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이번에 경주에서 탈핵학교를 크게 여셨어요.
‘파타고니아’의 지원을 받아서 하고 있어요. 회사 수익금의 1퍼센트를 환경운동에 기부하는 회사거든요. 국내에서 꽤 활동 중인 걸로 알아요. 워낙 세계적인 기업이라 1퍼센트라고 하지만 지원 금액이 크고 한국에 지원을 많이 하려 하는 것 같아요. 놀라운 건 지원은 해주되 간섭하지 않는다고. 회계에 대해 간섭하지 않아요. 결과물을 중심으로만 이야기하고. 우리나라랑은 지원방식이 다르죠.
Q. 지구 평균기온 1.5도 상승에 대한 포스팅이 인상적이었어요.
저는 기후위기와 관련된 활동을 전면적으로 하는 활동가는 아니에요. 핵발전소 문제나 환경운동연합 관련 일을 해요. 기후위기가 현재 제일 중요한 이슈이기는 하지만 제 활동 영역은 아니었어요. 오히려 다른 단체의 활동에 참여하면서 인식이 넓어졌고, 그러다 관련 책들을 차근차근 보게 되었어요.
최근에 요청으로 경주지역 노동운동하시는 분들에게 기후위기 관련해서 강연을 하게 되었어요. 자료를 모으고 이야기하면서 찾은 것들 중에 작년 2월부터 해서 평균기온상승이 1.5도가 넘었다는 자료가 있어서 자료를 보여드렸어요. 그러고 나서 한 주 지나 또 1.6도 이상 이야기가 나오니까 이에 관련한 꾸준한 자료가 나오는구나, 생각보다 심각하구나. 해서 글을 쓰고 공유했습니다.
최근에 보니 이제 1.5도는 포기해야하는 거 아니냐. 이제는 2도라도 방어해야 하는 거 아니냐 하고 있더라구요. 기후위기 대응도 후퇴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들어요. 게다가 그러면 2도라도 가능할까 하는 의문이 들어요. 기후강의 하시는 분들이 쓰시는 데이터를 보면 혁명적인 삶의 변화가 필요한데. 그게 보이지 않거든요.
기후위기가 오고 평균기온이 오르고 탄소배출이 늘어나면 지구의 종말이나 붕괴를 상상하는데 그러지 않다는 의견이 많아요. 아마 2050년에도 인류는 살아가고 있을 거예요. 다만 우리가 과거에 누렸던 삶의 패턴, 우리가 정상적이라고 생각했던 패턴은 상실될 것이고 우리 아이들들이 성인이 되었을 때는 소풍을 가거나 하는 그런 지금의 일상적인 삶이 사라질 수 있는 거지요. 상당 부분 유실되고 파괴될 것이지만 생존하고 있을 거고 그것이 주는 고통이 또 있겠지요. 기후위기는 그러한 관점에서 바라봐야 합니다.
Q. 그동안 주된 운동은 탈핵 운동이지요?
네. 경주에 있으니까. 직업적 환경운동은 2010년 5월에 경주환경운동연합에 입사하면서 활동가로 시작했어요. 늦게 환경운동을 시작한 거지요. 그때 당시에는 방폐장 전담활동가였어요. 그때 막 경주방폐장을 건설하고 있었거든요.
당시 동국대 의대 김익중 교수님이 환경운동연합에서 조용히 활동하시다 비대위 위원장 맡으시고 전면에 나서시게 되었고, 방폐장 문제에 힘이 부쳐 활동가가 필요하다, 중앙에 지원 요청해서 지원받고 제가 추천받았어요. 김익중 교수님을 만나고 이분과 일하면 재밌겠다 싶어서 입사하게 되었지요.
