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공익활동가포럼] 운동의 수요자와 관계 맺는 방식에서 실패한 것은 아닐까? - 명호


올해 생태지평이 구글임팩트챌린지 본선에 도전해서 꽤 큰 액수의 기금을 받으셨어요. 그 과정에서 느끼신 게 많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이야기부터 해볼까요?

 

여러 가지가 있죠. 제가 가장 놀란 것은 본선에 올라온 단체가 10개였는데 사회연대은행을 제외하고는 다 잘 모르는 단체들이었습니다. ‘아, 이런 활동을 하는 곳들이 있구나’ 싶은 단체들이 많더라구요. 이름 뿐만 아니라 그 단체들이 문제와 해법에 접근하는 방식도 완전 새로운 세상이더군요. 교육운동을 하는 ‘미래교실 네트워크’만 보더라도 선생님들이 현장에서 교육방식을 바꾸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곳인데 매년 약 3,000명의 선생님들이 결합해서 활동하고 있더라구요. 입시 위주의 교육 현실에서 기존과는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고 있고 상당한 효과도 있는 것 같아요.

제 머리 속에 그려놓은 시민운동의 틀 안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거죠. 시민운동이 결국은 얼마큼 더 나은 방향으로 세상을 바꿀 것인가라는 물음 안에 있는 것인데 우리가 구호로 외쳤던 운동 보다 더 밀접하게 현장에서 움직이고 있는 모습들이 보이는 거예요. 단지 발표를 들었을 뿐인데 말이죠. 운동의 수요자들하고 일정 정도 호흡을 같이 하면서 움직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가 지금까지 몸담아왔던 단체와는 전혀 결이 다른 거죠. 발표를 한 10개 단체 중 4개가 교육 관련 단체들이었는데 역설적으로 한국사회의 교육문제가 그만큼 심각하다는 말이기도 한데요. 이 4개 단체가 목표나 지향하는 바는 유사하지만 각기 다른 방식으로 교육문제에 접근하고 있더라구요. 그런 면이 참 특이했어요. 그분들끼리 서로 간에 차별성이 무엇인지, 장점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는걸 보니까 평소에 교류가 있나봐요.

코딩교육을 하는 ’멋쟁이 사자처럼’도 인상적이었어요. 초등학생부터 대학생까지 나이가 적건 많건 상관없이 취업을 위한 교육이 아니라 일상 생활 속에서 자신이 느끼는 불편함을 코딩교육을 통해 본인 스스로 방법을 찾아가도록 한다고 해요. 본인에게 필요한 프로그램이나 본인에게 필요한 것을 누구에게 맡기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대안을 만들어낼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 독특했어요. 그 안에서는 저희만 이상한 거 같았어요.

 

그분들이 보기에는 ‘생태지평’이 새로웠을 수도 있겠는데요.

그렇겠죠. 그분들은 오히려 우리와 같은 시민단체의 문제해결 방식에 익숙치 않으셨을 테니까요. 병원이나 장례식상, 결혼식장에서 버려지는 꽃들을 활용해서 호스피스 병동 같은 곳에 재활용하는 아이디어를 낸 ‘플리’도 있었는데요. 이건 기존의 전형적인 자원봉사활동이 아니라 플랫폼 속에서 움직이는 새로운 방식의 자원봉사활동이라고 느껴졌어요. 단지 호스피스 병동에 꽃을 배달하는 게 아니라 버려지는 꽃을 통해 병원이라고 하는 공간을 어떻게 바꿔나갈까 고민하더라구요.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누군가가 미쳐서 시작했더라구요. 그 일에 미쳐서 직장을 때려치우고 몇 년간 매달리는 사람들이 있었고 거기에 동조해주는 사람들이 있었던 거죠. 오랜 시간 동안 생활 속에서 느끼는 시민들의 요구사항들을 어떻게 풀어갈 것인가라는 문제에서부터 접근을 했더라구요. 만약에 제가 저 문제에 직면했을 때는 어떻게 풀 수 있었을까 생각해봤더니 답이 안 나오더라구요. 제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전통적인 시민운동 안에서 어떤 체계와 절차를 갖춰서 정책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를 우선 고민하지 그 방식은 안 나왔을 것 같아요.

우리가 크다고 하는 시민단체들 있잖아요. 그런 곳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직접 참여해서 움직이고 있는 것도 대단했어요. 그건 우리 시민운동의 시각에서는 잡히지 않지만 사실 다른 쪽에서는 이미 하나의 흐름이 형성되고 있다는 걸 보여주거든요. 그런 부분이 놀라웠어요. 그러면서 저런 영역과 어떻게 우리가 관계 맺기를 할 것인가를 생각해보니까 사실 답이 안 나와요. 10개 단체 중 9개 단체는 우리와 결이 다른데 아까 이야기했던 것처럼 우리가 저 사람들을 신기하게 보잖아요? 근데 저 사람들에게는 우리가 신기한 거겠죠. 우리가 지금 활동하는 분야를 모르는  분들이 태반일거예요. 그렇더라구요.

 

좀 전에 교육문제에 대해 새로운 접근방식을 시도하고 있다고 했잖아요. 만약 전통적인 시민단체라고 하면 정부나 교육부나 문제를 해결하라고 요구했을 테죠. 그리고 그 바꾸는 주체는 정책 당사자나 학교 현장이어야 한다고 했을 테구요. 그런데 구글임팩트챌린지에서 만난 단체들은 그 방식이 아니라 ‘실제 자기들이 그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겠다’는 접근 방식이라는 거죠. 그리고 시민운동이 세상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화시키는 운동이라고 하면 사실 우리가 모르고 있을 뿐이지 이미 기존 시민운동과는 다른 영역이 존재하고 있었던 거죠. 20년 넘게 시민운동을 해오셨는데 단순하게 느낌이나 기분 이런 거 말고 시민운동의 방향성과 관련해서 어떤 영감 같은 것을 주는 게 있던가요?

그 부분에 있어서는 솔직히 한계를 느끼는 것 같아요. 뭐랄까 관성과 습관의 문제인 거 같아요. 다른 활동가들은 어떻게 느꼈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아, 저렇게도 해봐야겠다’라는 생각이 드는 게 아니라 ‘이제 내 방식 가지고는 힘들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어요. 그곳에서 본 활동들의 공통점은 우리 방식이 옳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이렇게 대안을 만들 수 있으니, 그 대안을 운동의 수요자들에게 선택하게 하는 것이었거든요. 자기들의 방식을 강요하는 게 아니라 자기만의 방식대로 활동하면서 그것이 모델화가 되고 성과를 보이면 또 다른 수요자들에게 평가하고 선택하게 하면서 확산해가는 방식이더라구요.

근데 우리는 그동안 주장을 많이 해왔잖아요. 두 번째로 시민운동의 방향과 관련해서는 잘 모르겠지만 솔직히 제 고민은 ‘생태지평’은 어떤 방식으로 전환할 수 있을까예요. 사실 구글임팩트챌린지에 도전하기 전까지는 우리가 제안하는 이 사업이 정말 ‘생태지평’에 필요한 일일까 계속 고민했어요. 이게 정말 생태지평이 하고자 하는 일일까? 아니면 연안습지보존운동의 발전 단계에서 이 일이 꼭 필요한 것일까? 혹시 ‘생태지평’이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 아닐까 고민하게 되더라구요.

결론은 ‘생태지평’이 활동하는 영역과 방식 안에서 꼭 필요한 일은 아닌 것 같다. 그런데 연안습지보존운동에서 이 사업은 지금 단계에 꼭 필요한 일이다. 그래서 도전을 해보자고 결정을 했어요. 근데 거기 가서 느낀 건데 ‘생태지평’이 움직이는 활동방식이나 다음 단계의 운동을 고려해봤을 때 우리가 활동 방식을 저렇게 바꿔갈 수 있을까에 대해서는 의문이 들어요. 한계점에 온 건 아닐까라는 생각도 들구요. 물론 외부 사람들이 봤을 때는 ‘생태지평’의 활동방식이 저런 그룹들과 유사하다는 평가도 하지만 내부적으로 고민되죠.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요. ‘생태지평’의 활동방식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데요. 생태지평은 창립할 때부터 일반 시민들이 우리 활동의 직접적인 1차 수요자는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우리 포지션은 정확히 어디일까? 우리 고민은 시민보다 한 단계, 한 단계라는 표현이 적절한 개념은 아닌데 시민들 중에 갯벌이나 연안습지에 관심을 가진, 예를 들어 갯벌 모니터링에 참여하거나 갯벌 보존운동에 참여하는 분들과 환경운동단체들 간의 중간쯤 포지션이라고 판단한 게 있어요. 그 다음에 환경단체와 네트워킹해서 그들에게 새로운 정책을 제시하고 갈 길을 모색해주는 단위로 ‘생태지평’의 역할이 있어요. 그래서 ‘생태지평’은 17개의 시민모니터링 지역과 10개의 갯벌센터가 있고, 2개의 네트워크와 정부기관, 전문가들의 관계망 속에 있는 거죠.

