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활동가인터뷰] 조직에서, 또 개인의 삶에서 정체성을 찾아나가는 청년활동가. 내일상회 이혜림

이혜림 활동가(림림)를 처음 만난건 3년전 어느 청년 캠프에서였다. 이제 막 비영리의 세계로 들어서, 폭풍같은 업무에 치여 있었던 나는 같은 고민을 나눌 수 있는 청년 활동가들을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했고, 그곳에서 림림을 만났다. 

나와 같은 나이에 이미 지역에서 3년차 상근활동가로 활동하던 림림은, 강릉생명의숲이라는 환경단체에서 상근활동가로 일하며, 강릉청년공동체 청년나루를 중심으로 지역 활동도 하고 있다고 했다. 당시 림림은 자신이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에 있다고 말했지만, 나에게 림림은 이미 정체성을 확립한 단단한 사람처럼 보였다.

그 뒤 삼일동안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나는 무슨 이야기를 해도 빠져들게 만드는 그의 입담과 캠프 장기자랑 시간에 보여준 진행능력에 탄복했고, 림림을 흠모하게 되었다.

그리고 1년 뒤쯤 이직한 단체에서 그를 다시 만났다. 나는 서울의 조직에서 일하고, 림림은 강릉의 조직에서 일하는 관계였지만. 업무상 종종 만나면서, 언젠가는 더 깊은 이야기들을 물어보고 싶은데 기회를 찾지 못하다가 활동가 이야기 주간을 보자마자 림림이 생각 나 연락했고, 그렇게 그가 친구들과 마을에서 운영하는 강릉의 내일상회에서 인터뷰를 진행하게 되었다.

인터뷰 경험이 없는 내가 림림이 가진 다양한 정체성(여성, 청년, 지역, 환경운동가)을 어떻게 한 인터뷰에 담을 수 있을 것인가 고민하다가, 인터뷰어와 인터뷰이 모두가 30대 여성이고, 환경단체에서 일하는 청년 활동가라는 점 그리고 삶에서의 활동에도 관심이 많다는 공통점부터 출발해 이 인터뷰를 풀어보기로 했다.



** 내일상회에서 만난 림림 


내일상회에 초대해주어서 고맙습니다. 공간이 너무 좋네요. 말로만 들었는데, 생각보다 더 크고 멋있어요! 여기가 어떻게 시작된 곳인지부터 묻고 싶어요. (내일상회 인스타그램)

내일상회는 강릉에서 함께 활동하는 친구들과 마련한 공간이예요. 이름을 듣고 상회라는 단어 때문에, 가게를 연거냐고 주변에서 굉장히 관심이 많습니다만, 여러가지 작당모의가 이루어지는 동네 아지트입니다. 2018년 겨울 즈음에, 이 동네(용지각)에 먼저 자리잡은 동네분 소개로 하나둘씩 모여 살게 되었어요. 처음부터 포남동 용지마을에 자리잡자 하고 계획해서 모인건 아니였구요. 저 역시도 살던 집 계약이 끝나가서 어디로 이사를 가야하나 고민하던 중에 1층에 주인 할머니 혼자 사시는 단독주택 2층에 저 혼자 입주했어요. 같은 시기에 다른 친구도 옆집 2층이 비어서 들어오고, 길 건너서도 다른 친구가 이사 오고... 그렇게 단계적으로 이 동네에 쭉 4팀 정도가 모여 살게 되었답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우리가 사는 동네에 우리만의 색깔을 담은 공간을 고민하게 되었고, 그때 마침 기존에 운영하던 청년공간도 도시계획으로 인해 나가야 하는 상황이었거든요. 집 앞 건물 1층에 괜찮은 자리까지 얻게 됐고, 부족한 자금은 공동체은행 빈고에서 출자를 받아 1년 동안 직접 공사하면서 꾸리게 됐지요. 모든게 물 흐르듯 이어졌어요(!)

이 동네가 아주 매력있어요. 말이 연못에 빠져서 용으로 승천했다는 용지각, 실을 뽑던 마을이라서 잠실, 20년 전에만 해도 옛날 강릉여고에 유학온 학생들이 묵던 하숙집을 운영해서 지금의 게스트하우스럼 작은 방이 많거나 단독주택이 많아요. 현재는 지역 공동화 현상으로 할머니, 할아버지 혼자 1층에 거주하시는 주택들이 많거든요. 저희는 그 2층에 세들어 살고 있구요. 동네가 원도심이다보니 못보던 청년들끼리 모여다니면 ‘뭐 하는 애들인가’ 하는 경계도 있는데, 동네에서 꼬뮨 게스트하우스 사장님 아는 동생들처럼 알려져서 쉽게 적응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것을 증명하듯 내일상회의 테이블과 의자는 청년들의 활동을 애정어린 마음으로 지켜보고 계시는 맞은편 음식점 사장님이 기증해주신 것이라고 했다.)


