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우연히, 그러나 활동은 전력으로!
“저는 청개구리예요. 청개구리. 다른 사람이 하라고 한 거면 안 했을 거예요. 사람도 그렇고 일도 그렇고 나랑 안 맞으면 못해요.” 30여년 동안 공익활동에 참여해 올 수 있었던 비결을 묻자 이금순 활동가는 자신이 좋아서, 자신과 맞아서 오랜 기간 동안 할 수 있었던 거라고 담담하게 이야기한다.
이금순 활동가에게 항상 따라오는 말은 ‘평범한 주부에서 공익활동가가 된’ 사람이라는 것. 그러나 인터뷰를 하며 이금순 활동가에 관해 느낀 점은 그가 절대 ‘평범한 주부’라는 말로 수식할 수 없는 비범한 용기를 갖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쓰레기 소각장 문제로 시작했던 수리산에 대한 관심이 자연과 생태 전반에 관한 관심으로 넓어지기까지. 군포 초막골생태공원에서 청개구리 활동가, 이금순 대표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Q. 활동가로서 인생이 시작되기 전, 이금순에 대해서 먼저 이야기해 볼까요. 이전에도 환경에 관심을 두고 계셨나요?
아니요, 아니요. 그 전에는 그냥 남들 사는 것처럼 살았어요.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그렇게 살았어요. 친구 따라 당동에 이사 와서 살다가 이 주변에 신도시 생기면서 1994년도에 입주했어요. 그때 아이가 7살이었거든요. 아이가 좀 컸으니까, 아이한테 활동하는 엄마를 좀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래서 아파트 동대표에 지원했거든요. 그런데 당시에는 여자는 동대표 하지 않는 분위기이다 보니, 몇몇 분들이 저를 부르더라고요. 집에 남편이 없느냐고요. 좀 괘씸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동대표는 단지 내에서 하는 거예요, 밖에서 하는 거예요?”하고 물으니까, 안에서 하는 거래요. 그래서 “그런데 남편이 아니라 내가 하는 건 왜 안 되는 거예요?”하고 다시 물었죠. 그랬더니 아무 말도 안 하고 가더라고요.
분위기가 좋지는 않았지만, 단지 안에 사는 젊은 친구들과 기죽지 않게 많은 도움과 격려로 서로 많이 배웠습니다. 모르는 것은 서로 공부도 하면서 동대표를 시작하게 됐습니다. 활동에서 많이 배웠어요. 동대표 역할을 맡으면서 소각장 문제에도 나서게 된 거니까 공익활동에 참여하게 된 시작도 거기에 있다고 할 수 있겠네요.
Q. 지금 말씀하신 것처럼 1994년에 군포시 수리동 가야아파트로 이사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공익활동가로서의 삶이 시작됐다고 알고 있어요. 당시 소각장 건립은 주민들의 의견이 반영되지 않은 독단적 사업이었죠. 이 사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셨어요. 당시 상황을 좀 구체적으로 들어보고 싶습니다.
제가 입주한 아파트가 신도시 건설로 시작된 곳이었어요. 그런데 1989년도 4월에 수도권 5개 신도시(분당, 일산, 중동, 평촌, 산본)가 건설이 발표되었죠. 개발주체인 LH에 의해 200톤 소각장 건립이 추진되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소각장 건립이 피할 수 없는 사업이 되고, 1991년도11월 166번지 소각장 부지로 발표됐습니다.
저는 그 문제가 생기고 나서 수리산에 올랐어요. 수리산에 올라가 본 적 있으신가요? (글쓴이: 있습니다.) 수리산이 어떻던가요? (글쓴이: 너무 공기도 좋고, 경치도 훌륭하던데요.) 아니에요. 그때 제게 수리산은 조금 다르게 보였습니다. 똑같은 걸 봐도 사람마다 집중해서 보면 보는 게 달라요. 그 당시 저는 ‘만약에 저 자리에 소각장이 있으면 저 구름은 뭉게구름이 아니라 분진이나 이런 게 뭉친 게 저기로 떨어지게 되는 거겠구나’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럼 그걸 내가, 내 가족들이 마시게 되는 거고. 수리산이 멋있게만 보이지는 않더라고요.
