** 알짬 어린이 도서관 관장 시절의 강영희 과장. 도서관에서 둘째 아이 책을 읽어주다 쫓겨난 경험이 있는 강 과장은 지역 아이들이 마음 껏 놀 수 있도록 도서관을 운영했다. 사진제공-대전일보
강영희 대전시 공동체 정책 과장(55)을 인터뷰 해야겠다 마음먹은 데는, 그가 대전 지역 마을 운동의 산증인 같은 인물이여서다. 강 씨가 마을 운동에 뛰어든 건 2005년. 어린이 도서관 알짬의 관장을 맡으면서다.
“제가 살고 있는 대전 석교동이란 지역이 옛 동네예요. 대부분 사시는 분들의 직업이 건설업인데, IMF 이후 건설업이 사양화됐잖아요. 그 바람에 동네가 슬림화됐어요. IMF 겪으면서 자살 사건이 나고 그럴 때, ‘우리는 이렇게 어렵게 사는데 왜 죽어야겠다는 생각은 안 할까?’ 엄마들이랑 차 마시면서 얘기 나눈 적이 있어요. 동네 엄마들이 모두 다 동네에서 재미있게 놀았던 추억이 있더라고요. 우리도 아이들을 같이 놀게 해 볼까. 그러던 게 나중에 도서관까지 하게 됐어요.”
** 알짤마을 어린이 도서관 전경
뭔가 홀린 듯 시작했던 활동
강 씨 말에 따르면 어린이 도서관을 시작할 때 신이 나서 뭔가에 홀린 듯했단다. 동네에 ‘임대 놓습니다.’ 내놓은 건물이 있으면, 다짜고짜 찾아가 “도서관 하려고 하는데 무료로 건물 임대 해줄 수 있어요?” 물었다고. 여러 번 퇴짜를 맞고, 만원만 후원해달라는 요청을 거절당하는 경험을 반복하면서, 비로소 활동이 뭔지 피부에 와닿았다.
“우리 애들 아플 때마다 다니던 동네 소아과 의사 선생님이 친절하셨어요. 당연히 해줄 거라 기대하고 후원 요청을 드렸는데, 단칼에 거절하시더라고요.”
마음의 근육이 붙지 않았던 때 겪은 일이라, “그 병원 못 쓰겠더라.” 불평을 쏟아 놓기도 했다. 하지만 정말 힘들었던 건 함께 했던 사람을 보내야 하는 일이었다.
“우리 애 때문에 왔는데 이렇게 할 수는 없다고 사람이 떠날 때. 그때가 가장 힘들었어요. 그 사람한테 들이는 정성이 굉장했기 때문에, 떠나는 걸 부드럽게 맞이하는 게 힘들었어요. 최근에서야 그게 가능해진 것 같아요. 그래 봐야 농도가 옅어진 거지만요.”
15년 활동을 통해 그가 절감한 건 마을이 뜻대로 안 된다는 거다.
“10년을 새벽 2-3시까지 일하며 푹 빠져 살았는데 마을이 나를 잊는데 3개월도 채 안 걸리더라고요.”
활동의 굽이굽이 마다 갈등과 화해의 시간이 있었지만, 정작 마을이 별로 안 바뀌었다고 느낄 때, 헛헛함이 몰려 왔다.
“어떤 사람이 10년 20년 일하면 마을이 변화할 것 같았는데, 생각 보다 마을의 변화가 정말 없는 거예요. 그런 것을 바라보는 게 힘들었어요. 반면에 주변 사람들은 굉장히 빠르게 변하더라고요. 그런 언버런스가 아주 힘들었어요.”
‘세상은 쉽게 변하지 않는구나.’ 그런 절망감 같은 게 심장 언저리에서 툭 튀어나올 때마다 헛발질하는 느낌 때문에 씁쓸함을 느껴야 했다. 그럼에도 그가 앞으로 나갈 수 있었던 건 민주주의를 경험한 사람은 후퇴하지는 않는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민주주의의 모든 걸 경험하진 않잖아요. 하지만 자기가 경험한 민주주의 선 안에서는 후퇴하지 않더라고요.”
경제문제가 해결 안 되면 활동을 권유할 수 없죠
5년의 세월을 쌓으면서 깨달은 건 공동체 운동이 지속되려면 경제 활동이 마을 공동체에 조성돼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고.
