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동가는 언제 태어나는 걸까? 우리는 어느 시점에 한 사람을 활동가라고 부르게 되는걸까? 사회문제 해결이나 변화를 모색하는 모임에 참여할 때? 거리에서 피케팅을 하거나 모금을 할 때? 아니면 소위 진보적 사회단체라는 곳에서 직책을 맡거나 상근직으로 일을 할 때?
뭐든 확인 가능한 기준이 있다고 하더라도, 사람의 내면은 그리 매끈 반듯한 것이 아니어서 딱 잘라 언제 어느 조건이라면 가능하다고 말하기 어렵다. 겉으로는 ‘활동가’의 모습을 띠고 있더라도 열정을 불태우던 기억은 옅어진 채 제자리에서 퇴보만 하고 있을 수도 있고, 내면은 충실히 성장하고 있지만 주어진 상황과 조건 속에서 택한 선택지로 인해 ‘당신이 어떻게?’라는 비난이나 실망 어린 조언을 듣게 되기도 하는 것이다.
지난 인터뷰들을 통해 활동의 동기를 확인하려 시도했다면, 이번에는 활동을 지속하는 힘이 무엇인지를 듣는데 좀 더 집중했다. 거의 십 년 전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에서 일하던 때에 처음 만났던 박진옥 활동가는 현재 무연고사, 고독사 등 '애도되지 못하는' 죽음을 기리며 사회적 장례지원을 하는 단체 ‘나눔과나눔'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무더위가 시작되려는 여름날 오전, 서울 마포에 있는 조용한 사무실에서 마주 앉았다.
* 무연고사망자 실태에 관해 학술지에 기고한 논문을 들고 (사진: 박진옥)
요즘 어떠세요, 많이 바쁘죠?
최근에 제 일상이 좀 깨져서 힘들어하고 있어요. 활동만이 아니라, 개인적인 것 포함해서 너무 벌려놓은 게 많아서요.
그러게요. 그 사이 학술지에 논문도 쓰셨더라고요.
공부를 하고 있어요. 제가 대학에서 배운 것을 바탕으로 마흔까지 쭉 살아왔는데, 그때쯤 인권이라는 새로운 영역을 접하면서 다시 공부하고 싶어지더라고요. 원래 경제학을 전공했고, 장애인, 사회복지 관련 활동을 해왔어요. 그러다 앰네스티에서 일하게 되면서 세상을 보는 눈이 바뀌고 완전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어요. 인생의 2막이 시작된 거죠. 이럴 때는 재충전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대학원 진학해서 인권과 사회복지를 공부했고, 지금은 박사과정 공부 중이에요. 죽음과 장례 관련해서는 철학이나 산업적 측면이 아닌 현장을 연구하는 사람이 거의 없는 상황이라.
일단 박사 논문을 연말까지 끝내는 게 목표예요. 나눔과나눔 활동을 하면서 이전부터 하던 인권 강의도 계속 늘고, 공부까지 하니까 아무래도 제가 원하는 방향대로 못 살고 있어요.
원하는 방향이란 어떤 거예요?
제가 꿈이 크지 않은 건지 몰라도 저는 평범한 것에 가치를 두고 있어요. 내 일상이 탄탄해야 해요. 사실 99%의 사람들은 평범하게 살잖아요. 꿈과 비전을 이야기하면 뭔가 야망을 품거나 큰 변화를 꿈꿔야 할 것처럼 이야기하는데, 저는 활동을 하면서 엄청나게 큰 담론을 만들어내는 것보다는 평범한 일상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해나가고 싶어요. 그 정도면 사람으로서 살 수 있는 게 아닐까 싶어요.
일상이 깨질 정도라면 가족들과는 괜찮아요?
둘째에게 많이 미안하죠. 첫째는 열아홉이라 이미 자기 삶을 살지만 둘째는 아직 열다섯 살이라. 평소에는 안 그렇지만 한 번씩 말문이 열리면 하고 싶은 말이 많은 아인데, 그런 말 할 기회를 줘야 할 텐데 제가 너무 여유가 없어 걱정이죠. 일단 양해를 구했어요. 박사 논문을 써야 하니까 올해는 아무래도 바쁠 것 같다고.
그래도 좀 조절을 한다면 뭘 할 수 있을까요?
강의를 줄여야죠. 앰네스티 활동하던 시기에 발달장애인법도 통과되고 사회적으로 요구가 많아서 인권 강의를 다니기 시작했어요. 나눔과나눔 활동을 시작하고는 상근자가 저 혼자고 단체에 예산이 부족하니까 강의를 더 본격적으로 해서 제 인건비는 그걸로 충당했어요. 다행히 올해부터는 좀 부족하기는 하지만 인건비를 예산으로 지급하자고 해서 제 부담이 줄었어요. 그래서 줄이려고요.
공부는 현재 활동에도 도움이 돼요. 제가 연구한 것을 돌아와서 같이 나누고 그러니까 이론적 바탕이 탄탄해지고 이야기할 것이 많아져요. 힘은 드는데, 조직으로서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가져오는 통로이기도 해요. 이제 상근자가 세 명으로 늘어서 실제 장례지원은 다른 두 분이 많이 가시고 저는 대외활동을 주로 해요. 그러다 보니 문득 아, 내가 뭐 하고 있지? 현장의 이야기들이 부족해지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종종 들어요. 늘 현장에 나가다가 그게 줄어드니까. 현장과 대외활동과 이 접점을 어떻게 해야 잘 유지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어요. 둘 다 좋고 필요한데.
* 2018년 고 박태오 님 장례 (사진: 나눔과나눔)
우연한 연결과 시작
나눔과나눔이라는 활동이 생겨날 무렵(2011) 박진옥은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에서 캠페인 팀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언론을 통해 알려진 것처럼, 위안부 문제를 제기하던 당사자이자 활동가들이 점차 세상을 떠나는데 장례를 치를 여건이 되지 않는 것을 보고 몇 사람이 모여 장례지원 활동을 시작한 게 출발점이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앞의 이야기가 더 있었다.
나눔과나눔 활동은 단체 설립 시기부터 쭉 함께하셨나요?
그렇긴 한데, 처음부터 주도한 건 아니에요. 당시 '위안부' 피해 할머니가 80여 분 살아 계셨는데, 자꾸 할머니가 돌아가신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어요. 우연히 지인들과 만났을 때 이 이야기를 했더니, 때마침 상조회사를 다니기 시작한 지인이 할머니 장례를 우리가 함께 지원하면 되지 않겠냐는 제안을 해서 제가 정대협과 그 상조회사를 연결했어요. 정대협에서도 장례가 큰 걱정거리 중 하나라고 하시더라구요. 당시 길원옥 할머니들께서 우리를 보고 고맙다며 “이제 나 죽어도 걱정 안 해도 되는구나” 하시며 좋아했구요. 그리고 이 계기로 당시 모였던 지인들이 주변의 장례를 치르지 못하는 분들을 도와야겠다며 나눔과나눔 활동을 시작한 거예요. 그중 한 분이 회사를 다니면서도 창립 당시부터 지난 해인 2018년 2월까지 대표로 열심히 활동하셨어요. 저는 이미 앰네스티 활동을 하고 있으니 당시에는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고 필요할 때 돕는 정도였고.
그럼 좀 우연적인 연결이었네요.
네, 아마 그래서 가능했던 것 같아요. 그냥 시민사회 활동만 했던 사람들이었으면 이 일이 시작되지 않았을 거예요. 그러니 어찌 보면 비영리에 계신 분들도 좀 더 다양하게, 영리 쪽으로도 네트워크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 2015년 고 최금선 님 장례식 방명록 (사진: 나눔과나눔)
영역보다는 지향
영역을 넘나들며 다양한 경험을 하고 네트워크를 쌓아나가는 것. 그것은 박진옥이 활동해온 과정의 중요한 특징이기도 하다. 민주화운동 이후, 분신과 투쟁이 이어지던 1991년 무렵 대학에 입학해 학생운동을 하기도 했다. 특히 장애인에 관심을 두고 수화동아리에 참가하고, 장애인 관련 분야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던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의 교육 프로그램도 수강하면서 진지하게 활동했다. 그러다 3학년에 접어들면서 돌연 학군단(ROTC)에 입단했다. 해마다 오르는 등록금과 졸업 후 생계를 생각해 깊이 고민해서 내린 결정이었지만 당시 분위기에서는 아무래도 공감받기 어려웠다. “네가 어떻게 거길 갈 수 있어?”라며 묻는 친구도 있었다. 그러나 선택지가 없다고 생각했기에 아무 말 못했다.