그래서 그 뒤로는 발로 뛰었어요. 대구에 있는 성서소각장에 갔거든요. 가보니까 알게 된 것들이 여럿 있었어요. 소각장의 온도 등 소각장 운영 방식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는 것, 소각장에서 나올 수 있는 유해 물질 중에서 ‘다이옥신’이라는 물질이 있다는 것... 이런 것들을 다 처음 알게 된 거죠. 자세히 아는 것도 별로 없어서 전문가들한테 물어보거나, 여의치 않으면 환경단체를 찾아다니면서 물어보고 그랬어요. 그게 삶이 됐죠.
이런 문제들이 있는데도 환경부에 보고된 166번지 환경영향평가 공람 보고서에는 ‘인근 주민 반대의견 없음’이라고 기재가 됐어요. 그때 당시에 아파트 입주가 진행 중인 상황이었고, 입주율은 겨우 14.7%였어요. 그런 상황인데도 주민 전체가 소각장 건립에 대해 의견이 없다고 보고서가 제출된 거죠. 그때부터는 치열하게 싸웠어요. 소각장 건립 부지에 가서 밤새 돌아가며 지키기도 하고,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는 등교 거부도 해보고요. 그 과정에서 동대표나 부녀회 사람들이 잡혀가는 일도 부지기수였고, 1994년 12월 5일 급하게 연락이 와서 들어가 보니 포크레인이 이미 밀고 들어오고 있었던 적도 있었어요. 치열했죠. 그 경험이 자연과 생태에 관해 관심 갖게 된 계기였습니다.
# 자연은 함께 보면서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우니까 지켜주고 싶죠.
Q. 수리산자연학교가 만들어지는 데에 크게 기여하셨죠. 수리산자연학교를 처음 시작했을 때는 지금처럼 자연이나 환경에 대해 관심을 두고 노력하려는 분위기가 덜 형성되어 있었을 것 같아요. 이 활동들을 어떻게 이루어내셨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시골 출신이에요. 환경 관련 공부나 활동을 하면서 여러 사람을 만나서 자연을 걷고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내가 자연을 보는 관점과 다른 사람들이 자연을 보는 관점이 이렇게 다를 수 있구나 싶었어요. 그렇게 자연에 대해서 재미있게 알아갈 수 있는 기회를 만들고 싶었어요.
수리산이 정말 아름다우니 보존과 보전하고 싶다는 생각도 했고요. 97년도쯤에는 학교운영위원회를 준비하고 있었고, 저희 아이도 학교를 보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자녀가 흥진초, 금정초에 있는 다른 엄마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어요. 함께 모여서 공부도 하면서 모임을 가졌는데 그게 시작이었어요. 수리산자연학교를 시작하려는 마음을 먹고 준비를 하는 과정이 정말 순탄치 않았어요. 그때는 미디어나 SNS가 발달한 때도 아니었던데다가 강사도 없던 시절이었어요. 돈도 없었지만, 돈이 있다고 해도 부를 강사가 없었죠.
그때 서울시립대에 많은 도움을 받았어요. 강사비를 챙겨주지 못해도 그냥 다 도와주셨죠. 사실 그때는 내가 배워야겠다는 생각이나 목표 의식 때문에 잘 생각을 못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너무 미안하고 감사한 일이에요. 그래서 저는 지금도 내가 배운 거, 가진 거 다 나누려고 많이 노력합니다. 30년을 활동하면서 받은 건 정말 다 나누려고 애썼어요. 받으면 환원해야 한다는 게 제가 지닌 신념 중 하나입니다. 수리산자연학교도 그렇게 설립되고, 이어지고 있어요.
