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활동가인터뷰] 일과 삶의 경계를 허무는 작당, 십년 후를 연구하는 활동가 송성희

4년 만에 폭염이라는 문구가 점점 와 닿는 요즘이다. 일 년 중에 해가 가장 긴 ‘하지’가 지나니 6월에 한 낮의 온도가 36도를 찍었다. 덥다 ▶ 에어컨을 튼다 ▶ 지구온난화의 속도가 빨라진다 ▶ 더욱 덥다의 반복. 이 악순환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십년후연구소에서 활동하는 송성희 대표는 그 대안으로 쿨루프 캠페인을 제안한다. 건물의 옥상을 하얗게 칠해 햇빛을 반사시키면서 건물의 온도를 낮추는 캠페인이다. 2014년도부터 진행된 쿨루프 캠페인에서 올해는 함께 옥상을 칠할 동료 ‘롤링베어스’ 30명도 모집했다. (필자도 이번 롤링베어스 1기로 활동 중이다.) 기후변화와 폭염에 시급하게 대응해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린 뉴딜은 이렇게 시작된다.

 


요 며칠 작업복 바람으로 쿨루프 시공 현장(아파트 옥상)에서 뵙다가 이렇게 동네 카페에서 뵈니 또 새로워요. 어떻게 지내세요? 요즘 <십년후연구소>에서는 어떤 활동을 하고 계신지 궁금해요.

요즘은 쿨루프 캠페인에 시간과 에너지를 많이 쏟고 있어요. 캠페인팀은 얼마 전 시작된 롤링 베어스 실습과 현장 매칭&준비가 한창이고요. 연구팀은 쿨루프 모니터링 논문을 작성 중에 있어요. 사람들이 쿨루프에 대해서 질문할 때 “그럼 겨울철에는 어떻게 되는데?” 라고 자주 물어요. 옥상에 하얀 페인트가 칠해지면 여름에는 빛을 반사시키니까 여름에 시원해지는 건 알겠는데 그럼 겨울에는 추워지는 건지 궁금해 하더라고요. 그걸 윈터 페널티라고 해요. 그래서 구체적인 국내 데이터를 수집하여 추출하고 있어요. 최종적으로는 3년 동안의 사계절 데이터를 쌓는 것이 목표이고요. 2019년 8월부터 시작했으니 2022년 7월이면 3년차 데이터가 완성되겠네요. 그럼 우리나라에서 쿨루프 효과가 어느 정도라는 것을 실증할 수 있게 될 것 같아요.


우리나라는 대부분 건물 옥상이 초록색이라 칠해져야 하는 곳이 정말 많을 것 같아요. 그 중 순서를 정한다면 쿨루프가 가장 (시급하게) 필요한 곳이 있다면 어디일까요?

쿨루프 시공이 필요한 곳으로 노후주택과 옥탑방을 최우선으로 꼽고 있어요. 우리나라는 2013년부터 비로소 모든 건축물의 에너지효율등급 인증제도가 시작되었는데, 아직도 의무화 단계가 아니예요. 그래서 지어진 지 오래된 노후주택일수록 단열이 허술한 경우가 많아서 쿨루프가 꼭 필요해요. 그중에서도 옥탑방이 가장 더위에 취약하고요. 해마다 폭염일수와 열대야 기간이 길어지고 있는데, 여름철 옥탑방은 에어컨을 틀어도 소용이 없는 상태가 되거든요. 에어컨 바람이 닿는 부분에서만 냉기를 느낄 수 있을 뿐, 온몸은 땀으로 젖고 머리가 어질어질해지죠. 우리가 옥탑방 지붕에 올라가 쿨루프 페인트를 칠해드리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는 이유예요.


그럼 쿨루프 캠페인 이외에 십년후연구소에서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나 관심을 가지고 있는 이슈가 있다면 무엇이 있나요?

코로나19 감염사태가 벌어지기 전 최근 몇 년간 우리를 가장 불안에 빠뜨렸던 건 미세먼지였죠. 십년후연구소에서도 공기청정기의 필요성을 느끼고 대안을 찾던 중에 2017년부터 ‘은하수 공기청정기(이하 은하수)’를 이웃들과 함께 만들어 쓰는 DIY 제작 워크숍을 진행하고 있어요. 워크숍 앞단에 짧은 강연 순서를 넣어 기후변화와 미세먼지의 상관관계, 미세먼지 공격에서 벗어나는 근본적인 방법 같은 것들을 함께 논의해 왔어요. 이처럼 십년후연구소에서는 기후변화로부터 비롯된 우리 삶을 위협하는 여러 현상들을 추적하고 생활 속 긴박한 문제들에 대한 해법을 연구하고 있어요.



