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공익활동가포럼] 나의 욕구를 우리 욕구로 확인하는 것, 풀뿌리운동의 시작 - 이호


빈민 운동의 현장에서부터 시작해서 도시연구소와 풀뿌리자치연구소 이음까지 20년 넘게 풀뿌리 운동의 현장에서 많은 활동가들을 만나셨잖아요. 최근에 풀뿌리운동에 관한 책도 쓰고 계시단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활동가들의 현재 운동에 대한 고민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시리라 생각하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 보죠. 운동 조직 내부의 민주주의 문제와 수평적 조직 운영에 대한 요구는 꽤 오래 전부터 있어왔습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민주적으로 운영될 환경조차 마련되어 있지 않은 곳이 많다고 이야기합니다. 예를 들어, 경력 있는 대표나 사무처장 한 명과 한 두 명의 활동가들이 일하고 있는 곳들이 많기 때문에 그런 규모에서는 민주주의가 작동될 여지조차 없다는 거죠. 물론 일반적인 모습은 아닙니다만 이호 선생님께서 보시기에 운동 조직에서 민주적인 운영의 중요한 요소는 무엇일까요?

일하는 사람이 10명쯤 되면 민주적이고 수평적인 의사결정구조가 필요하죠. 그런데 한두 명이 일하는 작은 단체들에게는 민주적 의사결정구조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합의할 것인가의 문제겠죠. 저도 몇 년 동안 동료 한 명하고만 일해 본 경험이 있어요. 둘이 있으면 회의도 잘 안 해요. 서로 일하면서 하고 싶은 이야기도 하고, 농담도 하다가 일과 관련된 상의도 하고 결정도 합니다. 두세 명이 일하는데 민주적이지 못하고 존중받지 못하고 수평적이지 못하다고 느끼는 건 일상적인 소통이 잘 안되기 때문이죠.

당연히 조직을 민주적으로 운영해야죠. 근데 두세 명이 모여서 어떻게 민주적인 운영을 할 수 있을까요? 사실 막연하잖아요. 풀뿌리자치연구소에서 10년 차이가 나는 후배랑 일을 했는데 그게 가능했던 것은 서로에 대한 존중이 있어서겠죠. 예를 들어 저는 제가 내린 결정을 후배가 따라야 한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요. 물론 그 후배도 따라야 한다는 생각을 안했을 거예요. 어떨 때는 나한테 승낙도 안 받고 제멋대로 일하는 경우도 있죠. 솔직히 말하면 그게 서운할 때도 있었어요.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 후배가 내 지시를 따르기 위해서 같이 일한 게 아니니까요. 서운한 건 서운한 거고 본인은 할 일을 한 것 뿐이고 내가 할 일은 내가 하면 되는거지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러니까 민주적인 운영을 따지기 전에 일상적인 소통을 어떻게 할 것인가가 더 중요한 거죠. 근데 일상적인 소통이라는 것도 선배는 주로 자기 경험을 중심으로 이야기하는데 후배는 경험이 많지 없으니까 주로 들어야 되는 입장이 되요. 이런 경우 소통을 잘 못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힘들어요. 예를 들어 한 풀뿌리 단체에 처음으로 공채를 통해 젊은 활동가 두 명이 들어왔어요. 근데 젊은 활동가들이 보기에 사무실이 너무 칙칙하더라는 거예요. 도배를 새로 했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했대요. 하지만 사무국장은 도배를 할 필요성을 못 느꼈고, 거기에 돈을 들여야 할 이유도 못 찾겠는 거죠. 결국 안하기로 결정을 했는데 제가 그 상황을 보면서 오래 같이 일하기 힘들겠다 싶었는데 결국 두 명 다 그만뒀어요.

이럴 경우 후배들은 사무국장인 선배가 후배들의 이야기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수평적이고 민주적인 관계를 맺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겠죠. 왜냐면 도배를 결정하는 사람은 사무국장이었는데 후배들의 의견을 묵살한 거니까요. 사무국장은 그게 심각한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어요. 근데 그게 꼭 권위적이고 수평적이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일까요? 세 사람이 일하는데 역할을 구체적으로 구분한 다음에 이거이거는 네가 전결처리하라고 하는 게 맞는 걸까요? 나는 잘 모르겠어요. 예로 든 단체의 경우 상근하는 사람들 간의 소통이 부족했을 거예요. 소통이 부족할 때 그 피해는 주로 후배들에게 돌아가기는 하죠.

 

민주적인 운영을 따지기 전에
일상적인 소통을 어떻게 할 것인가가 더 중요

 

민주적인 운영이나 절차, 구조에 대해 생각할 여지가 없는 규모의 단체들도 있죠. 그 경우 일상적인 소통이 중요하다고 하셨는데 그러면 결국 사람의 문제로 결론이 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조직의 리더들에게 필요한 건 소통능력이다라고 결론내릴 수 있는 문제도 아닌데 말이죠.

최근에 공동체 이야기 많이 하죠. 저는 마을공동체운동은 대안적인 운동이라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우리가 함께 만들어가고 있는 운동이니까요. 지금 사회 속 사람들의 관계가 계속 적대적인 관계로 바뀌고 있는데 이 관계를 다시 호의적인 관계로 다시 전환하는 게 중요한 대안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공동체운동이 점점 중요해진다고 보는데 공동체운동은 관계 속에서 이루어져요. 공동체운동이 좋다고 해서 딱 되는게 아니라 그 공동체를 이루는 사람들의 내공 정도에 따라 공동체가 만들어질 수 있을 뿐이죠. 그래서 운동이라고 이야기하는 거구요. 고정된 모습의 공동체를 만들자는 게 아니라 나에서 우리로, 사회로 계속 확대 발전해가는 공동체운동을 하자는 이야기예요. 마찬가지로 조직 내의 민주주의 문제도 개인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집단의 문제이기도 하고, 사회적 문제이기도 해요. 10년 이상 나이 차이가 나는 후배들과 같은 조직 안에서 평등하게 일상의 이야기를 나누기는 쉽지 않아요. 이해 안 되는 점이 있을 수도 있구요. 서로 인정해야죠. 

운동하는 사람이라면 세상을 바꾸는 것만이 내 운동의 과제라는 생각은 버려야 해요. 사회를 바꾸는 것 뿐만 아니라 내 스스로가 얼마나 대안적으로 바뀔 수 있느냐도 운동의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하거든요. 내 주변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나와 우리가 어떻게 함께 변할 것이냐가 운동의 과제이고 그 변화가 확산되는 것이 사회의 변화라고 한다면, 조직 내에서 존재하는 갈등과 관계의 문제를 어떻게 풀어갈 것이냐도 중요한 운동과제라고 할 수 있는 거죠. 그러니까 이걸 단지 개인의 문제로 간주할 것은 아니라는 거예요. 운동하는 태도와 세상을 바꾸려는 열정을 일상에서 어떻게 구현시키느냐가 우리 운동의 과제예요. 때문에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없다의 문제를 넘어 우리가 정말 그것을 중요한 운동 과제로 삼고 있느냐의 문제로 보는 거죠.

