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활동가인터뷰] 불씨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 안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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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옥계에서 산불을 끄고 내려와 찍은 마스크 (사진: 안창영 페이스북)

 

식목일을 하루 앞둔 2019년 4월 4일 저녁, 강원도 고성에서 산불이 났다. 도로변 전신주에서 갑자기 튀어 오른 불꽃이 하필 몰아닥친 강풍을 타고 주위에 옮겨붙은 것이다. 소방대가 곧바로 달려갔지만, 초기 진화에 실패하면서 불은 순식간에 고성군과 속초시 전역으로 확산했다. 이 화재로 밤사이 두 명이 목숨을 잃고 11명이 다쳤으며, 인근 주민 4천여 명이 긴급 대피했다. 그리고 1,700여 헥타르에 달하는 산림과 각종 시설물이 전소했다. 

같은 날 새벽, 안프로(안창영)의 페이스북에 영상이 두 개 올라왔다. 불길을 피해 도망가도 시원찮을 그 시점에 운전대를 잡고 무섭게 튀어드는 불꽃을 헤치며 달려들어 가는 장면이었다. 공교롭게도 고성에서 화재가 발생하고 몇 시간 안 되어 남쪽으로 100km 정도 떨어진 강릉 옥계에서도 산불이 난 것이다.

강릉의 조용한 해변에서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는 안프로는 손님이 거의 없는 주중에는 생계를 위해 산림청 특수진화대로 일한다. 산불이 나면 도심에서 사용하는 소방장비나 시스템이 무용지물이라 사람이 일일이 산을 타고 다니며 직접 불길을 잡아야 한다. 이 임무를 맡는 특수진화대는 일당 10만 원에 10개월 계약으로 일하는 비정규직으로, 변변한 진화 장비도 없이 천 오백 원 짜리 일회용 마스크 하나 쓰고는 말 그대로 몸을 던져 산불을 끈다.

이번 화재가 워낙 갑자기, 급격히 커진 만큼 피해 상황이나 소방대원의 안위에 세간의 관심이 쏠렸다. 그러면서 특수진화대의 존재도 조금씩 알려졌다. 그러다 보니 이틀 후 옥계에서의 임무를 마치고 무사 귀환한 안프로가 다시 올린 특수진화대 작업에 관한 짧고 담담한 글은 소셜미디어에서만 아니라 여러 언론의 주목을 받으며 화제를 일으켰다. 며칠 후, 산림청은 특수진화대를 무기계약직으로 전환하는 방안을 내놓았다.

 

* 안프로의 페이스북 글로 재구성한 SBS의 뉴스 클립. 2019년 4월 10일.

 

나는 안프로를 만나보기로 했다. 활동가의 삶이라는 주제와 안프로의 삶이 굉장히 다양한 경로에서 만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그를 보았던 건 2014년 무렵, 종종 교류하던 만화가 김성희와 함께였다. 서울에서 독립영화 감독과 미디어 활동가로 십년동안 활동해온 그는 그즈음 강릉으로 돌아가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한다고 했다. 쉼이 필요한 활동가들이 언제든 찾아올 수 있도록 바닷가 너른 집 한 채를 얻어 1년 동안 천천히 구석구석 손수 꾸몄다.

그때는 그냥 아, 영상 관련 일을 해서 안프로(PD)구나, 하는 정도였다. 낯을 가리는지 말을 많이 하지도 않고 조용히 자리를 지키는 그와 기억에 남을 만한 대화를 나누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2018년, 만화가 김성희가 신작 [너는 검정](창비)을 출간했는데, 강렬한 표지에 등장하는 인물이자 책의 주인공인 창수가 바로 안프로였다. 

 

너는 검정, 그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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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란과 호기심, 반항의 에너지가 느껴지는 얼굴이다. 스치듯 만났을 때는 찾아보지 못했던 얼굴. 1980년대 강원도 정선의 작은 탄광촌을 배경으로 하는 [너는 검정]은 천진한 사고뭉치 시골 아이가 성장통과 시대의 아픔을 동시에 겪으며 마음에 굵은 생채기를 더해가는 과정을 담담히 보여준다. 공부는 곧잘 하면서도 좁은 고향 동네와 억압적인 고등학교가 싫었던 주인공 창수는 어느 날 학교에서 교사들의 비리를 발견한다. 친구들을 설득해 수업 거부 운동을 벌이지만 맥없이 실패하고, 운동을 주도했다고 ‘빨갱이'로 몰려 퇴학을 당할 위기에 처한다. 사북 항쟁의 여파가 생생하던 당시 빨갱이라는 낙인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무서운 것이었다. 홀로 고민하던 창수는 결국 남몰래 기차를 타고 고향을 떠난다. 


