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활동가인터뷰] 주민들의 보호자로 병원에 갈 때가 제일 좋아요. - 동자동사랑방 박승민

“동자동사랑방 재정이 넉넉치 않아서 반상근으로 활동을 시작했어요. 오전 10시부터 오후 3시까지. 점심시간 빼면 4시간 근무죠. 그렇지만 아시다시피, 점심시간? 없죠. 퇴근시간? 못 지키지죠.(웃음)”


많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서울역, 드나드는 사람들을 위한 화려함인지 상권을 위한 화려함인지 역 주변은 늘 번화하다. 그 화려함 속 한 켠, 용산구 동자동에는 도시빈민이 살고 있다. 그곳은  서울에서 손 꼽히는 쪽방촌 밀집지역이다. 

‘동자동사랑방’(이하 사랑방)은 농부 출신 엄병천이 2008년에 만들었다. 그는 가난한 농부였고, 농산물이 제 값을 받지 못하는 게 억울해서 서울로 상경했다. 농민운동을 했어야 했던 그는 농민운동을 뒤로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만났다.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가난은 개인의 잘못이 아니라는 걸 말하고 싶었다. 당시에 나는 우여곡절 끝에 석사과정을 마치고 직업을 찾던 중이었다. 사회복지를 전공했으나 경력이 부족하니 오라는 곳이 없었다. 취업문턱은 하루가 다르게 높아졌다. 엄병천은 귀신같이 알고 나를 불렀다. 2009년부터 2011년까지 사랑방에서 일했다. 

가난한 동네에서 가난한 주민들을 만나며 가난한 단체를 꾸려 간다는 것은 실로 모험이었다. 그당시 내가 가진건 왕성한 호기심과 쓸모 없는 학위 쪼가리가 전부였다. 모험은 굶는 것부터 시작했다. 거짓말 안 보태고 우린 늘 배가 고팠다. 물리적인 허기는 견딜수 있었지만 무관심에서 오는 허기는 가슴을 후벼팠다. 서울역의 웅장하고 화려한 건물을 뒤로 하고 쓰러질듯 남은 건물에 둥지를 틀고 사는 사람들, 아무도 그들에게 관심을 갖지 않았다. 

없는 사람들 마음은 없는 사람이 잘 안다고, 엄병천은 주민들에게 신과 같은 존재였다. 무슨 일이 생기면 생기는대로 안 생기면 안 생기는대로 술 병을 들고 사랑방을, 엄병천을 찾았다. 덕분에 유리로 만든 사랑방 대문은 하루가 멀다하고 깨졌다. 없는 살림에 깨진 유리를 갈아 끼우느라 가세는 더욱 기울었다. 11년 전엔 그랬다. 더이상 깨진 유리를 막을 재간이 없는지 지금은 두꺼운 아크릴로 바꿨다는 후문이다. 주민들이 신처럼 생각했던 사랑방의 1대 대표 엄병천은 태평농법으로 거덜난 농업을 일으키러 고향으로 내려갔다. 

역 주변을 드나드는 사람처럼 동자동에도 드나드는 사람들이 많다. 드는 사람은 역 근처에서 노숙을 하다 오신분이고, 나는 사람은 돌아가시는  분이다.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터질지 모르는 곳, 동자동


여전히 그곳엔 가난의 그림자가 걷히지 않고 있다. 오늘도 발을 동동 구르며 일하는 박승민 활동가가 그곳에 있다. 하루 일을 겨우 마치고 헐레벌떡 뛰어오는 박승민을 6월 12일 금요일 오후 5시 사랑방 인근의 카페에서 만났다.  



** 인터뷰 하고 있는 박승민 활동가


“사실, 오늘은 <사랑방마을주민협동회>(마을 은행)이사회가 있는 날이에요. 원래는 월요일이었는데 갑자기 바뀌어서 오늘 하게 됐어요. 인터뷰와 겹쳐서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결국 회의에 못 간다고 했어요. 동자동사랑방 상황은 누구도 예측하지 못해요. 반상근으로 채용한다고해서 왔는데 알고 보니 제때 퇴근할 수 없는 것 부터(웃음).

