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활동가인터뷰] 사람, 마을, 자연을 품고 이으며 지키는 환경운동가. 제주생태관광협회 고제량

“6월 제주사람들은 이 콩잎에 자리 (자리돔의 제주 방언) 젓갈을 얹어 쌈을 먹어요. 지금 이때만 먹을 수 있는 제주음식이지요. (...) 제주 사람들은 된장국 보글보글 끓일 시간이 없어요. 밥하고 생된장 한 숟가락 퍼서 담아가서 찬물에 밥, 생된장 풀어 저어서 밭에 있는 오이 하나 뚝 잘라서 같이 먹는 거예요. 여름 되면 몸에서 이 된장냉국이 당겨요.”


최불암의 <한국인의 밥상>도 허영만의 <백반기행>이 아니다. 척박한 제주의 환경과 역사, 음식, 문화 이야기가 도란도란 둘러앉은 이을락 밥상위에서 펼쳐진다. 코로나19로 제주의 관광이 그야말로 바닥을 치던 6월, 제주생태관광협회 고제량 대표를 만나기 위해 제주행 비행기를 탔다. 직접 빚은 이북식 만두와 제주식 밥상을 차려 놓고 우리를 반겨주는 그가 있어 제주는 낯선 여행지가 아니었다.


‘아! 자연은 아버지처럼 하는 거로구나.’


현장에서 20년 동안 환경운동가로, 생태여행안내자로 활동하고 계신데요, 어떻게 이 길을 걷게 되었나요? 

왜 이 일을 하게 됐지? 이 일을 시작하고 지금까지 끌고 온 거는 아마도 전공 때문이다, 뭐 때문이다가 아니라 내가 살고 있는 이곳 제주도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제주도에 내가 살면서 무엇이 문제고 그 문제를 풀기위해 ‘나’라는 한 개인이 뭘 할 수 있을까? 이런 고민 속에서 여기까지 왔고, 환경학을 선택한 건 분명 관심이 있었던 건 맞아요. 

그보다 어렸을 때 내가 자연에 미안한 게 있어요. 몇 살인지도 모르는 기억인데 꽃삽을 가지고 노는 그 아주 어렸을 때죠. 우리 집이 과수원이었으니까 흙무더기가 있었던 것 같아요. 어른들은 일하고 나는 흙무더기에 꽃삽을 가지고 노는데 구멍이 나 있더라고요, 그 구멍이 궁금하니까 꽃삽으로 그 구멍을 잡고 헤치고 헤치고 하는데 흙이 계속 들어가는 거예요, 구멍으로. 나는 그 속에 누가 있는지를 보고 싶은데 ‘누구’는 안 나오고 흙이 계속 들어가는 거죠. 흙이 들어가는 걸 오빠가 보더니 “야, 그 안에 있는 아이 숨 막혀 죽겠다!” 하면서 지나가 버리는 거예요, 자기는. 

그때부터 들어가는 흙 때문에 입구가 막혔고 그 아이는 숨 막혀 죽었다는 게 나한테 뇌리에 박힌 거죠. 그 미안함과 죄책감이 나의 트라우마로만 작용한 게 아니라 생명을 존중하며 살려고 노력하게 해준 것 같아요. 어렸을 때 마당이 굉장히 넓고 그랬어요. 아버지가 내 삶의 환경을, 정원 꾸미시는 거 되게 좋아하셨던 것 같아요. 과일나무, 꽃나무를 엄청 좋아해서 마당에 잔뜩 심었고 학교 갈 때면 꽃을 신문지 같은 거에 둘둘 말아서 꽃병에 꽂고 친구들이랑 같이 보라고 하고  붕어도 가지고 가서 어항에 넣고 “같이 봐라.” 아버지가 그랬었거든요. 

‘아! 자연은 아버지처럼 하는 거로구나.’ 이런 생각과 그 미안함이 겹쳐서 환경이라는 걸 내 삶의 길로 택하고 관심 가졌던 건 맞아요.


환경을 지키기 위해 관광을 이용하는 환경운동가


진로 고민 없이 관심 있었던 환경을 전공하고 자연스럽게 환경운동가의 길을 택했다는 건 엄청 행운이네요.  

환경 관련 학과를 가고 싶었는데 제주대학교에는 환경공학과 밖에 없어서 공학을 배우고 싶지는 않았으나 ‘환경’이 들어가니까 알아서 배워지겠지 하고 갔는데 정말 달랐어요. 대학에서는 수질 처리, 폐기물 처리, 대기 처리를 배웠어요. 전공은 수질과 대기, 둘로 나눠지는 거였어요. 저는 대기가 전공이에요, 기상학이 부전공이고. 공부는 했는데 뭔가 처리만 가르쳐줘요, 처리. 다 이미 다 훼손된 걸 처리 하는 거예요. 그래서 대학 다니기 진짜 싫었어요. (웃음)

대학 다니기는 싫었는데 환경이라는 나의 테마, 그러니까 좋은 것을 잘 보전하고 그걸 계속 봐야 하고 이것에 대해서는 늘 기본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거여서 대학 졸업하자마자 환경운동은 시작했고, 직장은 적응이 힘들어서 3년 만에 그만두었죠. 

