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활동가인터뷰] 이상을 쫓기보다는 내 속도에 맞게 살고싶은 사람, 박내현


무언가 좋은 것을 떠올렸다 해도 그것을 실행하는 데는 생각보다 큰 용기가 필요하다. 심지어 불행을 자초하는 일이기도 하다. 지난 세기 혁명가들의 불행한 삶을 수없이 목격한 우리는 이제 그 어떤 이상주의자의 유토피아에도 설렘과 기대를 품지 못한다. 바깥의 적을 무찌르고 둘만의 사랑을 완성한다는 전래동화의 ‘그 후로 오랫동안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라는 결말은 곧 인간의 삶에서 떼어놓을 수 없는 권태와 불안, 오해, 집착의 긴 여정을 알리는 출발선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하물며 공동체란 말할 것도 없다. 여럿이 어우러져 함께 행복하게 살아간다는 걸 상상하기 힘들고, 그런 일을 시도하기는 더욱더 어렵다. 그런데도 여전히, 어디선가 그런 일을 저지르고야 마는 사람이 나타난다. 2019년 현재 서울 동대문구 이문동에도 바로 그런 사람들이 있다.

재개발이 머지않은 동네에 작은 공간을 만들어 여럿이 모여 먹고, 대화하고, 공부하며 어느새 6년이라는 시간을 지나온 이문동 공동체 도꼬마리. 처음 그 공간을 만들기로 마음먹었을 때, 그 사람들은 대체 어쩔 작정이었을까? 나는 익숙한 냉소를 떨쳐내고 조심스러운 호기심을 안은 채 이문동에 찾아가 공간 제안자 중 한 사람이자 지역 활동가인 박내현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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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을카페 도꼬마리 입구 (사진: 신비)

 

오늘은 혼자 계시네요?

네. 오늘 이 시간에는 제가 담당해요. 운영진 열두 명 중에서 일곱 명이 요일과 시간을 나눠서 공간을 함께 운영해요.

 

올해부터 활동가 기본소득제를 하신다고 들었어요.

몇 달 전부터 회원 중에서 자원하신 두 분이 기본소득을 받기 시작했어요. 생활에 필요한 최소한의 금액과 투여할 수 있는 시간을 정해서 지속 가능하게 공간을 운영하면서 자기 활동도 해보기로 했어요. 한 분은 그림을 그리셔서 드로잉 클래스를 열고, 다른 한 분은 미디어 작가라 재개발 지역 길고양이 이주 방사 과정 기록하는 작업 하고 계세요.


아직 실험단계인 건가요? 기한은 있나요?

일단 올 한해 해보고 의논하기로 했어요. 저희가 그동안 시행착오를 많이 겪었어요. 2013년 처음 열었을 때는 사람들이 다 공간을 너무 갖고 싶어 하던 때라 자발적으로 자기 시간을 내서 운영을 잘 했어요. 그때 왜 그랬는지 백수가 많아서. 그러다가 한명 두명 취직하고 옮겨가고 하니까 못 여는 날이 생기더라고요.

그래서 나중에는 상근활동가를 두기도 하고 서울시 청년활동가 지원을 받아보기도 했는데 장단점이 있었어요. 제일 큰 문제는, 돈을 받는 상근자가 생기니까 그 사람에게 모든 일을 미뤄버리게 되더라고요. 이전에는 각자 청소하고 그러던 사람들이 쓰레기통 하나를 안 비우고.

아무래도 이건 아닌 것 같아서 좀 쉬어보기도 하고 다시 자율 운영도 해 봤는데 공간이 너무 죽어버려서, 지난겨울 새 공간으로 이전하면서 다 같이 고민했어요. 이전에 범했던 오류를 반복하지 않게, 지속 가능하게 운영할 방안을요. 

 

그 결과가 기본소득이었군요.

네. 활동비는 저희가 여기서 하는 사업과 자체적으로 생기는 수입, 회원들이 자발적으로 보내주시는 후원금으로 충당해요. 활동가 두 분이 공간 운영에 많이 참여하시지만, 예전처럼 모든 걸 떠맡는 상근자는 아니라고 서로 재확인하고 주의하면서 함께 운영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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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꼬마리 활동가들이 진행 중인 프로그램 (사진: 도꼬마리 공동체)

 


도꼬마리가 지천이었다던 그 동네


도꼬마리 공동체가 처음 자리 잡았던 그 골목에는 ‘독구말’이라는 이름이 붙어있었다. 말 그대로 도꼬마리 풀이 가득한 길이라는 뜻이라는데, 지금은 도꼬마리 풀도 사라지고 골목도 무너져가고 있다. 이런저런 시행착오를 겪으며 공동체가 뿌리를 내리고 조금씩 성장하는 동안에도 재개발은 그저 무심히, 때로는 폭력적으로 진행되어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난겨울, 결국 이주라는 현실에 직면한 도꼬마리 사람들은 무력하게 떠밀려가기를 거부하고 조금 떨어진 곳으로 옮겨가 새로운 공간을 피워냈다. 그래서 여전히 그곳에 살아있는 도꼬마리 공동체. 어디서나 볼 수 있던 풀 이름에다 공동체라는 단어를 갖다 붙인 그 이름은 가벼운 듯 무거운 듯 오묘한 느낌을 준다.


공동체라고 이름 붙인 특별한 이유가 있어요? 

처음에 왜 공동체라는 단어를 썼는지 모르겠어요. 약간 생각 없이. 그런데 쓰고 보니까 그 말이 갖는 무게가 있더라고요.