 

관계라는 키워드로 이야기를 하니까 맥락이 잡히는 거 같네요. 나와 주변 사람, 지역과 사회와의 관계를 계속 호의적으로 만들어가는 게 공동체 운동이고 그게 곧 풀뿌리 운동이라는 말씀이시죠? 마찬가지로 조직 내에서 나와 다른 활동가들과의 관계, 회원들과의 관계, 시민들과 사회와의 관계를 호의적으로 만들어가는 차원으로 생각하면 이 문제가 단순히 현재의 갈등을 푼다는 수준에서가 아니라 우리 운동의 굉장의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해볼 수 있겠네요.

그럼요. 중요한 운동의 과제라고 보는 거죠.

 

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으니까 말인데요. 과거와 달리 지금은 활동가 개인의 감정을 소홀하게 대하면 안 되는 때인 거 같아요. 서운한 감정도 묵혀두지 않고 최대한 솔직하게 드러낼 필요가 있다고 이야기하구요. 그러다보니까 그 전에는 드러나지 않았던 감정의 골이 깊어진 측면도 있죠. 좋지 못한 감정이 쌓일 수도 있고, 그냥 흘러보낼 수도 있는데 그 감정들이 관계에 좋지 못한 영향을 준다고 하면 신뢰가 부족해서겠죠?

부부 사이도 마찬가지죠. 결혼하기 전에는 서로 죽고 못산다 해도 결혼하고 나서는 한동안 전쟁 같은 시간을 보내기도 하잖아요. 우리가 아무리 이성적으로 성장했다고 해도 처음부터 자연스럽게 신뢰관계가 형성되지는 않는다는 거예요. 우여곡절을 겪을 수밖에 없죠. 근데 가족들끼리는 그렇게 싸우면서도 왜 신뢰가 있냐면 웬만해서는 서로 등을 돌릴 수 없는 관계니까 그래요. 그렇지 않은 관계는 마음에 안 들면 언제든지 등 돌릴 수 있잖아요. 그러니까 저는 조직 내 관계에서도 여러 우여곡절이 무르익는 동안 서로 견뎌내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봐요.

가족과 비교하는 게 적절할지 모르지만 유사 이래로 인류가 집단을 이루었을 때 갈등이 없었던 적이 있었는가 생각해보면 없었잖아요. 이상을 추구하는 종교인들이 모여 있는 수도원에도 갈등이 있어요. MBTI나 애니어그램과 같은 검사방법도 수도원에서 활용되면서 확산되었어요. 갈등이 심했기 때문이예요. 갈등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예요. 갈등에 좀 익숙해질 필요가 있다고 봐요. 그러기 위해서는 견디는 시간이 필요하구요. 그걸 못견디면 갈등이 반복되면서 확대 재생산되거든요. 특정한 갈등 문제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어느 순간 적응이 되는 순간이 있을 거예요.

공동체 관계도 내 생각이 100% 받아들여지지는 않죠. 성숙한 개인들이 모여 있으면 서로를 쿨하게 인정해주는 게 필요해요. 나 같은 세대의 표현으로는 성숙함이고 젊은 사람들 표현으로는 쿨함이겠죠. 나는 ‘쿨하다’는게 ‘성숙하다’는 것만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서양의 똘레랑스도 서로의 생각을 존중해주는 거잖아요. 너는 그렇게 생각하니? 그럼 그렇게 일해봐. 나는 이렇게 생각하니까 이렇게 일해볼께. 나중에 만나서 이야기해보자. 이렇게 가야죠.

 

공익활동포럼을 위한 질문 워크숍에서 나온 질문 중 하나가 ‘조직이 과연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였습니다. 비슷하게 ‘활동가에게 조직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도 나왔구요. 얼마 전에 같은 질문을 다른 선생님께도 한 적이 있는데요. 최근에 새롭게 등장하고 있고, 조직 생활에 지친 젊은 활동가들이 원하는 정체성 중 하나가 독립활동가나 1인 활동가, 혹은 조직 밖에서 활동하는 활동가의 모습인거 같다고 말씀드렸더니 그 분은 단호하게 조직에 기반하지 않은 활동가란 없다고 말씀하시더라구요. 근데 이야기를 하다보니까 그 분이 생각하는 조직과 젊은 활동가들이 이야기하는 조직이 다른 개념이더라구요. 일반적으로는 ‘단체’를 조직으로 생각하는데 그 분은 단체 범위를 벗어나서 지역의 여러 네트워크 관계를 포함한 ‘관계망’ 자체를 조직이라고 생각하고 계신거죠.

저도 그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거예요. 조직이 세상을 바꾸지 못한다라고 이야기한 게 아니라 단체가 세상을 바꾸지 못한다라고 이야기한 거거든요. 조직을 단체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사실은 우리가 흔히 네트워크라고 하는 개인들의 자발적인 연결망, 이것도 조직이라고 할 수 있는 거죠. 조직이 아닌 홀로 동떨어진 개인이 세상을 바꾼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그럼 단체가 세상을 바꿀까요? 나는 요즘 그 부분에 회의적이지만 연결된 개인들의 자발적인 네트워크가 세상을 바꾸는 조직으로 새롭게 등장하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거죠. 그것도 조직은 조직이죠.

 

일단은 단체로 좁혀서 이야기를 해보죠. 지금 시기의 활동가들에게 단체는 어떤 의미일까요? 이호 선생님이 일하실 때의 단체와 지금 시기의 단체는 그 의미가 굉장히 다를 것 같거든요.

저는 천주교도시빈민회라는 단체에서 빈민운동부터 시작했어요. 단체 중심으로 활동한 건 맞아요. 그때는 단체가 아닌 건 존재하지 않았으니까요. 근데 저는 빈민 지역에서 일을 했어요. 그러다 보니까 어떤 일이 있었냐면요. 내가 일하는 신정동에는 철거반대투쟁을 하는 철거민들의 조직이 있었고 나는 천주교도시빈민회라는 단체에 있었어요. 현장에서는 대중조직 어딘가에 속해있어야 했어요. 천주교도시빈민회라는 단체가 대중 조직을 수용하는 구조가 아니었던 거죠. 그래서 단체에서 일을 했지만 다른 조직에 있는 사람들하고 계속 결합하는 경험들을 가질 수밖에 없었어요. 