Q. 김익중 교수님이 활발히 꽤 오랫동안 탈핵활동을 해 오셨지요?
예. 힘든 일 많으셨어요. 경주환경운동연합에 오셨을 때 비대위 위원장으로 올라오셔 대표를 하셨고 그때 회원이 70명이었어요. 그래서 경주환경운동연합을 재건해야 하는 일이 시급했어요. 게다가 1년 뒤 후쿠시마 원전사고가 났구요. 선생님도 그 이전까지는 탈핵운동 활동가는 아니셨어요. 방폐장 문제가 현안이라 관련해서 활동하시다가 후쿠시마 사고가 터지면서 큰 충격을 받으셨나봐요.
한달을 집안에만 계셨다고 해요. 교수님 표현으로는 이게 뭐지 싶어 뉴스만 봤다고. 그러다 도달한 결론이 핵은 해서는 안되는구나 였고. 그때부터 탈핵 강연을 하기 시작하셨어요. 아마 수천 번 하셨을 거예요. 전국을 누비며 몇 년간. 차도 강연을 위해 연비가 좋은 걸로 바꾸시고. 그 강연들의 결과가 ‘한국탈핵’ 이라는 책이었어요. 출판사에 효자책이라고 하더라구요. 그전까지는 그만한 탈핵 교과서가 없었어요.
Q. 중간중간 새를 관찰한다거나 하는 일도 환경운동연합에서 하시나요?
저희는 한 번씩 회원들과 생태탐방을 가긴 하는데, 저희 회원 중에 생태 감수성이 뛰어나시고 새를 좋아하시고 개인적으로도 탐조에 관심 있는 분이 계세요. 그래서 탐조에 관심 있는 분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탐조를 하기 시작했는데 저도 거기 참여하고 있어요. 탐조활동은 회원들이 자발적으로 하고 있는 활동입니다.
Q. 그럼 탈핵 쪽이 지금까지 집중해서 해 온 일이네요
경주는 그게 제일 큰 현안이고 관련 일들이 계속 있었어요.
Q. 그러면 입사하시기 전에는 어떤 일을 했나요
학교 다닐 때 학생운동을 계속 했고 그러다보니 처음에는 노동조합에 있었어요. 동국대 의료노동조합에 있었고, 서른 넘어 그만두고 나와서 민주노동당 경주 상근자가 되었지요. 그때만 해도 경주에서는 민주노동당이 세가 있었어요.
Q. 이전 일들을 그만둘 때 개인적인 상황은 어땠나요
노동조합에서 그만둘 때는 힘들었어요. 크게 비전이 보이지 않았고, 그때는 젊었기 때문에 개인적인 비전이라기보다는, 노동조합 형편이 힘들었어요. 2000년 후반이었나 그때 들어갔는데, 동국대병원 생기고는 첫 파업이라고 했어요. 파업 준비를 열심히 했어요. 한 달 파업을 했고 파업은 잘 했는데 파업 이후에 일상으로 돌아갔을 때의 보복. 그걸 견뎌내지 못했어요. 파업할 때 조합원이 300명 넘었는데 이후로 조직적 탄압이 이어졌고 그 뒤로 조합은 계속 와해 되기만 했지요.
한 달 파업이 재밌었어요. 추석이 끼어있었는데 식당 노동자들이 추석 때 고향 가시면서 내가 명절 때 노는 건 처음이다 하셨을 때 좋았지요.
Q. 민노당 그만둘 때는 어땠어요?
좋은 일은 아닌데. 저는 상근자고 당의 집행부는 자꾸 바뀌는데 새로 오신 위원장과 갈등이 많았어요.
Q. 환경운동엽합에서 가장 오래 근무하셨네요. 정년퇴직 있나요?(웃음)
그런 게 없네요.(웃음) 고민입니다. 14년 차인데 옛날에는 10년 차만 봐도 까마득했는데. 이제 제가 14년 차니까. 저희가 큰 조직이 아니잖아요. 많아야 상근자 두 명인데. 상근자인 제가 나이 들어가니까 경주환경운동연합 자체가 나이 들어가고. 역동성이 떨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에요. 젊어져야 하는 과제가 있습니다.