아직 스무 살도 안 된 '빨갱이'이자 '가출 미성년'이 된 창수는 그 후 어떤 삶을 살아갔을까? 강릉 독립예술극장 신영 로비에서 안프로와 마주앉자마자 나는 창수에 관해 물었다.

 

책 속의 창수와 안프로는 동일 인물인가요? 

“뭐, 몇 가지 에피소드가 섞여 있긴 하지만 거의 제 이야기긴 해요.”

 

그럼 고향을 떠나 어디서 어떻게 지내셨어요?

 “서울 갔다가 공장 가서 일도 하고, 별별 거 다 했죠. 안 해본 일이 없을 정도로 많이 해봤어요. 일용직도 해보고. 처음 갔을 때는 꼼장어 지갑 공장에서 본드 칠하고. 그다음에는 봉제 공장 가서 일하고. 유흥업소 가서 술잔도 나르고. 스탠드바에서 조폭들 양말도 빨고..”

 

무슨 영화에 나오는 이야기 같은데요? 그렇게 지내기 괜찮았어요? 

“어릴 때 생각이 별로 없잖아요. 철이 없달까. 그러니까 뭐 친구들과 휩쓸려서 자유롭고 좋았죠. 고생은 되는데. 광산촌에 살아본 사람들은 그랬을 거예요. (제가 자란 곳처럼) V자로 패인 협곡, 그런 좁은 데서 살면 말이에요. 중학생때부터 가출하는 사람들 있고 고등학교 때 거의 3분의 1은 가출한다 봐야 해요. 처음에 우리 반 67명인가 그랬는데 졸업을 열 여덟 명인가 했나.”

 

나만 너무 동떨어진 그런 느낌은 아니네요. 

“그렇죠. 그래도 그런 건 있어요. 항상 뭔가 처음에 저지를 때 그 부담감이 있잖아요. 남들 다 학교 다니는데 나만 학교를 그만두게 되니 뭘 해얄지 몰라 부담감이 컸어요. 그런데 서울 가서 먼저 가출한 친구들 만나서, 광산촌이 아닌 다른 공간에 있으니까 처음에는 그 자체가 자유롭고 좋았죠.”

 

그때부터 거의 끊김 없이 한 시간 가까이, 그 ‘자유롭던 시절'에 관한 이야기가 쏟아져 나왔다. ‘안 해본 일이 없을 정도로' 온갖 일을 하며 떠돌아다닌 그 시간. [너는 검정]의 후속편이 또 한 권 나와야 할 듯한 사연이 그득했다. 나는 때론 놀라고, 때론 한숨을 쉬면서 한 단어도 빠트리지 않고 귀에 담으려 애썼다. 오랜 시간 내가 만나본 활동가 중 손꼽을 만큼 곡절 많은 성장기를 거친 안프로의 내면을 감각적으로 이해하고 싶었다. 

 

대들고, 질문하고, 저항하다

 

듣고보니 과연, 그에게는 어떤 기질이랄까 열정이랄까 그런 것이 항상 내재했다. 눈 앞에 펼쳐진 부당한 상황에 질문을 던지고 저항하는 태도 말이다. 지갑 공장에서는 주말에 휴일을 주지 않아 무단으로 이탈했다가 매를 드는 사장에게 대들다 쫓겨났다. 일을 시작한 지 한 달도 안되어서였다.

그다음에는 성남의 한 봉제 공장에서 인형 배에 솜 넣는 일을 했는데, 작업이 너무 지겨운 데다 매일같이 야근하는 게 너무 싫었다. 그러다 우연히 서점에서 들춰본 노동법 해설서에서 근로기준법이란 걸 발견했다. 야근이고 임금이고 원래 그래야 하는 줄만 알았던 많은 것들이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걸 알게 되었다. 민주화운동과 노동자 대투쟁의 열기가 끓어오르던 그 시절, 안프로는 주말에 친구들과 사절지에다 임금인상을 포함해 스무 개가 넘는 요구사항을 적어 대자보를 준비했다. 월요일 오전 조회가 끝나자마자 앞에 나가서 대자보를 붙였고, 그 순간 수백 명이 밤낮없이 바삐 일하던 공장은 돌연 가동을 멈추었다.

경력도 제일 짧고, ‘나이도 어린 것들'이 갑작스레 저지른 이 일에 먼저 호응한 건 역시 또래 여성이 대부분인 미싱부였다. 평소 부당하다고 생각만 하던 걸 누군가 말하고 나서니 금세 공감대가 형성된 거다. 반면 중년 여성이 대부분인 완성부는 파업을 거부하고 자리로 돌아가, 나중에는 대체 인력으로 투입되기도 했다. 그래도 미싱부 인원이 절반이 넘을 정도여서 파업은 깨지지 않았다.

