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활동가인터뷰] 강정과 제주, 한반도와 세계의 평화를 위해서 끊임없이 이 세상을 밀고 있는 평화활동가 최성희

** 비자림로에 서 있는 최성희 평화활동가(사진 장영식)


2020년 10월로 강정에서 평화활동을 한 지 만 10년을 맞이하는 최성희 평화활동가를 만났다. 늘 꾸밈없고 한결같은 태도로 강정 현장을 지키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인 최성희는 제주 지역 최대 현안인 제2공항 문제에 대해 기본계획 중단을 촉구하며 2019년 초 24일간 단식을 하다가 응급실에 실려 가기도 하였다.

지금도 매주 월요일 아침, 제주도청 앞 현관 앞에서 제2공항 예정부지에 서식하는 맹꽁이 등을 손수 그린 피켓을 들고 서 있는 그녀를 만날 수 있다. 그녀가 메고 있는 검정 배낭은 노트북과 다양한 짐들로 늘 무겁다. 단식 중에도 그녀는 성명서를 작성하고 강정 영자신문을 만들고 끊임없이 강정 해군기지와 제2공항 관련 소식을 국내외로 발신하느라 분주했다.

그녀가 강정과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2009년 10월. 외국 평화활동가의 여행을 코디하면서 안내자 겸 통역자로 처음 강정에 들렀다. 그렇게 맺은 관계가 그녀를 강정에서 떠날 수 없게 만들었고 강산이 변한다는 10년이 흘렀다. 그녀를 둘러싼 강산은 많이 변했다. 하지만 여전히 그녀는 강정의 평화, 제주의 평화, 한반도의 평화, 세계의 평화를 위해서 끊임없이 이 세상을 밀고 있다.


처음 강정에 대해 접한 내용은 무엇인가?

2007년 강정에 대해 처음 각인한 것이 당시 현애자 의원의 27일 단식이었다. 당시 나는 평화활동보다 작품 활동에 더 집중하던 시기였고 작품 주제가 미사일 방어 이슈였다. 당시 강정해군기지가 미사일 방어전초기지로 우려된다는 내용과 한 여성이 27일간 단식을 했다는 내용이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리고 2008년 6월에 귀국하자마자 국제 컨퍼런스를 준비하면서 강정에 관한 자료를 더 찾아보게 되었는데 당시 강동균 전마을회장이 울분에 맺혀서 제주 도청에서 할복을 시도하는 동영상을 보게 되었다. 영상 속 강동균 전회장의 처절한 눈빛이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강성원 강정 주민이 뜨거운 뙤약볕에 매일 청와대 앞에서 연산호 1인 피케팅을 하는 장면이다. 나를 강정으로 이끌었던 세 가지는 어떤 집단의 항의와 저항보다 현애자, 강동균, 강성원 등 개인의 절박한 투쟁이었다. 나는 1인 시위의 힘을 믿는다.

그리고 2009년 10월에 강정에서 구럼비를 보고 주민들을 만났는데 주민들은 2년여의 치열한 싸움 끝에 너무 지쳐있었고 구럼비는 너무 아름다웠다. 당시 제주 활동가가 외국활동가와 주민 사이의 간담회를 기획했는데 주민들은 “우리는 삭발, 단식, 청와대 투쟁 등 모든 투쟁을 다해 보았고 지칠대로 지쳐 있다. 우리가 더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그 질문에 대한 외국활동가의 말이 10년이 지난 지금도 잊히지 않는데 머릿속에 남아 있는 한 문장은 ‘여러분이 지켜주지 않으면 저 말 못하는 생명들은 누가 지켜주는가?’이다. 그 말이 참으로 강렬했고 그 말을 통해 나도 ‘싸운다는 것은 무엇인가?’ 더 깊게 성찰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나는 성산의 멸종위기 생물, 비자림로 멸종위기생물 등 말할 수 없는 수많은 동식물들을 위해서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 강정에 내려와서 초창기 최성희 모습(사진 송동효) 


예술적으로도 미사일 방어기지에 관심을 가졌다는데 왜 그랬나?