Q. 지금은 사단법인 ‘자연과 함께하는 사람들’을 운영하고 계세요. 수리산자연학교에서 ‘자연과 함께하는 사람들’로 발전하면서 어떤 변화가 있었나요?
2006년에 그냥 자연학교를 만들었던 팀에서 수리산자연학교를 분리해서 독립하면서 제가 대표를 맡게 되어 활동했습니다.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열정 하나만으로 활동을 이어왔죠. 지금 다시 하라고 하면 못 하겠어요. 저도 한 20년 동안 활동을 하다 보니까 너무 힘들어서 그만하고 싶다는 생각도 했어요. 그런데 제가 그만두려고 하니 여기저기서 문제가 터지는 거예요. 워낙 오랫동안 준비하며 활동해 온 일이다 보니 인수인계가 완벽하게 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던 거죠.
그래서 자연과 함께하는 사람들이라는 사단법인을 만들게 된 거죠. 자연스럽게 수리산자연학교에서 함께 하던 분들과도 계속 동행하게 되었어요. 사단법인을 만드는 과정 역시 많은 기본자본과 사람이 필요했지만 그래도 우리가 원래 하던 활동을 조금 더 깊이 있게 하기 위해서는 이 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전문가를 초빙하는 일도 더 필요하고요. 지금은 전문가와 활동가로 구성된 이사님들이 21명이나 구성되어 있습니다. 물론 왕성하게 활동하는 활동가들이 힘차게 활동합니다.
공익활동단체는 늘 돈이 없어요. 그래도 달라진 게 있다면 일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이 생겼다는 거? 그래도 제가 30여 년에 걸쳐서 이런 활동들을 해왔던 것처럼 앞으로의 10년은 활동할 수 있는 사람을 더 키워내자는 목표를 갖고 임하고 있습니다. 저도 제대로 인수인계를 해서, 자랑스러운 우리 공익 전문가들이 주도적으로 활동을 이끌어나갈 수 있게끔 말이지요.
Q. 그럼 사단법인 ‘자연과 함께하는 사람들’이 운영하는 프로그램 중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프로그램이 있다면 소개해주실 수 있을까요?
지금 법인 운영을 9년 정도 해왔습니다. 그런데 그 훨씬 전부터 ‘생생활동가’를 키워내고 있어요. 살아있는 뿌리를 제대로 성장시키자는 의도에서 그렇게 이름 지었습니다. 중간에 활동하는 사람들이 바뀌면서도 계속해서 활동가를 키우려는 노력이 이어지고 있는 거죠. 활동가에게 경험이나 노하우를 자세히 공유해서 활동가들이 성장할 수 있도록 아낌없이 지원하는 것이 이 프로그램에서 정말 자랑스러운 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초막골생태공원을 민관 협력으로 만든 경험이나 3년째 이어오고 있는 애반딧불이 복원 사업, 맹꽁이가 서식할 수 있는 대체 서식지 5곳을 3년째 위탁 운영하고 있는 것도 자랑스럽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내가 선택한 길, 나는 힘들게 걸었어도 다른 활동가들은 더 나은 환경에서 활동할 수 있길!
Q. 이렇게 이야기를 들어보니, 공익활동에 굉장히 오랜 시간 동안 헌신하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공익활동이 사익을 추구하는 활동이 아니다 보니 꾸준히 하기가 참 어려운데, 혹시 이렇게 공익활동을 하는 데에 영향을 미친 사람이 있을까요?
아니요. 저는 공익활동에 저 스스로 걸어들어왔어요. 그리고 사실 이 일은 어떤 한 사람의 영향을 계속해서 이어 하기는 참 쉽지 않다고 생각해요. 그래도 활동하면서 나이가 많건 적건 내가 배울 점이 있으면 배우고, 적극적으로 활동에 임하면서 지금까지 이어왔다고 생각합니다. 함께 활동했던 사람들이 제가 이 일을 그만둘 수 없게 했다고 생각해요. 함께 성장하면서 힘든 과정들을 넘겨서 오늘에 이르렀다고 생각합니다. 한 사람을 정해서 영향을 받은 건 아니라는 거죠.