그다음부터 여행에서 생태관광, 역사관광 이런 것들을 가져갔는데 내가 관광을 하고 싶어서 한 게 아니고. 그러니까 나한테 관광만을 물으면 안 돼요. 사람들이 나한테 관광을 자꾸 묻고, 정치하는 사람들도 관광 쪽에 와서 이야기해 달라고 해요.

나는 제주도라는 이 섬의 환경을 보전하려고 내 역할이 뭘까 찾다 보니 관광이 환경을 훼손하고 있더라. 그러면 관광을 바꿔야지. 그래서 도구로 쓴 거예요, 도구. 생태관광은 나의 도구죠. 환경을 지키기 위해 여행을 이용하는 거예요.


생태관광을 이용해 환경을 보전하는 활동가, 환경을 지키기 위해 사업을 이용하는 파타고니아의 미션과 같은 맥락이군요.

나의 목표는 항상 보전에 있는데 사람들은 생태관광 전문가로 보거든요. 정말 누군가가 내 삶을 전반적으로 본다면 ‘아, 저 사람이 환경 보전이라는 게 목표로구나. 그리고 잘 보전된 자연이 사람을 가장 행복하게하기 때문에 그 길을 가는구나.’로 봐줬으면 좋겠어요. 

생태관광, 이 산업이 물론 잘 되어야겠죠. 잘 되게 하려고 하고요. 그렇지만 산업이 잘 되는 게 나의 목표는 아니에요. 사람들이 ‘자연이 잘 보전되니까 내 삶도 조금 윤택해지네.’라는 걸 알게 하고,  이 윤택한 삶을 보장받은 사람이 다시 또 자연을 보전하고, 잘 보전되면 또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고. 이 선순환을 하고 싶은 거거든요. 


공감하지만 쉽지 않은 길이예요. 생태관광이 자연 보전만으로 되는 것도 아니고.

나는 생태관광에 자연만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역사, 문화 그다음에 사람, 예술까지도 같이 포함된다고 봐요. 그래서 제주도에 관해서는 공부한답시고 한때는 제주도의 역사, 장소, 문화적인 장소를 아는 사람, 그 장소를 아는 사람이 둘째가라면 서럽다고 할 만큼 구석구석 많이 다니면서 공부도 많이 했거든요. 

새로운 관광, 해치지 않고도 될 수 있는 관광을 실험하고 싶었고 그래서 2000년 초반에 생태관광을 선택해서 해나가는 와중에 의지 있는 몇 명만 해서는 안 된다는 걸 알았어요. 이거는 후원군이 어마어마하게 필요하고 또 굉장히 많은 사람이 해야 바뀔 수 있다는 걸 알고 그래서 마을로 들어갔죠. 


우리 드디어 마을로 들어가는 건가요?  선흘마을에서 9년, 이야기를 듣는 우리는 굉장히 감동적인 스토리지만 그 과정이 아름답지만은 않았겠죠?

마을로 들어간 이유는 지역 주민들 스스로 보전한 자연을 관광이라는 요소로 활용하는 것을 지역이 많이 했으면 좋겠는 거예요. 그런데 아무리 그런 말을 해도 “그게 가능이나 해? 너 너무 이상적이다.” 부정적이니까‘하면 되는데? 매일 하고 있으면 되는데?’라는 생각으로 들어간 거죠. 들어가서 10년 동안 매일 한 거죠, 아이들하고.

지금까지 하고 있고 앞으로도 할 건데 그분들이 스스로 자연에 대한 가치를 알게 하고…… ‘알게 하고’는 건방진 소리고 이미 알고 있어. 이미 다 알고 있고 그게 도움 된다는 것도 알고 있고, 그 길로 가야 하는 것도 주민들은 다 알고 있어요. 그런데 이 자본의 사회가 그분들을 눈멀게 하고 귀먹게 해서 혼란스럽게 만들어서 다른 데 집중하게 하는 것 같아요, 


제주토박이로 오랫동안 이 일을 하신 고제량 대표님도 개발과 자본의 사회에서는 어려움이 있군요. 오히려 제주사람이어서 더 힘들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어요. 지역에서 만난 청년활동가는 자기 말은 안 들으면서 외지에서 온 사람들을 더 인정해줘서 속상해하더라고요.  

'동네 새 각시 안 알아준다.'라는 말 알아요? 원래 제주말로는 “동네 심방 안 알아준다.”인데 심방이라는 게 뭐냐 하면 무당이라고 하면 잘 알려나…… 그러니까 무속신앙을 행하는 사람. 제주도는 신앙이 워낙 많잖아요. 신이 많아서 동네마다 다 당이 있어요.


당오름할 때 그 당인가요?

그렇죠. 당오름도 당이 있어서 당오름이잖아요. 당에는 메인 심방이라고 그 무속을 행하는 그 사람이 있어요 심방이라고 하거든요, 제주도는. 

이 마을 사람들이 자기네 동네에 당이 있고, 자기네 당에 용한 메인 심방이 있는데 집에 큰 굿을 할 때는 저 먼 데 가서 유명한 사람을 데려온다는 거예요. 이 동네 심방을 안 알아주는 거예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가까이 있는 사람은 왠지 떨어져 보이는 거죠. 그 사람 사정을 가장 잘 알고, 잘 빌어줄 수 있는 건 그 동네 심방일 수 있는데 욕심에서 안 그런 거죠.