마음맞는 친구들이랑 옆집, 앞집에 모여 산다니... 꿈만 같네요. 내일상회는 제로웨이스트샵으로 알려져있는데, 그럼 처음부터 제로웨이스트샵을 생각하며 만든 공간인가요?

처음에는 강릉 지역성을 잘 드러내는 일을 하고 싶었어요. 강릉이라는 곳에서 우리만의 역할을 찾자 라는 생각에 지역에서 나는 것들을 전시하고 파는 소품샵 같은걸 생각했어요. 정작 강릉에 사는 우리도 강릉을 잘 모르고, 강릉에 여행을 오는 분들도 많으니까 그 사이를 연결하는 거죠. 지역 작가들이 만든걸 전시하기도 하고, 지역 예술가들과 함께 환경을 주제로 굿즈 같은걸 만들어서 팔고, 한쪽에는 포장재 없이 세제같은 것을 소분해서 살 수 있는 소분샵 코너도 두고요! 그런데 준비를 하다보니 제로웨이스트샵을 메인으로 운영해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제로웨이스트 제품을 소개하는 것도 의미있을 뿐더러, 지역 사람들이 포장재 없는, 제작부터 배송, 사용 이후의 폐기 전과정에서 환경에 영향을 최소화로 미치는 물건을 선택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고 느꼈거든요. 아직 이런 공간이 많지 않아서 소비의 선택권 자체가 없는 경우가 많은데, 우리가 그 선택권을 넓혀주는 역할을 해보자 한거죠.

처음에는 저희도 물건들을 대량구매를 해두고 단가를 낮추어서 팔까 하는 생각도 했었는데, 가격을 계속 낮추기만 하는건, 소비를 장려하는게 될 수도 있겠더라고요. 사실 지금도 쇼핑몰에서 최저가 구매를 한다면 더 저렴하게 살 수 있지만, 약간 더 비싸더라도, 이곳에 오면 포장과 개별 택배 과정 없이 필요한걸 바로 살 수 있고, 비용의 일부가 이 공간을 꾸리고 워크샵을 하는데 다시 쓰이니까, 그런 선순환의 형태를 오시는 분들께 설명해 드리려고 하죠. 물건을 살 때, 나중에 치러야 하는 사회적 비용을 포함하여 정당한 값을 지불하고, 대신 물건에 쉽게 사고 쉽게 버리지 말자라는 문화를 이야기하자. 

또, 강릉 안에서 만들어지는 상품을 발굴하자라는 목표도 가지고 있어요. 지역에서 온전히 생산, 제조, 유통되는 물건은 많지 않거든요. 뱃지도 디자인은 지역에서 할 수 있지만, 제작은 서울에서 하는 구조잖아요. 그래서 올해에는 강릉 안에서 만들어진 상품을 하나 발굴하는 것도 성과겠다 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그게 제로웨이스트샵으로서는 과제인 것 같아요.


** 제로웨이스트샵 내일상회의 모습


환경과 지역에 대한 고민이 느껴져요. 사실 인적 규모나 네트워크가 서울과는 다르다보니 아무래도 지역에서 이렇게 마음 맞는 친구들을 만나기는 쉽지 않을 것 같은데... 내일상회를 함께하고 있는 친구들을 어떻게 만난건지, 어떻게 환경단체에서 상근활동을 하면서도 이런 활동도 하고 있는지가 궁금해요. 저는 퇴근하면 힘들어서 누워있기 바쁜데...

잠시 누웠다가 같이 밥을 먹으면 어떨까요(웃음). 4년 전쯤에 청년나루 활동중에 ‘따뜻한 밥 한끼’라는 밥모임을 운영했어요. 같이 활동하던 대학생 청년 1명이 늘 제대로 밥을 못먹는거예요. 굶거나 라면 하나, 귀찮기도 하고 돈도 없고, 늘 결식상태였죠. 알바해서 학비 정도는 벌어서 지내다가 생활비가 떨어지면 라면 하나로 며칠을 때우는 상황이였죠. 