Q. 가족들은 ‘공익활동하는 이금순 활동가’를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함께 활동을 하신 경험 혹은 반대에 부딪힌 경험이 있으신지 궁금합니다.
사실 가족들의 반대는 없었어요. 제가 공익활동을 하면서 우리 남편하고 나하고 약속한 게 있거든요. ‘내가 하는 일에 남편을 끌어들이지 않는다.’ 그런데 사실 외조를 우리 남편보다 잘해준 사람은 없었다고 생각해요. 사실 제가 가정의 일 때문에 불편하게 집 문을 닫고 나온다면, 사실 일이 될 수 없죠. 남편이 그런 부분에서 신경 쓰이지 않도록 도움을 많이 주었고요. 사단법인 ‘자연과 함께하는 사람들’에 매달 꼬박꼬박 후원도 합니다. 지금은 제가 강의를 가거나 할 때 늘 태워다주곤 해요.
아들은 저를 굉장히 자랑스럽게 생각하더라고요. 초등학교 때, 아들의 담임 선생님을 뵈러 갔는데, ‘어머님, 너무 뵙고 싶었어요’라고 하시는 거예요. 이유를 물었더니, 아이가 항상 엄마가 살아 움직이는 게 너무 보기 좋다고 평소에 이야기했었다고 하더군요. 아들도 전형적인 사춘기를 겪기는 했는데, 그때 제가 ‘엄마 너 때문에 이제 활동 못 하겠다. 아무래도 엄마가 일을 관둬야지 네가 공부도 하고 하지 않겠냐.’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아들이 그건 절대 못 하게 하더라고요. 만약에 아들이 저에게 활동을 그만둬달라고 했다면, 제가 지금까지 이 일을 할 수 없었겠죠.
Q. 젊은 공익활동가들에게 나눠주고 싶은 삶의 지혜가 있다면 어떤 게 있을까요?
저는 지혜가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왜냐하면 젊은 활동가들에게는 공익활동을 위해 저처럼 희생하라고 이야기하고 싶지 않거든요. 솔직히 말하면, 아들과 남편이 저를 이해해주는 환경 속에서, 열정과 의지만 갖고 여기까지 왔지만, 시대가 달라진 만큼 지금 사람들에게 그런 희생을 강요하는 건 좀 안 맞잖아요. 그래서 지금은 우리가 일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 주고 싶은 마음입니다. 공익활동의 의미, 가치도 중요하지만 그 사람의 삶도 중요하니까요. 사실 이건 제가 생각하는 숙제이기도 합니다. 적어도 적은 활동비라도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제가 경제 활동을 하지 않아도 남편이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저는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사실은 그건 문제가 되는 부분이잖아요. 저는 어떻게 보면 조금 바보스러운 올곧음으로 지금까지 버텼지만 그래도 뒤에 활동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보다 더 나은 환경을 만들어주고 싶은 생각이 있습니다.
Q. 어떤 소망을 갖고 계시는지 알 것 같아요. 그런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요?
저는 지금 함께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이 참 아름다운 사람들이라고 생각해요. 그 아름다움을 유지할 수 있는 아름다운 공동체를 유지하려면, 지역에서 자율적으로 활동하는 사람들에게 아주 적은 비용이라도 좋으니, 지원을 해주는 제도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은 NPO에에게 50% 비용을 지원해 주는 제도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거든요. 우리에게도 그런 멋진 세상이 오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저의 꿈이자 희망이에요!
영원히 꺼지지 않을 수 있는 불이 있다면, 그건 우리 마음속 열정이 아닐까요? 누구든 인생에서 마음의 불을 활활 지필 수 있는 목표를 만난다는 건 큰 행운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금순 대표는 그런 행운에 자신의 노력과 헌신을 더해, 그 행운이 더 많은 이들의 행복과 자연의 보존을 위해 활용될 수 있도록 동분서주하는 삶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자연은 물론이고,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의 소중함을 되새길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경기 #수리산 #초막골 #수리산자연학교 #이금순
인터뷰어 : 황보정애
지금이 내 인생에 가장 빛나는 날이다'라는 좌우명으로 공익활동을 하는 비영리단체 활동가입니다. 인권과 환경 관련 이모저모를 전하기 위해 늘 노력하고 있습니다.
