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인터뷰] 나의 장래희망은 행동하는 연구자. 통영시지속가능발전교육재단 박수연

만나면 괜히 기분 좋아지는 사람이 있다. 경쾌한 에너지가 느껴지는 사람이랄까. 통영에서 조용히 뭐라도 해보고 싶었던 그 시절에 박수연을 처음 만났다. 주인과 손님은 아니고, 갑과 을도 아닌, 정규직과 자문위원이라는 다소 애매한. 처음 만났던 거의 10년 전의 기억을 되살려보니 ‘하고 싶은 일을 또랑또랑한 서울말로’자신있게 표현했던 박수연이 떠오른다. 반달과 초승달 중간쯤의 눈웃음과 함께.

꿈이 없는 청소년이 꿈을 찾도록 도와주고 싶은 꿈을 가졌던 청년. ‘차라리 동티모르로 가라’던 친구들의 걱정을 응원 삼아 서울에서의 30년을 뒤로하고 통영으로 삶의 터전을 옮긴지 10년이다. 2020년 5월, 세자트라숲에서 박수연을 만났다. 박수연과 통영, 그가 만난 사람들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통영에서의 십년을 이야기해보기로 했다.



“2011년에 내가 관찰한 박수연은... 음... 일 못하고.... 이렇게 쓰시려고요?(웃음)”

차 한 잔 두고 앉자마자 이런 환영사를 날린다.



먼저 자기소개 부탁합니다. 통영시지속가능발전재단에서 지속가능발전교육을 총괄하는 박수연을 어떻게 소개하는 것이 좋을지 여전히 어려워요.

통영시지속가능발전재단 교육사업팀 수석PD 박수연입니다. 제가 일하는 ‘통영시 지속가능발전교육재단’은 UN지속가능발전교육 전문가 거점센터인 통영 RCE(Regional Centre of Expertises on Education for Sustainable Development)가 2011년 독립한 재단법인으로 통영시 출자출연기관입니다.

교육사업팀은 유아부터 성인까지 다양한 그룹을 위한 지속가능발전교육 프로그램을 만들고 진행하는데요, 유아부터 청소년 대상의 학교교육은 지역교육지원청과 연계해서 현재는 모든 유·초·중·고에 ESD(지속가능발전교육) 담당교사를 지정해서 학교교육위원회라는 형식으로 진행해 오고 있고요. 지역의 교육담당기관과 단체들의 연합체인 시민교육위원회를 중심으로 지속가능발전교육을 각 영역에서 확대하는 사회교육도 하고 있어요. 저는 교육팀을 총괄하고 있습니다.



RCE(Regional Centre of Expertises on Education for Sustainable Development)란 무엇인가?

UN (국제연합 United Nations)이‘UN지속가능발전교육 10년(DESD)’을 선포하면서 지속가능발전교육을 전 세계적으로 확산하자는 움직임이 2002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2005년부터 2014년까지 10년 동안 지속가능발전교육을 주관하는 유네스코(UNESCO)가 각 회원국의 국가교육과정을 바꾸는데 역할을 하고 UN총회 산하 고등교육기관인 UN대학에서는 ‘지역별 거점센터를 지정, 지속가능발전교육을 통한 10년의 지역 변화와 성과’를 연구하기로 합니다.

통영시는 세계에서 여덟 번째,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RCE 도시로 지정(2005. 10.)되었습니다. 그동안 통영과 주변 지역들에 지속가능발전교육을 확산하는 거점의 역할과 함께 2012년에는 제 7차 세계RCE총회를 개최했습니다. 통영RCE세자트라숲은 교육, 연구개발, 네트워크 기능을 효과적으로 수행하는 교육시설로 2015년 문을 열었습니다. 사람, 시설, 프로그램이 유기적으로 통합되어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현세대와 미래 세대의 공존을 배우고 실천하는 공간을 추구합니다.

통영시지속가능발전교육재단 홈페이지 http://www.rce.or.kr



여기 이 공간 통영RCE세자트라숲도 소개해주셔야죠. 세자트라숲이 생기고 나서 재단의 사업이나 대외적인 이미지도 많이 달라진 것 같아요.

공간이 생기기 전에는 각 위원회 체제로 사업을 진행하면서 우리를 드러내지 않는 방식으로 일을 해 왔어요. 그런데 건물이 생기고 나니까 이제는 우리가 알려져야 되는 당면 과제가 생겨서 지금은 조금 기조가 바뀌기는 했어요. 예전에는 조금 국제적인 느낌이었다고 하면 요즘은 누구나 올 수 있는 공간이라는 느낌이 들어서인지 시민들도 친근하게 느끼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조금 나아졌어요, 그런 부분은.


