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사회에서 사회운동가, 혹은 특정 시민사회단체에서 일하는 상근자를 ‘활동가’라고 칭한다. 하지만, 최근 활동가 담론에서는 사회혁신가, 사회적기업가, 소셜디자이너, 마을활동가 등 공공과 영리가 아닌 제 3섹터에서 활동하는 모든 이들을 활동가라고 포괄하여 명명한다. 이들 중에서도 청년 활동가는 조금 특별한 점이 있다. 청년 실업이 고착화된 사회구조와 이에 대응하는 청년 당사자들의 움직임 속에서 직업으로서 활동가를 선택한 이들. 과거 군부독재시절 목숨을 걸고 쟁취하려 했던 민주주의라던지, 대대적 통일운동이라던지, 사회 전반에서 펼쳐졌던 노동운동과 같이 치열했던 현장을 겪지는 않았지만, 누구보다 현재를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는 오늘의 청년이 하고 싶은 사회운동이란 무엇일까? 그리고 그 시작은 어디일까?
청년 활동가, 그 시작이 떠오르는 사람은 한 명이었다. 실천하는 사람의 선(善)을 믿고 따르는 청년활동가, 도라지(가명)씨. 아침부터 비가 온 탓인지 검은 구름이 낮게 내려 앉고, 더운 기운이 사방에 번져있는 6월의 전주. 기와를 멋있게 얹은 전주역에 점심쯤 도착했다. 전주의 느긋하고 다정한 인상은 오늘의 인터뷰이를 꼭 닮았다.

도라지(가명)씨는 34년째 이곳에 살고 있는 토박이다. 인터뷰어가 도라지(가명)씨를 알게 된 건 약 8년 전쯤, 한 비영리단체의 직원들이 모이는 워크샵의 장기자랑에서였는데, 대학을 졸업하지 마자 갓 입사했던 그가 당시 유행하는 개그맨의 분장을 하고 무대 위를 휘젓는 모습이 첫 인상이었다. 모두를 깔깔 웃게 만들던 능청스러움에 박장대소를 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면서도 무대에 내려와서는 수줍은 소년의 얼굴을 하고 귀까지 빨개졌던 도라지씨.
자원봉사자로 활동을 시작하여, 짧은 계약직을 거쳐 한 매장의 매니저로 일했던 도라지씨는 이 지역의 최연소 본부장이 되어서 왕성하게 활동하다가 얼마 전 보직을 사임하였다. 자원활동가로 시작하여 본부장까지 경험하고 다시 매니저로 돌아온 도라지씨를 아주 오랜만에 만났다. 도라지씨를 만나러 오는 길, 열차안에서 인터뷰 질문을 정리하며 첫 물음을 골랐다.
스물여섯의 청년이 사회의 첫 직장으로 비영리단체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경제적 보상이 충분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 분야에서 8년이 넘는 동안 지속적인 활동을 하게 하는 그 힘의 원동력은 어디에서 올까?
전공이 사회학이었네? 사회문제에는 언제부터 관심을 가졌던 거야?.
거창한 이유는 없어요. 사실 저희 집이 아버지부터 누나까지 다 공무원이었거든요. 저도 대학에서 공무원시험 준비 하겠다 생각하고 진학했던 거라 점수 맞춰서 간 거였어요. 그리고 공부 진짜 안했어요(웃음) 맨날 자고. 수업 빠지고(웃음) 그러다 군대갔다와서.. 이제 정신 차리고 공부해야지 하고 기웃기웃하는데 뭘 어떻게 해야 되는지 막막한 거예요. 근데 전공이 사회학이라.. 자연스럽게 그 쪽(?) 분야에 대한 공부를 시작했어요.
지역에서 가장 좋은 학교라고 손꼽히는 국립대학교의 사회학과에 진학했던 이유를 묻자, 그냥 점수에 맞춰서갔다라고 겸손하게 말하는 여전히 말간 얼굴. 그 대답이 또 평소의 그답게 너무나 솔직하고 담백해서, 사회학이라는 학문에 일정 환상을 가지고 있었던 나는 맥이 좀 빠진다.
그래도 뭔가 사회 돌아가는 상황이나 이슈 같은 거에 관심이 있었으니까 전공을 택했을 것 같은데. 조금이라도.
음..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았다기보다.. 저는 그냥 사람 자체를 좋아해서요. 엉성하지만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뭔가를 위해 힘을 합치는 게 좋아요. 한 두명의 엘리트가 진두지휘하는 것보다 집단의 지성과 연대. 이런 점에 많이 끌렸던 것 같아요. 지금도 그렇고요. 제가 어릴 때부터 친구들이 정말 많았거든요. 각자 다른 성격과 특징을 가진 사람들과 관계를 다양하게 가져가다보니 자연스럽게 형성 된 취향이라고 해야 할까?
근데 사회학이라는게.. 결국 사람 사는 것에 대한 공부잖아요. 저 사람은 무엇 때문에 기쁠까, 슬플까, 그런거. 좀 더 철학적으로 고민한다면 그래서 사회에는 어떤 영향을 미칠까 까지 나아가는 것 같고, 그런 고민들 속에서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데 이바지하는 사회적경제와 사회적기업에 관심을 가지게 됐어요. 어차피 경제생활을 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건 변함이 없는데, 이왕 하는 거 보다 사회에 이롭고 도움 되는 게 끌려서.