졸업 후 예정된 군 복무를 2년 동안 하고 곧바로 금융회사에 취직했다. 당시 금융권 급여는 지금 생각해도 상당한 액수일 정도로 괜찮은 일자리였다. 그러나 사실은 거의 폭탄을 안은 셈이었다. IMF가 터진 것이다.
돈을 너무 많이 주는 거예요. 좋았죠. 직장생활은 새로운 걸 배우는 시기였는데, 돈도 주니까. 금융권이라도 지원파트라 크게 고민할 게 없이 업무 하면 되었어요. 서류하고 계약 업무하고.. 그러는데 갑자기 IMF가 온 거죠. 그래도 별문제 없을 거라고 다들 이야기했지만, 결국 회사가 퇴출당했고 해고통지서가 날아왔어요.
그다음으로 찾은 직장은 제조회사였다. 제도와 체계로 움직이는 금융권과 달리, 가 보니 모든 게 사업주 마음대로였다. 사업도 제조업을 내걸고 실제로는 부동산업을 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큰 충격을 받아 1년 만에 그만두고는, 대학 때부터 꾸준히 인연을 맺고 있던 장애우권익연구소에서 장애인직업재활센터를 만든다기에 그리로 갔다. 그렇게 영리와 비영리가 접목하는 현장에 처음 발을 내디뎠다. 급여는 두 번 이직하는 사이 반에 반 토막이 났다.
자본의 첨단에서 사회복지 운동의 현장으로 영역이 크게 바뀌었군요. 굉장히 달랐을 것 같아요. 특히 경제적으로.
글쎄요. 돈을 많이 벌어야겠다는 생각은 별로 없었어요. 성공의 가치가 돈에 있지 않으니까 그런 선택을 할 때 그리 어렵지 않았던 것 같아요. 대학 때 학군단으로 간 건 주어진 현실적인 여건 때문이었어요. 그 후로도 아주 여유 있지는 않았는데, 그래도 꾸역꾸역 맞춰지고 해서 이 일을 그만두고 더 많은 돈을 벌러 가야 하는 상황이 아직은 벌어지지 않았어요. 삶을 유지할 정도는 맞춰지니까 감사하죠.
첫 직장 면접 볼 때, 꿈이 뭐냐고 물어보시더라고요. 제가 모든 사람이 인간답게 사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그랬더니 사장이 막 웃더라고요. 진지하게 말했는데 왜 웃지? 싶었어요. 뭐, 20대 중반 청년이 와서 허무맹랑한 얘기를 하니까 그랬겠죠. 저는 그 생각이 지금도 여전한 것 같아요. 어느 일을 하든. 정 못 견디겠으면 하던 일을 그만두고 그런 과정들이.
단체로 이직하고는 재미있었어요. 지적장애인 당사자들이 지하철 유실물을 받아서 세탁해서 판매하고 그런 일이었어요. 직업 재활이라고 하지만, 재활용품을 판매한다는 인식이 그 당시에는 낯선 시기여서 거의 노점을 하다시피 했어요. 겨울에 여기가(손) 항상 부르트는 거예요. 추운 날에도 계속 뭔가 작업을 하니까. 그 경험 덕에 저는 지금 뭐 여차하면 노점을 하는 것도 두렵지 않아요.
학생운동에서 군 생활로, 금융업, 제조업에서 복지서비스로. 벌써 두어 번 큰 전환을 겪으셨는데요, 이게 아주 거스를 수 없는 변화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드나듦에 가까운 것 같아요. 사실 IMF 때 회사가 없어지는 걸 겪은 게, 언제든 이 일을 못 할 수 있고 없어질 수 있다는 생각, 내가 자의로 그만둘 수도 있고. 그런 걸 각인시킨 것 같아요.
좋은 의미로는 적응력이 생긴 걸까요?
네. 여러 가지 경험을 하다보니 내가 무엇을 하고 사는지는 중요하지 않더라고요. 어떤 지향을 갖고 사느냐가 중요하지. 혹시 지금 나눔과나눔 활동하다가 정말 돈이 필요해서 돈 많이 주는 데로 갈 수밖에 없다고 하더라도 그게 중요하지 않은 거 같아요. 내 삶의 지향점과 가치가 어디를 향하고 있느냐가 훨씬 중요하다고 판단하게 되었어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시민단체 활동하고 싶다는 사람 있으면 가능하면 큰 기업에서 먼저 일을 해보면 어떠냐고 해요. 거긴 시스템이 있으니까. 물론 사람이 시스템에 들어가서 하나의 부품처럼 움직이는 건 문제일 수 있지만, 조직이라는 건 하나의 시스템으로 움직이는 맥락이 있는 거라.
비영리의 전문성과 체계
‘시스템이 있는' 큰 기업에서 일해 보면 좋겠다는 건 구체적으로 무슨 뜻일까? 물론 비영리에도 시스템은 있다. 이사회, 위원회, 직위 직급 등 조직 내 의사결정 및 권한, 책임에 관한 사항은 관료 조직이나 기업의 체계를 이식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그 시스템은 형식에만 그친다거나, 구체적인 실무에 들어가면 매뉴얼이나 작업 도구 없이 오직 담당자의 재량으로 해결해야 하는 일도 많다. 기업에서 일을 시작한 박진옥이 비영리를 접했을 때 가장 피부로 와 닿는 문제는 바로 이 지점이었을 것이다.
사회복지 영역으로 왔더니, 당시 직원분들이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따기 위해 대학원에 가더라구요. 그러면 내가 이 영역에서 잘 할 수 있는 게 뭘까 고민하다가 사회복지사들이 힘들어하는 영역 중 하나인 회계파트의 전문가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저는 경제학을 공부했고, 일반 기업에서도 일했으니까요. 그리고 2년 정도 직업센터에서 활동했는데,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는 원래 법과 제도화를 연구하고 활동하던 곳이라 제가 활동하던 직업센터 활동에서 제가 장기적인 비전을 찾기는 어려웠어요. 그래서 앞서 고민했던 회계파트 전문가가 되기 위해 그만두기 전에 AICPA라고, 미국공인회계사 자격증을 땄어요. 그리고는 음악 채널 방송사 회계팀장으로 이직했는데 이번에는 6개월 만에 회사가 망했어요. (웃음) 그때 사랑의열매에서 회계팀 직원을 뽑는대서 지원했는데 실제로는 기획 파트로 뽑혀서 이직했죠.
또 한번 영리-비영리 전환이 있었네요.
그렇죠. 사랑의열매에 갔더니, 그 큰 조직에 시스템이 없더라고요. 전국 조직 예산 정리를 엑셀로 하고 있었는데 그 안에 함수가 하나도 없었어요. 회계업무 프로그램이야 있었지만, 예산 대비 결산이 안 되고 있었던 거예요. 기업들이 ERP라고 전사적 자원관리를 한참 하던 때고 비영리단체는 아직 그렇게 관리를 하던 때는 아니었어요. 그래서 전산시스템 만드는 작업을 했어요. 지금은 전국적으로 시스템화한 걸로 알아요.
한동안 재밌게 열심히 일했어요. 그러다가, 제가 비영리에 왔던 이유가 있었잖아요. 오너의 전횡, 비민주적인 것. 그런데 여기도 별반 다르지 않더라고요. 예산, 채용, 구체적인 현실을 들여다보니까 심각하더라고요. 결정적으로는 입찰 문제가 있었어요. 기업이 적절하게 운영되는지 지켜봐야 하는 감사팀에서 오히려 나서서 입찰에 개입해 자격 없는 업체를 선정한 거예요. 나름 항의했지만 소용없었고, 그거 보면서 더 있으면 안 되겠다 싶었어요.