그게 모든 전반에 걸쳐서 나타나는 거죠. 예를 들어서 활동가인 나도 물론 사실은 아닌데(웃음) 주변에 나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뭐라고 하냐면 “고제량 씨는 환경부 가면 알아주는데 제주도에서는 안 알아준다.”고 해요. 


아! 어떤 의미인지 알겠어요. 육지에서 멀리 제주에 있는 고제량 대표님을 찾는 분들이 많지요. 이 분야에서 전문가 의견이 필요할 때 제일 먼저 떠 올리는 이름이기도 하고요. 반면에 제주에선 제주를 너무 잘 아시니까 좀 불편한 분들도 있겠지요. 

중앙에서 토론회나 이런저런 사업을 할 때는 저를 부르죠. 주민 참여 분야에 대해서는 내가 워낙 한 10년 동안 해왔기 때문에. 그런데 지역에서는 제가 뭘 하는지 잘 모르고 제가 보전하자고 하면 개발도 안 되니 불편하고 거부하죠.

그런데 저하고 길이 맞는 친환경적인 마을이 있다면 주민들하고 대화하고 방향성 찾고 환경부나 관련 부처 대화도 가능하고 사업도 연결할 수 있지요. 저는 그런 능력이 저 스스로 있다고 보거든요. 단박에 먹어주지는 않지, 잘하는 사람이라는 걸 믿어주면 나중에는 연결되잖아요.

그래서 저는 잘해놓고 사람들이 와서 “그렇게 하려면 어떻게 합니까?” 할 때 “그러면 이렇게 해 봅시다.” 제안을 하고 같이 길을 가는 걸 되게 좋아하는데 지역 사람들이 그걸 잘 모르죠. 오히려 밖에서 “저 사람 정말 그런 일 잘하는 사람이야.” 하면 이제 지역 내에서는 “아, 그런 거야?” 하면서 일이 시작되기도 해요.

도시재생이건 환경운동이건 생태관광이건 크게 판을 벌이는 것보다 진득하니 10년, 20년 가는 게 중요해요. 그런 건 저처럼 지역 사람이 더 잘 가는 거죠.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 “이거 너 욕심 채우는 일이냐? 공공의 선인 거 맞아?”


모든 일이 그렇지만 오랫동안 마을로 들어가서 일하다 보면 오해를 받거나 상처 받는 일도 많을 것 같아요. 특히 환경은 늘 개발과 보전 사이에서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히기도 하고요. 어떻게 극복하세요? 

제 성향이 아주 강단 있거나 내공이 깊지는 못해요. 내공이 깊지 못하고 그런 말에 굉장히 슬퍼하고 화내고 이 안에서만 엄청 들끓어요. 들끓는데 제가 돈 욕심은 없는데 명예욕이 있는 사람이거든요. 명예욕 있는 게 나쁜 거 아니더라고, 살아보니까. 이 들끓는 모든 것을 금방 나타내는 게 너무나 부끄럽고 창피해, 스스로. 

그거를 표출하는 것이 나의 바닥을 보이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금방 표출 안 하고 어떻게 하냐 하면 이 순간이 지나서 결과가 나타나면 저분도 이 방향을 맞다고 볼 거라는 확신을 갖죠.


확신과 기다림, 내공 없이 가능한가요?

왜냐하면 몇 가지 제가 자신을 점검하는 질문들이 있어요. 가장 첫 번째가 ‘너 욕심 부리는 거 맞아, 안 맞아?’ 이거를 하거든요. 

‘이게 고제량을 너를 위한 일이냐? 너 욕심 채우는 일이냐?’ 그 다음에 ‘공공적인 일 맞아? 공공의 선인 거 맞아?’ 

이런 것들을 스스로 묻는데 가끔 내가 욕심 부리는 게 가미될 때는 가차 없이 버리고 공공의 선인 것, ‘아무리 생각해도 내 욕심은 아닌 것 같은데?’ 하는 확신이 생기면 밀고 나가요. 그 확신에 믿어주는 몇 명만 있으면 마을에서 함께하는 게 가능하더라고요. 

그렇게 가는 거예요. 몇 명 뜻 맞는 사람 모여서 나를 믿어주는 몇 명만 있으면 되거든요, 이 방향이 맞다 해 주면 그분들하고 같이 “이거 맞아? 틀려?” 해보면서 “그 방향은 맞는데…… 가능할까요?”하면 “그럼 맞으면 가능해.” 해서 쭉 가면 어느 순간 그게 결과가 나타나고 좋은 효과가 나타나요. 그러면 주변에 사람들이 오더라고요.  


동지이자 믿는 구석, 참여의 꽃은 역시 마을 주민! 사람이네요. 그런데 주민들과 의기투합했다고 건 잘 되는 건 아니잖아요. 누군가는 큰 바윗돌에 비유하기도 하는데 행정과 문제가 생기면 어떻게 하세요?

넘기 힘든 바윗돌 일 때가 있어요. 대신 잘 맞는 사람이 담당자로 올 때도 있고요. 나의 삶과 이 운동의 길은 굉장히 길잖아요. 그러니까 잘 가면 100년 갈 수 있잖아요. 그 담당자는 끽해 봐야 2년, 짧으면 1년, 6개월 만에 가는 사람도 있는데 그분들 때문에 내가 이 긴 길을 포기할 수 없다는 건 굉장히 단단하게 있어요. 그리고 정 안 맞을 때는 일 안 하고 좀 가만히 엎드려 있어요. 기본만 하고 좀 가만히 있다가 뜻이 맞을 때는 좀 빨리 속도를 내서 가고. 사실 이거를 행정을 대하는 나는 최고의 노하우라고 지금 생각하고 있어요. 


