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인터뷰] 하고 싶은게 너무 많아 지칠새가 없는 활동가 - 옥천순환경제공동체 정순영

주위에서 번-아웃을 걱정할 때 본인은 재미난 것을 궁리하네


'활동가이야기주간'이라는 특별한 행사가 있다는 사실을 이번에 처음 알게 됐다. (사)옥천순환경제공동체 정순영 사무국장이 “선배님, 저 좀 인터뷰 해주세요”라는 전화를 받으면서였다. 그랬다. 이번 인터뷰는 ‘인터뷰이’가 먼저 요청했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고 했다. (**정 사무국장은 공적으로든 사적으로든 늘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은 사람이다).

우리는 지난 2007년 옥천신문사에서 기자 선·후배로 처음 만났다. 그리고 15년 가까운 시간이 흘러올 동안 동료이자 친구로 많은 활동을 함께 했다. 인구 5만의 작은 시골에서 지역신문 기자의 삶과 비영리단체 활동가의 삶은 많은 영역에서 겹치기 때문이다. (**정 사무국장은 2007년부터 2014년까지 옥천신문 취재기자와 편집기자를 거쳐 편집국장을 지냈다. 2015년부터 현재까지는 (사)옥천순환경제공동체 사무국장을 맡고 있다. 나는 2007년 옥천신문사에 취재기자로 입사해 2019년 퇴직했다.)

우리는 많은 것을 함께 고민했고 가끔 싸우고 자주 키득거리며 가족처럼 지내왔다. 신문에 나란히 정창영 기자, 정순영 기자라는 바이라인이 올라갈 때면 ‘둘이 친남매냐?’라는 질문도 자주 받았다. 그렇게 가깝게 지낸 사이였기에 새삼스레 공식적인 인터뷰를 한다는 사실이 쑥스럽게 느껴졌다. 하지만 배운 도둑질이 이것 밖에 없어서였을까? 오랜만에 취재수첩을 들게 됐다. (**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인터뷰 내용 일부 순서를 바꿔 재구성했다)


** (사)옥천순환경제공동체 정순영 사무국장


늘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인줄은 알았지만 이번에도 굳이 누가 시키지도 않는 일을 했다. 왜 인터뷰를 요청했나?

보통은 NGO 활동이라고 하면 서울에 많이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실제로 아름다운재단이나 참여연대 같은 유명한 단체들이 서울에 많이 있고. 하지만 시골에도 우리같이 주민운동을 하는 비영리 조직이 있다. 도시에 비해 숫자가 많진 않지만 활동가들도 있다. 옥천군은 인구 5만의 작은 농촌 지역이다. 이런 곳에서 회원이 100명이 넘고 상근자를 두고 있는 (사)옥천순환경제공동체 같은 조직이 있다는게 흔한 일은 아니다. 이런 사실을 알리고 싶고 자랑하고 싶어서 인터뷰를 먼저 요청하게 됐다. 우리같이 전국 각지에 있는 작은 조직들이 이런 행사에 많이 참여하면 좋을 것 같다.


먼저 옥천으로 오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부산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대학을 다녔다. 전혀 연고가 없는 옥천으로 오게 된 이유는 뭔가?

대학 때 학생운동을 하면서 농활을 다녔는데, 그때 시골이 참 좋더라. 기회가 된다면 시골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당장 농사를 지을 수는 없어서 진로 고민을 많이 하던 시기에 ‘옥천신문’ 신입기자 공채를 보게 됐다. (당시에) 옥천신문은 안티조선운동으로 유명한 신문사였고 ‘작은 언론이 희망이다(장호순, 2001년)’는 책에서도 보게 됐다.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긴 했지만 서울이라는 공간은 내가 추구하는 삶의 방식과 맞지 않았다. 서울에서 나는 ‘너무 많은 사람 중의 하나’에 불과했다. 여기서 나는 차를 살 수도, 집을 살 수도 없는 무능력한 사람이 될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한창 학생운동, 사회운동을 하면서도 실제 삶과 운동 사이에 괴리감 같은 것을 느꼈다. 세상을 바꾸자고 외치는 사람들이 정작 자기 동네 골목에 잔뜩 쌓여있는 쓰레기를 치우자는 얘기는 안 하더라. 농업의 중요성을 얘기하면서 농활을 가는 사람들조차 평소에는 패스트 푸드를 먹는다. 너무 큰 구호를 외친다고 생각했고 내가 외치는 구호와 실제 내 삶이 전혀 매치가 되지 않는다고 느꼈다.