그때가 장애인차별금지법이 통과되면서 인권위에서 장애인차별문제 조사관을 뽑는다는 소식이 들렸어요. 그걸 염두에 두고 이직 준비를 했어요. 그런데... 정권이 바뀌면서 인권위가 엄청 흔들리는 상황에서 채용 작업도 중단되어 버렸어요. 직장은 이미 그만두었고. 30대 후반이었는데 그때가 정말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어요. 그래도 법으로 만든 조직인데 설마 하고 기다리면서 1년 동안 놀았어요.
그 괴로운 기다림의 시기에, 박진옥은 어학 연수차 잠시 머문 필리핀에서 이후 삶의 ‘2막’을 열 새로운 영역을 만난다. 이왕 기다리는 김에 현지 인권단체를 경험해보자고 앰네스티 필리핀 지부에서 석 달 동안 무급 인턴으로 활동한 것이다. 세계인권선언 60주년이라 캠페인이 풍부했다. 활동하면서 인권 공부도 하고, 프라이드 마치도 거기서 처음 접했다. 그리고 귀국을 준비하던 때에 앰네스티 한국지부의 채용공고를 발견했다. 직무도 마침 회계팀이라, 반가운 마음에 자신감을 갖고 지원했다.
* 필리핀에서 앰네스티 캠페인 중 (사진: 박진옥)
그게 앰네스티 활동의 시작이었군요?
아, 그런데 제가 떨어졌어요. 안 그래도 1년 동안 힘들게 지낸 터라 되게 좌절했죠. 처음으로 편두통이 왔어요. 이 길이 아닌가 보다 하고 다시 영리 쪽을 알아보는데 전화가 왔어요. 회계팀 말고 캠페인팀을 해보지 않겠냐고. 저는 관련 업무를 해본 적도 없고 그래서 망설이다가 다시 인터뷰하고 일을 시작하게 되었어요. 서로가 모험이었죠.
당시 앰네스티가 변화의 시기를 겪고 있었어요. 제가 일 시작한 그때 바로 용산참사, 쌍용차, 그런 사건들이 이어지면서 그 전해에 벌어진 광우병소고기반대 촛불집회 포함해서, 처음으로 내가 역사의 현장에 서 있구나, 하는 걸 느꼈어요. 이 상황을 어떻게 대응해야 하지? 앰네스티라는 국제단체가 어떤 영향을 미쳐야 하지? 완전 새로운 인권이라는 가치관으로 세상을 보고 판단해야 하는 상황이었어요. 그래서 정신없이 지냈죠. 사실 중간에는 아, 이거 아닌거 같다며 그만두고 싶은 생각도 있었지만, 동료들이 되게 만족해하고 조직에 제가 가진 역량이 도움이 된다고 하니까, 만약 내가 더이상 필요 없고 나도 도움이 안 되면 그때는 과감하게 나가자 하고 있었어요.
5년 동안 캠페인도 많이 했고, 정말 많이 배웠어요. 특히 언론 대응. 그때 만나 같이 활동한 팀원들이 참 좋았어요. 지금도 그런 사람들을 만나진 못할 것 같아요. 능력 있는 팀원들에게 많이 배웠어요. 십 년씩 나이 차이가 나도 그 사람의 마인드, 일하는 방식 그런 건 배울 게 많았죠. 기본 역량들이 있어서 다 알아서 하고, 저는 사실 조직관리만 했던 거 같아요. 누가 하고 싶다고 하면 장을 만들어주는 그런 역할.
만약 원하던 대로 인권위 들어가셨으면 아마 그때가 인생 최악의 시기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네요.
네, 아마 그랬을 거예요.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지금 돌아보면, 때로 소망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는 게 축복일 수 있겠다 싶어요. 제가 성격이 좀 급한데, 그런 경험을 하면서 좀 천천히 가려고 노력하게 되었어요.
돌아보면 앰네스티 있었던 기간이 제게는 삶의 지평을 넓혔던 것 같아요. 이전에는 사회복지 분야에 있었다 보니 글로벌한 이슈를 접할 일이 별로 없었는데, 전 세계적인 캠페인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그런 걸 알게 된 게 정말 좋은 기회였고, 무엇보다 인권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토대가 생겼어요. 지금 나눔과나눔이 존재할 수 있는 것도 앰네스티의 영향이 커요. 거기서 캠페인이며 여러 활동 했던 것들이 그대로 여기 와서 적용되니까요.
그런 곳을 그만두신 건 좀 아쉬울 수도 있겠는데요.
계속 있었어도 재밌게 했었을 거 같긴 한데, 5년 정도 지날 무렵에 조직 내부에 또 변화가 필요했고, 제가 그만두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꼭 한곳에 오래 머무는 것만이 좋은 것 같지 않아요. 저는 그전에도 동료 중 누군가 떠난다면 잘 가라고 하지 붙잡지 않았었거든요. 우리 활동에 우호적인 사람들이 많이 퍼져나가서 다른 영역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연계하면 좋지 않을까 생각해서요.
이직을 많이 하는 건, 비영리 영역에서 새로운 사람이 성장하기 어려운 환경 때문이라는 지적도 있는데요.
저는 시스템은 일반 기업에서 배웠고, 사랑의열매에서는 공식 문서 작성법을 배웠어요. 그 덕에 지금도 공무원들과 일하는 게 어렵지 않아요. 캠페인을 했던 앰네스티 경험은 언론에 어떻게 대응하고, 의제를 어떻게 제기하고 제도화할지를 알게 해 줬어요. 그런 게 다 밑거름이 되었다고 생각해요. 앞에 그런 시기가 없었으면 지금 이 활동을 이렇게 하고 있지 못했을 거예요.
지속해나가는 힘
이전에 활동하시던 곳들에 비하면 지금은 뭐가 크게 다른가요?
크고 유명한 단체들이긴 했죠. 사람들이 들으면 알고, 모르면 왠지 알아야 할 것 같은 곳들이었죠. 활동가도 많으니까 뭔가 기획하고 상의하면 실무가 쫙 진행되고 그랬는데, 여기서는 처음부터 만들어나가야 했어요. 처음 2년은 상근자도 사무실도 없었거든요. 그러다 보니 아무래도 흐지부지되는 면이 있었어요. 협조가 필요한 공무원들도 우리가 믿을만한 단체인지 확신이 없고.
그러다 제가 상근을 하기로 했고, 3년은 혼자 일했어요. 필요한 일이라는 당위가 커서 우선 활동하면서 세팅을 해나갔어요. 말했듯이 인권 강의로 활동비를 벌고, 죽음이나 장례에 관해서도 잘 알던 게 아니라 자료도 모으고 그러면서. 그러다 무연고사, 고독사 문제를 다루게 되고 활동가도 더 들어오고 그러면서 점차 나아졌어요.
심리적 트라우마 같은 문제는 없나요? 구조 활동을 많이 하는 동물권 운동에서는 그런 이야기도 나와요.
이야기를 많이 나눠요. 수시로. 그러지 않으면 쌓일 테니까. 활동가들이 장례 지원 다녀오면 어땠는지 서로 이야기하고 특히 감정을 나누려고 해요. 의례로서 형식은 거의 똑같은데 거기서 느끼는 감정이 매번 다르거든요. 사람을 새로 만나는 느낌이랄까, 전혀 모르는 사람의 삶을 잠시 접하고 오는 느낌이 들어요. 장례라는 게 떠나보낸다고 하지만 그 자리가 만나는 자리이기도 하고, 여러 생각을 할 수 있는 한 시간이예요. 혼자 있을 때는 그게 어려웠는데, 다른 단체 사무실을 같이 쓰면서는 거기 분들과 같이 이야기하고 이해받으면서 힘을 얻기도 했어요.
그리고 저희는 입관을 직접 하지 않아요. 아마 그걸 했으면 충격이 상당했을 거예요. 입관은 시에서 계약을 맺은 업체에서 하는데, 그분들도 되게 힘들다고들 하세요. 주로 저희가 지원하는 분들은 상태가 안 좋으시거든요. 이렇게 험한 시신은 처음이라며, 만나면 사진을 보여주시는데 그걸 보면 힘들죠. 매번 그랬다면 정말 쉽지 않았을 거예요. 이번 주말에 장례 치른 분은 생전 사진에 수염이 있으신데 입관 장면은 수염이 하얗게 되어 있었어요. 이분은 마지막에 자기를 돌보지 못해서 그런 것일까? 그 현장에 갔던 활동가가 돌아와서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 앰네스티 무기거래통제 캠페인 (사진: 박진옥)
그렇게 지속해나가는 힘을 얻는 거군요.