그게 바로 내공인데요! 

아니, 내공은 담대해야 하는데 담대하지는 않아. 명예욕에 그냥 감사하고 있을 뿐이에요. (웃음) 그리고 주민이 딱 뒤에 포진하고 있으면 어려운 거 없어요. 주민이 힘을 빡 받을 때는 행정이 좀 맞지 않아도 속도를 내 줄 때가 있어요. 10년이라는 세월, 내가 지역에 있을 수 있는 건 “너 일 잘하고 있지?”하면서 주민들이 뒤에 포진해 주고 있어서예요. 


주민들이 큰 배경이지만 늘 같은 방향을 보는 건 않잖아요. 주민들 간 의견이 다를 수도 있고. 

그렇죠, “고제량이 제시하는 길로 가는 게 맞아. 그래서 우리는 환경 보전의 길로 가자.” 하는 사람도 있지만 한쪽에서는 누군가가 소외되거든요. 지역 공동체 일이라는 건 다 만족이 나올 수는 없어. 언젠가는 당해요. 그런데 자기가 소외된 사람이거나 이해관계에 엇갈린 사람이 있으면 이 사람은 그게 맞지 않다고 해버려요. 

98명이 옳다고 하고 2명이 아니라고 하면 “그래도 우리 마을이 전체적으로 가는데 이 정도는 감수할 수 있어.” 해서 조용히 있거나 아니면 “야, 그거 좋기는 한데 이거를 감수하기는 좀 너무하지 않냐? 해결하고 가자.” 이렇게 푸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해관계자에서 자신의 욕심이 내재한 사람은 목소리 크게 덤비더라고요. 


행정 담당자 입장에선 주민 갈등, 민원이 발생하면 곤란하죠. 해결과 중재를 위해 나서기도 쉽지 않을테고.  

물론 법적인 것들을 따지기는 하시더라고. 그런데 주민들이 하는 민원은 법적인 거 따질 만한 큰 건이 아닐 때가 많아요. 초반에 옳고 그름을 이야기해 주면 아무 문제가 아닐 수 있는 걸 그렇지 못하고 막 그게 부풀려서 문제를 만드는 경우를 몇 번 겪었죠. 10년 동안 가만히 공동체를 보니까 그렇더라고요. 


중간 중간 삶의 문제를 해결하면서 여럿이, 오래 가는 길은 못 이긴다


요즘은 어떠세요?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는 말이 헛말이 아니었다는 것을 요즘은 실감하고 있고, 옳고 그름으로 우리가 그것만을 믿고 가기란 불가능하다. 그래서 뭔가 그걸 대적할 힘이 필요하다고 생각을 하는데 그게 다수 패러다임·문화, 이렇게 표현할 수 있겠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이 사회의 환경에 대한 인식, 공공의 선, 타인에 대한 배려, 평화 이런 것들이 자리 잡으려면 빨리 세를 늘려서 문화가 되어버리게끔 그렇게 하면 되는 것 같아요. 공동체에서도 그렇게 되더라고요. 다수가 그 패러다임으로 가면 소수는 잠시 이길지 모르지만 오래가지는 않아요. 여럿이 가는 길, 오래 가는 길을 못 이길 거다.


문화가 된다면 한사람씩 붙잡고 설득하지 않아도 되고, 누군가의 선동에 휘둘리지도 않겠지요. 혁신이 아니라 앞으로 우리가 가야할 변화의 모습일 것 같기도 해요.

저는 가능하다고 믿거든요. 어려움은 있겠지만 핵심을 버리지 않는다면. 패배할 때도 있지만 계속 넓혀나가다 보면 문화가 될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하는 거고요.  

제가 한때 미생물 요법으로 감귤농사를 지었거든요, 미생물 요법이라는 게 간단히 이야기하면 미생물에는 호기성과 혐기성, 우리한테 좋은 효과를 내는 미생물과 나쁜 효과를 내는 미생물이 있거든요. 호기성 미생물의 힘을 키워서 이 농작물이 좋은 효과를 내야 하는 거예요, 호기성 미생물 힘을 길러주는 방법이 뭐냐 하면 수를 계속 늘려주는 거죠. 미생물을 3가지로 나누면 호기성, 혐기성 이 가운데는 얼추얼추 미생물들이 분명히 있어요. 인간하고 똑같잖아요.

호기성 미생물을 계속 늘리면서 미생물을 물에 타서 나무에다가 물을 주는 거예요. 그러면 처음에는 호기성, 혐기성 수가 같더라도 호기성 미생물 수를 늘려주고 커 가면 얼추얼추 미생물은 호기성에 붙어요. 힘 있는 데 미생물이 붙는다, 이게 사람으로 치면 패러다임이라고 믿어요.


혐기성이 호기성으로 변하지는 않나요?