또 다른 점은 <생태지평>은 현장을 중요하게 생각해서 지역별 센터에 사람을 키워서 보내는 방식을 핵심 목표로 삼고 있다는 점도 강조하고 싶네요. 그래서 외부에서 볼 때는 우리 방식이 구글임팩트챌린지에 도전했던 다른 곳들과 비슷하다고 느꼈을 수도 있어요. 근데 우리가 볼 때는 ‘생태지평’이 시민들과 직접적으로 호흡하면서 움직이는 방식으로는 어려워요. 하지만 한번 시도해보고 싶다는 생각은 들더군요. 이건 지금의 의제를 벗어나서 새로운 의제로 갔을 때는 가능할 것 같은데 지금의 의제 속에서는 실제 지역으로 들어가는 방법 밖에는 없어요. 지금 시민운동이 놓치고 있는 부분은 이거예요. 우리 활동의 수요자와의 간격이 너무 벌어졌어요. 예를 들어 우리 활동이 만들어내는 정책의 수요자가 언젠가부터 정부와 언론이 되어버렸어요. 시민들이나 지역 주민이 아니예요. 제가 다른 의제 이야기를 해서 죄송한데 뭐 흔히 하는 이야기이니까요. 골프장 반대운동만 해도 환경운동의 20년 넘은 의제 중 하나예요. 근데 단적으로 20년간 골프장 반대운동 관련해서 구호나 정책, 주장이 변한 게 없어요. 똑같아요. 골프장과 관련된 법과 제도, 정책방향도 똑같아요.

 

우리 방식이 옳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이렇게 대안을 만들 수 있으니 

그 대안을 운동의 수요자들에게 선택하게 하는 것

 

단체들의 주장도 똑같다?

네, 똑같아요. 그리고 결과적으로 보면 골프장 반대운동을 하고 나면 단체들에게 남는 건 하나도 없어요. 몇 개의 보고서와 페이퍼, 보도자료, 성명서, 법률관련 자료가 남아요. 그렇다고 지역 주민들이 환경단체 회원이 되는 것도 아니예요. 단체와 주민이 분리되어 있어요. 기록들을 보면 참 슬프게도 언론 기사 나온 게 몇 개 있구요. 지역 주민들은 끊임없이 그 싸움의 희생자가 돼요. 좀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손해배상소송 걸리고 빚지고 지역에서 단체들은 떠나는 양상들이 벌어져요. 오히려 이제는 주민들이 골프장의 문제점에 대해서 단체들보다 더 잘 알아요. 솔직히 20년 동안 온갖 보고서 다 나와 있잖아요. 검색만 해봐도 다 나오구요. 단체들의 도움 없이도 본인들 스스로 싸워요. 이럴 때 단체는 어떤 포지션을 가져야 할까요?

우리들이 20년간 환경문제와 싸우면서 결국은 하나도 못 바꾼 것들이 많아요. 환경부 역사만 봐도 처음에는 수질, 대기, 폐기물 이런 의제들로 시작했는데 환경운동도 똑같아요. 사람이 발 딛고 서 있는 땅의 문제, 호흡하는 문제, 먹는 문제, 배설하는 문제, 이렇게 단계별로 출발했거든요. 그러다가 이제는 각종 유해 물질까지 점점 확대되고 있잖아요. 근데 이런 문제들은 일차적으로 법과 제도로 풀어갈 수 있어요. 수질, 대기, 폐기물 관련 의제들은 법과 제도로 풀어왔거든요. 다음 단계에서 사람들은 자연생태계에 관심을 가져요. ‘아, 우리가 이렇게 살아도 될까?’ 이런 고민을 하는 거죠. 그러면서 나온 이슈가 예를 들어 동강 문제예요. 동강 문제는 두 가지예요. 한참 경제성장하다가 IMF사태 이후로 뚝 떨어졌잖아요. 경제 성장 별거 아니구나, 자연이라도 지켜야 하는 거 아닐까라는 생각이 하나 있었어요. 다른 것이 눈에 보이기 시작한 거죠. 그 즈음에 동강 문제가 생겼어요. 그 이후에는 어떤가요? 최근 가습기 문제처럼 우리가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범주의 새로운 문제들이 생겨나기 시작해요. 나노 물질도 그렇고 발전이라는 과정에서 생겨난 문제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거예요.

다시 예전 문제로 돌아가 보면요. 우리가 과연 제대로 했던 것일까 의문이 들어요. 연안습지보존운동은 새만금이라고 하는 굉장히 큰 사건을 계기로 시작했기 때문에 좀 다르긴 한데요. 골프장, 댐, 산림벌채, 도로, 수질, 폐기물 문제 등등 한국사회에서 환경운동이 30년 동안 이런 문제에 관심을 가져왔어요. 보통 이 정도 되면 시민들의 의식이 굉장히 높아지던가, 환경단체에 후원자라도 늘던가, 관련 법과 제도가 엄청 발전하던가 해야 하는데 매번 쳇바퀴돌 듯 제자리예요. 우리 운동의 직접적인 수요자와 우리가 관계 맺는 방식에서 실패한 것은 아닐까? 우리는 단기적인 성과를 남기기 위한 방식으로 1차 수요자는 건너뛰고 2차 수요자 중심으로 접근한 측면이 있죠. 사회적으로 이슈화되어야 하고, 언론에 보도되어야 하고, 국회에서 다뤄져야 하고, 법이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 말이죠. 이런 게 단기간의 성과를 남기는 방식이긴 했지만 정작 1차 수요자와 관계 맺기의 측면에서 보면 실패했다고 봐야죠.

온갖 환경이슈가 지나온 곳들을 다 뒤져봐도 그 이슈가 있었던 지역의 주민들과 1차 수요자로서 5년 이상 관계를 맺고 있는 경우는 드물어요. 예를 들어 우리가 홍보나 마케팅 측면에서 성명서를 쓰거나 보도 자료를 내거나 인터넷을 활용하거나 이런 활동의 기술적인 부분들은 엄청 발전했는데요. 정작 활동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기술적인 부분은 놓치고 있는 것 같아요. 새만금 운동 할 때는 지역 주민들을 설득하기 위해 실제 마을에 들어가서 몇 달간 생활하면서 주민들과 호흡하고 설득하고 이런 과정이 있었어요. 근데 요즘은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지역단체들은 많이 하는 거 같아요. 근데 중앙단체들은 그렇게 하나요?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들이 많은 것 같아요. 아까 이야기했듯이 기술적 관점에서의 운동의 성장과 더불어 실제 운동의 관점에서 우리들만의 방식, 새로운 관계 맺기 방식이 필요한데 그게 없는 것 같아요.

최근에 서울시NPO지원센터에서 서울시 의제를 찾는 작업들을 했는데 새로운 시도라고 생각해요. 실제 서울 시민들의 삶 속에서 나타나는 의제가 뭘까를 고민을 하는 것은 새로운 방식의 접근이죠. 그런 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근데 기술적 관점에서는 사실 잘 모르겠어요. 홍보를 어떻게 할까, 마케팅이 어떻고, 소셜 네트워크는 어떻고, 최근에는 기자들도 페이스북에서 공유되지 않을 것 같은 기사는 잘 안 쓴다고 하더라구요. 성명서와 보도자료를 어떻게 잘 쓸까, 이런 게 의미가 있을까요? 제가 활동한지 20년이 넘어서 그러는지도 모르지만 최근의 시국선언문들도 보면 저도 잘 안 읽을 것 같아요. 왜냐면 읽어봐도 무슨 이야기인지 잘 모르겠어요.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는 알겠는데 맥락이 잡히지 않고 그냥 쓴다는 느낌을 받아요.

 

우리 운동의 직접적인 수요자와 

우리가 관계 맺는 방식에서 실패한 것은 아닐까?

 

조금 전에 말씀하신 것 중에 1차 수요자와의 관계 맺기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그 점에 대해서 생각할게 좀 있을 것 같은데요. 예전에도 애드보커시형 시민운동과는 다르게 지역의 사람들과 함께 생활 속 변화를 모색하는 움직임이 있긴 했어요. 환경운동 영역에서도 보면 그런 흐름이 생협 운동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유기농 생태농업을 하겠다고 농촌으로 가신 분들도 있고 했죠. 그렇게 존재해 온 운동의 흐름들과는 또 다른 측면이 있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그렇죠. 환경운동만 이야기하자면요. 우리가 왜 실패했는지를 한동안 고민했었어요. 제 경험 중심으로 이야기할 수밖에 없긴 한데 한국의 환경운동 30~40년 동안 정말 중요한 이슈 중 하나였고 국민적 지지도 많이 받았던 새만금 운동 왜 실패했을까? 새만금 운동 끝나고 나서는 환경운동가들이 화병에 걸릴 지경이었어요. 저 같은 경우는 새만금이 막힌 후 2년간 모니터링을 다녔는데 그 후에는 열불이 나서 그 지역에 가보지도 않았어요. 