89년도에 지역에 기반해서 활동하는 빈민운동단체들 간에 갈등이 있어서 갈라진 적이 있었는데요. 우리는 왜 갈라설 수밖에 없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는데 우리의 목표는 빈민 지역에서 주민자치조직을 만드는 걸로 결론이 났어요. 제가 신정동 다음에 봉천동에서 일을 했는데 저는 천주교도시빈민회의 일원으로 거기서 일을 했고, 다른 사람은 지역 공부방에서 일을 했고, 기독교도시빈민선교협의회 목사님은 민중교회를 운영하고, 지역사회탁아소연합회에 소속된 사람들은 탁아소를 운영했어요. 다양한 단체에 소속된 사람들이 같은 지역에서 일을 했고 그 사람들이 모여서 ‘봉천동 주민연합조직’을 만들었어요. 일종의 네트워크 조직이었죠.

그러니까 저는 단체 중심으로 활동했던 경험이 많지는 않아요. 오히려 지역을 중심으로 한 네트워크 조직에서 일한 경험이 훨씬 더 많죠.  그렇게 일을 하다가 또 갈등이 있었어요. 천주교도시빈민회 선배들은 우리가 얼마나 중요한 단체인데 정책에 대한 논의도 하지 않느냐는 비판들을 했어요. 우리의 현장이 지역이면 지역에서 같이 일하는 사람들하고 정책 논의를 해야지 왜 천주교도시빈민회 회원들하고만 정책 논의를 하냐는 거였죠.

제가 왜 단체가 세상을 바꾸기 힘들겠다고 생각했냐면 여러 협의회나 네트워크 단체들을 보면서예요. 예를 들면 이런 거죠. 단체들 간의 네트워크다보니까 거기에 속한 단체들의 욕구에 기반해서 합의된 운동이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당위적인 것들로부터 운동이 만들어져요. 그러다 보니까 네트워크에 속한 단체들은 자기 일로 생각해서 헌신적으로 일하는게 아니라 한 단체가 어떤 이슈가 중요하다고 하면 그 단체 중심으로 일이 되고 나머지는 곁다리로 참여하는 등 단체가 되버리는 거예요. 이렇게 되니까 네트워크가 잘 운영이 안되죠. 그리고 지역에서 활동가들끼리만 만나서 마치 세상을 바꿀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주민들에게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하는 그들만의 리그가 계속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거죠.

 

조직을 단체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네트워크라고 하는 개인들의 자발적인 연결망, 이것도 조직

 

지금 말씀하신 네트워크는 각 지역별로 있는 시민사회단체들의 연대체나 협의회 등을 말씀하시는 거죠?

그렇죠. 실제 네트워크라는 생각이 안드는 거예요. 지역을 보면 단체의 대표와 사무국장 등이 한 그룹이고, 젊은 활동가 그룹이 있고, 회원 그룹이 있는 3중 구조를 갖고 있어요. 네트워크 단체니까 의사결정은 윗 사람들이 하고, 실행은 의사결정에 참여하지 못한 활동가들이 하고, 회원들은 거기서 배제되는 구조가 계속 강화되는 거예요. 사무국장과 대표로 상징되는 선배 그룹은 젊은 활동가들이 제대로 일 못한다고 투덜대고, 활동가들은 우리는 서로 만나지도 못하는데 당신들이 다 결정해와서 우리에게는 일만 시키냐고 하고, 회원들은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전혀 모르고 있는 상황이 되는 거죠. 회원들은 가끔 소식지나 받아보면서 행사에 와달라고 하는 동원의 대상이 되는 상황이 계속 반복되니까 단체들의 영향력은 점점 작아지는 거죠. 

사무국 중심, 전업활동가 중심의 활동이 지역사회에서 미치는 영향력이 어느 정도인지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전에는 지역 언론사에서 활동가들의 말을 이해하고 받아줬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아요. 본인들은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지역에서는 별다른 영향력도 없는, 그들만의 리그라는 걸 다 안단 말이예요. 그래서 이런 식으로 계속 간다면 단체가 세상을 바꾸는데 아무런 기여를 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이제는 실질적인 운동 네트워크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에 집중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단체가 그런 네트워크를 만들 수도 있지만 지금은 사람들의 욕구와 자발성을 중심으로 새로운 사람들이 스스로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자발적인 결사체가 많이 만들어져야 하는거 같아요. 그것이 운동의 의미를 담고 있든 그렇지 않든 그것 자체가 시민사회가 열려있다는 자극점이고, 그런 자발적인 결사체들이 나중에 어떤 의미를 찾아가게 할 것인가를 운동의 과제로 삼아야죠. 처음부터 운동의 과제를 내놓고 사람들을 동원하려고 하는 방식은 더 이상 아니예요. 그런 식으로는 운동이 되지 않는다고 보는데 단체는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라는 생각이 들어요. 

오히려 단체들이 역할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해요. 왜냐면 자발적인 결사체들이 모여서 뭔가를 해보려고 하는 시도들이 꽤 많이 일어나고 있는데 거기에는 또 한계가 있어요. 그렇게 해본 경험이 많지도 않고, 시간을 많이 투여할 수 있는 사람도 없거든요. 이런 표현이 어떨지 모르지만 단체들이 욕심을 버리고, 내가 세상을 바꾸는 주역이 되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그렇게 자발적으로 모여 있는 사람들을 지원하는 역할을 해야 되지 않을까 생각해요. 이게 단체들이 세상을 바꾸는데 기여할 수 있는 중요한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훈련된 전업 활동가들이 있으니까요. 그 역할들이 필요 없는 것은 아니거든요. 단체는 그런 자발적 결사체들을 지원하는 역할로 가야하지 않을까요?

 

시민사회단체의 새로운 역할에 대해서는 나중에 구체적으로 다시 여쭤보기로 하구요. 그 전에 단체가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라는 질문은 지금의 단체들이 지역사회에서 변화를 이끌어내거나 사람들을 끌어들일만한 매력적인 역할을 못하고 있다는 현실의 반증일 수 있겠군요.

그렇죠. 지난 10년 동안의 민주정부라고 하는 시기에 몇몇 단체들은 지역에서 꽤 영향력을 높이고 목소리를 키워왔던 게 사실인데, 10년이 지난 후에 보니까 그 단체 영향력은 꽤 커졌는데 지역 시민사회 전체의 영향력은 커지지 않았다는 거예요. 한 단체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과 그 지역 시민사회와 시민들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과는 비례하지 않다는거죠. 반비례하지도 않지만 비례하지도 않더라는 걸 보게 된 거죠. 그렇다면 단체의 영향력이 커진다고 하는 게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어요.

