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인터뷰] 가치에 따라 흘러온 세월의 어느 여울에서 흙을 보듬고 있는 할부지. 김훈배

첫째의 특수학급 여름학교. 학부모 악기교실에서의 처음 만남.
그때부터 내가 무얼 하든 내게 있어 그분은 “선생님”이었고 그 호칭을 빼고 달리 말할 수 없다.



인터뷰를 위해 한창 조성중인 농장을 찾았다. 교육자의 모습으로만 남은 기억에서 털털히 밀짚모자 쓰고 신록으로 덮인 텃밭을 돌보시고, 허브를 어디 심을지 이야기하는 선생님의 흙을 쥔 농부의 손은 생소하다.


선생님이 삶에서 가장 맘에 두고 있는 하나의 문장이 있을까요?

내게 있어서 “가치와 가치관은 삶, 길이다.”


귀촌으로의 선택 계기는 어떻게 될까요?

저는 우리 미래세대들을 위한 문화활동을 주로 해 왔어요. 보건복지부에서 하는 ‘청소년정서지원서비스’라는 음악을 가르치고 그 아이들에게 음악치료기법을 적용해서 정서지원을 해주는 일을 2006년부터 해왔어요. 김천소년교도소 아이들에게 악기를 가르치면서 정서지원을 해주는 일이 1989년부터 시작했으니 30년이 넘었죠. 

지금의 힐링농장 만들기까지 어떤 생각으로 이어졌는가 하면, 폐쇄공간에서 아이들을 보는 것과 자연, 개방된 공간에서 이 작업을 하는 것의 차이가 어느 정도인가를 가늠해보니까 차이가 많이 나죠. 마침 내가 돌보던 아이들 중 기억에 자리를 많이 차지 했던 아이가 출소를 했거든요. 그래서 자연환경이라는 그 어메니티(한없이 열려있는) 공간을 내가 그리는 방향으로 극대화 시키고 싶은 생각이 있었어요. 그래서 제가 있는 구미라는 공간에서 어느 정도가 가능할까? 금오산, 천생산, 태조산 그리고 접성산 이렇게 4개의 산을 곳곳을 다녔는데. 

금오산은 형곡동에서 숭오동까지 6개월, 태조산은 도리사가 있는 송림리에서 도개 다곡까지 3개월 답사를 하고... 천생산은 위치가 멀어 슬쩍슬쩍 봤고. 그 다음에 접성산 이곳 항곡에 들어오면서 정밀하게 살피는 작업을 했죠. 제가 그 중에서 금오산을 자세히 봤어요. 그런데 도립공원으로 선정된 공간이어서 저해요소가 많아요. 다음으로 태조산이라고 하는 냉산에서 태조왕건 이야기가 가장 많이 녹아있는 ‘칠창리’를. 칠창리는 태조왕권과 신숭겸의 전투에서 군량미를 보관했던 7개창고가 지역이름에 스며든 땅이죠. 굳이 내 관점에서 7개 창고에서 창고 군량미에 전쟁승리의 기운이 있었다고 보고 육체적인 곡식도 그곳에 저장하지만, 우리가 정서적으로 회복할 수 있는 창고를 만들면 되지 않을까. 나는 정서적인 지원을 해주는 그런 사람이니까. 

그래서 5곡과 2개의 창고(정서공간)를 만들 목표를 갖고 7개의 창고를 이미지상 복원하고 있어요. 저수지 위에 2500평중 1000평 매입 임대차 주변산지와 준비를 해서 치유농장을 준비했었죠. 맘대로 되는 일은 잘 없다는 게 진입로 문제와 마을주민의 반대로 그 곳에는 일반 농사를 짓기로 하고 더 좋은 곳이 없을까? 고민했던 곳이 처가가 있는 옥성 초곡리 못골이라는 산골짜기였어요. 농지 40,000평과 주변산지가 멋지죠. 여기 힐링공간을 만들자. 활동 1차년도 작은 버드나무를 뽑아내고 연을 심었어요. 그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어요.


연은 심겼으니 내년에는 꽃을 볼 수 있겠네요.

