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활동가인터뷰] 활동의 순도에서 그림이라는 언어의 순도로, 직면하며 밀어나가는 사람. 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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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노래 한 곡이 떠올랐다. 전날 우영과 나눈 이야기를 갈무리하는 동안 마음속에 어떤 풍경이 드리웠는데 그 모습을 구체적으로 그려보지 못하고 잠든 터였다. 잠도 깰 겸, 노래를 틀어놓고 베개 속에 머리를 다시 파묻었다. 밴드 ‘브로콜리너마저'가 2010년에 발표한 <졸업>이라는 노래다.

 

“난 어느 곳에도 없는 나의 자리를 찾으려 / 헤매었지만 갈 곳이 없고 / 우리들은 팔려 가는 서로를 바라보며 / 서글픈 작별의 인사들을 나누네 / 이 미친 세상에 어디에 있더라도 행복해야 해 / 넌 행복해야 해 행복해야 해 / 이 미친 세상에 어디에 있더라도 잊지 않을게 / 잊지 않을게 널 잊지 않을게”

브로콜리너마저 <졸업> 뮤직비디오 https://youtu.be/0jVziDGnNrA

오랜만에 들어도 역시, 고개를 돌릴 새도 없이 그대로 현실에 이마를 부딪치게 하는 가사다. 발매 당시 KBS로부터 방송 부적격 판정을 받은 전력이 있는 이 노래는 막막한 현실을 절감하는 청년 세대를 중심으로 공감을 얻으며 생명력을 이어오다가 7년 후인 2016년 11월, 100만여 명이 거리에 나와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외쳤던 서울 광화문 촛불 집회 장면을 담은 뮤직비디오로 재탄생해 크게 주목받았다. 누군가는 이 노래를 그저 구직이 힘들고 사회생활이 두려운 젊은이들의 넋두리로 치부했겠지만, 뒤늦게 나온 뮤직비디오는 개인의 절망과 시대적 문제가 얼마나 뜨겁게 얽혀있는지를 귀와 눈으로 절절히 새기게 했다.

  

청년, 비영리에 진입하다

 

대학에서 광고홍보학을 전공한 우영은 그 노래, <졸업>이 발매되기 두어 해 앞서 졸업을 맞이했다. 그를 기다리는 건 역시 막막하고 불안한 거절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우영은 한 가지 다른 가능성을 발견했다.

 

“구직하면서 (이 사회에) 진입이 안 된다는, 누군가 밀어내는 듯한 경험을 했어요. 알랭 드 보통의 [불안](이레, 2005)나 우석훈, 박권일의 [88만원 세대](레디앙, 2007) 같은 책을 읽으면서 생각한 것도 있었고, 원래 기획하는 일을 하고 싶었으니까 그렇다면 NGO 쪽도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단서를 가지고 비영리 영역의 일자리를 찾아보게 되었어요.”

 

그렇게 찾은 일터는 다양한 국가의 청년들이 모여 유럽 등지에서 자원활동하며 경험을 쌓을 수 있도록 지원하는 단체였다. 대학생들 사이에 유럽 여행가는 수단으로 붐이 일었던 때라 단체의 한국 지부가 생겼고, 우영은 실무 간사로 일을 시작했다.

 

“비영리는 낯설지만 ‘국제'라는 단어가 붙은, 영어로 이메일 주고받고 외국 출장도 가고 그런 일을 한다는데 매력을 느꼈어요. 게다가 세계시민교육을 한다는 가치도 있으니까. 스스로 사명감 같은 것도 크게 품고 일했어요. 3년 동안.”

 

3년 후 무슨 일이 생긴 건가요?

"처음 비영리를 접할 때 홈페이지나 홍보물에 적힌 표현을 그대로 믿고 무리한 일이 있어도 의미부여 하면서 일을 하는 경우가 많잖아요. 저는 다행히 좋은 팀장을 만나서 배워 나갈 수 있었지만, 찾아오는 사람들의 욕구가 그렇다 보니 (국제적인 활동에 대한 선망 같은 것) 아무래도 판 자체가 왜곡되는 부분도 있었고, 내부에서 문제를 제기하다가 결국에는 약간 정리당하듯이 그만두게 되었어요.”