그래서 옥천신문사에 와보니, 옥천에 살아보니 실제로 서울에서 삶과 많이 달랐나?

너무 좋았다. 서울에서는 반지하에서 살았는데 옥천에는 햇볕 짱짱 들어오는 빌라 2층에서 살았다. 나는 특히 공기에 민감한데, 시골은 공기가 너무 좋았다. ‘들’과 ‘볕’이 좋았고, ‘물’과 ‘공기’가 좋았다.

기자라는 직업 덕분인지는 몰라도 새파랗게 젊은 여자애가 온동네를 돌아다니는데 새로운 것도 많고 밥 사주는 분들도 많고 잘 대해주시더라. 그리고 무엇보다 지역이라는 것에 대해서 하나부터 열까지 새롭게 눈을 뜨게 됐다. 옥천을 알기 위해 (고향인) 부산시청 홈페이지도 들어가보고 옥천을 통해 지역을 새롭게 배우고 지방자치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 나는 우리 사회의 대안이 ‘지역’이라고 생각한다. 국회와 청와대도 지역으로 옮겨야 한다고 본다.


** 활동가로 일하지만 농사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정 사무국장은 옥천군 9개 읍면 중 가장 인구가 적은 안남면(약 1천500명)에 살며 아스파라거스와 블루베리, 산딸기 등을 키운다.


‘새파랗게 젊은 여기자’였기 때문에 ‘남기자’들은 겪지 않아도 될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었을 것 같다. 이를테면 성희롱이라든지?

분명히 있었을 것 같은데 그때는 잘 인식하지 못했던 것 같다. (사람마다 차이가 있는 것 같지만) 농촌에서 젊은 여성에게 쏟아지는 지나친 관심이나 언어폭력 같은 것도 물론 있었지만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타입이었던 것 같다. 기자라는 직업 자체가 가지는 특성 때문이기도 한데 가령 같은 또래에 비해 굉장히 많은 사람과 사건, 경험을 하게 된다. 가령 일가족 살인사건이라든지, 나이 많은 정치인들을 상대한다든지 하는.

그러다보니 오히려 강해져야 한다는 강박이 심했던 것 같다. 지금 같으면 성희롱적인 발언을 들으면 그 자리에서 문제제기를 할텐데 당시에는 더 센척을 하기 위해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식으로 응수했다. 남자 공무원들과 술을 마시면 꼭 이겨야 한다는 그런 식의 강박이 있었다. 강해진다는 것에 대해 착각을 했던 시기였다. 지금은 오히려 그런 면에서 더 편해졌다.


옥천신문 취재기자로서 삶에 꽤 만족한 것 같은데, 왜 비영리단체 활동가가 됐나?

두 가지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 첫 번째는 좋은 기사를 쓰기 위해 공부를 하고 다른 지역 사례를 취재하다 보니 ‘기사만 쓰는 기자’로서 아쉬움이 많아지더라. 특히, 사회적경제와 관련한 기사를 쓰면서 그런 갈증이 더 심해졌는데, 내가 취재해보니까 우리지역의 실질적인 변화를 위해서는 사회적경제가 대안이더라. 그런데 기자는 아무리 실천적인 기사를 쓴다고 해도 그냥 기자다. 직접 실행하는 것이 아니니까. 그렇다면 ‘내가 직접 한번 해봐야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옥천신문은 2010년부터 3년간 옥천군, 사회투자지원재단과 함께 ‘옥천사회적경제함께만들기’라는 공동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정 국장은 당시 옥천신문 프로젝트 책임자를 맡았다. 현재의 옥천순환경제공동체 역시 이 프로젝트를 통해 설립에 이르게 됐다.)

두 번째는 그즈음 한편으로 취재기자로서 내 자신에 대해 한계를 많이 느꼈다. 2014년은 국회의원 선거가 있던 해였는데 선거 이슈와 관련해서 당시 편집국장을 맡은 내가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다는 자괴감이 들었다. 내가 편집국장을 맡기 직전에 선배기자들은 당시 현직 군수 비리를 보도해서 결국 구속시킨 사건이 있었다. 그런데 내가 편집국장을 맡은 다음에 (일부에서) ‘지면이 무뎌졌네’, ‘선배들만 못하네’ 이런 평가를 듣게 되면서 많이 지쳐갔던 것 같다.


