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활동가인터뷰] 제가 활동가인가요? - 실개천 마을학교 이은숙

이은숙 활동가를 인터뷰 해야겠다고 생각한 이유는 활동가의 어떤 전형에서 벗어나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이은숙 활동가 본인 역시 “제가 활동가인가요?”라고 반문할 정도였으니 예상이 적중했다고 봐도 될 듯 하다. 

우리는 은연 중에 활동가의 전형을 만들고 상상하는 경향이 있다. 가장 일반적인 이미지는 젊은 시절 학생운동이나 노동운동 같은 것을 경험하고 어떤 조직이나 단체에 들어가서 활동을 이어가는 경우다. 직업인으로서 상근 활동가가 되기도 하고 사회참여의 일환으로 비상근이나 반상근 활동가가 되기도 한다. 

어쨌든 이런 사람들에게는 스스로 ‘활동가’라는 자각이 있다. 내가 만난 이은숙 활동가는 아직 그 ‘자각’에 완전히 이르지는 않았다. 마을이라는 토대 위에서 움직이다 어떻게 하다보니 주변에서 ‘마을 활동가’라고 부르는 상황을 맞딱드렸다고 하는게 더 정확할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스스로 확신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어떻게 활동은 만들어지고 이어지는지, 그 속에서 ‘의식화’ 과정을 거치지 않은 평범한 이웃이 어떻게 훌륭한 활동가가 되는지 알고 싶었다.


한 번도 활동가가 되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던 사람


** 동화구연 맘스토리 활동 당시 모습. 맘스토리는 아이들을 위한 동화구연 및 창작동화 활동을 하는 엄마들의 모임이다. 이은숙 활동가가 본격적으로 마을과 공동체를 만나기 시작한 곳이 맘스토리다.


활동가 이야기 주간이라는 특별한 행사를 통해 새롭게 만나게 됐습니다. 제가 활동가 인터뷰를 하고 싶다고 요청했을 때 조금 망설이셨는데요. 아직 ‘활동가’라는 말이 익숙치 않은 것 같습니다. ^^

남들은 저 보고 활동가라고 하는데 저는 잘 모르겠어요. 저는 제가 하는 일이 그냥 봉사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작년에 옥천교육지원청에서 전국 마을교육활동가분들 연수 프로그램이 있는데 저를 추천해서 가게 됐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활동가라는 말 자체를 잘 몰랐어요. 그때도 “제가 활동가에요?” 이렇게 반문을 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마을을 위해서 이런 저런 활동을 하니까 마을 활동가라고 봐주셨던 것 같아요.


요즘 흔히 말하는 마을 활동가라는 인식을 가졌다기보다는 그냥 봉사 활동을 한다는 의미가 더 컸던거군요?

네, 저희 엄마가 18년 전에 심장 수술을 하셨거든요. 심장판막 3개를 인공판막으로 바꾸는 큰 수술이었는데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봉사활동을 많이 하셨어요. (수술 이전에도 엄마는 봉사활동을 꾸준히 하셨어요) 엄마가 미용을 하셨는데 가난한 분들 공짜로 머리도 해주고 쉬는 날에는 어르신들 찾아 다니면서 미용 봉사도 하고 정말 18년 동안 쉬지 않고 봉사를 하셨어요. 어려서부터 그런 모습을 봐서 그랬는지 저도 봉사활동을 하는게 자연스러웠어요. 봉사라는게 특별한 사람들이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배웠던 것 같아요. 제가 마을 활동을 할 수 있었던 건 그런 배경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 어린시절 엄마와 함께 찍은 사진. 엄마는 이은숙씨에게 '봉사하는 삶'의 가치와 일상성을 보여주셨다.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이은숙 활동가도 봉사를 하게 되면서 '활동가'의 길을 조금씩 걸어갔다.


마을과의 첫 만남은 밸리댄스 봉사활동이었다고요?

고향이 서울이에요. 지금도 친척들은 다 서울에 살고요. 어렸을 때부터 방학에 시골 내려가는 친구들이 부러웠어요. 시골에 대한 환상 같은게 있었다고 할까요? 제 상상 속 시골의 삶은 은은한 강물이 흐르는 고즈넉한 곳에 2층 집을 짓고 여유롭게 사는 것이었는데...

14년 전에 결혼을 하면서 드디어 시골(옥천)로 내려오게 된거에요. 근데 진짜 시골에 와보니 지나치게 너무 고즈넉하더라고요. 집도 외딴 곳이고... 그래서 혼자 쑥도 캐러 다니고 그랬어요.