 

장기적으로는 전체 시민사회, 지역의 시민사회와 시민들의 영향력이 커질 수 있도록 하는 게 단체의 중요한 역할이라는 거잖아요. 조금 전에 단체의 새로운 역할이 ‘지원’이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그 점에 대해 좀 더 이야기를 해주시겠어요?

기존의 단체가 주로 사무국이나 전업활동가 중심으로 움직이니까 그들만의 리그가 되버린 거죠. 단체에서 일을 잘 할 수는 있지만 제가 관찰하기에는 시민사회 영향력을 키우는 데는 별로 도움이 안되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시민들의 자발적인 결사체가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그런 결사체가 소모임 형태로 만들어지기도 하고, 어느 정도까지 운영되다가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는 경우들도 많은데 그건 이 분들이 그런 일을 해본 경험이 없어서거든요.

자발적인 결사체라고 하는 집단을 어떻게 외부 세계와 영향을 주고받으며 발전시킬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부족하고, 뭔가를 하고 싶어서 모였는데 그걸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모르기도 하죠. 그리고 누군가는 시간을 내서 사람들을 조직하고 일을 기획하는 역할을 해야 되는데 시간을 못 내죠. 예를 들면 개별적으로 역량은 다 있는데 그 결사체에 시간을 내고 투자할 사람이 없는 거죠. 그럼 그 역할을 누군가가 해야 되는데 이미 지역 사회에는 그런 일을 할만한 좋은 역량들이 있다는 거예요. 전업 활동가가 그분들이죠. 그래서 이렇게 자발적인 결사체에 모인 시민들과 역량을 가진 전업 활동가들이 결합하는 방식으로 지역운동을 재구성해가는 것이 맞겠다고 생각해요.

그럼 단체가 문을 닫아야 하는 문제가 아니라 단체는 자기 고유한 일상 활동을 하면서 전업활동가들은 자발적인 주민 결사체들을 어떻게 지원할까를 중요한 역할로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야 지역사회 내에 광범위한 인적 네트워크가 만들어질 수 있는거죠. 이 네트워크 자체가 하나의 조직일 수도 있고 다양한 소모임들의 네트워크일 수도 있는데 그건 지역 상황과 사람들이 모여 있는 방식에 따라 다양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이렇게 단체 역할의 재편을 통해 지역사회를 다시 재구성했으면 좋겠어요.

조직가 마인드가 있는 활동가라면 주민들을 조직해서 스스로 결사체를 만들 생각을 하는데 사실 지역에 그런 결사체들은 이미 있어요. 단지 그 결사체들이 자기들의 모임만으로 존재하고 있을 뿐인 거지. 그건 그 사람들이 폐쇄적인 성격이어서가 아니라 외부 세계와 영향력을 주고 받는 방법을 잘 몰라서일 수 있어요. 이 상황을 관계로 설명을 해보자면 저는 조직 내부에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세상과의 관계를 계속 형성해가는 것이 운동의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문제는 내부의 관계는 만들어냈는데 외부 세상과의 관계를 만들어 나가는 방법, 운동으로서 영향력을 키우는 방법을 잘 모르는 경우가 많은 거예요.

 

자발적인 결사체에 모인 시민들과 
역량을 가진 전업 활동가들이 결합하는 방식으로 
지역운동을 재구성해가는 것이 맞다

 

말씀하신대로 단체가 그런 역할을 해야 한다면 전업 활동가들게는 두 가지 고민이 생길 것 같아요. 하나는 단체에 속한 전업활동가로 일하면서 지역의 자발적 결사체들의 지원자 역할을 한다고 했을 때 먹고 사는 문제를 어떻게 할 것이냐, 과연 그런 활동을 지지해주는 후원자 그룹이 지역사회에 있을 것인가? 기존에는 단체의 지향이나 집중하는 현안, 사업 내용을 보고 직접 참여는 못하지만 후원이라도 하겠다는 분들이 많았거든요. 근데 말씀하신대로 역할을 변경하면 구체적인 사업 내용이 아니라 사람의 역할에 지지와 후원을 해야 하는거잖아요. 또 하나는 전업활동가의 역할이 그렇게 바뀐다면 사실상 사무실로 출퇴근하는 게 큰 의미가 없어 보이거든요.

 

그게 참 어려운데요. 재정문제는 모든 단체가 다 힘들잖아요. 근데 지역에 있는 단체들은 일이 전문적으로 분화되어 있지는 않아요. 다 비슷한 지역 이슈를 가지고 일을 해요. 그러니까 단체의 고유한 일상 활동은 회원 모임 운영과 같은 주민들과의 관계와 관련된 것 아니겠어요? 저는 솔직히 말하면 이게 쉽게 판단할 문제가 아니란 건 알지만 단체들이 왜 따로 있어야 되는지 모르겠어요. 단체 상황을 보면 이 활동에 동의해서 후원하는 일부 시민들 외에는 다 돌려막기 아닌가요? 예를 들면 제가 살고 있는 군포에 회원 가입이 한 곳만 되어 있는 게 아니란 말이죠. 단체 회원으로 있는 사람들은 몇 군데 단체의 회원을 같이 하고 있어요. 저는 전체적으로 12군데가 넘어요. 사무실을 통폐합하는 것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봐요. 왜 통페합을 못할까요? 20년 전부터 그 고민을 했는데 뚜렷한 이유가 없어요. 단체 자산이 없어진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나중에는 돌이킬 수 없는 상태가 될 수 있어요.

 

기존에는 단체가 하는 구체적인 일을 보고 후원을 하고 그 후원금으로 단체를 운영해야 한다는 게 정석처럼 되어 있어요. 물론 프로젝트 사업을 하지만 단체의 미션과 비전과 사업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후원금으로 단체를 운영한다는 게 기본이었거든요. 근데 방금 말씀 하신대로 하자면 단체의 구체적인 사업 보다는 전업활동가의 어떤 역할을 지지하고 후원한다고 볼 수 있거든요. 그런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저는 나중에는 그렇게 가야 한다고 봐요. 지금 <지리산이음>에서 하는 청년활력기금이나 민주주의기술학교에서 하려고 하는 청년활동가 후원 프로젝트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최근에 했어요.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최소한의 생계비는 후원해주자는 개념이잖아요. 나는 그런 방향으로 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 필리핀의 주민운동에서 제일 부러웠던 게 주민들이 활동가를 채용하잖아요. 월급을 주고 활동가를 고용해요. 주민들이 어떤 일을 하려고 하는데 도와줄 조직가가 필요해요. 그러니까 조직가를 훈련시키는 곳에 이런 역할을 하는 사람을 파견해달라고 해요. 그런게 참 부러웠거든요. 실제 그런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런 주민모임에서 일정한 경비를 마련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활동가의 역량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해볼까요? 활동가가 과거에는 기본적인 사무능력도 필요했지만 사회 현안에 대한 전문성도 필요하고, 조직가로서의 역할도 요구받고, 기획서도 잘 써야 되고, 결산도 잘 해야 되고… 여러 가지 종합적인 역량을 요구받았는데 방금 말씀하신대로 단체와 활동가의 역할 전환이 필요하다면 활동가에게 필요한 역량도 달라질 필요가 있겠네요.