저는 전교조 세대라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라는 노래를 들으며 자랐어요. 대학을 가고 싶다는 생각은 안 했어요. 공부에 취미도 없었고요. 어렸을때는 주위 사람들하고 노는게 즐거웠고, 결혼하고 아이들 키울 때는 육아 밖에 몰랐어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직장 생활 하다가 <참교육시민모임>이라는 단체에서 일했어요. 지금은 ‘사랑방’과 ‘집’ 두 개 밖에 몰라요(웃음). '지금'에 충실하며 열심히 사는 게 제 삶의 기준이에요. 

사랑방에 오기 전까지만해도 가난한 삶은 뉴스에서 본게 다였어요. 여기와서 처절한 실체를 마주하게 됐어요. 그리고 배우고 있어요. 어떻게 하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면서. 제가 오자마자 같이 일 하던 활동가가 인수인계도 안 하고 이주일 만에 그만뒀어요. 이유는 자세히 모르지만, 주민대표와 갈등이 있었나봐요. 할 수 없이 제가 모든 일을 떠맡게 된거죠. 앞이 캄캄했어요. 제가 그만두면 사랑방은 버려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일해야겠다고 마음 먹었을 때는 일이 이렇게 힘들 거라 생각하지 못했어요.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좋은일을 하는 곳 정도로만 생각했어요. 막상 해보니까 아니었어요. 저도 시민단체 일을 해봤지만, 이 곳은 보통의 시민단체와는 다른 곳이에요. 사랑방에서 활동해 보셨으니까 잘 아실 거예요. 눈코 뜰새가 없어요.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고, 활동가는 없고, 나이 들고 아픈 주민들은 많고.” 


나는 동자동사랑방에서 일하면서부터 인생이 꼬였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지금은 돈 걱정은 덜 하지만 당시에는 거의 앵벌이 수준으로 일했다. 2년동안 뼈를 갈아 넣으며 일했지만 쫓겨나듯 떠날 수 밖에 없었다. 내가 나온 후에도 여러명의 활동가가 들고 났다. 무슨 생각으로 사랑방에서 일한다고 했는지 모르겠다. 웬만한 꼴통이 아니고서는 선택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생각해보니 고생하는 게 싫어서 나간 것 같지는 않다. 주민들과 어떻게 호흡하고 맞춰야 하는지 몰라서 떠났을 거라고 추측할 뿐이다. 뼈를 갈아넣었는데 돌아오는 게 ‘욕’, 아니면 ‘악담’이니 어느 누가 버틸 수 있을까. 그럼에도 가난한 주민들은 ‘정’이 넘쳤다. 조금만 뭔가를 도와드리면 그것의 배가 넘는 고마움을 표했다. 평생 마실 술의 2/3를 그 때 마셨다. 그 덕에 힘든 걸 잊고 일했다.


“(몸이 아픈 주민분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아픈 분들을 모시고 병원에 갈 때, 그 때가 제일 좋아요. 가족도 없고 돌봐주는 사람도 없는데 몸까지 아프면 얼마나 서럽겠어요. 병원에 가면 많은 환자를 상대하는 의료진이 세심하게 봐주지 않아요. 거기다 늙고, 가난한 사람이 오면 눈길을 잘 안 주죠. 의례적인 말만 할 뿐. 그런데 제가 같이 가면 한마디라도 더 해줘요. 한 번 더 쳐다 보기도 하고. 왠줄 알아요? 늙고 남루한 행색이어도 보호자가 있으니까 함부로 못하는 거예요. 같이 간 주민분도 든든해 하시고. 우리한테는 아무것도 아닌, 핸드폰 사용법을 몰라서 물으시는 분들도 많아요. 사용법을 알려드리면 얼마나 고마워 하시는지 몰라요. 저는 여기서 일하면서 마음이 힘든 적은 없어요. 나이를 먹다보니 체력이 달리고 몸이 힘들어서 그렇지.”  