은하수 프로젝트 관련해서 좀 더 자세히 얘기해주세요. 은하수 공기청정기를 제작하시게 된 배경이나 이유가 있으실 것 같아요.

지금 우리는 페트병 생수를 사서 먹거나 정수기를 거친 물만 마시고 있는데, 음용수를 사서 먹는 일이 우리 사회에서 그렇게 오래된 일이 아니에요. 얼마 전만 해도 물을 사서 먹는다는 건 상상하기 힘들었죠. 수돗물을 끓여서 먹는 것으로 충분했던 것이 몇 번의 결정적인 화학폐기물 오염 사건을 거치면서 결국 정수기 산업이라는 것이 확고하게 자리를 잡아버렸어요. 미세먼지가 수그러들 기미가 보이지 않자 이번에는 공기청정기 판매량이 급증하고, 생활필수가전으로 자리잡고 있다는 기사까지 쏟아져 나오고 있어요. 학교나 공공건물은 물론이고 개인들까지 방방마다 공기청정기를 놓고 각자도생해야 한다면 이건 정말 큰일 아닌가요? 물을 사서 먹게 되어버린 것도 통탄할 일인데 공기마저 사야하는 현실을 우리가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절박함이 있었어요.


정말 그래요. 머지않아 공기를 사서 마셔야 하는 현실이 올지도 모른다는 말을 들었을 때 얼마나 끔찍하던지요. 그럼 공기청정기를 사고 싶지는 않지만, 필요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서 직접 만들어보게 된 건가요?

맞아요. 기억하기로 2013년 무렵부터 미세먼지가 점점 심해지기 시작했는데요, 뉴스에서 미세먼지의 위험성을 거론하며 황사마스크로도 막을 수 없으니 미세먼지 마스크라는 걸 사용하라는 권고가 나오기 시작했어요. 당시엔 미세먼지 측정기라는 게 있다는 것도 몰랐고, 그저 실체를 알 수 없는 어떤 새로운 존재로부터 위협을 받고 있다는 공포감이 앞섰어요. 외출시엔 마스크를 쓰라는데 그럼 실내에서는 괜찮은 건가? 미세먼지 입자가 그렇게 작다는데 실내 공기 중에 외부에서 유입된 미세먼지의 양은 얼마나 되는 걸까? 난생 처음 맞닥뜨린 공기가 위험하다는 이 초유의 사태 앞에서 온갖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거예요. 

이런 계기로 우리는 공기와 미세먼지에 대해 공부하게 되었고, 당분간은 일터와 집안에서 공기청정기를 쓸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어요. 그런데 시중의 공기청정기를 구입하기 위해 제품정보를 캐다보니, 이 물건들이 생산, 유통, 폐기되는 과정, 그리고 우리가 사용하는 과정에서 발생하게 될 새로운 미세먼지에 대해 생각이 미칠 수밖에 없었어요. 내 집안의 미세먼지를 없애려고 사용하는 물건이 바깥의 미세먼지를 늘이는 악순환에 빠지고 싶지는 않았어요. 그래서 찾아낸 해법이 꼭 필요한 기능만을 갖춘 최소한의 공기청정기를 우리 손으로 직접 만들어쓰는 것이었고, 2017년 3월 미세먼지가 아주 극심했던 어늘 토요일, 십년후연구소 내부 멤버들이 함께 재료를 갖추어 제작 워크숍을 열었어요. (이 과정에서 CAC라는 DIY 공기청정기 제작회사의 도움이 컸어요.) 공기청정기를 만들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친구의 친구들이 워크숍을 더 열어달라는 요청이 이어졌고, 그렇게 이어진 워크숍이 전국으로 확대되었어요.


많은 환경문제가 그렇지만, 미세먼지 문제는 특히 대처하기가 어려운 것 같아요. 눈에 보이지도 않고 인체에 정확히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아직 자료도 부족한 것 같고요. 특히 내가 어디서부터 대응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다보면 나는 이 지구에 너무 작은 한 사람일 뿐이라는 생각도 들어요. 그러다 손을 놓아버리기 쉽죠.