완벽하지 않은 환경과, 그보다 더 불완전한 사람들이 어설프지만 사회를 위한 노력을 쏟는 거, 애쓰며 좋은 무언가를 만들어내기 위한 힘을 모으는 것. 저는 그 자체를 좋아해요. 꼭 거창한 목표를 가지고 어떤 문제를 해결해야지. 이게 아니라.. 작든 크든 모두가 함께 해나가는 과정 안에서의 여러 시너지. 너무 좋지 않아요?
늘 이런식이다. 도라지(가명)은 내 편견을 항상 이렇게 말끔하게 깬다. 문제로부터 출발이 아니라 일상에서의 시작. 목표을 향해 달리는 것이 아니라 과정을 더 깊게 들여다보는 그의 시선은 늘 나를 깨운다.
사회적기업을 택하게 된 이유가 있었을 것 같은데.. 결정에 가장 영향을 받은 일이 뭐였어?
대학교 수업 중에 사회적기업과 관련한 과제를 수행해야 하는 게 있었어요. 그 때 봉사활동을 시작했었거든요. 그때는, 살아있는 현장 경험을 기반으로 과제를 완성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도서관가서 자료 찾고 인터넷 뒤지고 그러기보다 바로 경험해볼 수 있는 봉사활동을 찾아보기 시작했어요. 사회적기업에서 봉사활동을 해보고 그 경험을 기반으로 시작해야겠다 싶어서. 집 근처에 봉사활동을 할 수 있는 곳이 하나 있었는데, 제가 봉사활동을 신청했던 그 매장의 매니저님이 마침 제 대학동기였어요. 나는 봉사자였고. 그러다 보니 아무래도 봉사활동에 대한 조언도 많이 얻고, 관련해서 생기는 고민들을 나눌 수 있었어요. 그리고 새로운 봉사활동을 해볼 수 있는 기회도 많이 받았던 것 같아요. 딱 매장에서 정해져있는 봉사활동만 하지 않고, 외부에 캠페인을 나간다던지, 야외장터나 바자회 같은 것도 해보고. 저는 그런 활동들이 너무 재밌었어요.
친구가 추천해서 그곳으로 봉사활동을 갔던거야?
아니요, 전혀. 심지어 학교 다니면서 그렇게 막 친하거나 말을 많이 해보지도 못했어요. 제가 과 생활을 안했어 가지고… 되게 우연히, 가까워서 간 곳 이예요. 근데 봉사활동을 하면서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게 엄청 재밌고 즐겁더라구요. 여기가 좀 사람들이 다양하게 오잖아요. 어린학생부터 나이가 지긋한 할아버지까지. 고객으로 오는 사람들의 층위도 다양하고. 그렇게 봉사활동을 하다가, 매니저님께 계약직으로 한 3개월 짧게 일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았었는데 흔쾌히 수락했어요. 아마 그때가 육아휴직 갔던 간사님의 대체였던가 그럴거예요. 여하튼, 그렇게 시작했던 것이 자원봉사자에서 3개월 계약직 직원으로, 그리고 공채로 입사하게 되고.. 벌써 8년이 지났네요.
도라지(가명)는 첫 사회생활이 그곳이잖아. 주변에서 지지는 좀 많이 받았어?
음.. 어렸을 때부터 친구들 다 포함해서 이 쪽 바닥(?)에 있는 사람은 저 뿐이긴 해요. 그래서 처음에 시작할 때 큰 지지를 받지 못하면서 일을 시작했어요. 아무래도 이 영역에 대한 이해도 좀 떨어지기도 했고. 거기다 월급은 적고, 일은 많고 하다보니깐 부모님이 우려를 좀 하셨죠.
아, 그러고 보니 도라지(가명)의 어머님이 봉사활동을 하지 않으셨어?
기억력 좋네요(웃음) 맞아요. 저희 엄마는 지금도 계속 봉사활동을 하세요. 지금 1000시간도 넘었을거예요. 엄마가 마음이 진짜 여려요. 좀 어려운 사람 절대 그냥 못 지나치고, 또 집에 좀 괜찮은 게 있으면 맨날 주변사람들한테 퍼나르느라 바빠요(웃음) 아무래도 전 엄마 성격을 좀 많이 닮은 것 같은데 (웃음) 제가 어릴 때부터 봉사활동이나 이런 걸 하는 엄마를 보고 커서 그런지 이 사회적경제 쪽에서 하는 얘기가 영 낯설거나 하진 않았죠.
이로운 사회변화를 만들어내는 따뜻한 마음들이 모이는 장소라고 소개하는 곳에서 첫 사회인으로 발 디딘 도라지. 그 선택의 이유가 뭘까?
여기는 모두 기증품으로 이루어지잖아요. 기증품이 판매되어서 얻은 수익금이 다시 그 지역의 어려운 이웃들에게 환원되는. 자기 것을 내놓으면서 사회의 긍정적인 변화를 일으키려는 따뜻한 선의의 마음들이 얼마나 귀하고 감사해요. 저는 일상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그렇게 따뜻한 바람을 일으키고, 또 그 바람을 맞고 싶었어요. 제가 그리고 여러 사람들하고 부대끼며 사는 걸 정말 좋아해서… 공동체에 대한 욕구도 강하고. 어린 시절을 그렇게 보내서 그런가싶어요.
어린 시절 이야기 좀 해줄 수 있어?
