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활동가인터뷰] 할 수 있는 것을 가능한 만큼 해 나가는 사람, 이민주

여름 휴가를 맞아 대통령이 [90년생이 온다]라는 책을 직원들에게 돌려 화제가 되었다. 책을 쓴 임홍택은 80년대에 태어났고, 그 책을 추천한 대통령은 50년대에 태어났다. 이른바 386 이전 세대와 88만 원 세대가 머리를 맞대고 그다음 세대를 연구하는 모습이다.

세대론은 읽히기 좋은 콘텐츠다. 대개 베이비부머에서 출발하던 미국의 세대 담론도 X세대를 거쳐 Y세대, Z세대, 통칭 밀레니얼까지로 확장된 상태다. 세대가 다르다는 것은 DNA나 인종이 아니라 그들이 자라온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환경이 다르다는 것이다. 그 차이를 단지 시대에 따라 구분하려는 시도는 세상을 간명하게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겠지만 그만큼 오해나 편견을 강화할 위험이 있다. 기술 변화, 국가 교육제도와 같이 명확히 시대적 특성으로 포착할만한 틀이 있더라도 막상 들여다보면 그 안에도 다양한 외부조건과 개인적 특성이 결합한 무수한 갈래가 존재하기 마련이다.

[90년생이 온다]도 그 위험을 현명하게 비껴가지는 못했다. ‘9급 공무원 세대’라는 표현이나 ‘삶의 목적'보다는 ‘삶의 유희'를 추구한다는 지적으로 흥미를 유발하지만, 세심한 사회과학적 검토가 필요한 사례들을 지나치게 단편적으로 조합해 개연성을 끌어내려 한 점은 해롭게 느껴지기도 한다. 문제의식과 대안이 궁극적으로는 보편적인 인간의 조건으로 나아가지 못한다면, 이런 분석에서 우리가 얻을 것은 조악한 신조어들밖에 없을 것이다.

씁쓸하게 책을 덮으며, 얼마 전 내가 직접 만난 어느 90년대생 활동가의 이야기로 눈을 돌린다. 일부러 끼워 맞춘 개연성이 아닌 생생한 삶의 경험이 날것으로 담겨 있어 다시 들어도 신이 난다. 청년이 꿈으로 삼기에는 초라하다며 모두가 탄식하는 공무원 시험을 목표로 삼았다가, 청년은 모두 떠나고 없다는 농촌 지역에서 마을만들기 활동을 공들여 하고 있는 경력 5년 차 ‘중견' 활동가. 충청남도 청양군 마을만들기 지원센터 교육팀장으로 일하는 이민주는 현재 이십 대 후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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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활동 분야에서 굉장히 젊은 편이실 것 같아요.

청양에서는 엄청 젊은 편에 속하긴 해요. 그래도 지금 일하는 조직에서는 중간이에요. 대학 졸업하자마자 일하는 동료도 있어서요.

 

팀장이니까 팀원을 돌보는 역할도 하시겠네요.

네. 힘들고 벅차기도 하지만 성장하는 느낌이 들어요. 저는 처음 일할 때도 바로 국장님 같은 분들이랑 시작해서, 누군가 선배 같은 존재가 있으리라 기대를 못 했거든요. 작년에 여기 오면서 팀장이라는 직책을 맡게 되었어요. 어딜 가나 항상 막내였는데 갑자기, 누군가를 챙기고 그런 역할을 하려니 처음엔 정말 적응이 안 되더라고요. 내가 누굴 알려주고 그럴 수 있을까? 고민을 많이 했어요.

지금은 조금 적응이 되긴 했어요. 제가 처음 일할 때 원했던 것, 이게 맞다 아니다 누군가 말해줬으면 했던 것, 그런 걸 해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저희 센터장도 새로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업무를 잘) 알려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를 하시고. 하지만 아직 부족한 게 많아요.

 

주로 어떻게 시간을 보내세요?

주중에서는 센터에서 일하고, 주말에는 지천생태모임이라는 지역 시민단체 활동에 참여하고, 부모님 농사 도와드리러 가기도 해요. 저녁에는 학교에 다녀서 기숙사에서 지내요.

 

그러면 언제 쉬어요? 쉴 시간도 없이 굉장히 바쁘시겠어요.

좀 그런 편이죠. 그래서 사람을 못 만나는지… (웃음)

 

나고 자란 곳에서 뿌리내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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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 앞 마당의 앵두나무 (사진: 이민주)

 

청양은 충청남도의 한 가운데 있는 군 단위 지역이다. 칠갑산을 포함해 산지가 많은 지역으로 주로 고추, 구기자 등 농산물을 생산한다. 인구는 32,296명인데, 규모 순으로는 전국 82개 군 중에서 62위, 충남에서는 가장 적다. (행정안전부, 지방자치단체 행정구역 및 인구 현황, 2018년 12월 31일 기준) 

이 청양의 한 농가에서 맏이로 태어난 이민주는 고등학교 3년을 제외하면 내내 고향에서 살아온 토박이다. 그때만 해도 청양읍에 인문계 고등학교가 없어서 중학교 졸업생 중 50% 정도는 외지로 나가야 했는데, 이민주도 그중 하나였다. (2008년 청양농공업고등학교와 청양여자정보고등학교가 통합해 현재 청양고등학교가 되었고, 이후에는 외지로 나가는 학생이 현저히 줄었다. 국내 최초로 실업계 고등학교를 통합한 사례로, 당시 청양에서는 큰 사건 중 하나였다고 한다.)

