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기로 마음먹은 순간보다 그 마음 멈추기로 한 순간이 보다 길고 아리게 남는다. 상담활동가 고진달래는 이주 노동자와 성매매 여성들에 대한 관심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던 순간 멈추기로 했고, 그 후 몇 년을 전업 심리상담가로 살았다. 상담이 버거워지던 때, 네팔로 떠났다. 그곳에서 충만한 장면들을 채워왔고, 반성매매 인권행동 ‘이룸’으로 다시 돌아갔다. 그리고 지금은 반성매매 활동가가 아닌 상담 활동가로 심리상담소 ‘잇다’를 열었다. 누군가를 전력으로 좋아했던 흔적은 결코 지워지지 않는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여전히 사람과 사람을 잇고 있는 고진달래 소장을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 운동이 아닌 사람과 존재에 빠져들며
Q. 지금은 심리 상담가, 활동가이지만, 이주 노동과 반성매매 활동가로도 오래 활동하셨어요. 어떻게 처음 활동을 시작하셨는지 듣고 싶어요.
대학교 다니던 시절이 총여학생회가 세워졌을 때는 아니었어요. 대신 여성주의 학회를 만들었죠. 공부 모임을 했었는데 종종 노동 운동하는 선배들과 토론할 때도 있었어요. 성매매에 대한 토론을 하면 확연히 갈렸어요. 노동 운동하는 선배들은 항상 ‘성 노동’이라고 이야기했죠. 저는 노동의 측면이 아닌 분명 다른 측면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 제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어요.
대학을 졸업하고, 천호동 성매매 집결지에서 일하는 수녀님에게 연락해서 ‘소냐의 집’에서 활동을 시작했어요. 뒤돌아볼 것도 없이 성매매 여성들을 알고 싶다는 마음으로 뛰어들었죠. 이후에는 천호동에서 청량리 반성매매 인권행동 ‘이룸’으로 가서 여성들을 지원하는 일을 했죠.
이룸에 다니면서 저녁과 주말에는 이주 노동자들을 만났어요. 반성매매 활동을 시작하기 1년 전 즈음부터 이주 노동자들 농성에 결합해서 활동하기도 했어요. 아나키스트 친구들과 ‘투쟁과 밥’이라는 활동을 했죠. 이주 노동자 문제를 알리고, 같이 밥을 해서 나눠 먹기도 하고요. 이주 노동자에게 한글을 알려주고, 농성장 잡일도 많이 했어요.
Q. 이주 노동자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도 궁금해요.
저는 사람에게 먼저 관심이 가는 거 같아요. 노동 운동 혹은 여성 운동으로 시작하는 게 아니라 어떤 대상을 만나고, 그 사람에서 넓혀나가는 거죠. 이주 노동자를 만나서 노동을 알게 됐고, 그들의 언어, 한국에서의 위치성 등이 마음에 더 깊이 들어왔어요.
Q. 반성매매 인권행동 ‘이룸’에서의 활동에 대해 조금 더 들을 수 있을까요?
성매매 집결지 안의 여성들을 주로 만났어요. 스물다섯 무렵에 일을 시작했는데 더 잘 만나고 싶다는 생각을 항상 가지고 있었어요. 개인적으로 큰 주제인 이주 노동자와 성매매 여성은 직접 살아본 경험이 없는 대상이죠. 그렇기 때문에 대상에 대한 고민이 훨씬 더 컸어요. 복잡했고, 가끔은 괴롭기도 했던 거 같아요. 만남은 불균등할 수밖에 없어요. 쉽사리 우리는 친구, 동지라고 말하기 어려운 거죠. 위선적이라고도 생각했던 것 같아요. 나와 그들 사이에 있는 간극에서 괴로워하며 만났어요.
‘이룸’에서 만난 동료들은 비슷한 지향점과 관점을 가지고 있어서 많은 토론과 대화를 거쳐 같이 해나갔죠. ‘이룸’에서 청량리 성매매 여성들과 반상회도 진행했었는데 우리가 결정한 사항을 전달하는 게 아니라 청량리의 사람들과 같이 만들어 갔죠. 여성들은 항상 대상화되어 있는데 적어도 우리 관계에서는 그렇지 않기를 바라면서요. 하나를 결정해도 여성들과 같이 결정하고, 여성들과 의논한다는 게 중요했어요. 여전히 간극은 존재했겠지만, 이러한 관점을 가지고 활동했어요.
Q. 청량리 기록 사업도 진행하셨어요.
여성들에게 카메라를 나눠주고 각자 기억하는 청량리는 어떤 곳인지 기록하는 작업을 했어요. 역사문제연구소와 함께 청량리의 역사, 기억의 방식, 우리는 또 어떻게 사업을 진행했는지에 대해서도 정립해 나가기도 하면서요. 청량리 기록화 사업을 두 번 진행했죠. 한 번은 여성들의 인터뷰가 들어간 『천일야화』라는 책으로, 두 번째는 사진과 역사가 기록된『청량리』라는 책으로 결과가 나왔어요.
사진 작업을 하면서 이주 노동자 문화 예술 단체인 아시아미디어컬쳐팩토리(AMC)에서 정소희 강사를 초빙했어요. 정소희 활동가는 이주 노동자에게 영상 교육을 하고 있었어요. 당시는 우리의 생각을 전달하는 게 아니라 이주 노동 당사자의 이야기 자체가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때였어요. 이주 노동자를 대상으로 정소희 활동가가 진행하는 수업을 들은 적이 있는데 간단하더라고요. 이주 노동자와 하는 작업은 언어가 굉장히 중요해요. 이주 노동자들이 한국어에 능통하지 않기 때문이죠.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어려운 말을 쓸 때가 많은데 군더더기 없이 심플하게 수업하는게 인상적이었어요. 쉬운 단어와 단문으로 말하는 게 중요한 태도라고 생각해요.
60, 70대 성매매 쪽방촌 여성들에게 사진을 교육할 사람이 떠오르지 않았는데 정소희 활동가가 적임자였어요. 언니들에게 카메라를 나눠줬던 시점은 이미 청량리 성매매집결지가 재개발 중인 때였어요. 무너진 곳도 있고, 철거 준비를 하는 곳도 있었어요. 이러한 상황에서도 언니들은 일을 해야 했고요. 스마트폰으로 사진 찍는 법을 교육하고, 카메라를 많이 기증받아서 나눠드렸죠. 찍어오면 서로 뭘 찍었는지 같이 보고, 책에 넣을 사진을 선택하고요. 성매매 집결지 현장은 밖에서 보는 것과 안에서 보는 게 완전히 달라요. 그들이 살았던 공간이기도 하니까요. 그들의 눈으로 본 현장이 책에 실렸어요.