어.. 제가 어릴 때는 뭐, 누나도 경험을 했겠지만, 집들이 정말 가까웠잖아요. 우리집에 엄마가 늦게 오면, 그냥 옆집 가서 밥 얻어먹고 놀고. 근처 골목에서 다 같이 놀다가 엄마가 데리러오면 같이 손잡고 들어가고. 지금은 공동체라고 해봐야 고작 친구관계가 다인데.. 그 때는 나이도 상관없고 성별도 상관없고 그냥 다 관계를 맺고 지냈었던 것 같아요. 트럭으로 과일 팔러오는 아저씨와도 하루 종일 놀고 수박 주시면 그거 또 같이 먹고 했었으니까. 제가 그리고 어릴 때부터 주변사람들한테 예쁨을 많이 받았어요(웃음) 거절 당하는 경험이 많지 않았고, 미움 받아 본 기억도 없고. 관계들이 다 좋았죠. 그렇게 사람들한테 둘러쌓여서 지내다보니 전 북적북적하고 왁자지껄한 그런 사람관계에 정말 익숙해요.

대학교생활은 어땠어?
여러모로 지금의 저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던 시절이 대학교예요. 몇 가지 큰 사건도 있었는데.. 대학교 때 제 친한 친구의 여자 친구가 자살을 했던 일이 있었어요. 저랑도 친했고. 그 친구가 조울증이었다고 하는데… 저랑 제 친구랑 밥을 먹고 있는데 그 여자 친구가 전화가 왔었거든요. 그래서 친구가 뭐, 지금 저(도라지)랑 밥먹고 있다. 이러고 끊었었는데… 그 후에 자살을 했죠. 한동안 되게 힘들었어요. 제가 좀 도울 수 있었을텐데.. 아쉽고 속상했어요.
그 일이 있고나서 뒤르켐의 <자살론>에 대한 공부를 했었어요. 자살은 사회적 현상이고, 그렇기 때문에 개인의 자살 이유도 사회적이라는 내용인데요. 저는 그 친구가 정말 조울증이라는 병 때문에 그런 선택을 한 건지, 아니면 사회에 적응하는 것이 어렵고 힘들어서 취한 선택인건지가 고민되더라구요. 후자라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구조적 문제인거니까. 만약 그 친구의 주변 사람들과 사회가 그 친구에게 좀 더 관심을 가지고 손을 내밀었다면… (침묵)
예전에 정신건강과 관련된 분야에서 자원봉사를 했다고 하지 않았었나?
네, 쉽게 설명하면, 프로그램에 참여를 신청한 사람과 봉사지가 멘티멘토의 관계를 맺어요. 그래서 주기적으로 만나 대화도 하고 여러 활동을 같이 하는 그런 활동이었어요. 제 멘티는 저랑 동갑이었는데, 이야기를 하다보니 나와 다를 게 전혀 없는 그런 친구였죠. 게임 좋아하고, 책값 받아서 게임방 가고, 시험기간에 공부안하고 만화책보고.. 다 똑같았죠.
유일한 차이는 이거였어요. 저희 부모님은 제가 말썽을 피울 때 끝까지 제가 잘할 수 있다고 응원하고 지지해주었거든요. 가끔 너무 심한 장난은 혼이 났지만, 그래도 전 저희 부모님이 절 사랑한다는 것을 의심해본적이 없어요. 그런데 그 친구의 부모님은 그 친구를 바로 정신병원에 보냈었죠. 그 친구는 정신병원에 가자마자 사회적 낙인이 찍혀서… 뭐만 하면 정신병자 이런 얘기들을 들으며 살았던 거예요. 저는 그 친구의 영향을 참 많이 받았다고 생각해요. 주변의 관심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배웠죠. 사람들과 함께 하는 관계가 얼마나 중요한지.
개인은 전체의 총합을 구성하는 요소로 그치는 게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이 존엄한, 사회를 구성하는 주체잖아요. 그런데 그 사실이 간과되기 쉬워요. 특히 개인이 고립되고 관계가 파편화되는 현대사회에서 더 심하죠. 개인이 강조되면서 공동체가 약화되는 건 너무 단순한 것 같아요.
흔히 사회적 경제는 호혜와 연대를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공동체의 복원과 지역 공동체의 활성화에 유용한 방법이라고 제시된다. 특히, 신자유주의 사회의 대안으로 주목받는데, 이런 맥락에서 도라지의 첫 사회생활은 너무나 적성에 맞는 직업군에서부터 출발했다고 말할 수 있었다.
관계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도라지에게, 공동체성이 중요시되는 시민사회의 활동가는 딱 맞는 직업인 것 같네. 호혜와 연대 빼면 아무것도 없는 영역이잖아 (웃음) 이쯤에서.. 이 영역에서 일하는 것, 어떤 점이 힘들어?
활동가는 참으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좀 불편해도 침묵하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사회는 더 좋은 발전으로 나아가지 못해요. 그런데 문제는 용기죠. 이 용기를 내는 게 가끔은 너무 어려워요. 관계를 이해하다보면, 그 입장을 또 알겠거든요. 그리고 사실 세상에 나쁜 사람은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라서. 다 그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이해가 가요. 그런데 침묵할 수는 없는 노릇인거죠.
