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익활동포럼2016을 준비하면서 10명의 활동가를 만나 인터뷰를 했습니다. 아래는 “OO은대학”에서 일하다가 현재는 노르웨이에서 1년간 교육연수 중인 기은환님과의 인터뷰 전문입니다.
– 신비(이하, 신) : 요즘 무슨 일해요? 정기적으로 하는 일 있어요?
– 기은환(이하 기) : 땡땡은 대학에서 일하고 있어요. 교육팀에서 사회적 경제 혁신활동가 지원하고, 기획사업도 하고 그래요.
– 신 : 얼마나 되었어요?
– 기 : 들어가 일한 건 작년부터. 그때는 사회적 경제 지원센터에서 혁신 활동가 지원 업무와 교육 맡아서 일하다가 올해는 세운상가로 사무실 옮겨서 활동하고 있어요. 세운공공이라는 사업을 사경센터랑 땡땡은 대학이 같이 진행하는 거에요.
– 신 : 재밌어요?
– 기 : 재밌어요. 즐겁게 일하고 있어요.
– 신 : 1년 지났는데 여전히 재밌게 일하면 아주 좋은 거네요.
– 기 : 맞아요. 친구들하고 일하는 게 재밌어요.
– 신 : 주로 교육, 기획 그런 거 한다고 말했는데, 실제 어떻게 일해요?
– 기 : 다 해요. 교육 접수받고, 진행하고… 같이 일하는 친구들 나이나 경험 같은 게 고만고만해서 다 비슷비슷하게 일할 수 있어서 좋더라고요.
– 신 : 매일 나가요?
– 기 : 주 3일만 일하자 했는데 일이라는 게 그렇게 안돼서 주 4일 나가고 있어요.
– 신 : 그걸로 먹고 살만해요?
– 기 : 땡땡은 대학이 재정에 비해서는 좀 무리하지만 다른 비영리단체 수준보다는 급여를 조금 더 받는 편이에요. 그런데 저는 주 3일 일하고 있어서 그걸로 생활이 다 해결되지는 않아요. 사실 반상근 택한 건 여유롭게 일하고 싶은 것도 있지만 단체가 주 5일 수준으로 급여를 줄 여유가 없어서기도 해요. 학자금 빚이 매월 60만원씩 나가서 그것 때문에 다른 일을 더 해야 해요. 지금은 사회적 경제 연구회라는 모임에서 비상근 간사 역할을 하고 중간중간 단기 알바도 뛰고 있어요.
– 신 : 학자금대출은 언제부터 갚기 시작했어요? 언제까지 가요?
– 기 : 학교 다니면서 다 받았거든요. 4년 내내. 생활비 대출도 받고. 중간에 한번은 학기 중에 때려쳐서 9학기를 다녀서 그 돈이 좀 컸어요. 20대 초중반에는 돈이 없으니까 이자만 계속 내다가 지금은 원금 내고 있어요.
– 신 :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줄 수 있어요?
– 기 : 대학 가고부터는 집에서 돈을 안 받았어요. 그래서 대출도 받고 학교에서 근로 장학생도 하고 그랬죠. 근로 장학생 한 건 현상 유지만 되고 빚은 계속 쌓였어요. 학자금은 3,600만원, 생활비 대출받은 건 900만 원 정도예요. 갚기 시작한 건 졸업 이후인데 대출이 다 시기가 다르니까 3-4년 전에는 원금까지 해도 월 15만 원 정도였어요. 1년 전부터는 금액이 높아졌는데 다행히 대여섯 개 대출을 하나로 묶어서 내게 되었어요. 지금은 월 60만 원 정도씩 갚고 있고 내년에 갚을 돈은 650만 원이에요. 그렇게 한 3년 정도 더 갚으면 끝날 것 같아요.
– 신 : 그럼 몇 살 되는 거에요?
– 기 : 서른 중반 들어서겠죠.
– 신 : 졸업 후 십년 가까이 대출상환으로 보내는 거네요.
– 기 : 솔직히 진짜 아깝더라고요. 요새 너무 돈이 없어서 학자금 대출 사이트에 가서 제가 이자만 얼마를 냈는지 계산 해봤는데 지금까지 낸 것만 거의 천만 원이에요.
– 신 : 대학 간 이후로 집에서 돈을 안 받은 건 부모님이 내주기 어려워서 그런 거에요, 아니면 자립하려고 안 받은 거에요?
– 기 : 일단 학자금 대출이라는 제도가 있으니까. 제가 4남매 중 맏이여서 부모님 도움받기도 어려웠고요. 동생들도 다 그렇게 공부하고 있어요.
– 신 : 일단 제도가 있으니까 다른 방법보다는 그걸 선택했고 그 대출금도 부모님 도움 없이 그냥 내꺼다 생각하고 갚아온 거고요?
– 기 : 네. 각자 책임지는 거죠.
졸업 후, 학자금 대출상환으로만 10년이 흘러
– 신 : 그러면, 그런 것 때문에 생활도 힘들고 사회적 활동도 하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왜 이 동네에 온 거에요?
– 기 : 아, 그러게요. 별로 생각이 없는 거 같아요. 일단 어떻게든 살겠지라고 생각했던 거 같아요. 활동가가 된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게 아닐까 생각한 게, 고등학생 때 학교에서 학생회 하고 그 전부터 청소년 단체 활동했었거든요. 저도 잘 몰랐는데 그 단체가 강한 진보적 성향을 가진 곳이었어요.
– 신 : 고등학교 때 왜 그런 활동을 하게 되었어요?
– 기 : 생각해본 적 별로 없는데… 그때 단체에서 청소년을 위한 학교 같은 걸 연다고 벽보를 붙였어요. 저는 방송반이었는데 아나운서 배우 그런 사람들 온다고 하니까 관심이 갔어요. 그래서 갔다가 청소년운동을 접하게 되었죠. 굉장히 열심히 활동했는데, 졸업한 후로 그때 활동하던 단체와는 좀 멀어졌어요.
– 신 : 뭐가 달라진 건가요?
– 기 : 음.. 요즘 탄핵 촛불집회에 나오는 고등학생들 보면 순수한 열정으로 가득찬 시기라는 생각이 들어요. 정말 빛나는 말도 많이 하잖아요. 저도 제 인생에서 그때가 정말 힘들었지만 그래도 진짜 나에게 빛나는 시간이었다 싶어요. 학생운동 하느라 당연히 수능은 열심히 준비 안했죠. 그리고 여대나 법대는 절대 안 갈거라 했었는데 어쩌다보니 여대 법대를 가게 되었고, 마침 그때 집이 급격히 어려워지기 시작했어요. 돈도 없고 뭘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법은 재미없고. 그래서 학교 생활을 거의 안 했어요. 동아리는 미술 동아리 하나 했어요. 엠티나 축제 한 번도 안 가고 4년 내내 아웃사이더로 지냈어요. 학교 갈 때는 대충 모자 쓰고 슬리퍼 끌고 다녔는데, 주변에서는 제가 일찍부터 사법고시 준비하는 줄 아는 친구들도 있었던 거 같아요. 대신 맛집 탐험대나 대장정 같은 학교 밖 활동은 좀 했어요.
– 신 : 미래에 대해서는 아무런 계획이 없었어요?
– 기 : 네, 아무런 계획 없었어요. 그래도 학교 생활하면서 제가 정말 좋아하는 교수님을 만난 건 운이 좋았다고 생각해요. 철학자인데 김영민 교수라고. 철학 아무것도 모르는데 어쩌다가 신청한 수업 들으면서 채식을 시작했고 여러 가지로 달라졌어요. 공부는 많이 못 따라갔지만 되게 좋더라고요. 삶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게 되었어요.
– 신 : 그러다가 대학 졸업 후에 비영리 영역으로 오게 된 이유는 뭐에요?
– 기 : 어쩌다보니 그렇게 된 것 같아요. 한번은 교수님 추천으로 국제민주연대라는 인권단체에서 인턴을 했어요. 고등학교 때 경험도 있고 그래서인지 자연스럽게 인권활동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하지만 대학 4년 마칠 즈음에는 자존감이 되게 낮아져 있었어요. 취직을 한다거나 미래에 대한 생각도 없이 그냥 백수해야지 하고 있었는데, 또 다른 교수님에게 소개를 받아서 간 모임에서 싱크카페 준비하시던 하승창 대표를 만났어요. 저더러 같이 하자고 하셔서 교수님과 상의한 뒤에 하기로 결정했어요.
– 신 : 그런 선택에 대해서 가족들은 어떻게 생각해요?
– 기 : 사실 첫째라 부모님도 기대하는 게 있는 것 같긴 한데. 제가 진짜 불효자식인 거 같아요. 손 벌리지 않을테니까 내 맘대로 살래, 그렇게 생각해요.
– 신 : 집에서는 나왔어요?