그건 절대 아니에요. 영원히 이 성격을 가지고 있어요. 나쁜 짓 안하고 가만히 있어주면 고마운 거야. 700 ~ 900명을 넘나드는 지역 공동체 마을에 들어가서 보니까 그게 딱 맞더라고요. 어르신들 얘기를 들어보니까 역사적으로도 계속 그랬대요.

그런데 아무리 좋은 취지라 해도 이 좋은 부류가 대적해 줄 수 있는 여건이 되어야 해요. 그다음에 이분들을 이끌고 가는 가치들이 너무나 막연하지 말아야 한다는 거죠. 중간 중간 피부로 나타날 수 있는 것들이 있어야 하는데 그게 생태관광이었어요. 환경 보전하자고 하면 지역 주민들이 운동가입니까? 안 하지. 환경보전 좋은 거니까 가자고 하면 “네가 대통령이야?”그러는데 중간 중간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작업을 하나씩 하는 거죠.

우리는 그거를 간과하지 말아야 해요. 좋은 선의로 덤볐다고 하더라도 또 그게 선의로 결과가 다 나타나지도 않고. 그래서 그냥 옳다고 믿는 것에 대해서 삶으로 생활로 길게 가자, 길게 가자. 욕은 늘 먹는다. 욕 안 먹는다는 거는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욕은 늘 어디서든 나온다. 안 나오는 게 더 웃기지 않아요? 이 다양한 사회에서.

지금 잠시 엎드려 있더라도 항상 전화위복은 있었고 나는 또 다른 역할이 있고 있을 거라고 봐요. 그리 슬프지만은 않은 게 지역에서 한 10년 했기 때문에 지역이 또 받쳐주는 게 있어요.


이 마을에 이 마을 청년들이 돌아왔으면 좋겠다


제주청년들 중에 환경운동을 하는 활동가들이 많은가요?

네, 일단 우리 김유진 국장이 8년째 하고 있지요. 20대부터 와서. 집에서 여기까지 버스 3번 갈아타고 걸어 다니면서 시작했거든요. 


고제량 대표의 영향을 받아서 여기로 온 건가요?

아니요, 제주도가 고향인데 일본도 나가서 생활했었고 서울에서도 생활했었는데 자꾸 돌아오고 싶었대요. 가장 하고 싶은 게 이 일이래요. 

물론 여기서 일어나는 일이 계속 좋기만 하겠어요? 힘든 일도 있으나 잘 견뎌내고 있는 거고, 김유진 국장 후배 중에 이 일만 하면 가슴이 뛴다고 지금 열심히 해나가는 청년이 있어요. 자연생태, 역사, 문화 이런 것들이 따로 뗄 수가 없는 거잖아요. 그래서 그런 것들을 뭉뚱그려서 관심 있게 활동하는 친구들도 있고요. 내 목표는 ‘그 마을에, 그 마을 청년이 돌아왔으면 좋겠다’인 거죠. 그런데 들어왔다가 또 나가더라고요. 


나가죠? 왜 나갈까요?

20대는 뛰는 피야, 뛰는 피. 뛰는 피예요. 아이들이 막 뛰듯이. 그래도 30대, 40대쯤은 돼야 그런 거 이길 내공도 생기고.  또 제주도는 청년들이 돌아오면 돌아온 거거든요. 그런데 망해서 들어왔다고 생각해요, 어른들이. 


맞아요. 그래서 고향 대신 연고가 없는 지역을 찾아가는 청년들도 있어요. 우리는 고향을 금의환향하는 곳으로 생각하죠. 

그런데 금의환향하기 쉽지 않지. 그리고 금이 많을 때는 안 돌아오고 싶잖아요. 제가 마을을 지키는 이유 중에 하나도, 내가 지키지는 않지, 마을 분들이 지키는 거지만. 거기 사는 게 가장 행복하다는 걸 자연이라는 소재로 알게 해주고 싶은 거거든요. 

그 지역이 살아나야 하는 이유도 제주도를 떠났던 친구가 자본과 도시에 망해서 오더라도 비빌 언덕이 있어야 하잖아요. 그게 마을인 거죠. 그래서 줄기차게 마을로 가서 내 청춘을 바치는 거죠. 우리의 마지막 보루가 마을이죠. 


활동가가 행복하려면 운동이 바뀌어야 한다


활동가의 길과 대표님의 삶은 함께 해 왔지만 요즘은 조금 달라졌어요. 청년 활동가들은 내가 행복하지 않은데 이 활동이 무슨 의미가 있냐고 당당히 말해요. 더 이상 선배세대의‘라떼는 말이야’는 통하지 않아요.

내가 겪어온 지난 시간이 억울해서 “야, 나는 이랬는데 너는 왜 안 해?” 이런 마음이 생기지만 그거는 맞지는 않은 거죠. ‘그게 꼰대선배의 시작이다’ 부족한 인간, 불완전한 인간으로서 그런 감정도 느끼고 화도 나고 하지만 저는 청년들의 주장이 맞다고 봐요. 

저도 뭔가 일을 할 때 ‘이거 내 삶에 그대로 한 귀퉁이인가?’ 하면서 ‘내가 행복한가?' 물어요. 밖에서 불행하게 일하고 저녁에 집에 와서 가족들하고 놀 때는 행복하고 이거는 안 되잖아요. ‘같이 행복한 것이 맞다’고 보기 때문에 운동이 바뀌어야 하는 거죠. 행복과 그 자체로 일과 삶이 연결될 수 있도록 만족할 수 있는 방법으로 나는 운동방법이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삶에서 할 수 있는, 일상운동으로 생활운동으로 바뀌어야 한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이슈 파이팅의 운동이 필요하잖아요.