 

첫 직장생활이자 비영리와의 첫 만남은 그렇게 끝이 났다. 하지만 불행한 경험으로만 남은 시간도 아니었다. 그 시기에 배운 것이 기반이 되어서 실무자로 사는데 도움받았고 지금까지 그 영향이 남아있으니까. 

단체에서 만난 동료 셋이서 사회적기업을 꾸려볼까 구상도 해봤지만, 당시로선 녹록지 않았다. 각자 다른 일자리를 찾아 흩어졌고, 우영은 <함께 일하는 재단>에서 1년 계약직으로 다시 일을 시작했다.

 

“건물에 들어갔는데 1층에 노조가 있더라고요. 그 전 단체에서 문제 제기할 때 개인적으로 대표랑 부딪치는 식으로 했고, 결과가 안 좋았다 보니 마음을 내려놓게 되었거든요. 여긴 안정적인 대신 그런 걸 기대하기 더 어려울 거로 생각하고 왔는데 오히려 진보적으로 행동하는 사람들이 있구나 싶어서 반가웠어요.”

 

바로 그 노조에 참가하면서 격변이 생겼잖아요?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되었죠. 입사할 때 1년 계약직이라도 구두로는 연장이 될 것처럼 들었는데, 딱 1년 후에 계약 만료로 그냥 끝나버렸죠. 국제사업팀에서 추진하는 일이 나름의 가치가 있었으니까 아마 노조 안 했으면 더 다닐 수 있었을 거예요. 하필 제가 들어간 그해가 노조도 왕성하게 활동하던 때라, 딱 걸린거죠. (웃음)”

 

적당히 피할 생각은 없었나요? 

“몸을 사리려면 사릴 수도 있었겠지만, 근본적으로 단체에서 실무자로 하는 일에 허무함을 느끼기도 해서 굳이 피할 마음은 없었어요.”

 

함께일하는재단은 1997년 외환위기 때 벌어진 금 모으기 운동 성금으로 설립한 실업극복국민운동위원회로 출발한 공익재단이다. 재단 노조는 2012년 2월 일자리 문제 해결을 주요 목적으로 하는 재단이 정작 내부적으로는 불안정 고용과 투명하지 않은 운영방식 등 문제를 안고 있음을 지적하며 활동을 시작해 비정규직 노동자 해고에 반대하는 1인 시위, 천막농성 등을 벌였다. 당시 농성 현장에 참여한 우영은 문득 그 풍경을 그림으로 그려보자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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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영, <명랑촛불문화제> (2013)

 

“현장에서 본 걸 그림으로 그려서 노조 카톡방에 올렸는데 호응이 좋더라고요. 주위에서 장난 반으로 박 화백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왜 그림이었어요?

“그 무렵 참여연대 아카데미에서 드로잉 수업을 들었거든요. 자기 계발을 위해서, 세속적인 목적이었죠. 그 아카데미가 저에게는 실무자 사교육장 같은 곳이었어요. 어쩌다 현장에 가면 제가 너무 모르는 거예요. 학교 다닐 때 광고밖에 몰랐으니까. 비영리 영역에서 하는 얘기 정도는 알아들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인문학 수업 들으러 꽤 다녔어요. 시민으로서 배워야 할 것들도 그때 많이 배웠고. 그러던 중에 드로잉 수업이 좋다는 얘기를 몇 번 들어서 수강한 거였어요. 

드로잉을 배우고 나서 여행 가서 그린다거나 하는 예는 있어도 어떤 회화적인 자극이 없으면 계속해나가는 경우가 드물어요. 제 경우는 움직이는 현장에서 보고 그리고, 혼자 보는 게 아니라 당사자에게 보여주고 반응을 확인하고 그러다 보니 경험이 이어졌어요. 나중에는 농성장에서 이런저런 설치 미술도 해보게 되었고.”

 

그림과 만나다

 

단체에서 실무자로 하는 일에 허무함을 느끼셨다고 했는데요. 그 허무함의 정체는 뭐였을까요?