개인적으로 사진 작업을 좋아했어요. 책 작업 이후에도 계속 모임에서 여행 갈 때면 일회용 카메라를 사서 서로 찍은 걸 보고 이야기하는 과정을 가졌죠.
#. 잠시 멈추면서 보았던 일들
Q. ‘소냐의 집’과 ‘이룸’에서 활동하시다가 잠깐 휴식을 가지셨어요.
반성매매 활동가로 스물여섯에 시작해서 5년 활동하고, 중간에 쉬었다가 다시 5년 활동하고 나왔어요. 제가 처음 ‘소냐의 집’에서 일할 때, 수녀님이 상담을 권유하셨어요. 상담을 받으면서 활동을 했으면 좋겠다고요. 성매매 집결지에서 만난 여성들이 대부분 또래였어요. 활동하면서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어요. 때로는 그들의 사연도 버거웠죠. 수녀님이 일정 부분 상담비를 지원해 주셔서 상담을 받으면서 일을 했어요.
당시 상담사 선생님이 공부를 해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하셨어요. 스물일곱에 상담 대학원에 갔죠. 낮에는 활동을, 밤에는 대학원에 다녔어요. 사실 활동가가 상담 공부를 한다는게 납득이 잘 안 됐어요. 학부에서는 사회과학대 정치 외교를 전공했기 때문에 당시에는 개인의 문제를 살피기보다는 사회적인 문제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거든요. 심리학을 공부한다는 사실이 잘 소화되지 않아서 엉성하게 학교를 다녔어요.(웃음) 막연히 여성들에게 도움이 될 거라는 마음으로요. 상담할 거라고도 생각하지 않았어요. 활동가 정체성이 훨씬 강했죠.
처음 이룸을 떠날 때쯤 청량리 사업을 담당하고 있었어요. 정부 지침에 맞게 활동해야 지원금이 나왔죠. 이룸의 측면에서 동의할 수 없는 부분들이 존재했어요. 정부 지원금을 받는다는 거 자체가 부대 끼기도 했고요. 이러한 일들이 이룸의 성격과 맞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정부 지원금을 반납했어요.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허무했어요. 활동을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했죠. 활동을 정리한 뒤, 심리 상담을 업으로 삼았어요. 다시 수련하고, 상담 자격증을 따고, 돈 벌고 자립하는 과정을 보냈죠. 6~7년 정도 일했는데 상담에서도 답을 못 찾았어요. 상담은 일대일의 관계 안에서 벌어지는 일인데 여러 내적 갈등을 겪게 되는 지점이 있어요. 상담은 나랑 안 맞다고 생각해서 네팔로 떠났죠.
Q. 왜 네팔이었을까요?
2003~2004년 전쯤 명동성당에서 이주 노동자들과 농성했었어요. 농성을 거치며 이주 노동자들의 노조가 만들어졌죠. 그들의 언어가 익숙해지고, 가끔 부르는 국가마저도 익숙해졌죠. 네팔 티베트 불교 성지 보더나트에서 2년 정도 살았었어요. 제2의 고향 같은 곳이죠. ‘잇다’에서 피우는 향은 네팔 어디를 가도 맡을 수 있는 향이에요. 네팔에서 일 년쯤 지냈을 때, 대지진을 겪었어요. 대지진 이후의 일 년이 정말 좋았어요. 네팔인들이 지진에서 회복하는 모습이 저에게는 치유적으로 다가왔죠. 네팔 사람은 공동체성과 유머를 가지고 있어요. 대지진과 더불어 물자도 부족한 상황이었는데 서로 밥을 먹었는지 살뜰하게 챙겨요. 여진을 겪을 때도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이 어렵겠냐며 농담하더라고요.
네팔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결국 다시 공동체라는 결론에 도달했어요. 트라우마는 개인적인 측면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는 생각도 했고요. 만약 다시 상담한다면 사회적인 상담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우선 한국으로 돌아가면서 이룸에 연락해서 다시 일하게 됐죠.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는 이룸에서 활동하고, 토요일에는 신경정신과에서 상담했어요. 신경정신과와 발달센터에서 일하면서 생각을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어요.
Q. 전업 상담과 네팔 생활을 마치고 이룸으로 돌아온 뒤의 5년은 어떠셨나요?
이룸에 다시 돌아온 변을 이야기하는 자리에서 성매매가 뭔지 알고 싶다고 말했어요. 이전 활동 기간에는 성매매 여성 지원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어요. 그러다 보니 성매매 자체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고 느꼈어요. 성매매에 대해 보다 알게 되고, 발화하고 싶다는 목표를 가지고 돌아왔어요. 글을 쓰든 강의하든 내가 아는 만큼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 해야겠다고 생각했죠. 연대도 많이 했고, 공부도 많이 했어요.
제가 20대 때 만났던 청량리 여성분들과 다시 만나서 모임도 꾸리고, ‘불량 언니 작업장’도 만들고, 여러 단체와 동료들과 네트워킹하며 지냈어요.
이 과정을 통해 이제는 명확하게 알았어요. 성매매는 빈곤의 문제다. 빈곤의 문제는 이론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는 확신이 들었어요. 그렇다면 나는 내가 믿는 관점을 실천하고 사는 방법밖에 없다는 게 명확해졌어요.
생각이 명확해지면서 활동은 충분히 했다고 느껴졌어요. 더불어서 체력적으로 힘들기도 했어요. 개인적으로 안 좋은 일들이 겹치기도 했고요. 또 마음속에서 ‘상담은 무엇인가?’라는 의문이 생겼고, 답을 찾고 싶었어요. 내가 20대에 열중했던 성매매에 대해서는 알게 됐는데 내가 관심을 가졌던 다른 분야인 상담은 어떨까 싶었죠. 상담도 보수적인 집단인데 내가 조금 다른 역할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지금도 부족하다고 느끼지만, 당시에는 계속 부족하다는 느낌만 가득했어요. 상담을 계속하다 보니 내가 지금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은 무엇인지 어렴풋하게 말할 수 있게 됐어요. 앞으로 보다 명확히 하고 싶어요. 시간이 걸리겠지만요.
#. 내가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서로를 이으며
Q. ‘심리상담소 잇다’는 어떤 공간인지 궁금해요.
4년 전에 만든 상담 공간이에요. 거의 모든 소품은 다 네팔에서 온 거에요. 제가 좋아하는 것들을 모아뒀어요. 제가 가장 안정적이었을 때가 네팔에서 지내던 시절이에요. 여기 오시는 분들도 제가 네팔에서 느꼈던 안정감을 느낄 수 있기를 바라며 이렇게 꾸몄어요.