사실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라 오래 전부터 해왔던 이야기인데요. 오히려 90년대 이후에 요구되는 활동가의 역량이 이상하게 바뀌었죠. 예를 들면 90년대 이후에 활동가들에게 전문가의 시각을 강조하는 분위기가 많았는데 활동가에게는 시민들의 시각에서 그걸 분석해내는 능력이 필요하죠. 제일 많이 잃어버린 것 중에 하나가 그것 같아요. 전문성을 강조하고 소위 가방끈 긴 전문가들에게 의존하게 되면서 시민의 관점을 오히려 잃어버린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전문가들이 읽어내는 시민의 관점도 있겠지만 시민들 스스로 사회에 대한 시각을 정리하고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기 위한 노력도 많이 약해졌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지금 활동가들에게는 시민들의 입장에서 문제를 분석하고, 시민들이 그것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는 능력이 가장 중요한 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활동가는 자기가 주체가 되는 역할이라고 보지 않는 거예요. 활동가는 시민들이 주체가 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해 주는 게 가장 중요한 역할인거죠. 그래서 사람들과 어울리는 능력, 사람들을 설득하는 능력, 관계를 잘 맺는 능력 같은 것들이 중요할 수 있죠.

 

그런 역할들이라면 굉장히 스트레스 받는 일이 될 수 있어요.

그렇죠. 그래서 그 분야의 전문성이 필요하다고 보는 거예요. 사람들이 활동가는 전업으로 단체에서 일하는 사람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활동가, 즉 액티비스트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조직가’라는 말도 이제는 별로더라구요. 조직하는 사람과 조직당하는 대상으로 구분되는 어감 때문에 그 말을 쓰고 싶지 않아요. 예전에는 ‘활성가’라는 말도 썼어요. 요즘은 촉진자, 퍼실리테이터라고 하죠. 제가 퍼실리테이터라는 말을 20년 전에 들었어요. 빈민 운동하던 시절인데 선배 한명이 외국을 다녀오더니 퍼실리테이터라는 개념을 들고 와서 조직가의 역할도 이제는 활성가의 역할로 재조정될 필요가 있다고 하더라구요. 그때 퍼실리테이터를 활성가라고 번역해서 썼어요. 

워크숍 때 기억이 나는데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조직가와 활성가가 뭐가 다르냐고 물었을 때 사실 같은 건데 조직가라는 말이 조직당하는 사람을 대상화시키는 의미가 있으니까 활성가라는 말을 쓰자고 했어요. 근데 활성가라는 말도 따지고 보면 활성시키는 사람, 활성당하는 사람으로 구분되죠? 그런 구분을 없애려고 하는 것 자체가 활동가의 능력이라고 봐요.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할 수 있게 하고, 각자의 이야기들이 모여져서 액션 플랜을 스스로 만들 수 있는 과정을 만들어 내는 사람, 그런 역량이겠죠.

 

전문성을 강조하고 전문가들에게 의존하게 되면서 
시민의 관점을 오히려 잃어버린 게 아닌가

 

활동가들의 그런 역량을 키워주기 위해서 우리는 무슨 노력을 해야 할까요? 단순히 교육프로그램만으로 채워질 수 있는 능력은 아닌 것 같은데요.

깊이 생각해 보진 않았지만 우선 활동가 개인들의 네트워크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올해 ‘이호의 풀뿌리학교’를 하면서 깨달은 게 뭔지 아세요? 제 이름을 걸고 하는 학교라 사실 부담이 많았어요. 건방진 이야기지만 내 모든 노하우를 다 전해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구요. 짧은 기간 안에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전달할까 고민했죠. 근데 제가 지금까지 쌓은 경험이나 노하우를 체계적으로 선배한테 배운 적이 한 번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그러니까 저 자신도 제가 쌓은 노하우를 체계적으로 후배들한테 전해준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거예요. 후배들은 체계적으로 교육받기를 원하죠. 근데 경험이 없으니까 그 방법을 모르겠어요. 계속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새롭게 배워야 하는 과정인거죠. 그런 상호작용이 계속 필요한 거 같아요. 

곳곳에 다양한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있는데 그 사람들이 한 달에 한번이든 일주일에 한번이든 모여서 서로 소통하면서 질문을 던지고 경험을 나누는 자리가 필요해요. 꼭 선후배로서의 경험이 아니어도 되죠. 내가 경험하지 못한 것을 후배들은 이미 알고 있는 것도 많을테니까요. 그래서 서울NPO지원센터에서 하는 미트쉐어와 같은 프로그램이 중요할 수 있겠다 생각해요. 다만 그렇게 프로그램화된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모일 수 있는 네트워크였으면 좋겠어요.


교류와 상호작용, 관계 맺기가 핵심 키워드겠네요.

그렇죠. 활동가는 스트레스 받는 직업이라고 하잖아요. 그럼 스트레스를 풀기 위한 관계도 필요하잖아요. 그런 것부터 시작하고 과정을 거쳐야 단련이 되죠. 근데 후배들은 선배들의 경험을 체계적으로 전달받아야 된다는 생각이 많은 거 같아요. 근데 문제는 선배들도 체계적으로 배운 적이 없어요. 그러니까 체계적으로 전달할 능력도 없어요. 그런 과정을 후배들이 만들었으면 좋겠어요. 짧은 경험으로 만드는 것이 어렵다면 선배들과의 교류를 통해서 자기 것으로 만들고 체계화했으면 좋겠어요.

 

최근의 시국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해볼까요? 최근 상황에 대해 시민혁명의 시기라고도 이야기하고, 광장의 문화라는 것도 만들어지고 있죠. 이런 광장이라고 하는 열린 공간에서 단체와 활동가들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요?

사람들이 광장에 자발적으로 모인거지 단체들이 주도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사람들의 요구가 분출되는 상황이고 그 요구들을 잘 받아들여서 탄핵이든 하야든 결과를 만들어내는 게 중요한데 그런 쪽으로는 일을 해본 적이 없어서 사실 잘 모르겠어요. 문제는 지금 같은 시국에서 이 움직임이 어떻게 일상의 촛불로 연결될 수 있을까가 제 고민이예요. 저는 노무현 탄핵 때 일어났던 촛불, 광우병 때 일어났던 촛불, 세월호 때 일어났던 촛불이 왜 그 당시 이슈의 성패에 따라서 꺼져버렸을까 궁금해요. 과연 그 촛불들이 우리 사회를 바꾸는데 기여했을까? 이런 질문을 던지면 약간은 회의가 들어요.