앰네스티 활동하면서 또 하나 느낀 건, 변화의 흐름이란 게 정말 중요하구나, 하는 거예요. 조직은 변화의 흐름을 만들어가는 곳이더라고요. 예를 들어 무기거래통제 캠페인은 벌써 30년 해 온 거거든요. 한 캠페인을 10년 지속하기도 어려운데 말이에요. 30년 걸려서 결국 국제연합에서 조약을 만들었어요. 현장에서 총기, 무기가 얼마나 인권을 침해하는지 확인한 인권운동가들이 이걸 어떻게 변화시킬까 연구하고 고민한 끝에 무기거래통제라는 방향을 만들어 냈고, 그 의제를 가지고 전 세계적 캠페인을 한 다음에 조약이라는 형태가 필요하다고 요구하고 그 조약을 만드는 작업을 한 거죠. 거기서 끝난 게 아니예요. 조약이 실효성이 있으려면 꾸준히 변화 시켜 나가야 하는 과정이 있죠. 그 사이에 사람은 많이 바뀌었지만, 이 의제와 캠페인은 변하지 않은 거예요. 아, 이런 거구나. 사회를 변화시킨다는게 한순간에 되지 않잖아요. 50년, 100년 후에 변화되는 모습이 나타나는 것이라, 그걸 어떻게 만들까 생각해야죠.
나눔과나눔은 우리 일상의 하나인 죽음이라는 걸 어떻게 바라보고 인식하고 변화시켜나갈까 고민해요. 지금은 작은 단체니까 일단 계속 왱왱거리는 거죠, 모기처럼. 이 활동하면서 좋았던 거는, 저희가 말하던 걸 사회가 똑같이 말할 때, 처음 꺼낼 땐 낯설던 것들이 언어가 될 때 굉장히 감동적이었어요. 그렇게 길게 보고 계속해나가는 거죠.
크게 변화의 흐름을 만드는데는 굉장히 긴 시간이 필요한데, 거기에 너무 압도되기보다는 지금 할 수 있는 걸 차근차근 쌓아나가야 한다는 말씀인가요?
기록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책 만들고 기록 남기고. 장례 지원하는 봉사단체가 몇 군데 있는데 기록하는 곳이 없어요. 기록하고, 그들의 삶이 어땠는지, 죽음이 어땠는지 이야기하고 이 과정을 통해서 우리 이 시대 살았던 사람들이 어떤 모습인지를 누군가는 증언해줘야 하는데. 당사자는 돌아가셨으니 아무 말 못 하고, 혹시 가족이 있더라도 가족들도 재정적으로 부담이 올까 봐 시신을 포기하고 아무런 말을 못 하는 거죠.
그러면 공공기관은 움직일 이유가 없고.
그렇죠. 최근 몇 차례 고독사 사건이 생기면서 화두가 되지 않았으면 사회가 별로 관심 갖지 않았을 거예요. 사회가 어떤 임계점에 도달하면 그런 현상이 수면으로 나오는데, 한국은 IMF 이후 20년이 지나서 무연고 사망자나 고독사가 사회적 이슈가 된 거예요. 그동안 없었던 건 아니었지만, 노숙자가 급증하고 가족 해체도 급격했던 그때 40대이던 분들이 이제 60대가 되었어요.
처음에는 단순히 기초생활수급자나 사정이 어려운 분들의 장례로 접근했는데, 그것만이 아니었어요. 애도 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지금 그동안 활동하면서 접한 사례 연구를 하고 있어요. 장애인을 뭉뚱그려 하나로 퉁쳐버리곤 하지만 실은 엄청 다양한 장애의 정도가 있는 것처럼, 무연고 사망자라고 해도 그 안에 참 많은 삶의 모습이 있어요. 이를테면 이 사람은 가족이 있는데 왜 무연고자가 되었을까? 하는. 그리고 장례식에 참석한 지인들이나, 자원봉사자들의 삶의 이야기도 다양하기 때문에 이런 걸 살펴보다 보면 우리 사회가 무연고 사망자를 더 잘 바라볼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생각해요.
* 2017년 홈리스 추모제 (사진: 나눔과나눔)
1인 가구가 늘고, 가족의 형태도 다양해지면서 이런 사안에 관심이 늘고 있는 듯해요.
네, 그래서 오히려 젊은 세대가 더 관심이 많기도 해요. 물론 기성세대도 관심을 갖기는 하지만 기성세대는 무연고사망자 문제를 삶을 잘 못 살아서 그랬다는 인식, 그러니까 '타인의 고통'쯤으로 생각한다면, 젊은 층은 본인들의 미래라고 생각해서인지 훨씬 더 관심이 많더라고요.
해야할 일에 비해 일손이 달린다는 말씀을 하셨는데요, 사실 단체가 어디든 항상 사람이 부족하잖아요. 일은 항상 많고. 그래도 지금은 세 명이 일하고 있으니 혼자 하실때에 비해서는 커진 거 아닌가요?
그렇죠. 그래도 더 커져야 해요. 완전 새로운 모델을 사회에 제시하려면, 제도화되기까지 모델을 만들 필요가 있으니까요. 그렇다고 무한정 조직을 키우려는 건 아니에요. 이 단체는 자기소멸적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미션이 해결되는 걸 원하지 확대를 원하는 건 아니거든요.
다행히도, 저는 일을 벌이는 스타일인데 그걸 제어해주는 다른 활동가가 계세요. 어떤 일을 하려다 보면 이 선택밖에 할 수 없다는 당위가 생기잖아요. 그럴 때 왜 꼭 그걸 해야해? 그런 질문을 받는 거예요. 그러면 바로 멈추는 거죠.
활동 자체를 가지고 밖에서 의논할 사람들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 관계망이 있으면 좋겠지만 아직은 없어요. 친구들은 있지만 좀 다른 세상을 사니까 모임을 잘 안 가게 되기는 해요. 조직에서는 사무국 외에 이사회가 그런 역할을 하죠. 밖이라면, 마포돌봄네트워크라는 연대체가 있어서 돌봄을 주제로 같이 논의하기도 해요. 공부하면서는 호스피스 쪽 하는 분들이 계셔서 교류하는데, 아무래도 조금 결이 다르긴 해요. 죽음이라는 공통된 주제를 다루지만 임종을 지키는 것과 그 이후는.
사실 만나자고 하면 만날 수 있을 거예요. 그런데 만나자는 이야기를 꺼내기 쉽지 않아요. 각자 자기 활동이 너무 바쁜 거죠. 연대하겠다는 마음을 갖지 않으면 누군가의 헌신으로 돌아가기 마련이니까. 시간을 내줘야 하는데, 아무래도 조금 여유가 필요할 것 같아요.
지속해나간다는 것, 그것은 시작한 사람들의 유산을 그대로 답습하는 게 아니다. 시작할 때의 비전을 재확인하면서 주어진 상황과 조건에 따라 섬세하게 조율하고, 때로는 과감하게 바꾸어나가야 할 수도 있다. 그것은 생각보다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그리고 사람에게 용기를 주는 존재는 역시 다른 사람이다.
영리/비영리, 상근/자원활동, 직위나 나이가 주는 상하 관계, 이런 경계를 뛰어넘기란 어쩌면 자기 내면에 드리운 불안과 혼란의 선을 넘는 데 비하면 훨씬 더 쉬운 일인지도 모른다. 동료든 가족이든 이웃이든, 내게 그 선을 뛰어넘을 용기를 심어줄 사람을 많이 만날 수 있다면, 그동안 박진옥이 그래온 것처럼 우리도 현실의 어떤 경계든 유연하게 넘나들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이 바로 지금 우리에게 더 많은 만남과 대화가 필요한 이유가 아닐까?
부디, 머지않아 그의 일상에 여유가 돌아오기를. 그래서 더 많은 만남과 대화를 열어나갈 수 있게 되기를.