“우리 마을은 맞벌이가 아니면 살 수 없는 가정형편의 사람들이었거든요. 남편들의 비아냥과 핍박을 참고 마을 일을 하는 거잖아요. 경제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으면서 어떻게 활동을 하라고 할 수 있는가 싶었어요. ”
그가 2008년, 마을 일자리 사업을 지원하는 <풀뿌리 사람들>을 만든 데는 이렇게 각별한 애정을 쏟았던 마을 활동의 경험이 녹아있다. 하지만 공공의 일, 마을의 일을 만들려면 시스템이 있어야 했다.
“풀뿌리 사람들이 중간지원조직이잖아요. 그때만 해도 그런 단체 생리를 모르던 때였어요. 중간지원조직이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이 많았어요.”
중간지원조직의 정체성을 만드는 게 급선무였다. 공동체 유랑단을 꾸려 혁신공간을 견학했다. 대전형 혁신공간을 꿈꾸며 형식과 내용을 새로 담으려 노력했다.
“공동체 수다라는 것을 했는데, 카페에서 했어요. 한 명이 앉아서 토크쇼 하듯이 진행하고 사람들이 질문하는 형식이요. 그때만 해도 이런 게 대전지역에 없었거든요. 마을에 공공의 일자리를 만들려면 형식적인 파괴가 필요하다는 걸 알렸어요. ”
강 씨는 시민단체에 경영 마인드도 보급했다.
“시민단체도 경영 마인드가 필요하다. 그런 차원에서 주민이 아니라 고객이라고 부르자. 이런 게 저부터도 혼란스러웠고 시민단체로부터 욕도 많이 들었어요. 경영 마인드가 필요한다는 걸 강조하기 위해 한 일이었지만, 약간 터부시됐던 경영 영역을 공부하게 되면서 내부적 갈등도 많았어요. 시민사회 단체와 낯설음도 있었고요. 그렇지만 보람도 컸어요. 시민단체와 함께한다는 게 고스란히 힘이 됐어요. 보람과 어려움이 같이 있었지 따로 있었던 것은 아니었던 거 같아요.”
풀뿌리 사람들에서 중간지원단체의 정체성을 만들어 가던 강 씨는, 2015년 대전사회적 지원센터 센터장으로 임명을 받았다.
“사회적자본지원센터가 현장과 밀접해야 하잖아요. 법인(풀뿌리 사람들)에서 제가 마을 활동가 출신이니까 적합하다고 생각했어요. 내가 잘할 수 있을까 고민을 많이 했어요. 관은 정무적 성격이 있으니까. 제가 정무적 감각, 정치적 감각이 없었거든요. 굉장히 두려웠죠.”
보고해야 하는 주체가 있다는 것은 판단하고 원하는 대로 정책을 만들 수 없다는 걸 의미했다. 강 씨는 센터장이 된 이상 참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참았다. 2년을 그렇게 보냈다.
그런 강씨가 지난 해 또 한 번 일을 냈는데, 대전형 마을 공동체 사업을 총괄하는 대전시 공동체 정책과장에 임명된 것이다. 이로써 마을 공동체 조직 사업부터 중간조직단체활동, 마을 공동체 정책 제정에 이르기까지. 강 씨는 대전 지역의 마을 공동체 만들기 사업과 관련해 A부터 Z까지 경험한 몇 안 되는 활동가가 되었다.
관습적으로 해왔던 일을 역행해야 하는 일
그는 “대전광역시 공동체 정책과장의 자리는 지금까지 한 일 중 가장 힘든 자리”라고 말했다. 공동체 정책과장을 개방형 직위로 뽑는다더라. 너가 해야 한다. 권유를 받는 일부터가 무척 힘들었다고. 안 받아들이면 배신감 느낀다는 원망을 지역사회 활동가들로부터 들었을 거란다. 하지만 정말 안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만큼 공직에 대한 반감이 컸다. 그래도 받아들인 건, 50살 이후부터는 지역사회가 필요로 하는 일을 해야겠다는 소명의식 때문이었다.
하지만 공무원 사회에 팽배해 있는 위계적인 조직 문화 탓에 갑갑할 때가 많았다. 70, 80년 동안 이어졌던 관습인 터라 쇄신하는 게 어려웠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쫄아 살았다고. 나아졌지만 지금도 목구멍까지 감정이 찰랑댈 때가 있다.