세상을 바꾸고 싶은 게 운동이라고 한다면, 최근 어떤 청년이 페이스북에 ‘박근혜가 하야하면 내 삶은 과연 자유롭고 행복질 수 있는가? 과연 우리가 행복하지 못한 것이 박근혜 때문이었나?’ 이런 글을 올린 걸 봤어요. 박근혜를 내려오게 하는 건 당장의 현안일 수 있지만 운동이 이루고자 하는 바가 박근혜 하야는 아니겠죠. 우리가 행복한 삶을 영위하도록 만드는 것, 그것도 개인적으로가 아니라 더불어서 행복한 삶을 어떻게 재구성할까? 이것이 핵심일거예요. 그럼 거기에 젠더 문제도 있고, 노동 문제도 있고, 문화 문제도 있고, 환경생태 문제도 있어요. 그런 문제들을 외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운동도 여전히 필요하겠지만 그것이 내 일상에서 어떻게 발현되는가 하는 것도 중요한 운동의 과제일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혼자서 고립된 섬에 앉아서 환경적인 삶, 젠더의식이 충만한 삶을 사는 게 아니라 관계 속에서 그런 삶을 어떻게 만들어갈까에 대한 일상의 고민이 필요합니다. 저만 해도 젠더에 대한 감수성이 요만큼 생겼다고 하더라도 굉장히 미약할거 아니에요. 제가 빈민운동을 했으니까 빈곤문제에 대한 감수성은 딴 사람보다 좀 높을지 모르겠지만 생태 감수성이나 젠더 감수성은 그에 비해 떨어지죠. 하지만 다른 가치에 대한 감수성은 키워가려고 노력하고 있고 그게 운동이라는 거죠. 개인적인 내 안에서, 우리 안의 관계를 통해서 그걸 어떻게 사회적으로 실현시켜 나갈까? 이게 운동의 삼 박자, 세 가지 요소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일상 속에서 그런 지향점에 다가서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일상이 이뤄지는 공간은 크게 두 가지예요. 하나는 일하는 공간인 직장이고, 하나는 내가 생활하는 공간인 지역이죠. 그 두 공간에서 일상을 재구성하기 위한 노력을 해야죠. 노동운동은 우리 일상 중 한 부분인 일하는 공간만 건드리고 있으니까 이익집단으로 변했다는 비판을 받는 거잖아요. 그리고 세상에 노동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근데 노동운동은 임금 노동자만을 노동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잖아요. 맑시즘부터 시작된 전통적인 사고인데 이제는 아닌 것 같아요. 대표적으로 돌봄 노동이 얼마나 중요한 노동이예요? 단지 임금을 받지 않을 뿐이지.

 

노동운동에 대한 이호 선생님의 생각은 이렇게 비유해볼 수도 있겠네요. ‘운동 아닌 게 어디있어? 전업 운동만 운동이야?’라구요.

맞아요. 전업운동가들은 지금까지 좁은 우물 안에서 살아온 측면이 있어요. 내가 본 하늘은 좁은 우물 안에서 본 하늘에 불과해요. 오래 활동하면서 시야가 넓어졌다고 하는 건 우물의 크기가 더 넓어졌을 뿐이지 결국 우물은 우물일 뿐이예요. 제가 30년 동안 전업활동가로 살아왔어요. 그러니까 운동이 아닌 다른 일상에 대한 이해가 굉장히 부족해요. 내가 좁은 우물 속에 살면서 본 하늘을 전체라고 생각하며 살아온 게 아닌가라는 생각도 들어요. 이런 말을 하면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솔직히 요즘은 그런 생각을 많이 해요.

 

민주노총을 포함한 노동운동단체들에게 사회에서 요구하는 것과도 대비시켜볼 수 있겠네요. 시민사회운동을 지원하는 곳에서도 주로 전업활동가나 단체 중심의 활동을 지원해주는데 노동운동은 왜 임금노동자, 그 중에서도 정규직 노동자들 중심이냐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죠. 노동운동이 비정규직 노동자를 포함해서 꼭 임금노동자가 아니더라도 노동을 하고 있는 사람들까지도 포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우리가 관심 가져야 할 시민사회의 범위도 역시 확장시켜볼 수 있는 거 아닐까요?

그렇게 하면 공통분모가 많이 드러나죠. 노동의 현장에서 젠더 문제는 중요해요. 근데 노동운동에서는 그게 중요하게 부각되지 않잖아요. 여성운동이 그걸 해요. 그게 과연 여성운동만의 일이어야 할까요? 환경문제는 환경 단체만의 일이어야 할까요? 환경 문제와 빈곤 문제는 서로 다른 건가? 사실 다르지 않죠. 환경 문제로 가장 피해를 받는 건 가난한 사람들이거든요.

우리가 사는 일상은 그런 것들의 총합이예요. 일상의 운동은 욕구로부터 시작했다고 생각해요. 지금 당장 드러나는 욕구는 집단이기주의일 수도 있어요. 근데 집단이기주의가 아니라 운동이라고 하는 것은 그 욕구에 머무르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욕구를 개방적으로 확대해보자는 지향이 있기 때문이거든요. 지금 있는 욕구만 해결해야 한다면 그게 운동일 수 있을까요? 그게 우리 삶을 총체적으로 행복하게 할 수 있을까요? 그건 노동 운동 뿐만 아니라 여성 운동, 빈민 운동, 환경 운동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묻고 싶은 질문이예요.

칸막이는 행정에만 있는 게 아니라 우리 운동 내에도 존재해요. 요즘 중간지원조직 만드는 게 유행인데 거기서도 사회적 경제와 마을 공동체가 다른 영역으로 이야기되고 있잖아요. 청년도 마찬가지구요. 그게 왜 다른 문제일까요? 사회적 경제와 마을 공동체는 ‘공동체’라고 하는 키워드로 시작했거든요. 사회적 경제는 어떻게 공동체적으로 먹고 살 것인가라는 고민 아래 협동조합 이야기를 했던 거고, 지역을 어떻게 하면 공동체적으로 함께 살아가는 곳으로 만들 것인가 고민하면서 마을 만들기 운동이 생겼어요. 공동체에서는 상호관계가 핵심이고 사실 다른 게 아닌데 마을 만들기를 추진했던 사람과 사회적 경제를 추진했던 그룹이 서로 달랐던 것 뿐이예요. 그러다 보니까 다른 업계가 생겨버리게 된거죠.