그런데 그 친구는 돈이 생기면 친구랑 술먹는 데 돈을 씁니다. 다른 세대들은 이해를 못했어요. 그 돈으로 왜 쌀을 안사고 술먹는데 쓰냐(쌀 외에 식재료는 1인 가구가 비용이 더 듭니다). 그치만 그 청년들은 1-2만원이 생기면 친구들이랑 같이 맥주를 마시는게 관계를 맺는 방식인거에요. 조금의 돈이 생기면 친구들이랑 같이 맥주를 마시지 쌀을 사진 않는… 결식 같은 것보다 관계 단절이 더 무서운거죠. 

그래서 밥모임을 시작하게 됐어요. 그때 식생활교육네트워크 팀에서 청년 밥모임으로 지원을 약속받고, 저희가 작정하고 강릉청년 200명 대상으로 사전 설문조사까지 하고, 그 결과를 토대로 식생활 교육 겸 활동을 기획했어요. 청년들의 먹거리 문화, 지역농부님 모셔서 이야기도 듣고, 지역 먹거리와 농업의 위기를 알아가고, 환경관련 영화도 보고, 채식요리도 연구하면서 소소하게 같이 공부할 거리를 찾았죠. 정말 좋았던 건 강사님들이 부모님 세대였는데(거몽님 감사합니다!), 집에서 직접 만든 간장, 매실청 같은걸 바리바리 싸오셔서 청년공간에 다 채워주시고, 쌀도 나눔해주시고, 반찬 만드는 법도 알려주시고… 환대와 지지를 많이 받았어요. 

그 밥모임 10회기가 끝나고, 그 구성원들과 같이 텃밭을 가꾸게 됐어요. 이젠 우리가 직접 길러먹어보자. 초당동에 텃밭을 빌려 퍼머컬처 공부도 하고, 토종 씨앗도 알게 되고... 이렇게 확장이 됐어요. 저는 정선에서 자라서 농사에는 어느정도 익숙했지만, 관행농에 익숙했는데, 그때 대안농에 대해 공부를 하게 된거죠. 사실 동네 분들은 저희가 섞어짓기로 한 농사를 지저분하다고 마음에 들어 하진 않으셨지만요(웃음). 그렇게 자연스럽게 생태주의적 삶에 대해서, 생태민주주의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되었던 거 같아요. 이것도 결과론적으로 물 흐르듯 그렇게 되었어요.

그 시기쯤 여성 활동가들과 마더피스 타로 읽기 모임도 하고, 정현님을 만난 청년 활동가캠프에 가서 전국에서 온 다양한 친구들도 만나면서 1년동안 나름 회복할 수 있는 활동들을 했었던 것 같아요. 저도 모르게 상근 활동을 하며 많이 소진되어 있었거든요. 그러면서 단체 활동으로 채워지지 않은 것들을 더 해야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실제로 제 삶의 일상을 바꾸고, 정체성을 긍정하게 하는 활동들을요. 지금은 구슬을 꿰는 일을 주로 하고 있다면, 앞으로는 나만의 구슬을 만들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었죠.

  

음, 역시 상근활동가로 일하면서, 다른 활동도 하는건 쉽지만은 않은거 같아요. 구슬을 꿰는 일이라는 말이 너무 공감이 가네요. 나중의 나만의 구슬을 만들고 싶다는 것도요. 그럼 림림은 스스로 조금 더 일상적이고, 내 정체성을 찾게 해주는 그런 활동들로 균형을 찾고 계시는군요. 그런데 조직에서는 개인의 활동들을 이해해주나요?(웃음)

다른 분들은 제가 조직에서 일하면서 청년 활동을 한다고 알고 계시는데 정 반대입니다. 저는 20대 중반에 강릉에 아예 ‘지역 청년들과 뭐라도 해보고 싶어서’ 내려왔고 (그는 강릉에서 대학을 나온 뒤 부산, 원주, 서울 등에서 일경험을 했다), 그 활동을 대해 이미 지금 조직의 구성원들이 동의하고 지지해주기 때문에 시작했어요. 그렇지 않았다면 상근 활동가를 시작하진 않았을 거 같아요.