‘잇다’라는 이름의 공간이 최근에 여러 방면으로 많아져서 바꿔야 하나 고민이에요.(웃음) 예전부터 제가 어떤 공간을 만든다고 하면 내가 만났고, 관심 가졌던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곳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이주 노동자, 성매매 여성, 아나키스트 친구들, 활동가들, 노동자들이요.
Q. 심리상담소 ‘잇다’에 오시는 분들은 주로 어떤 분들일까요?
내담자분들이 어느 정도 정해져 있어요. 기관 통해서 오시는 젠더 폭력 피해자, 성폭력 피해 경험 여성, 성매매 여성들이 있고요. 최근에는 예술가들이 비율이 높아졌고, 노동자, 목사님들도 오시고요
Q. ‘잇다’가 신길동에 자리 잡게 된 이유도 있을까요?
처음 상담소를 열려고 준비할 때, 청량리에서 반성매매 운동을 할 때라서 신설동, 동대문을 기점으로 알아봤어요. 성매매 여성들이 쉽게 방문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한적한 걸 좋아하는데 동대문은 그런 분위기는 아니죠. 1호선 라인을 따라서 찾아보다가 우연히 신길역에 도착했어요. 생전 처음 오는 역이었어요. 대방에서 걸어오는데 높은 건물 없이 탁 트여있어서 좋았어요.
상상 해봤어요. ‘잇다’에서 상담받고 나왔는데 높은 건물들만 즐비하면 혹 외롭지는 않을까 하고요. 낮은 건물들이 아늑하게 있기를 바랐어요. 처음에는 신길역이 보이는 오피스텔에서 1년 정도 있었어요. 지금은 주택가 일 층으로 왔는데 땅이랑 접지된 느낌이 정말 좋아요. 고양이들도 와서 밥 먹고 가고, 유치원 아이들인 인사하고 가고, 어르신들이 식물에 물도 주고 가시고요.
Q. 심리 상담소 ‘잇다’의 페이지를 보면 여러 관심사를 살펴볼 수 있어요.
젠더 폭력, 성매매 여성과 이주 노동자는 저에게 뗄 수 없는 존재들이죠. 상담의 주제는 트라우마이고, 이들의 정체성에 관심이 많아요. 인간의 실존에도 관심있죠. 영적인 것도요.
요가에도 관심 있어요. 요가 경전 보는 것도 좋아하고요. 자주 하려고 하는데 쉽지는 않아요.(웃음) 새해 목표로 매일 요가하기가 들어가죠. 오시는 분들에게 요가 동영상을 종종 추천해요. 요가에 대해 말하다 보면 몸을 이야기할 수 있어서 좋아요. 상담은 마음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잖아요. 요가를 통해 몸과 마음이 하나로 되어 있다는 걸 이야기할 수 있어서 좋아요. 싱잉볼도 좋아해서 여러 개 수집하고 있네요.
관심사에 타로도 있어요. 상담으로 활용하지는 않고, 개인적으로 사용할 뿐이에요. 간혹 교육용으로 사용할 때는 있어요. 오랜 기간 다산 콜센터 여성들과 교육 과정을 함께했어요. 자기 마음을 살펴보는데 타로가 도움이 될 수 있어요. 잘 사용하면 좋은 도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조직 점검이나 교육용 워크숍을 진행하게 되면 수지애니어그램을 활용해요. 자기 본질을 바라보는데 좋은 도구라고 생각해요. MBTI와 다르게 본질을 이야기할 수 있죠. 내가 태어나면서 갖게 되는 본질적인 특징을 깨닫고, 이해하면서 나의 성장을 위해서는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지 명확하게 보여주는 도구라고 생각해요. 사람마다 각자 특징이 다르다는 걸 이해하는 데 효율적이에요.
Q. 심리상담소 ‘잇다’에서 한 활동 중에 기억에 남는 일이 있으실까요?
이제서야 조금씩 만들어가고 있어요. ‘이룸’에서 나와서 활동가가 아닌 다른 정체성을 떠올리는 게 한동안 어려웠어요. ‘저는 상담을 합니다’라고 말하는 게 낯간지러웠죠. 이러한 시기를 거쳐서 올해부터는 여러 활동을 시작했어요.
활동가들과 프로그램을 2년째하고 있는데 요즘은 수지 애니어그램을 해요. 매주 토요일에는 여성 활동가를 대상으로 하는 명상 모임을 하고요. 올해 처음으로 여성주의 트라우마 연구 모임을 만들었어요. 활동가와 상담가를 엮어내는 게 제 역할이지 않을까 생각해요. 여성주의 상담은 상담가만으로는 절대 할 수 없어요. 현장에 있는 활동가와 같이 이야기 해나가면서 만들어가야 해요. 상담 진단을 하다 보면 성별에 따라 다르게 내리는 경우가 있어요. 이러한 점들을 여성주의자들끼리 이야기해보자는 취지에요. 죽음에 대해서도 이야기해보고 싶어서 죽음에 대한 책 읽기 모임도 진행해요.
이러한 활동은 상담계에서 비주류에요. 그래서 위축됐던 거 같아요. 내가 보는 관점을 내 슈퍼바이저나 다른 주류 관점에서 납득할 수 있을까. 이전까지는 의심 했다면 이제는 확신을 갖게 되는 시기라고 생각해요.
#. 밀물과 썰물이 반복되듯
Q. 활동가로, 상담가로서 지내오면서 마음에 오래 남은 장면이나 기억이 있을까요?
‘불량 언니 작업장’을 만들 때, 많은 분이 도와주셨어요. 사진 작업을 하고 싶다고 하면 사진기를 보내주시기도 하고, 뜨개질하고 싶다고 하면 전국에서 실이 들어왔죠. 경향 신문 기자 분이 와서 저희가 하는 작업을 소개해 주시고 하고요.
‘불량 언니 작업장’을 몇 년 같이하다 보니 언니들이 노동자 대회에 나가보고 싶다고 했어요. 한참 버닝썬 이슈가 터질 때였는데 다같이 행진했어요. 부스를 열어서 다른 노동자들과 서로 소개도 하고요. 저는 이런 장면들을 좋아해요. 우리 힘으로만 할 수 없는 일인데 합심해서 무언가 이루어 내는 장면이요.