** 정순영 활동가는 학습하는 것을 무척 즐거워해 주변을 괴롭게 한다. 사진은 2019년 사회적경제 현장활동가 학습모임 페다고지 참가 모습


활동가로서 6년째 삶을 살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정순영 사무국장의 헌신이 없었으면 지금의 옥천순환경제공동체는 없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다른 조직은 어떤지 모르지만 (사)옥천순환경제공동체에서는 누구도 나에게 ‘헌신성’을 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는 많은 분들에게 사랑 받는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대부분의 회원님들이나 지역에서 만나는 분들이 ‘얼마 받지도 못하는데 열심히 한다’고, ‘참 고생이 많다’고 격려해주시고 위로해주신다.


하지만 옥천순환경제공동체 사정이 어려워져 1년 가까이 전혀 임금을 받지 못하고 ‘투잡’을 뛰면서 활동하던 시기도 있지 않았나?

나는 누가 시켜서 이 일을 하는게 아니고 앞에서 말한 것처럼 활동가로서 ‘하고 싶은게 있어서’ 하고 있다. 누구나 다 자기 직업, 자기 영역 안에서 이루고 싶은 것, 성취하고 싶은게 있지 않나? 내가 너무 이상적인지는 모르지만 월급을 못 받는다고 해서 그런 성취감 같은게 없어지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만, 가족(신랑)에게 미안한 마음이 큰 것은 사실이다. 가족의 호혜가 없으면 지금의 활동이 가능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은 한다. 우리 신랑은 내가 집에 돈 한 푼 안 들고 와도 ‘왜 월급 갖고 오지 않느냐’고 하지 않는다. 엄청 미안함이 있다. 그래서 문득문득 자다 일어나서 ‘돈 벌러 갈까?’ 이런 생각을 하기도 하지만... 이제 20대가 아니라 그런지 투잡은 못하겠더라. (웃음)


도대체 활동가가 뭐기에, 그렇게까지 하는가. 정 국장이 생각하는 활동가는 어떤 사람인가?

영국처럼 시민사회가 발달한 곳에서는 활동가라는 말 대신 ‘조직가’라는 말을 쓰기도 하더라. 활동가란 주민의 욕구를 조직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오만가지 일을 하지만 ‘주민들과 함께 살아가면서 욕구를 조직하는 것’이 활동(가)의 ‘백미’라고 생각한다. 그런 활동가가 없으면 조직에서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어차피 우리는 돈이 있는게 아니니까 뭔가를 하려면 자원이든 사람이든 활동이든 조직해야 한다. 훌륭한 활동가는 훌륭한 조직가라고 생각한다.


6년의 시간이 지나오면서 옥천순환경제공동체는 비영리 민간단체에서 사단법인으로 성장(?)했다. 그 과정에서 활동가의 할 일, 책임은 더 많아졌다. 일이 너무 많아져서 버겁거나 힘들지는 않은가?

2015년에 처음 활동가가 됐을 때는 정말 혼자였다. 야쿠르트 대리점 건물 2층 사무실에서 혼자 일을 했다. 나름 신입직원의 마음으로 9시 출근, 6시 퇴근을 하는데 같이 밥 먹을 사람 하나 없이 일을 했다. 비영리 조직을 어떻게 운영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사람도 없었다. 업무 인수인계 받을 때 공인인증서 하나랑 100명이 넘는 회원 명부가 전부였다.

체계적인 기반이 없다보니 장점도 있었다. 혼자 일을 하다보니 모르는게 생기면 김민희 활동가나 박윤영씨 같이 그쪽 일을 아는 사람들에게 자꾸 묻게 되고, 그러다보니 친해졌다. 농촌지역 작은단체 활동가가 혼자 A부터 Z까지 깨우쳐야 한다는게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런 조건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버텨내는 사람이 필요하다. 이겨내기가 쉽지는 않았던 것 같다.

비영리단체 운영이 익숙해질만하니까 사단법인으로 전환하게 됐다. 물리적으로 더 힘들어졌다는 느낌보다는 아직 할 일이 많이 있는데 다 못하는 것에 대해 늘 안타까움 같은 것이 있다. 지역의 의제를 연구하는 ‘옥동자(옥천동네자치연구소)’도 만들어야 하고 활동가들도 길러내야 하고 이런 저런 할 일이 많은데 준비할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 우리가 다 같이 성장할 시간 같은.