공간을 만들고 공동체 카페라고 붙여두니까 그렇게 질문하는 분들이 많았어요. 여기 혹시 교회나 종교 공동체냐고. 그래서 들어오기 쉽지 않았다고도 하고. 어쨌든 크게 의미를 부여하기보다는 그냥 자연스럽게 약간 관성적으로 써 온 단어이긴 해요.

 

시작할 때 함께하신 분들이 계속 같이하고 계시나요?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해요. 처음에는 청년들이 많이 참여했었는데, 아무래도 이동성이 있잖아요. 취업하거나 결혼을 하거나 해서 떠난 분들이 계시고, 이후로 이 동네에 사시는 분들, 주로 2~3년 차에 들어오신 분들이 오래 같이하고 있어요.

 

초기에는 청년 공간을 만들 생각이셨나 봐요?

네. 이문동이라는 지역 자체가 대학가여서 청년들이 많이 거주하는 곳이에요. 워낙 집값이 싸니까 현재 대학을 다니는 학생들만 아니라 졸업하고 직장 다니면서도 결혼을 하거나 더 안정적인 집을 구하기 전까지는 그냥 여기서 거주하는 청년들이 많거든요. 그런 사람들은 있는 듯 없는 듯 지내기 마련인데, 이 마을에서 좀 편하게 스스로 주민이라고 생각하면서 살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시작을 했어요.

그때 저도 삼십 대여서 청년이라는 정체성을 갖고 있었고, 저랑 같이 사는 사람(이후로는 주로 파트너라는 표현을 쓴다)이 대학에서 강의했었거든요. 그래서 만나는 학생들에게도 얘기하고 수업 듣는 청년들이 오기도 하고 그랬어요.

 

학습공동체 같은 느낌이었겠어요.

그런 생각이 좀 있었죠. 대학에서 강의도 많이 없어지고 있으니 대학 밖의 좋은 강의를 만들어보자, 라든가 책 모임, 연구모임 같은 걸 하고 싶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준비모임을 했어요. 그런데 모인 청년들에게 우리가 동네에서 뭘 하면 좋겠냐고 물어봤더니 공부하고 싶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같이 밥을 먹으면 좋겠다, 운동을 같이하면 좋겠다, 아니면 그냥 친구를 사귀고 싶다, 이런 게 더 많았어요. 그래서 처음 시작할 때 밥상 모임, 운동 모임, 영화 보는 모임하고 그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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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을 연 이듬해인 2014년, 이문동이 아니라 전국적으로(!) 파란을 일으켰던 주성치 영화제 (사진: 도꼬마리 공동체)

 

 활동가의 (재)탄생

 

도꼬마리를 만들기 1년 전까지만 해도 박내현은 대학 졸업 후 12년을 내리 근속한 풀타임 회사원이었다. 큰 기업의 IT팀에서 단기간에 빠르게 진급해 비교적 젊은 나이에 회사 전체의 시스템 관리를 담당하는 역할을 했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편에는 사회운동에 관한 막연한 선망이 있었다. 대학 졸업 후 집안 형편을 고려해 취직을 택했지만, 4년 동안 학보사 활동을 하면서 알고 지낸 선배나 동기들이 이후 사회단체나 노동조합에서 활동하는 모습을 보며 저렇게 자기가 하고 싶고 의미 있는 일을 하면서 살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종종 했다.

회사 일이 힘들거나 싫었던 건 아니었다. 몸이 힘들어 가끔 병가를 내긴 했어도 급여나 업무상 권한도 높았고, 무엇보다 일 자체가 재밌고 즐거웠다. 그런 그의 마음을 결정적으로 꺾이게 한 건 12년 차에 맞이한 구조조정이었다.

 

제가 구조조정 TF에 들어가게 되었어요. 너무 괴롭더라고요. 뭔가 좋은 방향으로 풀어보려고 제안을 해봐도 잘 안되고, 그 과정에서 권고사직을 실제로 해야 했어요. 그러면서 몸과 마음이 다 안 좋아졌어요. 아, 이제 정말 그만둘 때인가보다 싶어서 회사에 얘기하고 사직서 쓰고 나왔어요. 그리고는 한 서너 달 쉬었는데 그때 진짜, 지금 생각해보면 우울증 같은 게 살짝 왔던 거 같아요. 아침에 일어나면 종일 메일 확인하고 전화 받고 너무 바쁘게 살던 사람이 갑자기 아무것도 안 하고 있으니까 넋이 나갈 것 같은 거예요. 아침에 일어났는데 아무도 나를 찾지 않는 이 상황이, 멘붕이 오더라고요.


불안한 마음에 괜히 동종업계에 지원서를 내보기도 했다. 채용되어도 가지 않았으면서, 아직 쓸모있는 사람인가 확인하고 싶었던 마음이 컸던 모양이다. 그리고 얼마 후, 그 마음을 잘 알고 함께 의논하던 지인이 조심스레 권한 노동조합 쪽 일을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12년 직장생활로 경제적인 문제는 해결이 되셨나요?