– 기 : 아니요. 두어 번 정도 나와서 고시원에서 살아 보기도 했는데, 지금은 부모님 집에서 지내요.
– 신 : 부모님은 어떠세요?
– 기 : 동교동에서 헌책방을 하시는데, 연세가 좀 많으세요. 아버지가 50년생이신데 최근에 간암 발견되서 이식 준비하고 계세요.
– 신 : 그럼 경제적 부담이 크겠네요. 보험으로 보전이 되요?
– 기 : 이식을 하려다가 의료사고가 있어서 중단하고 병원을 옮겼어요. 그때 보험금 받아서 썼는데 다시 치료비가 들어가는 상황이라.. 원래 있던 헌책방에 프랜차이즈 가게가 들어오겠다고 해서 내주고 그 돈 받아서 쓰고 있어요. 책방은 근처로 옮겼구요.
– 신 : 집은 자가예요?
– 기 : 아니에요.
– 신 : 그럼 생활비 부담도 있겠네요. 음, 그래도 흔들리지 않아요?
– 기 : 이렇게 생각하면 안될 수도 있지만 그냥 각자의 삶이 있고 각자 책임지는 거라고 생각해요. 좀 미안하긴 해요. 그래도 아직은 가족이 버텨주고 있어서 저는 제가 할 거 충실히 하고 때가 되면 역할을 하려고 해요.
– 신 : 어쨌든 학자금 대출 갚고 생활을 하려면 지금 돈 버는 일을 안 할 수는 없는 상황인거죠. 그렇다면 돈 벌면서 활동을 할 수 있는 곳을 찾아서 지금 일을 하게 된 건가요, 아니면 그걸 떠나서 지금 이 활동이 베스트라서 하고 있는 건가요?
– 기 : 이게 베스트여서 하는 것 같아요.
– 신 : 자신이 활동가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 기 : 그게 참, 늘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어요. 내가 실무자야, 활동가야? 활동가라면 자기 활동을 기획하고 사회적으로 어떤 역할을 할지 동료들과 함께 고민해야 되는데, 사회적으로 도움되는 일이라고 해도 실무에 막 떠밀려서 어떤 역할을 하고 도움이 되는지 못 느끼고 한 적이 많아요. 그래도 올해는 좀 달라요. 친구들과 이야기나눌 시간이 많았거든요. 각자 어떻게 살고 싶고 앞으로 어떤 세상이 오면 좋겠는지를 시시콜콜 수다 떨듯이 계속 이야기해요. 그러면서 제가 활동가이긴 하겠다 느끼기는 했는데 막 자각하기까지는 아닌 것 같아요. 정체성을 활동가라고 규정하기보다는 그냥 세상에 조금 더 도움이 되면 좋지 않을까 생각하는 편이에요.
– 신 : 그걸 위해서 포기해야 하는 게 있어요? 세상을 좀 더 좋게 하는 걸 하지 않으면 그래도 좀 더 나를 위해서 할 수 있는 게 있는데 포기하는 게 있는지, 아니면 그 자체로 현재 나에게 좋은 선택인건지.
– 기 : 사실 자기 검열을 되게 많이 하는 것 같아요. 아주 사소한 거라도, 예를 들어서 여기서 차를 마시고 설겆이를 안 하고 놓고 간다면 마음에 남아요. 이런 거 하나가 아, 이렇게 살면 안되는데라고 생각하게 만들어요. 샴푸를 쓰는 거라든지 작은 거 하나하나. 채식을 하고부터는 고기 안 먹는 사람을 배려하게 되고, 주변에 성소수자 친구가 생긴 뒤에는 남자 친구 여자 친구 있어?라고 묻던 걸 애인있어?라고 묻거나 아예 묻지 않게 되고. 조금씩 고려할 것이 많아지는 게 버겁기도 한데 그럴 수 있다는 게 좋기도 해요.
정체성을 활동가라고 규정하기보다는
그냥 세상에 조금 더 도움이 되면 좋지 않을까 생각하는 편이에요.
– 신 : 채식을 시작한 이유는 뭐에요?
– 기 : 특별한 이유는 없어요. 앞에서 말한 김영민 교수님 수업에서 각자 자기소개 하는데 누가 채식을 한다는 거에요. 저는 돈 생기면 무조건 꽃등심 먹으러 가고 그랬었는데, 채식하는 사람을 처음 봐서 너무 신기했어요. 그래서 나도 백일만 해봐야지 했죠. 전날에 고기를 엄청나게 먹고 시작했는데 막상 해보니 너무 힘든 거에요. 그래도 일단 마음 먹었으니 열심히 했어요. 채식에 대한 자료도 보고 영상도 보면서. 그렇게 백일 하고 나니까 곧바로 고기를 다시 먹게 되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그냥 계속 해온 게 7년 정도 되었어요.
– 신 : 아직도 그렇게 고기가 땡기거나 하지 않아요?
– 기 : 네. 제가 실험도 몇 번 해봤어요. 순대 같은 것도 가끔 먹고, 한번은 햄을 사서 막 파먹어 봤어요. 맛은 있는데 그래도 계속 먹게 되진 않더라고요.
– 신 : 또래 친구들, 내 세대 사람들과 자신이 다르다고 느껴요?
– 기 : 조금 다른 것 같아요. 돈이 있으면 어떤 친구는 저축해서 집을 사고 뭘 하고 그렇게 계획을 한다면, 저는 적게 벌더라도 어떻게 사는 게 좋을까 더 고민하는 게 다른 듯 해요.
– 신 : 그러면 주변에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은 좀 있어요?
– 기 : 있는 거 같아요.
– 신 : 작년과 올해 크게 다르다고 했는데 이유가 뭐에요?
– 기 : 이전에 첫 직장이던 싱크카페와 더체인지 일할 때는 혼자였어요. 혼자 하니까 잘하는지 못하는지 잘 모르겠고 그랬어요. 작년에는 혼자가 아니긴 했지만 너무 다른 관점으로 일을 하는 동료와 함께 하기가 되게 힘들더라고요. 그걸 관리하는 체계도 없었고. 지금 같이 일하는 친구들은 성실하고 체계에 대해서 같이 계속 고민하고 만들어가는 게 차이가 있는 듯 해요.
– 신 : 일에 대한 태도나 가치관 차이를 얘기하셨는데, 그런 게 세대를 통해서도 나타난다고 생각해요?
– 기 : 잘은 모르지만, 예전에 운동하신 분들은 돈은 못 벌어도 세상을 위해 헌신하고 주어진 거 없지만 개척해나가고 그렇게 운동 하셨던 거 같아요. 지금 젊은 세대는 여러 가지 선택지 중에서 활동가를 선택하고 왔는데 막상 아무도 일에 대해서 가르쳐주지 않고 피드백 주는 사람도 없어서 힘들어해요. ‘그냥 알아서 하래. 그럼 내가 지금 누구랑 일하는거야? 나는 일을 어디서 배워? 이런 구조가 합당해?’ 이런 질문 있잖아요. 실제로 직업으로서 활동가를 택한 친구들도 있어요. 이전에는 일과 삶이 일치돼서 했다면 지금 세대는 일이 끝나면 개인 시간도 갖고 싶고, 업무 시간에만 일에 충실하는 활동가이고 싶은 경우가 있는 거죠. 이럴 때 그냥 헌신한다고 해서 다 되는 게 아닌 거 같기도 하고. 누가 좀 알려줬으면 싶기도 하고 그래요.
– 신 : 직업으로서 선택한다는 것은 어떤 뜻이에요? 예전에는 활동가가 되면 생활비를 못 버는 정도가 문제였다면 지금은 빚이 이미 쌓여있는 상태여서 생계활동이 반드시 되어야 하는, 상황 자체가 다른 걸까요?
– 기 : 그렇기도 하고, 삶에 대한 생각도 많이 바뀐 거 같아요. 직업도 직업이지만 활동가가 뭔지에 대해 그리는 상도 달라진 거 같아요. 예전에는 세상을 바꾼다 하면 싸울 대상이 뚜렸했잖아요. 요새는 되게 많긴 한데 명확하진 않고, 그 대상이 밖에도 있고 조직의 상사일 수도 있고. 사실 저는 꼰대라는 말 별로 안 좋아해요. 되도록 잘 이해하려고 하는 편인데 그래서 손해보는 게 많았던 거 같아요. 일을 해놓고 돈을 못 받는다거나, 경험한 셈 쳐라고 넘어간다거나. 이전에 일 그만두고 돈은 벌어야해서 알바하면서 지내던 때에 어느 대안 학교에서 방학 기간 도서관 일을 제안받았어요. 활동비를 주신다고 해서 갔었는데 막상 가니까 활동비를 꼭 받아야겠냐고 하시더라고요. 애초에 도와달라고 했으면 몰라도, 너무 당황스러웠어요. 심지어 일에 필요한 비용도 먼저 사비로 쓰고 나중에 지급 요청하라고 하셨어요. 그렇게 쓴 게 백만 원 가까이 되었어요.
