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 상황 앞에서 기독교의 오랜 기만과 모순과 패착을 말하며 사과문을 읽는 기독인이 있다. 그는 동료 한 사람과 함께 단 둘이서, 기후위기 대응을 위해 기독인들이 연합하고 연결되고 대화할 수 있는 장을 만들기도 했다. 기후위기 기독인 연대의 문형욱 활동가다. 그의 이야기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기후위기는 이 사회 시스템이 오랜 기간 야기해온 문제.
이에 대한 기독인들의 선명한 인식과 책임의식 일어야.
Q. 형욱 님을 가장 잘 대표할 수 있는 말이 기후위기 기독인 연대라고 생각되는데요, 이곳은 어떤 곳이며 형욱 님은 이곳과 어떻게 관계를 맺게 되었는지 소개해주실 수 있을까요?
일단 기후위기 기독인 연대를 소개한다면, 이곳은 단체 이름이 말해주는 것처럼 기독인들의 연대를 도모하는 단체라고 할 수 있어요. 첫 번째 의미는, 기독교 쪽에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가지신 분들을 대표해서 단체를 만들었다고 할 수 있겠고요, 두 번째 의미는 그들을 조직해서 기후위기에 같이 대응한다는 취지로 만든 것이라 할 수 있어요.
Q. 그럼 형욱 님이 기후위기 기독인 연대를 처음 만들거나 꾸린 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그 계기는 어떤 것이었나요?
제 경우는 원래 이전에 기독교 안에서 시민단체 활동을 하고 있었고 그 안에서 기후위기 대응하는 그룹에도 있었거든요. 그런데 좀 더 고유한 운동을 만들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당시 윤석열 대통령이 대선 후보로 나오게 되면서 위기의식을 크게 느꼈어요. 사실 이번 총선도 그랬듯이 정치권력이라는 게 양당에 집중되어 있잖아요. 그래서 그 양당 체제 안에서는 기후위기 대응이라는 것, 기후위기를 극복하는 어떤 제도적인 전환이라든지 하는 것들을 전혀 할 수 없는 막막한 상황이라는 걸 자각하곤, 좀 다른 목소리를 좀 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기후위기에 대응하려면 양당 후보를 떠나서 진짜 어떤 후보가 대선 후보로 적당하냐 이런 메시지부터 저희가 시작을 한 거죠. 그렇게 대선, 지방선거에 대응하면서 저희 단체가 이제 만들어지기도 하고 자리도 잡아가고 그랬어요.
Q. 대선이면 2022년이었나요?
네, 맞아요. 22년 1월 즈음이었어요. 당시, 기독교 내에서 기후위기와 관련해서는 대선 대응 활동이 없었거든요. 그걸 자각하곤 급히 현 기후위기 기독인 연대의 공동대표인 김영준 님을 만나, 지금 이 상황에서 우리가 뭔가 행동을 해야 되지 않겠냐는 이야기를 했어요. 그렇게 회의를 시작하고, 기자회견 기획을 하고 보도자료와 웹자보를 만들게 되면서, 그렇게 모든 게 순식간에 시작이 된 거예요.
그런데 어쨌든 그동안 기독교 안에서는 기후위기가 여러 제안 공약 중에 “환경” 공약으로 끼어들어가 있었던 건데, 사실은 기후 문제가 단지 “환경”으로 치환되는 문제는 아니잖아요. 기후위기라는 것은 이 사회 시스템이 오랜 기간 야기해온 문제이기 때문에, 시스템 전체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되는데 그런 목소리나 인식이 아직까지는 많이 부족하잖아요.기후위기가 도대체 얼마만큼 큰 이야기를 담고 있고 얼마만큼 큰 변화를 만들어내야 되는 일인지에 대해 시민들이나 기독교인들 대부분이 아직 그 인식이 부족하니까, 그에 대한 운동과 선명한 목소리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 기후위기 기독인 연대를 만들었다고 할 수 있겠어요.
#보여주기 식의 코로나 대응, 그린뉴딜 정책 등 정치권에 대한 실망과 무기력을 넘기 위해.
Q. 형욱 님이 크리스천이니까 그 크리스천 정체성으로서 연대체를 만들어보자는 뜻도 있었을 것 같고, 기후위기라는 이 절체절명의 문제 앞에서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는 마음과, 또 이에 대한 보다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문제에 대한 인식론을 강화해야 한다는 문제의식도 있었을 것 같아요. 그런데 왜 하필 기독교 사회 내에서 이 문제에 대응해야 하는지에 대한 강력한 연결고리가 필요했을 것도 같은데요, 개신교 자체가 어떻게 기후위기하고 관련이 되어 있는지에 대한 성찰이나 고민이 있었을 텐데 그에 대해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우선 개인적인 차원에서 얘기를 한번 해볼게요. 제가 속해 있던 공동체나 그 교회 문화권 안에서는 일반적으로는 제가 어떤 문제를 마주하고 내 문제로 받아들이게 될 경우, 그것을 기독교인이라는 정체성이 아니라 일반 시민사회에서, 교회 바깥의 영역에서 그와 관련된 활동과 대응을 하도록 하는 게 일반적인 메시지였어요. 저도 오랫동안 그렇게 배워왔고요. 그런데 저 같은 경우는 종교적인 언어와 하나님 나라라는 개념이 너무 중요해서 이것 자체를 사회적 삶과 엮어서 이야기하는 게 저한테는 되게 중요했던 것 같아요.