2024공익활동가주간을 맞아 다양한 지역과 분야에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변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는 활동가들을 만나 이들의 일과 삶에 대한 이야기를 기록하는 활동가인터뷰 공모 프로젝트를 진행했습니다. 인터뷰 공모에는 여러 지역의 활동가들이 참여해주셨습니다. 이 프로젝트는 <공익활동가사회적협동조합 동행>, <한국시민사회지원조직네트워크>, <지리산이음>이 공동주최하고, <아름다운재단>이 지원했습니다. |
#시작은 우연히, 그러나 활동은 전력으로!
“저는 청개구리예요. 청개구리. 다른 사람이 하라고 한 거면 안 했을 거예요. 사람도 그렇고 일도 그렇고 나랑 안 맞으면 못해요.” 30여년 동안 공익활동에 참여해 올 수 있었던 비결을 묻자 이금순 활동가는 자신이 좋아서, 자신과 맞아서 오랜 기간 동안 할 수 있었던 거라고 담담하게 이야기한다.
이금순 활동가에게 항상 따라오는 말은 ‘평범한 주부에서 공익활동가가 된’ 사람이라는 것. 그러나 인터뷰를 하며 이금순 활동가에 관해 느낀 점은 그가 절대 ‘평범한 주부’라는 말로 수식할 수 없는 비범한 용기를 갖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쓰레기 소각장 문제로 시작했던 수리산에 대한 관심이 자연과 생태 전반에 관한 관심으로 넓어지기까지. 군포 초막골생태공원에서 청개구리 활동가, 이금순 대표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Q. 활동가로서 인생이 시작되기 전, 이금순에 대해서 먼저 이야기해 볼까요. 이전에도 환경에 관심을 두고 계셨나요?
아니요, 아니요. 그 전에는 그냥 남들 사는 것처럼 살았어요.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그렇게 살았어요. 친구 따라 당동에 이사 와서 살다가 이 주변에 신도시 생기면서 1994년도에 입주했어요. 그때 아이가 7살이었거든요. 아이가 좀 컸으니까, 아이한테 활동하는 엄마를 좀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래서 아파트 동대표에 지원했거든요. 그런데 당시에는 여자는 동대표 하지 않는 분위기이다 보니, 몇몇 분들이 저를 부르더라고요. 집에 남편이 없느냐고요. 좀 괘씸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동대표는 단지 내에서 하는 거예요, 밖에서 하는 거예요?”하고 물으니까, 안에서 하는 거래요. 그래서 “그런데 남편이 아니라 내가 하는 건 왜 안 되는 거예요?”하고 다시 물었죠. 그랬더니 아무 말도 안 하고 가더라고요.
분위기가 좋지는 않았지만, 단지 안에 사는 젊은 친구들과 기죽지 않게 많은 도움과 격려로 서로 많이 배웠습니다. 모르는 것은 서로 공부도 하면서 동대표를 시작하게 됐습니다. 활동에서 많이 배웠어요. 동대표 역할을 맡으면서 소각장 문제에도 나서게 된 거니까 공익활동에 참여하게 된 시작도 거기에 있다고 할 수 있겠네요.
Q. 지금 말씀하신 것처럼 1994년에 군포시 수리동 가야아파트로 이사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공익활동가로서의 삶이 시작됐다고 알고 있어요. 당시 소각장 건립은 주민들의 의견이 반영되지 않은 독단적 사업이었죠. 이 사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셨어요. 당시 상황을 좀 구체적으로 들어보고 싶습니다.
제가 입주한 아파트가 신도시 건설로 시작된 곳이었어요. 그런데 1989년도 4월에 수도권 5개 신도시(분당, 일산, 중동, 평촌, 산본)가 건설이 발표되었죠. 개발주체인 LH에 의해 200톤 소각장 건립이 추진되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소각장 건립이 피할 수 없는 사업이 되고, 1991년도11월 166번지 소각장 부지로 발표됐습니다.