“어떤 일을 실행해 가는 프로세스가 있는데, 제가 개방형으로 들어간 게 행정의 프로세스를 역으로 하라고 들어간 거잖아요. 더구나 지금까지 일을 안 해 온 사람들과 함께 해야 하는데, 직원들은 매 순간 그동안 해왔던 대로 일을 해요. 나는 계속해서 그걸 지적 할 수 없으니 전략적으로 어디까지를 말해야 하나 판단해야 하고요.”
강 씨는 일화를 들려주었다. 그가 공동체지원국 첫 회의를 주재했을 때 일이다. 전체 회의를 한다니까 사람들이 화들짝 놀라는 기색이 표정에 역력했단다. 공무원들은 업무를 개인이 책임진다. 같은 계끼리도 업무에 대해 서로 말하지 않는다. 그러다 자기에게 불똥이 튀어 책임을 뒤집어쓰게 되면 어쩌나 노심초사한다. 그런데 강 과장이 전체 회의를 소집했으니 개인이 하고 있는 업무에 대한 평가 회의로 생각해 당황했던 것이다. 공동체 사업은 과와 과. 계와 계 사이에 협업이 필수다. 그래야 일이 추진된다. 칸막이가 쳐진 문화에서 공동체 관련 사업과 정책을 만들고 추진하기가 어렵겠다 싶었다.
“생일 파티를 해보자고 했어요. 그렇게라도 모여야 뭐가 되지 않을까 싶더라고요. 그것조차도 싫어하더라고요.”
서로 간의 협업을 만들 수 없는 문화. 답답한 마음에 “그럼 다른 과에 다 주자.”하면 직원들 입에서 볼멘소리가 터져 나왔다.
“직원들의 공적은 남기면서 다른 부서와 협업을 만들어 가는 게 과제인데 복병이예요. 잘 안 보여요. 익숙해질만 하면 직원이 바뀌는 것도 힘들고요. 그러니 매일 매일 참는 것을 해야 해요. 내가 하고 싶은 게 10개라면 3개만 말하면서요.”
활동가는 수많은 산을 넘어가는 사람
강 씨는 시간이 약이라고 그래도 1년이 지난 지금, 서로 간의 소통의 여지가 조금 열린 것에 감사하다.
“가만히 보니까 저라는 사람 때문이라기보다 개방형 직위로 온 사람에 대한 부담감이더라고요.”
인내심을 가지고 직원들과 수시로 이야기를 나눈 게 도움이 됐다. “나는 행정을 하러 온 사람이 아니다. 행정은 너희들이 더 잘하니까 말해 달라” 는 태도를 일관되게 보였다고. 하지만 소통은 어디서나 힘든 법.
“생각했던 것보다 괜찮네. 그러다가도 어쩔 때 보면 사람이 쌀쌀맞은 것 같다고 그래요. ”
특히 상의 차 업무 이야기를 하면 일을 시킨다고 오해하는 게 어렵다고.
“공무원 사회가 상하 조직 문화가 강하잖아요. 내가 업무 이야기를 하면 직원들은 자기에게 일 시킨다고 생각해요. ‘아니다 일을 시키려는 게 아니라 상의하는 거다’ 말해도 납득을 잘 못해요. 서로 이해하는 데 오래 걸렸고, 지금도 프로세스 때문에 겪는 어려움이 있어요.”
강 과장은 가장 어려운 점으로 상의할 사람이 없다는 점을 꼽았다.
“밖에 있을 때는 군단이 있었잖아요. 고민이 있을 때 상의할 수가 있었어요. 지금은 우리 과에서 내가 제일 많이 안다는 거. 이게 정말 어려워요.”
후회하냐는 질문에 “나아졌다. 처음 들어왔을 땐 별생각이 다 들었다”고 말했다. 강 씨는 관으로 오면서 겸손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다.
“잘난것을 낮춰 말하고, 갖고 있는 것을 소박하게 말하는 걸 겸손이라고 이해했거든요. 모멸감을 버티는 게 겸손이더라고요.”
활동가의 정의에 대해서는 “가장 어려운 질문”이라고 운을 뗐다. 그는 활동가의 기준을 두 가지로 말했다. ‘주체적이냐’와 ‘무엇을 선택했느냐’ 는 것. “사회의 가치 기준을 만들어 가는 게 정치라고 생각한다는 그는, 그런 측면에서 활동은 운동성을 추구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활동가란 사회 기준의 가치를 약자에게 유리하도록 가져가는 사람이라고. 그런 삶을 스스로 선택한 사람이라고. “그런 의미에서 자신은 파견 나온 활동가” 라고 말했다.