청년나루 활동을 할 때도 사무국에서 많이 지지해주셨죠. 청년모임이나 광주역사기행, 세월호벽화작업 등 청년들이 뭐라도 한다고 후원도 해주시고, 설악산 케이블카 반대활동이나 김성수열사추모제와 같은 지역사회 활동에 같이 참여하고... 같이 일하는 분들이 사무실 동료면서도 강릉에서 시민사회 활동도 함께하는 동료이기도 해서, 일은 많고 힘든 부분도 많지만, 각자가 추구하는 바가 맞아 잘 다니고 있는 것 같아요. 

저는 일하기 전까지 생명의숲 이라는 단체가 있는 줄도 몰랐고, 다만 환경이라는 키워드에 관심이 많았는데, 우연히 놀러갔다가 ‘생명의숲 회원이 되는게 어떤가요?’라는 부장님의 제안을 받고 회원으로 먼저 시작했어요. 당시에 청년활동을 하면서 이런저런 곳에서 일 제안도 받고, 저도 지역에서 시작하는 기반에 대해 고민을 많이 하던 시기에, 생명의숲에서 하는 숲교육은 교육을 전공했던 제가 어느정도 해볼 수 있는 일이고, 누구와 일할 것인지도 중요한데 시민사회에서 만난 좋은 사람들도 있어서 그렇게 생명의숲과 인연이 시작이 되었어요. 


** 내일상회 앞에서


청년활동을 통해 지역에서 알려진 림림을 생명의숲이 데려간거군요!(웃음) 강릉생명의숲은 조직이 작은데, 저도 5명이 안되는 작은 조직에서 일해본 경험이 있지만, 크지 않은 조직에서 청년활동가로 일하는건 어렵더라고요. 더군다나 지역이라면. 림림은 어떻게 단체 활동을 풀어가고 있나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찾기위해 정말 고민과 어려움이 많았어요. 20년이 넘은 단체이다보니 이제 시작한, 경험이 부족한 제가 할 수 있는 일들이 적었거든요. 기존의 큼직한 일들, 작은 지역에서 연대사업이나 관계성이 필요한 일들, 전문성이 필요해서 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활동을 제가 턱 받기는 쉽지 않고 부담도 큰 상황이었어요. 그때는 활동가라는 직업에 기대나 환상이 있는 친구들에게 우스개 소리로 ‘나 영수증 붙이는 일 하는데’라고 말하기도 했어요. 

제가 생명의숲에서 택한 방식은 다른 영역에서 활동하는 사람들과 새로운 집합점을 찾아내는 일이였어요. 나도 이 조직에서 독자적으로 내가 일하는 방식과 내가 일하는 조력자들과 지역 네트워크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생명의숲으로 사람들을 막 초대했어요. 예술인 협업 프로젝트도 진행해보고, 지역 미디어팀이랑 청소년 영상 숲교육도 만들고, 게릴라가드닝, 도시숲퍼 같이 청년들이 올만한 활동을 기획해보기도 하고, 교재나 보고서 등 출판을 할 일이 있을때 동네 독립서점이랑 같이 작업하며 시민들에게 배포하는 등 제 나름의 역할을 찾아왔던 것 같아요. 이제는 래퍼, 설치미술가, 여행작가, 미디어활동가 등 저만의 파트너들이 지역에 생긴거죠. 

생명의숲 안에만 있었다면 활동을 오래하지 못했을 것 같아요. 무엇보다도 내가 여기서 할 수 있는 일이 없구나라고 생각해서 다른 일을 찾아봤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내가 이 단체에서 도움이 충분히 될 수 있을까. 산림전공자도 아니고, 숲교육 경력도 길지 않은데. 세대가 다른 회원분들을 대하는 것도 어렵고... 누구든 시작은 어렵잖아요. 한편으로는 제가 그림이나 디자인, 출판에 관심이 있는데 이곳에서 교재나 교구를 만드는 활동이 재밌으니 생명의숲 활동이 저에게 충족되는 면이 있죠. 

또 생명의숲은 전국 네트워크를 가졌기 때문에 정기적으로 교류회도 하고, 어떤 사업에 따라서는 TF팀을 꾸려 같이 진행하기도 하면서 다른 지역 활동가들과 공통의 의제를 이야기할 수 있는 점도 좋았어요. 지역에 있지만 지역에 매몰되지 않을 수 있는 교류의 기회들, 청년 네트워크 활동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죠! 이런게 맞물렸기 때문에 양쪽 활동을 다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생명의숲에서 활동하면서도 청년활동가의 정체성을 놓지 않으려 했고, 청년 활동을 할때에도 생명의숲 활동가라는 걸 소개하고, 정체성을 놓지 않으려고 했던 것 같아요.