큰 위기에 봉착했을 때, 우리가 대처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는 것 같아요. 나만 살아남는 방법과 다같이 무사한 방법이요. 크고 심각한 위기일수록 같이 해결해야 풀리는 일이 많더라구요. 미세먼지는 말씀하신 것처럼 지구적 차원의 기후변화와 연결된 아주 큰 문제이기도 하고 매일 우리에게 전기를 공급해주고 있는 화력발전소와 자동차 매연의 문제이기도 해요. 이럴 때 아주 작은 대안 혹은 해결의 열쇠 하나라도 내 손 안에 쥐고 있는 것, 그런데 그 대안이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닌 것은 무척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저는 은하수를 많은 사람들과 같이 쓰게 되면서 세상에 미세먼지를 조금이라도 덜 만들고 있다는 사실에 위로 받고, 그 위로의 힘으로 또다른 일을 찾아나설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타임라인을 좀 더 이전으로 돌려볼게요. 어떻게 십년후연구소를 시작하게 되신 거예요? 십년후연구소 이전에는 어떤 삶을 사셨는지 궁금해요.

1997년 IMF 외환위기 이전에는 직장생활을 열심히 하는 젊은 시절을 보냈어요. 대체로 취업이 쉬웠고 월급은 조금씩이라도 오르는 것이 당연하다 여겼던, 많은 사람들이 때가 되면 내 집 마련하고 은퇴 나이가 될 때까진 현재 직장이 유지될 거라 생각하던 시기였죠. 그런데 외환위기 후 한국사회는 그동안 당연한줄 알고 있었던 그 모든 것이 당연하지 않은 일이 되어버렸어요. 그 과정을 겪으면서 내가 하고 있는 일, 적을 두고 있던 회사나 조직과의 일체감이 무너졌어요. 나라는 존재를 처음으로 낯선 시선으로 돌아보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나이 서른에 시작된 정체성에 대한 고민은 나의 삶뿐만 아니라 문명 전반에 대한 성찰로 확대되었어요. 니어링 부부의 에세이와 녹색평론, 반야심경 같은 책들을 길잡이 삼아 혼자만의 암중모색에 빠져들었어요. 그렇게 새로운 길을 따라가다 보니, 어느덧 저는 탈도시, 탈시스템을 꿈꾸는 생태주의자가 되어 있었죠. (웃음)


그래서 귀농을 결정하시게 된 건가요?

맞아요. 제가 귀농운동본부에서 운영하는 귀농학교 45기인데요, 수료 후 곧바로 귀농하진 못하고 귀농운동본부에서 발행하는 계간지 귀농통문을 만드는 일을 하게 되었어요. 그 덕에 전국의 귀농자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생겼고, 지역마다의 사정, 문화에 대한 정보도 많이 알게 되었고요. 처음에는 어디에서 살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는데, 취재를 다녀보니까 어디든 다 좋아, 나도 얼른 정착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졌어요. 그러다 귀농통문 필자 중에 전남 장흥에 먼저 정착하신 분의 초대로 저도 드디어 귀농이란 걸 하게 되었어요.


저도 만약 귀촌을 하게 된다면 어디가 좋을까? 이런 생각을 종종해요. 이야기를 들으니 어디든 다 비슷하다면 재미와 작당을 더해줄 친구가 있는 곳에 가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드네요. 부름을 받고 내려가신 귀농(장흥) 살이는 어떠셨어요?

저에게는 일종의 존재론적 실험에 가까웠어요. 태어나서 그때까지 의식주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화폐를 지불하면 시장에서 제공받는 삶을 살아온 저로서는 스스로 생산하는 삶에 대한 열망이 컸어요. 특히 자급자족을 기본으로 하는 소농으로 살면서 생태적 삶에 한발이라도 다가가고 싶어요. 생태텃간을 지어 자가퇴비를 만들고 손으로 모 심고 피 뽑는 벼농사를 지어보니 세상이 다 내 것 같았어요. 

우리 마을은 대를 이어 농부로 살아온, 그야말로 오래된 농부들이 살고 계신 30가구가 채 안 되는 작은 농촌마을이었는데, 마을살이 곳곳에 울력과 품앗이 등 공동체 노동의 흔적이 남아있어서 초보 귀농자는 매일 새로운 발견과 설레임으로 흥분 상태였어요. 그중에서도 인상적이었던 에피소드 한 토막 들려드릴게요. 혹시 “돈 산다”라는 표현 들어보신 적 있으세요? 어느 날 동네 아짐들이 읍내 장날 농산물을 팔러 나가시면서 “돈을 사러 간다”고 하시는 거예요. 돈을 받고 팔거나, 돈을 주고 사거나 하는 거지, 돈을 사다니요?? 생산자인 농부가 잉여생산물을 장터에 들고나가 필요한 것으로 맞바꿔 오던 교환경제의 흔적이 남아있는 생생한 현장이었던 셈이죠. 물질문명에서 생태문명으로의 전환을 꿈꾸던 저는 아마도 그날밤 “이곳이야말로 ‘오래된 미래’ 아닌가?”라는 식의 일기를 썼던 것 같아요.


