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활동가인터뷰] 실용음악을 전공했는데 무연고 사망자 장례지원을 하는 이유 - 나눔과나눔의 김민석

“나눔과나눔에서 일한지 5개월 됐어요. 출근 첫날 빼고 매일 장례식장(정확히 말하면 화장터)에 갔어요. 기억에 남는 장례를 꼽으라고 하면, 하나를 콕 짚기는 어려워요. 모든 장례가 다 인상적이고 기억에 남거든요.” 


‘나눔과나눔’은 무연고 사망자의 장례식을 돕는 비영리단체다. ‘사회적 고립으로 외롭게 살다가 쓸쓸하게 삶을 마무리하는 사람이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2011년에 만들었다. 

연고자 없는 사람은 없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연고가 생긴다. 하지만 삶은 녹록지 않다. 무연고자가 되기 십상인 조건이 차고 넘친다. 벼랑 끝에 몰리는 건 순식간이다. 가족을 만날 용기마저 잃고 무연고자가 된다. 마지막 길을 가족이 아닌 사람이 배웅한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의 마지막을 동행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승에서의 동행도 힘든데 마지막을 동행하다니 즐거운 일도 아니다. 그 길을 걷는 청년 활동가가 있다. 각자도생의 사회에서 좀처럼 쉽지 않은 선택을 한 이유는 무엇일까 궁금해서 인터뷰했다. 7월 3일 오후 7시 마포에 있는 나눔과나눔 사무실에서 김민석을 만났다. 


모든 장례 다 기억에 남아


“저는 실용음악을 전공했어요. 특별히 음악을 좋아한 건 아니에요. 고등학교 때 자율학습을 빼려면 학원을 다녀야 했어요. 그래서 논술학원을 다녔어요. 글쓰기를 배웠는데 두 달만에 실증이 났어요. 다음 달 등록을 해야 하는데 안 하고 나왔어요. 나오다 보니 바로 옆에 실용음악학원이 눈에 띄었어요. 그래서 음악을 하게 됐어요.

워크넷에서 나눔과나눔의 채용공고를 봤어요. 홈페이지에 올라온 글들이 너무 좋았어요. 읽다보니 이 곳에서 일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어요. 장례식은 일반적인 사회서비스처럼 당연한 거라고 여겼어요. 장례에서도 소외된 사람들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어요.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충분히 애도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접할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한 장례지원을 하는 이곳에서 꼭 일하고 싶었어요. 

장례식장에 지인이 오면 오는 대로 안 오면 안 오는 대로 느낌이 달라요. 관의 무게가 가벼우면 가벼운 대로 무거우면 무거운 대로 기억에 남아요. 분골된 유골이 어떨 때는 한줌일 때도 있고 어떨 때는 양이 많을 때도 있어요. 그럴때 혼자 생각하죠. ‘왜 이렇게 일찍 돌아가셨을까. 이렇게 체구가 작은 분인데 사회적 돌봄은 잘 받으셨을까’ 하는 궁금증도 있고요. 저는 이 죽음들은 국가가 죽인 거라고 생각해요. 국가는 개인의 안전과 생명을 지킬 의무가 있잖아요. 그런데 이분들의 삶과 생명을 지키지 못했어요. 사회안전망은 사람이 딱 죽지 않을 만큼만 작동하면 되는 건가요? 외롭게 돌아가시는 분들이 이렇게 많은데도요? 

오늘 변 하사님(트렌스젠더 군인)을 강제 전역시킨 것의 취소 소송 결과가 나왔어요. 기각 됐대요. 이  역시 국가가 개인의 삶을 짓밟은 거예요.”




** 고인의 유골을 산골(뿌리는 것)하기 직전에 유골함을 잡고 안식을 기원하고 있다. 2020.6 (사진제공;김민석)


김민석은 93년생이다. 비영리단체에서 일한 경험도 없다. 스스로 선택한 일자리가 무연고 사망자의 장례를 치르는 곳이라니 믿기 어려웠다. 그래서 더 궁금했다. 그는 왜 이곳을 첫 번째 일터로 선택했을까. 나눔과나눔의 상임이사는 김민석을 뽑은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나눔과나눔에서 일하고 싶어하는 간절한 눈빛을 잊을수가 없었어요.”


그제서야 납득이 갔다. 김민석의 간절한 눈빛, 그 눈빛에는 우리 사회에 할 말이 많은 청년들보다 훨씬 더 강렬한 욕구가 담겨있었다는 것을.   