“재단에서 국제 행사를 열면 해외에서 초대받아 온 활동가들을 만나곤 했어요. 제가 해외로 출장을 가도 그렇고. 그 사람들이 진짜 활동을 하고 있고 나는 그냥 실무자인 것 같은 느낌이 계속 있었어요. 우리말로 활동가라고 할 때랑 영어로 액티비스트Activist라고 할 때 어감이 좀 다른데요, 특히 동남아 지역은 현장의 문제가 선명해서 액션으로나 비즈니스 모델을 접목하는 면으로나 좋은 사례가 많더라고요. 이왕 하려면 저런 게 순도가 더 높은 활동 같은데, 나는 어찌 되든 행사가 잘 진행되도록 보조하는 역할에 그치니까 충족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어요. 설사 계약이 연장되더라도 비전을 갖고 스스로 해나갈 동기가 딱히 없었죠. 엄두는 안 나지만 나도 저쪽으로 가봐야 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도 막연히 했고.”

 

대화 중에 ‘세속적'이라는 단어를 몇 번 쓰신 것도 그런 의미인가요?

“아, 그랬나요? 이 영역이 딱 분리된 것도 아니지만, 정말로 진지하게 활동하는 분들에 비해서는 제가 스스로 활동가라고 말할 수 있을까 싶어요. 

첫 직장 그만두고 제주 강정마을 현장에 간 적이 있어요. 행정대집행 들어와서 인간 띠로 막고 그런 소식을 보고 다음 날 내려갔죠. 막상 가보니까 제가 할 게 없는 거예요. 현장에는 예술가, 활동가, 또는 종교적 신념을 갖고 경찰 펜스를 넘는 분도 계시고 그런데 저는 그냥 숙소에 머물고 밥만 축내다가 저녁 촛불문화제에서 촛불 드는 것 말고는 역할이 없더라고요. 열흘 정도 있다가 돌아왔어요. 

그때에 비하면 재단 노조에서는 색다른 경험을 한 거죠, 제가 할 역할이 있었어요. 그림으로. 게다가 예전 직장에서는 제대로 목소리도 못 내고 나왔다면 여기서는 노조에서 같이 목소리라도 한번 내 보고 나가자, 그렇게 생각을 정리했어요. 바로 그 시점에 그림이 제 삶에 들어왔고. 일로는 충족하지 못하는 욕구를 이걸로 채워볼 수 있지 않을까 싶었어요.”

 

그렇게 그림이 우영의 삶에 들어왔다. 얼마 후에는 그렇게 그린 우영의 그림이 내 마음에도 들어왔다. 2014년 겨울 어느 날, 무심결에 페이스북에 접속한 나는 우영이 올린 그림 한 장을 보았다. 잿빛 배경과 대조되는 해맑은 색채와 입체적인 구성에 먼저 이끌렸지만, 들여다보면 볼수록 이상한 감정이 차올랐다. 체한 것도 분통이 터지는 것도 아닌 묵직한 어떤 감정의 덩어리가 생겨나서는 한동안 떠나지 않고 가슴을 짓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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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영, <다큐 일러스트 - 서울, 도시위에서> (2014)

 

다큐멘터리 <경한아저씨, 안녕>(2013, 명랑마주꾼)은 2013년 서울 영등포 쪽방에서 홀로 죽은 지 며칠 만에 발견된 한 남자, 고 김경한의 장례를 치르러 나선 청년들의 발길을 뒤따르며 고립사의 현실을 조명하는 작품이다. 우영은 다큐멘터리의 마지막 장면에 넣으려고 이 그림을 그렸다.

고인과 아무 인연도 없고 만난 적도 없으면서 상주를 맡고 장례의 전 과정을 함께한 그 청년들은 명랑마주꾼이라는 집단으로, 영구임대주택 한 곳을 중심으로 마을공동체 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이들이 애초에 그 아파트 단지를 주목한 이유도 고립사에 있었다. 2012년, 한 단지에서 겨우 100일 사이에 무려 여섯 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실이 알려지면서 소외계층의 고립사 문제에 사회적 관심이 쏠렸다. 관심은 곧 사그라들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은 곧 명랑마주꾼이라는 이름을 달고 아파트 주위를 맴돌기 시작했다. 고독하게 죽어간 사람들을 위해 추모제를 열고, 음악회를 열고, 돗자리를 깔고 앉아 뜨개질을 하는가 하면, 간단한 수리를 해준다며 가내 방문도 했다.