 

“일단 파업에 돌입하는 데는 성공했는데, 아무것도 모르니까. 프로그램도 없고. 하다못해 그 흔한 노래조차도 모를 때여서 뭘 해야 될지 몰랐어요. 그런데 미싱사들은 자꾸 와서 물어보고. ‘야, 이제 어떻게 해? 뭐 해야돼?’ 그래서, 그냥 퇴근 때까지 일하지 말고 쉬라고만 지침을 주고 친구들 넷이서 공장 정문 앞에 앉아 담배만 뻑뻑 피워댔어요.”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저질렀다. 교사들의 부정을 고발하고 수업 거부 운동을 벌였던 고등학교 때와 다르지 않은 그의 모습. 하지만 쫓기듯 고향을 떠나야 했던 그때와 달리 이번에는 뜻밖의 상황이 펼쳐졌다. 경찰서에서 형사가 찾아와 용돈을 건네고 간부들이 찾아와 밥을 먹여도 안 되니 회사는 결국 일주일이 채 지나지 않아 두 손을 들었다. 대자보에 써 붙인 요구사항을 모두 들어주고, 심지어 파업을 주도한 이 대 책없는 젊은이들에게는 급여 외에 금일봉까지 챙겨주었다. 처음에 파업을 반대하고 대체인력으로 일하기까지 했던 완성부 노동자들도 똑같은 혜택을 받고, 알고보니 참 장하다며 이들을 추켜주었다. 대단한 성공이었다.

 

“근데 한 두 달이나 더 다녔나. 금방 그만뒀어요. 일이 힘들기보다 일할 마음이 없으니까. 그 나이 때, 질풍노도의 시기니까 뭔가 다른 거 하고 싶고. 봉제공장은 먼지 엄청 많고 뽀대도 안 나고 어린 나이에 멋있어 보이지도 않고. 그래서 돈 5만 원씩 더 준대도 아침저녁으로 소주 사 먹고 기숙사비 내고 뭐 하면 금방 다 없어지고.”

 

그래서 좀 더 멋있어 보이는 유흥가로 갔다. 성남에서 제일 잘 나간다는 조직폭력배들이 운영하는 스탠드바에서 술을 나르고 청소를 했다. 

 

“사람들이, 어른들이 술 먹으면 천태만상. 별별 사람들이 다 있잖아요. 그걸 보다 보니 나도 덩달아 어른이 된 거 같고. 영업 끝나고 아침에 길가에 입간판 들여놓으려고 나가보면 내 또래 애들이 학교 가려고 버스 기다리고 있어요. 나는 어른이 되어 가는데 쟤들은 학교에 묶여있구나. 사는 세계가 다르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 일은 오래 하셨어요? 

“오래는 안 했어요. 갑자기 군대 가야 된다고, 영장 나왔단 연락이 와서 집에 갔죠. 그 사이 가족들이 정선에서 강릉으로 이사를 했는데 그것도 모르고 집에 갔더니 다른 사람이 살고 있더라고요. 시외 전화 걸려면 DDD가 필요하던 때라 평소 연락도 거의 안하고 지냈거든요. 물어물어 강릉으로 찾아가 가족들 만나고, 입대했어요. 저는 중졸이니까 현역으로 못 가고 방위로 가야 해서 집에서 출퇴근했죠. 그런데 군인이 되어서 대학 다니는 고참들도 보고 그러니까 제게 뭔가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질감이 느껴지더라고요. 사는 방식 자체가 다르구나 싶은. 

제대하고 나오니 친구 중에는 아예 조폭 똘마니처럼 일하는 애도 있고 한데, 나는 이제 그걸 하기가 싫더라고요. 그렇다고 딱히 수가 있는 것도 아니고. 옛날에는 멋있다고 생각한 그 생활이 아무것도 아니더라고요. 친구들 꼬드겨서, 이거 계속 이렇게 살다가 재수 없어 칼 맞아 죽지 않으면 다행이고, 계속 있으면 안 된다 설득해서 다 같이 그만뒀어요.”

 

그 후에도 안프로와 친구들은 곧장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어쨌거나 먹고 살겠다고 사업도 해봤다가 일용직도 해봤지만, 결국 모든 의욕을 잃고 지하 월세방에서 폐인 생활을 몇 달이나 하는 등 온갖 우여곡절을 겪은 후에야 겨우 자신과 친구들을 설득해 집으로 가는 버스에 오를 수 있었다.