왜 우리는 실패했을까? 우리의 주장이 잘못된 것이었나? 왜 우리 주장이 전라북도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에서는 거의 80% 가까운 지지를 받았는데 왜 실패했을까? 이게 제일 큰 고민이었죠. 지금 생각해보면 환경운동은 보존이라는 개념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서 차이가 많이 나는 것 같아요. 복잡한 논쟁은 제쳐두고 단순화시켜보면 언젠가부터 우리는 운동의 의제와 사람들이 사는 영역을 분리하기 시작했어요. 분리시키면서 주민들조차도 대상화시킨 측면이 있어요. 일종의 선민의식처럼 전라북도 주민들한테 갯벌을 보존하라는 것은 주장할만한 내용이 아니었던 거죠. 그 분들한테 새만금은 일상이고, 삶이고, 생활이어서 새만금과 어떻게 조응해 살아갈 것인가가 중요했던 건데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의 가치관에 따른 주장만 했던 거죠. 새만금이 그분들의 생활과 관계를 맺어서 순환적으로 보존될 수 있는 구조를 제시하지 못했던 거예요. 주민들이 자연자원을 이용하는 방식, 그 자연자원이 주민들과 맺고 있는 관계를 도외시한 채 우리가 보존해야 할 대상, 즉 새만금과의 관계만 생각했으니까 주민들과의 관계가 끊어져버렸거든요. 관계가 단절되니까 우리가 말하는 것을 이해 못하시고, 아니 이해가 아니라 호응할 수 없었던 거예요. 본인들이 이 의제로부터 배제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요. 이 부분이 가장 뼈아픈 부분이죠.

급했어요. 우리가 문제에 접근해서 분석하고 어떻게 막아야 한다는 고전적인 방식이 주민들이 정치적으로 자기 권리를 갖게 하는 변화를 만들어내지 못했던 거예요. 시민이 성장하는데 필요한 역량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았어요. 스스로 권리를 이야기하지 못하는 분들을 도와줘야 된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측면도 있었구요. 주민들과 관계를 형성하고 그들의 역량을 강화하기보다는 급하다는 판단 속에서 중앙 정치를 중심으로 정책 판단과 결정의 영역에만 집중했던 것 같아요.

갯벌 생태계 안에는 다양한 생물종들이 있어요. 어떤 박사님은 이 다양한 생물종 안에 사람이 있다, 사람도 하나의 생물종으로 보고 종합적으로 이해해야만 이 공간을 보존하는 새로운 방식이 등장한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어요. 사실 맞는 이야기죠. 예전에는 어민들과 갯벌을 분리해서 접근했어요. 이곳을 보존해야 합니다. 왜? 갯벌에 사는 생물종들이 중요하고 그 안에는 멸종희귀종들도 있으니까 생태계적 가치가 굉장히 높다는 접근이었죠. 근데 생각해보면 지난 수천 년 동안 어민들은 갯벌과 굉장히 선순환적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왔어요. 다른 말로하면 보존하는 주체가 우리 환경운동가들은 아니거든요. 결국 어민들이 주체가 되어 갯벌을 잘 관리하는 방식을 어떻게 만들어낼 것인가가 중요했던 건데 그걸 분리해서 생각했던 거죠. 그래서 어민들은 그냥 교육의 대상이었던 거죠.

지금은 많이 달라지긴 했지만 단순화시켜 보면 결국 그런 점들이 우리 실패의 원인이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설악산 케이블카 문제도 고민이 커요. 우리가 속초, 양양, 인제, 양구의 주민들이 설악산이라는 자연 자원과 분리되어 있다고 사고하는 순간, 끊임없이 이걸 이용하고 개발하기 위한 방식만 찾아갈 거예요. 이 지역에서 중요한 설악산이라는 자연자원이 보존되는 것이 지역의 발전과 어떤 맥락으로 같이 갈 수 있는지 모델을 만들어주지 않으면….

 

어민들이 주체가 되어 갯벌을 잘 관리하는 방식을 

어떻게 만들어낼 것인가가 중요했던 건데 

그걸 분리해서 생각했던 거죠.

 

이런 이슈는 끊임없이 나올 수밖에 없다?

어느 지역이든 마찬가지예요. 약간 달리 생각해보면 설악산 케이블카를 무조건 배제하면서 보존하는 것이 우리가 주장하는 보존의 개념과 맞는 것일까, 케이블카라는 것은 항상 절대 악이어여야 하나, 과연 케이블카가 선악의 대상인가, 우리가 지역의 개발과 선순환적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고 모든 사람의 진입과 이용을 배제하는 방식으로 해서 보존이 가능한 걸까? 우리가 어떤 지역을 보존하는 방식이 그 지역과 유기적 관계나 선순환적 모델을 만들지 않고 보호하고자 하는 공간이 고립되어 있는 녹색 섬으로 남아 있는 것을 주민들이 수용할 수 있을까? 혹은 환경운동은 수용할 수 있을까? 스스로 질문을 던져보면 불가능할 것 같아요. 우리가 어떻게든 환경영향평가나 제도적 장치를 이용해서 급한 개발 사안을 막을 수는 있겠지만 과연 지금의 개발 사업을 막은 다음에 끝이 날까요? 그건 아닌 것 같아요.

 

운동의 관계 맺기 방식이 잘못되었다는 말씀은 굉장히 중요한 것 같은데요. 이건 단순히 운동의 방식이 바뀌어야 한다는 차원을 넘어서는 이야기거든요. 아까 말씀하셨듯이 새만금을 예로 들면 새만금이라고 하는 자연환경이 있고, 그곳에 발딛고 살아가는 주민들이 있고, 새만금을 보존하자고 하는 환경단체가 있어요. 기존에는 환경단체와 새만금, 주민들이라고 하는 세 주체를 종합적으로 고려해서 운동을 한게 아니라 환경단체가 새만금을 보는 관계 지점으로 주민들을 옮기려고 했다는 말이잖아요. 근데 이 관점에서 보자면 새만금이 아니더라도 지리산댐도 있고, 설악산케이블카도 있고, 비슷한 사안은 여러 곳에 있죠. 여전히 주민들과의 관계 문제는 풀리지 않는 숙제처럼 남아 있어요. 그동안 환경운동이 댐이나 케이블카를 어느 정도 막아낼 수 있었던 이유는 주민들의 조직된 힘이나 댐이나 케이블카가 없어도 충분히 여기에서 잘 살 수 있고 자연환경을 보존할 수 있다는 의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환경단체의 주장이 여러 정치적 맥락 속에서 받아들여진 거죠. 주민들의 힘에 의해서 막아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계속 쳇바퀴 돌듯 반복되는 싸움을 하고 있다는 말로 이해됩니다. 그렇게 때문에 운동의 관계 맺기가 달라져야 한다고 하면 어떻게 관계 맺기를 시작해야 하는 문제가 남는데요.

 

그런 측면에서 보면 가로림조력발전소반대운동(이하, 가로림만) 같은 경우가 성공한 케이스라고 볼 수도 있어요. 가로림만의 경우 거의 10년 간의 싸움이었죠. 보통의 환경이슈를 보면 지역 주민들이 반발하고, 지역단체들이 결합하고, 중앙단체들이 결합해서 시민사회의 힘으로 막아냈다는 과정을 거치면서 끝나잖아요. 이렇게 끝나면 한 10년 정도 지나서 또 같은 이슈가 등장해요. 근데 가로림만 경우는 좀 달랐죠. 조력발전소가 잠정적으로 백지화되고 난 이후, 1년 반 만에 보호지역으로 지정됐거든요. 항구적으로 이곳을 보존할 수 있는 최소한의 제도적 틀이 마련된 거죠. 그 다음에 이곳을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특히 주민 중심의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관리할 수 있는 기구가 만들어졌어요. 이건 제가 볼 때 다른 지역에서 없었던 사례인데 환경단체에서도 모범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다른 사안에 비해 빠른 시간 안에 진행되고 있어요.