 

고등학교 생활은 어땠어요?

3년 동안 정말 울면서 다녔어요. 어릴 때 제가 다닌 초등학교가 전교생 50명 정도 되는 작은 학교였어요. 그래서 애들이랑 정말 서로 다 알아요. 6년 동안 한 반에서 공부하고, 14명이 같이 졸업했어요. 그러다 중학교 갔더니 반이 세 개더라고요. 너무 큰 세계인 거예요. 그래서 적응을 못 하고 힘든 과정을 거쳤는데 이제 고등학교에 가니 더 크고, 완전 처음 본 세계잖아요. 1학년때 정말 힘들어서 맨날 기숙사에서 울고 그랬어요. 하지만 그래도 그런 과정에서 시야가 많이 넓어졌어요. 그다음에 대학 가면서 여기로 돌아왔죠.

 

밖으로 나가면 더 넓은 곳으로 가고 싶을 수도 있었을 텐데, 다시 돌아온 이유가 특별히 있었어요?

꿈이 공무원이었어요. 원래 기자를 동경하다가 직업으로 공무원이 되려고 했어요. 여기 충남도립대학교에 2년 과정으로 자치행정과가 있고, 공무원 특채 같은 것도 있거든요.

사실, 공무원이 되는 게 꿈은 아니었어요. 내가 뭘 하고 싶은지 이런 고민 별로 안 해봤으니까. 저희 부모님도 저한테 그런 걸 알려주시는 분들은 아니었어요. 농사만 짓는 농부셔서 그런 대화를 한 적도 없고, 제가 첫째여서 물어볼 사람도 없었어요.

기자를 동경한 이유는 정확히는 모르겠어요. 고등학교 때 책을 읽다가 정의로워 보였달까, 되게 멋져 보이더라고요. ‘머리는 차갑게 마음은 뜨겁게' 그런 말도 되게 멋있었고. 그래서 나중에 대학 졸업하고는 오마이뉴스에서 하는 기자캠프도 가고 그랬어요. 그렇지만 생각해보면 정말 하고 싶은 건 글을 쓰는 거고, 글을 쓰기 위해서 직업이 기자일 필요는 없겠더라고요. 그래서 공무원이 되려고 자치행정과로 입학을 했어요.

다른 지역으로 떠난다는 건, 제가 초등학교부터 작은 데서 다녀서 서울 같은 큰 도시로 간다는 게 두려웠어요. 도시에서 청년들이 어렵게 사는 거 언론에서나 주변에서 듣기도 하고 그래서... 약간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남게 된 것도 있어요.

 

그런데 막상 대학 가서는 공무원에 도전하지 않으셨나 봐요?

학교에서 배우는 게 재미가 없기도 했고, 안정적인 직장이라는 막연한 생각 외에는 직업으로 공무원이 되는 걸 원하지 않아서 계속 방황했어요. 학보사 활동하면서 글도 써보고 여러 사람과 관계도 맺고 그런 시도를 해보다가 그대로 졸업을 하게 되었어요. 친구들은 노량진에 가거나 공채로 취직을 하거나 그랬고, 저도 시험 준비를 하긴 했는데 오래 하지는 않았어요.

졸업 후에 학교 추천으로 국민건강보험공단에 인턴을 했어요. 집에서 다녔는데 6개월 기간이니까 금방 끝났어요. 그러니까 또 고민이 되는 거예요. 정말 떠나야 하나, 서울로? 아니면 지역에 그냥 남아야 하나? 그런데 지역에는 직장이 마땅치 않아서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던 와중에 군청 도농교류센터라는 곳에서 공고가 뜬 거예요. 소통과 홍보, 지역 문화관광 프로그램 개발 같은 되게 다양한 내용이었어요. 거기 지원해서 2년 동안 일을 하게 되었어요. 스물 두세 살 때.

여러 마을이 연합해서 사무실을 열었는데, 사실 조직 체계도 없고 그냥 딱 두 명이서 일하는 곳이었어요. 그래도 거기서 운 좋게도 지역의 어른이라고 할 수 있는 분들을 많이 만난 거예요. 마을 이장님들, 지역에서 생태 운동하시는 분들도 만나고. 지천생태모임도 그때 알게 되어서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고요. 그 활동은 제가 지역에 정착하는 큰 계기 중 하나였어요.

도농교류센터에서 일하면서 이런저런 연결고리를 통해서 제가 그동안 못 느꼈던 많은 것을 보았어요. 그러다 보니 아, 지역에 남아야겠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던 거 같아요. 우리 지역이 이런 게 많구나, 청양이 가진 자원이라든지, 그런 게 보이더라고요. 그렇게 2년을 일하고, 그다음에는 도에서 지원하는 청년활동가로 공주에 있는 사회적협동조합에서 1년 동안 일을 했어요. 그리고 작년에 마을만들기 센터가 문을 열면서 충원할 때 다시 청양에 와서 지금까지 2년째 센터에서 일하고 있어요.

 

지역에 정말로 필요한 것

 

지천생태모임에는 어떤 분들이 계신가요? 상근활동가가 있는 조직인가요?