거기 우영이 있었다. 두 번째 직장에서 해고된 후, 우영은 더 이상 구직을 하지 않고 활동과 삶을 이어나가는 실험을 시작했다. 그동안 알고 지낸 사람들이 알음알음 짧게 연결해주는 일로 어느 정도 수입을 얻으며 그림에 좀 더 집중하는 시간을 보냈다. 서울시의 청년 혁신 활동가로 지원해 활동비를 받으며 또래 청년들과 여러가지 문화예술활동을 벌여볼 수도 있었다. 명랑마주꾼이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가난한 이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도시 위에서 둥둥 떠다녔고 밀려났다. 도시 위에 있지만, 몸 뉘일 방 한 칸, 죽어서 안치될 서랍 한 칸 허락되지 않았다.” (우영 그림집 [아직 해가 머무는 시간], 2017, 27쪽)

그렇게 도시 위에서 둥둥 떠다니는 존재에 관해 생각하던 우영은 샤갈의 <도시 위에서>를 떠올렸고, 작품의 구도를 차용하되 컨테이너로 꾸며진 쪽방 풍경과 실제 현장에 걸려있던 ‘비정상의 정상화' 현수막도 재현하며 세부를 변형해나갔다. 두려움과 희망이 교차하는 두 커플이 떠 있던 자리에는 평온한지 쓸쓸한지 모를 표정을 한 경한아저씨를 그려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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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샤갈, <도시 위에서> (1918)

 

명랑마주꾼 활동을 하는 동안에도, 이후 동료들이 제각기 다른 실험으로 접어드는 와중에도 우영은 계속해서 그림을 그려나갔다. 크로키도 하고, 존경하는 작가를 모사하기도 하고, 타국으로 그림 여행도 다녔다. 매일 스쳐 지나는 도시의 고단한 노동자들을, 골목의 노인들을, 가라앉는 세월호의 아픈 풍경을, 손수 만들어 먹은 음식을, 마음에 남은 풍경을 그렸다. 서너 해가 지난 후, 그렇게 그린 그림을 모으고 글을 써서 독립출판물 [아직, 해가 저무는 시간]이라는 그림집으로 갈무리해냈다. 그리고는 더 깊이 그림에 빠져들었다.

 

“저 책을 낼 때까지는 내가 이런 사회적인 뭔가를 읽었으니 내 그림도 봐줘, 이랬던 거 같아요. 이러이러한 문제나 사회적 장면, 인간적인 장면을 내가 목도했으니 봐달라고요. 그림 자체의 완결성보다는 메시지에 기대는 느낌? 지금은 그림 자체의 완결성으로 더 잘 진입이 되었으면 좋겠고, 그게 된 다음에 메시지가 읽혔으면 해요. 그럴 때 사람이 감동을 느낀다고 생각하는데, 아무래도 배운 가닥으로 그림보다 글을 길게 쓰는 그런 갈증이 있었어요.”


이제는 그림 자체에 완전히 집중하기로 한 건가요?

“미술이라는 게 인류가 굉장히 오래 다져온 영역이다 보니까 캐면 캘수록 깊은 거예요. 이쯤 하면 되었어, 라는 게 없는 영역이랄까. 예전에 영어 배울 때처럼, 새로운 시각적 언어를 마주하고 있는 기분이 들어요. 그래서 더 막연하고 어렵기도 하지만, 뭔가를 더 알아갈 여지가 많고 그게 축이 되어서 다른 것을 해석할 수 있는 기준이 되니까. 그런 걸 깊이 알아가는 기쁨이 있어요. 

그래서 미대 진학을 준비했어요. 그림집을 만들 때 제작비를 크라우드 펀딩으로 마련했는데요, 그게 말하자면 무명가수가 이 앨범이 안되면 나는 접는다, 끝, 하는 그런 마음으로 한 작업이었어요. 미숙하게 혼자 그려온 시간을 정리하고 좀 더 실력을 쌓고 싶었어요.”


책의 말미에 우영은 미대 입시에 도전하면서 얻은 느낌과 경험을 기록해두었다. 자기만의 표현을 죽이는 입시와 전공 미술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알고 있었지만, 미술학원에 다녀보고, 오랜만에 수험장이라는 곳에 돌아가 앉아보고, 실기 시험을 직접 응해보며 천천히 생각을 정돈할 수 있었고, 그런 다음 미련 없이 마음을 거두었다.