– 신 : 그런 조건인데도 일을 한 거에요?
– 기 : 아이들하고 약속을 다 해놓은 후에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그 자리에서 따지질 못했어요. 너무 황당하기도 하고. 그리고 아이들에게 제가 어떤 사람인지도 제대로 소개해주셔야 하는데 그냥 동네 주민이라고 소개하신 거에요. 아이들이 저를 뭐라 불러야할지 모르겠다 하고 그런 상황에서 학교는 방학이라 선생님들도 안 나오는 때였고 그렇게 저랑 아이들이 방치되서 있는데, 너무 이게 미치겠는 거에요. 그런데 저한테 결정권도 없고 의논할 상대도 없고. 그때 아빠 간암도 알게 돼서 한 달 하고나서 그만하겠다 말했더니 교장이 서로가 좋지 않을 때 만나가지고 이렇게 된 거 같다 말씀하셔가지고…
– 신 : 실비 쓰신 건 받으셨어요?
– 기 : 네, 받았어요. 아무튼 그때 타격이 컸고 그런 일이 계속 반복되는 거에요. 어느 재단에서 녹취를 풀어달라고 해서 두 시간 풀었는데 4만원 정도 주는 거에요. 그것도 한 달도 더 넘어서 나왔어요. 애초에 그렇게 주는 줄 알았으면 안했을 거에요. 저한테 얘기를 했다고 하는데 저는 들은 바가 없어요. 그런 식으로 제가 노동한 거에 비해서 굉장히 허접하게 받는다거나, 작업 빨리 해달래서 빨리 해줬더니 다른 사람이 늦게 줘서 기다렸다가 ‘다 같이 입금해야 하니까 기다리세요.’ 이런 것도 있었고. 그런데 이게 문제가 그쪽만이 아니라 당시에 말을 못했으니까 제 잘못도 있는 거에요. 말을 하긴 했지만 좀 더 명확하게 분명하게 못해서. 어떤 일 할 때는 급여가 3개월 밀리기도 했어요. 그런데 두 달 지날 때까지 말을 안했어요. 운영도 어려워서 다른 사람 월급 제 돈으로 주고, 물건도 제 돈으로 사고. 돈 못받은 다른 분이 스트레스로 원형탈모가 생기고 안 나오고 그래서 제 돈 드렸어요. 일은 해야 하고 안 나오면 운영 구멍나니까.
예전에는 세상을 바꾼다 하면 싸울 대상이 뚜렸했잖아요.
요새는 되게 많긴 한데 명확하진 않고,
그 대상이 밖에도 있고 조직의 상사일 수도 있고.
– 신 : 왜 그렇게 열심히 한 거에요?
– 기 : 책임감? 글쎄요, 모르겠어요. 왜 그랬지? 정신이 팔려있었던 건지, 제가 약간 서비스 마인드가 있어서인가 싶기도 하고. 아무튼 저는 일단 돈을 벌어야 하고 그러면서도 일이 잘 되었으면, 단순히 일이 아니라 그 활동이 정말 잘 되었으면 했고. 아무튼 그런 경험에 대해서 지금까지도 계속 조금씩 정리를 해나가는 중이에요. 저는 저만의 관점을 잘 못 세우는 편이에요. 이건 이거야, 저건 저거야 명확하게 이야기하는 분들 보면 속시원할 때도 있는데, 저는 그렇게 말 못하고 ‘이런 거 같아요, 이렇게 생각해요’ 하는 편이에요. 조심스러운 것도 있지만 제가 틀릴 수도 있잖아요. 잘 모르니까. 늘 모른다고 생각하니까 자존감이 많이 낮았던 거 같고. 요샌 좀 나아졌어요.
– 신 : 올해 들어서 자존감이 좀 올라온 거에요?
– 기 : 네. 올해 일하면서 재미있어서. 그 전까지는 계속 헤메고, 재미있는지 어떤지 모르는 상태였던 거 같아요. 나를 봐 주는 동료나 피드백도 없고 하니까 이게 맞나 잘 모르겠고, 역량도 없고 그러니까. 아직도 부족한 건 매한가지인데, 이전에는 누구한테 연락해야 한다 하면 핸드폰 붙들고 한 시간 있었어요. 진짜 자신감이 없어가지고. 문자 썼다 지웠다. 요샌 그냥 전화하거든요. 많이 나아졌다 싶죠.
– 신 : 부족하다고 했잖아요. 그 기준이 어디에 있는 거에요?
– 기 : 제가 인정하는 기준. 잘은 모르겠는데, 아무튼 저 꼭대기에 있는 거 같아요.
– 신 : 그게 어디서 오는 거 같아요?
– 기 : 제가 원래 그런 성향이 좀 있었어요. 아예 열심히 하거나 아예 바닥을 치거나. 이런 성향이다보니까 어쨌든 기준은 최고로 잡는 거죠. 주변에 일 잘하는 친구들 보면서 저렇게 하고 싶다 생각하기도 했어요. 사람을 만날 때는 저 정도의 태도로 만나는 거구나, 문서를 쓸 때는 이정도 해야 잘 하는거구나 하고. 어쩌다 너무 힘들 때도 이건 정말 힘든 게 아닐거라고 계속 생각했어요. 좋지 않은 생각이었던 것도 같지만 상황을 최악으로 두지 않은 게 저를 버티게 해 준 힘이기도 해요. 연결이 될지 모르겠지만 반대로 제가 한 일을 최고로 두지도 않아요. 이 다음이 있을거야라며 준비하려고 하는 편이에요.
– 신 : 성장하고 싶은 욕구일까요?
– 기 : 네. 그런데 확 놔버리고 싶은 것도 있고… 성장이라는 게 그런 부분도 있잖아요. 내가 나를 놔도 된다고 판단하고 놔줄 때. 전 아직 그 정도까지는 안된 거 같아요. 내 판단을 내가 믿고 가도 될지 아직은 판단이 잘 안돼서.
– 신 : 현재까지 해 온 영역을 굳이 분류하면 어디에 해당된다고 생각해요? 시민운동? 뭘 하고 있었던 거 같아요?
– 기 : 시민운동이 뭔지 잘 모르겠어요. 각자가 목소리 낼 수 있고 자기 주체성으로 살 수 있는 그런 세상을 만드는데 도움이 되는 뭔가를 하는 거라면, 그런 언저리에 있었던 거 같은데 직접적인 변화를 위해서 뛰어들거나 이랬던 건 아닌 거 같고. 그런 작은 움직임이 쌓이면 어떤 변화를 추동해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요즘 토요일마다 알바를 해야 해서 탄핵 집회에 아직 한 번도 못나갔어요. 그것도 되게 속상해요. 그래도 이전에 광우병 촛불집회 갔을 때는 느끼지 못했던 변화들이 조금씩 일어나고 있는 거 같아요.
– 신 : 사회적 경제나 협동조합이나 그런 건 뭘 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 기 : 넓게 보면 시민운동이라고 생각해요. 시민운동이 다양해진 거 같아요. 이전에는 시민운동하면 참여연대 같은 방식 생각했다면 지금은 내가 그냥 참여하면 그게 시민운동이니까, 사회 혁신이든 사회적 경제든 사회를 이롭게 하면 그게 운동이 되지 않을까요.
– 신 : 그런 활동하기에 더 좋아진 거 같아요? 이전의 협소한 운동 범위에 비해서? 정책 중심의 단체들이 현재 운동이 어려워졌다고 평가를 많이 하는데요. 사실 사회적 경제라든지 새로운 영역 중에는 공적 기금이나 재단 같은 곳에서 지원하니까 가능한 것도 있잖아요.
– 기 : 저는 시민운동이 예전에 비해 많이 참여할 수 있고 쉬워졌다고 생각해요. 새로운 영역에 자본이 투하되는 걸 부정적으로 바라볼 수도 있지만, 사실 사회적 경제든 기존의 좁은 의미의 시민운동이든 정말로 사회적이고 대안적인 방식으로 조직을 운영한다거나 삶을 사는 사람은 소수인 듯 해요. 그런 고민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서로를 세워주는 관계성, 서로 주체성 같은 게 형성되기 보다는 예전의 방식으로 찍어 내리는 식으로 조직을 운영한다거나 그런 게 좀 있다고 봐요. 사회혁신활동가 지원하는 일을 하다보니 그들이 기존 시민단체나 사회적ㅡ기업에 가서 듣고 오는 언어나 경험한 바들 쏟아내면 너무 당황스러울 때가 많아요. 예를 들면, 영국에서 몇년 공부하고 돌아온 사람이 뜻이 있어서 혁신활동가로 갔는데 담당 활동가분이 다른 손님이 왔을 때 ‘아휴, 유학 가봤자 뭐해요. 저런 거나 하고 있는데’라고 이야기한 경우가 있었어요. 혁신 활동가는 적은 급여로 현장을 경험하러 가는 분들이라 무리하게 야근 같은 건 삼가해달라고 하면 그러면 일을 어떻게 하라는거냐 볼멘소리 하시기도 해요. 그런 것들이 수면 위에서 같이 이야기되면 좋겠는데 이야기할 장이 별로 없어요. 같이 성장을 고민해주지 않는 거에요. 사람이 왔다고 생각하지 않고 그냥 일을 할 실무자, 우리 너무 바쁜데 이 일 해줄 사람 왔다 이런 인식이 있어요. 그런 태도와 매일 부딪치는 활동가들은 상처를 받죠.