청양은 생협이라든지 생태적 활동이 발달한 편은 아니어서 그런 데 관심 있는 분들이 모임에 오세요. 청양에서 활동하는 시민단체 분들이 계시고, 지역 사안이 있을 때 앞에 나섰던 분들, 그밖에 시민운동보다는 생태 자체에 관심 있는 분들도 있어요. 교사, 공무원, 시민단체, 학부모, 어린이집 원장님 등 서른 명 정도가 활동하고 계시고, 트래킹을 하거나 아이들과 숲에서 노는 체험을 한다든가 그런 사업을 해요. 십 년 정도 되었고, 임의단체예요. 상근자는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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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천생태모임 우산성 숲속기행 중 아이들이 돌 위에 그린 그림 (사진: 이민주)

 

단체에서 상근할 생각을 해 보진 않으셨어요?

재작년에 잠시 쉴 때 여기랑 지역의 다른 시민단체에서 일해달라는 부탁을 받은 적이 있었어요. 더 어릴 때였으면 했을지도 모르겠지만, 부모님이 농사지으시고 저도 미래를 생각해야 하고 학교 등록금도 마련해야 하고 그러니 아무래도 급여를 안정적으로 받아야겠더라고요. 그리고 직장 생활 하면서 항상 중간관리자가 없는 상태로 일하는 게 힘들었어요. 항상 국장 다음 나, 대표 말고 나 이런 식이니까. 중간에서 가르쳐줄 수 있는 사람이 있는 곳에서 일하고 싶었어요. 지금 일터에서는 신분은 기간제 근로자이지만 급여가 안정적이고, 같이 대화하며 일할 동료들이 있어요. 처음에 들어올 때도 개인적 비전이라든지 공부하는 것 최대한 배려해주겠다고 말씀해주시기도 했고.

 

대학을 졸업하셨다고 했는데요, 등록금이 필요해진 건 왜죠?

 도립대학교가 2년제 전문대학교라 졸업하자마자 일을 한 거예요. 그러다 보니 더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는데 대학원에 가려면 4년제를 나와야 하잖아요. 학교에 야간으로 3, 4학년 학사과정이 있어서 센터 입사하면서 학교도 같이 다니게 되었어요. 아직 대학원 진학을 딱 결정한 건 아니지만 먼저 학사 과정을 마치려고 해요.

 

어떤 공부를 더 하시려고요?

정책이나 NGO 분야에 관심이 많아서 지역 정책 관련 공부를 좀 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정치나 정책은 내가 관심을 두고 활동으로도 풀 수 있을 것 같더라고요. 지금 가장 큰 관심은 노인복지예요. 마을만들기 일을 하고 있다 보니까 저도 전공을 마을만들기라는 큰 틀에서 고민하게 되었어요. 복지라는 게 지역에서 가장 큰 예산을 차지하고 있기도 하고, 앞으로 커뮤니티케어같이 관련 분야도 늘어날 테니까요.

이게 사실 저희 부모님도 바로 맞닥뜨린 문제거든요. 친척분들은 거의 다 외지로 나가고 저희 부모님만 할아버지 농사를 물려받아서 계시는 거니까. (주로 무슨 작물을 키워요?) 고추 많이 하고 벼도 하고 밤도 하고. 그건 소득 작물이고, 깨나 토마토, 콩 그런 건 먹으려고 심어요. 저도 청양에 있다 보니까 주말엔 부직포 깔아드리러 가고, 5월에 고추 심으러 가고, 8월 되면 또 고추 따러 가고.

 

노동력이 많이 필요한 일이네요.

집에서 할머니 할아버지를 20년 정도 모셨는데 작년에 할아버지 돌아가시고 할머니는 요양원으로 가셨어요. 농사일이라는 게 쉬는 날도 없고 그러니까 아무래도 몸과 마음에 탈이 나더라고요. 특히 아빠는 밖으로 활발히 움직이는 성격도 아니셔서 문화생활이랄게 술 말고는 딱히 없으니까. 심적으로 많이 약해지셨어요. 그래도 올해는 작년보다 좀 나아졌어요. 아빠의 오랜 꿈이던 집을 지었거든요. 원래 슬레이트 지붕에 마루 있는 엄청 옛날 집이었는데 건강이 나빠지는 데는 집도 문제가 되는 것 같아서 새로 지었어요.

작년에 할아버지 돌아가시는 거 보면서 농촌에 계신 어르신들은 삶의 마지막 순간에 존중받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청양에는 의료원이나 의원밖에 없어요. 물리치료나 감기 정도밖에 안 되고 최소한 맹장 수술 같은 걸 하는 곳도 없어요. 간단한 수술을 받거나 약을 타려고 해도, 그런 의료혜택을 받으려면 홍성까지는 나가야 하거든요. 그래서 요양병원에서 돌아가시는 분이 많은데 저희 할아버지도 정말 그런 식으로, 6인실에서 그냥 커튼 가려진 채로 의료 혜택을 못 받고 돌아가시는 모습을 제가 봤어요.

그래서 전문적인 의료서비스는 아니더라도 노인복지 분야는 한번 공부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요즈음 생겼어요. 학교를 정하거나 한 건 아니지만 전공은 복지로 거의 마음 먹은 상태예요.