_ 신비
#박진옥 #나눔과나눔 #신비 #장상미 #서울 #무연고사망자 #복지 #소외 #심리 #국제연대
활동가는 언제 태어나는 걸까? 우리는 어느 시점에 한 사람을 활동가라고 부르게 되는걸까? 사회문제 해결이나 변화를 모색하는 모임에 참여할 때? 거리에서 피케팅을 하거나 모금을 할 때? 아니면 소위 진보적 사회단체라는 곳에서 직책을 맡거나 상근직으로 일을 할 때?
뭐든 확인 가능한 기준이 있다고 하더라도, 사람의 내면은 그리 매끈 반듯한 것이 아니어서 딱 잘라 언제 어느 조건이라면 가능하다고 말하기 어렵다. 겉으로는 ‘활동가’의 모습을 띠고 있더라도 열정을 불태우던 기억은 옅어진 채 제자리에서 퇴보만 하고 있을 수도 있고, 내면은 충실히 성장하고 있지만 주어진 상황과 조건 속에서 택한 선택지로 인해 ‘당신이 어떻게?’라는 비난이나 실망 어린 조언을 듣게 되기도 하는 것이다.
지난 인터뷰들을 통해 활동의 동기를 확인하려 시도했다면, 이번에는 활동을 지속하는 힘이 무엇인지를 듣는데 좀 더 집중했다. 거의 십 년 전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에서 일하던 때에 처음 만났던 박진옥 활동가는 현재 무연고사, 고독사 등 '애도되지 못하는' 죽음을 기리며 사회적 장례지원을 하는 단체 ‘나눔과나눔'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무더위가 시작되려는 여름날 오전, 서울 마포에 있는 조용한 사무실에서 마주 앉았다.
* 무연고사망자 실태에 관해 학술지에 기고한 논문을 들고 (사진: 박진옥)
요즘 어떠세요, 많이 바쁘죠?
최근에 제 일상이 좀 깨져서 힘들어하고 있어요. 활동만이 아니라, 개인적인 것 포함해서 너무 벌려놓은 게 많아서요.
그러게요. 그 사이 학술지에 논문도 쓰셨더라고요.
공부를 하고 있어요. 제가 대학에서 배운 것을 바탕으로 마흔까지 쭉 살아왔는데, 그때쯤 인권이라는 새로운 영역을 접하면서 다시 공부하고 싶어지더라고요. 원래 경제학을 전공했고, 장애인, 사회복지 관련 활동을 해왔어요. 그러다 앰네스티에서 일하게 되면서 세상을 보는 눈이 바뀌고 완전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어요. 인생의 2막이 시작된 거죠. 이럴 때는 재충전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대학원 진학해서 인권과 사회복지를 공부했고, 지금은 박사과정 공부 중이에요. 죽음과 장례 관련해서는 철학이나 산업적 측면이 아닌 현장을 연구하는 사람이 거의 없는 상황이라.
일단 박사 논문을 연말까지 끝내는 게 목표예요. 나눔과나눔 활동을 하면서 이전부터 하던 인권 강의도 계속 늘고, 공부까지 하니까 아무래도 제가 원하는 방향대로 못 살고 있어요.
원하는 방향이란 어떤 거예요?
제가 꿈이 크지 않은 건지 몰라도 저는 평범한 것에 가치를 두고 있어요. 내 일상이 탄탄해야 해요. 사실 99%의 사람들은 평범하게 살잖아요. 꿈과 비전을 이야기하면 뭔가 야망을 품거나 큰 변화를 꿈꿔야 할 것처럼 이야기하는데, 저는 활동을 하면서 엄청나게 큰 담론을 만들어내는 것보다는 평범한 일상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해나가고 싶어요. 그 정도면 사람으로서 살 수 있는 게 아닐까 싶어요.
일상이 깨질 정도라면 가족들과는 괜찮아요?
둘째에게 많이 미안하죠. 첫째는 열아홉이라 이미 자기 삶을 살지만 둘째는 아직 열다섯 살이라. 평소에는 안 그렇지만 한 번씩 말문이 열리면 하고 싶은 말이 많은 아인데, 그런 말 할 기회를 줘야 할 텐데 제가 너무 여유가 없어 걱정이죠. 일단 양해를 구했어요. 박사 논문을 써야 하니까 올해는 아무래도 바쁠 것 같다고.
그래도 좀 조절을 한다면 뭘 할 수 있을까요?
강의를 줄여야죠. 앰네스티 활동하던 시기에 발달장애인법도 통과되고 사회적으로 요구가 많아서 인권 강의를 다니기 시작했어요. 나눔과나눔 활동을 시작하고는 상근자가 저 혼자고 단체에 예산이 부족하니까 강의를 더 본격적으로 해서 제 인건비는 그걸로 충당했어요. 다행히 올해부터는 좀 부족하기는 하지만 인건비를 예산으로 지급하자고 해서 제 부담이 줄었어요. 그래서 줄이려고요.
공부는 현재 활동에도 도움이 돼요. 제가 연구한 것을 돌아와서 같이 나누고 그러니까 이론적 바탕이 탄탄해지고 이야기할 것이 많아져요. 힘은 드는데, 조직으로서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가져오는 통로이기도 해요. 이제 상근자가 세 명으로 늘어서 실제 장례지원은 다른 두 분이 많이 가시고 저는 대외활동을 주로 해요. 그러다 보니 문득 아, 내가 뭐 하고 있지? 현장의 이야기들이 부족해지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종종 들어요. 늘 현장에 나가다가 그게 줄어드니까. 현장과 대외활동과 이 접점을 어떻게 해야 잘 유지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어요. 둘 다 좋고 필요한데.
* 2018년 고 박태오 님 장례 (사진: 나눔과나눔)
우연한 연결과 시작
나눔과나눔이라는 활동이 생겨날 무렵(2011) 박진옥은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에서 캠페인 팀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언론을 통해 알려진 것처럼, 위안부 문제를 제기하던 당사자이자 활동가들이 점차 세상을 떠나는데 장례를 치를 여건이 되지 않는 것을 보고 몇 사람이 모여 장례지원 활동을 시작한 게 출발점이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앞의 이야기가 더 있었다.
나눔과나눔 활동은 단체 설립 시기부터 쭉 함께하셨나요?
그렇긴 한데, 처음부터 주도한 건 아니에요. 당시 '위안부' 피해 할머니가 80여 분 살아 계셨는데, 자꾸 할머니가 돌아가신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어요. 우연히 지인들과 만났을 때 이 이야기를 했더니, 때마침 상조회사를 다니기 시작한 지인이 할머니 장례를 우리가 함께 지원하면 되지 않겠냐는 제안을 해서 제가 정대협과 그 상조회사를 연결했어요. 정대협에서도 장례가 큰 걱정거리 중 하나라고 하시더라구요. 당시 길원옥 할머니들께서 우리를 보고 고맙다며 “이제 나 죽어도 걱정 안 해도 되는구나” 하시며 좋아했구요. 그리고 이 계기로 당시 모였던 지인들이 주변의 장례를 치르지 못하는 분들을 도와야겠다며 나눔과나눔 활동을 시작한 거예요. 그중 한 분이 회사를 다니면서도 창립 당시부터 지난 해인 2018년 2월까지 대표로 열심히 활동하셨어요. 저는 이미 앰네스티 활동을 하고 있으니 당시에는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고 필요할 때 돕는 정도였고.
그럼 좀 우연적인 연결이었네요.
네, 아마 그래서 가능했던 것 같아요. 그냥 시민사회 활동만 했던 사람들이었으면 이 일이 시작되지 않았을 거예요. 그러니 어찌 보면 비영리에 계신 분들도 좀 더 다양하게, 영리 쪽으로도 네트워크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 2015년 고 최금선 님 장례식 방명록 (사진: 나눔과나눔)
영역보다는 지향
영역을 넘나들며 다양한 경험을 하고 네트워크를 쌓아나가는 것. 그것은 박진옥이 활동해온 과정의 중요한 특징이기도 하다. 민주화운동 이후, 분신과 투쟁이 이어지던 1991년 무렵 대학에 입학해 학생운동을 하기도 했다. 특히 장애인에 관심을 두고 수화동아리에 참가하고, 장애인 관련 분야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던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의 교육 프로그램도 수강하면서 진지하게 활동했다. 그러다 3학년에 접어들면서 돌연 학군단(ROTC)에 입단했다. 해마다 오르는 등록금과 졸업 후 생계를 생각해 깊이 고민해서 내린 결정이었지만 당시 분위기에서는 아무래도 공감받기 어려웠다. “네가 어떻게 거길 갈 수 있어?”라며 묻는 친구도 있었다. 그러나 선택지가 없다고 생각했기에 아무 말 못했다.