그렇죠. 올해도 어느 정도 연은 변식력이 좋아서 볼 수 있겠고. 주변농지는 다랑이 논이라서곡선이 살아있는 다랑이 논 특유의 두렁이 그대로 살아있어요. 논뚝에는 꽃창포, 원추리 나리꽃들을 식재하고 위에는 구절초를 식재할 겁니다. 맨처음 봄에는 꽃창포가 피고, 뒤이어 원추리꽃이 필 것이고, 그것이 지면 구절초가 피어주겠죠. 자생하던 야생초 애기똥풀 등과 어우러지면서 나와 함께 일년을 채우겠죠. 자연환경을 그렇게 만들어 놓고 음악치료 수업을 실내에서 하던 것을 실외에서 할 생각으로, 아이들이 그 자연환경에 어우러질 수 있는 그런 공간을 지금 추구하고 있습니다. 5년 조성 목적을 갖고 진행 중입니다.


그럼 30년 전으로 돌아가 볼까요? 처음 미래세대를 위한 문화예술 교육자가 되신 계기는 어디에 있었을까요?

그 시작은 고등학교 1학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때 주일학교 교사를 너무 하고 싶은 거에요. 목사님께 찾아가서 "목사님 저 주일학교 교사하면 어때요?" 했더니, 목사님이 “애들도 없는데 네가 어떻게 할 거냐?”라고 하시기에. “그럼 애들은 제가 데리고 오면 되잖아요”라고 대뜸 답하고 골목으로 갔죠. 골목에 놀고 있는 애들 중에 초등학교 5학년 여자아이들 6명을 데리고 목사님께 갔어요. 주일날 아침에. 그 전에부터 중2때 부터 교회에서 반주를 하고 있었거든요. 

“목사님 제가 애들 데리고 왔으니까.. 얘들 제가 가르쳐도 되죠.”하니 "오우 그러믄 뭐 얼마든지 해라" 그래서 애들을 앞에 두고 “예수님 제자 몇 명이고?” (12명) “그럼 우리 몇 명만 데리고 오면 되냐? 한명 당 한명만 데리고 와도 12명이다. 그럼 올해 연말까지 목표 12명이다”하고는, 여름방학 때 그 목표달성이 되었어요. 그래서 또 목사님을 뵙고 "목사님 우리반애들이 12명이 됐으니까 애들 데리고 성가대를 만들거에요." 통보를 하고는 12명을 데리고 성가대를 시작했죠. 

그리고 그 해 의성지방의 성가대회에 가서 1등을 했죠. 애들을 위한 음악교육은 그때부터 시작했고, 중고등부 소년성가대를 만들고 세월이 흐르고 그 성가대원들이 너무 잘되어 있어요. 선교사로 간호사로, 목사로 대표적으로 기억하는 애가 대구 동산병원 병원장 비서실장을 하고 있는 학생이 기억나네요. 

이런 애들이 계속 배출되고 나니까 일이 내게 있어 재미있기도 하지만 이런 부분에서 힘이 생기는 거죠. 1979년 상모교회 성가대 지휘자로 구미에 오게 됩니다. 보통 지휘를 하면 주일 새벽부터 저녁미사까지 계속해서 성가대 5개부를 지휘를 하게 되었죠. 그리고 차주 성가 연습을 마치면 10시가 되죠. 그 후 일과가 끝나느냐, 그렇지 않고 그때 성가대 대장이었던 집에 방문해 아이들 3명 피아노레슨을 마치면 12시 가까이였죠. 이렇게 20대 청춘을 어찌보면 재미없게 보냈습니다. 

그렇게 보낼 수 있는 체력이나 라이프 스타일요? 아버지에게서 나왔어요. 아버지가 50마지기 농사짓는 농부였는데 새벽 4시만 되면 일어나셔서 일하는 사람들 일하도록 준비를 다 하세요. 아버지랑 같은 방을 쓰는데 자고 있을 수가 없잖아요? 미안해서. 그래서 자연스럽게 아버지가 깨는 시간 같이 일어나 책보는 척이라도 하게 되죠. 그게 체화가 된 거죠. 새벽 4시만 되면 일어나서 활동하는 습관이 되어서 지금은 어떤 일을 해도 새벽4시 일어나고 다시 자더라도. 새벽기도도 하고 그 습관이 지금체력을 받쳐주는 거.