Q. 제가 보기에는 경주에서 일관성 있게 오래 활동하신 것 같습니다. 그럴 수 있는 원동력이 무엇이었나요.
농담처럼 그런 말은 했어요. 배운 게 이거밖에 없다고. 그런데 솔직히 최근에는 그런 고민을 안 해봤어요. 그냥 할 일이 많다 라는 표현이 맞을 것 같아요.
Q. 사실 별별 일들이 많이 등장하잖아요. 경주에 대형 태극기 설치하는 거라든가
태극기 이야기하면, 벌써 공사 시작을 했어요. 작년에 그렇게 반대했는데 벌써 공사를 시작했네요. 일인시위를 해야 하나하고 집행위에 고민을 이야기했는데 결론은 우리가 막을 힘은 없지 않냐 그래도 기록은 남겨야겠다는 거였어요. 이 사업이 무슨 문제가 있는지. 모르는 사람이 많으니까.
그래서 성명서도 내고. 그런데도 볼 때마다 저걸 그냥 둬도 되나. 할 때 하더라도 계속 앞에 가서 시위를 해야 하지 않나 그런 생각들이 계속 있는 거예요. 그런데 제가 늙어가니까.. 옛날 같으면 가서 혼자 피켓이라도 들고 있었을텐데. 지금은 온갖 생각만 들고.
Q. 이야기를 들어보면 하시는 일에 만족감이 높고 이 일이 잘 맞는 일이신가봐요
노동조합이나 진보정당에 있었을 때는 생태나 생명에 대한 가치는 잘 몰랐어요. 환경운동 활동하면서 그런 가치들을 접하기 시작했어요. 제 입장에서는 이 단체와 인연이 된 게 행운이에요. 제 삶을 풍부하게 해 준 것 같고 고마워요.
Q. 어린시절의 기억은 어떤가요
제가 중2 때 까지 울산 남창 중학교에 있었어요. 87년도에 6월 항쟁이 일어나고. 저는 기억이 생생해요. 아버지가 다니시던 공장도 한 달 넘게 파업을 했어요. 노동조합이 그때 만들어지고. 태어난 건 부산 동래였는데 박정희가 공업화 추진하고 울산공업단지 만들면서 울산으로 이전되면서 가족이 울산변두리로 이사를 온 거죠. 럭키화학 사택에 살았어요.
거기 살 때만 해도 우리는 대문 닫아놓고 살지 않았어요. 어머니가 음식을 잘 했어요. 늘 우리 집에 동네 아주머니들이 오셔서 놀고 그랬어요. 동네 누나들이 많았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제가 이쁨을 많이 받았어요. 그렇게 자라다 중2에 한 달 간 파업을 할 때 우리 사택에서도 큰 찜통에 음식해서 공장 담벼락 안으로 넣어줬던 일이 생생해요.
울산 중앙중학교 2학년으로 전학을 했는데 그 학교가 과학학교로 지정이 되어있었어요. 첫 시험을 치고 과학점수가 제일 좋아서 표창창을 받았어요. 집에 과학전집이 있었는데 거기 빠져있었거든요. 중고등학교때는 ‘월간 뉴튼’을 구독했고, 그래서 그랬는지 환경운동연합의 활동들, 핵문제, 그게 다 이해가 잘 되더라구요. 그래서 강연을 하거나 환경운동연합 신입활동가가 오면 저에게 이과냐고 물어봐요. 문과인데.(웃음)
Q. 과학영재 바탕이 있었네요. 그래서 그런가 강연하시는 걸 들어보면 본인도 이해하고 이해시키려고 하시는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래서 재밌었고
2015년부턴가 그때부터 저희들이 갑상선암 공동소송을 하고 있었어요. 지금은 핵발전소 지역이 5개지만 그때는 4개였거든요. 거기에 5년 이상 거주하신 분들 중 갑상선암 진단을 받으신 전국 618명을 알게 되었고 그분들과 공동소송을 10년째 하고 있어요. 그 소송에서 1심 2심 다 지고 대법원에 가 있는 상태에요. 그 소송을 하면서 방사선에 대해 알아야 겠구나 싶었어요. 그 전까지는 그런 의식이 없었어요. 핵발전은 터지면 다 죽는다 뭐 이렇게 단순하게 생각했지 방사선에 대한 위험은 의식하지 못했어요. 일상적인 방사선 피폭의 위험성에 대한 인식이 생겼고 계속 공부를 하게 되었지요.