 

일상이 이뤄지는 두 개의 공간,
일하는 공간인 직장과 생활하는 공간인 지역
그 두 공간에서 일상을 재구성하기 위한 노력을 해야

 

칸막이와 경계 이야기가 나왔는데요. 전통적으로는 시민단체, 풀뿌리단체, 분야별 운동단체들이 있었고,  최근에는 형태별로 사회적 기업, 협동조합, 소셜 벤처 등 여러 그룹들이 있어요. 조직의 형태와 다루는 이슈는 다르지만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것과 공동체적 가치를 추구하는 것은 비슷하거든요. 어째튼 지금은 구분이 되고 있단 말이예요. 근데 우리가 일반적으로 시민사회라고 할 때는 그걸 다 구분해서 따로 이야기하지는 않거든요. 그러면 지금 시기의 시민사회 범위와 경계는 어디까지일까요?

저는 굳이 경계를 둬야 될까 싶은데요. 시민사회는 그냥 존재하는 거예요. 뭔지 모르지만 명확히 구분은 안 되고 존재하는 것인데 그 시민사회가 과연 우리들의 총체적인 삶과 연관되어 있는지를 보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저는 한 사람이 행복하게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노동 문제, 젠더 문제, 환경 문제가 각각 구분된 게 아니라 총체적으로 연결된 것이라 생각하거든요. 우주가 그렇게 구성되어 있고, 한 사람의 삶도 그렇게 구성되어 있고, 지역도 세상도 다 그렇게 구성 되어 있다는 거죠.

우리가 운동을 하고, 세상을 바꾸고 싶다고 하고, 행복한 삶을 만들고 싶다고 하고, 그런 방향으로 우리의 관계를 호의적으로 만들고 싶다면 그 관계는 단순히 젠더, 환경, 노동 이렇게 구분 되는 게 아니라 총체적으로 드러나야 하는 거죠. 단지 지금 당장 예민하게 느낀 욕구에 따라서 일을 하고 있는 건데 결국은 서로 만나서 총체적으로 개선하는 방향으로 나가야지 우리의 삶도 재편될 수 있고, 세상도 재편될 수 있는 거 아니겠어요. 그렇게 따지면 당장 우리가 하는 일은 여성운동, 환경운동, 노동운동 등으로 나뉘어져 있지만 결국 이것이 시민사회 속에 총체적으로 녹아들어야 되는 것이라고 봐요.

 

단체와 단체 간의 연대 보다 활동가들 간의 연대가 필요하다는 말을 아까 하셨는데요. 그게 꼭 비슷한 일을 하는 활동가들 뿐만 아니라 사회적 기업이나 시민단체, 협동조합, 풀뿌리단체 등의 구분과 장벽 없이 다양한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서로 교류할 수 있는 기회를 많이 만드는 게 지금 시기에 꼭 필요하겠네요. 그래야 총체적으로 시민사회 속에 녹아들 수 있을 테니까요.

어떻게 교류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까에 대해서는 막막하긴 해요. 저는 나의 욕구를 우리 욕구로 확인하는 것으로부터 풀뿌리운동이 시작된다고 생각하거든요. 활동가들도 마찬가지예요. 환경운동을 하는 활동가와 여성운동을 하는 활동가가 일상적으로 만나서 신뢰를 쌓고 서로 공유하는 것들이 많아지면 함께 할 수 있는 일들이 생기지 않을까요? 근데 단체로는 함께 일을 하기가 힘들어요. 단체와 단체가 연대해야 되는 문제가 생기거든요. 단체 입장이 아닌 활동가 개인 입장으로 만나서 이야기를 하다보면 나의 욕구와 너의 욕구가 다르지 않다는 걸 확인하게 되고 공통적으로 하고 싶은 일들이 생길 수 있다면 그걸 같이 기획해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죠.

그래서 서울시NPO지원센터가 만들어질 때도 그 이야기를 했고, 아름다운 재단에도 계속 활동가 네트워크 사업을 해보자고 했었는데 그게 익숙치 않은지 잘 안 되더라구요. 활동가 네트워크를 통해서 그런 식으로 일을 하려면 제안서를 놓고 사업계획을 쓰는 게 아니라 수다를 떨다가 하고 싶은 공통된 일이 생겼을 때 제안서를 써야 되는데 첫 단추가 잘못 끼워진 것 같아요. 일단 자기 이야기를 나누고 그 속에서 공감대를 넓혀가려는 과정이 필요해요. 그 안에서 사업이 나와야지 각자 단체에서 하고 있는 사업을 가지고 이야기하면 무슨 공통점이 나올 수 있겠어요.

 

풀자연 이음에서 활동가들이 같이 이야기하고 교류할 수 있는 모임들을 만들면 어때요?  그 안에서 이야기 하다 보면 하고 싶은 게 나올 테고, 그럼 현장에서 바로 지원해주는 식으로 하면 좋을 것 같은데요.

저는 그런 자리가 만들어지면 사업비를 만드는 건 어렵지 않다고 생각해요. 필요는 인정하지만 일상적으로 그런 과정을 만들어야겠다고 잘 생각 안하거든요. 중간지원조직은 활동가들이 어떤 일을 하고 싶다고 할 때 그걸 지원해주는 게 역할인데 그런 사업을 만들어 내는 과정 자체를 중간지원조직에서 할 수 있는 게 아니죠. 시민사회에서 자발적으로 해야 되는 건데 그 과정이 없다 보니까 잘 안 되었던 게 아닐까 싶어요. 일이 괜찮고 그런 과정을 통해서 하고 싶은 사업이 있다면 그걸 지원해줄 곳은 많다고 생각해요.

 

나의 욕구를 우리 욕구로 확인하는 것으로부터 풀뿌리운동이 시작

 

개인적인 이야기를 좀 해볼까요? 한 30년 전업활동가로 일하셨는데 그렇게 30년을 활동하게 한 동력은 무엇이었나요?

시작은 신앙과 관련이 있었어요. 제가 빈민운동을 하겠다고 마음 먹은 이유이기도 하고요. 원래 수도자가 되고 싶었어요. 성서의 한 구절이 인상 깊었는데 예수 탄생 이야기예요. 예수가 태어나는 이야기의 핵심은 신이 인간이 되었다는 거예요. 그것도 마굿간에 태어난 비천한 인간이 인류를 구원하려고 한 거죠. 그걸 어떻게 이해할 수 있어요? 이해할 수 없잖아요. 그렇게 살아보지 않고서는 이해할 수 없잖아요. 또 기본적으로 그리스도 신앙은 위계적이예요. 지금은 그런걸 안좋아 하지만 어쨌든 그게 가난한 사람들 속에서 함께 살아가야 되는 이유라고 생각했으니까요.