중간지원조직의 사회적 역할

 

이번 인터뷰 요청을 받은 이들이 대체로 그랬듯이, 이민주도 처음에 자신이 인터뷰 대상자로 적합할지 모르겠다며 고민을 비추었다. 나는 이것이 사회운동, 활동가의 범위와 역할이 사회 변화에 발맞추어 빠르게 변하고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당연한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국가기구(GO) 대 비정부기구(NGO), 영리기업(PO) 대 비영리기구(NPO) 같은 식으로 범위를 설정하는 이론이 등장한 지도 어느덧 수십 년이 지났고, 기존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다양한 시도가 계속되고 있다. 최근 속속 등장하는 이른바 ‘중간지원조직’은 GO와 NGO의 경계 위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조직의 형태와 운영체계는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의 법 제도를 기반으로 하지만 인력풀은 기존 NGO를 기반으로 하는 경우가 많다. 법 제도의 변화와 발전도 필요하겠지만, 그 안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정체성을 부여하느냐에 따라 이런 조건이 한계로 작용할지 장점으로 발전할지가 판가름 날 것이다. 때로는 중간지원조직이 시민사회운동을 약화시킨다는 비판이 나오기도 하는데, 나는 이민주와 대화를 하는 도중 어쩌면 시민사회운동이 힘을 잃고 있기 때문에 중간지원조직의 역할이 커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처음에 인터뷰 요청했을 때 주저하셨었죠. 

활동가라고 해서 저는 사실 시민단체에서 상근하는 활동가 이미지가 컸어요. 저는 여기 중간지원조직으로 들어왔잖아요. 내가 활동가라고 할 수 있나? 의문이 들었죠. 하지만 가만 보니 여기서도 그런 활동을 내 나름대로 내 범위에서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긴 했어요. 그래서 인터뷰하겠다고 했죠.

사실 이 지역에서 시민단체가 청년을 키우기도 힘든 구조니까. 지역에 사람이 필요한 조직이 없는 건 아닌데요, 그 필요라는 게 정말 이 사람을 주체로 키워줄 수 있는 것인지, 아니면 당장 조직에서 필요한 일에 쓰려는 것인지 의문이 들 때가 있어요. 그런 걸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으면 청년들이 시민단체에 들어가기 점점 더 쉽지 않을 것 같아요.

중간지원조직은 행정과 주민조직, 행정과 행정, 주민조직과 주민조직 사이에서 일을 하게 될 텐데요, 행정의 프로세스를 바꾸려면 잘 알고 진행해야 하잖아요. 사업 하나를 할 때도 행정이 생각하는 주민 의견수렴과 민간이 생각하는 의견수렴은 굉장히 다른데, 그런 격차가 이 지역에서 굉장히 컸어요. 

민간의 이야기를 잘 담고, 기록하고, 잘 전달하는 게 되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지금은 워낙 사회도 다양하고 의견도 많은데, 기존에 하던 대로 단편적으로 대안을 제안해서는 바뀌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특히 농촌 공무원조직은 너무 단단해요. 지역에서는 굉장히 엘리트고, 제일 큰 조직이거든요. 이런 상황에서 민간의 얘기를 잘 들어서 행정 체계에 반영해서 방식을 바꿀 수 있다면, 그렇다면 내가 하는 활동도 활동이지 않을까? 그러면서 시민단체나 동아리에 직접 참여를 하거나 회비를 내거나, 지역의 이슈에 계속 관심을 가진다면? 그런 의미의 활동가라면 나도 활동가라고 할 수 있겠구나. 지역마다 다양하겠지만, 그런 면에서는 중간지원조직에서 일하는 게 제게 잘 맞는다고 생각이 들었어요.

 

가능하다면, 얼마 동안 일하실 생각이세요?

최소 5년은 보고 있어요. 이렇게 인연이 되었으니까, 뭔가를 알려면 그래도 5년 이상은 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멋있네요. 3년으로 승부를 보려고 하는 경우가 많은데. (웃음)

3년은 짧은 듯해요. 대학원 공부를 하면서도 지금 하는 일을 계속할 계획이에요. 이론과 실무가 병행돼서 지역주민들의 삶에 스며드는 일을 하고 싶어요. 그리고 제일 좋은 건, 여기서 같이 일하는 동료들이 있어서예요. 저 포함해서, 청년 세대가 다섯 명 있거든요. 다 여기가 고향이고, 나이도 비슷하고 생각도 잘 통해요. 그중에는 대학을 외부로 나갔다가 지역에서 일하고 싶어서 온 경우도 있는데, 청양은 기업이 별로 없어서 취업하기 힘들거든요. 저도 단편적으로 아는 거지만 공무원이 되거나 군청이나 공공기관 계약직, 아니면 작은 규모의 사무실에 들어가거나, 알바를 하는 정도죠. 창업 같은 건 거의 힘들어요. 그런 와중에 중간지원조직이라는 것이 생기니까, 외지에서 대학을 마치고 청양에 왔는데 전공을 살려서 일하고 싶었던 분들이 우연히 저희 조직에 들어오게 된 거예요.

요즘은 도시재생이나 그런 사업에도 청년들이 많이 참여하는데요.

청양에 사회적경제 조직 영농조합법인이든 사회적기업이든 그런 조직이 스무 개 정도 있기는 해요. 그중에 자생력이 있어서 정부 지원 없이 청년을 고용할 수 있는 곳은 찾기 어려워요. 청년들이 지역에 와서 도전하고 그러기엔 좀 힘들죠. 저도 여기 있다 보니까 이웃 지역 사례들도 보게 되는데, 전통시장이 있고 청년이 그냥 들어가서 살려라, 행정은 그렇게 단편적으로 보는데 그러면 저희는 말을 하죠. 다른 사례를 봐도, 그런 청년들을 단계별로 최소 2~3년은 중간에서 지원해줄 수 있는 조직이 항상 있었고, 이 사람들이 실패해도 되는 기반을 마련해주고 혼자가 아니라 여러 팀이 함께하는 그런 사례들이 있었다고.