       

** 주민에게 핸드폰 사용법을 알려주고 있는 박승민 (사진; 박승민)


옷을 어떻게 입느냐에 따라 밥을 얻어 먹을 수 있느냐, 없느냐가 정해진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썩 동의하지는 않지만, 겉모습을 보고 사람을 평가하는 습관은 여전하다. 의지할 곳 없고, 몸은 아프고, 혼자서는 가기 힘든 병원에 누군가와 함께 간다는 것은 든든한 ‘빽’이다. 박승민은 덩달아 흥이 난다. 몸은 힘들어도 일하는 재미가 있는 곳, 그곳이 ‘동자동사랑방’이다. 


주민들의 ‘욕받이’가 되어도 매일 보람돼요


“굳이 힘들때를 말하라고 하면, 제가 주민들의 ‘욕받이’가 될 때에요. 이유도 모르는 폭언을 들어야 할 때가 있어요. 고소를 하거나 같이 싸우기도 어려워요. 누군가 화풀이 대상이 필요할 때 그게 사랑방이 되기도 하고 제가 되기도 하는거죠. 그 일을 마음에 담아두면 저도 병이 생기겠죠. 그래서 받는 즉시, 날려버려요. 어디다 날리는지는 비밀이고요(웃음). 작년에 제가 좋아하는 주민 한 분이 오랫동안 병원에 입원했었어요. 그 때 정말 마음이 힘들었어요. 주민운동 교육을 받고 수료하는 날이었는데  많은 주민분들이 축하해 주러 오셨어요. 그분도 오셨구요. 그런데 다음날 건강이 악화되셔서 바로 입원하셨어요. 죄송했어요. 저는 사랑방에서 일하면서 매일매일 보람을 느껴요. 어디가서 이런 경험을 해보겠어요. 학교에서도 배울 수 없는 걸 여기서 다 배우고 있죠(웃음).”


주민들의 욕받이가 되어도 매일 보람된다는 박승민의 얼굴에는 행복한 웃음이 가득했다. 사랑방에는 점심 한끼를 천원 주고 먹는 밥상공동체 ‘식도락’이 있다. 코로나 때문에 2월 말에서 3월 말까지 한 달 동안 문을 닫았다. 그 때 마음이 많이 아팠다고 한다. 지역의 복지시설도 하나 둘 문을 닫자, 거동이 불편한 분들은 끼니를 해결하기 힘들었다. 승민씨와 주민들은 식도락에서 도시락을 만들어 주민들께 나눠 주는 것으로 지혜를 모았다.  


“코로나 때문에 식도락 안에서 식사를 못하니까 어떻게하면 식사를 거르시는 분들이 식사를 할 수 있게 할까 고민하고 있었어요. 그때, 주민들이 도시락을 만들어서 나누자는 의견을 주셨어요. 의견만 가지고는 일이 되지 않죠. 실행에 옮기려면 여러가지 자원이 필요하잖아요. 사람이 있어야 하고, 만들어야 하고, 나눠줘야하고. 

식도락을 처음 시작 할 때는 혼자 일 하느라 힘들었어요. ‘내가 여기 밥 해주러 왔나?’ 하는 생각도 들었고. 혼자 낑낑거리며 일하는 걸 주민들이 보신거예요. “여기 사람들 먹여 살리느라 고생 많다”면서 정기적으로 도와주시겠다는 분들이 생겼어요. 도와주기로 한 분들이 갑자기 안 오실때도 있어요. 그럴때는 힘이 빠졌는데 시간이 지나니까 책임감을 가지고 오세요. 점심 준비하는 것도 주민들과 함께 장보고 음식을 만드니까 가능하지 저 혼자면 못하죠. 평소에는 40-50명쯤 오셔서 식사를 하시는데 지금은 코로나 때문에 함께 식사를 못하니까 80인분의 도시락을 만들고 있어요. 엊그제는 돼지고기 덮밥을 만들었고, 그저께는 열무비빔밥을 만들었어요. 