마을의 정치 권력 바꾸는 게 대통령 바꾸는 거 보다 힘든 법이죠
강 씨에게는 딸아이가 두 명 있다. 그는 활동가로서 큰딸에게 배운 게 있다고 했다.
“2002년에 미선이 효순이 사건 일어났을 때요. 우리 애가 중학생이었어요. 대전역에서 중‧고등학생들이 촛불 시위를 할 때 전 문화 충격을 받았거든요. 그렇게 놀란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어떤 애가 ‘미군은 물러가라. 효순이, 미순이 살려내라’고 써있는 팻말을 들고 오더라고요. 자세히 보니까 우리 애인거예요.”
자신이 대학생일 때 들고 서 있던 팻말과 비슷한 문구의 피켓을 아들이 들고 서 있게 될 줄 상상도 못했다고. 그런 사실이 너무 슬퍼서 대전역에서 집에까지 눈물을 계속 흘리며 걸어왔다. 그때 구조만 바뀌어서는 안 되는구나. 삶이 바뀌어야 되는구나 깨달았다. 마을 활동을 하기 전이었는데, ‘마을의 정치 권력을 바꾸는 게 대통령 바꾸는 것 보다 힘든거 겠구나’ 뼈저리게 느꼈다고.
그로부터 15년. 무엇이 변했을까. 대전의 마을 활동 인구는 전체 대전시민의 0.1%. (147만) 열심히 하는 활동가를 꼽으면 140명도 안 된다. 그럼에도 대전시에 영향을 주고 있다.
“이제 마을 활동을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은 없어요. 주민들이 사는 마을에서 정책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하고요.”
강 씨는 “코로나가 우리에게 무엇이 중요한지 알게 해주었다”는 말을 꼭 전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요즘 공동체를 만나러 다녔는데요. 코로나 이후에 대형 사업을 못 하게 됐잖아요. 정말 1년차 공동체는 사업을 아무것도 안 했더라고요. 그런데 오히려 2-3년 차 지역 공동체들은 아이들을 데리고 방과 후 교실을 운영했어요. 학교가 안 봐줘서 돌봄이 안 되다 보니까. 다 알고 지내는 믿는 사람들이니까요. 서로 도왔던 거예요.”
그는 “특수한 사례일지 모르겠다”고 전제하면서 “코로나가 사람 간의 신뢰가 얼마나 안전한지 보여줬다.”고 지적했다. 사회적 신뢰를 갖고 있는 공동체가 어떻게 스스로를 돌봤는지 그런 돌봄이 얼마나 안전했는지 알려줬다고. “코로라 이후를 대비한다면 소규모의 신뢰 공동체를 어떻게 확대할 것인가 고민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타인의 고통에 말을 걸어주는 사람
15년 활동 선배로서 후배 활동가에게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일까? 한 마디로 미안하단다. 월급이든 재산이든 꺾어내는 것을 안 하면서, 50대 그의 친구들이 요즘 애들 운운하는 게 못 마땅하다고. 최근의 일화도 소개했다. 그가 정말 좋아하는 20대 에코페미니스트 후배가 로또를 사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고. 더 마음 아팠던 건 그가 덧붙인 말이었다.
“물방울(강 과장의 별칭), 우리는 집을 살 수 있는 확률이 0%예요. 그런데 로또를 사는 것은 그보다는 확률이 있잖아요.”
그 말이 가슴을 때렸다고.
“그래서 청년들에게 뭐라고 말할 수가 없어요. 우리 세대에게 말해야죠. 월급 꺾어내자 말해야 하는데...”
그의 말을 들으며 활동가란 ‘타인의 고통에 말을 걸어주는 사람’이구나 생각했다. 나도 모르게 자꾸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의 마음이 흘러 흘러 마을을 바꾸겠구나 싶었다. 따뜻한 기운이 몸 안을 스쳐 지나갔다. 그는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갈까. 임기가 끝나면 다시 마을로 돌아가고 싶다는 강영희 과장. 그가 만들어 갈 이야기가 벌써부터 기대 된다.
글 쓴 사람- 이은하
생애사 작가. 대전 여성운동의 대모 이정순 선생님을 비롯해 여러 활동가의 회고록을 썼다. <<페미니스트 비긴스,>> (오월의봄 출판사)가 곧 출판될 예정이다. 금산 별무리 고등학교 학생들과 이타적 자서전 쓰기 활동을 함께 하고 있다.