얼마나 계셨던 거예요?

처음 터를 정하고 집 짓던 시기까지 합하면 삼년 반 정도 있었어요. 남편과 제가 살 집을 두 사람의 노동력만으로 지어보고 싶었기 때문에 집 짓는 데 시간이 좀 많이 걸렸어요. 우리가 할 수 있는 정도라면 다른 사람들도 시도해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우리의 과정과 경험을 공유할 수 있는 공법으로 완성해보고 싶었어요. 많은 귀농자들이 정착 초기에 집 문제로 힘들어 하거든요. 오래지 않아 서울로 돌아오는 바람에 내손으로 집짓기 노하우를 전할 기회를 갖지는 못했지만, 이 무모했던 시도를 통해 남편과 저는 우리나라에도 이미 도래한 지구온난화와 기후변화의 징후들을 온몸으로 확인하게 되었고, 이때의 경험은 그후 많은 일의 동기가 되었어요. 

예를 들면, 한겨울에도 영하로 내려가는 일이 거의 없었던 그간의 평균기온 데이터를 믿고 집의 단열기준을 잡았는데, 우리가 장흥에서 보낸 두 번의 겨울은 영하10도의 이상한파가 밀어닥쳐, 동네에서 평생 사신 70, 80대 어르신들이 내 평생 이런 추위는 처음이라는 말씀들을 하셨죠. 사실 농부는 기후변화의 최전선에 서 있다고 할 수 있어요.


시골에서의 충만한 삶을 뒤로하고 다시 서울에 오시게 된 이유가 있으셨나요?

한마디로 자의반 타의반으로 그리 되었다 할 수 있는데요, 그 무렵 서울에서는 보궐선거를 통해 박원순 시장님이 취임하면서 시민 참여와 마을공동체, 민관 협치의 장이 열리고 있었어요. 서울을 떠나기 전에 함께 이런저런 일을 도모하던 지인들이 관련한 일을 벌이면서 장흥에 있는 우리까지 회의에 호출이 되었어요. 회의 한 번으로 시작된 일의 흐름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으니 인생이 참 예측불가의 측면이 있죠. (웃음) 

그렇게 설립된 십년후연구소는 우리끼리는 시민력 증강 프로젝트라고 불렀던 동대문 DDP 개관 전 시민참여 프로그램 <동대문 봄장>, 한글의 일상화를 꾀한 <입는한글> 전시, 복합문화공간 <서울그라픽스> 같은 일들을 거쳐 내부 팀웍이 다져면서 점차 기후변화에서 비롯된 우리 삶의 긴급한 현안들에 천착하게 되었어요.



그럼 요즘은 어떤 것이 필요하다고 느끼세요? 또는 가장 많이 하는 생각이나 고민이 있다면요?

지금은 쿨루프 캠페인 기간 중이라 온통 쿨루프 생각뿐이에요. 특히 올해 새롭게 만난 롤링베어스랑 함께 할 일들로 가득해요. 지난 롤링베어스 오리엔테이션 장소에 걸어둔 “너! 나의 동료가 되어라”라는 펼침막의 문구 기억하세요? 십년후연구소 안지원 연구원이 제안한 만화 <원피스>의 어록에서 따온 구호인데요, 지구온난화 저지라는 우리들의 항해를 함께 할 새로운 동료가 생겼고 지금까지와는 또 다른 차원으로 진입하는 계기가 될지도 모른다는 예감을 느끼고 있어요.


조금은 개인적인 질문을 던졌는데, 이렇게 고민도 일과 연결 지어 있다니요. 대표님 혹시 워커홀릭이라는 말 많이 듣지 않으셨나요? (웃음)

십년후연구소란 곳이 이름이 독특해서인지 무얼 하기 위한 조직이냐, 꿈꾸는 바가 뭐냐 같은 질문을 많이 받았어요. 십년후연구소의 여러 측면이 있겠지만, 저는 무엇보다 함께 일하는 동료들에게 이곳이 ‘일과 삶이 조화로운 일터’, ‘나의 동기가 곧 내 일의 출발인 일터’였으면 좋겠어요. 일은 사라지고 고용(일자리)만 남은 그런 일터가 되지 않기, 일 속에서 뭔가를 성취함으로써 커리어 말고 개인이 성장하는 그런 일터이고 싶어요. 물론 쉽지 않은 꿈이고 지금도 크고 작은 좌절과 성공을 반복하고 있는 중이지만, 적어도 여기서는 어떤 개인도 하기 싫은 일, 고통스러운 일을 참아낸 대가로 임금을 받는 그런 상태에서는 벗어날 수 있기를 바라고 있어요.