사회적기업 같은 곳에 청년을 보낸다고 해도 그 조직에서 그 사람을 키우는 건 정말 힘든 문제예요. 1년 동안 배울 수 있는 것도, 급여도, 다 한계가 있고. 그 사람이 미래를 그릴 수 있어야 하잖아요. 그 조직과 맞는지, 함께 갈 수 있는지도 잘 모르는데 그냥 한 명 지원해놓고 지원해줬다, 그렇게 말하는 건 맞지 않죠. 같이 성장할 수 있는 동료들을 팀으로 지원해주던, 아니면 계속 케어할 수 있는 멘토를 두던 그런 것까지 생각해줬으면 좋겠다고 그런 의견을 전달하고 있어요. 그렇게 발표하고 제안도 하고 그러면서 조금씩이라도 시스템을 바꾸려 노력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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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양군 마을만들기 지원센터가 함께 하고 있는 벼룩시장 달빛마켓 (사진: 이민주)

 

안타깝게도 아주 근본적으로는, 도시로 집중되는 것을 막기는 어렵지 않을까요? 현재와 같은 농촌 커뮤니티가 지속하기 어렵다고 생각되거든요.

지방소멸, 마을이 없어진다 그런 얘기 많이 하죠. 하지만 저는 마을은 없어지지 않을 거다, 새로운 마을 형태가 생겨날거다, 라고 생각해요. 인구 3만 명이 되게 적다고 하지만, 마을만들기 공부하면서 알게 된 게 있어요. 이웃 나라 일본은 저희보다 작은 지자체가 굉장히 많아요. 5천 명 수준인 지역이 천 개나 되더라고요. 인구 규모가 문제가 아니라 인구 구조가 문제라고 해요. 3만 중에서 고령화된 사람이 많고 청년이 없는 게 문제지 인구 자체가 적다는 게 문제가 아니라고요.

결국 경제 활동할 사람이 많다면 규모가 작아도 활성화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청양은 이미 65세 이상 인구가 33퍼센트, 초고령화 상태예요. 농촌 상당수가 그런 현실인데요, 그렇기 때문에 계속 주민들을, 특히 청년을 어떻게 지역으로 오게 할 것인가 고민하는 거예요.

 

어떤 대안이 있을까요? 

청년의 생각이 다 달라요. 우선 청양이 고향인 청년들이 있을 거예요. 두 번째는 도시에서 귀농귀촌 하려는 청년이 있을 텐데 이 둘은 다르게 봐야겠더라고요. 주변에 귀농 귀촌한 제 또래, 여기 연고 없이 가족과 귀농한 친구도 있는데, 그런 분들에게는 주거나 일자리나 그런 것도 다 문제지만 지역의 폐쇄적인 문화가 되게 큰 문제예요. 주민들은 서로 너무 다 아니까 사생활 보장이 안 되고, 청양 사람이 아니면 그게 확 드러나고. 그런 게 저도 고민이 돼요.

사실 지역에 청년이 남거나 외지에서 청년이 와서 정착하려면, 현재 인구구조에서 노령 인구의 복지도 중요한데, 새로운 인력을 어떻게 잡아줄 것인지가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청양 출신 중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도립대로 오는 비율이 낮은데 그렇게 외지로 나가면 끝인 거거든요. 그러면 우리 지역에 맞는 정책을 세워야 하죠. 그분들이 돌아왔을 때 어떤 정책이나 문화가 있느냐에 따라 달라질 거예요. 그러니까 밖에서 청년이 오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선 현재 지역에 있는 청년들이 무슨 얘기를 하고 어떤 상황인지를 봐달라, 그런 의견도 내요. 관련 민간 그룹이라도 있으면 좋겠는데 아직은 좀 힘든 상황이에요.

문제 제기가 계속 나오니까 군에서 작년에 청년네트워크라는 조직을 만들긴 했는데, 군에서 만든 조직은 상대적으로 유연하거나 자발성을 갖기 힘든 구조에요. 그밖에 자발적으로 모이는 청년조직이 있긴 해요. 청년이 중심이 된 봉사동아리도 있고 특히 청문회담이라고, '청양의 청년문화를 말하는 팀'이 있어요. 그 팀 빼고는 뚜렷하게 청년 문제를 깊게 고민하는 팀이 없어요.

 

이런 문제를 잘 풀어낸 사례가 있던가요?

우리보다 먼저 고령화의 문제를 겪어온 일본에는 청년 파견제가 있어 집과 차 등을 지자체에서 지원하고 마을 일을 하면서 최소한의 보수를 주는 사례도 있고, 요즘 한국에서도 목포의 괜찮아마을, 경북 의성군의 이웃사촌 청년시범마을, 충남 서천의 삶기술학교 등의 시도가 이어지고 있는데, 저도 아직 시야가 넓지 않아서 많이 알지는 못해요.

무엇보다 인재풀이 항상 서울에 있잖아요. 도시가 좋은 건 다양한 분야의 사람이 소통하고 대화하면서 발전할 기회가 많잖아요. 그런데 지역은 그런 게 잘 안되고 엄청 늘어져요. 비교하거나 대화할 대상도 한정적이고, 고향 친구들은 있지만 관심사가 맞는 모임이 많지 않으니. 배우고 싶은 것이 있어도 전문가를 서울에서 초대해야 하니까 부담도 크고요. 사람이 많이 필요하기도 하지만, 전문성이나 새로운 역량을 가진 사람들이 지역으로 왔으면 해요.