Q. 마지막 질문이네요. 만약 기회가 돼서 다른 일을 한다면 어떤가요
생태활동가가 하고 싶어요. 제가 이런 말 하면 생태활동가들에게 미안할 수 있지만 저는 탈핵운동을 하는데 발전소 안에 들어갈 수 없잖아요. 베일에 싸여있어요. 어렵게 공부하고 있고. 삭막해요. 생태운동은 현장에 들어가잖아요. 생명을 지키고. 그 운동이 쉬운 운동은 아니지만 좀 더 교감하고 초록을 담을 수 있는 운동을 하고 싶어요.
아! 그것도 하고 싶어요. 남북이 함께할 수 있는 활동들. 중국이 산업화를 늦게 했잖아요. 자동차로 볼 때는 내연기관 뛰어 넘고 바로 전기차로 갔어요. 어마어마한 성장이죠. 북한도 곧바로 재생에너지로 점프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그러한 것들은 남북이 함께할 수 있는 거 아닌가 싶거든요. 정책 되지 않아서 그렇지 우리도 역량이 있으니 가능하지 않을까요. 체제비판을 떠나서 북한의 경우에는 지도자만 결심하면 되잖아요. 그런 체제적인 이점을 활용해서 점핑 했으면 좋겠어요. 그런 바람이 있습니다.
#경주 #환경련 #환경운동연합 #이상홍 #탈핵 #기후위기
글쓴이 _ 경주피터 김용진
경주에 살고 있다. 모두누림경주교육사회적협동조합 이사장, 인문학공간 <신촌서당>대표
Q. 이번에 경주에서 탈핵학교를 크게 여셨어요.
‘파타고니아’의 지원을 받아서 하고 있어요. 회사 수익금의 1퍼센트를 환경운동에 기부하는 회사거든요. 국내에서 꽤 활동 중인 걸로 알아요. 워낙 세계적인 기업이라 1퍼센트라고 하지만 지원 금액이 크고 한국에 지원을 많이 하려 하는 것 같아요. 놀라운 건 지원은 해주되 간섭하지 않는다고. 회계에 대해 간섭하지 않아요. 결과물을 중심으로만 이야기하고. 우리나라랑은 지원방식이 다르죠.
Q. 지구 평균기온 1.5도 상승에 대한 포스팅이 인상적이었어요.
저는 기후위기와 관련된 활동을 전면적으로 하는 활동가는 아니에요. 핵발전소 문제나 환경운동연합 관련 일을 해요. 기후위기가 현재 제일 중요한 이슈이기는 하지만 제 활동 영역은 아니었어요. 오히려 다른 단체의 활동에 참여하면서 인식이 넓어졌고, 그러다 관련 책들을 차근차근 보게 되었어요.
최근에 요청으로 경주지역 노동운동하시는 분들에게 기후위기 관련해서 강연을 하게 되었어요. 자료를 모으고 이야기하면서 찾은 것들 중에 작년 2월부터 해서 평균기온상승이 1.5도가 넘었다는 자료가 있어서 자료를 보여드렸어요. 그러고 나서 한 주 지나 또 1.6도 이상 이야기가 나오니까 이에 관련한 꾸준한 자료가 나오는구나, 생각보다 심각하구나. 해서 글을 쓰고 공유했습니다.