 

“이후 힐스라는, 어느 정도 진보적인 생각을 하는 작가 공동체를 만났어요. 그림책 출판을 하거나 미대에서 가르치거나 그런 분들이 미대 교육의 한계가 아쉬워서 대안적인 미술 활동 양성기관을 만들자고 모인 집단이에요. 

거기는 정말 철저히. 제가 유일한 거예요. 가르치는 분들은 진보적 가치관이 강하고 학교의 지향도 그러한데, 학생들은 꼭 그렇지는 않았거든요. 그 점이 제게 잘 맞아떨어졌어요. 저는 진보적 지향이 있지만 그림 실력이 농익지 않은 상태니까. 거기서는 아무리 사회적인 메시지를 그림에 담아가도 읽어줄 사람이 없어요. 그림이 좋냐 후지냐 이걸로만 보죠. 혹독하긴 했는데, 바라던 대로 일러스트레이션을 그림언어로서 더 잘 정제해내는 훈련의 시간이 되었어요.”

 

노동, 작업, 행위 - 인간의 조건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은 좋지만, 아무래도 먹고 사는 문제가 걸림돌이 된다고들 하잖아요. 프리랜서, 독립활동가, 그리고 그림. 이렇게 해서 생활을 꾸려가는 게 생각만큼 쉽지 않았을 듯해요.

“맞아요. 단체나 기관 활동을 그만두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쭉 밀고 나가는 게 정말 쉽지 않아서, 그런 사례를 보면 저도 응원하게 돼요.

처음 (단체 실무자) 활동을 접으며 혼자 되었을 때는 주변에 접속할 데가 전혀 없어서 다시 조직으로 돌아가는 것밖에 선택지가 없었어요. 공백의 시기, 다른 걸 탐색하려는 시기에 아무것도 잡히지 않으면 내가 효용 없는 인간처럼 느껴져요. 그러면 결국 내가 익숙한, 돈을 벌 수 있는 문법으로 진입할 수밖에 없잖아요. 이후에 다시 일을 그만두었을 때, 그리고 명랑마주꾼 활동을 마무리하고 개인이 되었을 때는 달랐어요. 그동안 누적된 경험 네트워크에서 짧은 일들이 주어졌거든요. 그래도 내가 전문성을 갖고 짧은 시간을 투여해서 돈을 벌 수 있는 일, 퍼실리테이션이나 교육 같은 형태로 기회가 온 덕분에 버틸 수 있었어요.

문제는, 그런 일은 돌아서면 너무 허무한 거예요. 회의 진행 같은 일로 요청을 받으면 처음에는 연락 자체가 고마웠어요. 나를 섭외해주다니! 하는. 하지만 거듭할수록 일 자체가 주는 만족감은 덜했어요. 에너지를 확 들여서 일했는데 그 회의 결과가 공무원에게 단체 민원 넣는 정도로 끝난다든가 하면, 이렇게 공 들여 할 필요 있는 일인가 의문이 들었어요. 그 시기를 버티게 해 주는 좋은 일감이긴 했지만 분절감이 주는 한계가 있었죠.”

 

한편으로는 앞서 ‘순도 높은 활동'이라고 하신, 그쪽으로 가는 방법도 있잖아요. 

“운동권 세대가 있고, 글로 배우면서 시민사회를 접한 사람이 있다면, 저는 후자에 속해요. 그런 시대를 경험한 분들을 현장에서 눈으로 보면 제가 교육할 때 쓰는 연대라든지 호혜라든지 그런 말이 그분들만큼 강도를 갖기 어렵다는 걸 느꼈어요.

현장에서 활동하는 활동가들은 문제를 더 선명하게 드러낼 수 있는 언어를 쌓아갈 수 있죠. 그런 맥락을 켜켜이 쌓아서 활동을 언어화해내는 능력이 탁월하다고 생각해요. 문제는 그 맥락에서 분리된, 일상을 사는 시민들에게는 그런 언어가 어느 순간 당위로만 다가가는 거예요. 맥락이 다 함축되어버려서.