이해관계가 부딪히는 상황에서, 근데 그게 옳고 그름의 문제라기보다 그냥 서로의 입장 차이인 경우에는 정말 어려운 것 같아요. 슬쩍 모른척하고 싶기도 하고. 정의와 부정의는 끊임없이 고민하고, 또 스스로 다잡는 노력을 계속 해야 하는 것 같아요. 그리고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행동을 되돌아보고 반성하는 조심성, 이건 뭐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고요. 특히 여기에서 일하다보면 정말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잖아요. 오시는 분들이 다 사회적 경제를 이해하고 계시는 분들도 아니고. 그냥 저렴한 물건을 싸게 사러 오는 분들도 많고. 저는 특히 자원 활동가 선생님들을 함부로 대한다거나, 공정하게 누군가를 지원하고 도와야 하는 상황에서 누구누구의 지인, 이런 걸로 훅 치고 들어오는 사람들.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과 사회적 가치를 논하고 공익활동을 설명하고, 설득시키고 이런 과정들이 좀 힘들어요.
그리고, 제가 사회 첫 직장이 이 곳이잖아요. 이게 정말 최선이 맞나? 이런 의구심도 계속 들어요. 젊은 활동가의 한계라고 해야할까요. 경험이 부족해서 그런지... 순수한 마음을 이용하는 사람들에 대한 면역이 없어요. 심지어 때로는 그런 사람들에게 일을 배우는 상황이 있기도 하고. 그럴 때면 '아 내가 언제까지 더 이일을 할 수 있을까‘ 싶기는 해요.
그럼 어떤 점 때문에 계속 일하고 있는 거야?
음.. 어린 시절의 공동체성, 향수를 시민사회에서 많이 경험하고 있는 것 같아요. 아마 일반 회사였으면 이렇게까지는 못 경험할 것 같은데... 이런 점이 저를 계속 이 자리에 있게 만드는 것 같네요. 그리고 누나도 알다시피, 이 곳은 돈만 버는 직장이 아니잖아요. 재사용, 재활용, 나눔, 공익... 지역에 가치를 확산하면서 경제활동도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이 좋아요. 여전히 두근거려요. 누군가 손(도움)을 요구하면, 적시에 적절하게 손을 내미는 것이 중요하잖아요. 여기는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곳이니까. 전 첫 사회생활을 이곳에서 시작하면서, 장학금 받는 학생이라는 생각으로 활동해왔어요. 그 마음은 지금도 변함이 없죠. 많이 배우고 있어요. 많이 배웠고요.
이제 슬슬 마무리를 해볼까 싶네. 끝 질문! 젊은 청년, 그러니까 도라지와 같은 사회 초년생이 겪는 활동가로서의 어려움, 뭐가 있을까?
이런 질문 물어볼 줄 알았어요 (웃음) 가장 큰 건 월급이겠죠 뭐. (웃음) 알았어요. 음... 아무래도 사회변화를 일으키고 싶어서 이 쪽 영역을 선택거잖아요. 젊음 하나 믿고. 그런데 조직 내에서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충분한가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었어요. 미래 발전상이 크게 안보이는 슬픔이라고 해야 할까요. 저 만하더라도... 8년을 일하고 나서 그 다음은? 이런 고민이 들죠. 그리고 간혹 있는.. 선배들의 '될까?'하는 시선. "해봤는데 안 돼." 하는 시선은 젊은 활동가가 주체성을 가지고 발전하기 어렵게 만드는 것 같아요. 안전하게만 걸어갈 수 없잖아요.
도라지는 막내지만... 만약 주위의 동생이 이 영역에서 활동가로 일하겠다! 하는 고민을 상담하면, 도라지는 응원해줄거야?
응원이라. 응원. 그렇죠, 하죠. 어떤 점이 어렵고 또 어떤 점이 좋았는지에 대해 물어본다면 그것도 이야기 해줄래요. 사회적으로 활동한다고 하면 받게 되는 도덕적 책임에 대한 높은 기준과 시선이 때로는 부담스럽지만, 동시에 그렇기때문에 존엄을 가지고 일할 수 있다고 이야기하고 싶어요. 하지만, 먼저 물어보지 않으면 아무 말도 안해줄 것 같아요. 내가 경험한 것이 정답은 아니니까요. 그냥 내 생각을 전해주어도 처음은 막 그게 정답인 것 같고, 그렇게만 해야할 것 같고 그렇거든요. 전 그건 안할래요.
긴 인터뷰를 마치고 다시 도라지는 전주역으로 데려다 주었다. 올 때와는 달리 비가 제법 내리고 있다는 이유로.
반팔 소매를 입고 온 나(인터뷰어)를 걱정하며, 차에서 자신의 셔츠를 꺼내 챙겨주는 다정한 도라지. 돌아가는 서울 길이 멀다고 걱정하면서 "그래도 난 집에가서 바로 잘꺼예요" 하고 짖궂은 장난을 치는 도라지. 그러면서도 밤 11시, 도착예정시간까지 맞춰 안부를 물어주는 도라지. 이렇게 사람 좋고, 또 사람을 좋아하는 도라지를 만나고나니 새삼 기운이 솟는다. 뭉근하게 오래 끓인 보양식을 먹은 것처럼 배꼽부터 따뜻해지는 기분이다.
듣고 옮긴 이 : 비영리단체에서 7년을 일하다가, '고인 물'이 되기 싫어서 퇴사했다. 지금은 서울의 중간지원조직에서 지원하고 연결하는 일을 하고 있다. 세상을 바꾸겠다는 신념으로 시작했던 영역의 일이, 요즘은 내 작은 일상을 바꾸기도 힘들다는 것을 깨닫고 허우적대고 있다. 그럼에도 일단, 한다.