또 보다 큰 차원에서 얘기할 수도 있어요. 한국 사회에 기독교인들이 굉장히 많은데 대개가 많이 보수화되어 있고 진보적 담론을 계속 후퇴시키는 역할들을 하고 있죠. 여러 영역에서 안 좋은 모습을 많이 보이고 있어요. 그러니 기독교인들을 설득해야겠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제게는 기독교라는 게 고향 같은 것이고 집 같은 곳인데 그곳에서조차도 내부적으로 목소리가 제대로 안 나오고 있으니, 제겐 꼭 필요한 목소리를 어떻게든 일게 해야겠다는 마음도 있었죠.
Q. 그렇겠네요. 또 어째서 대선이 계기였을까 하고 생각을 해보면, 말씀하신 대로 이 사회가 기독교와 정치권 간의 유착이 심한 사회이니 더더욱 문제의식이 있으셨을 것도 같아요.
사실 아주 보수화된 교회라고 하면 전광훈 목사로 대표되는 집단들이 있을 테지만, 제가 속했던 소위 진보적이라 하는 그리스도인 그룹에선 사실 민주당 쪽에 많은 연결고리가 있었어요. 박근혜 대통령 탄핵되면서 문재인 정권이 들어서고, 총선은 크게 승리해서 민주당이 180석을 넘겨버렸잖아요. 그때 저는 되게 두려움을 느꼈어요. 왜냐하면 이렇게 180석을 만들어놓고 대통령까지 민주당인데 지금의 위기를 전혀 해결 못할 것 같은 거예요.
그 두려움이 괜한 게 아니었어요. 지난 21대 국회에서 여실히 드러난 면면들을 보면요. 문재인 정부에서 보여주기 식으로 코로나 대응이나 그린뉴딜 정책을 해나갔는데 그것들이 전혀 기후위기 대응의 실질적인 차원으로 연결되지 못하고 시장주의적으로 흘렀잖아요.
그런데 교회 내에서는 “민주당이 하나님 나라다”라는 말을 대놓고 하는 어른들이 있었고 그 내용을 담은 성명서에 원로 목사님들이 연서명을 해주시기도 했어요. 그걸 보고 젊은 진보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충격을 적지 않게 받았죠. 그런 맥락 속에서 우리는 민주당이 아니라 다른 대선 후보, 다른 정치인, 다른 지방선거에 대한 얘기를 해보자고 하는 맥락이 굉장히 컸던 것 같아요.
#관계를 회복시키고 세상을 회복시키기 위해 그리스도인이 나서야.
Q. 여기서 중간 질문을 하나 해볼게요. 그리스도인 정체성과 사회운동 활동가라는 정체성과는 어떻게 만난다고 생각하세요?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 기본적으로 성서가 말하는 것을 수용한 이들인 거잖아요. 물론 그리스도인들 중에도 어떤 교육 아래 어떤 입장을 가지게 되느냐는 갈리겠지만, 기본적으로는 사랑과 정의의 관점이 가장 중요한 이제 관점이라고 보거든요. 그 관점을 각자의 삶에서 실현해 나가는 과정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할 수 있겠죠. 활동가라고 하면 사회에 대해 목소리를 내고 움직이는 활동을 나의 업으로 생각하는 거잖아요. 시대적인 과제 앞에서 이 문제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그리스도인들한테도 계속 전달하고, 그리스도인들을 대표해서 이 문제에 적극적으로 뛰어드는 일이 ‘활동가 그리스도인’ 또는 ‘기독인 활동가’라는 포지션인 것 같아요.
Q. 말씀을 들으니 예수의 걸음이 생각나기도 해요. 예수님은 어디든 몸을 써서 돌아다니고 계속 만나고, 접촉하고, 만져서 바꿔내는 활동을 한 거잖아요. ‘기독인 활동가’의 걸음은 예수의 걸음과 어느 정도 닮아 있는 듯해요.
과분한 말씀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누구나 예수를 따라가고 닮아가야 한다고 생각하긴 해요. 예수님은 요한복음에서 “하나님이 이처럼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라고 말씀하시거든요. “하나님이 이처럼 유대인을 사랑하사”라고 말하지 않고 “하나님이 이처럼 세상을 사랑하사”라고 말한단 말이에요. 하나님이 예수를 보낸 건 흔히 ‘선민’으로 대표되는 유대인을 위해서 보낸 것도, 단지 인간을 위해서 보낸 것도 아니라는 뜻이에요. 하나님이 세상 전체를 만들고 세상을 위에서 사람을 둔 건데, 기후생태위기 상황은 그 관계가 다 깨진 상황이라 할 수 있잖아요.