– 신 : 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요?
– 기 : 사업장이나 기존 활동가가 무조건 나쁘다기보다는 그런 부분에 대해 서로 이야기하고 받아들일 준비가 안된 거 같아요.
– 신 : 그런 자리가 없기도 하고, 만들어도 잘 안 오시기도 하고?
– 기 : 와서 이해하고 간 줄 알았는데 잘 안되는 경우도 있고, 그런 자리에 보통 조직에서 한 명만 오잖아요. 돌아가서 공유가 잘 안되는 경우도 있고 그래요. 조금씩 나아지고 있긴 하지만, 문제가 있는 사업장도 지원기관과 친하다는 이유로 별 변화 없이 계속 활동가 지원을 받고 그래요. 문제가 될 만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 그걸 지적하면 개인의 되바라짐이 아니라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해요. 그게 윗세대든 아랫세대든 인식으로 자연스럽게 자리 잡았으면 좋겠어요. 선택지가 많은 시대여서 ‘아, 못해먹겠어’하고 다른 거 찾아도 되지만 애정이 있으니까 문제제기 하면서 계속 활동하려는 거잖아요. 그러면 그들이 함께 할 조건을 만들기 위해서 함께 고민하면 좋겠다 싶어요.
서로를 세워주는 관계성, 서로 주체성 같은 게 형성되기 보다는
예전의 방식으로 찍어 내리는 식으로 조직을 운영한다거나…
– 신 : 현재로서는 조직이나 같이 하는 사람들에게서 에너지를 찾는 게 가장 좋다고 봐야할까요. 그 밖에는 또 뭐가 있을까요?
– 기 : 활동가들 모여서 공부하면서 활동에 대해 이야기나누고 그게 도움이 되는 거 같아요. 제가 처음 일 시작했을 때 자존감 무지 낮았다고 했잖아요. 그때 매사에 막 고민하면서 이것저것 감당해야 했는데, 제 나름의 방식으로 어떻게든 해나갔던 거 같아요. 그렇게 잘 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 기간이 별로 후회가 없어요. 다행스럽게도.
– 신 : 그렇게 정리를 하기로 한 거에요, 실제로 도움이 된 거에요?
– 기 :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어요. 물론 실제로도 도움이 되었을 거에요. 올해 초에 땡땡은 대학 워크숍 가서 열 몇명 갔는데, 질문을 서로 던지는 시간에 누가 저에게 “싱크카페 전 대표란 어떤 존재?”이라고 묻길래 “키맨”이라고 답했어요. 어쨌든 제가 이 바닥에 들어오게 해 주신 분이고, 여러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게 해 주었으니까. 자율성을 많이 줘서 어려운 점 분명히 있었지만 스스로 하는 게 지시받는 것보다는 좋았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정리하고 있어요.
– 신 : 지금 시민사회에 꼭 필요한 게 있다면 뭘까요?
– 기 : 아무래도 활동가들에게 동료가 많이 있으면 좋겠는데, 빚이라든지 주거 문제라든지 그런 생존의 조건이 너무 어려운 듯 해요. 제가 최근에 학자금대출 하나로 합해서 이자 줄어든 것만 해도 굉장히 큰 도움이 되었거든요. 그런 기본적인 삶의 환경을 개선하는 거, 공동주거 같은거요. 그렇게 계기를 만들고 물꼬를 터주는 기획이 있으면 정말 좋겠어요. 더 많은 젊은 세대가 함께 할 수 있으려면요.
– 신 : 대학 때 인상적이었던 철학 수업처럼 지금 활동하는데 필요한 공부랄까, 그런 건 뭐가 있어요?
– 기 : 저희 집이 책방을 했잖아요. 늘 책이 그렇게 많은데 제가 너무 안 읽으니까 책에 대한 부채감이 있는 거에요. 고등학교 때는 청소년 운동하랴, 좋아하는 연예인 쫓아다니랴 바빴고, 대학 때도 거의 공부를 안 해서… 올해는 책을 많이 읽고 싶었는데 또 알바가 너무 많은 거에요. 그 알바도 사실은 공부나 활동과 연계된 것들이기는 하지만, 일로서 몰아닥치니까 일단 해내는 데 급급하게 되더라고요. 시간을 좀 가지고 한 책을 오래 보든, 이야기를 오래 나누든 아무튼 좋아하는 사람들이랑 만나서 공부 하고 싶어요. 생각해보면 동료들과 이야기하고 함께 하는 거 자체가 공부가 되는 거 같아요. 책을 많이 안 읽은 대신에 저는 몸에 익히는 감각 그런 건 좀 살아있는 거 같아요. 일상에서 사소한 행동, 책임감. 그런 걸 몸으로만 알고 있는 거여서 말로 설명한다거나 글로 풀어낸다거나 하는 역량이 부족하기 때문에 그런 것들을 해낼 수 있는 저의 언어, 사유를 확장시킬 무언가가 있었으면 좋겠다 싶어요.
– 신 : 거의 안 읽으셨다고 했지만, 그래도 그동안 읽은 것 중에 가장 감명 받은 책이 있다면 뭐에요?
– 기 : 이런 질문 받으면 항상 떠오르는 책이 딱 한권 있어요. 대학 때 그 철학 수업 들을 때 참고서적에 있었던 헬렌 니어링의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라는 책이에요. 제가 그 책은 두 번 봤어요. 동료들이 기억상실증 있냐고 할 정도로 기억력이 나빠서 책의 구절같은 거 잘 기억 못하는데요, 그 책에서 뭘 하든 삶을 예술로 살아야 한다던 구절은 기억해요. 그거 말고는 철학 수업했던 김영민 교수의 공부론이라는 책이 있는데, 그 책은 챕터별로 필사도 하고 지금도 띄엄띄엄 읽어요. 인문학에서 ‘문’은 ‘무늬’라고, 사람의 무늬가 인문학이라고 했어요. 그리고 공부란 인의불발, 당기되 쏘지 않는 것이다, 즉 알면서 모른체 하는 것이라는 부분이 인상적이에요.
– 신 : 앞으로의 얘기 좀 해보죠. 지금까지와 비슷한 방향으로 가려고 해요?
– 기 : 멀리 미래까지 생각하지는 않고 매일매일 지금 닥치는 것들 성실히 하자, 성실하지 못하면 사과라도 잘 하자, 그렇게 생각하고 지내요. 마침 내년 한 해는 공부하러 해외로 가요. 숙식 제공해주는 1년 짜리 프로그램에 지원했는데 선발되었어요. 작년부터 막연히 좀 벗어나고 싶다고 생각한 것 같아요. 내 안에 있는 틀로부터도 벗어나고 싶고, 내면이 너무 소란스러워서.. 꼭 간다고 뭐가 되는 건 아니라도 계속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돈도 없고 그래서 준비 못하고 있다가 우연히 기회를 얻었어요. 그럼 내년에는 돈을 못 버니까 학자금 대출 갚을 거 미리 버느라고 요새 많이 바빠요.
– 신 : 아무튼 지금 계획은 공부하러 간다, 그 뒤는 그때 가서.
– 기 : 네. 시간이 많은 사람이 되면 좋겠어요.
– 신 : 언제쯤 될 거 같아요?
– 기 : 한 오년쯤 후에? 너무 거창한가? 꿈이?
– 신 : 뭐, 학자금 일단 갚으면 아무래도 좋아지겠죠. 그 때쯤이면 다 갚지 않겠어요?
– 기 : 그러네요. 시간이 많아지면 좀 멍도 때리고, 너무 시간이 많아서 지겨워서 뭔가를 하게 되는 그런 경지에 이르렀으면 좋겠어요. 일을 안하겠다는 건 아닌데 제가 시간의 여유로움을 몸으로 느끼면서. 그게 물리적인 건 아닐 수도 있어요. 엄청 바쁘게 살지만 마음이 급하지 않는 삶일 수도 있고. 그런 상태여야 제가 누군가와 함께 일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실수나 차이에도 예민해지고, 서로 언어가 다르니까. 상대의 말이 무슨 말일까 생각도 좀 해보고. 너무 바쁠 때는 고민도 사치가 되니까요.
