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공익활동가주간]새로운 늘 시도를 지지해주는 장애인지역공동체에서 18년 - 대구 질라라비장애인야학 조민제

변화를만드는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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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민제는 대구에서 ‘장애인권’을 주제로 활동을 펼친 활동가이다. 장애인권동아리활동이 싫어 도망 다니던 대학교 새내기가 장애인지역공동체에서 18년째 일하며 70여명의 학생을 둔 질라라비장애인야학에서 교장을 지내고 있다. 집회에서 랩을 하던 ‘힙함’ 그 자체였던 활동가가 정장을 입고 교장이 된 그의 스토리를 듣는다. 


Q. 자기소개부터 해주시죠.

사단법인 장애인지역공동체 사무처장 조민제입니다. 부설기관 질라라비장애인야학에서 교장의 역할도 맡고 있습니다. 2006년 7월, 23살에 시작한 인생의 첫 직장이에요. 아직까지 한 번도 이직하지 않고 18년째 이일만 하고 있습니다.


Q. 장애인 인권 운동은 어떻게 시작하게 되셨나요?

저는 2003년에 대구대학교 특수교육과에 입학을 했는데 당시에는 특수교사가 상대적으로 임용 되기가 수월해서 ‘그냥 빨리 임용 공부해서 합격하여 안정적으로 살자’라는 단순한 욕망 때문에 진학을 했어요. 

그런데 문제는 제가 달성군 서재리에 살아서 경산시에 있는 학교까지 통학하려면 왕복으로 4시간 정도가 걸렸어요. 집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망도 있어서 기숙사를 알아보다가 장애인 룸메이트 제도를 알게 되었죠. 기숙사에 당첨될 확률이 높아진대요. 장애인분들을 좀 만나봐야 내가 더 나중에 나은 교사가 되겠지 이 정도의 생각으로 신청을 한 거죠. 그렇게 처음으로 장애인 룸메이트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Q. 어떻게 이야기가 진행될지 흥미진진한데요.

그 이후에 신고식 같은 행사에 불려가서 술도 먹고 놀면서 중증 장애인들을 처음 만났어요. 술도 엄청 잘 먹고 담배도 엄청 많이 피고. 그런 일상에서 장애인에 대한, 그러니까 제가 가지고 있던 굉장히 시혜적이고 동정적인 시선들이 그때 다 깨진거에요. 

그러다 선배가 장애인권동아리를 하고 있는데 한번 오라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하필 동아리 총회 현장이었어요. 저는 동아리도 술 먹고 그저 노는 곳인줄 알았는데, 엄청 심각한거예요. 사실은 학교에서 장애 학생 장학금을 축소하려고 하는 것에 대응을 어떻게 할지 4시간 동안 토론하는데, 내 문제도 아니고 지겨운 이야기를 계속 하고 있으니 재미없다고 느꼈었어요. 그런데 또 ‘장애인권동아리’ 라고 하니 좀 멋있어 보이잖아요. 그냥 멋있으니까, 하나씩 한번 해보자 이렇게 시작했어요. 

특수교육과 학생들은 자연스럽게 장애인 운동에 참여하는 문화가 있었어요. 그렇게 첫 입문을 하게 되었죠. 그런데 한 학기 정도 하다가 힘들어서 도망갔어요.(웃음)


Q. 어떤 점이 힘들었나요?

당시에는 활동보조인 제도가 따로 없었기 때문에 룸메이트가 장애인 학생들의 생활을 다 책임져야 했습니다. 기숙사에 계속 잔류할 수 있다는 이점을 제외하고는 흔히 무상 노동을 계속 하는 거죠. 예를 들면 동아리에서 선배들이 ‘노래방 가자!’ 라고 해서 신나서 갔더니, 노래방은 다 계단이 있는 지하잖아요. 다 업어서 내려가야 하고, 야식 시켜주면 맛있게 먹을 생각만 했는데 선배들을 다 먹여줘야 했어요. 빨리 도망가야지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대단한 사명감으로 시작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선배들을 피해 다니다가, 어느 순간 뒤통수가 계속 당겨서 그래도 내가 특수교사를 하겠다고 다짐했고, 장애인분들 관련한 문제에 대해 조금 더 깊게 알고 열심히 하지 않으면 나중에 교사가 돼서도 별로 멋있지 않겠다, 라는 생각들이 있었어요.