우리가 하는 교육사업이 통영이라는 작은 도시에서 ‘직접 사업을 하는 것’ 센터에 오는 분들 대상으로 교육을 하는 것이 한 파트라고 하면 또 하나는 위원회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각각 하고 있는 일들을 조금 더 지속가능발전교육 혹은 SDGs(Sustainable Development Goals)라는 공동의 세계적인 목표를 향해서 갈 수 있도록 조정시키는 역할을 하는 게 우리의 과제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몸집을 숨긴다고 노력하면서 괜히 욕먹기보다는 그냥 몸집은 몸집대로 드러내고 대신 좋은 영향력을 끼치는 게 훨씬 더 합리적이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게 100% 잘되고 있지는 않지만 어쨌든 지향하는 방향은 그래요.


저에게 '박수연은 에너자이저' 이미지가 있어요. 그래서 늘 일이 많고 바빠요. 요즘은 어때요? 여전히 바빠 보입니다만,

올해 경상남도 교육청이 통영을 환경·지속가능발전교육 특구로 지정하면서 6월 5일 통영교육지원청을 중심으로 통영시, 통영시 의회, 저희 RCE, 그리고 환경운동연합 등 여러 기관이 같이 ‘환경·지속가능발전교육 도시 선언’을 할 예정이에요.(2020. 5. 인터뷰 날짜 기준) 그 선언을 기점으로 교육청에서 해 왔던 학교환경교육과 함께 통영시 차원에서 사회환경교육을 조금 더 확산할 수 있을 것 같고요. 환경부에서 환경교육도시 지정사업도 올 해부터 진행한다고 하는데요. 통영도 환경교육조례도 만들고 환경교육종합계획도 세우는 등 준비해나갈 예정이에요. 통영이 지속가능발전교육 도시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동안은 저희 센터에서만 그냥 열심히 해왔던 것을 이제는 조금 더 확대할 수 있을 만한 인프라가 만들어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갖고 있고요.


지속가능발전, 지속가능발전교육, 지속가능발전목표. 요즘은 여기저기서 많이 듣지만 10년 전만 해도 참 생소한 말들이었어요. RCE, 참! 세자트라도 있네요. “RCE가 뭐꼬”라는 얘기 많이 들었죠?

중·고등학생이나 교사들은 저희를 많이 아시는데 일반 시민들, 50~60대 성인들, 특히 남성들은 잘 몰라요. 아이를 키우는 부모님 중에서도 엄마들은 잘 아는 정도예요. 센터가 생겨서 그래도 택시기사 분들은 잘 아시지요. 예전에는 “용남면에 있는 자연생태공원이요.”이라고 했다면 이제는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외국인만 타면 세자트라숲으로 가냐고 물어보신대요.


오~‘세자트라’가 브랜드로 자리를 잡았네요.

네. 약간. 처음에는 ‘세자트라’라는 말 자체가 너무 어려워서 사람들이 “어디 나라 말인지도 모르겠는 거 왜 했냐?” 했는데 이제는 오히려 통영시 지속가능발전교육재단은 ‘통영시’도 아는 말, ‘지속, 가능, 발전, 교육, 재단’ 다 아는 말이라서 맨날 순서가 헷갈리고 ‘지속발전교육’ ‘지속발전가능’ 이렇게 말하는데 오히려 세자트라는 고유명사로 기억해서 이제는 조금 나아진 것 같기는 해요, 예전보다는.


함께 자란 10년, 조직의 힘을 느끼다


통영에 온 지 10년입니다. 박수연과 박수연을 둘러싼 주변에 어떤 변화가 있었나요? 오늘은 이런 이야기들 해보려고 해요. 지금 몸담고 있는 조직과 지역의 변화와 함께 박수연도 성장하고 변했다고 보거든요. 본인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해요. 변화가 실제로 느껴지는지.

3~4명의 운동성을 가진 엘리트 집단 같았던 작은 조직이 지금은 꽤 커졌어요. 코로나19로 사람들이 없어서인지 몇 년 전에 왔을 때보다 훨씬 안정감이 느껴져요. 처음 통영에 왔을 때 통영RCE는 개인의 전문성과 역량으로 이끌어진 조직이라는 생각이 굉장히 많이 들어요. 그 당시에는 내가 배울 때니까 굉장히 많이 배웠고, 도움도 받아서 그게 싫지는 않았지만.