최근에 보니 이제 1.5도는 포기해야하는 거 아니냐. 이제는 2도라도 방어해야 하는 거 아니냐 하고 있더라구요. 기후위기 대응도 후퇴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들어요. 게다가 그러면 2도라도 가능할까 하는 의문이 들어요. 기후강의 하시는 분들이 쓰시는 데이터를 보면 혁명적인 삶의 변화가 필요한데. 그게 보이지 않거든요.
기후위기가 오고 평균기온이 오르고 탄소배출이 늘어나면 지구의 종말이나 붕괴를 상상하는데 그러지 않다는 의견이 많아요. 아마 2050년에도 인류는 살아가고 있을 거예요. 다만 우리가 과거에 누렸던 삶의 패턴, 우리가 정상적이라고 생각했던 패턴은 상실될 것이고 우리 아이들들이 성인이 되었을 때는 소풍을 가거나 하는 그런 지금의 일상적인 삶이 사라질 수 있는 거지요. 상당 부분 유실되고 파괴될 것이지만 생존하고 있을 거고 그것이 주는 고통이 또 있겠지요. 기후위기는 그러한 관점에서 바라봐야 합니다.
Q. 그동안 주된 운동은 탈핵 운동이지요?
네. 경주에 있으니까. 직업적 환경운동은 2010년 5월에 경주환경운동연합에 입사하면서 활동가로 시작했어요. 늦게 환경운동을 시작한 거지요. 그때 당시에는 방폐장 전담활동가였어요. 그때 막 경주방폐장을 건설하고 있었거든요.
당시 동국대 의대 김익중 교수님이 환경운동연합에서 조용히 활동하시다 비대위 위원장 맡으시고 전면에 나서시게 되었고, 방폐장 문제에 힘이 부쳐 활동가가 필요하다, 중앙에 지원 요청해서 지원받고 제가 추천받았어요. 김익중 교수님을 만나고 이분과 일하면 재밌겠다 싶어서 입사하게 되었지요.
Q. 김익중 교수님이 활발히 꽤 오랫동안 탈핵활동을 해 오셨지요?
예. 힘든 일 많으셨어요. 경주환경운동연합에 오셨을 때 비대위 위원장으로 올라오셔 대표를 하셨고 그때 회원이 70명이었어요. 그래서 경주환경운동연합을 재건해야 하는 일이 시급했어요. 게다가 1년 뒤 후쿠시마 원전사고가 났구요. 선생님도 그 이전까지는 탈핵운동 활동가는 아니셨어요. 방폐장 문제가 현안이라 관련해서 활동하시다가 후쿠시마 사고가 터지면서 큰 충격을 받으셨나봐요.
한달을 집안에만 계셨다고 해요. 교수님 표현으로는 이게 뭐지 싶어 뉴스만 봤다고. 그러다 도달한 결론이 핵은 해서는 안되는구나 였고. 그때부터 탈핵 강연을 하기 시작하셨어요. 아마 수천 번 하셨을 거예요. 전국을 누비며 몇 년간. 차도 강연을 위해 연비가 좋은 걸로 바꾸시고. 그 강연들의 결과가 ‘한국탈핵’ 이라는 책이었어요. 출판사에 효자책이라고 하더라구요. 그전까지는 그만한 탈핵 교과서가 없었어요.
Q. 중간중간 새를 관찰한다거나 하는 일도 환경운동연합에서 하시나요?
저희는 한 번씩 회원들과 생태탐방을 가긴 하는데, 저희 회원 중에 생태 감수성이 뛰어나시고 새를 좋아하시고 개인적으로도 탐조에 관심 있는 분이 계세요. 그래서 탐조에 관심 있는 분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탐조를 하기 시작했는데 저도 거기 참여하고 있어요. 탐조활동은 회원들이 자발적으로 하고 있는 활동입니다.
Q. 그럼 탈핵 쪽이 지금까지 집중해서 해 온 일이네요
경주는 그게 제일 큰 현안이고 관련 일들이 계속 있었어요.