저는 그 문제가 생기고 나서 수리산에 올랐어요. 수리산에 올라가 본 적 있으신가요? (글쓴이: 있습니다.) 수리산이 어떻던가요? (글쓴이: 너무 공기도 좋고, 경치도 훌륭하던데요.) 아니에요. 그때 제게 수리산은 조금 다르게 보였습니다. 똑같은 걸 봐도 사람마다 집중해서 보면 보는 게 달라요. 그 당시 저는 ‘만약에 저 자리에 소각장이 있으면 저 구름은 뭉게구름이 아니라 분진이나 이런 게 뭉친 게 저기로 떨어지게 되는 거겠구나’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럼 그걸 내가, 내 가족들이 마시게 되는 거고. 수리산이 멋있게만 보이지는 않더라고요.
그래서 그 뒤로는 발로 뛰었어요. 대구에 있는 성서소각장에 갔거든요. 가보니까 알게 된 것들이 여럿 있었어요. 소각장의 온도 등 소각장 운영 방식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는 것, 소각장에서 나올 수 있는 유해 물질 중에서 ‘다이옥신’이라는 물질이 있다는 것... 이런 것들을 다 처음 알게 된 거죠. 자세히 아는 것도 별로 없어서 전문가들한테 물어보거나, 여의치 않으면 환경단체를 찾아다니면서 물어보고 그랬어요. 그게 삶이 됐죠.
이런 문제들이 있는데도 환경부에 보고된 166번지 환경영향평가 공람 보고서에는 ‘인근 주민 반대의견 없음’이라고 기재가 됐어요. 그때 당시에 아파트 입주가 진행 중인 상황이었고, 입주율은 겨우 14.7%였어요. 그런 상황인데도 주민 전체가 소각장 건립에 대해 의견이 없다고 보고서가 제출된 거죠. 그때부터는 치열하게 싸웠어요. 소각장 건립 부지에 가서 밤새 돌아가며 지키기도 하고,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는 등교 거부도 해보고요. 그 과정에서 동대표나 부녀회 사람들이 잡혀가는 일도 부지기수였고, 1994년 12월 5일 급하게 연락이 와서 들어가 보니 포크레인이 이미 밀고 들어오고 있었던 적도 있었어요. 치열했죠. 그 경험이 자연과 생태에 관해 관심 갖게 된 계기였습니다.
# 자연은 함께 보면서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우니까 지켜주고 싶죠.
Q. 수리산자연학교가 만들어지는 데에 크게 기여하셨죠. 수리산자연학교를 처음 시작했을 때는 지금처럼 자연이나 환경에 대해 관심을 두고 노력하려는 분위기가 덜 형성되어 있었을 것 같아요. 이 활동들을 어떻게 이루어내셨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시골 출신이에요. 환경 관련 공부나 활동을 하면서 여러 사람을 만나서 자연을 걷고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내가 자연을 보는 관점과 다른 사람들이 자연을 보는 관점이 이렇게 다를 수 있구나 싶었어요. 그렇게 자연에 대해서 재미있게 알아갈 수 있는 기회를 만들고 싶었어요.
수리산이 정말 아름다우니 보존과 보전하고 싶다는 생각도 했고요. 97년도쯤에는 학교운영위원회를 준비하고 있었고, 저희 아이도 학교를 보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자녀가 흥진초, 금정초에 있는 다른 엄마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어요. 함께 모여서 공부도 하면서 모임을 가졌는데 그게 시작이었어요. 수리산자연학교를 시작하려는 마음을 먹고 준비를 하는 과정이 정말 순탄치 않았어요. 그때는 미디어나 SNS가 발달한 때도 아니었던데다가 강사도 없던 시절이었어요. 돈도 없었지만, 돈이 있다고 해도 부를 강사가 없었죠.
그때 서울시립대에 많은 도움을 받았어요. 강사비를 챙겨주지 못해도 그냥 다 도와주셨죠. 사실 그때는 내가 배워야겠다는 생각이나 목표 의식 때문에 잘 생각을 못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너무 미안하고 감사한 일이에요. 그래서 저는 지금도 내가 배운 거, 가진 거 다 나누려고 많이 노력합니다. 30년을 활동하면서 받은 건 정말 다 나누려고 애썼어요. 받으면 환원해야 한다는 게 제가 지닌 신념 중 하나입니다. 수리산자연학교도 그렇게 설립되고, 이어지고 있어요.