#진달래 #도라지 #공익활동 #전북 #전주 #전라북도 #청년 #사회적기업 #활동가인터뷰공모
대한민국 사회에서 사회운동가, 혹은 특정 시민사회단체에서 일하는 상근자를 ‘활동가’라고 칭한다. 하지만, 최근 활동가 담론에서는 사회혁신가, 사회적기업가, 소셜디자이너, 마을활동가 등 공공과 영리가 아닌 제 3섹터에서 활동하는 모든 이들을 활동가라고 포괄하여 명명한다. 이들 중에서도 청년 활동가는 조금 특별한 점이 있다. 청년 실업이 고착화된 사회구조와 이에 대응하는 청년 당사자들의 움직임 속에서 직업으로서 활동가를 선택한 이들. 과거 군부독재시절 목숨을 걸고 쟁취하려 했던 민주주의라던지, 대대적 통일운동이라던지, 사회 전반에서 펼쳐졌던 노동운동과 같이 치열했던 현장을 겪지는 않았지만, 누구보다 현재를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는 오늘의 청년이 하고 싶은 사회운동이란 무엇일까? 그리고 그 시작은 어디일까?
청년 활동가, 그 시작이 떠오르는 사람은 한 명이었다. 실천하는 사람의 선(善)을 믿고 따르는 청년활동가, 도라지(가명)씨. 아침부터 비가 온 탓인지 검은 구름이 낮게 내려 앉고, 더운 기운이 사방에 번져있는 6월의 전주. 기와를 멋있게 얹은 전주역에 점심쯤 도착했다. 전주의 느긋하고 다정한 인상은 오늘의 인터뷰이를 꼭 닮았다.
도라지(가명)씨는 34년째 이곳에 살고 있는 토박이다. 인터뷰어가 도라지(가명)씨를 알게 된 건 약 8년 전쯤, 한 비영리단체의 직원들이 모이는 워크샵의 장기자랑에서였는데, 대학을 졸업하지 마자 갓 입사했던 그가 당시 유행하는 개그맨의 분장을 하고 무대 위를 휘젓는 모습이 첫 인상이었다. 모두를 깔깔 웃게 만들던 능청스러움에 박장대소를 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면서도 무대에 내려와서는 수줍은 소년의 얼굴을 하고 귀까지 빨개졌던 도라지씨.
자원봉사자로 활동을 시작하여, 짧은 계약직을 거쳐 한 매장의 매니저로 일했던 도라지씨는 이 지역의 최연소 본부장이 되어서 왕성하게 활동하다가 얼마 전 보직을 사임하였다. 자원활동가로 시작하여 본부장까지 경험하고 다시 매니저로 돌아온 도라지씨를 아주 오랜만에 만났다. 도라지씨를 만나러 오는 길, 열차안에서 인터뷰 질문을 정리하며 첫 물음을 골랐다.
스물여섯의 청년이 사회의 첫 직장으로 비영리단체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경제적 보상이 충분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 분야에서 8년이 넘는 동안 지속적인 활동을 하게 하는 그 힘의 원동력은 어디에서 올까?
전공이 사회학이었네? 사회문제에는 언제부터 관심을 가졌던 거야?.
거창한 이유는 없어요. 사실 저희 집이 아버지부터 누나까지 다 공무원이었거든요. 저도 대학에서 공무원시험 준비 하겠다 생각하고 진학했던 거라 점수 맞춰서 간 거였어요. 그리고 공부 진짜 안했어요(웃음) 맨날 자고. 수업 빠지고(웃음) 그러다 군대갔다와서.. 이제 정신 차리고 공부해야지 하고 기웃기웃하는데 뭘 어떻게 해야 되는지 막막한 거예요. 근데 전공이 사회학이라.. 자연스럽게 그 쪽(?) 분야에 대한 공부를 시작했어요.
지역에서 가장 좋은 학교라고 손꼽히는 국립대학교의 사회학과에 진학했던 이유를 묻자, 그냥 점수에 맞춰서갔다라고 겸손하게 말하는 여전히 말간 얼굴. 그 대답이 또 평소의 그답게 너무나 솔직하고 담백해서, 사회학이라는 학문에 일정 환상을 가지고 있었던 나는 맥이 좀 빠진다.
그래도 뭔가 사회 돌아가는 상황이나 이슈 같은 거에 관심이 있었으니까 전공을 택했을 것 같은데. 조금이라도.
음..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았다기보다.. 저는 그냥 사람 자체를 좋아해서요. 엉성하지만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뭔가를 위해 힘을 합치는 게 좋아요. 한 두명의 엘리트가 진두지휘하는 것보다 집단의 지성과 연대. 이런 점에 많이 끌렸던 것 같아요. 지금도 그렇고요. 제가 어릴 때부터 친구들이 정말 많았거든요. 각자 다른 성격과 특징을 가진 사람들과 관계를 다양하게 가져가다보니 자연스럽게 형성 된 취향이라고 해야 할까?
근데 사회학이라는게.. 결국 사람 사는 것에 대한 공부잖아요. 저 사람은 무엇 때문에 기쁠까, 슬플까, 그런거. 좀 더 철학적으로 고민한다면 그래서 사회에는 어떤 영향을 미칠까 까지 나아가는 것 같고, 그런 고민들 속에서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데 이바지하는 사회적경제와 사회적기업에 관심을 가지게 됐어요. 어차피 경제생활을 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건 변함이 없는데, 이왕 하는 거 보다 사회에 이롭고 도움 되는 게 끌려서.