그런 측면에서는 디자인, 카피라이팅 같은, 제가 광고 홍보를 공부하면서 익힌 것이 효용이 있더라고요. 당위로는 넘어설 수 없는 틀에서 이미지의 역할이 있다고 봐요. 비영리로 오고 나서는 대학 때 공모전도 하고 이것저것 열심히 하면서 들인 시간과 노력이 굉장히 쓸데없었다는, 허비했다는 생각 많이 했는데 어찌 보면 요즘 한 사이클 돌아서 다시 이미지가 중요하게 보여요. 전방위적으로 이미지의 압박을 받는 시대지만, 비영리에서 이미지, 미디어를 다루는 데는 영리의 세련됨을 추종하는 게 아닌 이쪽에 맞는 방식이 있을 텐데... 과거로 치면 의제를 판화로 대중에게 전달하던 민중미술 같은 것? 시각적인 문화로 접근할 수 있는 그런 디자인의 방향은 뭘까 찾아보고 싶어졌어요. 그래서 실무자를 위한 디자인 교육을 하고, 매뉴얼 같은 것도 만들어보려고 해요.”

 

활동의 순도를 높이듯, 활동을 담아내는 이미지라는 언어의 순도를 높이는 작업이라고 볼 수도 있겠네요

“순도 높은 활동을 향한 명랑마주꾼을 하면서, 중앙에서 뿌리는 자원이 현장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양쪽을 본 것 같아요. 지난 몇 년 동안 서울 청년허브 등 여러 기관이 생기고 혁신활동가 같은 자원이 풀리니까 저처럼 일의 형태로 진입하는 청년 실무자들이 보였어요. 자기 삶에서 발견한 문제의식을 쭉 밀고 나가는 게 아니라 어떤 자원, 조건을 보고 진입하는 경우죠. 그러면 계약이 끝나거나 지원이 끊기면 여기도 별다를 게 없다는 냉소를 품고 돌아서는 모습을 종종 봤어요. 그러면 선택의 갈림길에 서게 돼요. 중앙의 자원에 호명될 수 있도록, 이상적인 말 자체를 너무 덜컥 믿지 않으려 주의하면서 사업 마인드로 캐릭터를 잘 만들어 보여주는 쪽으로 처세를 할 건가, 약간 배고파도 애초에 마음이 끌렸던 언어의 순도를 높여나갈 것인가 하는. 전자를 택하면 반복적이고 소진되는 활동을 하면서 지원 주체의 중력에 끌려가기 쉽고, 후자를 택하면 자원 없이 뭔가 기획을 해서 1년을 바라보기도 막막한 상황에 놓이죠. 저와 친구들은 후자를 택했어요. 그리고 저는 그림을 더 그려야겠다고 생각했고요.

그런데 사실, 그림을 혼자 그리면 말이 막 하고 싶어져요. 그래서 나와서 사람들과 어울리고 대화하다 보면 또 그림에 집중하고 싶어지기도 하고. 그 사이사이에 돈을 벌기 위한 짧은 일들을 하면서 겪는 분절감도 계속되었죠.

다행스러운 건, 지인 몇 명과 함께 책 읽는 모임이 있었어요. 거기서 한 공부가 제가 느끼던 분절감과 혼란 같은 걸 넘어서게 해 줬어요. 그때 지그문트 바우만의 [액체근대]를 읽었고, 자원과 현장의 관계, 모순 그런 고민을 많이 정리할 수 있었어요. 한나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도 읽었는데, 그 책은 반년 동안 세 번은 읽은 듯해요.”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에서 노동, 작업, 행위 세 가지가 인간에게 꼭 필요한 ‘활동적 삶’의 요소라고 말한다. 반복되고 때로 의미 없다고 치부되기도 하지만 생활을 영위하는 데 필수적인 노동을 하는 한편, 의미를 찾고 가치를 부여하는 창조적 작업에 몰두하고, 그렇게 삶에서 쌓은 맥락을 언어로 바꾸어 공론의 장에서 타인과 대화하는 행위를 하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거다.

 

“세 가지 다 필요하구나, 수긍하게 되었어요. 활동이 어려웠던 건 그런 게 너무 교차하고 섞이다 보니, 노동이기도 하고 의미를 투사해야 한다는 당위도 있고 그래서 일이냐 활동이냐 같은 논쟁이 계속된 듯해요. 그게 딱 설명이 된 거죠. 그다음부터는 밖에서 일 요청이 오면 선뜻 받아서 하고, 그 돈으로 물감 사야지 생각하면서 돌아오고, 그렇게 3년을 버틸 수 있었어요. 꼭 나가서 깃발을 들지 않더라도 거실에 모여서 서로 다른 언어를 가진 사람과 대화하는 것도 행위라고 생각 돼서 독서 모임이나 대화하는 자리에는 가능한 시간을 내서 가고 그랬어요.”