졸업 후 예정된 군 복무를 2년 동안 하고 곧바로 금융회사에 취직했다. 당시 금융권 급여는 지금 생각해도 상당한 액수일 정도로 괜찮은 일자리였다. 그러나 사실은 거의 폭탄을 안은 셈이었다. IMF가 터진 것이다.
돈을 너무 많이 주는 거예요. 좋았죠. 직장생활은 새로운 걸 배우는 시기였는데, 돈도 주니까. 금융권이라도 지원파트라 크게 고민할 게 없이 업무 하면 되었어요. 서류하고 계약 업무하고.. 그러는데 갑자기 IMF가 온 거죠. 그래도 별문제 없을 거라고 다들 이야기했지만, 결국 회사가 퇴출당했고 해고통지서가 날아왔어요.
그다음으로 찾은 직장은 제조회사였다. 제도와 체계로 움직이는 금융권과 달리, 가 보니 모든 게 사업주 마음대로였다. 사업도 제조업을 내걸고 실제로는 부동산업을 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큰 충격을 받아 1년 만에 그만두고는, 대학 때부터 꾸준히 인연을 맺고 있던 장애우권익연구소에서 장애인직업재활센터를 만든다기에 그리로 갔다. 그렇게 영리와 비영리가 접목하는 현장에 처음 발을 내디뎠다. 급여는 두 번 이직하는 사이 반에 반 토막이 났다.
자본의 첨단에서 사회복지 운동의 현장으로 영역이 크게 바뀌었군요. 굉장히 달랐을 것 같아요. 특히 경제적으로.
글쎄요. 돈을 많이 벌어야겠다는 생각은 별로 없었어요. 성공의 가치가 돈에 있지 않으니까 그런 선택을 할 때 그리 어렵지 않았던 것 같아요. 대학 때 학군단으로 간 건 주어진 현실적인 여건 때문이었어요. 그 후로도 아주 여유 있지는 않았는데, 그래도 꾸역꾸역 맞춰지고 해서 이 일을 그만두고 더 많은 돈을 벌러 가야 하는 상황이 아직은 벌어지지 않았어요. 삶을 유지할 정도는 맞춰지니까 감사하죠.
첫 직장 면접 볼 때, 꿈이 뭐냐고 물어보시더라고요. 제가 모든 사람이 인간답게 사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그랬더니 사장이 막 웃더라고요. 진지하게 말했는데 왜 웃지? 싶었어요. 뭐, 20대 중반 청년이 와서 허무맹랑한 얘기를 하니까 그랬겠죠. 저는 그 생각이 지금도 여전한 것 같아요. 어느 일을 하든. 정 못 견디겠으면 하던 일을 그만두고 그런 과정들이.
단체로 이직하고는 재미있었어요. 지적장애인 당사자들이 지하철 유실물을 받아서 세탁해서 판매하고 그런 일이었어요. 직업 재활이라고 하지만, 재활용품을 판매한다는 인식이 그 당시에는 낯선 시기여서 거의 노점을 하다시피 했어요. 겨울에 여기가(손) 항상 부르트는 거예요. 추운 날에도 계속 뭔가 작업을 하니까. 그 경험 덕에 저는 지금 뭐 여차하면 노점을 하는 것도 두렵지 않아요.
학생운동에서 군 생활로, 금융업, 제조업에서 복지서비스로. 벌써 두어 번 큰 전환을 겪으셨는데요, 이게 아주 거스를 수 없는 변화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드나듦에 가까운 것 같아요. 사실 IMF 때 회사가 없어지는 걸 겪은 게, 언제든 이 일을 못 할 수 있고 없어질 수 있다는 생각, 내가 자의로 그만둘 수도 있고. 그런 걸 각인시킨 것 같아요.
좋은 의미로는 적응력이 생긴 걸까요?
네. 여러 가지 경험을 하다보니 내가 무엇을 하고 사는지는 중요하지 않더라고요. 어떤 지향을 갖고 사느냐가 중요하지. 혹시 지금 나눔과나눔 활동하다가 정말 돈이 필요해서 돈 많이 주는 데로 갈 수밖에 없다고 하더라도 그게 중요하지 않은 거 같아요. 내 삶의 지향점과 가치가 어디를 향하고 있느냐가 훨씬 중요하다고 판단하게 되었어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시민단체 활동하고 싶다는 사람 있으면 가능하면 큰 기업에서 먼저 일을 해보면 어떠냐고 해요. 거긴 시스템이 있으니까. 물론 사람이 시스템에 들어가서 하나의 부품처럼 움직이는 건 문제일 수 있지만, 조직이라는 건 하나의 시스템으로 움직이는 맥락이 있는 거라.
비영리의 전문성과 체계
‘시스템이 있는' 큰 기업에서 일해 보면 좋겠다는 건 구체적으로 무슨 뜻일까? 물론 비영리에도 시스템은 있다. 이사회, 위원회, 직위 직급 등 조직 내 의사결정 및 권한, 책임에 관한 사항은 관료 조직이나 기업의 체계를 이식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그 시스템은 형식에만 그친다거나, 구체적인 실무에 들어가면 매뉴얼이나 작업 도구 없이 오직 담당자의 재량으로 해결해야 하는 일도 많다. 기업에서 일을 시작한 박진옥이 비영리를 접했을 때 가장 피부로 와 닿는 문제는 바로 이 지점이었을 것이다.
사회복지 영역으로 왔더니, 당시 직원분들이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따기 위해 대학원에 가더라구요. 그러면 내가 이 영역에서 잘 할 수 있는 게 뭘까 고민하다가 사회복지사들이 힘들어하는 영역 중 하나인 회계파트의 전문가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저는 경제학을 공부했고, 일반 기업에서도 일했으니까요. 그리고 2년 정도 직업센터에서 활동했는데,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는 원래 법과 제도화를 연구하고 활동하던 곳이라 제가 활동하던 직업센터 활동에서 제가 장기적인 비전을 찾기는 어려웠어요. 그래서 앞서 고민했던 회계파트 전문가가 되기 위해 그만두기 전에 AICPA라고, 미국공인회계사 자격증을 땄어요. 그리고는 음악 채널 방송사 회계팀장으로 이직했는데 이번에는 6개월 만에 회사가 망했어요. (웃음) 그때 사랑의열매에서 회계팀 직원을 뽑는대서 지원했는데 실제로는 기획 파트로 뽑혀서 이직했죠.
또 한번 영리-비영리 전환이 있었네요.
그렇죠. 사랑의열매에 갔더니, 그 큰 조직에 시스템이 없더라고요. 전국 조직 예산 정리를 엑셀로 하고 있었는데 그 안에 함수가 하나도 없었어요. 회계업무 프로그램이야 있었지만, 예산 대비 결산이 안 되고 있었던 거예요. 기업들이 ERP라고 전사적 자원관리를 한참 하던 때고 비영리단체는 아직 그렇게 관리를 하던 때는 아니었어요. 그래서 전산시스템 만드는 작업을 했어요. 지금은 전국적으로 시스템화한 걸로 알아요.
한동안 재밌게 열심히 일했어요. 그러다가, 제가 비영리에 왔던 이유가 있었잖아요. 오너의 전횡, 비민주적인 것. 그런데 여기도 별반 다르지 않더라고요. 예산, 채용, 구체적인 현실을 들여다보니까 심각하더라고요. 결정적으로는 입찰 문제가 있었어요. 기업이 적절하게 운영되는지 지켜봐야 하는 감사팀에서 오히려 나서서 입찰에 개입해 자격 없는 업체를 선정한 거예요. 나름 항의했지만 소용없었고, 그거 보면서 더 있으면 안 되겠다 싶었어요.