어쨌든 감당할만한 상황이 되었어요. 부모님도 미안한 마음도 있으셨던 거 같아요. 정말 그만두고 싶어서 제가 겪은 고민과 상황을 다 얘기했을 때, “그래 그동안 고생했다, 미안했다. 이제 좀 쉬어라”고 얘기해주셨고. 그때는 이미 결혼을 했을 때였는데 같이 사는 사람이 용기를 좀 주기도 했어요. 그 사람도 활동가라 돈을 많이 벌지는 못하는데, 내가 너무 힘들어하고 때려치우고 다른 걸 해보고싶다 그랬을 때 이 사람이 준 조언이,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이 영역이 좋지는 않아” 였어요. 여기도 이상한 사람 많고, 네가 회사에서 만나는 좋은 사람, 이상한 사람, 여기도 다 섞여 있다. 만약에 여기가 막 환상적으로 좋을 거 같다고 생각하고 운동을 하려고 한다면 다시 생각해봤으면 좋겠다. 그런데 그게 아니고 온전하게 의미 있는, 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 그만두려는 거면 괜찮다고. 12년 동안 열심히 일했으니까 이제는 좀 쉬어도 돼. 쉬면서 하고 싶은 걸 찾아봐, 라고 얘기해준 게 힘이 되었어요.

 

그렇게 큰 변화의 시기에 주변의 지지가 있었네요. 

네, 다행히.

 

그때의 선택에서 지금까지 크게 달라진 건 없나요?

네. 직장생활 오래 하면서 좋은 것 나쁜 것 다 오지게 경험을 해서 그런 듯해요. 단체나 활동이 꼭 좋지만은 않아도, 그냥 이전으로 돌아가는 게 차라리 낫겠다고 쉽게 말하게 되진 않아요. 그래서 가끔 청소년들에게 조언해야 할 때 어느 한쪽만 무작정 좋거나 나쁘다고 하지 않고 경험해보면 좋겠다고 해요. 자기가 경험해보고 둘 중에서든 셋 중에서든 선택하는 걸 판단하는 거지, 아 직장생활 해봤더니 되게 안 좋아, 이거 말고 이게 훨씬 좋아, 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 같아요.

 

그래서, 드디어 ‘하고 싶고 의미 있는’ 일을 시작하게 되신 건가요?

그게, 두 달을 했는데 너무 싫은 거예요. 교육감 선거 캠프에서 일을 시작했는데... 아마 제가 노동조합, 노동단체에 대해서 어떤 환상 같은 걸 갖고 있었나 봐요. 너무 위계적이고, 폭력적이고. 선거가 압축적으로 뭘 많이 할 때잖아요. 그걸 두 달 동안 집중적으로 경험한 거죠. 원래는 선거 끝나고 본격적으로 활동할 생각이었는데, 아... 하면 안 되겠더라고요. 좀 더 쉬어야겠다고 말하고 다시 쉬었어요.

그래도 일을 좀 하니까 약간 회복이 되긴 했어요. (부정적 경험에도요?) 네. 제가 그때까지도 워커홀릭 같은 면이 있었나 봐요. 그전까지는 앞으로 뭘 해야 할지 몰라서 정말 막막한, 다운된 상태였다면 두 달 동안 일을 몰아쳐서 해 보고는 ‘아, 내가 언제든 하고 싶은 일이 생기면 다시 할 수 있구나’ 라는 자신감 같은 게 생겼어요.

 

그 힘으로, 진짜 ‘하고 싶은’ 일을 찾으러 나서신 거군요.

좀 쉬면서 천천히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마침 마을 관련 일이 있다는 제안을 받은 거예요. 마을기업 인큐베이터라고. 그때가 서울시에서 한창 마을공동체 사업을 할 때였어요. 협동조합을 양성하면서 동네마다 관련 활동을 하려는 주민들이 있을 때 상담을 해 줄 사람을 구한다고 했어요. 

잘 모르는 분야라 마을공동체에 관한 책을 좀 찾아 읽어봤는데, 재밌더라고요. 사회운동이라는 게 갖는 지향이 있잖아요, 노동이든 여성이든 인권이든. 하지만 내가 속한 집단에서는 그런 이야기를 전혀 나눌 수 없는 경험을 하면서 살아왔기 때문에 평소 고민을 했었어요. 내 주변 사람들하고도 그런 걸 나누지 못하면서 시청이나 광화문 가서 집회하는 게 무슨 의미일까? 곧 세상이 바뀔 것처럼 이야기하는 집단이 존재한들 주변에서는 관심이 1도 없다면? 그게 직장 생활을 하면서 제일 불편한 지점 중 하나였어요. 그래도 마을에서 활동하면 사람들과 천천히 그런 이야기를 조금씩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더라고요. 그래서 급히 책 몇 권 열심히 읽고 이해한 내용으로 시험 보고 면접 봐서 선발되었고, 활동을 시작했어요.

 

이번 경험은 좀 괜찮았나요?

재밌었어요. 어릴 때 광주에 살다가 제가 대학에 오면서 가족 모두 서울로 와서 살기 시작했거든요. 그래서 그때까지 15년 정도 동대문구에 살았지만, 전철역에서 우리 집 사이 말고는 동네에 대한 개념이 없었어요. 인큐베이터가 되고는 어디서든 부르면 가야 하니까 동대문구 열네 개 동을 다 돌아다녀 보고 주민들을 만났는데, 나이 되게 많으신 분, 막 아이를 낳은 젊은 엄마... 그 욕구가 다 다르더라고요. 신기하기도 하고, 뭔가 되게 다른 세상이 있구나, 사람들은 정말 다양한 생각을 하고 사는구나 싶었어요.

그렇게 활동하면서 석 달 정도 지나 보니까, 나도 마을을 모르고 공동체에 관해 아무것도 모르는데 주민들에게 마을성이 어떻고 공공성이 어떻고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게 웃긴 거예요. 내가 이걸 좀 경험을 해봐야겠다 싶어서 공간을 만들 생각을 했어요. 아까 말했듯이 지역 특성에 맞게 청년들과 함께 하는 건 파트너가 의견을 줬고요.