Q. 그러면 입사하시기 전에는 어떤 일을 했나요
학교 다닐 때 학생운동을 계속 했고 그러다보니 처음에는 노동조합에 있었어요. 동국대 의료노동조합에 있었고, 서른 넘어 그만두고 나와서 민주노동당 경주 상근자가 되었지요. 그때만 해도 경주에서는 민주노동당이 세가 있었어요.
Q. 이전 일들을 그만둘 때 개인적인 상황은 어땠나요
노동조합에서 그만둘 때는 힘들었어요. 크게 비전이 보이지 않았고, 그때는 젊었기 때문에 개인적인 비전이라기보다는, 노동조합 형편이 힘들었어요. 2000년 후반이었나 그때 들어갔는데, 동국대병원 생기고는 첫 파업이라고 했어요. 파업 준비를 열심히 했어요. 한 달 파업을 했고 파업은 잘 했는데 파업 이후에 일상으로 돌아갔을 때의 보복. 그걸 견뎌내지 못했어요. 파업할 때 조합원이 300명 넘었는데 이후로 조직적 탄압이 이어졌고 그 뒤로 조합은 계속 와해 되기만 했지요.
한 달 파업이 재밌었어요. 추석이 끼어있었는데 식당 노동자들이 추석 때 고향 가시면서 내가 명절 때 노는 건 처음이다 하셨을 때 좋았지요.
Q. 민노당 그만둘 때는 어땠어요?
좋은 일은 아닌데. 저는 상근자고 당의 집행부는 자꾸 바뀌는데 새로 오신 위원장과 갈등이 많았어요.
Q. 환경운동엽합에서 가장 오래 근무하셨네요. 정년퇴직 있나요?(웃음)
그런 게 없네요.(웃음) 고민입니다. 14년 차인데 옛날에는 10년 차만 봐도 까마득했는데. 이제 제가 14년 차니까. 저희가 큰 조직이 아니잖아요. 많아야 상근자 두 명인데. 상근자인 제가 나이 들어가니까 경주환경운동연합 자체가 나이 들어가고. 역동성이 떨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에요. 젊어져야 하는 과제가 있습니다.
Q. 제가 보기에는 경주에서 일관성 있게 오래 활동하신 것 같습니다. 그럴 수 있는 원동력이 무엇이었나요.
농담처럼 그런 말은 했어요. 배운 게 이거밖에 없다고. 그런데 솔직히 최근에는 그런 고민을 안 해봤어요. 그냥 할 일이 많다 라는 표현이 맞을 것 같아요.
Q. 사실 별별 일들이 많이 등장하잖아요. 경주에 대형 태극기 설치하는 거라든가
태극기 이야기하면, 벌써 공사 시작을 했어요. 작년에 그렇게 반대했는데 벌써 공사를 시작했네요. 일인시위를 해야 하나하고 집행위에 고민을 이야기했는데 결론은 우리가 막을 힘은 없지 않냐 그래도 기록은 남겨야겠다는 거였어요. 이 사업이 무슨 문제가 있는지. 모르는 사람이 많으니까.
그래서 성명서도 내고. 그런데도 볼 때마다 저걸 그냥 둬도 되나. 할 때 하더라도 계속 앞에 가서 시위를 해야 하지 않나 그런 생각들이 계속 있는 거예요. 그런데 제가 늙어가니까.. 옛날 같으면 가서 혼자 피켓이라도 들고 있었을텐데. 지금은 온갖 생각만 들고.
Q. 이야기를 들어보면 하시는 일에 만족감이 높고 이 일이 잘 맞는 일이신가봐요
노동조합이나 진보정당에 있었을 때는 생태나 생명에 대한 가치는 잘 몰랐어요. 환경운동 활동하면서 그런 가치들을 접하기 시작했어요. 제 입장에서는 이 단체와 인연이 된 게 행운이에요. 제 삶을 풍부하게 해 준 것 같고 고마워요.