빈민운동이 좋아서 시작했지만 천주교도시빈민회는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살아간다는 것을 중요시했어요. 집에서 출퇴근하면서 운동하는 게 아니고 빈민지역인 신정동으로 아예 이사를 갔어요. 혼자서 자취를 하면서 그렇게 시작을 한거죠. 물론 그 시기에 갈등이 많았어요. 나에게 이곳에 맞나 생각도 했구요. 그리고 내가 술을 잘 못하잖아요. 그것도 이유 중 하나였어요. 천주교도시빈민회 회원들을 만나도 술을 먹고, 지역의 주민들하고도 술을 안 마시면 개인적으로 가까워지기 힘드니까요. 근데 그게 너무 힘들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그런 상황에서 술도 안마시고  잘 버텼어요. 어쨌든 갈등은 있었지만 10년, 20년 지났을 때는 그런 생각도 했죠. 내가 이거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그런 질문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게 그 일이 이미 내가 제일 잘 할 수 있는 일이 되버린 거예요. 어떻게 보면 그것도 내가 행복하기 위해서 이렇게 사는 거니까요.

 

근데 왜 얼마 전 워크숍에서 은퇴시점에 대해 말씀하신 거예요?

요즘 모범이 될 만한 선배들을 별로 못 본다는 이야기하잖아요. 조용히 후배들만 도와주면 좋겠는데 아직도 자기가 앞장서서 후배들을 이끌어야 된다는 사명감에 불타는 선배들은 있죠. 안 좋아 보이더라구요. 오히려 후배들을 앞을 방해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 모습을 보면서 저렇게 살면 안되겠다, 조용히 사라져야겠다 생각했죠. 난 지금도 그런 생각해요. 괜히 쓸데없이 미적거리거나 그러면 안 된다구요. 

최근에는 제가 후배 활동가들을 위해 돈을 모아서 후원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후배들이 일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줘야 되는 거 아닌가? 제가 얼마 전에 이야기했죠? 40대 선배들한테는 노하우를 쏙쏙 빼먹고, 50대 선배들에게는 자원을 빼먹으라고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그때 충격을 받았는데 생각해 보니까 할 수 있는게 이제 그거 밖에 없는 거예요. 나는 그동안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아왔지 후배들의 앞길을 위해서 자원을 축적해야겠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단 말이죠. 근데 나는 그런 자원이 지금 없어요.

요즘에는 어떤 생각이 드냐면 나는 자원이 없더라도 아까 이야기한대로 한 명의 활동가를 여러 사람이 10만원씩 모아서 1년이라도 지원해보는 일은 해볼 수 있지 않을까? 구체적인 사업을 기획하기 보다는 그렇게 자원을 모으는 일들을 기획해보는 역할은 좀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은 거죠. 아니면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하고 싶은 일들을 이야기하게 하는 기회의 장을 만들어내는 게 내 역할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된거죠.

 

그동안에 먹고 사는 문제는 어떻게 해결해오신거예요?

먹고 사는 걱정은 계속 했죠. 활동 초기에 어떻게 먹고 살아야 되냐고 물었을 때 선배가 뭐라고 했냐면 ‘그냥 살게 돼’ 이렇게 얘기를 했어요. 굳이 노하우라고 하면 얼마나 돈을 벌 것인가를 고민하기보다 어떻게 돈을 안 쓰고 사는가를 고민했어요. 빈민운동 할 당시에는 돈이 떨어지면 노가다 일을 며칠 하고 그랬어요. 빈민운동을 했으니 자연스런 방법이었죠. 지금 후배들이 어떻게 먹고 살아야 되냐고 물어보면 저도 답이 없어요. 근데 서운한 것도 있더라구요. 후배들이 이렇게 이야기를 해요. ‘당신들은 선택할 여지가 있지 않았냐, 돈을 버는 일을 할 수도 있었지만 자진해서 선택해서 이 일을 한 거 아니냐, 근데 우리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이야기를 해요. 그러니까 이 말은 당신들과 우리들의 조건이 다르고, 현재의 우리가 더 힘들다는 이야기를 하는 건데 그걸 내가 부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서운한 것도 있어요.

우리도 다른 곳으로 가면 돈을 잘 벌 수 있고 운동을 계속 하면 돈을 못번다고 하는 선택의 기로에서 얼마나 힘들었는지도 생각 좀 해줬으면 좋겠어요. 선택의 여지가 없어 힘든 것도 있지만 선택할 수 있는 여러 옵션들이 있는데 이걸 선택할 때 내 갈등은 크기는 얼마나 많았겠냐구요. 더 이상 좋은 직장에 취직할 수 없는 나이가 되었을 때는 내가 빨리 관둬야 하는 거 아닌가라는 갈등도 많이 하고, 이걸 이겨내기 위해서 또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이런걸 후배들이 이해해주지 못하는 것은 좀 서운하더라구요.

지금 후배들한테 묻고 싶기도 해요. 그럼 너는 그렇게 먹고 살기 힘든데 왜 여기 있냐구요? 진짜 다른데 갈 곳이 없어서 있는 건가? 사실은 그렇게 묻고 싶기도 해요. 어떤 포럼 자리에서 젊은 활동가들은 간지 나는 일자리를 원한다고 이야기를 해요. 그건 동의하는데 그래서 간지 나는 일자리가 뭐냐고 물었더니 중간지원조직이라고 해요. 현장이 없는 중간지원조직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저는 예전에 돈도 돈이지만 내 책상을 갖고 싶다는 욕구도 있었어요. 동네에서 일하니까 내 사무실과 책상이 없었거든요. 내 책상을 갖고 싶다는 것은 무시 못할 욕구였어요. 만약 우리가 간지 나는 일자리를 그 정도 수준으로만 이야기한다면 현장이 없는 중간지원조직은 무슨 의미가 있겠냐는 거죠. 후배들은 중간지원조직에서만 일해야 되나? 후배들에게 불만이 있는 게 아니라 왜 우리는 간지 나는 일자리가 그것밖에 없는지 참 답답하더라구요.

 

오랜 시간 이야기 고맙습니다. 마지막으로 앞으로 어떤 일들을 하고 싶으세요?

아까 말했던 두 가지인데 계속 활동하면서 살고 싶은 후배들에게 자원을 연결해주는 일을 하고 싶어요. 또 하나는 활동가들이 모여서 수다 떠는 모임이나 자기 활동에 대해 집단적으로 성찰할 수 있는 모임들을 만들어내는 것도 하고 싶고요. 그걸 다른 사람이 해준다면 내가 해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지금 사람들이 너무 바빠서 못하는 거라면 하고 싶어요. 이 두 가지는 제가 개인적으로 하고 싶다기 보다는 지금 상황에서 제가 해야 할 사회적 역할이 아닐까 싶어요. <끝>


_ 조아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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