 

그렇게 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무엇이었나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일단 그 싸움에서 조력발전소를 막아낼 수 있었던 가장 힘은 주민 동력, 그 중에서도 이 운동에 미쳐있다고까지 표현할 수 있는 리더 한 명, 그 다음에 주민들을 앞서 나가지 않고 이 운동을 지원해온 환경단체, 마지막으로 주민들의 요구를 수용할 수 있는 합리적인 제도가 한 세트였던 것 같아요. 그래도 제일 큰 것은 어촌계장님이라고 하는 분들의 사고의 전환, 그 다음 행동의 전환이었죠. 이 과정은 단체들과 무관하게 그분들 스스로가 가로림만 갯벌을 온전하게 보존하고 지금처럼 주민과 갯벌의 관계 맺기 방식을 계속 유지하는 것이 본인들에게도 좋다는 것을 끊임없이 알아가는 과정이 있었던 것 같아요. 주민들이 다른 지역의 개발된 곳을 계속 찾아가본 것도 큰 동력이었는데 환경단체들의 역할이 조금 바뀐 측면도 있어요.

예전에는 환경단체들이 주민들의 상황이나 역량을 고려하지 과도하게 치고 나갔고, 운동을 이끌어가려고 했었잖아요. 근데 가로림만 싸움에서 단체들은 약간 2선으로 물러나 있었어요. 오히려 주민들이 필요로 하는 보전 방식의 제도가 무엇이 있을까, 정책적 요구가 무엇일까를 정교하게 다듬는 정도의 역할을 했던 거죠. 그리고 그게 실제 가능할 수 있도록 주민들에게는 없는 외부의 전문가를 필요한 요소마다 배치하면서 어떻게 지원할 것인가라는 방식으로 전환했어요.

근데 백지화되고 난 이후에는 그동안 2선에 있었던 단체들이 앞으로 나오면서 운동의 전환이 일어나요. 보통은 싸움을 막는데 앞장선 주민들이 보호지역 지정 문제가 나오면 개발행위 제한 등을 이유로 보호지역 지정을 반대하는 양상이거든요. 보통은 뭔가를 지키기 위한 싸움이 성공한 다음에 보호지역 지정이라는 낯선 행정 제도가 들어올 때, 기존에 우리 편이었던 주민들이 반대편이 되어버리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발생해요. 그때 단체들의 역할이 나오는 거 같아요. 앞선 싸움의 과정에서 오랫동안 함께 하면서 맺어진 신뢰를 바탕으로 1년이라는 기간 동안 앞으로의 비전이나 대안을 어떻게 주민들과 합의해갈 것인가 지점에서 단체들의 새로운 과제가 나오는 거죠. 저는 이런 과정이 있었기 때문에 가로림만의 경우는 성공한 케이스라고 보고 있어요. 그리고 단체들에게도 새로운 질문거리를 던져주죠.

아까 새만금 이야기를 했지만 환경단체가 정한 기준선으로 끌어들일 것인가, 아니면 3자 간의 관계를 융합해서 갈 것인가라는 선택 속에서 우리의 잣대는 마치 고정 불변하는 것으로 보는 경향들이 있어요. 유연하지 못하죠. 우리가 인지하는 범위 내에서 저 방식은 절대 안돼라고 하는 기준 같은 것이 있으니까요. 근데 이번 가로림만은 주민들과 관계를 맺는 것이 첫 번째 기준이었고, 오히려 이것을 유지하기 위해서 단체에서는 본인들의 주장하는 여러 가지 제도들 중에서 주민들에게 가장 원활하게 수용될 수 있는 게 무엇일까를 생각하면서 설득하는 일을 했던 게 성공요인이라고 봐요.

 

그렇군요. 다른 이야기를 하나 해볼께요. 관계 맺기 방식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동안 시민단체가 해온 고유한 역할이 점점 축소되고 있긴 해도 시민들과 활동가, 하나의 시민단체와 전체 시민사회, 그리고 이 사회와 관계 맺게 해주는 작업을 누군가는 해야 할 것 같아요. 시민사회단체들이 꼭 그걸 해야 한다는 건 아니고 기존 단체는 지금 시기에 필요한 단체로서의 역할을 재구성해서 하면 되겠죠. 지금은 시민과 시민, 활동가와 시민단체, 시민단체와 시민사회, 그리고 여러 다양한 영역들 사이의 틈을 메꿔주거나 연결고리를 찾아주는 일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이걸 누가 해야 할까요? 시민사회 내에서 새로운 관계 맺기를 어떻게 누가 시작할 수 있을지 고민이 좀 됩니다. 과거에는 시민사회의 리더들이 모여서 이런 점들을 고민했던 것 같아요. 한국의 시민사회가 어떻게 가야 할지 모여서 이야기도 하고, 새로운 판을 만들기도 하고 했는데 지금은 그런 게 없는 것 같거든요.

지금은 비전과 지혜를 구하는 어른이 없는 시대라고 하죠. 어른이 없어요. 그러니까 시민사회만 하더라도 어른이 없는 시대인 것 같아요. 신뢰를 하고 권위를 가진 존중할만한 어른이 없는 시대인거죠.

 

어른이 없다는 게 꼭 나쁘다는 의미는 아니죠?

꼭 나쁘다고 볼 수는 없지만 나쁘다는 의미도 갖고 있긴 하죠. 과거에는 우리가 개별적으로 흩어져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통의 꼭지점은 있었던 것 같아요. 이쪽과 저쪽 네트워크를 연결해주는 꼭지점들에 대한 신뢰는 있었죠.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잖아요. 솔직한 이야기로 환경운동가들한테 지금 환경운동 안에서 롤모델로 존경하는 환경운동가가 누가 있냐고 하면 없다는 사람 많을 거예요. 어떻게 보면 굉장히 불행한 현상이죠. 근데 또 한편으로 보면 다른 방식으로 무엇인가가 형성되고 있는 시기라는 생각도 들어요. 새로운 시도와 실험들이 진행 중이고 밑바닥부터 조금씩 달라지는 것들이 있으니까요. 과거에는 단체가 대정부 관계를 둘러싼 결사체 성격이 강했기 때문에 세상이 망해도 나는 이 길을 가겠다고 했잖아요. 근데 지금은 관계의 다양성은 확장되어 가는데 관계망 하나하나를 보면, 특히나 관계와 관계를 매개해주는 지점이 굉장히 취약해요.

생성과 소멸의 시간도 굉장히 짧아진 거 같아요. 과거에 단체들을 보면 대략 15년 주기로 움직였던 것 같아요. 성장기 5년 정도는 굉장히 활발하고, 5년에서 10년 정도는 피크타임으로 가다가, 나머지 5년은 활동력이 떨어지는 거죠. 단체의 활동력이 굉장히 높아지고 난 이후에 전환기를 못가지면 그 다음엔 쇠락해서 그냥 가는 상태가 되는 거죠. 근데 지금은 주기가 굉장히 짧아졌어요. 그렇기 때문에 아까 말했던 것처럼 네트워크를 확장하면서 그 다양성이 어떻게 시민사회의 힘이 되게 할 것인가가 중요해졌어요. 중간지원조직이 역할을 할 수도 있겠지만 질적 전환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점을 이끌어줄 수 있는 곳은 잘 안 보이는 것 같아요. 

요즘 환경운동 안에서 제일 확장력이 강한 곳이 어디인줄 아세요? 운동 분야별로 한번 모이자고 하면 어디가 제일 많이 모일 것 같아요? 케이블카이나 댐 이슈로 모이자고 하면 한 100명 모여요. 지역까지 다 합쳐서요. 근데 환경교육 관련해서 모이자고 하면 300명 이상이 모여요. 1년에 300명 정도가 모여서 워크숍을 해요. 예전에는 다 개별적으로 지역별로 움직이던 사람들이 만나서 연결될 필요성에 공감해서 모이는 거죠. 강 살리기 이슈의 경우에도 약 1,000명 정도가 그 활동을 해요. 미친 듯이 이 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묶어내는 누군가가 있었던 거죠. 근데 그렇게 모이는 것은 어째튼 공통적인 요구가 있기 때문에 가능하거든요. 이렇게 꼭지점을 서로 연결해주는 활동을 활동가의 역할로, 조직의 역할로 봐야 할지 모르겠지만 사람들과 활동들을 서로 네트워킹시켜주고, 그 다음에 그 분야에서 지금의 운동 과제와 목표들을 어떻게 잡아나갈 것인가를 논의하면서 찾아가는 그런 노력이 필요해

근데 생각해보면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운동 이슈, 예를 들어 반핵운동을 보면 지금이 어느 단계인지, 이 운동이 어느 수준으로 올라와 있는지, 의제와 목표가 무엇이어야 할지 깊이 있는 논의는 부족한 것 같아요. 탈핵이 궁극적인 목표라고 봤을 때 운동의 계단을 설정해놓고 이 시기에 우리가 달성해야 할 목표가 뭘까에 대해 논의해봤나 생각해보면 없는 것 같아요. 모든 기준이 탈핵이냐 아니냐라고 하는 굉장히 직선적인 질문과 답변 밖에 없어요. 그러면 점점 협소해지거든요. 지금 운동이 만나야 할 곳, 설득해야 할 곳, 확장해야 할 곳에 대한 판단이 굉장히 협소해지면서 우리 우군이 되어야 할 사람들 조차도 적으로 규정하는 일들이 많아져요.