#이은하 #강영희 #활동가인터뷰공모 #대전 #공무원 #행정 #도서관 #풀뿌리 #정치 #지방자치
** 알짬 어린이 도서관 관장 시절의 강영희 과장. 도서관에서 둘째 아이 책을 읽어주다 쫓겨난 경험이 있는 강 과장은 지역 아이들이 마음 껏 놀 수 있도록 도서관을 운영했다. 사진제공-대전일보
강영희 대전시 공동체 정책 과장(55)을 인터뷰 해야겠다 마음먹은 데는, 그가 대전 지역 마을 운동의 산증인 같은 인물이여서다. 강 씨가 마을 운동에 뛰어든 건 2005년. 어린이 도서관 알짬의 관장을 맡으면서다.
“제가 살고 있는 대전 석교동이란 지역이 옛 동네예요. 대부분 사시는 분들의 직업이 건설업인데, IMF 이후 건설업이 사양화됐잖아요. 그 바람에 동네가 슬림화됐어요. IMF 겪으면서 자살 사건이 나고 그럴 때, ‘우리는 이렇게 어렵게 사는데 왜 죽어야겠다는 생각은 안 할까?’ 엄마들이랑 차 마시면서 얘기 나눈 적이 있어요. 동네 엄마들이 모두 다 동네에서 재미있게 놀았던 추억이 있더라고요. 우리도 아이들을 같이 놀게 해 볼까. 그러던 게 나중에 도서관까지 하게 됐어요.”
** 알짤마을 어린이 도서관 전경
뭔가 홀린 듯 시작했던 활동
강 씨 말에 따르면 어린이 도서관을 시작할 때 신이 나서 뭔가에 홀린 듯했단다. 동네에 ‘임대 놓습니다.’ 내놓은 건물이 있으면, 다짜고짜 찾아가 “도서관 하려고 하는데 무료로 건물 임대 해줄 수 있어요?” 물었다고. 여러 번 퇴짜를 맞고, 만원만 후원해달라는 요청을 거절당하는 경험을 반복하면서, 비로소 활동이 뭔지 피부에 와닿았다.
“우리 애들 아플 때마다 다니던 동네 소아과 의사 선생님이 친절하셨어요. 당연히 해줄 거라 기대하고 후원 요청을 드렸는데, 단칼에 거절하시더라고요.”
마음의 근육이 붙지 않았던 때 겪은 일이라, “그 병원 못 쓰겠더라.” 불평을 쏟아 놓기도 했다. 하지만 정말 힘들었던 건 함께 했던 사람을 보내야 하는 일이었다.
“우리 애 때문에 왔는데 이렇게 할 수는 없다고 사람이 떠날 때. 그때가 가장 힘들었어요. 그 사람한테 들이는 정성이 굉장했기 때문에, 떠나는 걸 부드럽게 맞이하는 게 힘들었어요. 최근에서야 그게 가능해진 것 같아요. 그래 봐야 농도가 옅어진 거지만요.”
15년 활동을 통해 그가 절감한 건 마을이 뜻대로 안 된다는 거다.
“10년을 새벽 2-3시까지 일하며 푹 빠져 살았는데 마을이 나를 잊는데 3개월도 채 안 걸리더라고요.”
활동의 굽이굽이 마다 갈등과 화해의 시간이 있었지만, 정작 마을이 별로 안 바뀌었다고 느낄 때, 헛헛함이 몰려 왔다.
“어떤 사람이 10년 20년 일하면 마을이 변화할 것 같았는데, 생각 보다 마을의 변화가 정말 없는 거예요. 그런 것을 바라보는 게 힘들었어요. 반면에 주변 사람들은 굉장히 빠르게 변하더라고요. 그런 언버런스가 아주 힘들었어요.”
‘세상은 쉽게 변하지 않는구나.’ 그런 절망감 같은 게 심장 언저리에서 툭 튀어나올 때마다 헛발질하는 느낌 때문에 씁쓸함을 느껴야 했다. 그럼에도 그가 앞으로 나갈 수 있었던 건 민주주의를 경험한 사람은 후퇴하지는 않는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민주주의의 모든 걸 경험하진 않잖아요. 하지만 자기가 경험한 민주주의 선 안에서는 후퇴하지 않더라고요.”