그때 그 시절 동네에서 유명한 새벽종 치는 초등학생이었습니다. 늘 새벽종을 들었는데, 어느 날 장로님이 치는 종소리가 리듬이 안 맞았어요. 그래서 그 장로님을 찾아가서 “장로님 제가 종 쳐도 될까요?”라고 개구지게 물어보니까 마침 장로님이 "그럼 니 쳐 볼래?" 그러시더군요. 처음 배워서 땡땡~ 치고 기다렸다가 땡땡하고 맞추어 치니 동네 어른들의 “오늘 새벽종 누가 쳤노”물음에 훈배가 쳤다 하니 “훈배가 새벽종 치는 소리가 너무 듣기 좋더라”그 칭찬 하나에... 그 후로도 꾸준히 새벽 종 치는 유명 초등학생이 되었죠. 그때 저는 어릴 때 이미 어르신들에게서 칭찬의 힘을 체득해서 지금도 아이들을 보면 좋은 점이 먼저 맘에 들어와.

재소청소년 수업을 가도 다른 이들이 “애이 저 새끼들” 할 일에도 나는 “아오 조넘은 조거” 그 중에서 좋은 점 그게 눈에 먼저 들어오니. 그게 팔자지요. 그럼 어쩌겠어요. 일을 하게 된 게 어릴때 칭찬을 잘해주신 동네 어르신들께 받은 자원인 거죠? 이자원은 내께 아니잖아요. 이자원은 나를 둘러싼 사회에서 받은 거기 때문에 사회로 환원을 해 주어야 된다고 보고, 여지껏 내가 의도하고 이런 것은 제 삶의 여정에 하나도 없습니다. 그냥 이렇게 가게 되니까.. 이렇게 가고 여태 이래왔습니다. 단지 음악교육분야에 오랫동안 몸담게 된 것 뿐이죠.


지금 하시는 일을 소개해 주시겠어요?

전환이라고 보기 보다는 내 삶의 연장선상이라고 보면 좋을 거 같아요. 왜냐하면 정서지원을 해주는 공간만 이동했을 뿐이지 핵심적인 내용은 다 똑같기 때문에. 공간 자체를 농림공간으로 전환한 이유는 교육 효과를 본거죠. 폐쇄 공간과 개방 공간의 차이이고 그 다음에 인위적으로 하지 않아도 얻어낼 수 있는 효과 같은 것들도 굉장히 많다는 말이에요. 그래서 우리나라는 특별히 산림공간이 68~69% 가 되니까. 어디서든 신뉴딜 정책을 한다면 산림을 기반으로 했으면 좋겠어요. 일단 면적 자체가 넓고 활용할 가치들이 있는 정책이 준비되어 있고, 코로나19 사태에 처한 환경적인 요인들도 해외로 나가거나 빌딩도심에서 정주하기 보다는 숲을 활용하여 하는 것이 그린을 충분히 활용해야죠. 사람은 어차피 숲, 물 이런 자연을 통해서 힐링을 하기 때문에 산림의 자원은 굉장히 좋다는 것이죠.


하시는 일들에서 가장 집중하시는 것은요?

가치와 가치관 이라는 것 아까 말씀드렸는데, 그것과 함께 미래세대를 바로 세우는 것 이 두 가지에 집중하고 있어요. 요즘 가치관이나 생활 패턴이나 이런 것들이 계속 바뀌기 때문에 생활패턴이 바뀜으로 해서 가치관이 바뀌어 왔지만 근본적인 가치는 우리가 사람들이랑 함께 간다는 것, 이웃이랑 투게더라는 그 가치가 제일 중요하다고 봐요. 그래서 나 혼자만 어떤 이득을 보거나 나 혼자만 어떤 것에 집중을 하기 보다는 어떤 공동체 구성원들이 같이 이득을 얻고 그래야지 사회가 좀 좋아진다고 생각을 하거든요.


선생님이 구미지역 관광두레 PD를 하시잖아요. 그 가치를 따라가신다고 보면 될까요?

네, 관광두레를 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구미에서 79년부터 살게 되었으니까 40년이 넘었는데 인적자원 자연환경적인 자원이 너무 좋은데 국가산업공단에 가려져서 이런 것들이 빛을 바라지 못하는 모습을 보았어요. 쉽게 말해 그린공간이 회색공간에 가리워졌다고 해야 할까요? 이게 너무 안타까워서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었어요. 