지역 단위로 강 보존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아요. 올해 초 4대강 때문에 모여서 평가 회의를 했는데 제가 곰곰히 생각해봤어요. 왜 4대강 운동이 실패했을까? 정말 우리가 놓친 것은 무엇일까? 최근에 <참여연대>를 보면 활동이 많이 바뀌고 있더라구요. 그 중에 제일 부러운 것이 참여사회아카데미예요. 참여사회아카데미가 잘하고 있느냐, 못하고 있느냐를 떠나서 <참여연대>의 기존 활동이 정치 문제를 중심으로 한 대정부 관계와 국회  관계 중심이었다면 지금은 시민교육 관련 부분과 절반씩 나눠진 거 같아요. 그러면서 다양한 의제에 대한 시민교육을 통해 그것을 조직화해 나가는 방식으로 영역을 확장시키고 있고, 그것이 자발적인 모임이 되고, 그것이 참여연대라는 구심점을 중심으로 네트워크되는 방식으로 가고 있거든요. 지금은 참여연대가 이 네트워크를 조직화하는 방식이지만 나중에는 이런 자발적 네트워크가 조직의 방식을 전환하게 될 거라고 봐요.

 

지금은 관계의 다양성은 확장되어 가는데 

관계와 관계를 매개해주는 지점이 굉장히 취약해요.

 

단체를 둘러싼 네트워크나 자발적 모임들이 참여연대를 바꾸고 규정할거다?

네, 오히려 그렇게 될 거란 생각이 들어요. 이미 우리사회도 축이 바뀌고 있다고 생각해요. 온라인 운동이 이미 오프라인 운동을 강제하는 방식으로 가고 있고, 지금 스토리 펀딩이나 이런 것들을 보면 온라인 속에서 오프라인을 규정하는 부분들이 상당히 강해지고 있어요. 조직관계도 과거에는 정형화된 틀 안으로 대중들을 조직해가는 방식이었다면 앞으로는 반대의 방식으로 될 거라는 생각이 들구요. 지금의 강 살리기 운동이나 환경교육을 봐도 오히려 밑에서 먼저 만들어지고 이것이 다시 본인들의 활동을 좀 더 확장시키는 개념으로 가는 거죠. 과거처럼 지도하는 개념은 아니예요. 뭐라고 해야 될까요? 정리하기는 어렵지만 다중의 네트워크 속에서 꼭짓점들을 새로운 방식으로 조직하고 있는 건데 이런 일을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같은 곳에서 할 수 있을 것 같은가요?

 

누가 할 것인가는 지금 중요한 것 같진 않고요. 누군가가 해야 한다면 개인일 수도 있고 조직일 수도 있는데 그 누군가가 갖추어야 할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궁금증은 있어요. 매개 역할을 해주거나 꼭지점이 되거나 서로 연결해줄 수 있는 사람 혹은 그룹이 갖추어야 할 조건은 무엇일까요? 아까 신뢰에 대해서 이야기하셨는데 지금 시점에서 사람들에게 신뢰를 줄 수 있는 그룹이 없다고 하면 이 다양한 시민단체와 활동가들이 인정할만한 자격 조건은 무엇일까요?

저는 이런 표현을 자주 쓰는데, 별 짓을 해도 안될 때는 안되요.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일도 시대의 운이 맞아야 한다고 이야기하듯이 별 짓을 해도 안될 때가 있는 거예요. 운동은 사회적 과정이잖아요. 세상과 동떨어진 운동이란 건 존재하지 않아요. 제가 너무 비관적으로 보는 것일 수도 있지만 운동도 자기 역량을 다 바쳐도 안될 때는 안되는 거예요. 그때는 말 그대로 버티면서 내실을 다져야 해요. 그러다보면 될 때가 또 옵니다. 무슨 이야기냐면 그만큼의 절박성을 가지고 있을 때는 자연발생적으로 맞을 때가 있어요. 지금과 같은 시국 상황에 대해서 우리가 한 달 전에는 이럴 줄 알았나요? 이 거대한 광장을 움직이는데 시민사회단체와 노동단체, 민중단체들이 자임해서 현장에 나와 집회도 만들고 하지만요. 이 광장에 나온 사람들이 이 사람들을 지도부로 인정하지 않잖아요.

제가 지난 번에 촛불광장 관련해서 단체들 간의 회의를 한번 갔어요. 제가 몇 년만에 나간 회의인데 한동안 이해가 안되는 거예요. 말 자체도 그렇고 왜 저렇게 생각하지? 어떻게 저런 말을 쓰지? 어떻게 저런 분석이 나오지? 이런 의문만 들었어요. 한번 생각해 보자구요. 예를 들어서 이 광장을 움직이는 사람들을 이끄는 지도부가 구성될 필요가 있냐고 할 때 사람들이 필요하다고 해요. 그러면 그 지도부가 가져야 할 자질은 뭘까요? 뭐라고 생각하세요?

 

제가 방금 여쭤본 것하고 비슷한 맥락의 질문이라는 거죠? 저는 첫째가 신뢰라고 생각해요. 신뢰라고 하는 건 바로 얻어지는 게 아니고 운동의 과정 속에서 생기는 거지만 능력과는 다른 거죠. 두 번째로는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대중과 소통할 수 있는 가슴과 머리를 가지고 있느냐가 중요하지 않을까요?

비슷할 거 같아요. 말씀하신 신뢰와 커뮤니케이션 능력은 기본이죠. 저는 거기에 추가해서 시민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정서적 기반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솔직한 이야기로 세상 사람들과 정서가 다른데 어떻게 이야기가 가능하겠어요. 20년 차이가 나는 활동가하고 제가 같은 조직에 있으면서도 말이 통하는지 의문이 드는데 말이죠. 거기에 하나 더 필요하다면 통찰력이겠죠. 저는 리더는 통찰력은 분명히 있어야 된다고 생각해요. 광장에 모인 100만 명의 사람들과 하루가 걸리든 100일이 걸리든 간에 우리 세상이 어떻게 가야 된다는 걸 제시할 수 있는 통찰력이 있어야죠. 그건 환경교육 분야에서도 도 마찬가지고 연안습지보존운동에서도 마찬가지예요. 과거처럼 쪽수로 승부를 보는 시대는 지났잖아요.

아까 이야기했듯이 시민들도 집회만 해서 세상이 바뀐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어디로 갈 것인가에 대한 비전과 대안, 그것을 어떻게 이룰 것인지에 대해서도 신뢰와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있어야 가능하죠. 골프장 반대운동도 마찬가지예요. 20년 간의 골프장 반대운동의 평가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갈 것인가에 대해서는 그 운동을 담당하는 활동가가 고민을 해야죠. 운동의 기법은 발전할 대로 이미 발전했어요. 어떻게 이슈화시키고, 어떤 매체를 통해 이슈를 확산시키고, 어떻게 알려나가는지에 대한 방법들은 이미 많아요. 하지만 다음 단계까지 나아가기 위해서는 이 운동이 어떤 방향과 목표를 가지고 가야만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는 게 있어야 하는 거죠. 우리에게 어른이 없다는 건 사실 이런 것이기도 해요. 우리가 이명박부터 박근혜 시대까지를 살아오면서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지, 어떻게 운동을 해야 하는지, 우리가 그리는 다음 세상은 어때야 하는지 등을 이야기해주는 어른들이 없었잖아요.

 

방금 말씀 하신 내용이 아까 말씀하신 관계 맺기와 관련이 있네요. 광장에 모인 100만 명의 시민들을 어떤 방향으로 끌고 갈 것이냐에 대한 고민 보다는 광장에 모인 시민들과 판을 만든 조직과 현장에 나온 수많은 활동가들이 서로 어떻게 관계 맺기를 하고 그 안에서 역할을 찾을 것인지를 먼저 고민해야 한다는 말씀이시죠?

사실 80년대, 90년대, 2000년대 초반까지 우리 운동은 대정부 관계 속에서 광장에 모이는 쪽수의 운동이었어요. 죄송한 표현일 수 있지만 노동운동도 마찬가지고요. 우리 쪽수가 많네, 저네 쪽수가 많네… 극단적인 표현일 수 있지만 그런 방식의 운동이었단 말이예요. 삶의 영역 안에서 본인들의 문제가 무엇인가를 알아내고 그 문제를 스스로 바꿔나가는 방식의 운동이 아니었던 거예요. 광우병 촛불집회 당시 70만 명이 모였다고 하지만 그 이후에 그 만큼의 숫자가 어디선가 조직되어서 끊임없이 우리 세상의 한 복판에서 활동해나간 적은 없어요. 탄핵 이후 정치가 어떻게 변해야 하는지 물어보려면 어디선가 정치를 바꾸고자 하는 사람들의 모임이 끊임없이 움직여야 하는 거잖아요. 물론 몇몇 조직이나 사람들이 온라인 중심의 커뮤니티를 만들자는 이야기도 하고 오프라인 조직을 만드는 것도 제안하지만 사실은 이런 모임들이 우리 생활에서 국가시스템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어떻게 해야만 세상이 진짜 바뀔 수 있는지 생각해봐야 하는 거죠.