Q. 지금은 사단법인 ‘자연과 함께하는 사람들’을 운영하고 계세요. 수리산자연학교에서 ‘자연과 함께하는 사람들’로 발전하면서 어떤 변화가 있었나요?
2006년에 그냥 자연학교를 만들었던 팀에서 수리산자연학교를 분리해서 독립하면서 제가 대표를 맡게 되어 활동했습니다.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열정 하나만으로 활동을 이어왔죠. 지금 다시 하라고 하면 못 하겠어요. 저도 한 20년 동안 활동을 하다 보니까 너무 힘들어서 그만하고 싶다는 생각도 했어요. 그런데 제가 그만두려고 하니 여기저기서 문제가 터지는 거예요. 워낙 오랫동안 준비하며 활동해 온 일이다 보니 인수인계가 완벽하게 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던 거죠.
그래서 자연과 함께하는 사람들이라는 사단법인을 만들게 된 거죠. 자연스럽게 수리산자연학교에서 함께 하던 분들과도 계속 동행하게 되었어요. 사단법인을 만드는 과정 역시 많은 기본자본과 사람이 필요했지만 그래도 우리가 원래 하던 활동을 조금 더 깊이 있게 하기 위해서는 이 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전문가를 초빙하는 일도 더 필요하고요. 지금은 전문가와 활동가로 구성된 이사님들이 21명이나 구성되어 있습니다. 물론 왕성하게 활동하는 활동가들이 힘차게 활동합니다.
공익활동단체는 늘 돈이 없어요. 그래도 달라진 게 있다면 일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이 생겼다는 거? 그래도 제가 30여 년에 걸쳐서 이런 활동들을 해왔던 것처럼 앞으로의 10년은 활동할 수 있는 사람을 더 키워내자는 목표를 갖고 임하고 있습니다. 저도 제대로 인수인계를 해서, 자랑스러운 우리 공익 전문가들이 주도적으로 활동을 이끌어나갈 수 있게끔 말이지요.
Q. 그럼 사단법인 ‘자연과 함께하는 사람들’이 운영하는 프로그램 중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프로그램이 있다면 소개해주실 수 있을까요?
지금 법인 운영을 9년 정도 해왔습니다. 그런데 그 훨씬 전부터 ‘생생활동가’를 키워내고 있어요. 살아있는 뿌리를 제대로 성장시키자는 의도에서 그렇게 이름 지었습니다. 중간에 활동하는 사람들이 바뀌면서도 계속해서 활동가를 키우려는 노력이 이어지고 있는 거죠. 활동가에게 경험이나 노하우를 자세히 공유해서 활동가들이 성장할 수 있도록 아낌없이 지원하는 것이 이 프로그램에서 정말 자랑스러운 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초막골생태공원을 민관 협력으로 만든 경험이나 3년째 이어오고 있는 애반딧불이 복원 사업, 맹꽁이가 서식할 수 있는 대체 서식지 5곳을 3년째 위탁 운영하고 있는 것도 자랑스럽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내가 선택한 길, 나는 힘들게 걸었어도 다른 활동가들은 더 나은 환경에서 활동할 수 있길!
Q. 이렇게 이야기를 들어보니, 공익활동에 굉장히 오랜 시간 동안 헌신하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공익활동이 사익을 추구하는 활동이 아니다 보니 꾸준히 하기가 참 어려운데, 혹시 이렇게 공익활동을 하는 데에 영향을 미친 사람이 있을까요?
아니요. 저는 공익활동에 저 스스로 걸어들어왔어요. 그리고 사실 이 일은 어떤 한 사람의 영향을 계속해서 이어 하기는 참 쉽지 않다고 생각해요. 그래도 활동하면서 나이가 많건 적건 내가 배울 점이 있으면 배우고, 적극적으로 활동에 임하면서 지금까지 이어왔다고 생각합니다. 함께 활동했던 사람들이 제가 이 일을 그만둘 수 없게 했다고 생각해요. 함께 성장하면서 힘든 과정들을 넘겨서 오늘에 이르렀다고 생각합니다. 한 사람을 정해서 영향을 받은 건 아니라는 거죠.