그렇게 지내다 지금 12살인 아들이 3살 때 취미로 밸리 댄스를 배우기 시작했어요. 한참 재밌게 배웠는데 둘째를 임신하면서 그만두게 됐어요. 그리고 셋째를 낳고... 그 아이가 지금 7살이에요. 혼자 시골 내려와서 아이 셋 낳고 키우고 하다보니 우울하고 좀 그렇더라고요. 신랑은 한창 가게 일로 바쁘고. 그때 밸린댄스를 가르쳐주신 선생님한테 연락이 온거에요. 다시 밸린댄스를 해보면 어떻겠냐고? 그래서 지역축제나 행사장 같은데 가서 공연봉사를 시작했던 거에요.


밸린 댄스와 마을 활동가, 일반적인 조합은 아니라서 잘 연결이 안되네요. 공연봉사를 시작으로 지역사회와 연결점이 만들어지면서 더 많은 활동을 하셨을 것 같아요.

제가 어렸을 때 꿈이 많았거든요. 성대모사를 잘했어요. 장난전화 하면 친구들도 다 속아 넘어갈 정도로 끼가 있었어요. 그래서 성우를 해보라는 제안도 받고 뮤지컬 배우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했어요. 연극을 하고 싶기도 했고. 누구나 한번쯤 꿈 꿔보는 그런거 있잖아요. 다들 도전해보면 잘 할 것 같다고 했어요. (결국 이은숙 활동가는 2019년 실제로 동네주민들과 함께 아마추어 연극 공연을 선보였다. 작품명은 ‘산불’)

옥천에서 현미씨를 알게 됐어요. 현미씨는 맘스토리라는 동아리 활동을 하고 있었어요. 맘스토리는 어린이집이나 학교에서 동화구연 봉사활동을 하는 엄마들의 모임이에요. 저보고도 들어오라고 해서 같이 하게 됐죠. 그러면서 어린이집, 노인요양원, 초등학교 여러 곳을 함께 다니게 되면서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활동이 커지기 시작했어요.

활동이 많아지니까 자원봉사센터에서도 연락이 오더라고요. 저희 지역에 노인요양병원이 있는데 강사비를 줄 수 없는데 6개월 정도 무료로 동화구연 봉사를 해줄수 있냐고요. 당연히 해줄 수 있다고 했죠. 동화구연이라고 하면 어린아이들만 좋아하는 것으로 오해하기 십상인데 누구나 다 자기 이야기로 받아들일 수 있어요. 아이들은 당사자 입장에서, 엄마아빠는 아이들의 마음을 이해하는 계기로 동화를 배울 수 있어요. 유치원을 가본적 없는 어르신에게는 동화 이야기를 하며 ‘어르신들 어렸을 때는 어땠어요?’ 이렇게 이야기 하면 참 좋아들 하세요. 평소에 도란도란 이야기 나눌 말벗이 적기 때문에 누군가 찾아와서 이야기 하는 것만으로도 참 좋아들 하시거든요. 이 때까지도 활동가라는 생각보다는 개인적인 봉사활동이라고 생각을 많이 했어요.


** 어려서부터 끼가 많았던 이은숙 활동가는 성우, 뮤지컬 배우 등 하고 싶은게 많은 소녀였다. 그 꿈은 결국 2019년 주민연극 '산불'의 주연을 맡으며 이뤄졌다.


그렇게 평범한 지역주민의 한 사람으로 봉사활동을 이어가던 중에 옥천행복교육지구라는 사업을 만나게 된거죠? 그리고 대책없이 큰 사고를 치게 됩니다.

재작년에 옥천행복교육지구에서 마을교사 역량강화 프로그램을 진행했어요. 저는 아는 언니(안영빈씨)가 그쪽 기관에서 일을 해서 같이 참여하게 된거에요. 거기서 공릉청소년문화정보센터나 간디학교 이야기를 듣게 된거에요. 근데 그런 이야기를 듣다보니까 우리 아이들을 위해서 구읍에도 그런 시설이나 프로그램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거에요. 구읍은 제대로 된 놀이터 하나 없는 곳이거든요. (이은숙 활동가가 사는 동네 이름이 ‘구읍’이다. 오래전에 읍의 중심지 역할을 했던 곳이라는 의미에서 동네사람들이 편의상 ‘구읍’이라고 부른다. 참고로 옥천군에 ‘신읍’이라는 동네는 없다)

근데 누가 그런걸 대신 해주는 사람이 없으니까 영빈 언니랑 ‘우리가 한번 해볼까?’ 그렇게 시작을 한거에요. 그해 죽향초등학교 운동회 때 엄마들을 만나서 이야기 하고 같이 할 사람을 모으기 시작했어요. 여섯 명 정도가 뜻을 모았어요. 겁 없이 뛰어 든거죠. 우리마을 아이들을 위해서 멋진 배움터를 만들자 그래서 ‘실개천 마을학교’라는 걸 만들게 된거에요. 그 과정에서 지역 주민들과 함께 하고 화합할 수 있었고요.