Q. 결국 동아리는 다시 시작하게 되신 거군요. 본격적인 장애 인권 운동을 하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그 당시는 장애인교육지원법(지금의 「장애인등에 대한 특수교육법」) 제정과 관련한 활동을 많이 했었어요. 입법 활동도 하고 서울로 집회를 하러 가기도 하고요. 그러다 장애인 선배들이 학교를 졸업하고 자립하여 대구장애인차별철폐연대를 만들기 위한 움직임이 있었죠. 그런데 함께 하며 장애인 선배들의 활동보조도 해주던 분이 다른 활동을 선택하게 되고, 제가 그 자리를 채우러 가게 되었어요. 그렇게 갔는데, 선배들이 며칠 못 씻고 냄새도 나고 냉장고 안 음식들도 다 상해있는걸 보면서 내가 우러러 보던 당당하고 멋있었던 선배들이 지역사회에 나와서 이렇게 활동하려고 하는데 굉장히 초라한 모습으로 되어 있는 거예요. 당시 장애 학생이 대학교를 졸업한다는 건 흔히 말하는 엘리트였거든요. 엘리트의 삶도 이러는데 다른 장애인분들은 어떻게 살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Q. 그런 과정 속에서 장애인 활동보조 서비스 제도화 투쟁도 시작되었겠네요. 

2006년 서울 등에서 활동 보조 서비스를 만들어 달라는 요구를 장애인분들이 농성하며 처음으로 약속받아요. 장애인권동아리 선배였던 대구사람장애인자립생활센터 노금호 대표가 대구에서도 몇몇 단체를 모으고 있었어요. 그리고 특수교육과 학생회는 활동이 왕성했던 때라 장애인단체와 학생들이 모여 5월 18일 시청 앞에서 농성을 시작했어요. 그때 농성이 그렇게 길어질지도 몰랐어요.그냥 시청 앞에 거적때기 이불 깔고 누워서 자면서 농성을 시작했는데 43일이나 이어졌어요. 지역사회에 있는 성인 장애인분들과 오랫동안 교류한 적도 없었는데 대화도 많이 하고  서로 동료애도 생기는 이런 과정들이 너무 재미있었어요. 

아직 젊으니까 20대까지는 활동을 해도 되겠다, 라는 생각을 했는데 그 당시 중증장애인분들만 남아있었던 장애인지역공동체에서 조직 운영을 위해 같이 일하자는 제안을 해주셨어요. 


Q. 장애인지역공동체 18년 근속의 시작점이었네요. 

그때는 무식했고 용감했어요. 군대도 임용도 미루고 단체 운영을 돕겠다며 출근을 시작했어요. 기숙사 생활은 정리하고 장애인 선배들과 함께 살게 되었어요. 사무실 출근하고 돌아오면 집에서 활동보조를 하면서 대구의 장애 운동을 어떻게 만들어 갈지 계속 논의하면서 살았어요. 그게 시작이었습니다. 



Q. 지금 교장을 맡고 있는 장애인지역공동체 부설기관인 질라라비장애인야학에 대해 소개를 부탁드려요.

장애인지역공동체는 2000년 3월에 설립되었어요. 당시 대구는 보수적인 지역사회라 장애인 인권을 중심을 두고 활동하는 단체가 거의 없었고, 지역의 인권단체를 만들자라는 논의 속에서 장애인지역공동체가 만들어졌고, 같은 시기에 성인장애인들의 교육을 위한 부설 질라라비장애인야학이 개교하였습니다. 현재는 전국 최초로 2018년에 성인 장애인을 위한 학력 인정 기관으로 등록되었습니다. 중학교까지 학력을 취득할 수 있구요. 지금은 70명 정도 야학을 다니고 계시고, 전국 최초로 또 올해 8월에 중학교를 졸업해요. 지금은 고등학교 과정을 만들어 달라고 열심히 싸우고 있죠. 

그리고 박명애 대표님이 2006년에 야학을 졸업하시고 장애인지역공동체의 대표가 되셨어요. 그전에는 비장애인이나 경증 장애인분들이 대표를 하셨는데 진짜 당사자가 운영하는 조직이 된 거죠. 