환경 운동도 1차 수요자를 놓치면서 그들을 주변화시키고 대상화시키면서 단절되어 왔잖아요. 이번에 시민평의회 혹은 시민 대토론회 등의 새로운 시도기 진행되고 있는데 시민들의 시선으로 현재의 상황을 바라보며 앞으로의 방향을 모색하는 좋은 자리라고 생각해요. 이런 방식은 100만 명의 맨 왼쪽과 맨 오른쪽 양극단에 있는 사람의 시선에서 보면 웃기는 일일 수도 있어요. 양쪽의 끝에 있는 사람들이 볼 때는 눈에 들어오지 않겠죠. 결국 각자의 색깔에 맞는 운동을 할 수 밖에 없는데 다양성을 인정하고 조율하려는 노력이 없으면 광우병 집회 이후처럼 결국엔 맨 왼쪽만 남고 다 떠나는가는 상황이 반복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 동안은 평상시에 미래에 대한 준비, 과정에 대한 고민들을 시민들하고 나누는 과정을 안 거쳐왔잖아요. 그냥 단타치기만 했다고 해야 할까요? 그런 고민들이 들어요. 예를 들어, 생태지평의 활동 중에서 DMZ 보전 활동이 있어요. DMZ 주변에 살고 있는 사람들과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될지를 알고 싶어서 재작년에 양구에 있는 23개 마을을 두 번씩 방문했는데요. 마을 회관에서 동네 분들하고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우리 스스로가 마을에 대한 이해가 없는 거예요. DMZ에 대한 국가 정책이나 개발 정책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는데 정작 관계를 맺어야 할 마을에 대한 이해가 없다보니까 보존운동에 대한 방식 차이가 확 드러나는 거예요. 근데 전체 마을별로 두 번을 돌았더니 눈에 보이기 시작하는 게 있더라구요. 왜 이 마을과 저 마을 간에는 관계가 서먹서먹한지, 왜 이 동네에서는 아직 관념 속의 전쟁이 안 끝났는지가 이해되기 시작한 거죠.

 

환경 운동도 1차 수요자를 놓치면서 

그들을 주변화시키고 대상화시키면서 단절되어 왔잖아요.

 

그렇군요. 명호 선생님은 스스로를 시민운동가라고 생각하세요?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을 하죠.

 

최근에 사회혁신가라는 말을 써요. 단순하게 생각하면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 사회혁신을 위해 일하는 사람인데 그렇게 지칭되는 순간 망설여지는 게 있어요. 예전에 처음 운동을 시작할 때는 시민운동가라는 말을 당연하게 썼는데 지금은 그런 말 안 쓰죠. 그냥 활동가나 공익활동가라고 해요. 시간이 흐르면서 달라졌겠지만 지금 시점에 ‘시민운동가’라는 정체성에 대해서는 어떤 느낌과 생각을 갖고 계신지 궁금하네요.

시민운동가라는 말이 왜 이제는 잘 쓰이지 않는지에 대해서는 오랜 토론이 필요할 것 같지만요. 환경단체에서 일을 시작하고 3년 정도 지날 때 생각이 많이 바뀌었어요. 내가 가지고 있던 세상에 대한 잣대가 과연 올바른가에 대해서 많이 생각했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학생 운동할 때 가지고 있던 생각이 깔려 있더라구요.

그 시점에 ‘시민운동가’는 잘 모르겠지만 ‘환경운동가’라는 말을 나에게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지 고민이 많이 되더라구요. 예를 들어 저보고 생명운동가냐, 환경운동가냐고 하면 저는 생명운동가는 아니라고 그랬을 거예요. 실제도 지금도 저에게 생태주의 또는 생명운동가냐고 하면 저는 잘 모르겠어요. 근데 어떤 곳에서는 저를 전문가라고도 해요. 해양갯벌분야 전문가라고요. 내가 전문가인가? 근데 스스로를 무엇이라고 규정하면 그것이 나의 정체성을 가두는 위험성도 있다고 생각해요.

시민운동가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내 마음 속에는 두 가지가 다 있는 거 같아요. 기존 방식에 대한 부정도 있고, 기존 진영에 대한 기대감도 있어요. 제가 놓치지 말아야 되겠다고 생각한 부분들 있잖아요. 애매한 경계선에 있는 경계인이라는 생각도 들고요. 밖에서는 저를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러요. 근데 그렇게 규정되는 순간 관계 맺기나 활동의 폭이 좁아져요. 예를 들어 ‘명호는 시민운동가다’라고 말하는 것은 상대방이 가지고 있는 선험적 관념의 틀로 낙인을 찍는 위험성도 있어요. 어째튼 이런 문제는 내가 속해 있는 시민사회라고 하는 이곳이 사회 변화에 따라 게속 요동칠 것이기 때문에 명확히 뭐라고 규정하기는 힘들 것 같아요.

주민들을 만나면요. 뒤에 무슨 직책을 붙는가가 굉장히 중요해져요. 딱 선이 그어져요. 관공서 회의하고 할 때는 선생님이란 말이 붙어요. 주민들 만나러 가면 뒤에 아무 직함이나 직책도 붙이지 말라고 그러는데 잘 안되죠. 주민들이 제가 광장에 나와서 집회하고 그러는 사람으로 보는 순간 인식이 달라져요. 우리가 일상적으로 만나는 사람들은 지금 살고 있는 2016년 11월의 여기 서울의 사람이 아니라 내일 모레 당장 200만 명이 광장에 모인다 하더라도 동네에서 김장축제를 해야 한다고 모이는 사람들이예요. 그러니까 여전히 안팎으로 나의 위치와 정체성이 뭘까는 계속 혼동될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이 질문은 명호 선생님에게 해야지 다른 사람에게는 못할 것 같은데요. 시간이 꽤 지나기도 했으니까요. 새만금 운동하면 떠오르는 상징적이 운동이 삼보일배와 오체투지예요. 지금 그 운동에 대해 평가해달라는 것은 아니고 지금 가지고 있는 생각을 기준으로 보면 그 당시의 운동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제가 흔치 않게도 순례를 무려 4번씩이나 해봤어요. 사실 저에게는 굉장히 도움이 됐죠. 그때가 개인적으로 ‘아 힘들어서 도저히 못해먹겠다’는 그런 시점이었거든요. 개인적으로는 순례의 과정을 통해서 다 털어내는, 속을 비우는 계기였던 것 같아요. 제가 2013년에 힘들어서 아내하고 같이 산티아고 순례를 다녀왔어요. 사무실에는 출발 일주일 전에 앞으로 석 달간 없을 테니 찾지 말라고 하구요. 난리가 났죠. 3개월 산티아고 다녀오고 나서 무작정 지금 살고 있는 무안으로 내려갔어요. 우리가 부부였지만 그때 처음으로 서로 간의 운동방식에 대해 이야기도 하고,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서도 이야기해봤어요. 그러면서 첫 번째로 합의한 게 서울을 벗어나자였죠. 

운동이라는 것이 일종의 중독성이 있어요. 사람이 무언가를 가리킬 때 이렇게 손가락질 하잖아요. 손가락 2개는 상대방에게 가는데 3개는 저를 향해 있어요. 누군가를 비판한다는 것은 결국은 내 안에도 그 만큼의 화가 쌓여있다는 말이예요. 상대방에게 2개를 지적질하면 3개는 결국 내 안에 들어와서 쌓여가요. 그게 분노가 되기도 하구요.

활동가들에게 인문학적 소양을 쌓아야 한다고 이야기하잖아요. 저는 오히려 아무 것도 안하고 빼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단식을 통해서 몸 안의 독소를 빼듯이 자기를 돌아보는 그런 과정이 있어야 해요. 그게 뭐 앉아서 명상한다고 빠지겠어요. 성직자나 그렇게 앉아서 명상하는 거지. 활동 시간이 길어 쌓인 공력이 많을수록 그만큼의 시간의 독소를 빼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시민운동 차원에서 삼보일배나 오체투지와 같은 운동이 운동 전체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는 상당히 고민을 많이 해봐야 하고 평가도 해봐야겠죠. 삼보일배가 끝나고 나서 3년 정도까지는 종교계 내부에서도 평가가 있었고 사회 철학적 평가들도 있었어요. 근데 어느 순간 보니까 삼보일배라고 하는 것이 운동의 한 방법이 되어버렸더라구요.