(실개천 마을학교는 순수한 엄마들의 참여로 시작됐다. 하지만 프로그램 운영비나 공간이 전혀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지역사회의 협조가 필수적이었다. 엄마들은 마을을 돌며 도움을 청했고 고시산청년회가 공간을 내주었다. 옥천교육지원청은 프로그램 운영비를 지원키로 했다. 대책없이 시작했지만 대책이 만들어졌다.)


여섯명의 엄마들이 모였지만 그 중에서 활동가라고 부를 만한 분은 아무도 없었어요. 심지어 절반 이상은 직장맘이라 낮 활동을 함께 할 수도 없었고요. 좋은 취지에서 시작했다지만 많은 어려움이 있었을 것 같아요.

사람들이 여럿이서 함께 하다보니 아무래도 크고 작은 갈등이 있을 수밖에 없죠. 또 지역사회와 함께 가야 한다는 측면과 옥천교육지원청의 지원을 받다보니 그쪽 의견도 존중해야 하고, 엄마나 아이들의 의견도 또 들어야 하고, 그 중간에서 협의점을 찾고 소통하면서 가는 길이 쉽지는 않았어요. 마을교육이나 공동체 활동 같은 것을 경험해본 사람이 없다보니 되게 조심스러웠거든요. 우리가 말 한마디, 행동 하나 잘못하면 오해가 생길 수도 있고... 많은 분들이 도와주시는데, 사공이 많으면 또 그것대로 부딪히는 부분이 있으니까.


평범한 주부에서 갑자기 마을활동의 중심 인물이 돼버린거네요. 가족의 만류나 반대는 없었나요?

아직도 우리 신랑은 내심 제가 전업주부이기를 바래요. 우리 아이들도(12살, 9살, 7살) 아직 어리잖아요? 신랑은 엄마로서 아이들에게 집중하기를 바래요. 그렇다고 제 활동을 반대하지는 않아요. 사실 신랑의 지원이 없으면 이런 활동은 못하죠. 힘들면 그만하라고 하죠. 하지만 니가 하고 싶으면, 할 수 있는데까지는 해봐라 이렇게 지지를 해줘요. 제가 마을 활동가라는 자각을 한 것도 신랑의 한마디 때문이었어요.

“요즘 뭐하고 다니느라 그렇게 바빠? 돈을 벌어 오는 것도 아니고, 힘들면 그만둬. 근데 여기서 그만두면 자기가 동네에서 욕을 많이 먹겠지?”

이 얘기를 들었을 때 마을 활동가로서 책임감을 생각하는 계기가 됐어요. 친정엄마랑 동생도 저한테 그래요. 지금 마을 애들 걱정할 때냐고? 제 애나 잘 보라는 거죠. 동네 엄마들 통해서도 안 좋은 이야기 들릴 때가 있어요. 자기 애들은 내팽개치고 동네에서 설치고 다닌다 그런 식으로. 그런데 저는 애들 방치한 적이 없어요. 제가 없으면 아빠랑 같이 있어요.

또 이상하게 오해하는 분들도 있어요. 마을 활동하는게 무슨 큰 돈을 버는 줄 아나봐요. 한번은 누가 그러더라고요. “너 요즘 애들 가르쳐서 돈 번다며?”, “한 달에 천만원 벌어요?” 그런 얘기 들으면 맥이 빠지죠. 사실 마을 활동이라는게 큰 돈을 벌 수가 없잖아요.

저는 봉사활동을 많이 해서 그런지, 지금도 마을 활동을 하거나 다른 활동을 하고 돈을 받아간다는 것 자체가 부담스럽고 조심스러워요. 물론, 마을교육활동가나 강사 분들도 정당하게 받을 수 있는건 받아야죠. 다들 ‘당당하라’고 말씀하시는데 아직은 어색하고 어렵네요.


**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동화구연을 들려주는 모습. 이은숙 활동가의 주 활동무대는 학교와 마을이다.


지금은 봉사자에서 활동가로 바뀐 건가요? 스스로 어떤 변화 같은 것을 실제로 느끼시나요?