지금 본인이 일하는 것처럼, 중간지원조직이 그런 분들을 붙들어 줄 수 있을까요? 지역에 관심이 있어서 오는 분들이 자기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연착륙을 돕는 공간으로요. 

네, 저희의 목적도 그래요. 충남은 각 지역에 마을만들기 중간지원조직이 거의 다 있어요. 그중 청년들이 생각 외로 많은데요. 고향에서 일하고 싶거나, 귀농 귀촌한 청년이 일하는 경우가 많아요.

지금은 마을만들기지만 지역에 앞으로 다양한 중간지원조직이 생겨날 거라고 보거든요. 관심 있는 청년들이나 외지에서 오신 분들을 중간지원조직이 인큐베이팅해서 점차 나가서 각자 나름의 삶을 꾸릴 수 있게, 그런 역할을 하면 좋겠어요. 센터도 실제로 그런 고민을 하고 있어요. 누군가 여기 정착하고 싶을 때 저희가 하나의 단계가 될 수 있었으면 하고 생각해요.

청년이나 주민을 지원한다는 게 단지 양적 성장이 아니라, 근본적으로는 삶을 어떻게 서로 연결해서 지역사회가 바닥부터 신뢰 관계를 쌓아갈 거냐를 목표로 해야겠죠.

지금 중간지원조직으로 있는데, 조직으로서 좀 더 안정화될수록 활동가로서의 정체성이나 현장성 그런 게 약해지고 공무원처럼 되지 않을까, 그런 고민을 요즘 다들 해요. 공무원이 나쁘다는 게 아니라 그들이 할 역할은 그들이 하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걸 잘해서 실제로 지역을 바꾸어야 하는데 그게 아니라 공무원의 일을 대행하거나 공무원처럼 행동하거나 그런 걸 굉장히 경계하고, 어떻게 해야 그러지 않을 수 있을지 고민하는 거죠. 시간이 흐를수록 안팎에서 갈등도 생길 것이고, 익숙해지면서 자꾸 안정적으로 생각할 수도 있고.

저도 이제 팀장으로 돌봐야 할 동료들도 있는데, 어떻게 하면 그런 태도를 나도 유지하고 그들도 키워나갈 수 있을까 걱정해요. 우리 조직만 잘 살아남는 게 아니라 주민조직을 어떻게 잘 할까. 중간지원조직에 정보나 자원이 모였을 때 기존 네트워크가 깨지고 다 한곳으로 몰리게 될까 걱정이 돼요. 센터에 다 담는 게 아니라 우리는 연결 연결하고 각자가 잘 돌아가게 해주는 역할을 해야지 모든 게 저희에게 몰리면 정말 나쁜 조직이 되는 거죠. 기존 네트워크, 공동체를 깨트리는 조직이 돼버리는 거니까. 그런 질문을 계속 던지고 있어요. 최소 5년을 보고 있으니까 길게 고민하면서 하다 보면, 적어도 잊지는 않으려고 해요.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떠나지 않게 되었다고 말은 해도 이민주가 지역에 갖는 애정은 상당히 깊고 그 기반이 잘 닦여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경제적 안정을 중요시하는 것도 개인적 안락함만이 아니라 인정적으로 지역사회에 뿌리내리고 효과적으로 활동하고 싶은 욕구에서 비롯하는 듯했다. 그렇다면 그 욕구 자체는 과연 어디서 나온 것일까? 사회를 변화시키려는 열정과 지역사회를 향하는 애정은 과연 무엇을 통해 한 사람의 마음에 스며드는 것일까?

 

중간지원조직에서 일하면서 동시에 활동가로서의 정체성도 갖고 있는 것 같다고 말씀하셨는데요, 센터 내 업무 외에는 또 어떤 활동이 있을까요?

지역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도울 수 있는 일들이 있어요. 시사지 구독하고 지역 시민단체 회비 내고 관심 있는 분야에 참여하고, 촛불시위 할 때 포스터 만들 사람이 없다고 하면 만들고, 앰프가 없다고 하면 빌리고, 강사 섭외하거나 포스터 붙이거나 그런 자잘한 일들. 그렇게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는 정도죠.

그래서 활동가로서라기보다는 일하면서 일로서 친해진 사람들이 많아요. 강의를 하건 뭔가를 할 때 그 일 자체에 최선을 다하려고 하면, 그 일을 모두가 함께해낸 거지만 제가 있어서 그 일이 좀 되었다, 그런 말을 들을 때 되게 고마웠어요. 그렇게 주어진 일을 우선 잘하고 또 활동도 하고 그러려고 해요.

 

사회를 바꾸는데 기여하려는 그런 마음은 어디서 왔다고 생각하세요? 

큰 이유는 잘 모르겠고, 작게 작게 계기들이 있었던 것 같아요. 제가 정당 활동을 하거나 학생회 임원을 하거나 그런 것도 아니긴 했거든요. 그런데 여러 가지 잔상은 있어요. 예를 들면 중학교 때 읽었던 위안부 관련 책이나, [소년이 온다] 같은 소설, 아니면 저희 아빠가 농사를 지으시니까 쌀 때문에 고민하던 모습이라든지.

아, 제가 작은 초등학교 다녔잖아요. 한번은 학교가 없어질 뻔해서 버스를 타고 도 교육청에 가서 시위한 적이 있어요. 그때 한창 학교 통폐합하던 때인데, 가서 부모님은 집회하시고, 저희는 풍물치고 버스에 들어가서 그냥 애들끼리 노는 거죠. 전체 50명 정도 작은 학교인데 부모님들도 모교이고 해서 그랬나 봐요. 그 학교가 지금도 있어요. 고등학교 때는 또 광우병 관련 시위에 참여하는 분위기가 있었어요. 