이슈파이팅 하려면 사실은 힘든 시간을 참고 견뎌서 뭔가 이루어내고 난 다음에 잠시 쉬든지 하는 그 긴박한 시간이 있는데 그걸 젊은이들한테 ‘어떻게 이 순간을 이해시킬까?’ 이거는 저도 고민이에요. 

그래서 후배가 들어오면 “너 하고 싶은 거 뭐 있냐? 하고 싶어서 여기 왔냐?” 이것에 대해서는 묻고 대화를 해요. 

막판에 꼰대의 한 귀퉁이를 주입시키는 건데 “야, 그런데 우리가 사실은 이만큼의 행복을 누리려면 가는 길이 행복으로 딱 이어지지는 않더라. 이 주변에 이만큼 그 자잘한 일들을 다 해야, 귀찮은 일들을 이만큼 다 하면 정말 행복한 그 핵심, 네가 원하는 게 와. 그것만 누리겠다고 하면 그거는 지금까지 살아본 생각으로는 불가능하더라. 주변의 잔잔한 것들도 겪을 수밖에 없다는 걸 이해해 줘라." 이런 말을 하죠. 


‘라떼는 말이야’보다 한수 위 꼰대화법입니다. ㅎㅎㅎ 요즘에는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범주 자체가 다른 것 같아요. 세대 간의 생각도 다르지만 같은 세대라 해도 개인의 가치가 다르고. 다양성이 많아진 사회가 된 것 같긴 한데 그게 참 어려운 지점인 것 같아요. 

맞아요. 예를 들면‘우리 공동체가 잘 살아야 나도 행복해.’를 잘 이해 안 하더라고요. “나는 내가 할 누릴 만큼만 딱 하면 되는데 왜 우리 마을까지 생각해야 해요?” 라고 해요. 그렇다고 그거를 개인주의라고 하면 안 되잖아요. 

‘자기 테두리를 짓는다.’인데 그 테두리 밖과는 데면데면 불가근불가원 하는 거지. 나 같은 사람이 제주도를 생각하고, 대한민국 사회를 생각하고, 복지를 생각하고 이런 건 사실은 그들이 보기에는 오지랖 같은 거죠.

그래서 청년들이나 누구에게든 강요해서는 어쨌든 안 되고, 나는 내가 사는 동안에는 일단 우리 다음에 살아야 할 아이들 때문에 이 사회를 좋게 만들다가 죽어야 한다는 게 기본이지만 우리 다음 세대는 그러지 못해도 그거는 어쩔 수 없다. 그거는 시대가 풀어나가지 않을까. 


‘이어가는 즐거움’ 잇고 싶은 이을락의 초심 


지난 겨울에 이곳에 왔을 때 아들과 쉬러왔다는 활동가를 만났어요. 되게 인상적이었거든요. 이을락이 활동가들의 영혼의 쉼터인가 하는 생각을 잠시 했어요. 

일반 여행자들은 안 와요. 숙소가 매력적이어서 여기로 오는 건 거의 없어요. 이미 나를 알고 있거나 알고 있는 사람을 통해서 알게 된 사람들이 워크숍이나 잠깐 쉬러 오고요,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는데 환경운동단체, 역사기행하는 분들이 많이 오고요. 내가 마을에 들어가서 활동하기 때문에 마을활동가들이  마을 분들을 데리고 많이 와요. 내 이야기를 직접 저녁에 강의처럼 들을 수 있으니까.


여기 이름이 이을락이잖아요, 이을락. 이어가는 즐거움. 여행자도 와서 이어주고 자연환경도 이어주고 마을도 이어주고 제주도도 이어주고 이어주는 중간다리 역할을 하고 싶다는 게 이을락의 초심이었어요, 초심. 초심이 지금도 이어져 그대로이고 앞으로도 또 그렇게 이을락은 존재할 건데 앞으로 어떻게 방향이 바뀔지는 모르겠네요.


겨울과 지금 6월의 분위기가 달라요. 이을락의 4계절을 즐겨보고 싶어요. 이런 마음으로 찾는 분들도 많겠지요. 

 처음에 준비할 때 지리산이음 조양호 선생님과 저기 보이는 원룸 3개는 활동가들 와서 좀 쉬어가는 공간으로 하자고 했었는데 와서 보니까 불법 건축물이었던 거예요. 법적인가를 내려고 보니까 불법이어서 안 되는 예요. 

나중에야 합법화해서 건축물 등기를 했고 지금은 우리만 사용하고 있어요. 나머지 공간은 보시다시피 너무 크잖아요. 한두 명이 와서 쉬기에는 적합하지가 않은 거죠.  소소한 공간으로 좀 나눠서 한두 명이 와서 쉬는 공간으로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활동가들의 쉬는 공간으로 공식 발표하거나 그러지는 않았죠. 아직은 여행자들의 민박 숙소다 해서 쉼이 필요하거나 그런 사람들만 와요. 


공간을 운영하는 것, 손님을 맞이한다는 것. 너무 힘들지 않나요? 이 넓은 마당에 꽃, 나무 물도 줘야 하고요.