“교복이 입기 싫어서 교복을 입지 않아도 되는 공고에 입학했어요. 졸업 후에는 셔츠를 입을 일이 없었죠. 그런데 나눔과나눔에 채용서류를 넣고 면접 볼 때 입으려고 처음으로 셔츠를 샀어요. 면접을 잘 못봐서 떨어질 줄 알았어요. 기회를 한 번 더 달라고 메일을 보내려고 했어요. 이틀 후, 합격했다는 전화를 받았죠. 출근은 2월 17일부터 했어요. 둘째 날부터 벽제 화장장에 매일 갔어요. 낯설지 않았어요. 장례식장에 가본 경험이 많으니까요. 

제가 스물 두살 때 세월호 사건이 터졌어요. 당시에 수업을 듣고 있었는데 배가 침몰했대요. 얼마 지나지 않아서 전원이 구출됐대요. 마음을 놓았어요. 그런데 오보였어요. 충격이었어요. 저는 안산에 살거든요. 단원고 학생 중에 아는 사람도 꽤 있었어요. 

대학에서 실용음악을 전공했으니까 곡을 만들었어요. 세월호 추모곡을 만들어서 부르고 다녔어요. 당시에는 세월호를 노래하는 기성 가수들이 적었어요. 저를 아는 분들이 연락을 주셔서 세월호 행사에 참여했고 제가 만든 노래를 불렀어요. 현재까지 12곡 정도 만들었어요. 세월호 관련된 활동은 활동이라기보다 당연히 제가 할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나는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세월호 이야기가 나오면 견디기 힘든 감정에 휩싸인다. 내 인생에서 가장 큰 트라우마를 꼽으라고 하면 아마도 세월호 사건일 것이다. 희생자 중에 아는 사람이 없어도 그렇다. 희생자 가족의 슬픔과는 비교가 안 되겠지만, 나는 아직도 세월호가 침몰한 게 믿어지지 않는다. 더 이상 김민석에게 세월호와 관련된 질문을 할 수 없었다. 그의 얼굴에도 힘든 기색이 뚜렷했으니까. 


활동이 아닌 당연히 해야 할 일


“‘활동가’가 되어야겠다고 마음먹은 적은 없어요. 장애인 이동권 운동도 하고 여성 운동도 하고 성소수자 운동도 했거든요. 복지서비스를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시혜적인 게 아니잖아요. 마찬가지로 무연고 사망자의 장례지원은 당연한 일이에요. 어떤 분은 나눔과나눔이 장례지원하는 것을 보고 ‘천사들’이라고 말씀하세요. 개인의 삶이 존엄했다면 그 마무리도 존엄해야해요. 존엄한 마무리를 돕는것 뿐인데 천사라고 하시니 쑥스럽지요. 

일반적으로 활동가라고 하면 공익적인 일을 하고 희생하는 사람이라고 하는데 저는 제가 살기 위해서 하는 일이에요. 저는 성소수자예요. 제가 차별받지 않으려면 성소수자 운동을 해야 해요. 장애인 친구들이 있어요. 그 친구들과 같이 밥 먹으러 가야 하는데 이동의 제약을 받아요. 식당에 들어가려는데 턱이 있어서 못 들어가고, 관공서에 가야 하는데 계단이 있어서 못 올라가요. 그러면 장애인 운동을 해서 차별받지 않도록 해야 하잖아요. 노동 운동도 마찬가지죠. 저는 그 어떤 활동도 다 자기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서 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의외의 말에 놀랐다. 보통 활동가라고 하면 남들이 안 하는 일을 하고 돈을 많이 받지 못해도 보람있는 일을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김민석에게 활동이란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며 높이 평가 받아야 할 이유가 없는 일이다. 

도대체 김민석의 가치관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질문을 할수록 돌아오는 답이 예상을 벗어나니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허리를 꼿꼿이하고 귀를 쫑긋 세우고 들었다. 강적을 만났다.  


** 무연고사망자 장례의식 중 가장 마지막으로 진행하는 순서인 고인의 지방을 소지하는 모습. 2020. 7 (사진제공; 김민석)


“제 꿈은 제 이름으로 된 집을 사는 거예요. 사회가 너무 불안해요. 제가 환갑이 되었을 때,  연금을 받거나 수급비를 받으며 살고 있는데 월세까지 내면  평생 가난하게 살아야 되잖아요. 주거비용이 고정된 지출로 잡히지 않아야 빈곤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요. 그래서 저는 집에 비중을 크게 두는편이에요. 사람이 사는 데 의식주는 필수예요. 우리는 의식주가 보장되지 않는 사회에 살고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쪽방에 사는 분, 수급비로만 사시는 분, 무연고로 돌아가시는 분, 장례를 치르지 못하는 분들이 있죠. 무연고로 돌아가시는 분들은 주거문제와 단절된 관계가 가장 큰 문제인데 개인적으로 풀기에는 무리가 있어요.  