** 인터뷰어에게 강릉드립커피를 내려주는 친절한 림림


지역의 청년 활동가로서 힘든 점은 없나요?

요즘 활동가란 무엇인가 고민이 있어요. 타인에게 호명되는 이름 같거든요. 활동가는 이래야 한다는 활동가다움, 그렇지 않을때 스스로를 검열하는 기준같아요. 게다가 최근에는 지역에서 몇년째 활동을 하다보니까 노출에 대한 피로도가 쌓여 있어요. 시민사회에서 지역 활동을 하는 제 또래 여성이 많지 않기 때문에, 저 역시도, 제가 원치 않아도 필요하면 가서 스피커 역할을 할때가 있어요. 그냥 누군가 해야만 하는 이야기를 제가 그냥 가서 하는 거죠. 괴로워요. 개인적 성향을 생각하면 저는 조력자의 역할이 더 맞는데, 스피커의 역할을 해야하니까 힘든 것 같아요.

이중의 정체성을 가져야할 때도 있어요. 제가 어떤 자리에 가서는 여성, 어떤 자리에선 생명의숲, 어떤 자리에선 청년을 대표하는 사람이 되다보니, 모든게 나긴 하지만... 하라면 하고 말할 수 있는데, 요즘은 딱 끝나면 생각해요. 여기까지다. 빨리 집에 가서 고양이랑 누워있어야지(웃음).

강릉시의 청년정책위원회에서 활동을 하고 있는데요, 그동안 친구들과 ‘청년에게 발언권을 달라, 청년위원을 배정해달라’하고 외쳐왔고 실제로 청년정책이 추진되면서 위원회 제안을 받았을때 저희가 외친 이야기에 대한 책임을 다하기 위해 참여를 시작했어요. 2년째 하고 있는데 거버넌스 활동은 정말 어렵고, 행정과 민간 두 주체가 같이 돌아가기 위해 필요한 요소가 많아서 같이 하는 친구들 모두 많이 소진이 되었어요. 하지만 여전히 잘 마무리하고 싶어요. 제가 청년 정체성은 있지만 더이상 청년의 무엇으로서 호명되고 싶지 않기도 하거든요. 왜냐면 이제는 제 이야기가 아닌데 이야기를 해야될 때가 많아요. 내 의제는 아닌데, 청년들이 이게 필요하다더라 라고 말하는 위치에 자꾸 가게 되고. (예를 들면요?) 이제는 제 우선순위가 좀 다르달까요. 예를 들어 청년주거에 대해 이야기할 때도, 쉐어하우스 만들어서 살래?라고 하면 저는 아니지만 그런 자리에 나가서는 필요하다고 이야기해야하기도 하고 그렇죠.

그래서 같이 할 친구들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더 더 더 하게 돼요. 제가 20대에 시작했는데 30대가 되면서, 우리들의 삶의 과정이 달라지잖아요. 그래서 같이하던 친구들이 지역을 떠나기도 하고, 또 어떤 친구들은 이 시기에 결혼을 하고, 육아휴직을 하기도 하니까, 독박 육아에 갇혀 있고(웃음).

제가 20대 후반에 처음 생명의숲에 왔을 때, 지역에 단체 청년활동가라고 할 수 있는 친구들이 5-6명은 됐는데, 5년이 지난 지금은 저처럼 네트워크 활동까지 하는 친구는 2~3명 정도 밖에 되지 않아요. 그렇다고 조직에 청년이 없냐구요? 아니예요. 다른 동료들은 조직에 소속되어 있지만 실무자, 담당자, 책임자, 간사 인거지 실제로 시민사회 내에서 자신의 역할을 활동가라고 부를 수 있는 기회가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활동가 다움을 요구할때의 활동가로 불리지 않고, 스스로 활동을 위한 기반을 가진다면 강릉의 시민사회도 분명 달라질 거 같아요. 조직에서는 청년들이 오길 바라고, 네트워크 활동을 하기를 원하면서도, 너무 조직 밖으로 나가는건 싫어하는 것 같고. 일을 할때는 일반 회사에서 일하는 사람처럼 일하기 원하면서도, 마인드는 시민단체 활동가이길 원해서 무언가 연차나 처우를 얘기할 때는 그런걸 따지면 이런 일 못한다고 하고. 그런 이중적인 기준이 청년 활동가들에게 가혹하게 적용되는 것 같아요. 그 친구랑 여성활동가 모임을 만들려고 준비하고 있는데, 지역의 단체에서 일하는 청년들을 모으고 싶어요. 