 
뜻밖의 사건들

 

공간을 만들자고 사람들을 모으면서 일터도 동네로 옮길 생각을 했다. 컨설팅은 동대문구에서 해도 센터가 은평구에 있어 멀리 다녀야 했는데, 이제는 일도 생활도 제삼자가 아닌 당사자로서 마을에서 하고 싶었다. 도꼬마리 공간을 만들고 본격적으로 활동을 벌일 무렵, 8개월 동안 일했던 마을기업 코디네이터를 그만두고 동대문구 보건소에서 준비 중이던 경동시장 상인 건강 사업 활동가로 참여하기로 했다. 그런데 갑자기 사고가 났다. 그것도 엄청난 사고가.

밀양 송전탑 문제가 한창 심각할 때여서 다큐멘터리 [밀양전] 상영회를 열었어요. 밀양 활동가 초대하고 준비하는 과정을 파트너가 챙겼는데, 상영 직전에 이 사람이 안 보이는 거예요. 잠깐 시간이 남아 자전거를 타러 나갔다길래 그런가 보다 하고 기다렸어요. 그러다 전화가 왔는데 사고가 나서 응급실로 실려 가는 중이라고. 병원에 가 보니 수술을 한대서 그냥 어디 뼈가 부러졌나 보다 했는데 머리에 피가 차오르고 있다며 급하게 뇌수술을 한다는 거예요. 어깨 뼈도 부러지고 갈비뼈도 부러져 폐를 찌르고. 

그때부터 한 달을 온통 병원에서 보냈다. 아픈 사람은 아픈 대로 힘들고 보호자는 보호자대로 불안과 피로가 극심한 시간이었다. 다시 일상이라는 걸 찾을 수 있을지 온갖 무서운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 차오르는 그 시기에, 이제 막 싹을 틔운 마을공동체가 그 존재감을 크게 드러냈다.

 

도꼬마리 만들면서 만났던 사람들이 병원에 와준 거예요. 첫날부터 퇴원하는 날까지, 하루에 두 세 명씩 돌아가면서 그 한 달 동안, 계속. 저희가 개를 키우고 있었는데 집에 거의 못 가니까 자기들끼리 조를 짜서 개도 보살펴주었어요. 사실 그 사람들을 안 지 6개월 정도밖에 안 된 시점이었거든요. 그게 저한테는 엄청 오래 남았어요. 만약 그냥 내가 그 전처럼 직장생활을 하다가 이 사람이 사고가 나서 꼼짝없이 있어야 하는 상황이었으면 어땠을까, 그런 생각도 많이 들었고. 그런데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사람들이 매일매일 찾아와서 헛소리해주고, 함께 있어 주는 게 너무 고마웠어요. 석 달 예정이던 걸 본인이 우겨서 한 달 만에 퇴원하고 돌아왔는데 사람들이 축하 파티 해주고, 그랬어요.

 

드라마틱한 마을의 모습을 느끼게 하는 사건이었네요.

아, (마을, 공동체라는 게) 이런 건가? 싶었어요. 그분들도 뭐 이 한 몸 던져 뭘 하겠다든지 그런 게 아니고, 특별히 결속력이 있거나 하지 않을 때였는데 말이에요.

그리고, 그 일로 동네 주민들과도 관계가 더 생겨났어요. 나중에 알아보니까 자전거 사고 당시 지하 보도에 이 사람이 쓰러져있을 때 구해주신 분이 그 골목에서 치킨집을 하던 사장님이었어요. 오가며 얼굴만 아는 사이였는데 배달 가다가 발견하고 전화를 해주신 거예요. 병원에서 그랬어요. 시간을 다투는 수술이었는데, 빨리 신고해주셔서 다행이었다고. 그래서 나중에 저희가 그분에게 인사하러 가서 평생 치킨은 여기서 먹는다고 했죠. 진짜 재밌었던 건, 그때 그분들이 얘기하시더라고요. 그 지하 보도가 원래 되게 문제가 많았다고. 조명도 없고, 차가 다니는 길인데 보도가 너무 좁아서 크고 작은 사고가 났었대요. 그래서 조명 설치해달라 뭐 해달라 계속 말했는데 안 해줬던 거예요. 그런데 이 사고 나고 저희가 구청에 항의했더니 거기 조명이 설치가 된 거예요. 보도블록 파인 부분에 자전거 앞바퀴가 걸려서 넘어졌던거라 보도블록도 싹 개보수 해주고 조명을 엄청 밝게 달아줬어요. 그래서 저희끼리 농담으로 그랬어요. “아, 너 그 한 몸 바쳐서 마을의 안전을 이뤘구나. 정말 큰 일했다.” 동네 언니들도 애들이 자전거 타러 가면 “너, 그분 몰라? 그 사고 난 분 있었잖아. 헬멧 쓰고 다녀!” 그랬다고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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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번째 도꼬마리 공동체 공간 앞에서 (사진: 도꼬마리 공동체)

 

파란만장한 위기의 시간을 보내고, 뒤늦게 예정했던 경동시장 건강 사업에 합류했다. 현장 조사에서부터 프로젝트 매니저까지 2~3년 동안 그 일을 하면서, 그냥 소비자로 다닐 때는 알지 못했던 시장 상인들의 삶과 건강의 문제를 피부로 겪고 느꼈다. 특히 이중 삼중의 무게를 떠안고 살아가는 여성 상인들의 삶을 들여다보며 여성주의 활동에도 새삼 더 깊은 관심이 생겼다. 워커홀릭 증세는 여전해서, 그 큰 시장을 허구한 날 구석구석 돌아다니느라 아킬레스건에 염증이 생겨 반깁스를 하고 다닐 정도였다.