** 정순영 국장의 요즘 가장 큰 관심 중 하나는 옥천 주민 누구나 자유롭게 이용할수 있는 주민 공간을 만드는 일이다. 사진은 옥천읍 장야리에 조성 중인 ‘주민 공동체 허브공간 누구나’ 공사 현장을 주민들과 함께 둘러본 뒤 기념촬영을 한 것이다. ‘주민 공동체 허브공간 누구나’는 행정안전부 공모사업으로 옥천순환경제공동체가 프로그램 운영과 건물 디자인, 설계 전 과정에 참여했다. (사진 왼쪽 빨간 상의가 정순영 국장)


사단법인 전환과 함께 지역사회에서 민관 거버넌스에 대한 요구가 많아지고 있다. 실제 옥천순환경제공동체는 옥천군과 함께 지역사회활성화 기반조성사업이나 인구감소지역 지원사업 같은 거버넌스 사업을 주도적으로 끌어가고 있지만 기대만큼 속도나 성과가 나는 것 같지는 않다.

개인적으로 할 수만 있다면 ‘공익활동’에만 집중하고 싶지만 비판만 하고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지역에서 영향력을 갖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우리는 대안을 얘기하면서 동시에 문제해결 역량이 있는 조직이어야 한다. 실천력을 가지는 조직, 지금은 그런 것을 쌓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이런저런 거버넌스 활동이나 연구활동이 결국은 우리 동네에서 써먹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혹시나 우리의 결과물을 공무원들이 제대로 읽지 않더라도 적어도 우리는 이 동네에 계속 남아 있다. 외부 컨설팅 업체는 사업 끝나면 가버리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다. 저는 그것에 쓰임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많은 활동가들이 번-아웃을 경험하거나 걱정한다. 옥천순환경제공동체도 사무국장 한 사람에게 너무 집중돼 있는 것 같다. 최근에는 건강이 나빠져 의사가 일을 줄이고 쉬어야 한다고 구체적인 조언까지 했는데?

한 사람에게 집중돼 있다는 얘기는 맞는 말이다. 저도 나름대로 저와 함께 할 활동가들을 발굴하기 위해 노력을 많이 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 활동하는 청년 간사 두명과 일을 나누려고 노력도 한다. 하지만 일을 나눈다는게 그렇게 간단한 것은 아닌 것 같다. (** 옥천순환경제공동체는 지난 2015년부터 최근까지 삼선재단과 함께 청년 멘토링 활동 같은 청년 지원 사업을 지속해오고 있다. 현재는 정부의 일-경험 일자리 지원사업을 통해 청년간사 2명을 지원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마을교육공동체나 마을미디어사회적협동조합 같은 공동체 조직, 사회적경제 조직 설립과 지원에도 힘을 쏟고 있다. 옥천순환경제공동체 조직 안에서 함께 할 활동가뿐만 아니라 지역 전체적인 관점에서 함께 할 다양한 분야의 활동가 발굴 및 지원에 노력하고 있다)

올해 사십이 되면서 ‘계속 활동가를 할 것인가’에 대한 생각을 하기는 했었다. 일이 힘들어서 그만두거나 그런 것은 아니고 나이 사십에 사무국장이면 언제까지 사무국장직을 계속 해야 하나 이런 생각을 하게 되더라. 50에도 사무국장을 해야 되나? 뭐 이런 생각... 100세 시대라고 하는데 남은 인생이 60이라고 보면 80까지 산다고 해도 앞으로 40년이 남은 셈인데 사무국장‘만’ 계속 하는 거에 대한 고민, 이런게 생기더라.

원래 나이 앞자리가 바뀔 때는 괜히 큰 의미가 있는 것 같지 않나? 이십대에서 삼십대로 넘갈 때도 한의학과나 의학전문대학원을 갈까 생각을 하기도 했고, 사회적경제를 제대로 공부하기 위해 벨기에 유학을 갈까 생각도 잠깐 했었다. 사십이 되면서 정치를 해볼까 싶은 생각도 들고 제가 넷플릭스 보는 걸 좋아하는데 요즘은 그런 재밌는 드라마 작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저 자신은 되게 밝고 유쾌하게 살고 있는데 의사가 몸이 많이 안 좋아졌다고 쉬라고 하더라. 약을 1년 6개월이나 먹어야 된다고 하던데... 이게 진짜 이제 좀 쉬라는 신호인가 그런 생각도 들고...


드라마 작가가 되고 싶은 활동가의 지금, 이 순간의 고민은 무엇인가?