Q. 질라라비장애인야학을 통해 활동가 배출도 된 거네요. 그런데 팀장, 처장이라는 타이틀보다 ‘교장’이 주는 무게감이 다를 것 같은데요. 

처장도 무겁고요. 교장은 2021년에 되었는데, 사무처장은 23년도에 되어서 지금 교장 3년째, 사무처장 1년 된 건데 사실 교장은 전혀 생각 하지 못했었어요. 그래도 예전 야학 교사를 계속 했었기 때문에 교사로 일 해본 경험이나  학교 운영을 함께 참여해서 잘 알고는 있었지만 교장 제안이 왔었을 때 고민이 되긴 했었어요. 선출로 교장이 되었는데 사실 3년 동안 하면서도 잘 적응이 안돼요. 왜냐면 예전 사무국장만 할 때는 맨날 담배 피면서 인상 팍 쓰고 머리 쥐어뜯고 있었는데 이제 교장이 되니 지나다니면서 항상 웃고 있어요. 졸업식, 입학식 때도 흔히 말하는 행사의 축사도 해야 하고요. 졸업장을 직접 드려야 하니까 활동하면서 입을 일이 없던 정장을 많이 입게 되었어요. 왜냐하면 학생 분들에게 예를 갖추고 싶더라고요. 40대부터 60대까지 다양하게 계신데 사실 30~40년을 학교 교육이 허락되지 않아서 사회 바깥으로 밀려난 사람들이잖아요. 이분들이 초등학교 졸업장을 딴다, 중학교 졸업장을 딴다는 것은 인생에 엄청 큰일이거든요. 기뻐서 우시는 분들도 많이 계시고요. 그래서 격식을 따지는 걸 좋아하진 않지만 이분들에겐 최대한 격식을 차려서 뭔가 해드리고 싶더라고요. 



Q. 확실히 다른 책임감과 역할이 있겠네요. 힘든 점은 없나요?

잔소리를 못하는 게 마음의 병이 되죠.(웃음) 저는 굉장히 실무형이기 때문에, 서류 틀리면 고치고 회의록도 다 작성하는 사람이라서 교장이 되고 나니 정도를 지켜야 한다는 압박감이 굉장히 커요. 예전 같으면 성질냈을 것들도 부드럽게 돌려서 이야기해야 하고. 

많이 배우기도 했어요. 화만 내서는 일이 돌아가질 않는구나, 라는 것도 알게 되었고 교장이라는 건 한 집단을 대표하는 사람이니 리더로서 뭔가를 냉철하게 이야기하거나 너무 냉소적으로 말하게 되면 사람들이 겪는 파장이 되게 크더라고요. 2021년 전과 그 이후의 저는 많이 달라진 것 같아요. 


Q. 활동을 하면서 지칠 때 나의 원동력이 되는 것은 무엇인가요?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박경석 대표님이 ‘일쉼동체’라는 말을 하셨던 적이 있어요. 일과 심은 하나다, 라는 뜻이었는데 그 이야기를 듣고 저도 힐난했던 때가 있었는데요. 요즘 워라벨에 관련된 고민을 하다 보니, 기계적으로 일과 쉼을 분리하는게 더 괴로운 것 같더라고요. 

결과적으로는 쉼이 필요한 게 분명하고 충전도 필요한데, 내가 하는 일이 쉴 때를 명확하게 구분하는 게 쉽지 않으니까요. 그럴 수 없는 위치이기도 하고, 탈시설 장애인분들이 자립주택에서 많이 살고 계시는데 야간이나 주말에도 다양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거든요. 그래서 항상 긴장 상태로 대기할 때도 있어서 이런 일상에서 기계적으로 분리하려고 하면 더 소진이 더 빨랐어요. 그래서 그냥 너무 연연하지 말자라는 생각을 했고 과거에는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죠.

결과적으로 내가 하는 일에 재미를 느끼는 것이 10%라도 있으면 하자는 마음인데, 아직은 10% 밑으로 떨어진 적이 없어서 그냥 계속 하고 있는 것 같아요.그리고 장애인지역공동체가 성장하는 과정과 다양화되는 과정들에 역사를 함께한 사람이다 보니까 책임감 때문이기도 하고요. 