그러는 사이 마을의 다양한 이슈와 관계들이 촘촘히 일상을 파고들었다. 경동시장과 도꼬마리 공동체만이 아니었다. 짧은 시간에 온갖 마을 활동에 관여하게 되면서 활동가 박내현의 발걸음이 급격히 빨라졌다.

 

되게 리얼하게 현장 활동을 하셨네요.

도꼬마리가 배경이 되었든 아니든, 지역에서 제게 주어진 일이 되게 많았어요. 뭘 하든 저를 끼면 일이 빨리 추진된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었어요. 부탁하면 사업계획서 착착 써주고, 회의록 아무도 안 쓰려고 하면 제가 써주고 그러니까 같이 일하기에는 쓸모있는 사람이었나 봐요. 누군가가 전화해서 부탁하거나 상의하거나 하소연하는 걸 들으며 늘 전화통을 붙들고 있었어요. 파트너는 집에 사람이 와도 얼굴도 안 본다고, 너는 무슨 다산콜센터냐고 화도 내고. 주변 사람들은 너 도대체 왜 그러냐, 적당히가 없냐, 그런 말도 하고.

 

말마따나, 대체 왜 그러셨던 걸까요?

그때는 지역 활동에 신입인 거잖아요. 정말 적당히가 없었어요. 누가 보자고 하면 너무 신나고, 그런 시기였어요. 그리고 항상 성과로 측정받는 치열한 직장생활의 틀 안에서 성장해온 사람의 조급함이 분명 있었을 거예요. 그걸 마을에 와서도 못 버린 거죠. 회의하기로 했으면 회의를 해야지, 지난주에 뭐 했는지 막 수다 떨고 시간 보내고 그런 게 너무 답답해 죽겠는 거예요. 

한편으로는 초조함도 있었어요. 운동이라는 걸 늦게 시작했다는 초조함. 지금도 그런 생각을 안 하는 건 아닌데, 이십 대에 단체 활동을 시작하신 분들 있잖아요. 나보다 일찍 시작해서 나름의 영역에서 의미 있는 활동을 쭉 해온, 지금쯤은 뭔가 자기 운동이다 라는 화두를 가진 사람들을 통틀어서 막연하게 부러워하는 마음이 있었어요. 늦게 시작했으니까 빨리 막 잘하고 싶은 마음, 그런 걸 공명심 같은 거랑 겹쳐서 사명감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없는 동안에도 마을은 잘 돌아갔는데 그때는 마치 이게 아니면 안 된다는,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말을 즐겼던 게 아닌가 싶어요.

 

내가 없어도 마을은 잘 돌아갔다고 하셨는데, 그건 어떻게 확인하셨어요?

한동안 마을 활동에서 좀 떨어져 있었거든요. 이사를 간 건 아니고, 벗어나고 싶다는 마음이 커서 다른 지역에 있는 단체에서 일을 좀 했어요. 그러다 보니 지역 상황도 잘 모르게 되고, 거리를 핑계로 이런저런 제안에 거절도 하게 되고 그러면서 적당한 거리에서 관계를 정리하는 시간을 갖게 되었어요.

 

무슨 일이 있었나요? 마을에서 일하고 생활하기를 원하셨던 만큼, 일터를 별 뜻 없이 옮기신 건 아닐 텐데요.

 그렇죠. 크게 두 가지 계기가 있었어요. 하나는, 지역 단체 활동가들의 해고 문제를 중재하다가 당사자인 단체 리더와 마찰이 생겼어요. 그분과 주위의 다른 분들까지. 남성이고, 나이와 경력이 많은 그분들에게 나이 어린 여성인 제가 불편한 존재였다는 걸 그제야 알았어요. 도꼬마리 준비한다는 소문이 났을 때도 지역 활동 그렇게 하는거 아니라고, 잘 안될 거라는 식으로 말씀하셨지만 적당히 거리를 두고 지냈는데, 그때는 같이 일을 하고 있는 상황이어서 피할 수가 없었어요. 결국 그 사업도 못 하게 되었고, 지역에서 하던 모든 회의에서 쫓겨났어요. 하나씩 하나씩 명단에서 빠지더라고요. 이건 대체 뭐지? 신기한 경험이었어요. 그동안 내가 생각하는 방향을 이야기하고 열심히 해 왔는데 누군가 한번 입김을 불면 이렇게 싹, 모든 곳에서 소거될 수밖에 없는 존재인가? 무력함을 느꼈어요.

그리고 도꼬마리 공동체 내부에서도 갈등이 있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좀 더 성숙하게 대처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때는 제가 개인적으로 너무 힘든 상태였거든요. 아침에 눈을 뜨기도 싫고, 지역을 떠나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어요.

어디서나 벌어질 만한 일이면서, 막상 내가 당한다면 너무나 괴로웠을 경험을 돌아보는 박내현의 표정은 의외로 담담했다. 외로이 긴 시간을 보내고서야 얻을 수 있는 성찰의 흉터랄까. 그 모습이 내게는 그렇게 보였다. 더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서가 아니라, 스스로 더 나은 사람이 되려고 애쓴 흔적 말이다.

 

이야기를 나눌 상대가 있었던 거예요? 아니면 혼자 반추하신 거예요?

좀 혼자 머물면서 생각이 정리되었던 것 같아요. 이렇게 말하면 서운해하는 분도 계시지만, 지역을 떠나 일하는 게 저에게는 쉼이 되었어요.