Q. 활동가 그리고 상담가로 활동하다 보면 다른 사람과 다른 사람의 마음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될 거 같아요. 그러다 보면 자신과 자기 마음에는 소홀해질 때도 있고요. 활동가분들이 자기 소진에 대해 종종 이야기하는 걸 듣기도 했는데 소장님은 어떤 방식으로 자신을 돌보시는지 궁금해요.
어려운 문제예요. 왜냐하면 일할 때는 잘 몰라요. 제가 활동을 멈춘 시점을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저도 잘 마무리하지 못했다고 생각해요. 그만둔 때를 떠올려 보면 저를 극한까지 몰고 갔었어요. 지나고 나서야 내가 그때 서운했구나, 힘들었다는 걸 알게 됐죠. 당시에는 저 자신을 관리하지 못했어요. 스스로 상태를 알아차린 채로 그만뒀다면 지금과는 다른 모습일 거 같아요.
네팔 가기 직전도 나를 끝까지 몰아세운 상태였어요. 그렇기 때문에 네팔에 가기로 순식간에 결정할 수 있었죠. 연말이었는데 내년에도 이렇게 상담 노동하면서 살 수 있는지 물어보면 전혀 아닌 거죠. 만약 상담을 조금씩 줄여나가고, 자기 돌봄을 잘했다면 그만두지 않았을 수도 있어요.
혹시 지금 본인이 힘든 상황에 있다면 본인이 다 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자신을 살펴봤을 때, 짜증이 괜히 많아졌다면 분명 안 좋은 상태예요. 지금 해야 하는 일을 잠깐 멈춰도 되고, 내가 다 해내지 않아도 돼요. 자신의 상태를 잘 알아야 하죠.
사실 두 번째 그만둘 때는 확실한 계기가 있었어요. ‘n번방 사건’이 터졌어요. 당시 기사를 하나도 못 봤어요. 한참을 지나서야 조금 찾아봤죠. 사건 다음 날, 아침에 출근하는데 하늘이 너무 맑고 높고 비현실적인 거예요. 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죠. 내가 아무리 열심히 해도 소용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범죄의 형태가 너무 진화해서 내가 감당할 수 없구나. 너무 큰 구조와 싸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활동이라는 게 내가 열심히 하는 만큼 보상이 돌아오기는 힘든 구조예요. 활동가 개인이 이러한 허무의 순간을 마주칠 확률이 다른 직업군보다 훨씬 높다고 생각해요. 활동에 의문이 들기 시작하면 이어지는 질문에서 헤어 나오기 어려워요. 당시 저도 이런 마음을 나눌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지 못했죠.
많은 생각들을 나눠야 돼요. 허무의 순간을 마주하는 건 활동가들에게 트라우마가 될 수 있어요. 너무 순식간에 사건이 들이닥치고, 트라우마가 생겨나기 때문에 미처 준비할 틈이 없기도 하죠. 그럼에도 활동가 혼자 겪는 일이 아니니까 꼭 어려움과 허무, 괴로움을 서로 나누면 좋겠어요.
Q. 요즘은 어려움을 잘 나누시나요?
그런 것 같아요. 그리고 사실 스트레스 받는 일이 별로 없어요. 회의하는 게 더 힘들어요.(웃음) 다시 회의하면서 살라고 하면 못할 거 같아요.
상담에는 경계가 있어요. 그리고 그 경계가 정말 중요해요. 상담에서는 지금 상대가 어떤 상태에 있고, 어떤 힘이 있고, 스스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잘 파악해야 해요. 상대를 침범하지 않는 게 중요하죠. 너무 많은 개입은 오만이 될 수 있고, 방관하면 직무 유기가 돼요. 상담가의 적절한 선을 찾는 데 오랜 훈련이 필요하죠.
심리 상담에서 해결은 상담가의 몫은 아니에요. 내담자가 자기 속도와 자기의 걸음으로 가야 하는 거죠. 저는 거기에 발맞추면 되는 거라서 훨씬 에너지를 덜 쓰게 돼요. 상담가가 조절을 잘하지 못하면 서로 다른 내담자의 문제가 섞일 수도 있기 때문에 자신의 상태를 잘 만들어 놓는 것도 중요하죠.
상담은 안전한 구조화가 되어 있어요. 그러나 활동에서의 상담은 선을 침범하게 되는 경우가 많아요. 침범에 대한 부담과 해결에 대한 부담도 있죠. 어려워요.
Q. 고진달래 소장님에게 반성매매 활동은 어떤 의미였을지도 궁금합니다.
얼마 전 명동 성당 이주 노동자 농성 20주년이 있었어요. 네팔과 방글라데시 노동자들이 한데 모이는 자리였어요. 지금까지의 연대 활동이 어떤 의미였는지에 대한 질문을 그 때도 받았어요. 제 인생에서 빠질 수 없는 두 대상이 성매매 여성과 이주 노동자에요. 지금도 빠질 수 없고요. 왜 그럴까 생각해 봤어요. 이 사람들을 만났을 때가 가장 순수하게 저항했던 시기에요. 당시 만났던 아나키스트 친구들을 포함해서 지금 저의 사고방식을 만들어주고, 이전까지 해본 적 없는 질문을 던져준 존재들이죠.
Q. 심리상담소 ‘잇다’는 앞으로 어떤 공간이 될까요?
말씀드렸듯이 저는 상담 하는 대상이 정해져 있는데 가끔 외부 대상들이 연락이 오는 경우도 있어요. 제가 잘 알지 못하는 대상을 ‘잇다’로 들이기는 어려워요. LGBT 깃발이 걸려 있고, 여기에 오는 대상들은 이주노동자, 성매매 여성으로 확고하죠. 이들과 만나는 게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방식이에요. 영역을 잘 확장하는 동료들도 있어요. 가끔은 질투가 날 때도 있어요.(웃음) 하지만 그건 제가 할 수 있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지금처럼 오밀조밀 상담하며 지내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다독이고 있어요. 나의 기질이라고 생각하면서요.
‘잇다’라는 말처럼 사람들을 연결하고 싶은 욕심도 있으면서 반대로는 나를 잘 다스리며 명상하고, 요가하며 지내고 싶은 마음이 충돌해요. 저에게는 두 가지 기질이 있는 거죠. 연결하고자 하는 기질과 홀로 고요하고 있고자 하는 기질. 두 기질을 잘 다스리면서 지내면 좋겠네요.
#심리상담소 #고진달래 #고진달래
인터뷰어 : 김민범
문학을 오래 공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보다 잘 듣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바라는 사람입니다.