_ 신비
#공익 #씽크카페 #기은환 #OO은대학 #장상미 #신비 #서울
공익활동포럼2016을 준비하면서 10명의 활동가를 만나 인터뷰를 했습니다. 아래는 “OO은대학”에서 일하다가 현재는 노르웨이에서 1년간 교육연수 중인 기은환님과의 인터뷰 전문입니다.
– 신비(이하, 신) : 요즘 무슨 일해요? 정기적으로 하는 일 있어요?
– 기은환(이하 기) : 땡땡은 대학에서 일하고 있어요. 교육팀에서 사회적 경제 혁신활동가 지원하고, 기획사업도 하고 그래요.
– 신 : 얼마나 되었어요?
– 기 : 들어가 일한 건 작년부터. 그때는 사회적 경제 지원센터에서 혁신 활동가 지원 업무와 교육 맡아서 일하다가 올해는 세운상가로 사무실 옮겨서 활동하고 있어요. 세운공공이라는 사업을 사경센터랑 땡땡은 대학이 같이 진행하는 거에요.
– 신 : 재밌어요?
– 기 : 재밌어요. 즐겁게 일하고 있어요.
– 신 : 1년 지났는데 여전히 재밌게 일하면 아주 좋은 거네요.
– 기 : 맞아요. 친구들하고 일하는 게 재밌어요.
– 신 : 주로 교육, 기획 그런 거 한다고 말했는데, 실제 어떻게 일해요?
– 기 : 다 해요. 교육 접수받고, 진행하고… 같이 일하는 친구들 나이나 경험 같은 게 고만고만해서 다 비슷비슷하게 일할 수 있어서 좋더라고요.
– 신 : 매일 나가요?
– 기 : 주 3일만 일하자 했는데 일이라는 게 그렇게 안돼서 주 4일 나가고 있어요.
– 신 : 그걸로 먹고 살만해요?
– 기 : 땡땡은 대학이 재정에 비해서는 좀 무리하지만 다른 비영리단체 수준보다는 급여를 조금 더 받는 편이에요. 그런데 저는 주 3일 일하고 있어서 그걸로 생활이 다 해결되지는 않아요. 사실 반상근 택한 건 여유롭게 일하고 싶은 것도 있지만 단체가 주 5일 수준으로 급여를 줄 여유가 없어서기도 해요. 학자금 빚이 매월 60만원씩 나가서 그것 때문에 다른 일을 더 해야 해요. 지금은 사회적 경제 연구회라는 모임에서 비상근 간사 역할을 하고 중간중간 단기 알바도 뛰고 있어요.
– 신 : 학자금대출은 언제부터 갚기 시작했어요? 언제까지 가요?
– 기 : 학교 다니면서 다 받았거든요. 4년 내내. 생활비 대출도 받고. 중간에 한번은 학기 중에 때려쳐서 9학기를 다녀서 그 돈이 좀 컸어요. 20대 초중반에는 돈이 없으니까 이자만 계속 내다가 지금은 원금 내고 있어요.
– 신 :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줄 수 있어요?
– 기 : 대학 가고부터는 집에서 돈을 안 받았어요. 그래서 대출도 받고 학교에서 근로 장학생도 하고 그랬죠. 근로 장학생 한 건 현상 유지만 되고 빚은 계속 쌓였어요. 학자금은 3,600만원, 생활비 대출받은 건 900만 원 정도예요. 갚기 시작한 건 졸업 이후인데 대출이 다 시기가 다르니까 3-4년 전에는 원금까지 해도 월 15만 원 정도였어요. 1년 전부터는 금액이 높아졌는데 다행히 대여섯 개 대출을 하나로 묶어서 내게 되었어요. 지금은 월 60만 원 정도씩 갚고 있고 내년에 갚을 돈은 650만 원이에요. 그렇게 한 3년 정도 더 갚으면 끝날 것 같아요.
– 신 : 그럼 몇 살 되는 거에요?
– 기 : 서른 중반 들어서겠죠.
– 신 : 졸업 후 십년 가까이 대출상환으로 보내는 거네요.
– 기 : 솔직히 진짜 아깝더라고요. 요새 너무 돈이 없어서 학자금 대출 사이트에 가서 제가 이자만 얼마를 냈는지 계산 해봤는데 지금까지 낸 것만 거의 천만 원이에요.
– 신 : 대학 간 이후로 집에서 돈을 안 받은 건 부모님이 내주기 어려워서 그런 거에요, 아니면 자립하려고 안 받은 거에요?
– 기 : 일단 학자금 대출이라는 제도가 있으니까. 제가 4남매 중 맏이여서 부모님 도움받기도 어려웠고요. 동생들도 다 그렇게 공부하고 있어요.
– 신 : 일단 제도가 있으니까 다른 방법보다는 그걸 선택했고 그 대출금도 부모님 도움 없이 그냥 내꺼다 생각하고 갚아온 거고요?
– 기 : 네. 각자 책임지는 거죠.
졸업 후, 학자금 대출상환으로만 10년이 흘러
– 신 : 그러면, 그런 것 때문에 생활도 힘들고 사회적 활동도 하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왜 이 동네에 온 거에요?
– 기 : 아, 그러게요. 별로 생각이 없는 거 같아요. 일단 어떻게든 살겠지라고 생각했던 거 같아요. 활동가가 된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게 아닐까 생각한 게, 고등학생 때 학교에서 학생회 하고 그 전부터 청소년 단체 활동했었거든요. 저도 잘 몰랐는데 그 단체가 강한 진보적 성향을 가진 곳이었어요.
– 신 : 고등학교 때 왜 그런 활동을 하게 되었어요?
– 기 : 생각해본 적 별로 없는데… 그때 단체에서 청소년을 위한 학교 같은 걸 연다고 벽보를 붙였어요. 저는 방송반이었는데 아나운서 배우 그런 사람들 온다고 하니까 관심이 갔어요. 그래서 갔다가 청소년운동을 접하게 되었죠. 굉장히 열심히 활동했는데, 졸업한 후로 그때 활동하던 단체와는 좀 멀어졌어요.
– 신 : 뭐가 달라진 건가요?
– 기 : 음.. 요즘 탄핵 촛불집회에 나오는 고등학생들 보면 순수한 열정으로 가득찬 시기라는 생각이 들어요. 정말 빛나는 말도 많이 하잖아요. 저도 제 인생에서 그때가 정말 힘들었지만 그래도 진짜 나에게 빛나는 시간이었다 싶어요. 학생운동 하느라 당연히 수능은 열심히 준비 안했죠. 그리고 여대나 법대는 절대 안 갈거라 했었는데 어쩌다보니 여대 법대를 가게 되었고, 마침 그때 집이 급격히 어려워지기 시작했어요. 돈도 없고 뭘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법은 재미없고. 그래서 학교 생활을 거의 안 했어요. 동아리는 미술 동아리 하나 했어요. 엠티나 축제 한 번도 안 가고 4년 내내 아웃사이더로 지냈어요. 학교 갈 때는 대충 모자 쓰고 슬리퍼 끌고 다녔는데, 주변에서는 제가 일찍부터 사법고시 준비하는 줄 아는 친구들도 있었던 거 같아요. 대신 맛집 탐험대나 대장정 같은 학교 밖 활동은 좀 했어요.
– 신 : 미래에 대해서는 아무런 계획이 없었어요?
– 기 : 네, 아무런 계획 없었어요. 그래도 학교 생활하면서 제가 정말 좋아하는 교수님을 만난 건 운이 좋았다고 생각해요. 철학자인데 김영민 교수라고. 철학 아무것도 모르는데 어쩌다가 신청한 수업 들으면서 채식을 시작했고 여러 가지로 달라졌어요. 공부는 많이 못 따라갔지만 되게 좋더라고요. 삶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게 되었어요.
– 신 : 그러다가 대학 졸업 후에 비영리 영역으로 오게 된 이유는 뭐에요?
– 기 : 어쩌다보니 그렇게 된 것 같아요. 한번은 교수님 추천으로 국제민주연대라는 인권단체에서 인턴을 했어요. 고등학교 때 경험도 있고 그래서인지 자연스럽게 인권활동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하지만 대학 4년 마칠 즈음에는 자존감이 되게 낮아져 있었어요. 취직을 한다거나 미래에 대한 생각도 없이 그냥 백수해야지 하고 있었는데, 또 다른 교수님에게 소개를 받아서 간 모임에서 싱크카페 준비하시던 하승창 대표를 만났어요. 저더러 같이 하자고 하셔서 교수님과 상의한 뒤에 하기로 결정했어요.
– 신 : 그런 선택에 대해서 가족들은 어떻게 생각해요?
– 기 : 사실 첫째라 부모님도 기대하는 게 있는 것 같긴 한데. 제가 진짜 불효자식인 거 같아요. 손 벌리지 않을테니까 내 맘대로 살래, 그렇게 생각해요.
– 신 : 집에서는 나왔어요?