어제도 너무 힘들어 죽는 줄 알았어요. (웃음) 남편도 힘들고 아이들도 힘들고 한데 그래도 방법을 생각해서 그대로 유지하는 걸로. 계속해야죠. 

서울, 부산에 활동가 친구들이 있어요. 모두 66년 말띠들이거든요. 우리가 처음에는‘55세까지만 공공적인 대표나 시민단체 활동을 하자, 그다음에는 제주라는 곳에 모여서, 이을락에 모여서 활동가 프로그램을 하거나 쉼 프로그램을 하자.’약속했어요. 워크숍, 프로그램 기획을 잘해요. 나는 제주도 자연은 그래도 잘 아니까 매일 여기서 활동가 워크숍만 할 게 아니라 데리고 밖으로 나가는 거 하고. 청소년에 관심 있는 친구는 청소년 프로그램도 하고 해서 55세 이후는 그렇게 살자 약속을 했죠. 그런데 내가 약속을 깼지. 다시 공공적인 역할을 3년을 맡으면서 58세 이후로 밀려나기는 했는데 앞으로 이 공간을 그렇게 써보고 싶어요. 


5년 후, 10년 후에도 대표님과 이을락은 활동가들과 함께 있겠네요. 

지금도 제가 갈증이 심한 게 지금 굉장히 답답한 순간이잖아요. 선생님들이 와서 좀 그래도 어제오늘 들어줘서 많이 풀렸어요. 지역에서 활동한다는 것을 듣고 이해해 줄 사람이 있을까? 또 환경운동을 나는 이슈파이팅 하는 사람, 운동단체가 아니기 때문에 환경운동을 지역 주민들하고 한다는 게 가능하다고 봐줄 사람이 있을까? 요즘 이런 생각들을 계속 해요. 

나의 활동에 대해서 누군가 이해해 주고 그다음에 좀 업그레이드하는 역량 강화가 필요하잖아요. 그런데 아직까지 생태관광과 주민 참여 분야에서 이런 걸 같이 해 줄만한 장소와 프로그램이 있는 곳이 사실은 없어요. 

개인 활동가는 갈 수 있는 데가 없어서 제가 필요했었으니까 누군가 또 필요할 것 같다는 생각으로 그걸 마지막으로 하고 싶어요. 무릎 아파 현장 못 뛰면 이 안에서 누군가 찾아오면 그런 경험 나누고 이런 것들을 해야죠. 


동백동산 그리고 습지, 지키고 살아온 삼촌들의 삶에 재미와 의미를 더한다


10년 동안 주민들과 함께 그림책도 만들고 요리책도 만들면서 마을 공동체 안에서 다양한 콘텐츠를 만들어 오셨잖아요. 주민들 스스로 어르신들의 삶과 함께 한 습지를 지키자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고요.   

저는 습지라는 동백동산의 주제를 가지고 생태관광을 하고 마을 공동체의 여러 가지 일을 했는데 관광만을 하지는 않았어요. 어르신 그림책도 같이 만들고 그 과정에 모래그림도 어르신들이 그리고, 여러 가지 프로그램도 했는데 그게 관광과 직접 연결되지는 않거든요. 그래도 그분들이 ‘이거를 하니까 재미있는 거리가 있구나.’라는 것을 직접 느끼고 삶의 하나로 로 재미있게 가져가도록 만들고 싶었어요. 

그 다음에 자그마한 700~900명이 사는 마을이 이제는 습지를 보전해야겠다고 2만 명의 읍으로 확산을 시키려는 노력으로 2018년에 람사르 습지도시로 인증을 받았고요. 조천읍을 습지마을, 습지도시로 좀 특별한 도시로 만들어보고 싶었는데 동물테마파크만 아니었어도 이렇게 어려워지지는 않을 거예요.  


답답하고 어려운 시간이 금방 끝날 것 같진 않지만 환경운동가 고제량은 여전히 마을을 지키고 있겠지요.

지금은 할 수만 있다면 일을 떠날 것 같지는 않고요. 강약조절은 할 것 같아요. 아직도 저는 지역 주민들하고 방향성이 딱 맞았을 때 그때 느끼는 그 굉장한 희열? 이런 것들이 가장 기다려지기도 하고 그거를 위해서 하고 싶어요. 그게 내 삶과 나의 감정과 나의 정체성 이런 것들을 다 같이 응집하는 거라고 생각하고요. 

* 사진설명 : 인터뷰가 끝나고 동백동산습지센터 활동가들과  마을의 습지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이 곳을 지키며 살아온 선흘마을 삼촌들의 모습을 사진에 담기로 했다. 


선수가 아니라 지역에 들어가서 많이 하다보면 보이는 것들 


마지막 질문입니다. 이 답답한 순간에도 고제량을 설레게 하는 것이 있습니까?

요즘 가장 설레고 기쁘고 재미있게 하는 건 용천수. 조천이라는 마을이 그렇게 크지 않은데 해안 따라서 용천수가 23개가 있어요. 사십 몇 개였는데 메워버리고 해서 23개가 남았는데 아직도 예쁜 돌담으로 둘러쳐져 있고 거기에 삶의 이야기가 있어요. 물허벅을 올려놨던 물팡 (물허벅을 놓는 돌 선반의 제주도 사투리)도 그대로 남아 있고. 