2024공익활동가주간을 맞아 다양한 지역과 분야에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변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는 활동가들을 만나 이들의 일과 삶에 대한 이야기를 기록하는 활동가인터뷰 공모 프로젝트를 진행했습니다. 인터뷰 공모에는 여러 지역의 활동가들이 참여해주셨습니다. 이 프로젝트는 <공익활동가사회적협동조합 동행>, <한국시민사회지원조직네트워크>, <지리산이음>이 공동주최하고, <아름다운재단>이 지원했습니다. |
좋아하기로 마음먹은 순간보다 그 마음 멈추기로 한 순간이 보다 길고 아리게 남는다. 상담활동가 고진달래는 이주 노동자와 성매매 여성들에 대한 관심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던 순간 멈추기로 했고, 그 후 몇 년을 전업 심리상담가로 살았다. 상담이 버거워지던 때, 네팔로 떠났다. 그곳에서 충만한 장면들을 채워왔고, 반성매매 인권행동 ‘이룸’으로 다시 돌아갔다. 그리고 지금은 반성매매 활동가가 아닌 상담 활동가로 심리상담소 ‘잇다’를 열었다. 누군가를 전력으로 좋아했던 흔적은 결코 지워지지 않는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여전히 사람과 사람을 잇고 있는 고진달래 소장을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 운동이 아닌 사람과 존재에 빠져들며
Q. 지금은 심리 상담가, 활동가이지만, 이주 노동과 반성매매 활동가로도 오래 활동하셨어요. 어떻게 처음 활동을 시작하셨는지 듣고 싶어요.
대학교 다니던 시절이 총여학생회가 세워졌을 때는 아니었어요. 대신 여성주의 학회를 만들었죠. 공부 모임을 했었는데 종종 노동 운동하는 선배들과 토론할 때도 있었어요. 성매매에 대한 토론을 하면 확연히 갈렸어요. 노동 운동하는 선배들은 항상 ‘성 노동’이라고 이야기했죠. 저는 노동의 측면이 아닌 분명 다른 측면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 제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어요.
대학을 졸업하고, 천호동 성매매 집결지에서 일하는 수녀님에게 연락해서 ‘소냐의 집’에서 활동을 시작했어요. 뒤돌아볼 것도 없이 성매매 여성들을 알고 싶다는 마음으로 뛰어들었죠. 이후에는 천호동에서 청량리 반성매매 인권행동 ‘이룸’으로 가서 여성들을 지원하는 일을 했죠.
이룸에 다니면서 저녁과 주말에는 이주 노동자들을 만났어요. 반성매매 활동을 시작하기 1년 전 즈음부터 이주 노동자들 농성에 결합해서 활동하기도 했어요. 아나키스트 친구들과 ‘투쟁과 밥’이라는 활동을 했죠. 이주 노동자 문제를 알리고, 같이 밥을 해서 나눠 먹기도 하고요. 이주 노동자에게 한글을 알려주고, 농성장 잡일도 많이 했어요.
Q. 이주 노동자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도 궁금해요.
저는 사람에게 먼저 관심이 가는 거 같아요. 노동 운동 혹은 여성 운동으로 시작하는 게 아니라 어떤 대상을 만나고, 그 사람에서 넓혀나가는 거죠. 이주 노동자를 만나서 노동을 알게 됐고, 그들의 언어, 한국에서의 위치성 등이 마음에 더 깊이 들어왔어요.
Q. 반성매매 인권행동 ‘이룸’에서의 활동에 대해 조금 더 들을 수 있을까요?
성매매 집결지 안의 여성들을 주로 만났어요. 스물다섯 무렵에 일을 시작했는데 더 잘 만나고 싶다는 생각을 항상 가지고 있었어요. 개인적으로 큰 주제인 이주 노동자와 성매매 여성은 직접 살아본 경험이 없는 대상이죠. 그렇기 때문에 대상에 대한 고민이 훨씬 더 컸어요. 복잡했고, 가끔은 괴롭기도 했던 거 같아요. 만남은 불균등할 수밖에 없어요. 쉽사리 우리는 친구, 동지라고 말하기 어려운 거죠. 위선적이라고도 생각했던 것 같아요. 나와 그들 사이에 있는 간극에서 괴로워하며 만났어요.
‘이룸’에서 만난 동료들은 비슷한 지향점과 관점을 가지고 있어서 많은 토론과 대화를 거쳐 같이 해나갔죠. ‘이룸’에서 청량리 성매매 여성들과 반상회도 진행했었는데 우리가 결정한 사항을 전달하는 게 아니라 청량리의 사람들과 같이 만들어 갔죠. 여성들은 항상 대상화되어 있는데 적어도 우리 관계에서는 그렇지 않기를 바라면서요. 하나를 결정해도 여성들과 같이 결정하고, 여성들과 의논한다는 게 중요했어요. 여전히 간극은 존재했겠지만, 이러한 관점을 가지고 활동했어요.
Q. 청량리 기록 사업도 진행하셨어요.
여성들에게 카메라를 나눠주고 각자 기억하는 청량리는 어떤 곳인지 기록하는 작업을 했어요. 역사문제연구소와 함께 청량리의 역사, 기억의 방식, 우리는 또 어떻게 사업을 진행했는지에 대해서도 정립해 나가기도 하면서요. 청량리 기록화 사업을 두 번 진행했죠. 한 번은 여성들의 인터뷰가 들어간 『천일야화』라는 책으로, 두 번째는 사진과 역사가 기록된『청량리』라는 책으로 결과가 나왔어요.
사진 작업을 하면서 이주 노동자 문화 예술 단체인 아시아미디어컬쳐팩토리(AMC)에서 정소희 강사를 초빙했어요. 정소희 활동가는 이주 노동자에게 영상 교육을 하고 있었어요. 당시는 우리의 생각을 전달하는 게 아니라 이주 노동 당사자의 이야기 자체가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때였어요. 이주 노동자를 대상으로 정소희 활동가가 진행하는 수업을 들은 적이 있는데 간단하더라고요. 이주 노동자와 하는 작업은 언어가 굉장히 중요해요. 이주 노동자들이 한국어에 능통하지 않기 때문이죠.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어려운 말을 쓸 때가 많은데 군더더기 없이 심플하게 수업하는게 인상적이었어요. 쉬운 단어와 단문으로 말하는 게 중요한 태도라고 생각해요.