그때가 장애인차별금지법이 통과되면서 인권위에서 장애인차별문제 조사관을 뽑는다는 소식이 들렸어요. 그걸 염두에 두고 이직 준비를 했어요. 그런데... 정권이 바뀌면서 인권위가 엄청 흔들리는 상황에서 채용 작업도 중단되어 버렸어요. 직장은 이미 그만두었고. 30대 후반이었는데 그때가 정말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어요. 그래도 법으로 만든 조직인데 설마 하고 기다리면서 1년 동안 놀았어요.
그 괴로운 기다림의 시기에, 박진옥은 어학 연수차 잠시 머문 필리핀에서 이후 삶의 ‘2막’을 열 새로운 영역을 만난다. 이왕 기다리는 김에 현지 인권단체를 경험해보자고 앰네스티 필리핀 지부에서 석 달 동안 무급 인턴으로 활동한 것이다. 세계인권선언 60주년이라 캠페인이 풍부했다. 활동하면서 인권 공부도 하고, 프라이드 마치도 거기서 처음 접했다. 그리고 귀국을 준비하던 때에 앰네스티 한국지부의 채용공고를 발견했다. 직무도 마침 회계팀이라, 반가운 마음에 자신감을 갖고 지원했다.
* 필리핀에서 앰네스티 캠페인 중 (사진: 박진옥)
그게 앰네스티 활동의 시작이었군요?
아, 그런데 제가 떨어졌어요. 안 그래도 1년 동안 힘들게 지낸 터라 되게 좌절했죠. 처음으로 편두통이 왔어요. 이 길이 아닌가 보다 하고 다시 영리 쪽을 알아보는데 전화가 왔어요. 회계팀 말고 캠페인팀을 해보지 않겠냐고. 저는 관련 업무를 해본 적도 없고 그래서 망설이다가 다시 인터뷰하고 일을 시작하게 되었어요. 서로가 모험이었죠.
당시 앰네스티가 변화의 시기를 겪고 있었어요. 제가 일 시작한 그때 바로 용산참사, 쌍용차, 그런 사건들이 이어지면서 그 전해에 벌어진 광우병소고기반대 촛불집회 포함해서, 처음으로 내가 역사의 현장에 서 있구나, 하는 걸 느꼈어요. 이 상황을 어떻게 대응해야 하지? 앰네스티라는 국제단체가 어떤 영향을 미쳐야 하지? 완전 새로운 인권이라는 가치관으로 세상을 보고 판단해야 하는 상황이었어요. 그래서 정신없이 지냈죠. 사실 중간에는 아, 이거 아닌거 같다며 그만두고 싶은 생각도 있었지만, 동료들이 되게 만족해하고 조직에 제가 가진 역량이 도움이 된다고 하니까, 만약 내가 더이상 필요 없고 나도 도움이 안 되면 그때는 과감하게 나가자 하고 있었어요.
5년 동안 캠페인도 많이 했고, 정말 많이 배웠어요. 특히 언론 대응. 그때 만나 같이 활동한 팀원들이 참 좋았어요. 지금도 그런 사람들을 만나진 못할 것 같아요. 능력 있는 팀원들에게 많이 배웠어요. 십 년씩 나이 차이가 나도 그 사람의 마인드, 일하는 방식 그런 건 배울 게 많았죠. 기본 역량들이 있어서 다 알아서 하고, 저는 사실 조직관리만 했던 거 같아요. 누가 하고 싶다고 하면 장을 만들어주는 그런 역할.
만약 원하던 대로 인권위 들어가셨으면 아마 그때가 인생 최악의 시기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네요.
네, 아마 그랬을 거예요.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지금 돌아보면, 때로 소망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는 게 축복일 수 있겠다 싶어요. 제가 성격이 좀 급한데, 그런 경험을 하면서 좀 천천히 가려고 노력하게 되었어요.
돌아보면 앰네스티 있었던 기간이 제게는 삶의 지평을 넓혔던 것 같아요. 이전에는 사회복지 분야에 있었다 보니 글로벌한 이슈를 접할 일이 별로 없었는데, 전 세계적인 캠페인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그런 걸 알게 된 게 정말 좋은 기회였고, 무엇보다 인권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토대가 생겼어요. 지금 나눔과나눔이 존재할 수 있는 것도 앰네스티의 영향이 커요. 거기서 캠페인이며 여러 활동 했던 것들이 그대로 여기 와서 적용되니까요.
그런 곳을 그만두신 건 좀 아쉬울 수도 있겠는데요.
계속 있었어도 재밌게 했었을 거 같긴 한데, 5년 정도 지날 무렵에 조직 내부에 또 변화가 필요했고, 제가 그만두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꼭 한곳에 오래 머무는 것만이 좋은 것 같지 않아요. 저는 그전에도 동료 중 누군가 떠난다면 잘 가라고 하지 붙잡지 않았었거든요. 우리 활동에 우호적인 사람들이 많이 퍼져나가서 다른 영역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연계하면 좋지 않을까 생각해서요.
이직을 많이 하는 건, 비영리 영역에서 새로운 사람이 성장하기 어려운 환경 때문이라는 지적도 있는데요.
저는 시스템은 일반 기업에서 배웠고, 사랑의열매에서는 공식 문서 작성법을 배웠어요. 그 덕에 지금도 공무원들과 일하는 게 어렵지 않아요. 캠페인을 했던 앰네스티 경험은 언론에 어떻게 대응하고, 의제를 어떻게 제기하고 제도화할지를 알게 해 줬어요. 그런 게 다 밑거름이 되었다고 생각해요. 앞에 그런 시기가 없었으면 지금 이 활동을 이렇게 하고 있지 못했을 거예요.
지속해나가는 힘
이전에 활동하시던 곳들에 비하면 지금은 뭐가 크게 다른가요?
크고 유명한 단체들이긴 했죠. 사람들이 들으면 알고, 모르면 왠지 알아야 할 것 같은 곳들이었죠. 활동가도 많으니까 뭔가 기획하고 상의하면 실무가 쫙 진행되고 그랬는데, 여기서는 처음부터 만들어나가야 했어요. 처음 2년은 상근자도 사무실도 없었거든요. 그러다 보니 아무래도 흐지부지되는 면이 있었어요. 협조가 필요한 공무원들도 우리가 믿을만한 단체인지 확신이 없고.
그러다 제가 상근을 하기로 했고, 3년은 혼자 일했어요. 필요한 일이라는 당위가 커서 우선 활동하면서 세팅을 해나갔어요. 말했듯이 인권 강의로 활동비를 벌고, 죽음이나 장례에 관해서도 잘 알던 게 아니라 자료도 모으고 그러면서. 그러다 무연고사, 고독사 문제를 다루게 되고 활동가도 더 들어오고 그러면서 점차 나아졌어요.
심리적 트라우마 같은 문제는 없나요? 구조 활동을 많이 하는 동물권 운동에서는 그런 이야기도 나와요.
이야기를 많이 나눠요. 수시로. 그러지 않으면 쌓일 테니까. 활동가들이 장례 지원 다녀오면 어땠는지 서로 이야기하고 특히 감정을 나누려고 해요. 의례로서 형식은 거의 똑같은데 거기서 느끼는 감정이 매번 다르거든요. 사람을 새로 만나는 느낌이랄까, 전혀 모르는 사람의 삶을 잠시 접하고 오는 느낌이 들어요. 장례라는 게 떠나보낸다고 하지만 그 자리가 만나는 자리이기도 하고, 여러 생각을 할 수 있는 한 시간이예요. 혼자 있을 때는 그게 어려웠는데, 다른 단체 사무실을 같이 쓰면서는 거기 분들과 같이 이야기하고 이해받으면서 힘을 얻기도 했어요.
그리고 저희는 입관을 직접 하지 않아요. 아마 그걸 했으면 충격이 상당했을 거예요. 입관은 시에서 계약을 맺은 업체에서 하는데, 그분들도 되게 힘들다고들 하세요. 주로 저희가 지원하는 분들은 상태가 안 좋으시거든요. 이렇게 험한 시신은 처음이라며, 만나면 사진을 보여주시는데 그걸 보면 힘들죠. 매번 그랬다면 정말 쉽지 않았을 거예요. 이번 주말에 장례 치른 분은 생전 사진에 수염이 있으신데 입관 장면은 수염이 하얗게 되어 있었어요. 이분은 마지막에 자기를 돌보지 못해서 그런 것일까? 그 현장에 갔던 활동가가 돌아와서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 앰네스티 무기거래통제 캠페인 (사진: 박진옥)
그렇게 지속해나가는 힘을 얻는 거군요.