조금씩 조직이 커지면 이끌어가는 힘이 한 사람의 역량만으로는 안 되는 거잖아요. 집단의 역량이나 지혜들이 모여서 조직이 굴러가야 하니까요. 재단으로 독립하고 세자트라숲이라는 하드웨어가 생기고 내·외부적으로 변화를 겪으면서 불안한 과정을 겪었어요. ‘우리가 무너지는 게 아닌가. 우리가 망하는 게 아닌가.’ 이런 생각도 사실 많이 했어요. 지나고 보니 조직의 힘을 많이 느끼게 된 것 같아요. 4명일 때는 1명이 무너지면 끝인데 이제는 힘이 생겼다고 말하기에는 애매하지만 조직력이라는 게 있어서 어쨌든 굴러가던 일들은 굴러가게 되어 있고 각자의 이해가 좀 다르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것을 해내기 위한 응집력은 조직이 생겼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나 생각이 들고.


조직이 커지면서 겪는다는 일종의 성장통이라고 해도 될까요? 그럼 통영과 통영사람들은 어때요?

저는 우리가 만났던 아이들을 되게 많이 보게 되거든요, 다른 것보다는. 아이들의 큰 변화는 정말로 속마음이 그럴지는 모르겠지만(웃음) 통영으로 돌아와서 자리를 잡고 싶어 하는 아이들이 생긴다는 것이 가장 큰 변화같아요.

(여전히 자리가 없어서 못 오지만) 예전에는 통영은 그냥 고등학교 졸업하면 떠나버리고 싶은, 떠나고 돌아오지 말아야 하는, 잠시 금의환향하고 인사 받고 돌아가서 역시 자기 자리는 다른 곳이거나 40~50대가 되어서 나이가 들고 힘이 들 때 그냥 서울이나 대도시의 삶을 정리하고 올 수 있을 마지막 보루 같은 느낌이었다고 하면 지금은 젊은 친구들이 통영에 와서 무언가 변화를 이끄는 주체도 되고 싶다는 생각도 하고 있고 ‘그것을 위해서 나는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라는 그런 고백들을 할 때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이 어쨌든 영향력이 있는 거구나.’라는 생각을 되게 많이 하게 돼요.


와우~ 정말 큰 변화인데요, 통영이 고향이지만 저 역시 통영은 20살이 되면 떠나야 하는 곳이었거든요. 지금은 물론 아니지만...... 그럼 어른들은요? 아무래도 교사들을 많이 만나실텐데 꽤 보수적인 그룹이잖아요.

교사들도 그런 것 같아요, 교사들도. 물론 여전히 소수의 교사들이기는 하지만 초창기에 ESD 담당교사를 지정하는 것 자체가 진짜 너무너무 힘들었거든요. 그런데 열심히 활동했던 선생님들이 교감이 되고, 교장이 되고, 너무 정치적으로 보일수도 있지만 어쨌든 힘이 있는 위치로 가고 그분들이 재단이 하는 일에 굉장히 호의적인 태도를 가지고 지원해 주는거요.

그 분들 보면 업무 외 일에도 의미 있는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들은 자기 삶에서도 굉장히 인정받는 사람들이 많더라고요. 교장선생님, 교감선생님들이 학교에서, 또 교사들에게 인정받고 존경 받는 분들이고 재단이 하는 일에 굉장히 호의적이니까 교사들도 꾸준히 연수를 듣고 활동하면서 변화되기도 하고 학교에서 뭔가 변화를 만들어 내는 모습을 보게 되고요.


소개할만한 사례가 있나요?

거제고등학교 교사 한 분이 3년 내내 수업을 오시는 거예요, 굳이. 저희가 또 욕심쟁이잖아요. 그러니까 똑같은 프로그램으로 만들어놓고 돌리기를 못해요, 성격상. 주제는 거의 같지만 내용은 싹 다 바뀌는 방식이니까 선생님들이 계속 신청을 할 수 있는 거예요. 두 번인가 오셨던 선생님이 자기 학교에서도 B.T.W(브릿지투더월드) 하고 싶다고 그렇게 말씀하시더니 결국은 RCE 동아리를 만드신 거예요. 그래서 작년에는 거제고등학교도 같이 RCE 동아리를 했어요.



브릿지투더월드(bridge to the world)란 무엇인가?