60, 70대 성매매 쪽방촌 여성들에게 사진을 교육할 사람이 떠오르지 않았는데 정소희 활동가가 적임자였어요. 언니들에게 카메라를 나눠줬던 시점은 이미 청량리 성매매집결지가 재개발 중인 때였어요. 무너진 곳도 있고, 철거 준비를 하는 곳도 있었어요. 이러한 상황에서도 언니들은 일을 해야 했고요. 스마트폰으로 사진 찍는 법을 교육하고, 카메라를 많이 기증받아서 나눠드렸죠. 찍어오면 서로 뭘 찍었는지 같이 보고, 책에 넣을 사진을 선택하고요. 성매매 집결지 현장은 밖에서 보는 것과 안에서 보는 게 완전히 달라요. 그들이 살았던 공간이기도 하니까요. 그들의 눈으로 본 현장이 책에 실렸어요.
개인적으로 사진 작업을 좋아했어요. 책 작업 이후에도 계속 모임에서 여행 갈 때면 일회용 카메라를 사서 서로 찍은 걸 보고 이야기하는 과정을 가졌죠.
#. 잠시 멈추면서 보았던 일들
Q. ‘소냐의 집’과 ‘이룸’에서 활동하시다가 잠깐 휴식을 가지셨어요.
반성매매 활동가로 스물여섯에 시작해서 5년 활동하고, 중간에 쉬었다가 다시 5년 활동하고 나왔어요. 제가 처음 ‘소냐의 집’에서 일할 때, 수녀님이 상담을 권유하셨어요. 상담을 받으면서 활동을 했으면 좋겠다고요. 성매매 집결지에서 만난 여성들이 대부분 또래였어요. 활동하면서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어요. 때로는 그들의 사연도 버거웠죠. 수녀님이 일정 부분 상담비를 지원해 주셔서 상담을 받으면서 일을 했어요.
당시 상담사 선생님이 공부를 해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하셨어요. 스물일곱에 상담 대학원에 갔죠. 낮에는 활동을, 밤에는 대학원에 다녔어요. 사실 활동가가 상담 공부를 한다는게 납득이 잘 안 됐어요. 학부에서는 사회과학대 정치 외교를 전공했기 때문에 당시에는 개인의 문제를 살피기보다는 사회적인 문제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거든요. 심리학을 공부한다는 사실이 잘 소화되지 않아서 엉성하게 학교를 다녔어요.(웃음) 막연히 여성들에게 도움이 될 거라는 마음으로요. 상담할 거라고도 생각하지 않았어요. 활동가 정체성이 훨씬 강했죠.
처음 이룸을 떠날 때쯤 청량리 사업을 담당하고 있었어요. 정부 지침에 맞게 활동해야 지원금이 나왔죠. 이룸의 측면에서 동의할 수 없는 부분들이 존재했어요. 정부 지원금을 받는다는 거 자체가 부대 끼기도 했고요. 이러한 일들이 이룸의 성격과 맞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정부 지원금을 반납했어요.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허무했어요. 활동을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했죠. 활동을 정리한 뒤, 심리 상담을 업으로 삼았어요. 다시 수련하고, 상담 자격증을 따고, 돈 벌고 자립하는 과정을 보냈죠. 6~7년 정도 일했는데 상담에서도 답을 못 찾았어요. 상담은 일대일의 관계 안에서 벌어지는 일인데 여러 내적 갈등을 겪게 되는 지점이 있어요. 상담은 나랑 안 맞다고 생각해서 네팔로 떠났죠.
Q. 왜 네팔이었을까요?
2003~2004년 전쯤 명동성당에서 이주 노동자들과 농성했었어요. 농성을 거치며 이주 노동자들의 노조가 만들어졌죠. 그들의 언어가 익숙해지고, 가끔 부르는 국가마저도 익숙해졌죠. 네팔 티베트 불교 성지 보더나트에서 2년 정도 살았었어요. 제2의 고향 같은 곳이죠. ‘잇다’에서 피우는 향은 네팔 어디를 가도 맡을 수 있는 향이에요. 네팔에서 일 년쯤 지냈을 때, 대지진을 겪었어요. 대지진 이후의 일 년이 정말 좋았어요. 네팔인들이 지진에서 회복하는 모습이 저에게는 치유적으로 다가왔죠. 네팔 사람은 공동체성과 유머를 가지고 있어요. 대지진과 더불어 물자도 부족한 상황이었는데 서로 밥을 먹었는지 살뜰하게 챙겨요. 여진을 겪을 때도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이 어렵겠냐며 농담하더라고요.
네팔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결국 다시 공동체라는 결론에 도달했어요. 트라우마는 개인적인 측면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는 생각도 했고요. 만약 다시 상담한다면 사회적인 상담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우선 한국으로 돌아가면서 이룸에 연락해서 다시 일하게 됐죠.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는 이룸에서 활동하고, 토요일에는 신경정신과에서 상담했어요. 신경정신과와 발달센터에서 일하면서 생각을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어요.
Q. 전업 상담과 네팔 생활을 마치고 이룸으로 돌아온 뒤의 5년은 어떠셨나요?
이룸에 다시 돌아온 변을 이야기하는 자리에서 성매매가 뭔지 알고 싶다고 말했어요. 이전 활동 기간에는 성매매 여성 지원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어요. 그러다 보니 성매매 자체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고 느꼈어요. 성매매에 대해 보다 알게 되고, 발화하고 싶다는 목표를 가지고 돌아왔어요. 글을 쓰든 강의하든 내가 아는 만큼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 해야겠다고 생각했죠. 연대도 많이 했고, 공부도 많이 했어요.
제가 20대 때 만났던 청량리 여성분들과 다시 만나서 모임도 꾸리고, ‘불량 언니 작업장’도 만들고, 여러 단체와 동료들과 네트워킹하며 지냈어요.
이 과정을 통해 이제는 명확하게 알았어요. 성매매는 빈곤의 문제다. 빈곤의 문제는 이론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는 확신이 들었어요. 그렇다면 나는 내가 믿는 관점을 실천하고 사는 방법밖에 없다는 게 명확해졌어요.
생각이 명확해지면서 활동은 충분히 했다고 느껴졌어요. 더불어서 체력적으로 힘들기도 했어요. 개인적으로 안 좋은 일들이 겹치기도 했고요. 또 마음속에서 ‘상담은 무엇인가?’라는 의문이 생겼고, 답을 찾고 싶었어요. 내가 20대에 열중했던 성매매에 대해서는 알게 됐는데 내가 관심을 가졌던 다른 분야인 상담은 어떨까 싶었죠. 상담도 보수적인 집단인데 내가 조금 다른 역할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지금도 부족하다고 느끼지만, 당시에는 계속 부족하다는 느낌만 가득했어요. 상담을 계속하다 보니 내가 지금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은 무엇인지 어렴풋하게 말할 수 있게 됐어요. 앞으로 보다 명확히 하고 싶어요. 시간이 걸리겠지만요.