가장 어려운 거는 사람의 인식이란 것이 한번 인식을 하고 나면 기존 인식을 바꾸는데 시간이 굉장히 많이 필요하더라고요. 그래서 기다리면서 인식을 바꾸어가려고 맘을 정했고, 현재는 그 공간 중에 가장 좋은 공간이 제가 보기엔 일선리라고 생각하죠. 구미 풍수지리 하시는 분들 말씀으론 임하댐 수몰지구의 전주 류씨들이 이주해오며 마을조성을 한다고 했을 때, 구미의 안방을 내준다고 반대가 많았다고 하지요. 그 정도로 환경이 매우 좋아요. 배산임수는 물론이고, 고분군이 있고. 마을 뒤에는 신라불교초전지가 있죠. 들 옆에는 의구총이 있고. 이 같은 자원들이 함께 있고. 앞 강 물결이 일렁일 적에 저녁노을이 걸리면 어디가 부럽다고 하겠습니까? 하와이 안부럽죠. 

마을엔 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회복의 이야기가 숨겨져 있답니다. 태조 왕건이 팔공산전투 패배하고 이곳 골짜기에 피신 후, 피투성이가 된 몸을 씻으려고 백안계곡 물에 자신의 얼굴을 보니 백지장처럼 하얗다 해서 그 마을이 백안리가 되죠. 그래서 전 구미 지역을 알리는 모토가 "백안이 된 당신을 홍안으로 돌려드리겠습니다."예요. 백지장 같은 얼굴을 담고 절망에 차서 밀려밀려 왔다가 김선궁이라는 어린 소년의 패기로 재기의 발판을 얻은 왕건의 역사적 땅의 힘이 담긴 곳이죠. 


회복, 사람은 일상을 살아가면서 적절한
노동을 해서 피곤해 졌을 때 회복해야 다음 스텝으로 나아갈수 있기에.


활동가들이 어려운 점 또는 아쉬운 시스템을 겪는 일이 있어요. 선생님에게도 해오시면서 그런 부분이 있었을까요?

시스템에 어려움을 겪은 것들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폐쇄성, 행정편의주의적이거나 폐쇄적인 벽이 많아서 그러한 것들과 잘 결합하고 타협해나가는 과정들이 좀 힘들었죠. 79년도에 시립합창단, 80년도에 시립합창단 단모장 역할을 했었거든요. 단모장이 그러니까 행정가와 예술가의 중간역할, 완충역할을 해주는 자리에요. 그래서 그 역할을 하면서 그런 것들을 많이 느꼈고, 그 해소 사례가 될 만한 것들을 경험상 많이 했죠. 만약 나중에 필요하다면 사례가 될 만한 것들을 완충역할에 도움이 될 만한 사례들을 나누는 도움을 줄 수 있어요.


멈춤이 필요했던 순간이 없으셨나요? 그땐 어떻게 시간을 보내셨나요?

그럴 때는 가족들하고 맨 먼저 이야기를 해요. 왜냐하면 제가 성장 과정에서 학교에서 친구들과 다투고 오거나 절망적인 일이 있었을 때, “아버지”하고 들어가면 아버지 눈빛만 보면 회복이 되었거든요. 아버지가 아무 말씀 안하셔도 되요. 그냥 그윽한 눈빛만 보여주시면 저는 회복이 되죠. 그래서 가족하고 맛있는 밥을 먹어요. (허허허) 

맛있는 밥은 제가 하기도 하고 아내가 하기도 하고 아들이 하기도 해요. 저희들은 제가, 아내가 잘하는 것, 아들이 잘하는 음식이 각각 달라요. 저는 국찌게를 잘해요. 아내는 부침류, 아들은 간편식을 잘해요. 그래서 그렇게 회복을 하고. 좀 깊은 상념이 있을 때는 친구를 만나요. 횡하니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들면 저는 서울로 향해 궁궐탐방을 해요. 이 궁에서 세종이 어떤 생각을 했을까? 단종이 어떤 생각을 했을까? 