글로벌 마인드를 지닌 지역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지난 2008년부터 시행된 청소년 문제해결프로그램‘브릿지투더월드’가 2020년부터 경상남도교육청의 지원으로 경상남도 지역으로 확대, 운영됩니다. 경상남도교육청가 예산을 지원하고 통영시지속가능교육재단은 교사들이 학생들을 지도할 수 있도록 교육을 담당합니다. 현재 경상남도 17개 중·고등학교가 참여하고 있습니다.



그게 우리 연수의 성과였는데 그렇게 사람이 한 명씩, 두 명씩 남는 것들이 보이니까 그 분들이 지금은 교사지만 나중에 부장선생님이 되고, 그 교과 과정을 만들 수 있는 연구부장 선생님이 되고 그러다가 교감이 되고 교장이 되면 그분들의 영향력이 굉장히 커지게 될 거잖아요. 우리가 나이가 들면 그분들도 나이가 드니까. 꾸준히 무언가 하나씩 해왔던 게 엄청 크고 많은 열매가 맺힌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한 번씩 맺히는 열매들이 굉장히 탐스러워 보이는 그런 것들이 변화로 다가오죠.


천천히 서서히 크게 작게 변화가 나타나고 있네요. 이 변화 속에서 박수연은 어떤 모습인가요? 특히 조직 안에서. 운동성 강한 활동가에서 총괄하는 관리자로 역할에 변화가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요즘에는 세대갈등이 조직의 큰 이슈이기도 한데 잘 하고 계십니까?

아……. 어……. 사실 저희는 세대 간의 갈등이라는 것은 거의 없어요. 세대 간의 문제는 아닌 것 같아요. 오히려 아까 말씀하셨던 ‘활동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냐, 내가 미션을 가지고 이 일을 하는가, 내가 직장인으로 이 일을 하는가’의 차이인 것 같아요. 저는 여전히 액티브하게 뭔가 만들고 싶어 하거든요. 다행히 팀원들의 성향이 비슷해요. 출산휴가 후 복직하고 1년 동안 굉장히 스트레스를 받기도 했는데요, 사람들을 자기가 원하는 방식으로 일하게 만들면서 이들도 행복하게 만드는 게 결국 리더십이구나. 하는 생각을 많이 해요.

‘직장인으로 일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동기부여 할 것인가’가 활동성을 가진 저같은 사람들의 고민이고 그걸 해결하는 게 저의 역할인데 사실 저는 역할을 잘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아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노력은 하지만......

어쨌든 ‘그런 역할을 해야겠다’라는 생각은 하고 있는데 사실 쉽지는 않더라고요. 어떻게 보면 저한테는 가장 큰 도전 과제고 지금 제일 못하는 거예요. 어려워요.


차라리 동티모르를 가라


박수연을 통영으로 이끌게 된 건 사명감인가요? 결혼인가요?

서울에서 통영으로 내려오겠다고 했을 때 저희 부모님은 제가 직업을 못 가질까 봐 걱정을 했는지 (웃음) “어디를 가나 네가 하고 싶은 것 하면 되지. 꼭 서울이라고 답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셨는데 다른 사람들은 이 “야, 차라리 동티모르를 가라.”통영보다는 거기가 낫다고, 지방보다는 거기가 낫다고 했어요. 제일 친한 친구도 “서울에서 30년 산 사람이 거기서 못살아.”라고 말렸어요.

입사하기 2년 전에 통영RCE홈페이지를 본 적이 있어요. 거제 남자와 결혼을 하게 되어서 통영·거제·부산·진주 지역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알아보다가 마침 채용공고를 보고 지원하게 되었죠.

제가 교육인류학을 전공했잖아요. 지금도 여전하지만 저는 두 가지 미션이 있었는데요, ‘꿈이 없는 청소년들에게 꿈을 주는 사람이 되자.’와 ‘교사들을 교육하는 사람이 되자.' ‘세계시민교육’ ‘지속가능발전교육’은 제가 항상 관심 있던 주제였고. 그런데 통영에 오자마자 그것을 이뤘어요. 그래서 ‘뭐지? 이렇게 금방 이루어지는 건가, 원래?’ 이렇게 생각한 적도 있어요.


박수연에게 기회의 땅 통영인데요? 통영에서 살아보니, 일 해보니 동티모르보다 낫던가요? 아니면 후회했나요? 혹시 외지인이라 겪었던 서러움은 없었나요?