퀴어문제는 퀴어를 혐오하지 않으면 돼요. 하지만 간단한 문제가 아니죠. 퀴어를 좋아하고 싫어하고는 개인의 자유지만 그것으로 다른 사람의 인권을 침해하면 그건 ‘폭력’이죠. 혐오문제는 아마도 쉽게 해결되지 않을 것 같아요. 만약에 해결된다고 해도 또 다른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요? 그래서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문제의 총량은 변하지 않을 수 있어요. 

지금 사귀고 있는 사람과 결혼하고 싶어요. 결혼제도는 반대하지만 법적으로 결혼해서 제도권 안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내가 내일 죽어도 내 짝꿍은 제 장례를 치를 수 없어요. 유산을 상속받을 수도 없어요. 오래 제 옆에서 저를 사랑해 준 사람인데도 법적인 관계가 아니면 안 되는 게 많아요. 그런 걸림돌에 걸리고 싶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결혼 하려는 거예요. 나눔과나눔에서 말하는 것도 그거예요. ‘왜 사실혼 관계의 배우자가 장례를 치를 수 없는가? 왜 가족보다 더 끈끈한 정을 나눈 지인은 장례를 치르면 안 되는가?’하는 거요. 저는 가족주의를 싫어해요. 심지어 어머니가 저를 위해 밥을 차려주시고, 옷을 사 주시는 것도 안 좋아해요. 어머니는 제가 하지 말라고 해도 하지만요.”   


나도 장례 법을 안 후 놀랐다. 놀란 정도가 아니라, 잔인하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국가의 존립을 위해 만든 법이지만 그 법이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폭력이 된다면 없애는 게 맞다. 혈연중심으로 움직이는 사회는 변화의 가능성을 막는다. 김민석은 부모가 자식을 낳았다고 당연하게 뭔가를 해야 할 의무는 없다고 한다. 부모가 내게 쓴 돈은 모두 ‘부채’라고 생각한단다. 요즘 세상에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다니 적잖은 충격이다. 나는 지금 누구와 인터뷰를 하고 있나. 이십대 후반의 대한민국 청년과 인터뷰를 하고 있는 게 맞나, 싶었다.  이어서 김민석은 여성가족부 장관에 비추어도 손색이 없는 뼈 있는 말을 쏟아냈다.  


* 세월호 추모공원 설립을 촉구하는 집회에서 거리공연을 하고있는 김민석. 2017.9 (사진제공; 김민석) 


가족주의 반대, 육아의 책임은 국가가 져야


“아이를 낳으면 사회가 모든 것을 책임져야해요. 저는 부모 자식 간의 인연 같은 것은 큰 의미가 없다고 봐요. 저는 부모님을 사랑해요. 사랑하는 이유는 제 부모님이어서가 아니라 그 분들을 한 개체로서 사랑하는 거예요. 제게 동생이 한 명 있어요. 동생한테는 애정이 없어요. 애틋한 감정도 없고. 물론 안 좋은 일이 생기면 신경이 쓰이겠죠. 하지만 그건 모르는 사람이어도 마찬가지잖아요. 

제 생각에 가장 이상적인 사회는 아이들이 부모가 없어도 성장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드는 거예요.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정말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이에요. 물론 행복하고 즐거운 일도 있지만 육아는 누군가의 절대적인 노동과 희생이 필요한 일이잖아요. 부모는 좋은 선생님이라고 생각해요. 좋은 선생님이 되려면 제대로 된 훈련과 교육을 받아야해요. 그런  과정을 마친 사람들이 아이를 양육할 수 있고요. 저는 정말 운이 좋았어요. 그래서 좋은 부모님을 만났어요.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았을 거예요. 

나눔과나눔에서 오래 활동하고 싶어요. 하지만 활동은 그렇게 하면 안 될 것 같아요. 오래 일하면 안주하게 되고, 안주하면 문제가 닥쳤을 때 예민하게 반응하지 못하니까요. 저는 게을러요. 조직에서 필요로 하고 요구하는 것을 3년 정도 하면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다 한 거 아닐까요? 그 이후에 제가 무슨 일을 하고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죠.”




집이 멀다고 일어나는 김민석을 붙잡고 차마 술 한잔 하자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인터뷰 내내 이제 막 활동을 시작한 사람이 아니라 족히 30년은 활동한 원로를 만난 느낌이었다. 신선하고 귀감이 될 만한 말을 들었는데도 마음은 헛헛했다. 배는 고프고, 갈 길은 멀고, 술 생각이 간절했다. 혼술을 할까, 나눔과나눔의 모퉁이를 불러서 한잔 할까. 

일단, 걷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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