노무현 대통령 탄핵 당시에도 추미애씨가 삼보일배를 했죠.

노동계도 삼보일배를 했어요. 제가 그런 부분들에 대해서는 평가를 할 자격도 없고 주체도 아니어서 잘 모르겠어요. 근데 삼보일배 혹은 오체투지를 진행했던 사람의 입장에서 봤을 때는 상대방에게 2개의 손가락을 던져서 질문을 했다면 3개는 우리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이었거든요. 그 운동을 통해 생명에 대한 문제나 우리 안의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성찰을 주문했던 건데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이 그걸 하나의 전술적인 개념으로 이해를 하기 시작하더라구요. 우리의 활동방식이 지속가능한 것인지, 근본적인 부분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끊임없이 우리 안을 되돌아보자는 이야기들이었는데 말이죠. 

지금은 오체투지든 삼보일배든 다 하잖아요. 그때 저는 무슨 생각을 할까요? 슬프다는 느낌 같은 건 아니예요. 왜냐면 모든 사람들은 절박한 상황 속에서 어떤 행위들을 결정하거든요. 그 절박함 속에서는 그 행동이 가장 합리적일 수밖에 없어요. 일정 정도 시간이 지난 뒤에 그 행위를 보고 맞냐 틀리냐 판단할 수 있겠지만 그 시점에서는 모든 사람이 절박하기 때문에 그 행동들이 나오는 거겠죠.

되돌아보면 원래 소리를 지르면 오는 소리가 있어야 하잖아요. 근데 되돌아오는 답변은 그게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주변에서 평가를 해보자는 이야기를 많이 하세요. 삼보일배나 오체투지를 하신 분들도 그렇구요. 근데 저는 아직 시간이 아닌 거 같아요. 좀 더 기다려야 해요. 아직 우리가 그걸 이야기할 준비가 안 되어 있어요. 저한테는 굉장히 좋은 계기가 됐고 나를 다시 세우는 과정이었지만 전체 운동 관점에서의 평가는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삼보일배를 통해 우리 안의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성찰을 주문했던 건데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이 전술적인 개념으로 이해를 하기 시작해

 

하나의 운동 사례 속에 굉장히 좋은 단체와 사람의 역할이 있었다면 그냥 그 단체와 사람의 독특한 리더십이 있어서 가능했다고 평가하고 끝나면 안되잖아요. 지금 시기에 단체와 활동가가 어떤 방향으로 운동을 하면 좋겠다라고 하는 보편적인 역할론 같은 게 있을텐데, 그걸 생각하신 적 있으신가요?

 

보편적 역할론은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다른 영역으로 확장하면 어려울 수 있는데 환경 쪽만 놓고 보면요. 87년도 현대중공업 파업 당시 나왔던 유인물을 보면 ‘두발 자유’라는 내용이 들어있어요. 복장의 자유라는 말도 나오고요. 근데 지금은 아니잖아요. 무슨 이야기냐면 시민 운동하는 사람들이 우리가 함께하는 사람을 어떤 개념으로 부르건, 예를 들어 국민, 주민, 시민, 어떤 말로 부르더라도 그분들이 가지고 있는 역량은 엄청나게 발전한 거예요. 우리와 함께 한 사람들의 역량은 엄청나게 발전했는데 우리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는 것 같아요.

이런 이야기해서 죄송하지만 제가 20년 동안 시민운동을 했어요. 제가 발전했을까요 물어보면 저는 발전한 거 같지 않아요. 어느 단계에서 정체했다는 느낌을 받아요. 제가 함께 활동하는 단체의 사무처장들에게 나는 최대한 빨리 그만두고 싶다고 해요. 어디 보니까 60대까지 단체에서 계속 운동하고 싶다는 분들도 계시는 거 같은데 저는 그러면 안된다고 생각해요. 사람들은 변하고 시대가 변하고 있는데 운동만 그 자리에 있어요. 한 단체에서 20년간 활동하는 것이 자랑일까요? 저는 여기서부터 문제가 생긴다고 생각해요. 변화하는 세상을 이해할 수 있을까요? 저는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그렇게 때문에 일정 단계에서부터는 성장하기 보다는 내가 아는 범주에서 실수를 줄이기 위해서 노력하는 거죠. 근데 실수를 줄이는 노력은 발전이 아니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저는 20년, 30년 활동하다가 다시 평활동가로 단체가 끝날 때까지 운동하고 싶다는 건 적절치 않다고 생각해요. 20년이면요. 같은 단체 안에서도 후배활동가들이 들어오면 의사소통이 잘 안돼요. 정작 자기 단체 활동가들하고도 의사소통이 안되는데 시민들하고 의사소통이 되겠어요? 안되죠.

예전에는 우리가 이 만큼 앞서 있었기 때문에 시민, 국민, 주민들의 의식 수준도 떨어지고 방법도 잘 모르기 때문에 가서 조직화하고 의식화해야 한다는 표현을 썼잖아요. 요즘은 어떤가요? 시민들이 훨씬 빨리 알아요. 더 빨리 분석해요. 그리고 더 많이 찾아봐요. 사무실에 앉아 있는 한두 명의 활동가가 그 사안을 다 알 수 있겠어요? 옛날에는 우리가 다 제시했잖아요. 지금은 그게 아니죠. 어떤 공간과 장을 새로 열어야 되는 거잖아요.

연안습지보존운동만 보더라도 중앙은 없어요. 중앙이 아니라 서울에서는 저희 밖에 없어요. 지역에요? 엄청나게 많아요. 그러데 어떤 일이 벌어졌을 때 중앙단체들이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어요? 관계망이 바뀌었어요. 역전된 거죠. 중앙 단체들은 불가피하게 현재 방식으로 갈 수 밖에 없을 거예요. 관성이라는 게 있잖아요. 우리가 수자원공사는 댐을 만들지 않으면 망한다고 표현하듯이 서울에 있는 단체들도 이 방식을 멈추는 순간 망한다고 하는 위기의식을 가지고 있어요. 한 순간 바꾸기는 어려워요. 근데 생각을 해봐야죠. 우리 운동의 수요자가 누굴까, 내가 활동을 해서 결과물을 만들어 냈을 때 이걸 보고 자기 생활을 바꾸는데 함께 해줄 사람이 누굴까, 정부 관료들일까요? 지금은 기존 관성을 벗어나지 못한다 할지라도 일정 정도의 영역은 실험을 해야 돼요. 100이라는 영역을 놓고 본면 최소한 30 정도는 새로운 방식으로 움직일 수 있는지, 이게 우리가 고유한 의제로 삼고 있는 영역에서 가능한지 이야기해봐야 해요.


새만금 운동 이야기부터 지금까지 운동 자체에 대한 이야기였다면 이제는 단체 이야기를 해보고 싶은데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시민단체라는 게 길게 보면 87년 이후에 재야에 있던 혹은 지하에 있던 단체들이 공개적으로 드러나고, 나중에는 단체로서 법인화 할거냐 말거냐로 고민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정착된 지 20~30년 된 거 같아요. 90년대 후반에 생긴 단체들도 꽤 많으니까요. 비슷한 조직 형태가 벌써 20년, 30년 됐으니까 사실은 조직에 대한 의문이 굉장히 많은 시기이긴 해요. 과연 우리가 몸담고 있는 단체가 지금 시기에 사람들과 새롭게 관계를 맺고, 우리 주장을 전달하고, 우리가 뜻하고자 하는 바를 펼치는데 적절하냐에 대한 의문이 있는 거죠. 그래서 이제 그런 의문을 품고 있는 사람들 중에는 기존의 단체에 들어가지 않고 모임 수준으로 운영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혼자 하겠다는 사람들도 있어요. 전 그런 상황은 인정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편이예요. 그것까지도 시민사회 영역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렇다면 이미 20~30년의 정형화된 틀을 가지고 있는 단체는 이후에 어떤 방향으로 전환을 모색해야 하는 걸까요? 하나의 해법을 제시할 수는 없는 문제지만 그런 지점에서 어떤 고민을 하고 계신가요?

우리가 제도로 말하는 시민단체 이건 굉장히 협소해졌어요. 전형적으로 우리가 말하는 시민단체는 결사체의 의미가 강하죠. 주로 대정부 관계를 중심으로 한 결사체요. 한국에서 NGO라는 것은 여전히 87년 체제가 만들었던 민주주의라는 제도의 틀 안에서, 또는 정부와의 관계 내에서만 설명했던 협소한 개념일 수 있어요. 참여 자체의 민주주의 그 개념이었던 거예요. 근데 우리가 세상을 바꾸자라는 말은 본인이 느끼는 세상의 비합리성에 대해 본인만의 방식이든, 집단만의 방식이든 간에 바꿔나가는 거거든요. 그런 시민들의 활동방식들이 점점 확산되고 있는 거잖아요.