그 휴식 아닌 휴식을 제공한 곳은 독서공동체 땡땡책 협동조합이었다. 1년 남짓 사무국 상근활동가로 일하는 동안 땡땡책은 박내현에게 일터이자 치유와 배움의 공간이었다. 그 이유는 흥미롭게도, 그곳이 도꼬마리와는 다른 완전무결한 유토피아여서가 아니라 되려 비슷한 시행착오와 상처를 겪고 있는 공동체이기 때문이었다.

 

알고 보니 거기서도 비슷한 과정을 겪었더라고요. 누군가 문제를 제기했고, 그것을 잘 해결하지 못한 이사회에 실망하면서 조합원들이 나가고 그런 상황이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그 문제를 풀어나가는 과정을 보면서 놀라기도 하고, 용기를 얻었어요. 시간이 한참 걸리기는 했지만, 문제 상황에서 2차 가해를 하신 분이 그 사실을 용기 있게 인정했고, 조직 내 평등을 위해 나선 분들이 소위원회를 꾸려서 대안을 고민하고 여럿이 대화하는 자리도 만들었어요. 서로 입장이 달랐던 사람들은 지금도 서로 교류하지는 않고 있지만, 관계를 회복하거나 누군가 떠나는 것만이 아닌 다른 방법을 찾을 수도 있다는 게 놀라웠어요. (이 사안은 땡땡책 협동조합 웹사이트의 '차별고민대화모임 아하' 카테고리에서 조금 더 자세히 볼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 땡땡책 일하면서 지역 활동을 다시 계속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어요. 내가 했던 활동이 의미 없지 않았구나, 그리고 내가 진짜 지역에서 하고 싶었던 일이 뭐였더라,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어떤 회의체에 불려가고 활동가로서 주목받는 걸 원했었나? 그래서 그게 안 되니까 상처를 심하게 받은 건가? 내가 원했던 건 꼭 그런 것만이 아니었는데, 왜 그런 생각을 했지? 그렇게 내가 돌아보거나 점검할 시간 없이 ‘모든 이의 손을 다 잡아주리라’, 뭐 그런 마음으로 너무 미친 듯이 활동했구나 싶고. 그러면서 놓치게 된 사람들도 떠오르고. 

그러다 보니 이제는 무슨 협의체 위원장이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냥 나 자신에게 여전히 같이하자고 손을 내밀어주는 사람들이 보였어요. 아, 그래. 이렇게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랑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려고 한 거였지. 지역에 돌아가면 좀 제대로, 누군가에게 호출되거나 호명되거나 등 떠밀려서가 아니라 내가 선택해서 하고 싶은 사람들하고 다시 해봐야겠다. 그런 생각도 할 수 있게 되었어요.

 

이제 돌아오셨으니 땡땡책에서 그랬듯 지난 상처를 구체적으로 복기해볼 건가요?

한번은 이야기해야 할 것 같아요. 마음의 준비가 안 되었다는 분도 계시고 그래서 아직 못했지만, 내놓고 말하지 않아도 서로 더 조심하는 부분이 생긴 것도 사실이에요.

공동체뿐만 아니라 뭔가 가치 있는 일을 할 때 더 상처받는 게 이런 부분이잖아요. 단지 개인적 욕구가 충돌하는 게 아니라 각자 가치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겼을 때 말이에요.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가 아니라 원래 그런 일은 있는 거고, 악마 아니면 피해자 이렇게 구분할 게 아니라 좀 더 건조하게 얘기를 해야 하지 않을까. 저에게는 과제이기도 하고, 아마 그런 시기가 올 거 같아요.

 

자율적 공동체, 그 오래된 미래

 

현재 도꼬마리 공동체의 회원은 약 40명. 지난 6년 동안 조금씩 드나들기는 했지만, 전체 규모는 처음부터 비슷한 수준으로 유지되어 왔다. 대개 어떤 단체나 집단이 외부에 알려질 때는 대표 격의 특정한 인물로 드러나기 쉬운데, 적어도 드러난 행적을 살펴보건대 도꼬마리에는 콕 집어 떠오르는 누군가가 없다. 없거나, 여러 사람을 거치며 변주된다. 그건 아무래도 그동안 도꼬마리가 마치 풀씨들처럼, 말 그대로 ‘자율적으로’ 존재하려 애써온 결과일 거다.

 

도꼬마리에는 대표가 아예 없는 건가요?

명의로만 보면 있긴 하죠. 처음에는 보증금을 내셨던 분의 명의로 계약을 하고 등록을 했어요. 나중에 그분이 안 하신다고 해서 제 파트너 명의로 바꿔서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는데, 실제로는 아무 권한도 갖지 않아요. 외부에 나갈 일이 있으면 그때그때 상근이나 역할을 맡은 사람이 나가고 해서.

그간의 사정이나 회원을 가장 많이 아는 사람은 아마 저 정도일거에요. 처음 제안하던 때부터 여태 쭉 해왔으니까 아무리 주의를 한다고 해도 공동체 안에서 제가 가지는 권력이라는 게 있겠죠. 그래서 오해나 지적도 받고. 특히 회계나 행정 같은 일은 2~3년 빼고는 거의 제가 맡아왔는데, 아무래도 돈을 만지는 사람이 속사정을 제일 많이 알게 되니까 더 그런 것 같아요. 예를 들면 회원들이 사소한 물건을 사거나 하는 것도 직접 결정하기보다는 저에게 물어보시곤 하거든요. 이제 이걸 좀 놔야겠다 싶어서 내년에는 바꾸자고 얘길 했어요. 그리고 조직 내에서 필요한 정보는 가급적 매뉴얼로 남기자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어요.