사실 농촌에서는 그런 걸 경험할 수 있는 게 해봐야 티비 정도인데, 그런 경험이 모이다 보니까. 저는 나서는 편은 아니었지만 그런 분위기를 잘 관찰했던 거 같아요. 대학에서는 학보사 하면서 학교에 대해 했던 활동이 있었고. 그런 게 조금씩 쌓였던 것 같아요. 지역 모임에서 모여서 토론하고 공감하던 것들도 영향을 줬어요.

 

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바꿔야 하는 문제가 있다면 뭐라고 생각해요?

행정 시스템이 좀 공정했으면, 그리고 정보를 많이 공유했으면 좋겠어요. 열심히 일하는 공무원분들이 있기에 부패했다고는 말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많이 경직되어 있고, 정보 공유를 잘 안 한다는 느낌이 있어요. 사실 농촌에서 가장 큰 조직은 행정이거든요. 도시는 기업이 서비스해줄 수 있지만, 농촌은 행정밖에 없어요. 주민들도 무슨 문제 생기면 바로 면사무소에 전화하시고. 워낙 어르신 인구가 많은데 일부는 돈을 많이 버는 농부가 있어도 대다수가 고령이고 소농이라 경제적으로 힘들어요. 노인이 일할 환경이나 복지 공간, 커뮤니티가 되게 부족하잖아요. 이런 곳에서 많은 자원과 정보, 사람을 가지고 있는 행정이 지역에 애정을 갖고, 정말 잘못하면 지역이 없어질 수도 있다는 절실한 마음으로 좀 더 공유하고 생각도 하고 그랬으면 해요.

 

지역, 청년의 일 경험

 

일을 하다 보면 부정적인 경험, 특히 어리거나 여성이어서 겪을 수 있는 일들도 종종 있었을 것 같아요. 그래도 실망하거나 냉소적으로 돌아가지 않고 계속 의욕을 지켜나가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을 듯해요.

지역에 있는 청년들은 떠나고 싶고, 여기 있으면 뭔가 내가 능력이 없어서 남는다는 인식이 많아요. 지역 사회 시선도 그렇고. 대학을 서울로 갔으면 네가 지금 여기에 있겠어? 부모님들도 걔 아직 여기 있어? 그런 말 많이 듣거든요. 서로 다 알고 어딜 가나 만나고 그러니까 그런 시선이 되게 무섭죠.

그런데 저는 첫 직장이 또 마을 관련한 기관이었다 보니, 지역에서 너처럼 젊은 사람이 없는데, 서류로 봐도 그렇고 생각도 그렇고 마을에 너 같은 사람이 꼭 필요하다, 이런 말을 되게 많이 들었어요. 활동을 하고 사람들을 만나면서 청양이 참 좋구나, 내 고향이지만 이런 매력이 있구나 그런 걸 느껴서 애정도 생겼고요.

사실 마을 이장님이나 위원장님들, 그런 분들과 트러블도 있기는 하죠. 어리니까 듣는 말도 그렇고, 지금 생각해보면 성희롱이었던 그런 것도 있긴 했어요. 초기에는 문제 자체를 잘 인지하지 못했던 것도 있는데, 만약 계속 이 세계만 봤으면 떠났을 것 같아요. 정말 힘들었으니까.

그런데 지천생태모임을 함께 했잖아요. 퇴근하고 가서 만나는 문화는 또 다른 거예요. 거기서 만나는 분들은 모여서 좋은 이야기를 나누고 지역 문제도 함께 토론하고. 처음 그걸 경험하고는 일기에 썼어요. 청양에도 이런 토론문화가 있구나, 하고. 내 세상이 딱 이것만 아니라 또 다른 활동이 있고, 좋은 어른들과 교류했기 때문에 그렇게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 같아요.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들다가도 좋은 사람들 생각하면 또 괜찮고 그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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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천생태모임 활동모습 (사진: 이민주)

 

성희롱 같은 문제도, 예전에 잘 모를 때는 넘어갔어도 이제는 말을 해요. 제가 생각하는 걸 말 못 하고 참는 스타일은 아니에요. 어른들이 계셔도 할 말은 웬만큼 해요. 떨리지만, 그래도 제 말을 하려고 노력했어요. 그리고 성격이 긍정적이라, 나쁜 일도 경험이라고 생각했어요. 좋게 말하면 융통성이 많지만 나쁘게 말하면 참으려고 하고 무딘 거죠.

 

그래도 고향이라 좀 더 가능한 걸까요?

그렇긴 한 거 같아요. 만약 외지 사람이면 네가 뭘 알아? 그럴 수 있을거예요. 그런데 저는 장점이자 단점이 여기가 고향이라는 것. 농촌에서 태어나 자랐기 때문에 그런 거로 공격을 받지는 않아요. 제 의견을 반영하지 않을지라도 말을 하는 것 자체로 곤란해지지는 않아요.

제가 문제의식이 있을 때, 막 성격이 강단 있거나 그렇지는 않고 어느 정도 타협하면서 접근하는 편이기는 해요. 너무 나서나? 그런 고민을 하면서, 지나치게 깊이 개입하기보다는 할 수 있는 걸 하자고 생각하는 편이에요. 뭔가 바꾸려면 더 강하게 해야 하나 싶으면서도, 고향이고 연결된 것들이 있으니까 거기까지는 못 가는 것일지도 모르겠어요.