완벽하지 않은 환경과, 그보다 더 불완전한 사람들이 어설프지만 사회를 위한 노력을 쏟는 거, 애쓰며 좋은 무언가를 만들어내기 위한 힘을 모으는 것. 저는 그 자체를 좋아해요. 꼭 거창한 목표를 가지고 어떤 문제를 해결해야지. 이게 아니라.. 작든 크든 모두가 함께 해나가는 과정 안에서의 여러 시너지. 너무 좋지 않아요?
늘 이런식이다. 도라지(가명)은 내 편견을 항상 이렇게 말끔하게 깬다. 문제로부터 출발이 아니라 일상에서의 시작. 목표을 향해 달리는 것이 아니라 과정을 더 깊게 들여다보는 그의 시선은 늘 나를 깨운다.
사회적기업을 택하게 된 이유가 있었을 것 같은데.. 결정에 가장 영향을 받은 일이 뭐였어?
대학교 수업 중에 사회적기업과 관련한 과제를 수행해야 하는 게 있었어요. 그 때 봉사활동을 시작했었거든요. 그때는, 살아있는 현장 경험을 기반으로 과제를 완성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도서관가서 자료 찾고 인터넷 뒤지고 그러기보다 바로 경험해볼 수 있는 봉사활동을 찾아보기 시작했어요. 사회적기업에서 봉사활동을 해보고 그 경험을 기반으로 시작해야겠다 싶어서. 집 근처에 봉사활동을 할 수 있는 곳이 하나 있었는데, 제가 봉사활동을 신청했던 그 매장의 매니저님이 마침 제 대학동기였어요. 나는 봉사자였고. 그러다 보니 아무래도 봉사활동에 대한 조언도 많이 얻고, 관련해서 생기는 고민들을 나눌 수 있었어요. 그리고 새로운 봉사활동을 해볼 수 있는 기회도 많이 받았던 것 같아요. 딱 매장에서 정해져있는 봉사활동만 하지 않고, 외부에 캠페인을 나간다던지, 야외장터나 바자회 같은 것도 해보고. 저는 그런 활동들이 너무 재밌었어요.
친구가 추천해서 그곳으로 봉사활동을 갔던거야?
아니요, 전혀. 심지어 학교 다니면서 그렇게 막 친하거나 말을 많이 해보지도 못했어요. 제가 과 생활을 안했어 가지고… 되게 우연히, 가까워서 간 곳 이예요. 근데 봉사활동을 하면서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게 엄청 재밌고 즐겁더라구요. 여기가 좀 사람들이 다양하게 오잖아요. 어린학생부터 나이가 지긋한 할아버지까지. 고객으로 오는 사람들의 층위도 다양하고. 그렇게 봉사활동을 하다가, 매니저님께 계약직으로 한 3개월 짧게 일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았었는데 흔쾌히 수락했어요. 아마 그때가 육아휴직 갔던 간사님의 대체였던가 그럴거예요. 여하튼, 그렇게 시작했던 것이 자원봉사자에서 3개월 계약직 직원으로, 그리고 공채로 입사하게 되고.. 벌써 8년이 지났네요.
도라지(가명)는 첫 사회생활이 그곳이잖아. 주변에서 지지는 좀 많이 받았어?
음.. 어렸을 때부터 친구들 다 포함해서 이 쪽 바닥(?)에 있는 사람은 저 뿐이긴 해요. 그래서 처음에 시작할 때 큰 지지를 받지 못하면서 일을 시작했어요. 아무래도 이 영역에 대한 이해도 좀 떨어지기도 했고. 거기다 월급은 적고, 일은 많고 하다보니깐 부모님이 우려를 좀 하셨죠.
아, 그러고 보니 도라지(가명)의 어머님이 봉사활동을 하지 않으셨어?
기억력 좋네요(웃음) 맞아요. 저희 엄마는 지금도 계속 봉사활동을 하세요. 지금 1000시간도 넘었을거예요. 엄마가 마음이 진짜 여려요. 좀 어려운 사람 절대 그냥 못 지나치고, 또 집에 좀 괜찮은 게 있으면 맨날 주변사람들한테 퍼나르느라 바빠요(웃음) 아무래도 전 엄마 성격을 좀 많이 닮은 것 같은데 (웃음) 제가 어릴 때부터 봉사활동이나 이런 걸 하는 엄마를 보고 커서 그런지 이 사회적경제 쪽에서 하는 얘기가 영 낯설거나 하진 않았죠.
이로운 사회변화를 만들어내는 따뜻한 마음들이 모이는 장소라고 소개하는 곳에서 첫 사회인으로 발 디딘 도라지. 그 선택의 이유가 뭘까?
여기는 모두 기증품으로 이루어지잖아요. 기증품이 판매되어서 얻은 수익금이 다시 그 지역의 어려운 이웃들에게 환원되는. 자기 것을 내놓으면서 사회의 긍정적인 변화를 일으키려는 따뜻한 선의의 마음들이 얼마나 귀하고 감사해요. 저는 일상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그렇게 따뜻한 바람을 일으키고, 또 그 바람을 맞고 싶었어요. 제가 그리고 여러 사람들하고 부대끼며 사는 걸 정말 좋아해서… 공동체에 대한 욕구도 강하고. 어린 시절을 그렇게 보내서 그런가싶어요.
어린 시절 이야기 좀 해줄 수 있어?