청년 활동을 하면서 주변에서 ‘왜 이렇게 청년 이야기를 해?’’라고 할 때가 있었어요. 저는 그럴 때 ‘나는 청년 외에 다른 정체성에 대해서도 늘 이야기한다. 그리고 지금 이걸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의 삶에서 다른 이슈가 생겼을 때, 똑같이 그 정체성에 대해서도 계속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될거다’라고 말했어요. 제가 예전에 ‘저의 청년 운동의 궁극적인 목표는 탈청년이다!’라는 얘기도 많이 했었는데, 그런것들이 다 같은 맥락에 있는 것 같아요. 

내일상회 얘기 잠깐 해도 되요? 제가 청년 활동도 하고, 여성 운동도 하고, 환경단체에서 상근자로 일도 하고 있잖아요. 이정도 활동하면 제 삶이 당연히 생태적이고 정서적 안정이 이어져야 하는데, 제가 외치는 선언과 제 일상 사이에는 굉장히 괴리감이 커요. 숲에서 열심히 나무 심고, 저녁에 배달의 민족 시켜먹는 그런 20대를 보내면서 달라지고 싶었어요. 그래서 내일상회를 하는 지금 삶이 완전히 달라졌냐고 물으면 그건 절대 아니예요. 이제 저는 겨우 제 일상을 바꾸는 운동을 시작한 첫 걸음이거든요. 혼자서는 절대 못하고, 동료들의 지지와 환대가 필요해요. 


** 닮고 싶은 림림의 밝은 에너지


그동안 쉽지 않았을텐데, 림림은 참 단단한 사람처럼 보여요. 그래서 궁금한건데,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서 림림은 어떤 계기로 활동가가 되었고, 어떻게 활동가로서 정체성을 찾았던 건가요?

독립영화 혹시 좋아하세요? 제가 20대 초반에 강릉씨네마떼끄라는 독립영화단체가 강릉시영상미디어센터에서 상영회를 열었는데, 그때 처음 독립영화를 봤어요. 그 영화가 황윤 감독의 ‘어느 날 길 위에서’였던 거 같아요. 로드킬 문제를 다룬 영화였어요. 다큐멘터리, 독립영화라는 장르에 완전 빠졌고 스크린을 통해 다양한 세상을 만났어요. 무엇보다 영화를 찍은 감독과 배우와 만나는 GV는 영화 밖의 사람과 세상을 연결해주는 시간이여서 정말 완벽했어요. 

정동진독립영화제 자원활동가도 하고, 씨네마떼끄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다양한 사회문제를 독립영화를 통해 접하게 됐어요. 독립영화 주제들이 그렇거든요. 작은 동네에 살 때는 알지 못했던 노동권이라던가, 인권, 환경문제, 여성문제, 동물권 같은 의제를 처음으로 영화를 통해 만나게 되었어요. 스크린 너머 현장에서 직접 사람들과 관계 맺기 시작한건 세월호 참사 이후였어요. 저는 스스로 세월호 세대라고 생각하거든요. 2014년 당시 세월호 추모벽화 작업을 하며 사회 문제에 직접 목소리 내는 친구들을 만났어요. 그림을 그리고, 추모하는 글을 읽고, 영화를 함께 보고, 진실을 규명하는 부스를 운영하며, 다양한 형태의 참여와 어딘가 나타나서 홀연듯 사라지는 사람들. 강릉에서 시민운동하는 다양한 팀도 알게 되었고, 같이 기억하고 추모하는 시간을 보냈어요. 세월호추모 등반, 길 걷기, 현수막 활동 등을 매주 열면서 그 시기를 같이 보냈어요. 안산에도 가고, 팽목항에 가고… 

그런데 어떤 시기가 되면 자기 자리로 돌아가잖아요. 그렇게 우리도 열정적으로 함께 활동하다가 흩어지는 시기가 왔고, 저희도 홀연듯 돌아갔어요. 그런데 결코 전과 같지 않았어요. 이후에도 우리는 모여서 밀양에도 가고(밀양 송전탑 투쟁), 제주에도 가고(제주공항 반대투쟁),속초에도 가고(설악산 케이블카 반대투쟁) 전국의 연대 현장에서 다시 만나고, 서울에서 순천에서 원주에서 부산에서 지역 활동가들을 만나고 자유롭게 다녔어요. 그때 느낀 게  ‘아 우리 세대는 어디에 사는게 중요하다기보다 어떤걸 지향하는지가 중요하구나, 우리는 이리저리 움직이는게 청년들의 특성이구나’라는걸 깨닫게 되었던 것 같아요. 