 

앞으로도 계속 머물러 있을 생각인가요?

사실은 떠나도 상관없다고 생각해요. 떠나서 배우고, 또 돌아올 수 있는 기반이 고향이면 되고, 그런 선택지 중에서 일순위가 이곳이라면 좋을 것 같아요.

그러려면 여기서 제가 어떤 경험이나 활동을 했냐가 중요한 것 같아요. 마을이나 지역에서 직접 어떤 문제를 해결한 경험, 기억이 있다면 어딘가로 떠났다가도 돌아올 수 있을 거잖아요. 청년들에게 그런 기회를 많이 줘야 해요. 행정에서 인턴이나 계약직으로, 방학 기간에 일을 주거나 할 때 사무실에서 팩스 보내고 그런 일을 시킬 게 아니라 마을이든 어디든 나와서 뭔가를 성취하는 경험, 성공이든 실패든 그런 걸 쌓을 수 있게 도와주는 게 중요하다고 느껴요.

저는 어딜 가면 아 여기 그때 그림대회 나갔던 곳, 어, 예전에 여기서 우리 놀았었던 데잖아. 그런 기억이 나요. 그런 게 어느 순간에는 누군가 여기 정착하게 만드는 힘이 되지 않을까 해요. 그러기 위해서는 기존 중간지원조직이나 지역의 시민운동 영역에서 그런 활동을, 교류할 기회와 프로그램을 만들고 정책 제안도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활동의 보람을 느끼는 순간이 있다면 어떨 때인가요?

저번 주에 어느 공무원분이 그러더라고요. 자기들은 주민들 모아놓고 두시간 얘기 듣는 걸 의견수렴이라고 생각했는데, 저희가 주민들이랑 기획부터 견학, 진행 과정을 다 같이 하자고 제안해서 지금 모으고 있거든요. 그런 걸 처음 경험해보셨다고, 신기한 접근 방법이라고 하시던데 너무 뿌듯하더라고요. 사실 그거 하려고 한 달 동안 설득했어요. 이거 했으면 좋겠다, 다른 곳에서 이렇게 했더라 사례도 보여주고. 기존의 방식을 바꾸는 건 몇 배 이상의 에너지와 시간이 소요되지만 그런 경험이 또 다른 기반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요.

사람이 잘 모일지, 기획이 잘 될지 아직 모르겠어요. 걱정도 되지만 우선 한번 해봤으니까, 그리고 하고 싶은 걸 해보는 거니까. 그 안에서 공무원들도 조금씩 생각이 바뀐다면, 주민분들도 그냥 얘기만 했을 때는 알겠다고만 하고 피드백이 없었는데 저희가 기획부터 같이하자고 손을 내미니까 달라지지 않을까.

제가 활발한 성격도 아니고 리더십 있는 사람도 아니라서, 지금도 사실 재는 게 많아요. 그렇지만 누가 그러시더라고요. 안되더라도 일단 해 봐. 일단 전화해보고, 부딪쳐보고. 그래서 해보려고요. 내 일에서는 어떻게 되든 일단 해보고 싶은 거로 조그만 사례라도 남겨보고 싶어요.

 

극적인 한순간, 에피파니는 없다

 

앞으로 어떤 과정을 통해 성장해나갔으면 해요?

그동안 활동하면서 존경스러웠던 리더는 학습하는 리더였어요.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회의만 하거나 반복되는 업무를 하다 보면 똑같은 수준에 머물기 쉽죠. 그래서 공부하는 게 정말 중요한 것 같아요.

동료 중에 자기 업무가 소통인데, 잡지를 만들어야 한다고 그걸 잘하기 위해서 서울에 배우러 다니는 분이 있어요. 그걸 배우고는 거기서 만난 강사님을 지역에 모셔다가 청년들이 배울 기회를 어떻게 만들어볼까 고민을 하고 있고요. 예전에 혼자 일할때는 상상하기 어려웠는데, 이제는 이런 동료들이 있고 조직에서도 공부하도록 지지해주니까 재미있고 좋아요. 우리만 하는 게 아니라 지역 분들과 같이 배우고 나눌 수 있는 자리를 만드는 거, 계속했으면 좋겠어요.

그날, 해가 천천히 기우는 도립대학교 앞 카페테리아에서 나눈 대화는 나에게 중요한 가르침을 주었다. 사회 변화를 꿈꾸는 사람들의 마음 그 어딘가에는 한순간 눈이 뜨이는 극적인 경험, 그 나름의 에피파니(Epiphany)가 반드시 있으리라는 기대를 나도 모르게 품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깨달음은 그저 한순간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물이 한 방울씩 똑똑 떨어지다 어느 순간 넘쳐흐르듯, 알지 못하는 사이에 조금씩 쌓인 좌절과 성취의 경험이 어느 순간 사람을 훌쩍 성장시키는 것에 가까우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별한 계기나 강한 결심이 없었다고는 하지만 작든 크든 끊임없이 자기와 대화하면서 ‘할 수 있는 것’을 ‘가능한 만큼’ 해온 한 사람의 성장기. 이민주의 이야기를 들으며 내가 느낀 그 나름의 극적인 감동을 지금 여기서 함께 살아가는 어느 90년생 활동가에 관한 보고서로 담아 보낸다.

_ 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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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02 나래미 은행나무제.jpg

2019년 청양군 남양면 나래미 은행나무제 풍경 (사진: 이민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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