 

다시, ‘일반인'의 삶을 꿈꾸다

 

“고졸이라는 게 사회에서 묘한 커트라인이었어요. 군대도 그랬고. 한번은 기술을 배워보고 싶다 생각했어요. 방송용 카메라. 친구가 그걸 가르쳐주는 학원이 있다고, 관심 있으면 배워보면 좋지 않겠느냐길래 알아봤는데 수강 자격이 고졸이상인 거예요. 그러니까 안되는 거예요. 뭘 하든 고등학교는 나와야 되는구나. 그래서 검정고시를 봤죠. 그런 다음 입시를 준비했어요. 학력고사가 수능으로 바뀌어있더라고요. 강릉대학교 국문과에 들어갔어요.”

 

왜 국문과였어요? 글을 쓰고 싶었나요?

“그냥, 한글은 읽을 줄 아니까. (웃음) 사실 국립대가 학비가 제일 싸기도 했고요. 전공도 전공이지만, 그보다는 대학을 가는 것 자체가 중요했어요. 고등학교 이후로 뭔가 일탈하고 있다는 생각이 항상 들었는데 나도 보통 사람들처럼, 남들 가는 큰길에 나도 같이 가보고 싶다. 그런 마음이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꼭 그렇지도 않은데 그때 나름대로는 치밀하게 계산을 했죠. 내 또래들과 비교해보면 고등학교 졸업하고 대학 가서 군대 가고 졸업하고 1, 2년 정도 사회 생활하니까, 내가 지금 대학가서 졸업하면 스물여덟. 그러면 스물아홉 서른 돼서 취업하면 그 공백을 따라잡아 일반인의 대열에 낄 수 있겠구나.”

 

일하면서 만난 사람들도 어찌 보면 일반, 보통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그렇죠. 사실 보통이라는 것도 없는 건데. 계속 뭔가 내가 이탈되었다는 생각, 사회적 압박. 그런 게 컸나 봐요.”

 

그래서 대학 가서는 열심히 취업 준비 하셨어요?

“아뇨. 가자마자 바로 학고(학사경고) 받고. 못된 친구들 꾐에 빠져서 학생회 활동하고 그러느라.. (웃음)”

 

어린 빨갱이’에서 결국은 돌아돌아 대학 운동권으로 가셨군요.

“대학에서 철학 공부하고 세미나 하고 그러면서 알았어요. ‘아, 성남에서 내가 겪은 그게 이거였구나.’ 학교 친구들은 책만 봤고 나는 직접 일해본 사람이니까 질문도 많이 받았죠.”

 

그때 바라본 세상은 어떻게 달랐나요?

“지금도 그렇겠지만, 그때도, 나이는 더 먹었어도 생각에는 여전히 한계가 있었던 것 같아요. 사람이 사실 대의명분이 아니라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에서부터 뭔가 시작하고 나중에 거기에 명분을 붙이잖아요. 대학 때 사람들과 얘기하고 노동 관련해서 세미나도 하면서 특히 가난, 빈곤 이게 사실은 제일 관심 가는 주제였어요. 우리 집안 자체가 광산촌, 그랬으니까 가장 밀접하고요. 아무리 자유를 찾아 도시에 가서 공장일하고 그래도 항상 저임금에 장시간 노동을 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가난한 사람들이. 그랬는데 대학 가서 마르크스주의 배우고 착취의 구조 그런 거 보는 순간 확 다가오더라고요. 그동안 답답했던 원인을 알겠고. 그렇게 방향성이랄까 세계관 같은 게 싹 바뀌니까 진짜 뭔가 개인의 삶에서 큰 변곡점 같은 게 생긴 거죠. 세상을 보는 눈 자체가 달라졌어요.

그런데 그것도 참, 과도하달까. 골방에 모여서 세미나 하다 보면 막, 세상을 엎을 것처럼, 나가면 변혁운동사에 뼈를 묻겠다는 그런 각오도 다지고. 그랬지만 막상 사회 나오니까 세상이 또 참, 뭐랄까. 제 생각보다 훨씬 복잡하고, 운동도 그렇고. 그렇더라고요. 그 속에서 제가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역할? 그게 뭘까 생각했던 거 같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그렇게 안프로는 다시 한번 ‘보통 사람들'의 삶에서 이탈하기로 했다. 이번 이탈은 더 이상 누군가에게 떠밀려서도 분노를 주체못해서도 아닌, 길고 깊은 성찰을 통해 온 마음으로 선택한 길이었다. [너는 검정]을 그린 김성희가 ‘작가의 말’에 썼듯이, 안프로는 이제 성장한 창수가 되어 스스로 창수들의 울타리가 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창수처럼 학교를 이탈하든, 살던 커뮤니티를 이탈하든, 한국을 떠나든, 거침없이 이탈할 수 있으면 좋겠다. (중략) 사회에 염치가 있다면, 이탈자들은 조금 불편하더라도 불행해지지는 않을 것이다. 대책 없이 집을 나선 창수들에게 사회가 울타리가 되어줄 수도 있지 않을까.” (작가의 말, [너는 검정], 김성희, 창비,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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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터뷰 당일, 강릉 독립예술극장 신영 로비에서. (사진: 김성희)