경제문제가 해결 안 되면 활동을 권유할 수 없죠
5년의 세월을 쌓으면서 깨달은 건 공동체 운동이 지속되려면 경제 활동이 마을 공동체에 조성돼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고.
“우리 마을은 맞벌이가 아니면 살 수 없는 가정형편의 사람들이었거든요. 남편들의 비아냥과 핍박을 참고 마을 일을 하는 거잖아요. 경제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으면서 어떻게 활동을 하라고 할 수 있는가 싶었어요. ”
그가 2008년, 마을 일자리 사업을 지원하는 <풀뿌리 사람들>을 만든 데는 이렇게 각별한 애정을 쏟았던 마을 활동의 경험이 녹아있다. 하지만 공공의 일, 마을의 일을 만들려면 시스템이 있어야 했다.
“풀뿌리 사람들이 중간지원조직이잖아요. 그때만 해도 그런 단체 생리를 모르던 때였어요. 중간지원조직이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이 많았어요.”
중간지원조직의 정체성을 만드는 게 급선무였다. 공동체 유랑단을 꾸려 혁신공간을 견학했다. 대전형 혁신공간을 꿈꾸며 형식과 내용을 새로 담으려 노력했다.
“공동체 수다라는 것을 했는데, 카페에서 했어요. 한 명이 앉아서 토크쇼 하듯이 진행하고 사람들이 질문하는 형식이요. 그때만 해도 이런 게 대전지역에 없었거든요. 마을에 공공의 일자리를 만들려면 형식적인 파괴가 필요하다는 걸 알렸어요. ”
강 씨는 시민단체에 경영 마인드도 보급했다.
“시민단체도 경영 마인드가 필요하다. 그런 차원에서 주민이 아니라 고객이라고 부르자. 이런 게 저부터도 혼란스러웠고 시민단체로부터 욕도 많이 들었어요. 경영 마인드가 필요한다는 걸 강조하기 위해 한 일이었지만, 약간 터부시됐던 경영 영역을 공부하게 되면서 내부적 갈등도 많았어요. 시민사회 단체와 낯설음도 있었고요. 그렇지만 보람도 컸어요. 시민단체와 함께한다는 게 고스란히 힘이 됐어요. 보람과 어려움이 같이 있었지 따로 있었던 것은 아니었던 거 같아요.”
풀뿌리 사람들에서 중간지원단체의 정체성을 만들어 가던 강 씨는, 2015년 대전사회적 지원센터 센터장으로 임명을 받았다.
“사회적자본지원센터가 현장과 밀접해야 하잖아요. 법인(풀뿌리 사람들)에서 제가 마을 활동가 출신이니까 적합하다고 생각했어요. 내가 잘할 수 있을까 고민을 많이 했어요. 관은 정무적 성격이 있으니까. 제가 정무적 감각, 정치적 감각이 없었거든요. 굉장히 두려웠죠.”
보고해야 하는 주체가 있다는 것은 판단하고 원하는 대로 정책을 만들 수 없다는 걸 의미했다. 강 씨는 센터장이 된 이상 참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참았다. 2년을 그렇게 보냈다.
그런 강씨가 지난 해 또 한 번 일을 냈는데, 대전형 마을 공동체 사업을 총괄하는 대전시 공동체 정책과장에 임명된 것이다. 이로써 마을 공동체 조직 사업부터 중간조직단체활동, 마을 공동체 정책 제정에 이르기까지. 강 씨는 대전 지역의 마을 공동체 만들기 사업과 관련해 A부터 Z까지 경험한 몇 안 되는 활동가가 되었다.
관습적으로 해왔던 일을 역행해야 하는 일
그는 “대전광역시 공동체 정책과장의 자리는 지금까지 한 일 중 가장 힘든 자리”라고 말했다. 공동체 정책과장을 개방형 직위로 뽑는다더라. 너가 해야 한다. 권유를 받는 일부터가 무척 힘들었다고. 안 받아들이면 배신감 느낀다는 원망을 지역사회 활동가들로부터 들었을 거란다. 하지만 정말 안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만큼 공직에 대한 반감이 컸다. 그래도 받아들인 건, 50살 이후부터는 지역사회가 필요로 하는 일을 해야겠다는 소명의식 때문이었다.
하지만 공무원 사회에 팽배해 있는 위계적인 조직 문화 탓에 갑갑할 때가 많았다. 70, 80년 동안 이어졌던 관습인 터라 쇄신하는 게 어려웠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쫄아 살았다고. 나아졌지만 지금도 목구멍까지 감정이 찰랑댈 때가 있다.