동자동사랑방의 사업중에서 식도락의 비중이 커요. 처음에는 점심식사 비용으로 500원을 받았는데 운영난 때문에 주민들께 양해 구하고 천원으로 올렸어요. 제가 온 후 첫 달 식도락 수익이 27만원 이었어요. 그걸로는 택도 없죠. 사랑방 예산을 보면 아시겠지만 식자재 값만 해도 80만원 가량 들거든요. 정부 지원을 전혀 받지 않고 순수 후원회비로만 운영하니까 늘 어려워요. 다행이 올해 부터는 ‘바보의 나눔’에서 식도락 사업비를 지원 받게 되었어요.”


가난한 사람들에게 한 끼 식사는 보통 사람의 한 끼 식사와는 다르다. 한끼를 먹느냐, 그렇지 않느냐로 하루를 버티느냐, 못 버티는가가 정해지기 때문이다. 하루를 버텨야 한 달을 버티고, 한 달을 버텨야 1년을 버틸 수 있다. 하루하루가 모여서 인생이 만들어진다. 그렇게 만들어진 역사는 어느 누구의 것이라도 허튼것이 아니니까.


** 주민과 함께 식도락에서 돼지고기 덮밥 도시락을 만들고 있는 박승민 (사진; 박승민)


자나깨나 주민생각 뿐


“아까 제가 주민과 병원가는 일을 제일 좋아한다고 했는데, 그 다음으로 좋아하는 일은 주민들 만나러 돌아다니는 일이에요. 요즘은 홈리스추모제 주거팀에서 함께 만드는 쪽방신문을 들고 주민들을 찾아가요. 이런저런 얘기 나누고, 무슨 일이 생겼는지 듣고, 어디가 아프시고, 어떤 도움이 필요한지 알 수 있잖아요. 쪽방에 계신 주민들은 찾아다니지 않으면 안 나오세요. 방에만 계시는 분들을 만나러 가고 싶은데 혼자서 여러가지 일을 해야하니까  주민들을 많이 못 만나는게 항상 아쉬워요.

혼자 일하니까 외롭지 않냐고 하셨는데, 외로울 시간이 없어요. 활동의 고민을 나눌만한 사람이 없으니까 답답하긴 하죠. 주민활동가가 있어도 서로의 역할이 다르고 다들 아프신 분들이라 기동력이 떨어지죠. 속 모르는 사람들은 ‘가끔 멍때리는 시간이 있을것 아니냐’고 해요. 그런 시간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좋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없어요. 솔직히 멍때리는 시간이 있으면 그 시간에 주민들 만나러 다니겠어요(웃음).”


이 정도면 거의 중독 수준이다. 나도 그랬다. 매일 파김치가 되어 퇴근하고 집에 가면 곯아떨어지기 일쑤지만 빨리 아침이 되어 출근하고 싶었다. 누군가 나를 기다릴것만 같았고, 내가 없으면 안 될 것 같은 착각에 빠져 살았다. 그 원동력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것일까?   

가난한 사람들의 자조모임과 비슷한 동자동사랑방이지만, 조직의 체계를 갖추었다. 모든 활동의 중심에는 주민이 있다. 따라서 대표도 동자동의 주민이 맡았다. 박승민은 주민을 돕고 대표를 돕는 일을 할 뿐이라고 했다. 동자동사랑방 옆에는 <사랑방마을주민협동회>라는 마을 은행이 있다. 사랑방과 주민협동회는 같은 사무실을 쓴다. 사무실을 같이 써서가 아니라, 두 조직은 쌍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곳의 이사장님인 유영기님이 지난 3월에 돌아가셨다. 너무 갑작스러운 죽음이라서 마을 주민과 활동가 모두 충격을 받았다. 박승민도 예외는 아니다. 


“너무 갑자기 돌아가셔서 실감이 안 났어요. 폐암으로 병원에 입원하시고 얼마 안 되서 돌아가셨거든요. 하필 코로나가 터져서 면회도 못 가고, 돌아가시는 것도 못 봐서 마음이 많이 아팠어요. 이사장님은 항상 먼저 나오셔서 사랑방 문을 열었어요. 그리고 저의 하루를 다 보시죠. 제가 말을 안 해도 뭘 도와야 할지 알고 계시고, 그림자 같은 분이셨어요. 말씀은 많이 안 하시고 뒤에서 조용히 도와주셨어요. 이사장님과 단 둘이 있을때는 주민들 흉도 보고, 수다를 떨었어요. 이런저런 얘기를 많이해 주셨어요. 저희 대표님은 얼굴 보기도 힘든데 이사님이 대표님의 빈자리를 채워주셨어요. 