Q. 받아들이고 나니, 더 마음이 편안해지셨군요. 일에서 재미는 10%만 있어도 된다고 하셨는데, 그 10%는 어디에서 찾으시나요?

제가 10년차 정도의 경력이 쌓였을 때 서울의 중앙 조직 제안이 있기도 했고 흔들릴 때도 있었는데 그냥 제가 지금 이 조직에 애정이 많은 것 같아요. 그래서 계속 남아 일하겠다는 결정도 빨리 할 수 있었고요. 예전에 방영했던 예능 프로그램 무한도전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콘셉트를 얼마든지 바꿀 수도 있고 해보고 싶은 건 다 할 수 있게 신뢰를 주는 조직이거든요. 그리고 가장 중요한 좋은 대표, 좋은 어른들을 만난 것 같아요. 

예를 들어서 발달장애인 자기권리 옹호 운동을 ‘피플퍼스트(People First)’ 운동이라고 부르는데요. 대구가 적극적으로 국내에 보급하고 해외 연수도 갔었어요. 그냥 활동가가 이거 해보고 싶어요! 라고 계획서 만들어서 제안하면 반려되는 경우도 많잖아요. 장애인지역공동체는 ‘그래, 할 수 있으면 해봐.’ 라고 계속해서 새로운 시도를 해 볼 수 있는 계기를 많이 지원해줬어요. 


Q. 동료들의 믿음과 지원이 동력이었네요.

지금은 많은 사람들의 제안들을 제가 검토하고 오히려 반려하기도 해요. 이런 상황이 되어 보니 위치에 따라서 보는 시선이 달라지더라고요. 함께 일했던 분들을 떠올리며 참 좋은 어른이었구나, 라는 생각을 해요. 


Q. 최근 고민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조직을 책임져야 되는 위치에 와서 고민이 생기긴 했어요. 특히 건강에 관심을 많이 가지고요. 2026년이 되면 20년차가 되는데 갭이어 같은 시간을 한번 가져보고 싶다는 생각은 있어요. 장애인지역공동체에 계속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활동은 계속 할 거니까 한번 정돈하는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요. 

그리고 지금 장애인지역공동체에서 부서장님들은 50대 후반인 분들도 있어요. 흔히 말해서 10년 안에, 또는 10년이 지나면 은퇴를 하실 분들이 계신데요. 젊은 활동가 층들이 그 자리를 맡을 수 있도록 어떤 경험을 제공할지 고민이 많아요. 20~30대 활동가들의 시야가 더 넓어질 수 있게 경험을 제공하는 게 앞으로 10년 동안 제가 할 일이지 않을까 합니다. 


Q. 인터뷰를 읽는 분들에게 전해줄 이야기가 있다면요? 

예전의 장애인 운동은 굉장히 선명했어요. 이동권 문제면 저상버스를 만들어 달라, 엘리베이터를 지어달라 라는 주장을 했었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탈시설과 같은 다양한 이해 집단들간의 부딪히는 문제가 더 많아졌어요. 사회문제를 더 복잡하고 다양하게 보게 되는 것 같습니다. 

저희가 장애인분들에게 제공하고 있는 자립주택이 현재 20채거든요. 자립주택에서 40명의 장애인분들이 지역사회에서 함께 살고 계시고요. 이어서 장애인지역공동체에서 최근 최중증 발달장애인 통합 돌봄 사업을 시작했어요. 평일에는 저희와 함께 24시간 주택에서 살고 주말에는 원가정으로 돌아가는 형태의 사업인데요. 장애가 심하든 심하지 않던 따로 분리되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닌 시대라고 저는 생각해요. 이러한 새로운 출발도 많은 분들이 관심 가져주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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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길민준
좋은 변화를 만드는 사람을 만나고 그들을 조명하는 활동을 합니다. 좋은 사람들이 좋은 사회를 만든다고 믿는 인터뷰어 길민준입니다.

2024공익활동가주간을 맞아 다양한 지역과 분야에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변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는 활동가들을 만나 이들의 일과 삶에 대한 이야기를 기록하는 활동가인터뷰 공모 프로젝트를 진행했습니다. 인터뷰 공모에는 여러 지역의 활동가들이 참여해주셨습니다. 이 프로젝트는 <공익활동가사회적협동조합 동행>, <한국시민사회지원조직네트워크>, <지리산이음>이 공동주최하고, <아름다운재단>이 지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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