저는 사실 일하면서 지역에서 외지인이라서 겪는, 거부감 같은 것을 별로 못 느꼈어요. 먼저 서울에서 오셨던 분이 통영에서 아주 좋은 평가를 받고 계셔서. 오히려 우호적이고 되게 예뻐해 주는 그런 느낌 있잖아요. 처음에는 한계를 못 느꼈어요. 그리고 막내가 처음에 누구를 만났겠어요.(웃음)

시간이 지나면서 이 지역 출신이 아닌 것이 한계처럼 느껴지는 순간도 있긴 해요. 왜냐하면 ‘누구, 누구라서 되는’ 그런 분위기가 있어요. 누구라서 되고 누구라서 안 되고. 제가 만약에 개인 사업을 했으면 훨씬 더 많이 느꼈을 것 같아요. 그런데 재단은 시에서 출자·출연한 기관이고 교육을 하는 사람이니까‘아, 그냥 똑똑한 서울 아가씨’로 생각했던 거예요. 그러니까 별로 통영에서 마이너스될 일은 없더라고요.


나는 멋진 사람이 될 거야, 멋진 사람이 되고 싶어


‘꿈이 없는 청소년들에게 꿈을 주는 사람이 되자.’와 ‘교사들을 교육하는 사람이 되자.’ 박수연이 두 가지 미션을 갖게 된 배경이 궁금해지네요. 그게 종교적인 건지 가정교육인지는 모르겠지만.

제 인생에서 종교를 빼고는 설명할 수가 없는 것 같아요. 어렸을 때부터 교회를 다니고 나름대로는 좋은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해요. 스무 살 때부터 “아, 나는 멋진 사람이 될 거야. 멋진 사람이 되고 싶어.” 이런 이야기를 입버릇처럼 했어요. 어떻게 멋진 사람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멋진 사람이 되고 싶어.’라는 말을 했는데 그 멋진 사람은 돈을 많이 벌거나 이런 사람은 아니었어요, 항상. 

뭔가 사회적으로 좋은 영향을 끼치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청소년학을 전공했지만 청소년이 저와 안 맞는다고 생각했거든요. (웃음) 그게 아마 2004년? 청소년수련관에 실습을 갔다 너무 학을 뗀 거예요, 그 당시에. 제대로 된 것을 해보지도 못하고 실습이라는 게 다 요식행위 같아서 너무 싫었거든요. 그래서 ‘내가 청소년 쳐다보나 봐라.’ 이렇게 하고 진짜 발에 먼지 털고 나왔어요. 교사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도 없어요. (박수연은 고등학교 미술 시간 스텐실로 자기를 소개하고 표현하고 글을 쓰라는 과제에 “나는 교사는 1억을 줘도 안 할거야”라고 굳이 포부를 밝혔다는.)

그 시기에 제가 가졌던 교사들의 부조리함, 정의롭지 못함, 자기는 그렇지 못하면서 가르치는 것을 참을 수 없었거든요. 지금도 내가 가르치려면 그렇게 행동하지 않으면서 가르치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게 약간 저를 옥죄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잘 살아야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같은데. 그래서 교사에 대한 생각도 별로 없었는데 미국으로 교환학생 가기 전에 예비교사들과 현직교사들이 같이 모여서 하는 교회 수련회에 갔다가 제 마음에 꽉 막혀 있던 그런 마음들 있잖아요. 교사에게 상처 받았던 것들. 그게 확 풀린 거예요, 제 마음 속에서.


가벼운 마음으로 희망을 안고 미국으로 날아갔군요.

교사에 대한 마음이 풀리고 미국에 갔는데 갑자기 저희 집이 어려워졌어요. 웃고 말하지만 그때는 진짜 심각했어요. 1월에 미국에 교환학생으로 갔는데 아직도 기억이 나요. 부활절이었어요, 4월이었거든요. 그날 전화를 했는데 난리가 난 거예요.

“한국에 돌아올래? 더 이상 학비 지원해 줄 수 없을 것 같다.” 이렇게 얘기를 해서 어쨌든 한 학기 학비는 냈고 아빠가 나한테 보내줬던 돈은 있으니까 한 학기까지는 마칠 수 있을 것 같은데 5월이 학기가 끝나잖아요. 고민을 했어요. 제가 미국 갈 때 원래 가고 싶었던 바이블스쿨이 있었는데 기독교 선교사를 키우는 학교였어요. 아빠도 교회를 다니지만 딸이 선교사가 되기를 바라진 않으셨거든요. 제가 또 어디서 확 빠지면 빠지니까 굉장히 걱정하셨죠. 그래서 반대하셨는데 그때는 부모님이 너무 정신없었고 제가 여차저차 지원해서 텍사스로 가서 그 학교를 가게 된 거예요, 사실 그 학교가 한국에 돌아와서 학교를 다니는 것보다 저렴했어요. 학비와 생활비 다 합해도.