지역 정치를 뒤엎고 싶다. 정치를 바꿀 수 있는 활동가가 되고 싶다. 지역정치가 주민을 위한 정치가 돼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모든 것의 귀결을 정치로 보는 것은 너무 정치적인 것 아니냐고 할 수도 있지만, 지역의 실질적인 변화를 위해서는 정치가 바뀌어야 한다. 정치를 바꾸는 활동가가 되고 싶다. 하지만 아직은 그 전략이 잘 그려지지 않는 것 같다.

또하나는 우리지역 경제가 사회적경제 방식으로 세팅되고 작동될 수 있으면 좋겠다. 우리 조직 이름이 ‘옥천순환경제공동체’다. 처음 만들 때 취지가 ‘지역을 사회적경제 생태계’로 만들자는 건데 아직 실질적인 진전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는 강박이 있다. 여기에 집중하지 못하고 사회적경제 활동가를 길러내지 못한 것도 큰 아쉬움이다.

하지만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한다. 지금은 우리 단체가 (정치나 사회적경제 활동뿐만 아니라) 오만가지를 하는 시기인가보다 하고 받아들이고 있다. (** 옥천순환경제공동체의 활동 범위는 실로 다양하다.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공익활동은 물론이고 마을교육활동가 역량강화를 위한 연수, 충청북도∙옥천군과 함께 하는 거버넌스 사업 기획 및 추진, 지역의제 발굴을 위한 연구조사, 지역단체들의 네트워크 지원, 사회적경제 의제 발굴 및 단체 설립 지원, 청년 귀촌캠프, 마을신문, 마을라디오 등 마을 미디어 지원 등등)


** 정순영 사무국장의 활동반경은 예측을 불허한다. 사진은 지난 2018년 옥천순환경제공동체 청년 파일럿 프로그램으로 시작한 팟캐스트 제작현장 모습. 소박한 시작한 동아리 활동이 지금은 열다섯명의 옥천 청년과 주민이 조합원으로 참여하는 옥천마을미디어사회적협동조합으로 발전했다. (사진 오른쪽 위 모자 쓴 사람)


그 오만가지 중에 꼭 하고 싶은게 있다면?

우리동네 부자들이 돈을 ‘의롭게’ 쓸수 있도록 견인하는 활동을 한번 해보고 싶다. 지역장학회에 장학금을 주는 것도 좋지만 좀더 다양한 공익활동을 위한 기금을 만드는게 저의 원대한 목표다. 이를테면 동네부자들이 낸 돈으로 옥천사회적경제기금, 옥천동네청년발전기금 같은 것을 만들어 보고 싶다. 지금 제가 하고 있는 일을 다른 사람이 해주면 나는 동네부자들 만나 돈 모으는 일에 집중하고 싶다. 재밌을 것 같고 잘 할 수 있을 것 같다. 누가 제 일 좀 가져가 줄수 없을까? (하하하)

정순영 사무국장은 자신의 활동에 헌신성을 내세우지 않지만 곁에서 지켜본 선배이자 동료, 이웃으로서 그녀의 활동은 지나칠 정도의 헌신성에 기반하고 있다. 나는 가끔 정 사무국장에게 “당신처럼 일하면 그 자리에 다음 사람이 오기 어렵다”고 걱정 반 타박 반의 말을 한다. 하지만 그녀의 말대로 일을 줄이는 것이 어디 그렇게 쉽고 간단한 문제인가? 1인 혹은 소수의 활동가로 움직이는 단체 모두가 겪는 문제 앞에서 조직의 지혜와 개인의 용기가 필요한 시점이 아닌가 싶다.



묻고 정리한 사람 _ 정창영

십년 넘게 지역신문 취재기자 생활을 하다 ‘일’은 많고 ‘재미’는 없어서 그만뒀다. 한량이 되면 시간이 넉넉할줄 알았는데 오히려 그 반대라 경악하고 있는 지금은 ‘마을’과 여러 일을 도모하는 ‘마을형 백수’의 삶을 지향하고 있다. 마을카페, 마을미디어, 마을학교 등 ‘마을’ 이라는 글자가 들어간 일에 유독 흥분한다. ‘모든 공익은 사익에서 출발한다’는 얼토당토 않은 신념을 갖고 있다. ‘내가 재밌는 일’, ‘내가 원하는 일’, ‘내가 필요한 일’을 하다보면 마을과 만나는 지점이 반드시 생긴다 _ 고 믿는다. 선한 사람들의 ‘사익’은 지역 사회의 ‘공익’과 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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