갑자기 돌아가시니까 정말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황망하다는 것이 이런 거구나 싶었어요. 코로나 때문에 면회도 못 가고 퇴근하면 집안일 하느라 정신없고. 병원에 계실 때 연락도 자주 못 드려서 죄송한 마음이 컸어요. ‘내가 지금 제대로 일하고 있는가’라는 생각에 많이 힘들었어요. 지금은 조금 나아졌어요. 한동안 주민들이  이사장님 얘기를 안 꺼냈어요. 그런데 지금 이사장님 이야기를 꺼내시면... (승민씨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잠시 인터뷰 중단)”    


3월에 돌아가신 유영기 이사장님의 추모제를 4월 초, 동자동의 ‘새꿈 어린이공원’에서 지냈다. 이 곳은 평소에 쪽방 주민들이 친교를 나누는 고마운 공간이다. 추모제에 많은 주민들과 활동가들이 모였다. 저마다 유영기 이사장님과의 추억 한자락을 떠올렸다. 유 이사장님과 가장 가까이 지냈던 쪽방 주민이 추모사를 읽었다. 여기저기에서 눈물을 훔치는 소리가 들렸다. 박승민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추모제가 끝날무렵 박승민을 발견하고 위로를 전하려하자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코로나 때문에 처음으로 식도락 문을 한 달 가량 닫았어요. 쪽방은 특히 전염병에 취약하잖아요. 방이 다닥다닥 붙어 있으니까 한 명 걸리면 모두 걸리죠. 아프고 소외된 분들인데 전염병까지 도니까 암전 된 것 같았어요. 정부는 매일 브리핑을 하지만 방역하고 구호 물품 나눠주는 것 빼고는 달리 한 일이 없어요. 주민들을 찾아와서 체온재고, 끼니를 챙기는 일을 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곧, 폭염이 오잖아요. 대책을 세워야 해요. 코로나 때문에 그나마 있던 무더위 쉼터도 문을  닫았어요. 찜통 더위가 오면 주민들이 쉴 수 있는 공간이 없어요. 다들 기저질환이 있어서 위험한데 더위까지 겹치면 대책이 없죠. 함께 있어도 위험하지 않은 공간을 만들어야 해요. 대구 쪽방상담소는 65세 이상의 기저질환이 심하신분들 50명을 위해 냉방시설 갖춘 공간을 2개월 동안 지원 한다고해요. 이렇게 잠시라도 폭염을 피할 수 있는 공간이 없으면 40도가 넘는 쪽방에서 더위와 코로나에 갇혀 지금보다 많이 힘들어 하실거예요.”


현장에 있는 활동가답게 자나깨나 주민 생각 뿐이다. 관변단체는 생색내기용 사업만 하고 있다. 열악한 환경에 있는 주민들이 죽어나는 줄도 모르니 얼마나 답답할까. 박승민이 말한 대책이 올 여름 쪽방주민들의 건강한 여름나기 대책으로 발표되었으면 좋겠다. 

    

** 기초법 개정을 위한 농성장 앞에서 대표님과 함께(왼쪽부터 동자동사랑방 대표, 주민, 박승민 활동가. 사진; 박승민) 


“올 해 11월이면 여기서 일한지 만 3년이 돼요. 눈 깜짝할 새에 시간이 지나갔어요. 이 일이 저하고 잘 맞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어요. 저는 고맙다는 생각밖에 안 들어요. 배우는 것도 많고. 주민들은 아주 작은거 하나만 도와드려도 고마워 하세요. 별것도 아닌 사소한 일이지만 도와달라고 말할 곳이 없는 거예요. 그런 모습을 볼 때 마음이 너무 짠해요. 이 일은 제가 좋아서 하는 거예요. 누가 저를 치켜 세우면 몸둘바를 모르겠어요. 그러니까 저를 너무 미화시키지 마세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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