“어떤 일을 실행해 가는 프로세스가 있는데, 제가 개방형으로 들어간 게 행정의 프로세스를 역으로 하라고 들어간 거잖아요. 더구나 지금까지 일을 안 해 온 사람들과 함께 해야 하는데, 직원들은 매 순간 그동안 해왔던 대로 일을 해요. 나는 계속해서 그걸 지적 할 수 없으니 전략적으로 어디까지를 말해야 하나 판단해야 하고요.”
강 씨는 일화를 들려주었다. 그가 공동체지원국 첫 회의를 주재했을 때 일이다. 전체 회의를 한다니까 사람들이 화들짝 놀라는 기색이 표정에 역력했단다. 공무원들은 업무를 개인이 책임진다. 같은 계끼리도 업무에 대해 서로 말하지 않는다. 그러다 자기에게 불똥이 튀어 책임을 뒤집어쓰게 되면 어쩌나 노심초사한다. 그런데 강 과장이 전체 회의를 소집했으니 개인이 하고 있는 업무에 대한 평가 회의로 생각해 당황했던 것이다. 공동체 사업은 과와 과. 계와 계 사이에 협업이 필수다. 그래야 일이 추진된다. 칸막이가 쳐진 문화에서 공동체 관련 사업과 정책을 만들고 추진하기가 어렵겠다 싶었다.
“생일 파티를 해보자고 했어요. 그렇게라도 모여야 뭐가 되지 않을까 싶더라고요. 그것조차도 싫어하더라고요.”
서로 간의 협업을 만들 수 없는 문화. 답답한 마음에 “그럼 다른 과에 다 주자.”하면 직원들 입에서 볼멘소리가 터져 나왔다.
“직원들의 공적은 남기면서 다른 부서와 협업을 만들어 가는 게 과제인데 복병이예요. 잘 안 보여요. 익숙해질만 하면 직원이 바뀌는 것도 힘들고요. 그러니 매일 매일 참는 것을 해야 해요. 내가 하고 싶은 게 10개라면 3개만 말하면서요.”
활동가는 수많은 산을 넘어가는 사람
강 씨는 시간이 약이라고 그래도 1년이 지난 지금, 서로 간의 소통의 여지가 조금 열린 것에 감사하다.
“가만히 보니까 저라는 사람 때문이라기보다 개방형 직위로 온 사람에 대한 부담감이더라고요.”
인내심을 가지고 직원들과 수시로 이야기를 나눈 게 도움이 됐다. “나는 행정을 하러 온 사람이 아니다. 행정은 너희들이 더 잘하니까 말해 달라” 는 태도를 일관되게 보였다고. 하지만 소통은 어디서나 힘든 법.
“생각했던 것보다 괜찮네. 그러다가도 어쩔 때 보면 사람이 쌀쌀맞은 것 같다고 그래요. ”
특히 상의 차 업무 이야기를 하면 일을 시킨다고 오해하는 게 어렵다고.
“공무원 사회가 상하 조직 문화가 강하잖아요. 내가 업무 이야기를 하면 직원들은 자기에게 일 시킨다고 생각해요. ‘아니다 일을 시키려는 게 아니라 상의하는 거다’ 말해도 납득을 잘 못해요. 서로 이해하는 데 오래 걸렸고, 지금도 프로세스 때문에 겪는 어려움이 있어요.”
강 과장은 가장 어려운 점으로 상의할 사람이 없다는 점을 꼽았다.
“밖에 있을 때는 군단이 있었잖아요. 고민이 있을 때 상의할 수가 있었어요. 지금은 우리 과에서 내가 제일 많이 안다는 거. 이게 정말 어려워요.”
후회하냐는 질문에 “나아졌다. 처음 들어왔을 땐 별생각이 다 들었다”고 말했다. 강 씨는 관으로 오면서 겸손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다.
“잘난것을 낮춰 말하고, 갖고 있는 것을 소박하게 말하는 걸 겸손이라고 이해했거든요. 모멸감을 버티는 게 겸손이더라고요.”