어.. 제가 어릴 때는 뭐, 누나도 경험을 했겠지만, 집들이 정말 가까웠잖아요. 우리집에 엄마가 늦게 오면, 그냥 옆집 가서 밥 얻어먹고 놀고. 근처 골목에서 다 같이 놀다가 엄마가 데리러오면 같이 손잡고 들어가고. 지금은 공동체라고 해봐야 고작 친구관계가 다인데.. 그 때는 나이도 상관없고 성별도 상관없고 그냥 다 관계를 맺고 지냈었던 것 같아요. 트럭으로 과일 팔러오는 아저씨와도 하루 종일 놀고 수박 주시면 그거 또 같이 먹고 했었으니까. 제가 그리고 어릴 때부터 주변사람들한테 예쁨을 많이 받았어요(웃음) 거절 당하는 경험이 많지 않았고, 미움 받아 본 기억도 없고. 관계들이 다 좋았죠. 그렇게 사람들한테 둘러쌓여서 지내다보니 전 북적북적하고 왁자지껄한 그런 사람관계에 정말 익숙해요.
대학교생활은 어땠어?
여러모로 지금의 저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던 시절이 대학교예요. 몇 가지 큰 사건도 있었는데.. 대학교 때 제 친한 친구의 여자 친구가 자살을 했던 일이 있었어요. 저랑도 친했고. 그 친구가 조울증이었다고 하는데… 저랑 제 친구랑 밥을 먹고 있는데 그 여자 친구가 전화가 왔었거든요. 그래서 친구가 뭐, 지금 저(도라지)랑 밥먹고 있다. 이러고 끊었었는데… 그 후에 자살을 했죠. 한동안 되게 힘들었어요. 제가 좀 도울 수 있었을텐데.. 아쉽고 속상했어요.
그 일이 있고나서 뒤르켐의 <자살론>에 대한 공부를 했었어요. 자살은 사회적 현상이고, 그렇기 때문에 개인의 자살 이유도 사회적이라는 내용인데요. 저는 그 친구가 정말 조울증이라는 병 때문에 그런 선택을 한 건지, 아니면 사회에 적응하는 것이 어렵고 힘들어서 취한 선택인건지가 고민되더라구요. 후자라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구조적 문제인거니까. 만약 그 친구의 주변 사람들과 사회가 그 친구에게 좀 더 관심을 가지고 손을 내밀었다면… (침묵)
예전에 정신건강과 관련된 분야에서 자원봉사를 했다고 하지 않았었나?
네, 쉽게 설명하면, 프로그램에 참여를 신청한 사람과 봉사지가 멘티멘토의 관계를 맺어요. 그래서 주기적으로 만나 대화도 하고 여러 활동을 같이 하는 그런 활동이었어요. 제 멘티는 저랑 동갑이었는데, 이야기를 하다보니 나와 다를 게 전혀 없는 그런 친구였죠. 게임 좋아하고, 책값 받아서 게임방 가고, 시험기간에 공부안하고 만화책보고.. 다 똑같았죠.
유일한 차이는 이거였어요. 저희 부모님은 제가 말썽을 피울 때 끝까지 제가 잘할 수 있다고 응원하고 지지해주었거든요. 가끔 너무 심한 장난은 혼이 났지만, 그래도 전 저희 부모님이 절 사랑한다는 것을 의심해본적이 없어요. 그런데 그 친구의 부모님은 그 친구를 바로 정신병원에 보냈었죠. 그 친구는 정신병원에 가자마자 사회적 낙인이 찍혀서… 뭐만 하면 정신병자 이런 얘기들을 들으며 살았던 거예요. 저는 그 친구의 영향을 참 많이 받았다고 생각해요. 주변의 관심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배웠죠. 사람들과 함께 하는 관계가 얼마나 중요한지.
개인은 전체의 총합을 구성하는 요소로 그치는 게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이 존엄한, 사회를 구성하는 주체잖아요. 그런데 그 사실이 간과되기 쉬워요. 특히 개인이 고립되고 관계가 파편화되는 현대사회에서 더 심하죠. 개인이 강조되면서 공동체가 약화되는 건 너무 단순한 것 같아요.
흔히 사회적 경제는 호혜와 연대를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공동체의 복원과 지역 공동체의 활성화에 유용한 방법이라고 제시된다. 특히, 신자유주의 사회의 대안으로 주목받는데, 이런 맥락에서 도라지의 첫 사회생활은 너무나 적성에 맞는 직업군에서부터 출발했다고 말할 수 있었다.
관계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도라지에게, 공동체성이 중요시되는 시민사회의 활동가는 딱 맞는 직업인 것 같네. 호혜와 연대 빼면 아무것도 없는 영역이잖아 (웃음) 이쯤에서.. 이 영역에서 일하는 것, 어떤 점이 힘들어?
활동가는 참으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좀 불편해도 침묵하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사회는 더 좋은 발전으로 나아가지 못해요. 그런데 문제는 용기죠. 이 용기를 내는 게 가끔은 너무 어려워요. 관계를 이해하다보면, 그 입장을 또 알겠거든요. 그리고 사실 세상에 나쁜 사람은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라서. 다 그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이해가 가요. 그런데 침묵할 수는 없는 노릇인거죠.