 

현장을 누비는 미디어 활동가가 되다

 

'성장한 창수'의 울타리 치기는 주로 영화, 영상을 매개로 진행되었다. 대학을 다니던 중 영화 관련 비영리단체 <강릉시네마떼끄>를 만나 활동에 결합했고, 올해로 21회를 맞이한 <정동진독립영화제>의 시작과 성장을 함께 도모했다. (인터뷰를 진행한 신영극장은 바로 강릉시네마떼끄가 시민들과 함께 되살려낸 지역 독립예술영화 전문 극장이다. 그날 저녁에는 518을 다룬 다큐멘터리 [김군]의 GV가 예정되어 있었다.) 졸업 후에는 대학 때 하던 노래패 활동을 하다가 생업 삼아 지역 방송국의 외주 제작 일을 했고, 소록도로 가서 독립 다큐멘터리 제작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러다 2005년, 드디어 진짜 하고 싶은 일을 찾았다.

 

“다큐멘터리 작업을 한창 하던 와중에 울산 현대차 5공장에서 비정규직 파업이 시작되었어요. 다른 감독들과 현장 활동가들을 만난 자리에서 우리 뭐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하다가 팀을 꾸렸죠. ‘비정규직 완전 철폐를 위한 영상 프로젝트팀’, 줄여서 비철팀. 그때는 뭐 이름을 길게 만들기 좋아했던 모양이에요. 참세상(진보적 미디어를 표방하는 인터넷 언론사)이 막 출범하던 때예요. 울산뿐 아니라 전국적으로 영상 활동하는 친구들, 노동넷, 참세상 등등 결합해서 활동하는데, 그때 제가 하고 싶은 걸 찾았어요.”

 

다큐멘터리도 하고 싶은 일이지 않았어요? 

“감독마다 성향이 다르겠지만, 저는 촬영하면서도 하고 싶은 말이 과도할 만큼 차오르는데 막상 제작하고 보면 이것밖에 못 했나 하는 느낌이 들었어요. 찍는 것만 아니라 그 후에도 다듬고 하는 기간이 1년도 짧죠. 그렇게 몇 년 들여서 만들어도, 말할 기회도 별로 없어요. 해봐야 영화제 한번 틀고. 그러니까 소통할 공간이 별로 없는 거예요. 성격 급한 놈이 빨리 뭔가 하고 싶은데 잘 안 되는 거죠. 그런데 비철팀 할 때는 어디서 투쟁하면 바로 가서 기록하고 편집해서 참세상에 속보 영상을 올리면 금방 반응이 오니까 그게 저한테 딱 맞더라고요. 그래서 아예 참세상 영상기자로 결합했어요.

2년 동안 영상을 3~4백 개 만들었어요. 거의 매일 나가서, 퇴근도 안 하고 거기 살았거든요. 외대 앞(서울 동대문구)에 집을 얻어놨었는데 퇴근할 시간이 없더라고요. 계약을 1년 해놓는 바람에 월세만 꼬박꼬박 냈죠.”

 

활동비는 받으셨어요?

“참세상에서 월 30만 원 나왔어요. 그래도 뭐, 밥 같이 해 먹고 잠은 사무실에서 자고 그랬으니까. 참세상 있는 동안 저는 너무 좋더라고요. 내가 드디어 해야 할 일을 찾은 거 같고 스스로 하는 게 만족스럽고. 바쁜 것도 있고 사람들하고 같이 있는 게 소속감 느껴지는 것도 좋고.”

 

같은 카메라인데, 다른 세상을 보는 거군요.

“단지 뭘 알리고 그런 거야 기본적인 건데, 현장에 카메라를 들고 가면 확실히 다른 게 있어요. 경찰이나 구사대와 대치하고 있거나 그럴 때 아무도 기록해주는 사람 없으면 싸우는 당사자들은 불안하고 힘들잖아요. 거기 카메라가 같이 들어가 있으면 달라져요. 사람들이 굉장히 힘을 내고 그러니까, 그냥 촬영만 하고 그런 게 아니라 이 사람들하고 교감하고 그런 게 있는 거예요.