 

처음 인터뷰 요청했을 때 활동가로서 인터뷰하는 게 맞을지 모르겠다고 하셨잖아요? 이런 맥락에서 보면 조금 다르게 접근할 수도 있겠는데요? 

“활동에도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으니까요. 꼭 최전방에 있어야만 활동가라고 할 수는 없겠죠. 여전히 그런 분들이 계시는데 그게 제 역할은 아니라는 정도로 정리했어요. 함께 못해서 미안하다는 생각은 가끔 하지만, 그 대신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을 하려고 해요. 이를테면 문화연대 설치미술팀은 정말 놀라워요. 그 팀은 모든 현장에 다 있어요. 인간이 저렇게 동선이 나올수가 있나 싶을 정도로. 저는 그렇게는 못하지만 약간씩 후원을 하거나 그래요.

최근에 아버지가 사고를 당하고 입원 치료를 계속 받고 계시는데, 그 상황을 겪으면서 최전방의 현장이라는 것도 있지만 일상에서 우리가 돌파해야 하는 문제도 많다는 걸 생각하게 되었어요. 아서 프랭크의 [아픈 몸을 살다]를 굉장히 반갑게 읽었고, 그 책을 번역한 옥희살롱에서 연 수업에도 참여했어요. 거기도 또 후원하게 되었죠. 명랑마주꾼 하면서도 느꼈듯, 복지라고 하는 것이 얼추 있겠지 생각했던 것과 현실은 정말 다르더라고요. 돌봄 노동이나 임대주택을 둘러싼 첨예한 이슈들이 있고. 앞으로는 거대 악에 대항하는 운동만이 아니라 일상의 첨예한 이슈들에 관해 좀 더 세밀한 대화를 나눌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 언어를 잘 찾아내고 사회적 공감대를 확대해나갈 수 있는 대화의 장을 제시하는 활동이 필요해요. 그런 걸 잘 해내는 사람도 활동가라고 할 수 있겠지요. 만약 그럴 때 그림이 필요하다고 하면 나도 숟가락 하나 얹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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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영, <회색으로 떠난 사람들> (2018)

 

그림 자체의 실력을 키우기는 하되, 역시 메시지를 담은 그림을 지향해나가는 건가요?

“앞서 말한 힐스 공동체가 제게 좋은 훈련의 기회를 주고 있어요. 그림이 멀리 떨어진 게 아니라 시민의 삶 속에 존재해야 한다든지 그런 얘길 들을 때 뭔지 알아듣겠고. 어렴풋이 원하던 삶이랑도 윤곽이 비슷해서 이렇게 가면 좋겠다고 거기서 확인을 했던 거 같아요. 어디 화방에서 계속 그림을 그렸다거나 미대에 진학했다면, 굉장히 고군분투하고 설치 미술 이것저것 하고 그러면서 왜 아무도 날 알아주지 않는가 고뇌했을지도 모르죠.

지금 그림책 작업을 하나 하고 있어요. 여태 이야기한 작가로서의 시행착오를 에세이로 담은 책도 준비 중이에요. 내적 갈등이 없진 않아요. 긴 호흡의 뭔가를 했을 때 그걸 확인해본 적은 아직 없으니까, 작업하면서도 ‘아, 이거 언제 끝나지’하고. 게다가 지금까지는 내가 좀 덜 쓰고 1인분 살림만 잘 하면 버틸 수 있었는데 아버지 사고 난 후로 이제 1인분만으로는 곤란해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때때로 초조해져요. 이걸로 내 주변의 다른 사람들도 함께 존엄하게 살 수 있는 경제성이 담보될까? 이 작업의 성과가, 잘 안되면 어떡하지? 다른 길로 가기에는 너무 멀리 와 버렸는데, 하는.”

 

돌아갈 길은 이제 없는 건가요?