그래서 대표님은 일과 삶이 일치된 삶을 살고 계신가요?

네, 대체로 일=삶이긴 한데, 그렇다고 그 일이 항상 내가 원하는 만큼, 내가 원하는 때에 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일과 삶을 같은 곳에 두다보니 어느 날 보니 내가 24시간 일을 하고 있네? 싶을 때는 있어요. (웃음)


제 주변에서는 일과 삶이 일치된다는 말을 주로 부정적으로 사용하거든요. 일과 삶에 구분이 없어지면 쉽게 방전되고 번아웃이 온다고 생각해서요. 그래서 둘 사이에 어느 정도 거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는데, 이야기를 들으니까 좀 다른 접근인 것 같아요.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 해주실 수 있나요?

궁극적으로 번아웃은 일과 삶의 불일치, 불균형의 결과물일 거예요. 식물은 쉬지 않고 탄소동화작용을 하고 있지만 그 일을 너무 많이 해서 번아웃 되지는 않잖아요. 최근 제가 아주 공감하며 읽은 프랑스 철학자들의 대담집 『고용은 끝났다, 일이여 오라』(베르나르 스티글레르, 아리엘 키루라. 문학과지성사. 2018)에서는 산업사회에서 한 개인을 교육하고 사회화하는 과정은 노동시장의 피고용인이자 자본시장의 순종적 소비자를 길러내는 과정이라고 일갈하고 있는데요, 자신의 동기가 이끄는 일을 통해 나와 이웃 시민들의 삶이 같이 성장하는 그런 삶을 이들은 ‘할 줄-앎’, ‘살 줄-앎’이라고 표현하고 있어요. 일은 고용이 아니며, 일이란 앎이며, 앎은 곧 일이고, 일한다는 것은 언제나 앎을 실행하는 것이라는 이 철학자들의 지적은 포스트코로나 시대에 모든 것을 새로운 시각으로 살펴야 하는 지금 우리에게 너무나 시의적절한 메시지가 아닌가요? 십년후연구소는 그린뉴딜 일자리 또한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준비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 의미에서 <롤링베어스>를 기획하신 거죠? 사회에 의미 있는 일(그린뉴딜) 일자리 차원에서요.

네, 방금 말씀드린 고민과 모색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죠. 나아가서 (롤링베어스 모집 글에서도 밝혔듯이) ‘고용이 사라진 시대, 소소하지만 확실한 일거리’를 만들고자 싶었어요. ‘일자리’라는 말은 여전히 고용을 지향하는 단어인 것 같아서 굳이 일자리가 아닌 일거리라는 표현을 사용했어요. 이 요동치는 2020년을 같이 겪고 있는 지구 동료이자 롤링베어스 1기라는 이름으로 만나 쿨루프 시공 크루가 된 우리들이 “나와 타인의 가치를 존중하며, 외롭지 않게 느슨한 연결을 추구”하며 “불분명한 기후위협에 우울하거나 무력하고 싶지 않은, 구체적이고 확실한 대응을 지향하는 기후활동가”들의 네트워크를 이루어 2기, 3기 멤버들이 합류할 수 있는 큰 배를 띄우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무언가를 함께 할 동료가 있다는 건 굉장히 큰 일(동력)인 것 같아요. 말씀하신 것처럼 누군가와 함께하게 되면서 일이 시작되니까요. 그런데 제가 어떤 질문을 드려도 결국은 일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오는 거 아세요? 이거 정말 일과 삶이 정말 일치된 삶 아닌가요. (웃음)

맞아요. 결국 만나고 계획하고 이루는 모든 과정이 다 일이죠. 우리는 뭔가 좋은 일을 하거나 알게 되면 꼭 주변에 소문을 내고 같이 하고 싶어지잖아요. 누군가가 손으로 뭉친 최초의 눈송이는 하나 둘씩 동료를 만나 함께 굴려가다 보면 언젠가는 눈사람이 되기도 하죠. 오늘 우리 롤링베어스들이 굴려가는 롤러 붓을 따라 지구의 열을 조금이라도 식힐 수 있다면, 우리가 칠한 쿨루프 지붕이 녹아서 사라지는 북극 빙하를 대신해 태양광을 한 뼘이라도 튕겨낼 수 있다면, 이 눈송이는 구르고 굴러서 커다란 눈사람이 될 거라고 생각해요.

_ 인터뷰 ㅣ 송윤지 (greeneryunj@gmail.com)


활동가이야기주간2020 프로젝트의 '활동가인터뷰 공모 지원사업'으로 진행한 인터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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