활동가의 정의에 대해서는 “가장 어려운 질문”이라고 운을 뗐다. 그는 활동가의 기준을 두 가지로 말했다. ‘주체적이냐’와 ‘무엇을 선택했느냐’ 는 것. “사회의 가치 기준을 만들어 가는 게 정치라고 생각한다는 그는, 그런 측면에서 활동은 운동성을 추구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활동가란 사회 기준의 가치를 약자에게 유리하도록 가져가는 사람이라고. 그런 삶을 스스로 선택한 사람이라고. “그런 의미에서 자신은 파견 나온 활동가” 라고 말했다.
마을의 정치 권력 바꾸는 게 대통령 바꾸는 거 보다 힘든 법이죠
강 씨에게는 딸아이가 두 명 있다. 그는 활동가로서 큰딸에게 배운 게 있다고 했다.
“2002년에 미선이 효순이 사건 일어났을 때요. 우리 애가 중학생이었어요. 대전역에서 중‧고등학생들이 촛불 시위를 할 때 전 문화 충격을 받았거든요. 그렇게 놀란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어떤 애가 ‘미군은 물러가라. 효순이, 미순이 살려내라’고 써있는 팻말을 들고 오더라고요. 자세히 보니까 우리 애인거예요.”
자신이 대학생일 때 들고 서 있던 팻말과 비슷한 문구의 피켓을 아들이 들고 서 있게 될 줄 상상도 못했다고. 그런 사실이 너무 슬퍼서 대전역에서 집에까지 눈물을 계속 흘리며 걸어왔다. 그때 구조만 바뀌어서는 안 되는구나. 삶이 바뀌어야 되는구나 깨달았다. 마을 활동을 하기 전이었는데, ‘마을의 정치 권력을 바꾸는 게 대통령 바꾸는 것 보다 힘든거 겠구나’ 뼈저리게 느꼈다고.
그로부터 15년. 무엇이 변했을까. 대전의 마을 활동 인구는 전체 대전시민의 0.1%. (147만) 열심히 하는 활동가를 꼽으면 140명도 안 된다. 그럼에도 대전시에 영향을 주고 있다.
“이제 마을 활동을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은 없어요. 주민들이 사는 마을에서 정책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하고요.”
강 씨는 “코로나가 우리에게 무엇이 중요한지 알게 해주었다”는 말을 꼭 전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요즘 공동체를 만나러 다녔는데요. 코로나 이후에 대형 사업을 못 하게 됐잖아요. 정말 1년차 공동체는 사업을 아무것도 안 했더라고요. 그런데 오히려 2-3년 차 지역 공동체들은 아이들을 데리고 방과 후 교실을 운영했어요. 학교가 안 봐줘서 돌봄이 안 되다 보니까. 다 알고 지내는 믿는 사람들이니까요. 서로 도왔던 거예요.”
그는 “특수한 사례일지 모르겠다”고 전제하면서 “코로나가 사람 간의 신뢰가 얼마나 안전한지 보여줬다.”고 지적했다. 사회적 신뢰를 갖고 있는 공동체가 어떻게 스스로를 돌봤는지 그런 돌봄이 얼마나 안전했는지 알려줬다고. “코로라 이후를 대비한다면 소규모의 신뢰 공동체를 어떻게 확대할 것인가 고민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타인의 고통에 말을 걸어주는 사람
15년 활동 선배로서 후배 활동가에게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일까? 한 마디로 미안하단다. 월급이든 재산이든 꺾어내는 것을 안 하면서, 50대 그의 친구들이 요즘 애들 운운하는 게 못 마땅하다고. 최근의 일화도 소개했다. 그가 정말 좋아하는 20대 에코페미니스트 후배가 로또를 사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고. 더 마음 아팠던 건 그가 덧붙인 말이었다.
“물방울(강 과장의 별칭), 우리는 집을 살 수 있는 확률이 0%예요. 그런데 로또를 사는 것은 그보다는 확률이 있잖아요.”
그 말이 가슴을 때렸다고.
“그래서 청년들에게 뭐라고 말할 수가 없어요. 우리 세대에게 말해야죠. 월급 꺾어내자 말해야 하는데...”
그의 말을 들으며 활동가란 ‘타인의 고통에 말을 걸어주는 사람’이구나 생각했다. 나도 모르게 자꾸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의 마음이 흘러 흘러 마을을 바꾸겠구나 싶었다. 따뜻한 기운이 몸 안을 스쳐 지나갔다. 그는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갈까. 임기가 끝나면 다시 마을로 돌아가고 싶다는 강영희 과장. 그가 만들어 갈 이야기가 벌써부터 기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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