#. 내가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서로를 이으며
Q. ‘심리상담소 잇다’는 어떤 공간인지 궁금해요.
4년 전에 만든 상담 공간이에요. 거의 모든 소품은 다 네팔에서 온 거에요. 제가 좋아하는 것들을 모아뒀어요. 제가 가장 안정적이었을 때가 네팔에서 지내던 시절이에요. 여기 오시는 분들도 제가 네팔에서 느꼈던 안정감을 느낄 수 있기를 바라며 이렇게 꾸몄어요.
‘잇다’라는 이름의 공간이 최근에 여러 방면으로 많아져서 바꿔야 하나 고민이에요.(웃음) 예전부터 제가 어떤 공간을 만든다고 하면 내가 만났고, 관심 가졌던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곳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이주 노동자, 성매매 여성, 아나키스트 친구들, 활동가들, 노동자들이요.
Q. 심리상담소 ‘잇다’에 오시는 분들은 주로 어떤 분들일까요?
내담자분들이 어느 정도 정해져 있어요. 기관 통해서 오시는 젠더 폭력 피해자, 성폭력 피해 경험 여성, 성매매 여성들이 있고요. 최근에는 예술가들이 비율이 높아졌고, 노동자, 목사님들도 오시고요
Q. ‘잇다’가 신길동에 자리 잡게 된 이유도 있을까요?
처음 상담소를 열려고 준비할 때, 청량리에서 반성매매 운동을 할 때라서 신설동, 동대문을 기점으로 알아봤어요. 성매매 여성들이 쉽게 방문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한적한 걸 좋아하는데 동대문은 그런 분위기는 아니죠. 1호선 라인을 따라서 찾아보다가 우연히 신길역에 도착했어요. 생전 처음 오는 역이었어요. 대방에서 걸어오는데 높은 건물 없이 탁 트여있어서 좋았어요.
상상 해봤어요. ‘잇다’에서 상담받고 나왔는데 높은 건물들만 즐비하면 혹 외롭지는 않을까 하고요. 낮은 건물들이 아늑하게 있기를 바랐어요. 처음에는 신길역이 보이는 오피스텔에서 1년 정도 있었어요. 지금은 주택가 일 층으로 왔는데 땅이랑 접지된 느낌이 정말 좋아요. 고양이들도 와서 밥 먹고 가고, 유치원 아이들인 인사하고 가고, 어르신들이 식물에 물도 주고 가시고요.
Q. 심리 상담소 ‘잇다’의 페이지를 보면 여러 관심사를 살펴볼 수 있어요.
젠더 폭력, 성매매 여성과 이주 노동자는 저에게 뗄 수 없는 존재들이죠. 상담의 주제는 트라우마이고, 이들의 정체성에 관심이 많아요. 인간의 실존에도 관심있죠. 영적인 것도요.
요가에도 관심 있어요. 요가 경전 보는 것도 좋아하고요. 자주 하려고 하는데 쉽지는 않아요.(웃음) 새해 목표로 매일 요가하기가 들어가죠. 오시는 분들에게 요가 동영상을 종종 추천해요. 요가에 대해 말하다 보면 몸을 이야기할 수 있어서 좋아요. 상담은 마음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잖아요. 요가를 통해 몸과 마음이 하나로 되어 있다는 걸 이야기할 수 있어서 좋아요. 싱잉볼도 좋아해서 여러 개 수집하고 있네요.
관심사에 타로도 있어요. 상담으로 활용하지는 않고, 개인적으로 사용할 뿐이에요. 간혹 교육용으로 사용할 때는 있어요. 오랜 기간 다산 콜센터 여성들과 교육 과정을 함께했어요. 자기 마음을 살펴보는데 타로가 도움이 될 수 있어요. 잘 사용하면 좋은 도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조직 점검이나 교육용 워크숍을 진행하게 되면 수지애니어그램을 활용해요. 자기 본질을 바라보는데 좋은 도구라고 생각해요. MBTI와 다르게 본질을 이야기할 수 있죠. 내가 태어나면서 갖게 되는 본질적인 특징을 깨닫고, 이해하면서 나의 성장을 위해서는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지 명확하게 보여주는 도구라고 생각해요. 사람마다 각자 특징이 다르다는 걸 이해하는 데 효율적이에요.
Q. 심리상담소 ‘잇다’에서 한 활동 중에 기억에 남는 일이 있으실까요?
이제서야 조금씩 만들어가고 있어요. ‘이룸’에서 나와서 활동가가 아닌 다른 정체성을 떠올리는 게 한동안 어려웠어요. ‘저는 상담을 합니다’라고 말하는 게 낯간지러웠죠. 이러한 시기를 거쳐서 올해부터는 여러 활동을 시작했어요.
활동가들과 프로그램을 2년째하고 있는데 요즘은 수지 애니어그램을 해요. 매주 토요일에는 여성 활동가를 대상으로 하는 명상 모임을 하고요. 올해 처음으로 여성주의 트라우마 연구 모임을 만들었어요. 활동가와 상담가를 엮어내는 게 제 역할이지 않을까 생각해요. 여성주의 상담은 상담가만으로는 절대 할 수 없어요. 현장에 있는 활동가와 같이 이야기 해나가면서 만들어가야 해요. 상담 진단을 하다 보면 성별에 따라 다르게 내리는 경우가 있어요. 이러한 점들을 여성주의자들끼리 이야기해보자는 취지에요. 죽음에 대해서도 이야기해보고 싶어서 죽음에 대한 책 읽기 모임도 진행해요.
이러한 활동은 상담계에서 비주류에요. 그래서 위축됐던 거 같아요. 내가 보는 관점을 내 슈퍼바이저나 다른 주류 관점에서 납득할 수 있을까. 이전까지는 의심 했다면 이제는 확신을 갖게 되는 시기라고 생각해요.
#. 밀물과 썰물이 반복되듯
Q. 활동가로, 상담가로서 지내오면서 마음에 오래 남은 장면이나 기억이 있을까요?
‘불량 언니 작업장’을 만들 때, 많은 분이 도와주셨어요. 사진 작업을 하고 싶다고 하면 사진기를 보내주시기도 하고, 뜨개질하고 싶다고 하면 전국에서 실이 들어왔죠. 경향 신문 기자 분이 와서 저희가 하는 작업을 소개해 주시고 하고요.
‘불량 언니 작업장’을 몇 년 같이하다 보니 언니들이 노동자 대회에 나가보고 싶다고 했어요. 한참 버닝썬 이슈가 터질 때였는데 다같이 행진했어요. 부스를 열어서 다른 노동자들과 서로 소개도 하고요. 저는 이런 장면들을 좋아해요. 우리 힘으로만 할 수 없는 일인데 합심해서 무언가 이루어 내는 장면이요.