어느 날 밤에 집에서, 제 책상에 앉아서 기도한 것도 아니고 성경책 보고 앉아서 대화하듯이 “하나님, 저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라고 하는데 그 순간 마음에 확 오는 그런 거 있잖아요. 무슨 음성이 들리거나 그런 것은 아니지만.

‘아, 정말 꿈이 없는 청소년들을 위한 삶을 살고 싶다.’는 마음으로 청소년학과에 갔던 게 다시 상기가 됐고, ‘어떻게 하면 그런 청소년들에게 접근할 수 있을까.’생각하다보니 교사까지 생각한 것 같아요. 한 명, 한 명 만나는 것도 너무 의미 있지만 파급력이 적잖아요.

어느 날, 하루 밤에, 그냥 제 마음속에 왔는데 아마 그게 제가 고민하던 것들이 한번에 풀어진 것 아닌가 생각이 돼요. 그날 제가 만든 개인 이메일 주소가 youthchallenger랍니다. 그렇게 돌아와서 여자저차 대학원을 갔죠. 형편상 대학원 가는 것 진짜 쉽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저는 지도 교수님이 너무 마음에 들었고, 나를 뽑아줄 것 같은 거예요, 밑도 끝도 없이. 그래서 교육인류학을 공부하게 되었고요.


가족, 평범하지만 가장 특별한 지지자들


박수연의 다양한 역할, 정체성 중 하나가 부모인데요, 두 아이를 키우는 엄마이기도 하고 우리가 흔히 말하는 워킹맘이예요. 대한민국에서 맞벌이 부부의 육아란 참 어렵죠?

첫째를 낳았을 때는 제가 ‘워킹맘’이라고 거의 생각을 못할 정도로 그냥 ‘워킹퍼슨’이었어요. 친정엄마가 왔다 갔다 하면서 애를 봐주셨고, 그래서 ‘애는 혼자 크는구나. 낳아놓으면 큰다는 게 진짜 맞네?’ 하고 생각했었거든요, 그 당시에는.

그리고 집이 통영이니까 주말에는 어쨌든 같이 있을 수 있고, 남편이 엄청 애를 잘 보거든요. 그래서 아이를 키우면서 일하는 게 크게 어렵다거나 힘들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집에 늦게 들어가는 것에 대해서 남편이 한 번도 ‘애가 집에 있는데 뭐 조금…….’ 이런 말도 한 적이 없거든요. 그런 말 하면 큰일 나죠, 저희 집에서는. 그거 상상도 안 해요, 우리는 그런 관계가 아니라서. 결혼 안 했을 때와 별로 차이 없이 살았는데 둘째가 태어나고 굉장히 많은 게 변했죠.


둘째 임신했을 때 여러 가지로 힘든 일이 많았죠?

첫째는 출산 이틀 전까지 일했거든요. 너무 건강했고 임신 체질이라고까지 했었는데 둘째를 임신했을 때 5월에 재단 큰 행사 끝나고 이틀 후 갑자기 배가 아파서 병원 갔다가 1년 7개월을 못 왔어요.

너무 힘들었어요. 23주였는데 수술하고 누워 있어야 된다고 해서 “아주 간단한 일상생활만 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두 달 휴직하고, 그때 처음으로 아이를 진짜로 본 것 같아요, 첫째도 그렇고 제대로.


박수연의 주부체험이 시작된 건가요?

네, 맞아요. 주부체험처럼 하고 나서 둘째가 태어난 지 4개월 됐는데 목도 못 가누고 여러 가지 발달 문제가 있어서 병원에 가기 시작을 했고, 진짜 이슈가 많았어요. 어느 날은 모유 먹이는데 숨을 안 쉬어서 청색증이 오고... 두 손가락 심폐소생술 해보셨나요? 인공호흡도 하고 별짓을 다 했어요.

‘아, 이게 배운 게 쓸모가 있구나.’생각을 하면서.

그런 일이 몇 번 있고 응급실도 가고 부산대 병원까지 갔거든요. 그렇다고 해서 아이에게 문제가 있을 거라는 생각도 안 했는데 머리부터 발끝까지 여러 검사를 해 보니까 뇌도 작고 여러 가지 문제가 다 있더라고요. 우리가 조금 특별한 아이를 키우는 부모가 되었죠.