– 기 : 아니요. 두어 번 정도 나와서 고시원에서 살아 보기도 했는데, 지금은 부모님 집에서 지내요.
– 신 : 부모님은 어떠세요?
– 기 : 동교동에서 헌책방을 하시는데, 연세가 좀 많으세요. 아버지가 50년생이신데 최근에 간암 발견되서 이식 준비하고 계세요.
– 신 : 그럼 경제적 부담이 크겠네요. 보험으로 보전이 되요?
– 기 : 이식을 하려다가 의료사고가 있어서 중단하고 병원을 옮겼어요. 그때 보험금 받아서 썼는데 다시 치료비가 들어가는 상황이라.. 원래 있던 헌책방에 프랜차이즈 가게가 들어오겠다고 해서 내주고 그 돈 받아서 쓰고 있어요. 책방은 근처로 옮겼구요.
– 신 : 집은 자가예요?
– 기 : 아니에요.
– 신 : 그럼 생활비 부담도 있겠네요. 음, 그래도 흔들리지 않아요?
– 기 : 이렇게 생각하면 안될 수도 있지만 그냥 각자의 삶이 있고 각자 책임지는 거라고 생각해요. 좀 미안하긴 해요. 그래도 아직은 가족이 버텨주고 있어서 저는 제가 할 거 충실히 하고 때가 되면 역할을 하려고 해요.
– 신 : 어쨌든 학자금 대출 갚고 생활을 하려면 지금 돈 버는 일을 안 할 수는 없는 상황인거죠. 그렇다면 돈 벌면서 활동을 할 수 있는 곳을 찾아서 지금 일을 하게 된 건가요, 아니면 그걸 떠나서 지금 이 활동이 베스트라서 하고 있는 건가요?
– 기 : 이게 베스트여서 하는 것 같아요.
– 신 : 자신이 활동가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 기 : 그게 참, 늘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어요. 내가 실무자야, 활동가야? 활동가라면 자기 활동을 기획하고 사회적으로 어떤 역할을 할지 동료들과 함께 고민해야 되는데, 사회적으로 도움되는 일이라고 해도 실무에 막 떠밀려서 어떤 역할을 하고 도움이 되는지 못 느끼고 한 적이 많아요. 그래도 올해는 좀 달라요. 친구들과 이야기나눌 시간이 많았거든요. 각자 어떻게 살고 싶고 앞으로 어떤 세상이 오면 좋겠는지를 시시콜콜 수다 떨듯이 계속 이야기해요. 그러면서 제가 활동가이긴 하겠다 느끼기는 했는데 막 자각하기까지는 아닌 것 같아요. 정체성을 활동가라고 규정하기보다는 그냥 세상에 조금 더 도움이 되면 좋지 않을까 생각하는 편이에요.
– 신 : 그걸 위해서 포기해야 하는 게 있어요? 세상을 좀 더 좋게 하는 걸 하지 않으면 그래도 좀 더 나를 위해서 할 수 있는 게 있는데 포기하는 게 있는지, 아니면 그 자체로 현재 나에게 좋은 선택인건지.
– 기 : 사실 자기 검열을 되게 많이 하는 것 같아요. 아주 사소한 거라도, 예를 들어서 여기서 차를 마시고 설겆이를 안 하고 놓고 간다면 마음에 남아요. 이런 거 하나가 아, 이렇게 살면 안되는데라고 생각하게 만들어요. 샴푸를 쓰는 거라든지 작은 거 하나하나. 채식을 하고부터는 고기 안 먹는 사람을 배려하게 되고, 주변에 성소수자 친구가 생긴 뒤에는 남자 친구 여자 친구 있어?라고 묻던 걸 애인있어?라고 묻거나 아예 묻지 않게 되고. 조금씩 고려할 것이 많아지는 게 버겁기도 한데 그럴 수 있다는 게 좋기도 해요.
정체성을 활동가라고 규정하기보다는
그냥 세상에 조금 더 도움이 되면 좋지 않을까 생각하는 편이에요.
– 신 : 채식을 시작한 이유는 뭐에요?
– 기 : 특별한 이유는 없어요. 앞에서 말한 김영민 교수님 수업에서 각자 자기소개 하는데 누가 채식을 한다는 거에요. 저는 돈 생기면 무조건 꽃등심 먹으러 가고 그랬었는데, 채식하는 사람을 처음 봐서 너무 신기했어요. 그래서 나도 백일만 해봐야지 했죠. 전날에 고기를 엄청나게 먹고 시작했는데 막상 해보니 너무 힘든 거에요. 그래도 일단 마음 먹었으니 열심히 했어요. 채식에 대한 자료도 보고 영상도 보면서. 그렇게 백일 하고 나니까 곧바로 고기를 다시 먹게 되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그냥 계속 해온 게 7년 정도 되었어요.
– 신 : 아직도 그렇게 고기가 땡기거나 하지 않아요?
– 기 : 네. 제가 실험도 몇 번 해봤어요. 순대 같은 것도 가끔 먹고, 한번은 햄을 사서 막 파먹어 봤어요. 맛은 있는데 그래도 계속 먹게 되진 않더라고요.
– 신 : 또래 친구들, 내 세대 사람들과 자신이 다르다고 느껴요?
– 기 : 조금 다른 것 같아요. 돈이 있으면 어떤 친구는 저축해서 집을 사고 뭘 하고 그렇게 계획을 한다면, 저는 적게 벌더라도 어떻게 사는 게 좋을까 더 고민하는 게 다른 듯 해요.
– 신 : 그러면 주변에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은 좀 있어요?
– 기 : 있는 거 같아요.
– 신 : 작년과 올해 크게 다르다고 했는데 이유가 뭐에요?
– 기 : 이전에 첫 직장이던 싱크카페와 더체인지 일할 때는 혼자였어요. 혼자 하니까 잘하는지 못하는지 잘 모르겠고 그랬어요. 작년에는 혼자가 아니긴 했지만 너무 다른 관점으로 일을 하는 동료와 함께 하기가 되게 힘들더라고요. 그걸 관리하는 체계도 없었고. 지금 같이 일하는 친구들은 성실하고 체계에 대해서 같이 계속 고민하고 만들어가는 게 차이가 있는 듯 해요.
– 신 : 일에 대한 태도나 가치관 차이를 얘기하셨는데, 그런 게 세대를 통해서도 나타난다고 생각해요?
– 기 : 잘은 모르지만, 예전에 운동하신 분들은 돈은 못 벌어도 세상을 위해 헌신하고 주어진 거 없지만 개척해나가고 그렇게 운동 하셨던 거 같아요. 지금 젊은 세대는 여러 가지 선택지 중에서 활동가를 선택하고 왔는데 막상 아무도 일에 대해서 가르쳐주지 않고 피드백 주는 사람도 없어서 힘들어해요. ‘그냥 알아서 하래. 그럼 내가 지금 누구랑 일하는거야? 나는 일을 어디서 배워? 이런 구조가 합당해?’ 이런 질문 있잖아요. 실제로 직업으로서 활동가를 택한 친구들도 있어요. 이전에는 일과 삶이 일치돼서 했다면 지금 세대는 일이 끝나면 개인 시간도 갖고 싶고, 업무 시간에만 일에 충실하는 활동가이고 싶은 경우가 있는 거죠. 이럴 때 그냥 헌신한다고 해서 다 되는 게 아닌 거 같기도 하고. 누가 좀 알려줬으면 싶기도 하고 그래요.
– 신 : 직업으로서 선택한다는 것은 어떤 뜻이에요? 예전에는 활동가가 되면 생활비를 못 버는 정도가 문제였다면 지금은 빚이 이미 쌓여있는 상태여서 생계활동이 반드시 되어야 하는, 상황 자체가 다른 걸까요?
– 기 : 그렇기도 하고, 삶에 대한 생각도 많이 바뀐 거 같아요. 직업도 직업이지만 활동가가 뭔지에 대해 그리는 상도 달라진 거 같아요. 예전에는 세상을 바꾼다 하면 싸울 대상이 뚜렸했잖아요. 요새는 되게 많긴 한데 명확하진 않고, 그 대상이 밖에도 있고 조직의 상사일 수도 있고. 사실 저는 꼰대라는 말 별로 안 좋아해요. 되도록 잘 이해하려고 하는 편인데 그래서 손해보는 게 많았던 거 같아요. 일을 해놓고 돈을 못 받는다거나, 경험한 셈 쳐라고 넘어간다거나. 이전에 일 그만두고 돈은 벌어야해서 알바하면서 지내던 때에 어느 대안 학교에서 방학 기간 도서관 일을 제안받았어요. 활동비를 주신다고 해서 갔었는데 막상 가니까 활동비를 꼭 받아야겠냐고 하시더라고요. 애초에 도와달라고 했으면 몰라도, 너무 당황스러웠어요. 심지어 일에 필요한 비용도 먼저 사비로 쓰고 나중에 지급 요청하라고 하셨어요. 그렇게 쓴 게 백만 원 가까이 되었어요.