Q. 가족들은 ‘공익활동하는 이금순 활동가’를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함께 활동을 하신 경험 혹은 반대에 부딪힌 경험이 있으신지 궁금합니다.
사실 가족들의 반대는 없었어요. 제가 공익활동을 하면서 우리 남편하고 나하고 약속한 게 있거든요. ‘내가 하는 일에 남편을 끌어들이지 않는다.’ 그런데 사실 외조를 우리 남편보다 잘해준 사람은 없었다고 생각해요. 사실 제가 가정의 일 때문에 불편하게 집 문을 닫고 나온다면, 사실 일이 될 수 없죠. 남편이 그런 부분에서 신경 쓰이지 않도록 도움을 많이 주었고요. 사단법인 ‘자연과 함께하는 사람들’에 매달 꼬박꼬박 후원도 합니다. 지금은 제가 강의를 가거나 할 때 늘 태워다주곤 해요.
아들은 저를 굉장히 자랑스럽게 생각하더라고요. 초등학교 때, 아들의 담임 선생님을 뵈러 갔는데, ‘어머님, 너무 뵙고 싶었어요’라고 하시는 거예요. 이유를 물었더니, 아이가 항상 엄마가 살아 움직이는 게 너무 보기 좋다고 평소에 이야기했었다고 하더군요. 아들도 전형적인 사춘기를 겪기는 했는데, 그때 제가 ‘엄마 너 때문에 이제 활동 못 하겠다. 아무래도 엄마가 일을 관둬야지 네가 공부도 하고 하지 않겠냐.’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아들이 그건 절대 못 하게 하더라고요. 만약에 아들이 저에게 활동을 그만둬달라고 했다면, 제가 지금까지 이 일을 할 수 없었겠죠.
Q. 젊은 공익활동가들에게 나눠주고 싶은 삶의 지혜가 있다면 어떤 게 있을까요?
저는 지혜가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왜냐하면 젊은 활동가들에게는 공익활동을 위해 저처럼 희생하라고 이야기하고 싶지 않거든요. 솔직히 말하면, 아들과 남편이 저를 이해해주는 환경 속에서, 열정과 의지만 갖고 여기까지 왔지만, 시대가 달라진 만큼 지금 사람들에게 그런 희생을 강요하는 건 좀 안 맞잖아요. 그래서 지금은 우리가 일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 주고 싶은 마음입니다. 공익활동의 의미, 가치도 중요하지만 그 사람의 삶도 중요하니까요. 사실 이건 제가 생각하는 숙제이기도 합니다. 적어도 적은 활동비라도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제가 경제 활동을 하지 않아도 남편이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저는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사실은 그건 문제가 되는 부분이잖아요. 저는 어떻게 보면 조금 바보스러운 올곧음으로 지금까지 버텼지만 그래도 뒤에 활동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보다 더 나은 환경을 만들어주고 싶은 생각이 있습니다.
Q. 어떤 소망을 갖고 계시는지 알 것 같아요. 그런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요?
저는 지금 함께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이 참 아름다운 사람들이라고 생각해요. 그 아름다움을 유지할 수 있는 아름다운 공동체를 유지하려면, 지역에서 자율적으로 활동하는 사람들에게 아주 적은 비용이라도 좋으니, 지원을 해주는 제도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은 NPO에에게 50% 비용을 지원해 주는 제도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거든요. 우리에게도 그런 멋진 세상이 오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저의 꿈이자 희망이에요!
영원히 꺼지지 않을 수 있는 불이 있다면, 그건 우리 마음속 열정이 아닐까요? 누구든 인생에서 마음의 불을 활활 지필 수 있는 목표를 만난다는 건 큰 행운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금순 대표는 그런 행운에 자신의 노력과 헌신을 더해, 그 행운이 더 많은 이들의 행복과 자연의 보존을 위해 활용될 수 있도록 동분서주하는 삶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자연은 물론이고,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의 소중함을 되새길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경기 #수리산 #초막골 #수리산자연학교 #이금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