저는 통영에 있지만, 남편은 결국 (월급이 반토막이지만)세종으로 이직 했어요. 둘째가 매일 재활훈련을 받아야 하는데 남편도 출근을 해야 하니 친정부모님이 계속 도와주세요. 새벽부터 오후까지 다니시는데 너무 많은 생각이 들었어요.


작년에 ‘월간 나이듦’하면서 서울에서 만났을 때 했던 고민들이 생각나네요.

네, ‘진짜 뭐라도 세종에 진짜 조그마한 건더기라도 하나 있으면 내가 그리로 이동을 하겠다.’ 이런 생각을 했었는데 조건이 너무....... 다행히 남편과 친정 부모님이 제가 이 일을 하는 걸 되게 좋아하고 지지해줘요. 특히 부모님은 “내가 다 해 줄게, 너는 일해. 네가 일해서 성공하는 게 제일 좋은 선물이야.” 이런 스타일이시거든요.(웃음)

저는 그런 면에서 자원이 많죠. 솔직히 어디 가서 말 못해요, 이런 얘기 미안해서. 다른 사람들, 다른 워킹맘들 보면 애 보는 것도 남편 눈치 보면서 야근도 하는데 저는 눈치 한 번도 본 적이 없거든요.


역시 가족이 가장 큰 지지자군요. 특이하고도 특별한 가족

네. 저는 그런 부분에서 사실 조금 특별한 아이를 키운다는 것. 그런데 또 특별한 가족들이 함께 있기 때문에 힘들다기보다는 아이를 통해서 배운 게 너무 많아요. 그런 말들을 많이 하잖아요. 그런데 진짜인 것 같아

첫째는 다 뭐든지 빨랐거든요. 그게 당연한 줄 알았죠. 그냥. 그렇게 다 잘하는구나, 그러면서 자랑도 좀 했었죠. 둘째가 조금 느리고 발달이 안 좋다는 것을 알고 나서 에코팜므 박진숙 대표님이 이 이야기를 해 줬어요.

“아이들은 다 각자의 시간으로 산다. 그러니까 느리다고 표현하지 말고 이 아이의 시간이라고 생각하라.”고. 그 말이 되게 와 닿기도 하면서 만약에 빨리 크는 아이였으면 지금처럼 멀리 떨어져 있으면 진짜 힘들거든요. 한 주가 지나면 다른 말을 하고 있고 이러잖아요. 그런데 오히려 아이가 천천히 크니까 “엄마.” 한마디를 하면 엄마를 한 달 동안해요. 일주일 뒤에 가도 계속 ‘엄마’하고 있으니까 그 아이의 성장을 계속 볼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이 아이를 통해서 굉장히 시선이 넓어지더라고요.

물론 저는 옛날부터 장애인에 대해 관심이 많이 있었는데 정말 내 아이가 장애인이 되고 보니까 ‘아, 이게 정말…….’ 나는 우리 애는 장애인이라고 말도 못할 정도잖아요, 솔직히. 장애등급을 받았지만 나중에 보면 아무도 모르게 클 수도 있을 만큼 자기가 잘 자라고 있거든요, 어차피 어디서나 조금 부족한 사람들은 있으니까. 나는 ‘장애학교의 유치원을 보낼까, 일반 유치원의 특수반을 보낼까.’를 고민하고 있다고 하면 일반학교 특수반은 상상조차 못하는 장애를 가진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은 그 고민을 하고 있는 내가 부러울 거고, 그런 상황들이 보이더라고요.

그리고 새롭게 보였던 것은 장애인의 부모들이 생각보다 행복하다는 거예요. 저는 물론 많은 사람들이 힘든 부모들이 분명 있지만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내가 이 아이로 인해서 행복하다고 고백하지 “내가 얘 때문에 못 살겠어.”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 분들도 나름 삶에서 굉장히 소소하고 즐거운 일들을 찾고 그것을 즐기면서 살고 있는데 그것을 보는 시선의 문제죠. 아이가 장애가 있어서 괴롭고 힘들고 일도 못할 거고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참 많은데 꼭 그렇지만은 않더라고요.


그건 우리 사회와 사람들이 만들어낸 일종의 편견인 것 같기도 해요. 어렵고 힘들고 슬프긴 하지만 일상에서 어떻게 웃을 일이 한 번도 없을 수가 없잖아요. 그분들이 웃을 수 있는 기회를 더 못 가지게 하는.