– 신 : 그런 조건인데도 일을 한 거에요?
– 기 : 아이들하고 약속을 다 해놓은 후에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그 자리에서 따지질 못했어요. 너무 황당하기도 하고. 그리고 아이들에게 제가 어떤 사람인지도 제대로 소개해주셔야 하는데 그냥 동네 주민이라고 소개하신 거에요. 아이들이 저를 뭐라 불러야할지 모르겠다 하고 그런 상황에서 학교는 방학이라 선생님들도 안 나오는 때였고 그렇게 저랑 아이들이 방치되서 있는데, 너무 이게 미치겠는 거에요. 그런데 저한테 결정권도 없고 의논할 상대도 없고. 그때 아빠 간암도 알게 돼서 한 달 하고나서 그만하겠다 말했더니 교장이 서로가 좋지 않을 때 만나가지고 이렇게 된 거 같다 말씀하셔가지고…
– 신 : 실비 쓰신 건 받으셨어요?
– 기 : 네, 받았어요. 아무튼 그때 타격이 컸고 그런 일이 계속 반복되는 거에요. 어느 재단에서 녹취를 풀어달라고 해서 두 시간 풀었는데 4만원 정도 주는 거에요. 그것도 한 달도 더 넘어서 나왔어요. 애초에 그렇게 주는 줄 알았으면 안했을 거에요. 저한테 얘기를 했다고 하는데 저는 들은 바가 없어요. 그런 식으로 제가 노동한 거에 비해서 굉장히 허접하게 받는다거나, 작업 빨리 해달래서 빨리 해줬더니 다른 사람이 늦게 줘서 기다렸다가 ‘다 같이 입금해야 하니까 기다리세요.’ 이런 것도 있었고. 그런데 이게 문제가 그쪽만이 아니라 당시에 말을 못했으니까 제 잘못도 있는 거에요. 말을 하긴 했지만 좀 더 명확하게 분명하게 못해서. 어떤 일 할 때는 급여가 3개월 밀리기도 했어요. 그런데 두 달 지날 때까지 말을 안했어요. 운영도 어려워서 다른 사람 월급 제 돈으로 주고, 물건도 제 돈으로 사고. 돈 못받은 다른 분이 스트레스로 원형탈모가 생기고 안 나오고 그래서 제 돈 드렸어요. 일은 해야 하고 안 나오면 운영 구멍나니까.
예전에는 세상을 바꾼다 하면 싸울 대상이 뚜렸했잖아요.
요새는 되게 많긴 한데 명확하진 않고,
그 대상이 밖에도 있고 조직의 상사일 수도 있고.
– 신 : 왜 그렇게 열심히 한 거에요?
– 기 : 책임감? 글쎄요, 모르겠어요. 왜 그랬지? 정신이 팔려있었던 건지, 제가 약간 서비스 마인드가 있어서인가 싶기도 하고. 아무튼 저는 일단 돈을 벌어야 하고 그러면서도 일이 잘 되었으면, 단순히 일이 아니라 그 활동이 정말 잘 되었으면 했고. 아무튼 그런 경험에 대해서 지금까지도 계속 조금씩 정리를 해나가는 중이에요. 저는 저만의 관점을 잘 못 세우는 편이에요. 이건 이거야, 저건 저거야 명확하게 이야기하는 분들 보면 속시원할 때도 있는데, 저는 그렇게 말 못하고 ‘이런 거 같아요, 이렇게 생각해요’ 하는 편이에요. 조심스러운 것도 있지만 제가 틀릴 수도 있잖아요. 잘 모르니까. 늘 모른다고 생각하니까 자존감이 많이 낮았던 거 같고. 요샌 좀 나아졌어요.
– 신 : 올해 들어서 자존감이 좀 올라온 거에요?
– 기 : 네. 올해 일하면서 재미있어서. 그 전까지는 계속 헤메고, 재미있는지 어떤지 모르는 상태였던 거 같아요. 나를 봐 주는 동료나 피드백도 없고 하니까 이게 맞나 잘 모르겠고, 역량도 없고 그러니까. 아직도 부족한 건 매한가지인데, 이전에는 누구한테 연락해야 한다 하면 핸드폰 붙들고 한 시간 있었어요. 진짜 자신감이 없어가지고. 문자 썼다 지웠다. 요샌 그냥 전화하거든요. 많이 나아졌다 싶죠.
– 신 : 부족하다고 했잖아요. 그 기준이 어디에 있는 거에요?
– 기 : 제가 인정하는 기준. 잘은 모르겠는데, 아무튼 저 꼭대기에 있는 거 같아요.
– 신 : 그게 어디서 오는 거 같아요?
– 기 : 제가 원래 그런 성향이 좀 있었어요. 아예 열심히 하거나 아예 바닥을 치거나. 이런 성향이다보니까 어쨌든 기준은 최고로 잡는 거죠. 주변에 일 잘하는 친구들 보면서 저렇게 하고 싶다 생각하기도 했어요. 사람을 만날 때는 저 정도의 태도로 만나는 거구나, 문서를 쓸 때는 이정도 해야 잘 하는거구나 하고. 어쩌다 너무 힘들 때도 이건 정말 힘든 게 아닐거라고 계속 생각했어요. 좋지 않은 생각이었던 것도 같지만 상황을 최악으로 두지 않은 게 저를 버티게 해 준 힘이기도 해요. 연결이 될지 모르겠지만 반대로 제가 한 일을 최고로 두지도 않아요. 이 다음이 있을거야라며 준비하려고 하는 편이에요.
– 신 : 성장하고 싶은 욕구일까요?
– 기 : 네. 그런데 확 놔버리고 싶은 것도 있고… 성장이라는 게 그런 부분도 있잖아요. 내가 나를 놔도 된다고 판단하고 놔줄 때. 전 아직 그 정도까지는 안된 거 같아요. 내 판단을 내가 믿고 가도 될지 아직은 판단이 잘 안돼서.
– 신 : 현재까지 해 온 영역을 굳이 분류하면 어디에 해당된다고 생각해요? 시민운동? 뭘 하고 있었던 거 같아요?
– 기 : 시민운동이 뭔지 잘 모르겠어요. 각자가 목소리 낼 수 있고 자기 주체성으로 살 수 있는 그런 세상을 만드는데 도움이 되는 뭔가를 하는 거라면, 그런 언저리에 있었던 거 같은데 직접적인 변화를 위해서 뛰어들거나 이랬던 건 아닌 거 같고. 그런 작은 움직임이 쌓이면 어떤 변화를 추동해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요즘 토요일마다 알바를 해야 해서 탄핵 집회에 아직 한 번도 못나갔어요. 그것도 되게 속상해요. 그래도 이전에 광우병 촛불집회 갔을 때는 느끼지 못했던 변화들이 조금씩 일어나고 있는 거 같아요.
– 신 : 사회적 경제나 협동조합이나 그런 건 뭘 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 기 : 넓게 보면 시민운동이라고 생각해요. 시민운동이 다양해진 거 같아요. 이전에는 시민운동하면 참여연대 같은 방식 생각했다면 지금은 내가 그냥 참여하면 그게 시민운동이니까, 사회 혁신이든 사회적 경제든 사회를 이롭게 하면 그게 운동이 되지 않을까요.
– 신 : 그런 활동하기에 더 좋아진 거 같아요? 이전의 협소한 운동 범위에 비해서? 정책 중심의 단체들이 현재 운동이 어려워졌다고 평가를 많이 하는데요. 사실 사회적 경제라든지 새로운 영역 중에는 공적 기금이나 재단 같은 곳에서 지원하니까 가능한 것도 있잖아요.
– 기 : 저는 시민운동이 예전에 비해 많이 참여할 수 있고 쉬워졌다고 생각해요. 새로운 영역에 자본이 투하되는 걸 부정적으로 바라볼 수도 있지만, 사실 사회적 경제든 기존의 좁은 의미의 시민운동이든 정말로 사회적이고 대안적인 방식으로 조직을 운영한다거나 삶을 사는 사람은 소수인 듯 해요. 그런 고민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서로를 세워주는 관계성, 서로 주체성 같은 게 형성되기 보다는 예전의 방식으로 찍어 내리는 식으로 조직을 운영한다거나 그런 게 좀 있다고 봐요. 사회혁신활동가 지원하는 일을 하다보니 그들이 기존 시민단체나 사회적ㅡ기업에 가서 듣고 오는 언어나 경험한 바들 쏟아내면 너무 당황스러울 때가 많아요. 예를 들면, 영국에서 몇년 공부하고 돌아온 사람이 뜻이 있어서 혁신활동가로 갔는데 담당 활동가분이 다른 손님이 왔을 때 ‘아휴, 유학 가봤자 뭐해요. 저런 거나 하고 있는데’라고 이야기한 경우가 있었어요. 혁신 활동가는 적은 급여로 현장을 경험하러 가는 분들이라 무리하게 야근 같은 건 삼가해달라고 하면 그러면 일을 어떻게 하라는거냐 볼멘소리 하시기도 해요. 그런 것들이 수면 위에서 같이 이야기되면 좋겠는데 이야기할 장이 별로 없어요. 같이 성장을 고민해주지 않는 거에요. 사람이 왔다고 생각하지 않고 그냥 일을 할 실무자, 우리 너무 바쁜데 이 일 해줄 사람 왔다 이런 인식이 있어요. 그런 태도와 매일 부딪치는 활동가들은 상처를 받죠.