나중에는 뭐, 현장 촬영하러 갔는데 파업 프로그램한다고 분임토의에 들어가라고도 하고, 또 어디서는 경찰 침탈 막느라고 바리케이드 쌓고 있을 때 옆에서 열심히 찍고 있으려니까 조직국장이 와서는 지금 같이 바리케이트 안 쌓고 뭐 하냐고. 그래서 아, 예, 그러고 같이 바리케이드 쌓고 또 촬영하고 그랬어요. 그러니까 같이 싸운다는 느낌이 있는 거죠, 현장에서는. 처음부터 그런 관계가 형성된 건 아니고 계속 활동하면서 신뢰가 쌓인 거죠.”

 

그리고 2013년까지, 거의 십 년 동안 그는 현장을 누비는 미디어 활동가로 살았다. 

 

활동은 밑불 때기 같은 것

 

활동가라는 존재에 관해, 어떤 일을 하고 어떤 현장에 있는지 정도로만 관념이 고정되는 경향이 있다고 느껴요. 미디어 활동가로서는 아무래도 옆에서 지켜보는 역할을 주로 하게 될 텐데요. 그런 고민을 어떻게 풀었을지 궁금해요.

“술자리에서 간혹 질문을 받곤 했어요. 안프로는 왜 이 활동을 하느냐고. 저는 베이스가 영상이니까 할 수 있는 걸 했던 건데, 먹고 사는 걸 해결하는 알바가 되기도 하고. 그렇지만 기본적으로 내가 하는 활동은 밑불 때기 운동 같은 거라고 대답했어요. 불씨가 안 꺼지게. 그 얘길 처음 한 게 비철팀 하다가 동력이 조금씩 빠지면서 미디어문화행동이라는 걸 새로 만들 때였어요. 비철팀을 계속 운영하는 게 맞냐, 아니면 정리를 하고 갈까. 그때 저는 나중에 새로 이런 걸 만들려면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하니까 당장 좀 힘들어도 길게 보고 끌고 가면 좋지 않겠냐고 했어요. 결국은 얼마 후 접긴 했지만. 그때 제 생각은 그랬어요. 불씨를 어떻게 크게 키우지 않더라도, 다음에라도 다시 뭔가 있을 때 불을 만들 수 있게 해야겠다. 밑불까지 다 꺼지면 다시 살리기 힘드니까요.”

 

그런 생각을 할 수는 있지만 그러면 나는, 내가 실현하고픈 일은 뒤로 숨게 되잖아요. 받쳐주는 역할로 가면. 그런 갈등은 없었어요?

“아주 없지는 않죠. 가끔 소개를 할 때면 감독이라고 해야 하나 미디어 활동가라고 해야 하나 고민되기도 했고요. 자기가 하는 일을 내세울 수 있기까지는 스스로 그걸 받아들이는 과정이 필요한데, 그러기 전까지는 내가 뭐 하는 사람인지 혼란스러울 때가 있었어요. 지금은 촬영도 별로 안 하고 강릉에서 숙박업하고 산불진화대 하고 있으니까요. 그래도 베이스는 그런 거죠, 밑불 때기. 뭐가 되었든 운동으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늘 있어요. 앞으로 내가 또 어떻게 살아갈지 장담할 수 없기 때문에 그냥 막연히 생각하는 거지만요.”

 

지금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도 일종의 밑불 때기라는 말씀인 거죠?

“게스트하우스를 하지만 꼭 숙박업을 하려는 건 아니거든요. 저같은 경우는 바닷가에 있는 걸 좋아하기도 하고, 활동하는 사람들 맨날 싸움만 하고 살 수는 없으니까, 베이스캠프처럼 와서 잠수도 타고 좀 쉴 수 있는 공간 하나 있으면 좋겠다 생각했어요. 서울에 있는 <꿀잠>(비정규노동자쉼터) 같은. 그래서 몇 년 전에 이거 하면서 민숙련이라고 한번 전국적으로 조직하려던 적 있어요. 민중숙박연대 줄여서 민숙련. (웃음)

활동 오래 한 사람들 보면요, 제 주위에도 그런 이들이 좀 있어요. 계속 사회를 바꾸려 애쓰고, 이기기 위한 투쟁을 조직하고 싸우는데 이기는 걸 본 적은 별로 없어요. 저도 활동하면서 수백 군데 현장을 나가봐도 계속 져요. 사람과 현장만 바뀌지 입장이나 용어는 크게 달라지는 게 없고. 그러니까 그게 어느새 나한테도 영향을 주더라고요. 지켜보는 사람한테도. 우울증도 오고 패배감도 오고, 세상이 도대체 어떻게 해야 바뀔까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예전에 어느 활동가가 한동안 쉰 적이 있는데 그 얘기를 하더라고요. 자기가 문화노동자라고 운동 현장 가서 연대해서 활동도 하고 노래도 하고 하는데 이기는 꼴을 못 보니까 계속 깨지니까 자기한테도 영향이 와서 우울해지고 그랬다고. 다른 친구들은 병원 치료받느라 활동을 못 하는 경우도 있다고요.”