마을운동만 하더라도 자발적이냐 아니냐의 문제가 남아있겠지만 체제가 무너지더라도 마을이나 생활 공간을 바꿔가는 방식으로 되는 거잖아요. 일단 세상은 그렇게 가고 있어요. 앞으로도 이런 흐름들은 많아질 거구요. 우리의 전통적인 관점에서 보면 씨줄, 이것을 어떻게 엮어줄 것인가가 필요한 시점이죠. 근데 이게 시민단체의 역할이냐? 그건 의문점이 좀 생기네요. 자발적으로 나타나는 커뮤니티와 1인 활동가, 그리고 시민사회가 어떻게 상호관계를 맺을 것인가 중에서 1인 활동가와 단체의 관계는 아직 해법을 못 찾고 있는 것 같아요. 길을 잃어버렸다고 해야 하나? 연안습지보존운동을 예로 들면 새만금 운동 이후 중앙 방식의 갯벌 보존운동은 철저히 실패했어요. 근데 모순적이게도 새만금 운동 이후 우리나라 전체적으로 연안습지보존운동은 굉장히 확산되었거든요. 새만금  운동 이후 연안습지가 중요하다가는 것을 알고 일반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시작한 운동이 굉장히 활성화되었어요. 연안습지에 대한 인식이 높아진 거고 지역에서 그런 활동을 하는 곳들도 많아요.

'생태지평’은 그 사이에 존해하는 건데요. 그러니까 직접 시민들을 상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활동을 하는 개인과 단체들의 중간쯤 어딘가에서 우리 역할을 찾아야겠다 생각한 거죠. 양쪽에 어떤 정책과 활동 비전을 공급할 것인가, 그리고 이 분들이 필요로 하는 것들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서로를 연결하는 곳으로 우리 역할을 규정한 거예요. 이게 저는 이 영역에서 새로 고민해낼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물론 이게 성공할 수 있느냐는 약간 별개의 문제지만요. 여전히 그러한 새로운 관계망에서의 단체의 역할에 대해서는 고민이 계속되는 상황이죠.

 

운동은 세상의 비합리성에 대해 본인만의 방식으로 바꿔나가는 것,

현재는 그런 시민들의 활동 방식들이 점점 다양화되고 확산되고 있는 시기

 

이런 거 아닐까요? 전통적으로 영향력을 크게 행사해 왔던 시민단체들의 의미 자체가 없어진 건 아니죠. 근데 거기서 일하고 있는 당사자 입장에서 보면 새롭게 역할 규정을 하고 싶어도 여전히 기존에 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역할이 있죠. 시민 참여도 이끌어야 하고, 회원들과 관계도 맺어야 되고, 전문가들도 참여시켜야 되고. 그러니까 새로운 포지션으로 가야 된다고는 생각하지만 기존에 가지고 있는 일들의 가지를 자르지 못한 채 계속 새로운 것만 추가되니까 어려운거겠죠.

 

약간 불행한 표현인데 제가 운동은 중독이란 표현을 써요. 활동가가 1년차가 되면 선배들이 중요하게 해줘야하는 역할 중 하나가 이 활동가가 과연 이 단체와 맞을까, 계속 할 수 있을까, 그런 판단을 함께 해줘야 해요. 안될 것 같으면 다른 길을 안내를 하든지 해줘야죠. 그리고 3년 정도 지나고 나면 활동가가 자기 영역을 찾아야 돼요. 내가 정말 해보고 싶은 분야의 의제가 뭔지, 무슨 운동을 할 것인지 찾아야 하고요. 5년 정도 지나고 나면 사실 그 영역을 벗어나기 어려워요. 한 분야만 5년을 하면 그 만큼 그 분야를 아는 사람도 많지 않고요. 5년 지나면 다른 의제로 전환하기가 쉽지가 않아요. 그리고 세상살이가요. 개인 생활도 마찬가지로 그 방식으로 가요. 근데 불행히도 운동단체에 있는 사람들은 뭔가 문제점을 찾아가는 데는 선수예요. 문제를 분석하는 영역은 잘해요. 5년 이상 지나면요. 제가 생각할 때는 운동이 그냥 생활이예요. 이걸 끊는 게 어려워요. 그래서 저는 중독이라고 생각을 하거든요.

제가 ‘생태지평’ 일을 하면서 어려웠던 게 뭐냐면 현안 싸움은 결합하지 않는다라고 했어요. 내가 그 분야 운동을 하고 있지만 현안 싸움에는 결합하지도 않고 성명서도 안내고 보도자료도 안내고 집회도  안 나가겠다고 했어요. 아까 말했듯이 ‘생태지평’ 운동의 1차 수요자는 시민이 아니니까요. 근데 이걸 끊기가 굉장히 어려워요. 우리가 이렇게 가도 괜찮나? 그런 불안감도 생겨요. 우리가 새로운 방식으로 하고 있다는 생각은 하지만 이걸 환경운동이라고 할 수 있나 싶기도 해요. 요즘도 그런 부분이 있어요. 촛불 정국을 보면 우리가 이러고 있어도 되나는 고민도 하죠. 근데 환경 관련 의제에서는 호흡이 좀 차분해졌어요.

 

스스로의 역할을 재규정하신 거네요. 아니 단체의 출발 자체를 이렇게 하셨으니까요. 그렇다면 단체의 역할은 재규정은 하셨는데 활동가로서 단체 내부에서의 역할은 어떠신가요?

저는 정말 제가 오래 있으면 ‘생태지평’ 문 닫아야 된다고 생각해요. 제가 우리 단체에 처음 들어오는 활동가하고 이야기를 해보면요. 제가 사람을 뽑긴 했지만 지내다보면 잘 모르겠어요. 솔직한 이야기로 일은 하겠죠. 근데 사람을 잘 모르겠어요. 세대를 잘 모르겠어요. 이제 20대 후반의 활동가가 들어오잖아요. 20년 차이가 나는 거예요. 단체들마다 활동가 새로 들어오면 마음껏 해보라고 했을 때, 안 되면 기존 방식으로 해서 일정 정도는 끌고 갈 수 있어요. 그게 좋은 방식이든 나쁜 방식이든 굴러는 가겠죠. 근데 사람을 잘 모르겠어요.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시간도 많지 않고 하루에 8시간 나와서 일을 하지만 저녁에 술 먹는다고 해서 일주일 내내 붙어 있는 것도 아니고요. 솔직히 이 세대들이 가지는 특성이나 이런 부분들에 대해서는 안다고 이야기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인적 구성이 피라미드 구조로 가서 위에는 정말 몇 명만 남겨놓고 그 밖의 사람들은 다른 영역으로 확장해 나가는 게 맞다고 생각해요. 활동한지 20년쯤 되면요. 이 사람이 가지고 있는 사회적 네트워크도 꽤 넓어요. 오히려 이 넓은 네트워크를 단체 안에서 써먹지도 못하고 있는 거죠. 오히려 단체 밖으로 가서 확장할 수 있는 영역에서 네트워크를 활용하는 게 낫죠. 단체 내에서 조직이든 운동이든 바꾸는 가장 단순한 방식은요. 사람을 바꾸는 거예요. 기업도 혁신성이 안 나올 때 제일 먼저 하는 것이 사람을 바꾸는 거잖아요. 불행한 이야기지만요. 한국의 시민단체도 조금 나쁜 방식이긴 하지만 그런 계기는 좀 있어야 될 거 같아요. 우리가 없다고 해서 시민사회가 망하지 않거든요. 오히려 그 친구들이 더 잘 만들어 갈 수 있어요. 혼란기를 어떻게 줄일 것인가가 선배들의 역할인거지 혼란이라는 게 나쁜 건 아니거든요. 

20년 차 활동가가 되면요. 보고 배우는걸 자기 것으로 습득되는 속도가 느려요. 그리고 이걸 조직에 적용하겠다? 느려져요. 그 순간 이미 보수적이 돼요. 세상이 다 그렇잖아요. 세상이 아무리 혁신성이 있고 혁신가라 할지라도 이미 세상의 네트워크 속에 하나의 꼭짓점을 형성하고 있는 사람들은 이 네트워크 전체가 좌로 이동하든 우로 이동하든 간에 상당히 느릴 수밖에 없어요. 그리고 그 순간 이미 보수화되어버리는 것이고요. 그렇기 때문에 혁신의 주체는 우리가 될 수 없다고 판단을 하는 거죠. 연차가 오래된 활동가는 그 자신이 가진 네트워크에 기반 해서 단체든 개인이든 활동의 영역을 새롭게 확장하는 역할을 새로운 관점에서 진행하는 것이 필요한 시기인 것 같아요. <끝> 

- 조아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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