아무튼, 저는 워킹맘으로서 행복합니다.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고, 아이들도 잘 자라고 있고. 다행히도 아이들도 제가 주말마다 오는 것에 대해서 굉장히 잘 받아들이고 있어요.


첫째와 관계는 어때요? ‘주말모자(週末母子)’에 대해서 어떻게 받아들이나요?

첫째는 원래 엄마는 바쁜 사람이었기 때문에 괜찮대요. 매일 보지 못해 미안하지만 서로에게 좋은 것도 있어요. 제가 육아휴직하고 하루 종일 붙어 있을 때 맨날 싸웠거든요. 그리고 엄마에 대해서 별로 표현도 안 했는데 요즘은 주말마다 보니까 뭐 ‘사랑해’는 죽었다 깨어나도 안 하지만, 원래 그런 성격이라서. 그런데 잘 때도 같이 자려고 하고 안아주고 약간 이렇게 하더라고요. 만날 때마다 좋으니까. 전 만족스럽습니다.


행동하는 연구자 박수연


박수연을 정의하는 단어나 문장이 있나요?

예전부터 제가 만들었던, 저를 정의하고 싶은 말이 있었어요. 대학원 다닐 때 정말 아무것도 없을 때 만든 일종의 닉네임인데요, ‘행동하는 연구자’


오! 잘 어울려요. ‘행동하는 연구자 박수연’은 5년 후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요?

지금은 활동 무대가 통영에 국한되어 있고, 직접 대면해서 만나는 사람들에게만 영향력을 가진다면 박사 과정을 끝내고 5년 만에 논문 쓸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웃음) 학위가 생기면, 스스로 무엇인가 글을 쓸 수 있을 만한, 그래서 그 글이 조금 더 파급력이 있는 삶을 살 수 있으면 좋겠어요.

박사과정은 진짜 고민을 많이 했는데‘내가 하는 말이 조금 더 힘을 받기 위해서는 학위라는 것도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느 정도 경험은 쌓이는데 아직까지 우리 사회가 같은 말을 해도 학위가 있는 사람이 말하는 것과 없는 사람이 말하는 말을 다르게 받아들이더라고요, 세상이.


타인의 시선이나 인정도 있지만 그동안 현장에서 경험하고 활동해 왔던 것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학문과 학위가 필요한 것 같기도 해요.

네. 그동안 거부했지만 이제 정말 40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니‘아, 이제는 학위를 해서, 할 때가 되었구나.’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어쩔 수 없는 거죠. 제가 어디에 글을 쓴다고 해도 학계 연구로 발표되는 것과는 굉장히 다른 영향력을 가지니까요. 이제는 정책에 영향을 미치려면 연구물로 나와야 되겠구나 생각이 들어서... 꼭 그렇게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지역에서 사는 지혜


또 하나, 저희가 가진 빅픽처는 B.T.W를 했던 통영청소년이 다시 돌아와서 기관·단체를 세우고 RCE 시민위원회, 혹은 학교위원회에서 활동하다가 시장이 되는 거예요, 시의원이나.


이미 재단에서 일을 하는 사람은 생겼잖아요, B.T.W 출신이 통영에 돌아와서.

그렇죠. 혹시 그 친구가 시의원이 될지도 모르고요. 예전에는 ‘OO출신, OO출신’이게 되게 못마땅했거든요, 특히 초창기에는. 왜냐하면 나는 거기에 속하지 않았고 그것을 가질 수 없으니까. 약간 ‘뭐야, 실력 없으니까 그러는 거 아니야?’ 하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그게 또 지역에 사는 지혜인 것 같아요. 잘 이용하고 활용해서 좋은 데 쓸 수 있도록 좋은 에너지를 만들어 내는 게 어떻게 보면 그게 정치죠. 제대로 된 정치.

그런데 아직 거기까지는 못 간 것 같아요.


저도 그 말에 동감합니다. 우리 오늘의 인터뷰는 여기까지.

세자트라숲에서 자리를 옮겼다. 저녁을 먹으며 회포를 풀기 위해. 우리는 좀 투덜대고 누군가의 흉을 보기도 했지만 결론은 ‘박수연은 더 재미있게 더 좋은 일을 더 많이 하고 싶다’였다. 화수분 같은 열정과 에너지가 통영을 넘어 전 세계로 퍼지고 이어지면 좋겠다. 다음 우리의 만남이 더 기대된다.

_ 인터뷰어 : 이경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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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년 활동가이야기주간 프로젝트 일환으로 기획/진행한 '활동가 인터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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