 

그런 사람들이 와서 쉴 수 있는 공간을 만드신 거네요.

“다시 강릉 내려올 때 아무래도 불안이 없지 않았어요. 뭔가 중심에서 밀려서 변방으로 간다는 느낌 때문에. 어떤 일이든 싸움을 할 때는 본사나 정부 기관이 있는 서울로 몰리게 되고, 그런 이슈의 중심 같은 곳에서 깃발을 들든 기록을 하든 그 속에서 뭔가를 하고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내려오기 직전에는 활동에 겸해서 안정적인 수입이 되는 일을 몇 가지 하고 있었는데, 이게 뭔가 틀에 갇혀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작년 같은 올해, 올해 같은 내년이 반복될 거 같은. 근데 그걸 안 하면 살 수 없어. 그러니까 다른 선택지가 별로 없었어요. 안 할 수는 없고 하자니 갇힌 느낌 들어서 답답하고. 정권이 바뀌면서 세상이 더 나아지는 것 같지도 않아요. 상대적으로 더 진보적이라고는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세상을 근본적으로 더 낫게 바꾸고 있긴 한 건가 싶고. 그러니 이 꼴 저 꼴 보기 싫어지기도 해요. 그래서 고민하다가 다 정리하고 조용히 내려왔어요. 강릉이 관광도시고 바다가 있으니까 숙박업을 하면 사람들이 오지 않을까 그 정도 얄팍한 생각으로 시작했어요. 다행히 예전에 알던 분들도 찾아오고 몰랐어도 소개로 오고. 좋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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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다가 내다보이는 안프로하우스 거실 풍경 (사진: 안프로하우스 네이버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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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 쌓인 안프로하우스 전경 (사진: 안프로하우스 네이버카페)

 

그럼 지금 이 삶은 ‘활동’에 포함되지는 않는 건가요?

“아예 아니라고는 할 수 없죠. 근데 저는 좀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참세상 있을 때 사무실에 걸려있던 글씨에 이런 말이 있었어요. ‘운동하는 삶은 얼마나 행복한가' 뭐 그런 내용인데, 워낙 긴 글이라 다 기억나지 않지만 그게 저에게 와 닿았어요. 운동이 큰 권력과 맞서 싸우기도 하고 좁고 힘든 길을 가는 것 같을 수도 있는데요, 막막하고 불안하고. 그래도 운동하는 것 자체로 자기 삶의 어떤 가치를 스스로 만족하고 거기서 행복을 느끼는 거. 겪어보진 않았지만 식민지 때 만주 가서 독립운동하고 그런 사람들은 나라 잃은 분노에서든 제국주의에 대한 분노든 그런 마음으로 운동을 했겠죠. 그게 꼭 불행하고 힘들기만 했을까 싶어요. 오히려 분노를 꾹 참고 사는 게 더 힘들지 않았을까. 모르면, 자극이 없어 분노를 못 느끼거나 하면 적응하거나 살길을 찾을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가만 있는 게 더 힘들지 않았겠어요? 화나면 어디 짱돌이라도 던져서 분노를 표출하는 편이 낫죠. 가난하고 힘들고 해도 자기가 선택한 것이니까. 더 만족하기에 그걸 선택했을 테니까. 그런 면에서 그 글에 공감이 갔어요. 제가 해석하기에.”

 

만약 시간이 흐르고 상황이 바뀌고 생각이 달라져서 다른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이 왔을 때도 그렇겠군요. 자기 행복을 찾아 나가는 선택을 하는 게 좋다는 거죠?

“젊어서 에너지가 막 올라서 이 한 몸 바쳐서 남한 변혁운동사에 뼈를 묻겠다 그렇게 결기를 다질 때도 있었고, 여전히 그런 사람도 있겠지만 잠시 식은 사람도 있을 거예요. 나이 들수록 에너지가 떨어져서 자기 선택에 두려움이 커지잖아요. 자꾸 안정을 추구하게 되고. 그런데 저는 사람이 일관성 있게 사는 게 제일 어려운 거 같아요. 변절한다는 그런 차원이 아니라, 사람은 계속 변한다고 생각하거든요. 더 좋은 방향이든 나쁜 방향이든 고정된 건 아닌 듯해요. 그렇다면 그저 가만히 있다가 떠밀려서 변화하는 그런 게 아니라 자기가 선택해서 바꿔나가는 편이 좋지 않을까.”