아직도 물이 송송송 솟는다는 게 좋은데 용천수 안 먹잖아요. 필요가 없어져서 웅덩이지고 하니까 쓰레기 갖다 버리고 엄청 흉물스럽게 있었던 곳인데 지금 마을 이장님이 표지판을 세우자고 해서 용천수 표지판을 당신들이 먼저 세웠어요. 자기네 생돈으로 하는 거지, 청년들 불러다가.

그래서 이걸 공공재로 보고 정책으로 만들자고 제안을 했어요. 제주도청 물 정책과도 좋다고 해서 제주도내 용천수 전수 조사를 했어요. 용천수 전수조사와  계획 세우는 건 이미 조례가 있어요. 그런데 그 조례에 주민 지원에 관한 게 없어요. 용천수가 아직 등록은 안됐으나 문화재일 수 있고 유산일 수 있으니 관리해야 하는데 주민들이 와서 노력·봉사로만 하라는 것은 안 되죠. 

주민지원을 올해 시범사업으로 해 보고 정책 제안을 해 주면 하반기에 정책을 만들고 예산을 만들어서 내년 예산부터 반영하겠다고 제주도 물 정책과가 받아들였어요.

전수 조사는 제주연구원이 하고 나는 조천이라는 마을에 들어가서 주민들하고 공감대 만들어서 주민들이 스스로 할 역할들 교육도 해 보고 그걸 정리해주는 역할을 하고요. 하다 보니까 마을이 더 필을 받은 거예요. 마을개발위원회의라고 마을 위원들이 있거든요. 이장과 위원들이 회의해서 저희가 제안한 마을 물 교육장, 물 도서관, 물 체험장, 물 탐방로를 모두 다 OK! 받아들였고 물 학당도 만들기로 했어요. 

마을에 조천 야학당이라고 야학당 건물이 있어요. 임대준 걸 다시 마을이 되찾아서 마을이 하는 사업으로 물 학당을 만들고 물 도서관을 만들어서 제주도에 와서 물이라는 주제로 여행을 하든, 공부를 하든 ‘조천물학당을 첫 코스로 하자.’

그래서 그거 만드는 것이 가장, 엄청 설레고 재미있어요. 자려고 누워서도‘물 학당을 어떻게 하지?’ 막 이렇게 하면서.

이런 일들을 다 이장님하고 만드는데, 이장님은 뭐라고 하냐 하면“제량 씨는 선수니까.” 이러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선수가 아니라 지역에 들어가서 많이 해놓으니까 눈에 보이는 거죠. 눈에 보이는 거를 발견해 준 것뿐이에요. 그런 활동이 요즘은 최고로 재미있었어요. 이장님도 막 하루에 두세 번씩 전화하고. 당신이 더 신났어요. 



오늘 대표님과 이야기 나누면서 관광이 됐든 문화가 됐든 학습이 됐든 마을 안에서 주민이 같이 움직이면 그게 지속가능한 환경운동이고, 그게 맞다는 확신이 더 커졌어요.   

환경이라는 게 이슈 파이팅도 중요하다는 거 알아요. 아주 중요해. 그런데 그것만 해서는 안 된다는 거죠. 지금 제주도의 이슈 파이팅 주제는 제2공항이거든요, 비자림로랑. 제2공항으로 가는 비자림로니까 더 가열차게 갈 수밖에 없는데 여기에 모두 집중 돼서 마을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건 환경단체가 여력이 없어요. 그러면 우리 이거 다 패배하고 신경 못 쓰고 지나가야 하잖아요. 그런데 하나도 그냥 지나가지 않아요. 

너무나 놀라운 게 동물 테마파크는 선흘2리 지역 주민들이 일어서서 책임져주죠. 동복 쪽에 사파리가 또 있는데. 이거는 선흘1리 주민들이 일어나서 성명서 발표하고 책임져주죠. 저쪽 송악산은 지역 주민 총회 거쳐서 반대하자 까지는 못 이루었으나, 거기에 운동가들과 주민들이 막아주죠. 그러니까 풍력단지도 이번에 주민들이 싫다고 해서 막아내고 이러거든요. 

운동단체들이 큰 건 하나에 집중할 수밖에 없을 때, 주민들이 스스로 ‘우리 여기 있다’ 하면서 쫙 나타나 주는 게 얼마큼 설레고 든든한지. 백그라운드가 이게 백그라운드지. “절대 혼자 못 지킨다. 같이 지키자.”그 ‘같이’라는 말, 정말 ‘같이’가 될 때까지 이런 어려움이야 겪어야지 어떻게 해.” 이러는 거죠. 

이 대목에서 듣고 있는 모두가 울컥했다. 무엇을 할 것인지, 누구와 할 것인지 알고 행동하는 것, 참 멋지다.  그것은 ‘왜’ 하는지를 아는 사람만이 가능하다. 그래서 더더욱 고제량 대표가 걸어온 길, 담대하게 나아갈 길을 응원하게 된다.  

_ 인터뷰어 : 이경원


** 6월의 인터뷰가 끝나고  7월에 바라봄 나종민 대표와 다시 제주를 찾았다. 그리고  선흘마을 어르신들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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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년 활동가이야기주간 프로젝트 일환으로 기획/진행한 '활동가 인터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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