80년대 대학을 다녔는데 미국은 레이건 정권이었고 학생들의 시위와 분신자살이 있었다. 적극적이지 않았지만 무관심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나는 미술대학에 다녔는데 교육에 일제식민지 잔재가 많았고 일본과 미국의 제국주의적 철학과, 예술방법들이 무비판적으로 차용되고 있는 현실에 문제의식을 가졌다. 2000년대 초 부시 전 미대통령 집권시 핵태세 보고서와 미사일방어에 대한 본격적인 정책이 발표되는데 예사롭지 않았다. 두 가지가 식민지와 분단의 이중 문제를 가지고 있는 한국에 주는 영향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유학을 떠나게 됐나?

대학을 졸업하고 미술운동 단체에서 2년간 활동했고 작품, 작업에 집중하고 싶어서 유학을 결정했다. 하지만 작품을 하다 보니 결국 다시 반대의 길로 오게 됐다.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기를 워낙 좋아했지만 대학 시절에도 졸업 후에도 미술활동을 제대로 못했고 지쳐있기도 했다. 작품에 대한 욕구가 생기기도 했고 유학가서 다른 길을 찾아보고 싶었다.


그런데 어떻게 다시 방향을 선회하게 되었나?

아까 말한 작품 주제에 대해 조사할 것이 많았는데 조사하다 보니 공부를 하게 되었다. 귀국 즈음에는 예술작업에 대한 관심이 거의 없어진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고 오히려 메신저의 역할에 더 관심을 갖게 되었다. 미국에서 통역과 번역의 기회가 많아서 한미 양쪽 사회를 볼 수 있었고 서로의 정보와 상황에 대해 전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느 순간 본업에 대한 관심은 멀어지고 그 역할을 하는 나를 보게 되었다. 당시 접했던 정보들을 작품으로만 담기에는 너무 절박했고 개인작업으로 치환되기 보다 더 많은 사람에게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상황에서도 작품을 선택하는 작가가 있지 않나?

각자의 선택이다. 내가 절박함을 느낀 것은 작업보다는 상황을 알리는 메신저로서의 역할자였고 나의 성향과도 연관되어 있다. 창작욕구가 지금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작품을 구상하려고 하면 마음은 이미 성명서 등 더 시급하고 필요하게 요구되는 역할에 가 있다. 이것은 개인의 성향이고 좋고 나쁨의 판단 문제가 아니다.


현장에 항상 반응하고 계속 활동하는 최성희에게 쉼이란 무엇인가?

그런 질문을 받은 적이 예전에도 있지만 해야 할 일을 해야 제대로 쉴 수 있다. 조절이 잘 안 된다. 점성학적으로 그런 성향이다.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니 그렇게 고갈되지는 않는다. 그리고 주말 동안에는 쉼의 시간을 갖는다.


그럼에도 고갈되었던 순간들은?

내가 좋아하지 않는 일을 의무감으로 할 때 정말 힘들었다. 대학 졸업 후 미술 운동 단체에서 활동했는데 단체는 단체 리듬과 같이 가야되는 부분이 있고 항상 좋아하는 부분만 할 수 없다. 그러다보니 학교 때도 지쳤는데 단체에서도 지치고 고갈되는 부분이 있었다.


그렇지만 단체가 갖는 파급력이 개인보다 크지 않을까?

내가 일을 선택하는 데 있어서 기억하는 말은 ‘사람은 좋아하는 일만 할 수도 없고 의무감에 따라서만 할 수도 없고 밸런스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 흥미와 관심, 도덕적 책임 중간에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지점들이 있다고 생각하며 그 선택의 순간에 성향이 일부 작용한다. 내가 무엇을 했을 때 더 기여가 될 것인가? 이 시점에서 무엇을 하는 것이 더 나은 가 등 많은 다양한 요소에 의해 선택한다.


지난 총선 보궐선거 때 도의원 보궐 선거 출마를 조심스레 제안해보았는데 너무 단호하게 손사래 쳤다. 제주지역 사회에서의 여성 정치인의 활동이 굉장히 큰 의미가 있는데 왜 그렇게 강하게 거부하는가?