그러면서 강릉에 구심점을 가진 친구들이 ‘돈은 적당히 벌더라도 재밌게 살고 싶으면, 우리가 너의 기본소득을 만들어줄테니 같이 강릉에서 활동하자!’라는 별난 제안을 했고, 예쓰를 외치고 강릉에 정착하게 되었어요. 기본소득을 받을 생각이 없었지만(웃음), 이런 말을 하는 친구들이라면 뭔가를 같이해도 좋겠다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지금 생각하니 당시 기본소득제를 제안한 친구들이 대단하고 참 고맙네요. 

   

독립영화단체 활동이나 세월호 추모활동이 어떻게 보면 인생의 터닝 포인트였던 거군요. 신기해요. 그때는 그게 인생의 많은 길을 바꿔놓을 거라고 생각 못했던 일들이었을 텐데 말이에요. 저도 그런 경험이 있고요. 본투비 활동가인줄 알았는데, 성장형 활동가였다니!(웃음) 마지막으로, 림림은 가까운 미래에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나요?

궁극적으로 생태전환마을에서 사는게 목표인데, 그러려면 굉장히 많은 기반과 철학과 공부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같이 활동하는 친구들에게도 계속 물어봐요. 강릉에서 계속 살거야?하고. 그치만 지금 2-30대의 미래는 확정짓기 어려우니까… 

내일상회를 만든 배경도, 여기서 생태주의책모임, 강연회, 워크숍, 장터 같은 것을 하는 것도 사실 그런 맥락에서 있어요. 보통 소규모로 여는데, 그래도 매번 꼭 한두명씩 새로운 얼굴들이 만나거든요. 저는 내일상회가 이렇게 사람들을 연결해주는 공간이기를 바라요. 사실 지역에서는 환경문제나 기후위기 의제가 큰 이슈가 되지 못하거든요. 그래서 더욱 이런 문제에 관심있는 사람들과 연결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고, 이 공간이 우리를 연결시켜줄 수 있기를 바라고 있어요. 기후위기든 어떤 재난의 상황이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영향을 주진 않잖아요. 소외된 사람들은 더 큰 피해를 입기 마련이죠. 

그래서 이 공간이, 특히 그런 위기의 상황이 왔을 때 도미노처럼 우리를 연결시켜줄 수 있는 공간이길 바라고 있어요. 요일마다 친구들이 돌아가면서 자신만의 상회를 운영하고, 빈고 조합원들도 이곳을 이용하고, 다른 지역에서 활동가들이 강릉에 왔을 때 만날 수 있는 공간하면서 생태 커뮤니티 공간으로 자리잡아 갔으면 좋겠어요. 


** 평소 자전거로 출퇴근을 한다는 림림과 남대천 해변까지 드라이브


지난해부터 내일상회의 협동조합 인가를 준비해오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우리는 자전거를 타고 강릉초당순두부 아이스크림을 먹으러 나섰다. 멀리서 왔다며, 강릉의 관광코스까지 구경시켜주는 친절한 그. 항상 씩씩한 모습만 보아와서 그랬는지, 매번 어려움을 소화하고 있었다는건 잘 몰랐다. 

림림도 나도, 삶에서 소진되지 않기를 바라기보다 소진되었을 때, 그때를 잘 알아차리고 다시 나의 궤도를 찾아나갈 수 있기를, 그런 현명한 방법을 많이 찾을 수 있기를 소망해본다. 모든 청년 활동가들이 자신만의 구슬을 만들어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인터뷰 진행  정현(junglee327@gmail.com)

6년차 고양이 집사라는 정체성 외에 다른 정체성은 아직 찾지 못한 고민 많은 환경단체 활동가

활동가이야기주간2020 프로젝트의 '활동가인터뷰 공모 지원사업'으로 진행한 인터뷰입니다.



#이혜림 #강릉 #이정현 #생명의숲 #환경 #청년 #젠더 #미디어 #문화 #활동가인터뷰공모 #강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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