“가끔 다시 단체나 기관의 실무자로 와달라는 요청을 받긴 해요. 아무도 찾지 않는 상태로 혼자 그림 그릴 때에 비하면 그래도 돌아갈 곳이 있다는 생각에 심리적으로 여지가 생겨요. 고마운데, 역시 거절하게 돼요. 다시 돌아가면 중간 매니저 역할을 해야 할 텐데, 저는 주어진 일을 개인기로 어떻게 해낼 수는 있는데 규모 있는 일을 만들어내고 관리하는 능력이 탁월한 사람은 따로 있더라고요. 저는 그렇게 잘할 자신은 없어요.

무엇보다 그림으로 좀 더 밀고 나가보고 싶어요. 그림에는 끝이 딱히 없을 것 같아서, 다른 일로 돌아가도 1년도 안 되어서 ‘다시 그려야겠어!’ 라는 마음이 들 게 뻔하니까. 그래서 아직은 아닌 것 같아요.

다행히 이제 그림으로 의뢰가 들어오기 시작했어요. 되게 유명한 건 아니지만 이렇게 정기적으로 그림을 그려서 외부에 보낼 수 있는 정도죠. 그렇게 그리면서 익힌 지식을 디자인 수업으로 담는다든지 해서 순환시킬 수도 있어요.”

 


우영의 이야기는 어쩌면, 저성장 시대를 헤쳐나가는 한 청년의 생존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쩌면, 당위의 언어에서 삶의 촘촘한 맥락으로 시선을 옮겨가는 지금 시대에 꼭 필요한 활동가의 또 다른 모습일지도 모른다. 아니, 사실 나는 애초에 그렇다고 주장하고 싶어서 우영을 만났고, 대화를 나눈 뒤에 더 확신하게 되었다.

역사의 소용돌이를 넘나들며, 그저 잘 살아야만 하겠다는 의지와 번개 같은 개발의 속도에 취해 달려오던 한국 사회는 세기말에 이르러 급격한 브레이크를 맞이했다. 겨우 십년 사이에 성장은 둔화하고, 무수한 일자리가 사라지고, 가계 저축은 고스란히 부채로 전환했다. 그동안 공부만 열심히 하면, 좋은 대학을 가면, 남보다 더 많은 ‘스펙’을 쌓으면 장래가 보장되리라는 주문에 기대 자라난 청년들에게 이제 이 사회가 처음 내놓는 답은 거절, 온통 거절 뿐이다. 애초에 꿈이란 없고, 헤어지며 건넬 말은 그저 행복하라는, 잊지 않겠다는 단 두 마디뿐이다.

그러고 보니 아침에 왜 하필 ‘그 노래’가 떠올랐는지 알겠다. 초여름 저녁을 차분히 채웠던 우영과의 대화는 시작부터 끝까지, ‘이 미친 세상'에서 부유하는 우리가 찾아낼 또 다른 가치가 아직 존재하는지, 있다면 그게 대체 무엇인지에 관한 질문과 성찰을 넘나들었다. 꿈이 없으니 오히려 현실에 발을 딛고 선다. 아름다운 말의 배반에 냉소하지만, 그렇기에 진짜 언어를 찾아 헤맨다. 아무 의미도 없을 듯 그저 툭 던지는 행복하라는, 잊지 않겠다는 그 말이 2016년 11월의 광화문같은, 특별한 어느 순간에 저마다 어깨를 나란히 하고 연대할 이유가 된다.

 

“활동가이건 아니건, 일단은 이런 삶이면 좋다고 느껴요. 꼭 활동가가 아니라도 좋은 시민일 수는 있잖아요. 좋은 작가이자 좋은 시민으로, 딱 그만큼의 삶을 살아가면 좋겠어요. 내가 쌓아온 언어로 공론의 장에서 누군가와 대화할 수 있고 그걸 순환시킬 수 있다면 바랄 게 더 없겠다, 그게 지금의 바람이에요.”

 

기회가 된다면 어깨 너머로 슬쩍 들여다보고 싶다. 세상에 외치고 싶은 메시지를 조심스레 붙들어, 순도 높은 그림의 언어로 담아내려고 혼자 스케치북 앞에 앉아서 그리고 또 그리는 우영의 나무들을.

 

“나무가 바람에 흔들린다.
이 문장을 표현해내려면,
얼마나 더 그려봐야 알 수 있을까.”

우영 그림집, [아직, 해가 저무는 시간] 193쪽.


_ 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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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영, 월간 [옥이네] 표지 일러스트,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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