Q. 활동가 그리고 상담가로 활동하다 보면 다른 사람과 다른 사람의 마음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될 거 같아요. 그러다 보면 자신과 자기 마음에는 소홀해질 때도 있고요. 활동가분들이 자기 소진에 대해 종종 이야기하는 걸 듣기도 했는데 소장님은 어떤 방식으로 자신을 돌보시는지 궁금해요.
어려운 문제예요. 왜냐하면 일할 때는 잘 몰라요. 제가 활동을 멈춘 시점을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저도 잘 마무리하지 못했다고 생각해요. 그만둔 때를 떠올려 보면 저를 극한까지 몰고 갔었어요. 지나고 나서야 내가 그때 서운했구나, 힘들었다는 걸 알게 됐죠. 당시에는 저 자신을 관리하지 못했어요. 스스로 상태를 알아차린 채로 그만뒀다면 지금과는 다른 모습일 거 같아요.
네팔 가기 직전도 나를 끝까지 몰아세운 상태였어요. 그렇기 때문에 네팔에 가기로 순식간에 결정할 수 있었죠. 연말이었는데 내년에도 이렇게 상담 노동하면서 살 수 있는지 물어보면 전혀 아닌 거죠. 만약 상담을 조금씩 줄여나가고, 자기 돌봄을 잘했다면 그만두지 않았을 수도 있어요.
혹시 지금 본인이 힘든 상황에 있다면 본인이 다 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자신을 살펴봤을 때, 짜증이 괜히 많아졌다면 분명 안 좋은 상태예요. 지금 해야 하는 일을 잠깐 멈춰도 되고, 내가 다 해내지 않아도 돼요. 자신의 상태를 잘 알아야 하죠.
사실 두 번째 그만둘 때는 확실한 계기가 있었어요. ‘n번방 사건’이 터졌어요. 당시 기사를 하나도 못 봤어요. 한참을 지나서야 조금 찾아봤죠. 사건 다음 날, 아침에 출근하는데 하늘이 너무 맑고 높고 비현실적인 거예요. 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죠. 내가 아무리 열심히 해도 소용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범죄의 형태가 너무 진화해서 내가 감당할 수 없구나. 너무 큰 구조와 싸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활동이라는 게 내가 열심히 하는 만큼 보상이 돌아오기는 힘든 구조예요. 활동가 개인이 이러한 허무의 순간을 마주칠 확률이 다른 직업군보다 훨씬 높다고 생각해요. 활동에 의문이 들기 시작하면 이어지는 질문에서 헤어 나오기 어려워요. 당시 저도 이런 마음을 나눌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지 못했죠.
많은 생각들을 나눠야 돼요. 허무의 순간을 마주하는 건 활동가들에게 트라우마가 될 수 있어요. 너무 순식간에 사건이 들이닥치고, 트라우마가 생겨나기 때문에 미처 준비할 틈이 없기도 하죠. 그럼에도 활동가 혼자 겪는 일이 아니니까 꼭 어려움과 허무, 괴로움을 서로 나누면 좋겠어요.
Q. 요즘은 어려움을 잘 나누시나요?
그런 것 같아요. 그리고 사실 스트레스 받는 일이 별로 없어요. 회의하는 게 더 힘들어요.(웃음) 다시 회의하면서 살라고 하면 못할 거 같아요.
상담에는 경계가 있어요. 그리고 그 경계가 정말 중요해요. 상담에서는 지금 상대가 어떤 상태에 있고, 어떤 힘이 있고, 스스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잘 파악해야 해요. 상대를 침범하지 않는 게 중요하죠. 너무 많은 개입은 오만이 될 수 있고, 방관하면 직무 유기가 돼요. 상담가의 적절한 선을 찾는 데 오랜 훈련이 필요하죠.
심리 상담에서 해결은 상담가의 몫은 아니에요. 내담자가 자기 속도와 자기의 걸음으로 가야 하는 거죠. 저는 거기에 발맞추면 되는 거라서 훨씬 에너지를 덜 쓰게 돼요. 상담가가 조절을 잘하지 못하면 서로 다른 내담자의 문제가 섞일 수도 있기 때문에 자신의 상태를 잘 만들어 놓는 것도 중요하죠.
상담은 안전한 구조화가 되어 있어요. 그러나 활동에서의 상담은 선을 침범하게 되는 경우가 많아요. 침범에 대한 부담과 해결에 대한 부담도 있죠. 어려워요.
Q. 고진달래 소장님에게 반성매매 활동은 어떤 의미였을지도 궁금합니다.
얼마 전 명동 성당 이주 노동자 농성 20주년이 있었어요. 네팔과 방글라데시 노동자들이 한데 모이는 자리였어요. 지금까지의 연대 활동이 어떤 의미였는지에 대한 질문을 그 때도 받았어요. 제 인생에서 빠질 수 없는 두 대상이 성매매 여성과 이주 노동자에요. 지금도 빠질 수 없고요. 왜 그럴까 생각해 봤어요. 이 사람들을 만났을 때가 가장 순수하게 저항했던 시기에요. 당시 만났던 아나키스트 친구들을 포함해서 지금 저의 사고방식을 만들어주고, 이전까지 해본 적 없는 질문을 던져준 존재들이죠.
Q. 심리상담소 ‘잇다’는 앞으로 어떤 공간이 될까요?
말씀드렸듯이 저는 상담 하는 대상이 정해져 있는데 가끔 외부 대상들이 연락이 오는 경우도 있어요. 제가 잘 알지 못하는 대상을 ‘잇다’로 들이기는 어려워요. LGBT 깃발이 걸려 있고, 여기에 오는 대상들은 이주노동자, 성매매 여성으로 확고하죠. 이들과 만나는 게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방식이에요. 영역을 잘 확장하는 동료들도 있어요. 가끔은 질투가 날 때도 있어요.(웃음) 하지만 그건 제가 할 수 있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지금처럼 오밀조밀 상담하며 지내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다독이고 있어요. 나의 기질이라고 생각하면서요.
‘잇다’라는 말처럼 사람들을 연결하고 싶은 욕심도 있으면서 반대로는 나를 잘 다스리며 명상하고, 요가하며 지내고 싶은 마음이 충돌해요. 저에게는 두 가지 기질이 있는 거죠. 연결하고자 하는 기질과 홀로 고요하고 있고자 하는 기질. 두 기질을 잘 다스리면서 지내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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