글쎄요. 지금 전환기에 있다고 해야 하나, 그런 상태인거 같아요. 아직은 활동가, 마을교사 이런 것이 익숙하지는 않아요. 대신 분명하게 달라진 건 엄청 바빠졌다는거에요. 올해부터는 제가 실개천 마을학교 회장을 맡게 됐거든요. 그러면서 맘스토리 활동도 빠지고 여기에 집중하고 있는데 엄마들 하고 차 한 잔 편하게 마실 시간이 잘 안 나네요. 한번씩 몸이 아프면 일주일씩 일어나지도 못하겠고, 점점 정신적인 스트레스, 육체적인 피로가 심해지는 것 같아요. 열심히 하면 할수록 주변의 오해도 더 받는 것 같고.


이은숙 활동가가 겪는 지금의 상황이 앞으로 마을활동을 하는 분들이 겪게 될 통과의례처럼 느껴져요.

마을 활동가가 되려면 누구나 겪어야 될 수순인 것 같아요. 특히 저같이 평범한 주부나 일반 주민이 활동가가 되려면 다들 처음에는 봉사활동을 하고, 그 후에 더 구체적인 마을 활동으로 이어지지 않겠어요? 그 과정에서 제가 겪었던 것처럼 오해를 받을 수도 있고, 생각보다 경제적 보상이 너무 적어서 그만두는 분들도 생길 수 있겠죠.

저는 개인적으로 마을 활동으로 돈을 벌 생각은 하지 않아요. 대신 공익사업(공모사업)을 많이 해보고 싶다는 생각은 들어요. 공모사업을 하면 우리 아이들한테 줄 수 있는 혜택이 더 많아지잖아요.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게 다 내 욕심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어요. 전에 봉사활동 할 때도 저는 공모사업 따서 엄마들 활동비라도 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다른 분들은 그저 봉사로 하고 싶지 공모사업 따거나 그런 복잡한 것은 하고 싶지 않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때 ‘내 욕심 때문에 사람들을 힘들게 할 수도 있겠구나’ 그런 생각을 하게 됐죠.


지금 자신의 정체성은 ‘마을 활동가’라고 생각하나요?

이제는 마을 활동가가 된게 맞는 것 같아요. 솔직히 지금 저희 엄마가 많이 편찮으시거든요. 옥천에서 서울까지 왔다갔다 하면서 개인적으로 많이 힘든 상황이에요. 그런데 간병인을 쓰면서도 제가 이걸(실개천 마을학교) 놓지 못하겠더라고요.

아는 동생이 저한테 그러는 거에요. “언니가 수업 중에 위급하다는 전화가 왔어, 그럼 바로 갈거야 수업 끝까지 다 할거야?”. 저는 ‘수업 다 끝내놓고 갈거’라고 했거든요. 그럼 ‘언니는 이거 계속 해야 돼. 언니가 좋아서 하는 일이고 천직’인거야. 그러는 거에요. 그때 “아, 어느새 나도 마을 활동가가 됐구나. 이 일이 힘들지만 좋아하고 있구나” 생각이 들더라고요.

작년에는 방송통신대학교 교육학과에 들어갔어요. 계속 아이들을 만나고 활동하다보니까 제대로 공부를 해야 할 필요성을 많이 느꼈어요. 실개천 마을학교 하면서 제 스스로 배움에 대한 계기가 됐다고나 할까요? 요즘은 심리학에도 관심이 생겼어요. 아이들의 마음을 더 잘 이해하고 싶어서요.


이은숙 활동가와 인터뷰를 마치며 활동가의 시대도 변화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는 사회변화를 위한 거대담론 중심의 운동이 부각됐다면 지금은 마을을 중심으로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변화가 더욱 필요한 시대가 아닐까 싶다. 마을 활동가라는 호명도 어느덧 보통명사가 되어 가는 시대에 전업 활동가가 아닌 평범한 이웃의 변화를 지켜보고 지지하는 것도 작은 공동체에서 함께 살아가는 재미인 것 같다.


묻고 정리한 사람 _ 정창영

십년 넘게 지역신문 취재기자 생활을 하다 ‘일’은 많고 ‘재미’는 없어서 그만뒀다. 한량이 되면 시간이 넉넉할줄 알았는데 오히려 그 반대라 경악하고 있는 지금은 ‘마을’과 여러 일을 도모하는 ‘마을형 백수’의 삶을 지향하고 있다. 마을카페, 마을미디어, 마을학교 등 ‘마을’ 이라는 글자가 들어간 일에 유독 흥분한다. ‘모든 공익은 사익에서 출발한다’는 얼토당토 않은 신념을 갖고 있다. ‘내가 재밌는 일’, ‘내가 원하는 일’, ‘내가 필요한 일’을 하다보면 마을과 만나는 지점이 반드시 생긴다 _ 고 믿는다. 선한 사람들의 ‘사익’은 지역 사회의 ‘공익’과 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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