 

현재를 구성하고 있는 건 결국 내 선택이었다 이거군요.

“그렇죠. 지금까지 온 것도 계속 크든 작든 선택, 선택, 해서 여기까지 와 있는거고. 앞으로도 그럴거고. 후회가 없지는 않지만 그렇게 살아온거죠. 이 꼴 저 꼴 안 보고 살고 싶다 이런 말속에도 불만이나 욕망이 투사되어 있는 거죠. 운동하는 나와 개인인 내가 분리된 게 아니라 같이 있으니까.

살다 보면 자기조차 모르고 자기를 속이는 경우가 있더라고요. 신념이라고 생각했는데 지나서 보니까 아주 오래 내가 나를 속이고 있었다는 생각이 드는, 그런 게 있어요. 어쨌거나 자기 마음을 솔직하게 들여다봐야겠다고 깨달았어요.

요새 산불 끄러 다니면서 생각하는 게, 저는 그나마 산에서 일하는 게 마음에 들고 적성에도 맞는 거 같아요. 머리 쓰는 것보다 몸 쓰는 게 좋아요. 정해진 시간에 어느 공간에 가서 일하고 와야 한다는 건 여전히 별로지만요. 한 5년 정도는 이 일을 계속해서 지금처럼 게스트하우스를 월세 내면서 운영하지 않고 좀 더 안정적인 공간을 만들고 싶어요. 그러고 나면 1년에 6개월은 체류비가 한국보다 싼 다른 나라에 가서 지내다가 들어와서 6개월만 생활비 벌고 그렇게 지내고 싶어요.”


장장 세 시간 반에 걸쳐 진행한 안프로와의 대화를 곱씹다 보니 갑자기 헷갈린다. 이 사람, 대체 뭐 하는 사람이지? 주중에 그는 이 산 저 산을 타고 다니며 산불을 끄고, 혹시 남아있을지 모를 잔불을 잡으려 비탈을 구른다. 그러다 주말에는 지치거나 혼란에 빠진 활동가들이 행여 마음 속 불씨를, 어렵게 이어온 운동의 불씨를 꺼트리지 않도록 조용히 쉴 공간을 제공한다. 불 때는 재료를 캐는 탄광에서 자라나, 온갖 운동의 현장을 지키며 불씨를 이어가려 애쓰다가, 이제는 천오백 원짜리 마스크 하나 쓰고 산불을 끄러 다니는 이 사람. 모르긴 해도, 어쨌거나 평생 불과는 뗄 수 없는 운명인가보다.

  

현재를 구성하는 건 결국 내 선택이다.

 

인터뷰를 한 날은 마침 강릉단오제 기간이었다. 맛있는 음식을 먹을 기대에 부풀어 축제 장소를 향해 걷는 동안 보기 드물게 신이 난 안프로는 쉴 새 없이 단오제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풍년을 기원하며 대관령 산신에 제를 올리는 이 행사의 유래는 무려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가는데, 심지어 일제 강점기, 한국전쟁 중에도 중단한 적이 없다고 한다. 이 제의를 준비하는 데 가장 중요한 절차 중 하나는 단상의 중앙에 놓을 나무를 고르는 일이다. 그해의 임무를 맡은 무당이 사람들을 이끌고 산을 다니다가 신령이 깃든 나무를 발견해 붙들면 온몸을 덜덜 떤다고 한다. 그러면 그 나무를 베어 고이 모셔다가 남대천변에 설치한 단상에 세워두고 단오제 기간 내내 제를 올리는 거다.

그 대목에서 나는 감히 불경스러운 질문을 툭 던졌다. 그러자 안프로는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 무당은 정말 신기를 느끼는 걸까요? 혹시 적당히 괜찮아 보이는 나무를 붙잡고 그저 직업정신으로 세러모니를 하시는 건 아닐까요?

“그건 뭐 그분들만 알겠죠. 어쨌거나 그 사람이 선택한 나무라는 게 중요하니까요. 그 선택을 믿느냐 마느냐는 우리 몫이죠.”

 

우리는 마주 보고 크게 웃었다. 그리고는 인파를 헤치고 나가 천변에 늘어선 식당 부스에서 설렁탕을 사 먹고, 안프로의 단골 가게에 찾아가 메밀전도 배불리 먹었다. 남대천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꽤 선선했다.


- 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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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던, 안프로 단골 가게의 메밀전 (사진: 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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