앰네스티 활동하면서 또 하나 느낀 건, 변화의 흐름이란 게 정말 중요하구나, 하는 거예요. 조직은 변화의 흐름을 만들어가는 곳이더라고요. 예를 들어 무기거래통제 캠페인은 벌써 30년 해 온 거거든요. 한 캠페인을 10년 지속하기도 어려운데 말이에요. 30년 걸려서 결국 국제연합에서 조약을 만들었어요. 현장에서 총기, 무기가 얼마나 인권을 침해하는지 확인한 인권운동가들이 이걸 어떻게 변화시킬까 연구하고 고민한 끝에 무기거래통제라는 방향을 만들어 냈고, 그 의제를 가지고 전 세계적 캠페인을 한 다음에 조약이라는 형태가 필요하다고 요구하고 그 조약을 만드는 작업을 한 거죠. 거기서 끝난 게 아니예요. 조약이 실효성이 있으려면 꾸준히 변화 시켜 나가야 하는 과정이 있죠. 그 사이에 사람은 많이 바뀌었지만, 이 의제와 캠페인은 변하지 않은 거예요. 아, 이런 거구나. 사회를 변화시킨다는게 한순간에 되지 않잖아요. 50년, 100년 후에 변화되는 모습이 나타나는 것이라, 그걸 어떻게 만들까 생각해야죠.
나눔과나눔은 우리 일상의 하나인 죽음이라는 걸 어떻게 바라보고 인식하고 변화시켜나갈까 고민해요. 지금은 작은 단체니까 일단 계속 왱왱거리는 거죠, 모기처럼. 이 활동하면서 좋았던 거는, 저희가 말하던 걸 사회가 똑같이 말할 때, 처음 꺼낼 땐 낯설던 것들이 언어가 될 때 굉장히 감동적이었어요. 그렇게 길게 보고 계속해나가는 거죠.
크게 변화의 흐름을 만드는데는 굉장히 긴 시간이 필요한데, 거기에 너무 압도되기보다는 지금 할 수 있는 걸 차근차근 쌓아나가야 한다는 말씀인가요?
기록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책 만들고 기록 남기고. 장례 지원하는 봉사단체가 몇 군데 있는데 기록하는 곳이 없어요. 기록하고, 그들의 삶이 어땠는지, 죽음이 어땠는지 이야기하고 이 과정을 통해서 우리 이 시대 살았던 사람들이 어떤 모습인지를 누군가는 증언해줘야 하는데. 당사자는 돌아가셨으니 아무 말 못 하고, 혹시 가족이 있더라도 가족들도 재정적으로 부담이 올까 봐 시신을 포기하고 아무런 말을 못 하는 거죠.
그러면 공공기관은 움직일 이유가 없고.
그렇죠. 최근 몇 차례 고독사 사건이 생기면서 화두가 되지 않았으면 사회가 별로 관심 갖지 않았을 거예요. 사회가 어떤 임계점에 도달하면 그런 현상이 수면으로 나오는데, 한국은 IMF 이후 20년이 지나서 무연고 사망자나 고독사가 사회적 이슈가 된 거예요. 그동안 없었던 건 아니었지만, 노숙자가 급증하고 가족 해체도 급격했던 그때 40대이던 분들이 이제 60대가 되었어요.
처음에는 단순히 기초생활수급자나 사정이 어려운 분들의 장례로 접근했는데, 그것만이 아니었어요. 애도 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지금 그동안 활동하면서 접한 사례 연구를 하고 있어요. 장애인을 뭉뚱그려 하나로 퉁쳐버리곤 하지만 실은 엄청 다양한 장애의 정도가 있는 것처럼, 무연고 사망자라고 해도 그 안에 참 많은 삶의 모습이 있어요. 이를테면 이 사람은 가족이 있는데 왜 무연고자가 되었을까? 하는. 그리고 장례식에 참석한 지인들이나, 자원봉사자들의 삶의 이야기도 다양하기 때문에 이런 걸 살펴보다 보면 우리 사회가 무연고 사망자를 더 잘 바라볼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생각해요.
* 2017년 홈리스 추모제 (사진: 나눔과나눔)
1인 가구가 늘고, 가족의 형태도 다양해지면서 이런 사안에 관심이 늘고 있는 듯해요.
네, 그래서 오히려 젊은 세대가 더 관심이 많기도 해요. 물론 기성세대도 관심을 갖기는 하지만 기성세대는 무연고사망자 문제를 삶을 잘 못 살아서 그랬다는 인식, 그러니까 '타인의 고통'쯤으로 생각한다면, 젊은 층은 본인들의 미래라고 생각해서인지 훨씬 더 관심이 많더라고요.
해야할 일에 비해 일손이 달린다는 말씀을 하셨는데요, 사실 단체가 어디든 항상 사람이 부족하잖아요. 일은 항상 많고. 그래도 지금은 세 명이 일하고 있으니 혼자 하실때에 비해서는 커진 거 아닌가요?
그렇죠. 그래도 더 커져야 해요. 완전 새로운 모델을 사회에 제시하려면, 제도화되기까지 모델을 만들 필요가 있으니까요. 그렇다고 무한정 조직을 키우려는 건 아니에요. 이 단체는 자기소멸적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미션이 해결되는 걸 원하지 확대를 원하는 건 아니거든요.
다행히도, 저는 일을 벌이는 스타일인데 그걸 제어해주는 다른 활동가가 계세요. 어떤 일을 하려다 보면 이 선택밖에 할 수 없다는 당위가 생기잖아요. 그럴 때 왜 꼭 그걸 해야해? 그런 질문을 받는 거예요. 그러면 바로 멈추는 거죠.
활동 자체를 가지고 밖에서 의논할 사람들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 관계망이 있으면 좋겠지만 아직은 없어요. 친구들은 있지만 좀 다른 세상을 사니까 모임을 잘 안 가게 되기는 해요. 조직에서는 사무국 외에 이사회가 그런 역할을 하죠. 밖이라면, 마포돌봄네트워크라는 연대체가 있어서 돌봄을 주제로 같이 논의하기도 해요. 공부하면서는 호스피스 쪽 하는 분들이 계셔서 교류하는데, 아무래도 조금 결이 다르긴 해요. 죽음이라는 공통된 주제를 다루지만 임종을 지키는 것과 그 이후는.
사실 만나자고 하면 만날 수 있을 거예요. 그런데 만나자는 이야기를 꺼내기 쉽지 않아요. 각자 자기 활동이 너무 바쁜 거죠. 연대하겠다는 마음을 갖지 않으면 누군가의 헌신으로 돌아가기 마련이니까. 시간을 내줘야 하는데, 아무래도 조금 여유가 필요할 것 같아요.
지속해나간다는 것, 그것은 시작한 사람들의 유산을 그대로 답습하는 게 아니다. 시작할 때의 비전을 재확인하면서 주어진 상황과 조건에 따라 섬세하게 조율하고, 때로는 과감하게 바꾸어나가야 할 수도 있다. 그것은 생각보다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그리고 사람에게 용기를 주는 존재는 역시 다른 사람이다.
영리/비영리, 상근/자원활동, 직위나 나이가 주는 상하 관계, 이런 경계를 뛰어넘기란 어쩌면 자기 내면에 드리운 불안과 혼란의 선을 넘는 데 비하면 훨씬 더 쉬운 일인지도 모른다. 동료든 가족이든 이웃이든, 내게 그 선을 뛰어넘을 용기를 심어줄 사람을 많이 만날 수 있다면, 그동안 박진옥이 그래온 것처럼 우리도 현실의 어떤 경계든 유연하게 넘나들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이 바로 지금 우리에게 더 많은 만남과 대화가 필요한 이유가 아닐까?
부디, 머지않아 그의 일상에 여유가 돌아오기를. 그래서 더 많은 만남과 대화를 열어나갈 수 있게 되기를.
_ 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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