특히 제가 좋아하는 사람은 대원군이에요. 대원군이 초기에 세도정치에서 살아남아가는 그 과정을 굉장히 좋아해요. 그래서 대원군이 살았던 운현궁에 가서 노안당도 들여다보고 노락당도 들여다보고 산책을 다 하고 마지막 등용문으로 나와요. 저는 등용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등용문으로 나와요.(허허) 그래서 저는 이미 구미에 불교 초전지마을 이라는 한옥이 잘 정비되어 있어요. 야은길제 기념관도, 성리학역사관도 한옥이 너무나 잘 정비되어 있어요. 저는 이러한 하드에 휴식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제공해서 사람들이 쉬어가는 공간으로 연결되도록 노력해가려 합니다. 관광두레 PD를 하는 이유가 그거입니다. 구미에 좋은 자원의 활용이 지친사람이 쉬어서 활력을 얻어가는 공간으로, 그런 공간에는 공연도 인문학강좌도, 각자의 이야기를 나누어 울기도하고 웃기도 하며 손벽을 치기도 하는 그런 세부프로그램까지 고민합니다.


올해 활동, 어딜 가면 선생님을 뵐까요?

올해는 농사짓는 농부이자 사람을 잇는 이끔이네요. 사람들 많이 만나고 흙도 많이 만지겠네요. 제 SNS활동을 통해서 지인이 먼저 나한테 뭐가 필요한지 찾아서 “선생님 이것 필요하죠 가지고 가세요”하고 연락이 와요. 여기 허브는 아침에 사왔지만 저기 구절초 원추리 같은 것들은 그렇게 해서 나한테 오게 된 것들이죠. 그러면 제가 그것에서 효과를 배가 시켜서 이음 효과를 낼 수 있도록 구조를 만들고 그런 일들의 저변을 점차 넓혀가고 있습니다. 성과가 있어야 준 사람도 보람이 있으니까, 좀 더 흐드러지게 키워야겠죠?


활동가로서 활동가들에게 한마디 부탁드려요.

사람은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진심은 언제든지 통합니다. 아이들이 자신을 도와주로 왔는지 무엇을 원하고 왔는 것인지 얘들이 가장 빠르게 캐치해요. 내가 하는 일이 금방사람들에게 전달되지 않아도 그 진정성은 언제든지 전달이 되기 때문에 그런 것들에서 너무 성급한 성과를 바라지 말고 진정성을 전하고. 두번째로 묶어주는 것, 우리나라에는 덤, 낑가주는(지역어) 우수가 있잖아요. 같이 묶여가는. 특히 활동가는 사람들마다 각기 재능들이 각각 다르단 말이에요. 그 좋은 재능들이 묶여질 때 그게 굉장히 큰 에너지로 작용하기 때문에 이렇게 진정성과 묶음 이 두가지를 확보하라 나에게도 활동가분들에게도 전해드립니다.


앞 뒤가 막혀 관조가 필요한 활동가에게

그런 경우 저는 아버지 산소를 찾아가요. 그곳에서 아버지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하고. 그러면은 아버지와 보냈던 시간에서 그런 장면이 떠올라요. 아 그럼 나도 이렇게 하면 되겠네. 

제가 몇 년 전부터 닉네임을 ‘훈배할부지' '할부지'라고 써요. 할부지는 뭔가 제시하거나 지시하는 사람이 아니거든요. 뒤에서 보고 싱긋이 한번 웃어주면 되거든요. 웃어주면 본인들이 아 저 웃음 속에 간파하게 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관조할 수 있는 대상으로 남고 싶기도 하고. 또 남이 어떤 일을 할 때 그 일에 대해서 관조하면서 동조해주는 그런 대상이 되어줄 수 있죠. 그럴 때 관조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람을 찾으면 어떨까요?



사진 : 홍현옥 / 인터뷰글 : 김은영

아직.. 나누어줄 양식이 많으신 분인데 이제 초야를 찾아 들어가신 것 같아.. 이제 빈자리를 내어주는 현재가 무거웠다.
그러나 인터뷰를 통해서 어디서든 활동의 쓰임새를 찾아내는 선생님의 시선은 다시 길을 만들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좁아진 것이 아니고 더 넓어진 회색이 아닌 더 푸른 빛을 띄는 선생님의 영역을 바라보며, 그곳에서 움직일 북적임을 기대한다.
선생님의 가치는 여전히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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