– 신 : 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요?
– 기 : 사업장이나 기존 활동가가 무조건 나쁘다기보다는 그런 부분에 대해 서로 이야기하고 받아들일 준비가 안된 거 같아요.
– 신 : 그런 자리가 없기도 하고, 만들어도 잘 안 오시기도 하고?
– 기 : 와서 이해하고 간 줄 알았는데 잘 안되는 경우도 있고, 그런 자리에 보통 조직에서 한 명만 오잖아요. 돌아가서 공유가 잘 안되는 경우도 있고 그래요. 조금씩 나아지고 있긴 하지만, 문제가 있는 사업장도 지원기관과 친하다는 이유로 별 변화 없이 계속 활동가 지원을 받고 그래요. 문제가 될 만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 그걸 지적하면 개인의 되바라짐이 아니라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해요. 그게 윗세대든 아랫세대든 인식으로 자연스럽게 자리 잡았으면 좋겠어요. 선택지가 많은 시대여서 ‘아, 못해먹겠어’하고 다른 거 찾아도 되지만 애정이 있으니까 문제제기 하면서 계속 활동하려는 거잖아요. 그러면 그들이 함께 할 조건을 만들기 위해서 함께 고민하면 좋겠다 싶어요.
서로를 세워주는 관계성, 서로 주체성 같은 게 형성되기 보다는
예전의 방식으로 찍어 내리는 식으로 조직을 운영한다거나…
– 신 : 현재로서는 조직이나 같이 하는 사람들에게서 에너지를 찾는 게 가장 좋다고 봐야할까요. 그 밖에는 또 뭐가 있을까요?
– 기 : 활동가들 모여서 공부하면서 활동에 대해 이야기나누고 그게 도움이 되는 거 같아요. 제가 처음 일 시작했을 때 자존감 무지 낮았다고 했잖아요. 그때 매사에 막 고민하면서 이것저것 감당해야 했는데, 제 나름의 방식으로 어떻게든 해나갔던 거 같아요. 그렇게 잘 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 기간이 별로 후회가 없어요. 다행스럽게도.
– 신 : 그렇게 정리를 하기로 한 거에요, 실제로 도움이 된 거에요?
– 기 :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어요. 물론 실제로도 도움이 되었을 거에요. 올해 초에 땡땡은 대학 워크숍 가서 열 몇명 갔는데, 질문을 서로 던지는 시간에 누가 저에게 “싱크카페 전 대표란 어떤 존재?”이라고 묻길래 “키맨”이라고 답했어요. 어쨌든 제가 이 바닥에 들어오게 해 주신 분이고, 여러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게 해 주었으니까. 자율성을 많이 줘서 어려운 점 분명히 있었지만 스스로 하는 게 지시받는 것보다는 좋았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정리하고 있어요.
– 신 : 지금 시민사회에 꼭 필요한 게 있다면 뭘까요?
– 기 : 아무래도 활동가들에게 동료가 많이 있으면 좋겠는데, 빚이라든지 주거 문제라든지 그런 생존의 조건이 너무 어려운 듯 해요. 제가 최근에 학자금대출 하나로 합해서 이자 줄어든 것만 해도 굉장히 큰 도움이 되었거든요. 그런 기본적인 삶의 환경을 개선하는 거, 공동주거 같은거요. 그렇게 계기를 만들고 물꼬를 터주는 기획이 있으면 정말 좋겠어요. 더 많은 젊은 세대가 함께 할 수 있으려면요.
– 신 : 대학 때 인상적이었던 철학 수업처럼 지금 활동하는데 필요한 공부랄까, 그런 건 뭐가 있어요?
– 기 : 저희 집이 책방을 했잖아요. 늘 책이 그렇게 많은데 제가 너무 안 읽으니까 책에 대한 부채감이 있는 거에요. 고등학교 때는 청소년 운동하랴, 좋아하는 연예인 쫓아다니랴 바빴고, 대학 때도 거의 공부를 안 해서… 올해는 책을 많이 읽고 싶었는데 또 알바가 너무 많은 거에요. 그 알바도 사실은 공부나 활동과 연계된 것들이기는 하지만, 일로서 몰아닥치니까 일단 해내는 데 급급하게 되더라고요. 시간을 좀 가지고 한 책을 오래 보든, 이야기를 오래 나누든 아무튼 좋아하는 사람들이랑 만나서 공부 하고 싶어요. 생각해보면 동료들과 이야기하고 함께 하는 거 자체가 공부가 되는 거 같아요. 책을 많이 안 읽은 대신에 저는 몸에 익히는 감각 그런 건 좀 살아있는 거 같아요. 일상에서 사소한 행동, 책임감. 그런 걸 몸으로만 알고 있는 거여서 말로 설명한다거나 글로 풀어낸다거나 하는 역량이 부족하기 때문에 그런 것들을 해낼 수 있는 저의 언어, 사유를 확장시킬 무언가가 있었으면 좋겠다 싶어요.
– 신 : 거의 안 읽으셨다고 했지만, 그래도 그동안 읽은 것 중에 가장 감명 받은 책이 있다면 뭐에요?
– 기 : 이런 질문 받으면 항상 떠오르는 책이 딱 한권 있어요. 대학 때 그 철학 수업 들을 때 참고서적에 있었던 헬렌 니어링의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라는 책이에요. 제가 그 책은 두 번 봤어요. 동료들이 기억상실증 있냐고 할 정도로 기억력이 나빠서 책의 구절같은 거 잘 기억 못하는데요, 그 책에서 뭘 하든 삶을 예술로 살아야 한다던 구절은 기억해요. 그거 말고는 철학 수업했던 김영민 교수의 공부론이라는 책이 있는데, 그 책은 챕터별로 필사도 하고 지금도 띄엄띄엄 읽어요. 인문학에서 ‘문’은 ‘무늬’라고, 사람의 무늬가 인문학이라고 했어요. 그리고 공부란 인의불발, 당기되 쏘지 않는 것이다, 즉 알면서 모른체 하는 것이라는 부분이 인상적이에요.
– 신 : 앞으로의 얘기 좀 해보죠. 지금까지와 비슷한 방향으로 가려고 해요?
– 기 : 멀리 미래까지 생각하지는 않고 매일매일 지금 닥치는 것들 성실히 하자, 성실하지 못하면 사과라도 잘 하자, 그렇게 생각하고 지내요. 마침 내년 한 해는 공부하러 해외로 가요. 숙식 제공해주는 1년 짜리 프로그램에 지원했는데 선발되었어요. 작년부터 막연히 좀 벗어나고 싶다고 생각한 것 같아요. 내 안에 있는 틀로부터도 벗어나고 싶고, 내면이 너무 소란스러워서.. 꼭 간다고 뭐가 되는 건 아니라도 계속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돈도 없고 그래서 준비 못하고 있다가 우연히 기회를 얻었어요. 그럼 내년에는 돈을 못 버니까 학자금 대출 갚을 거 미리 버느라고 요새 많이 바빠요.
– 신 : 아무튼 지금 계획은 공부하러 간다, 그 뒤는 그때 가서.
– 기 : 네. 시간이 많은 사람이 되면 좋겠어요.
– 신 : 언제쯤 될 거 같아요?
– 기 : 한 오년쯤 후에? 너무 거창한가? 꿈이?
– 신 : 뭐, 학자금 일단 갚으면 아무래도 좋아지겠죠. 그 때쯤이면 다 갚지 않겠어요?
– 기 : 그러네요. 시간이 많아지면 좀 멍도 때리고, 너무 시간이 많아서 지겨워서 뭔가를 하게 되는 그런 경지에 이르렀으면 좋겠어요. 일을 안하겠다는 건 아닌데 제가 시간의 여유로움을 몸으로 느끼면서. 그게 물리적인 건 아닐 수도 있어요. 엄청 바쁘게 살지만 마음이 급하지 않는 삶일 수도 있고. 그런 상태여야 제가 누군가와 함께 일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실수나 차이에도 예민해지고, 서로 언어가 다르니까. 상대의 말이 무슨 말일까 생각도 좀 해보고. 너무 바쁠 때는 고민도 사치가 되니까요.
_ 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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