나의 성향 자체가 정치인이 되기에 맞지 않는다. 정치라는 것을 제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좁게 해석하면(그에 동의하지 않지만) 더더욱 그렇다. 나이가 들수록 내가 누구인지 더 명확해진다. 할 수 있는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이 뚜렷해지는데.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집중할 수 있는 부분이 더 명확해진다. 당위적으로만 선택할 수 없는 문제이다.


어떤 사람, 어떤 여성이 정치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당위와 관심·흥미 차원에서 밸런스를 찾을 수 있는 사람, 하고 싶으면서 동시에 그 당위를 잘 느끼는 분이 하면 좋겠고 필요하다. 따라서 나의 관심과 성향에 대한 파악이 필요하다.

나는 점성학에 관심이 있다. 20대 고갈되었을 때 나는 어떤 사람인가, 뭘 하면 좋은가 고민을 안 할 수 없었다. 여러 가지 자료를 찾다가 처음에는 흥미 위주로 점성학을 공부하게 되었는데 점성학을 통해 발견한 것은 다양성이다. 우리의 운동은 사람을 도덕적인 잣대로 흑백으로 가르는 경우가 많고 성향을 많이 배제시켰다. 점성학의 미덕은 그 다양성을 표현하고 인정하게 한다. 그것이 나의 평화운동에 도움이 되었다. 다양한 사람들을 이해하고 각각의 장점들을 인정하고, 결국 우리 모두는 필요하고 누구도 배제되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할 수 있게 도움을 주었다. 애니어그램, 점성학 같은 것이 자기 자신을 이해하고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며 곧 평화운동의 다양성의 지평을 넓히는데 도움이 된다.

어떤 인간에게도 역사적인 경험과 개인적의 성향의 장점들이 있다는 것을 이해할 때 서로 도울 수 있다는 것을 또한 이해할 수 있다. 점성학은 스스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만 동료, 심지어 규탄의 대상조차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조직에서 단일한 결정을 내리고 상황에 맞춰 행동을 해야할 때 모든 다양성이 인정되기에는 시간적 한계 등이 있다. 그런 경우 어떤 방법을 택할 수 있을까?

무엇을 하자라고 마음을 모을 때 일의 종류에 따라 사람들이 모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아무 것도 안하는 것 같지만 또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하고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어떤 이가 일을 안하거나 활동에 부동의한다고 볼 수 없다. 어떤 상황에 따라 그 사람은 선택을 했지만 전체 개념을 잃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소한의 공동의 약속이 필요하다. 공동의 행동 필요성이 강할 때는 각자의 자발성에만 맡기지 않고 공동의 최소 약속들을 강화할 수 있을 것이다.


올해 10월로 강정에서 평화 활동을 한지 만 10년이 된다. 활동하면서 어려운 시기는?

싸움 자체가 어렵다기보다 시각적으로 구럼비가 파괴되고 한라산의 허리들을 건물들이 가려버리는 변화, 그리고 어느 순간에 주민간의 연대가 무너지는 것 같은 순간이 아팠다. 하지만 어느 순간 내성이 생긴 것 같다. 마음이 한 순간 콱 꺾이지는 않는다. 그 배경에는 인간에 대한 신뢰가 있다.

80년대 미대 내 운동이 쉽지 않았다. 많은 미대생이 운동에 관심을 갖지 않았고 나는 소수에 속했다. 분신이 이어지는 엄혹한 시기에 미대생들의 냉담함을 보면서 이 시기에 어떻게 화실에 틀어박혀서 그림만 그릴까, 사람에 대한 절망감 그런 것들이 있었다. 그런데 87년 6월의 모습들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화실에 처박혀 있을 것이라고만 생각했던 미대생들이 하이힐에 짙은 화장을 한 모습으로 현수막을 들고 거리에 나와 같이 구호를 외쳤다. 그 모습에 너무 감동을 받았고 그 장면은 30년이 흘렀어도 강렬하게 뇌리에 남아있다. 그 순간부터 나는 인간에 대해서 절대로 절망하지 않기로 했다. 불이 꺼질 것 같던 상황에서 인간에 대한 무한한 신뢰가 생겼다. 그 후로는 좌절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가 바라는 조금이라도 나은 세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조금 더 빨리 올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6.10 항쟁, 박근혜 탄핵 촛불 등 우리 근현대사에는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 하지만 사람에게는 정의에 대한 불씨가 있지만 또 다른 다양한 욕망과 본능이 존재한다. 세상은 변하는 듯 하지만 모순을 반복하는 것처럼 보인다.