이해관계가 부딪히는 상황에서, 근데 그게 옳고 그름의 문제라기보다 그냥 서로의 입장 차이인 경우에는 정말 어려운 것 같아요. 슬쩍 모른척하고 싶기도 하고. 정의와 부정의는 끊임없이 고민하고, 또 스스로 다잡는 노력을 계속 해야 하는 것 같아요. 그리고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행동을 되돌아보고 반성하는 조심성, 이건 뭐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고요. 특히 여기에서 일하다보면 정말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잖아요. 오시는 분들이 다 사회적 경제를 이해하고 계시는 분들도 아니고. 그냥 저렴한 물건을 싸게 사러 오는 분들도 많고. 저는 특히 자원 활동가 선생님들을 함부로 대한다거나, 공정하게 누군가를 지원하고 도와야 하는 상황에서 누구누구의 지인, 이런 걸로 훅 치고 들어오는 사람들.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과 사회적 가치를 논하고 공익활동을 설명하고, 설득시키고 이런 과정들이 좀 힘들어요.
그리고, 제가 사회 첫 직장이 이 곳이잖아요. 이게 정말 최선이 맞나? 이런 의구심도 계속 들어요. 젊은 활동가의 한계라고 해야할까요. 경험이 부족해서 그런지... 순수한 마음을 이용하는 사람들에 대한 면역이 없어요. 심지어 때로는 그런 사람들에게 일을 배우는 상황이 있기도 하고. 그럴 때면 '아 내가 언제까지 더 이일을 할 수 있을까‘ 싶기는 해요.
그럼 어떤 점 때문에 계속 일하고 있는 거야?
음.. 어린 시절의 공동체성, 향수를 시민사회에서 많이 경험하고 있는 것 같아요. 아마 일반 회사였으면 이렇게까지는 못 경험할 것 같은데... 이런 점이 저를 계속 이 자리에 있게 만드는 것 같네요. 그리고 누나도 알다시피, 이 곳은 돈만 버는 직장이 아니잖아요. 재사용, 재활용, 나눔, 공익... 지역에 가치를 확산하면서 경제활동도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이 좋아요. 여전히 두근거려요. 누군가 손(도움)을 요구하면, 적시에 적절하게 손을 내미는 것이 중요하잖아요. 여기는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곳이니까. 전 첫 사회생활을 이곳에서 시작하면서, 장학금 받는 학생이라는 생각으로 활동해왔어요. 그 마음은 지금도 변함이 없죠. 많이 배우고 있어요. 많이 배웠고요.
이제 슬슬 마무리를 해볼까 싶네. 끝 질문! 젊은 청년, 그러니까 도라지와 같은 사회 초년생이 겪는 활동가로서의 어려움, 뭐가 있을까?
이런 질문 물어볼 줄 알았어요 (웃음) 가장 큰 건 월급이겠죠 뭐. (웃음) 알았어요. 음... 아무래도 사회변화를 일으키고 싶어서 이 쪽 영역을 선택거잖아요. 젊음 하나 믿고. 그런데 조직 내에서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충분한가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었어요. 미래 발전상이 크게 안보이는 슬픔이라고 해야 할까요. 저 만하더라도... 8년을 일하고 나서 그 다음은? 이런 고민이 들죠. 그리고 간혹 있는.. 선배들의 '될까?'하는 시선. "해봤는데 안 돼." 하는 시선은 젊은 활동가가 주체성을 가지고 발전하기 어렵게 만드는 것 같아요. 안전하게만 걸어갈 수 없잖아요.
도라지는 막내지만... 만약 주위의 동생이 이 영역에서 활동가로 일하겠다! 하는 고민을 상담하면, 도라지는 응원해줄거야?
응원이라. 응원. 그렇죠, 하죠. 어떤 점이 어렵고 또 어떤 점이 좋았는지에 대해 물어본다면 그것도 이야기 해줄래요. 사회적으로 활동한다고 하면 받게 되는 도덕적 책임에 대한 높은 기준과 시선이 때로는 부담스럽지만, 동시에 그렇기때문에 존엄을 가지고 일할 수 있다고 이야기하고 싶어요. 하지만, 먼저 물어보지 않으면 아무 말도 안해줄 것 같아요. 내가 경험한 것이 정답은 아니니까요. 그냥 내 생각을 전해주어도 처음은 막 그게 정답인 것 같고, 그렇게만 해야할 것 같고 그렇거든요. 전 그건 안할래요.
긴 인터뷰를 마치고 다시 도라지는 전주역으로 데려다 주었다. 올 때와는 달리 비가 제법 내리고 있다는 이유로.
반팔 소매를 입고 온 나(인터뷰어)를 걱정하며, 차에서 자신의 셔츠를 꺼내 챙겨주는 다정한 도라지. 돌아가는 서울 길이 멀다고 걱정하면서 "그래도 난 집에가서 바로 잘꺼예요" 하고 짖궂은 장난을 치는 도라지. 그러면서도 밤 11시, 도착예정시간까지 맞춰 안부를 물어주는 도라지. 이렇게 사람 좋고, 또 사람을 좋아하는 도라지를 만나고나니 새삼 기운이 솟는다. 뭉근하게 오래 끓인 보양식을 먹은 것처럼 배꼽부터 따뜻해지는 기분이다.
듣고 옮긴 이 : 비영리단체에서 7년을 일하다가, '고인 물'이 되기 싫어서 퇴사했다. 지금은 서울의 중간지원조직에서 지원하고 연결하는 일을 하고 있다. 세상을 바꾸겠다는 신념으로 시작했던 영역의 일이, 요즘은 내 작은 일상을 바꾸기도 힘들다는 것을 깨닫고 허우적대고 있다. 그럼에도 일단,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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