 

매뉴얼을 만든다 해도 맥락을 공유하고 이어나가는 일이 쉽지만은 않은 일이잖아요.

도꼬마리는 현재 임의단체고, 개인사업자로 카페를 운영하고는 있지만 처음 만들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특정한 규칙을 갖고 있지 않아요. 이제는 정관 같은 걸 만들자는 의견도 있기는 한데요, 저는 그보다는 문화가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요. 세상의 모든 조직이 그렇게 하는데 굳이 우리도 그럴 필요가 있을까 싶은 거예요.

비영리단체나 법인으로 등록을 하려거나 하면 필요할 수도 있겠지만 아직은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고, 여기저기 단체를 경험해봐도 그게 꼭 중요하지도 않더라고요. 만들어놔도 누구도 신경 쓰지 않다가 무슨 문제가 터지면 들여다보는 그런 규칙을 만드는데 거부감이 좀 있어요. 더 넓혀서는 노동이든 젠더든, 그런 게 막 학습을 해서 계몽되는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습이 되는 과정이 있으면 좋지 않을까.

 

그런 자율적 공동체를 누구나 꿈꾸기는 하겠지만, 솔직히 정말 가능할까요?

저희는 무슨 지향이 있는 단체가 아니고, 그냥 마을에서 친구를 만들어서 외롭지 않게, 좀 더 재밌게 살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시작했으니까요. 사회적인 이슈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꾸준히 이야기를 꺼내긴 해도 다 같이 발 빠르게 막 움직이거나 하지는 않아요. 그래도 가끔은 도꼬마리 안에서도 그런 경험을 할 때가 있어요.

이를테면, 매주 밥상 모임을 하는 분들이 계세요. 특정한 주제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그냥 동네 친구들 모여서 술 먹는 게 좋은 분들이지요. 저희가 2015년에 한 번 세월호 유가족을 모시고 상영회와 간담회를 한 적이 있거든요. 그냥 그런 행사를 한다고 알려드리기만 했는데 밥상 모임에서 괜찮으면 유가족 모시고 밥을 대접하고 싶다더라고요. 그게 저한테는 되게 감동이었어요. 어 뭐지? 하는 기분.

그 모임 중 한 분이 그러시더라고요. 자기도 아이를 키우는 엄마인데, 사실 자기는 용기도 없고 이런 일 잘 모르고 그래서 세월호 관련해서 아무것도 한 적이 없다고. 그런데 유가족이 우리 동네까지 오신다니까 따뜻한 밥 한 끼 먹여서 보내고 싶다고. 행사 끝나고 와 보니까 진짜 밥이 쫙 차려져 있었어요. 그래서 다 같이 모여서 밥 먹고 이야기 나누고. 유가족 분이 되게 좋아하면서 가셨어요. 모두가 그 문제에 관해 엄청나게 토론하거나 그러지 않아도 어느 순간에는 각자 자기 방식으로 품을 내고 싶어지는 게 아닐까? 때로 너무 거창해서 평범한 사람은 할 수 없는 그런 일로 느껴져서 못하는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분이 내준 마음이 정말 고마웠어요. 그냥 너무 평범한, 하지만 아무나 할 수 없는, 내어주는 그 마음을 너무 알 것 같아서. 

그렇게 조금씩, 같이 하는 분들의 관심이나 생각이 바뀌는 걸 느낄 때가 있어요. 세미나나 교양 말고 그냥  같이 활동하고 일상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머리가 아니라 감각적으로 그렇게 알게 되는 부분이 있더라고요. 물론 거기서 다 나아가기 위해서는 공부가 필요하겠지만. 그건 그때 가서 해도 늦지 않잖아요.

 

그러면 그다음은요? 그게 권력이든 부담이든 자신에게 부여된 역할이 줄어들고, 자율적으로 지속가능한 공동체로 성장해갈 수 있다는 걸 확인하게 된다면요, 그다음에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에요?

아직 이렇다 저렇다 결론을 내린 건 아닌데, 저의 바람은 그래요. 도꼬마리를 시작은 했지만 끝은 안 봤으면 좋겠다. 끝날 때까지 같이 있거나, 마지막 문을 닫는 일을 내가 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고요.

 

도꼬마리가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뜻이에요? 아니면 내 손으로 문을 닫는 일만은 하고 싶지 않다는 거예요?

‘사람들에게 맡겨두자’에 가까워요. 앞에서 말했듯이 좀 더 자율성에 맡기면서 갔으면 좋겠다는 게 제일 큰 바람이라서. 요즘은 예전처럼 제가 나서지 않고 있는데요, 오히려 먼저 나서서 뭘 하자고 저를 채근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공간을 옮길 때도 그랬어요. 상황도 좋지 않았고, 제 마음은 사실 이쯤 했으면 그만해도 되지 않을까였지만 나서서 이걸 그만하자 어쩌자 말하지는 말자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이주에 관해 이야기하는 자리를 만들었을 때 생각보다 많은 분이 오셔서 이야기를 나누었고, 없어질 때 없어지더라도 재개발로 문을 닫는 건 아닌 것 같다고 의견이 모였어요. 그래서 결론적으로는 다시 공간을 만들게 된 거예요. 앞으로 운영 방식이나 역할도 많이 의논했고. 그렇게 조금씩 중심축이 저에게 쏠리지 않고 나뉘는 걸 보면서 느끼는 개운함, 안도감이 있어요. 계속 그렇게 해나갈 수 있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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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주를 앞두고 이문동 재개발 문제를 알리기 위해 도꼬마리 공동체가 제작한 영상 (바로가기)