군사독재 이후 형식적인 민주주의를 이뤘지만 신자유주의라는 또 다른 괴물이 나타났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운동의 시작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밀고 있다. 인간에게는 어쩌면 절망할 부분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 세상은 절망적일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면 누가 저 목소리 없는 생명들을 대변할 것인가. 인간은 단지 이익과 관심에 의해서만 행동하지 않고 도덕적인 것을 더불어 생각할 수 있다는 실존의 근거가 있어서 인간은 계속 밀 수 있다. 무조건적인 낙관이 아니라 무조건적인 인간에 대한 신뢰이자 전망이다. 평화운동을 한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매일 매일 청소를 하는 것과 같다.

우리는 연결되어 있고 그 연결에 대해서 나 또한 책임을 지겠다. 그 지점을 평화 활동하는 사람들이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선배세대로서 운동에 절망하는 후배 활동가를 만나면 어떤 지지를 하겠는가?

‘너의 욕구를 이해할 수 있다. 떠나도 된다. 자신에게 정직하면 된다’는 말을 해주고 싶다. 나도 그림을 그리고 싶지 않았던 시기가 있다. 그럴 때 그림을 억지로 그릴 필요가 없고 운동하고 싶지 않을 때 억지로 운동할 필요가 없다. 이해할 수 있다. 정직하게 자기 마음의 목소리를 따르는 것을 존중하고 이해해줘야 한다. 그리고 다시 돌아오지 않아도 된다. 그 사람은 운동에 돌아오지 않아도 훌륭한 일을 할 수 있다. 그냥 이해하고 존중해줘야 한다. 젊은 세대들은 다양한 욕구를 가지고 있고 다양한 일을 하고 싶어 한다. 그것을 이해해줘야 한다.

** 2019년 2월 제주 제2공항 기본 계획 중단을 촉구하며 단식 중 (사진 : 이기철)


최근 페미니즘이 큰 화두가 되고 있다. 시민 운동 내에서도 소위 진보적인 사고를 갖고 있다고 하지만 여전히 가부장적인 문화와 습관이 내재된 한국 남성과 젊은 페미니스트 사이에 갈등과 불통이 존재한다. 세대와 세대와의 조화, 잔재하는 가부장적인 습관에 젖어있는 진보적인 사고의 남성과 젊은 여성과의 연대를 어떻게 이뤄낼 것인가?

나도 개인적으로 고민하는 문제다. 답을 찾기 어렵다. 하지만 각각 50대 남자의 눈이 되어서 30대 여성의 눈이 되어서 생각을 해볼 필요가 있다. 50대 남성의 눈으로 자신과 갈등을 겪는 30대 여성을 바라보았을 때 어떤 생각을 할까? 내 경험에 유추해 생각해보면 자기는 나름대로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하는데 꼰대라고 비판을 당하면 서운함이 꽤 클 것이다. 나는 나름대로 들으려고 생각하는데 내가 뭘 그렇게 잘못 했을까? 30대 여성의 입장에서는 굉장히 억압받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고 상종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이들 사이에는 성과 나이의 권력이 작동한다. 무의식적으로 억압하고 억압되는 권력의 문제들에 대해 돌아볼 필요가 있다.

남성여성만의 문제가 아니라 평화운동 내에서도 보이지 않는 권력이 갈등의 요인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최대한 그 갈등을 풀어갈 수 있는 방법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데 쉽지 않다. 하지만 각자의 기준과 잣대가 다른데 계속 지적을 한다고 해도 서로의 말이 먹히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사람의 입장이 되어서 그 사람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방법이 필요하다. 상당수 경우가 나이 많은 남성이 권력을 점유하는 경우가 있지만 그것이 또 절대적이지는 않고 다양한 상황들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페미니즘을 하면서 빠지기 쉬운 오류 중 하나가 ‘그녀는 생각하지만 그를 잊는다’. 여성에 대해 생각하지만 남성에 대해서 사고의 범위 중에 잊어버린다. 실재 페미니즘이 표방하는 바는 그를 포함하는 것이다. ‘she and he’를 생각하면 덜 시행착오를 하게 되지 않을까? 그리고 자신이 상대적으로 나이, 경험치, 성별 등으로 권력을 가지고 있다면 먼저 잘못하지는 않았는지 더 돌아봐야 한다.