Q. 어린시절의 기억은 어떤가요
제가 중2 때 까지 울산 남창 중학교에 있었어요. 87년도에 6월 항쟁이 일어나고. 저는 기억이 생생해요. 아버지가 다니시던 공장도 한 달 넘게 파업을 했어요. 노동조합이 그때 만들어지고. 태어난 건 부산 동래였는데 박정희가 공업화 추진하고 울산공업단지 만들면서 울산으로 이전되면서 가족이 울산변두리로 이사를 온 거죠. 럭키화학 사택에 살았어요.
거기 살 때만 해도 우리는 대문 닫아놓고 살지 않았어요. 어머니가 음식을 잘 했어요. 늘 우리 집에 동네 아주머니들이 오셔서 놀고 그랬어요. 동네 누나들이 많았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제가 이쁨을 많이 받았어요. 그렇게 자라다 중2에 한 달 간 파업을 할 때 우리 사택에서도 큰 찜통에 음식해서 공장 담벼락 안으로 넣어줬던 일이 생생해요.
울산 중앙중학교 2학년으로 전학을 했는데 그 학교가 과학학교로 지정이 되어있었어요. 첫 시험을 치고 과학점수가 제일 좋아서 표창창을 받았어요. 집에 과학전집이 있었는데 거기 빠져있었거든요. 중고등학교때는 ‘월간 뉴튼’을 구독했고, 그래서 그랬는지 환경운동연합의 활동들, 핵문제, 그게 다 이해가 잘 되더라구요. 그래서 강연을 하거나 환경운동연합 신입활동가가 오면 저에게 이과냐고 물어봐요. 문과인데.(웃음)
Q. 과학영재 바탕이 있었네요. 그래서 그런가 강연하시는 걸 들어보면 본인도 이해하고 이해시키려고 하시는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래서 재밌었고
2015년부턴가 그때부터 저희들이 갑상선암 공동소송을 하고 있었어요. 지금은 핵발전소 지역이 5개지만 그때는 4개였거든요. 거기에 5년 이상 거주하신 분들 중 갑상선암 진단을 받으신 전국 618명을 알게 되었고 그분들과 공동소송을 10년째 하고 있어요. 그 소송에서 1심 2심 다 지고 대법원에 가 있는 상태에요. 그 소송을 하면서 방사선에 대해 알아야 겠구나 싶었어요. 그 전까지는 그런 의식이 없었어요. 핵발전은 터지면 다 죽는다 뭐 이렇게 단순하게 생각했지 방사선에 대한 위험은 의식하지 못했어요. 일상적인 방사선 피폭의 위험성에 대한 인식이 생겼고 계속 공부를 하게 되었지요.
Q. 마지막 질문이네요. 만약 기회가 돼서 다른 일을 한다면 어떤가요
생태활동가가 하고 싶어요. 제가 이런 말 하면 생태활동가들에게 미안할 수 있지만 저는 탈핵운동을 하는데 발전소 안에 들어갈 수 없잖아요. 베일에 싸여있어요. 어렵게 공부하고 있고. 삭막해요. 생태운동은 현장에 들어가잖아요. 생명을 지키고. 그 운동이 쉬운 운동은 아니지만 좀 더 교감하고 초록을 담을 수 있는 운동을 하고 싶어요.
아! 그것도 하고 싶어요. 남북이 함께할 수 있는 활동들. 중국이 산업화를 늦게 했잖아요. 자동차로 볼 때는 내연기관 뛰어 넘고 바로 전기차로 갔어요. 어마어마한 성장이죠. 북한도 곧바로 재생에너지로 점프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그러한 것들은 남북이 함께할 수 있는 거 아닌가 싶거든요. 정책 되지 않아서 그렇지 우리도 역량이 있으니 가능하지 않을까요. 체제비판을 떠나서 북한의 경우에는 지도자만 결심하면 되잖아요. 그런 체제적인 이점을 활용해서 점핑 했으면 좋겠어요. 그런 바람이 있습니다.
#경주 #환경련 #환경운동연합 #이상홍 #탈핵 #기후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