 

그렇게 되면 저는 서울을 떠나고 싶은 마음도 있어요. 너무 미어터지고 바쁘지 않은 곳에서 좀 덜 벌고 적당히 살았으면 좋겠는데 파트너가 동의를 안 해줘서 아직은 가능성이 작지만요. 재작년 재개발 확정되고 상황이 빠르게 돌아갈 때는 아무리 해봤자 아파트 한번 짓는다고 하면 공간도 관계도 한번에 다 소거되는데 공동체가 다 뭐야, 의미 없어, 그런 생각이 강하게 들었어요. 지금은 그래도 도시에서 누군가 필요하다 느끼고 애를 써서 만들어내는 공간 자체는 의미있다고 생각해요. 다만 그게 내가 없어도 되는 공간이었으면 좋겠어요. 제가 언젠가 여기서 완전히 빠져나가서 다른 데로 갔을 때, 도꼬마리가 여전히 잘 운영된다는 얘기든, 어찌어찌 문을 닫았다는 이야기든 멀리 건너 전해 들으면 좋겠다, 그 마지막까지 내가 치열하게 고민하는 상황에는 있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에요.

 

그럼 그동안의 시간은 나에게 어떤 의미일까요?

어쨌든 제가 좋아하고 관계를 이어온 사람은 대부분 도꼬마리를 통해 만난 사람들이어서, 제 인생에서 도꼬마리가 차지하는 비중은 작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도꼬마리가 없어진다고 그 사람들과 관계가 없어질 거라 생각지는 않거든요. 그래서 고마움과 보람을 느끼지만, 이 공간이 죽을 때까지 있어야 한다든가 우리는 영원히 운명공동체로 가야 한다든가 이런 생각은 없어요.

보통 공동체라면 그 사람들이 계속 십 년 이십  년 같이 살아야 할거 같고 연결되어 있어야할 듯한 이미지를 주지만, 그게 아니라 더 유연하게, 누군가 떠나더라도 인연을 끊는 건 아닌, 그런 게 가능하다는 감각을 유지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상상력, 그리고 공간 만들기

 

유토피아는 없다, 라는 말에는 사실 함정이 숨어있다. 그것이 예전에는 있었지만 지금은 사라진 것인지, 어딘가에 존재하는데 발견하지 못했을 뿐인지, 머지 않은 미래에 실제로 실현될지 그 누구도 확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조금 뒤로 물러나서, 유토피아를 ‘자율적 공동체’라는 말로 대체해도 상황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한편, [아나키스트 인류학의 조각들]을 쓴 인류학자 데이비드 그레이버는 그 자리를 아나키즘이라는 단어로 채우면서 두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간다. 오늘날 모두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국민국가나 자본주의가 사회를 구성하는 단일한 해답이었던 적은 없으며, 사람들은 언제나 ‘경찰이나 보스 없는 비무장세계’(8쪽)에서 민주적이고 자유롭게 살아가기를 원한다고 말이다. 

“하지만 어떤 영토는 살아남았고, 새로운 영토는 항상 생겨나는 중이다. 오늘날의 세계는 이런 아나키 상태의 공간으로 가득 차 있으며 이 공간이 성공적이면 성공적일수록 소식을 들을 가능성은 더욱더 적어진다. 외부인은 이런 공간이 폭력으로 붕괴될 때가 되어서야 그 존재를 알아차리기 때문이다.”
 

- 데이비드 그레이버, [아나키스트 인류학의 조각들], 나현영 옮김, 포도밭출판사, 2016 (82쪽)

그레이버가 주장했듯, 우리의 일상은 흔히 말하는 합리적 거래 못지않게 비합리적이고 비체계적인 행위와 관계로 가득 차 있다. 인류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권력과 자본이 아니라 더 나은 세계가 가능하다는 상상력, 그리고 이미 도처에 존재하는 대항권력이 드러날 공간을 만드는 행위일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도, 더 나아가 한 사람의 내면에서도.


계속 고쳐 살고 있는 거 같아요. 나는 이런 사람이니까 이렇게 바꿔야지, 이렇게 왔다 갔다 하면서. 그런데 요즘 드는 생각은, 저는 원래 이런 속도감이 편한 사람인거예요. 하기로 한 건 빨리 되면 좋겠다, 내가 생각한 결과로 그냥 나와야 하고. 그냥 그것도 나였으면 좋겠는 거예요. 활동으로 내가 소진된 것도 맞고 적절한 시스템이 없는 것도 맞는데, 그것도 제각기 자기에게 맞는 속도가 있잖아요. 그러니까 예전의 나와는 결별하고 이제 새로운 내가 되어야지 이렇게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아무리 변하려고 해도 어떤 면은 그대로 나로 남아있을 테니까.

누가 뭐라고 하든지 내가 집중해서 속도를 내고 싶은 부분을 잘하면 되고, 또 별로 하고 싶지 않은 일은 그때 내 상태에 따라서 거절하면 되고. 그렇게 뭘 정해놓지는 않아야겠다고 생각해요. 활동가가 되어야겠다 생각하면서 '이상적인 상' 같은 게 있었던 거 같아요. 친절하다던가, 쉼 없이 노력한다던가, 어울리지 않게 느슨하게 사는 척 한다던가. 그런 '상'에 맞추지 않고 그냥 내 모습을 인정하면서 살고 싶어요.


_ 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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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꼬마리 풀 (사진: Harry Ro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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