내 인생에서 가벼운 충격 중 하나가 베트남에 갔을 때 일인데 그 때가 3.8 여성의 날이었다. 당시 남성이었던 관장이 인사말을 하면서 제일 먼저 여성들에게 꽃을 주었다. 우리나라에서는 한 번도 여성의 날에 꽃을 받아본 적이 없다. 평화운동 내에서도 여성의 날에 남성들로부터 축하를 받아본 적이 없다. 사소한 일일 수도 있지만 어떤 인식 차이를 본다. 한국남성들은 머리로만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아무리 이야기해도 변화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남자들 내에도 모범이 필요하다. 여자들이 얘기하면 타자화시키는 경향이 있지만 각성된 남성의 모범이 있으면 오히려 더 쉽게 이야기가 풀릴 수 있다.


가장 깊게 교류하는 사람은?

점성학적으로 사람을 많이 사귀지는 않는다. 혼자 집중하는 스타일이고 어렸을 때 나 스스로 왜 나는 다른 친구들처럼 막 어울려 놀지 않을까? 의문이 많았다. 놀 때보다 혼자 있을 때 나 자신이었을 때를 더 느꼈다. 지금도 가까이 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고 그것을 받아들인다. 처음에는 그런 나를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지만 점성학을 통해서 나의 성향이 나쁘지만은 않다는 것을 이해했다.


최근 당신 SNS를 보면 정의연, 윤미향 사건에 대해 굉장히 많은 생각과 고민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나는 운동을 떠나서 한 인간에 대해서 아무리 그 인간이 잘못된 일을 했다고 하더라도 한 인간에 대해서 온 사회가 돌을 던지고 공격을 하는 것 자체는 굉장히 비인도적이고 인권유린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악인이라도 인간에 대한 예의는 지켜야 한다.

문화대혁명 때처럼 인간을 끌고 가고 모욕하는 그러한 것은 옳지 않다.

그리고 윤미향이 해왔던 일들에 대해 나는 감사하고 있다. 그것은 누가 쉽게 할 수 일이 아니었다. 상처받은 할머니들은 본인의 무시무시한 상처 때문에 주변인에게 또한 상처를 줄 수 있다. 사랑과 이해, 인내가 없으면 못하는 것이다. 윤미향은 또한 위안부 문제를 돌봄의 영역에 국한시키지 않고 인권의 문제로 확장시켜 국제적인 연대로 가지고 갔다. 인식의 폭이 깊었고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운동 영역 내에서도 사람을 쉽게 재단하는 모습에 대해서는 아니라고 이야기해야 한다. 그리고 평화운동 내에서 가장 약한 곳은 여성운동가이다. 서지현 검사처럼 이 사회에서는 엘리트 여성의 목소리도 받아들여지기 힘들다. 가장 공격하기 쉬운 대상이다.


앞으로 계속 제주에 살 것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나는 내가 처해있는 상황에 최대한 충실한 사람이다. 변수라면 연로하신 부모님, 한 분이라도 쓰러지면 내가 올라가서 돌봐야 하는 상황이고 나의 계획과 의도와는 상관없이 자연인으로 도덕적인 역할을 하겠다.

그리고 할 수 있는 한은 계속 세상을 밀고 싶다. 인간은 자신이 하고 싶은 바가 있고 조건에 고개를 숙여야 할 때가 있다. 어떤 상황을 인정해야할 때가 있고 포기해야하는 상황이 있다. 나의 관심과 도덕적 요구 사이에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선택하면서 밀고 나가고 싶다.

** 2018년, 2019년 무참히 나무들이 벌목된 비자림로 현장에 나무를 심고 있는 최성희(사진 오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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