그러니 관계를 회복시키고 세상을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잘못 흘러가고 있는 부분들에 대해서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참여하고 헌신하고 희생하고 바꿔내려고 노력하는 게 맞는 거라고 봐요. 사실 그게 1순위라고 생각을 해요. 그래서 기후위기 기독인 연대의 1순위도 이와 다르지 않고, 세상을 같이 바꿔내는 일에 기독교인들을 어떻게 참여시킬 것인가가 큰 목표인 거죠.
Q. 앞의 이야기에 조금씩 담기기도 했지만 기후위기 문제에 딱 이렇게 집중하게 된 계기가 있다면 어떤 것일까요?
제가 대학 1학년 때 경제학 전공이었고 2학년 때 경영학 전공이었는데 3학년 때 전공을 다 포기했거든요. 대학에서 전문성을 쌓는다기보다는 시야를 넓히는 게 맞겠다는 걸 깨닫고는 사회, 문화, 역사, 철학을 전반적으로 되게 폭넓게 들어야겠다는 결단을 내렸죠. 그러면서 환경 수업을 3개 정도 들었는데 그때 처음으로 기후위기, IPCC 문제를 비롯해, 엄청난 기술력을 가진 전기차 개발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왜 대대적인 상용화가 안 되고 있는지에 대한 것, 즉 석탄화력발전 기업, 정유회사 등의 막대한 로비나 정치세력과의 유착 관계에 대한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런데 그땐 저런 교수님 같은 분들이 있으니까 잘 해결되겠지, 하는 생각만 했죠.
그 한참 뒤인 2018년에 한 관측 기사가 엄청나게 올라왔는데 그게 이제 한 번도 녹지 않았던 빙하가 녹기 시작했다는 거였어요. 그 당시 과학자들이 최후의 빙하라고 불렀던, 인류 역사상 단 한 번도 녹아내린 적이 없었던 그 지점의 빙하가 녹기 시작했다는 결과였어요. 그때 저는 하나님이 우리한테 허락해주신 이 지구의 시스템이 인간의 산업 문명 때문에 망가졌구나, 회복 불가능한 상태로 가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두려웠어요.
방금 언급했던 그 교수님 말씀을 들었던 순간부터 기사를 읽게 된 2018년까지는 상당히 시간이 있었는데 그 시간 동안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는 사실, 외려 더 심각한 상황이 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제게는 굉장히 크나큰 인생의 경종처럼 울렸던 것 같아요. 그때 이것이 내가 뛰어들어야 될 문제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Q. 말씀을 들으니 2022년의 924 기후정의행진 오픈마이크 생각이 나요. 그때 형욱 님께서 발언을 해주셨잖아요. 기독교, 개신교를 대표해서 사과한다고 하면서 엄청난 사과문을 작성해서 읽어주셨잖아요. 진짜 놀라웠고, 모인 사람들 모두가 너무 반가워했어요. 그 얘기 조금 해주실 수 있나요?
자본주의 시스템이 계속해서 과도하게 발전하는 동안 기독교가 해온 일은 계속해서 생태 학살하고 착취하라고 옹호하고 부추긴 일이라고 생각해요. 이게 괜한 말이 아니고 이 흐름을 분석한 논문들도 이미 있거든요.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이 대부분이죠. 성서의 말씀은 진짜 가난한 자들 곁에 있는 것, 이방인들과 고아와 나그네와 과부들의 피난처가 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책무인데, 지금은 그 모든 소수자, 약자, 가난한 자들을 배척하는 것은 물론 자본주의 질서를 옹호하는 집단이 된 것이 사실이에요. 저는 그게 너무 안타까운데 그에 대해 그 사람들한테 사과를 요구를 해봐야 통할 리 없으니, 내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먼저 사과를 하는 게 맞겠구나, 시민사회에서 기독교인들이 가장 먼저 해야 되는 건 사과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목소리가 더 멀리까지 들릴 수 있도록 비폭력 직접행동을.
Q. 그 사과는 말이 아니라 행동에 가깝다고 느껴질 정도로 굉장히 강력한 인상을 남겼어요. 그런데 최근엔 또 직접행동이 중요하다는 생각에서 멸종반란에도 합류를 하셨는데요, 어떤 문제의식에서 이처럼 새로운 걸음을 더하게 되었는지 궁금해요.
많은 것들이 단절되고 관계망 또한 파편화되어 있는 지금의 세상에선 시민사회 활동도 대중에게 다가가기 참 어려운 구조라는 생각을 해요.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이 뭐가 있을까를 고민할 때, 비폭력 직접행동이라는 수단이 가장 적절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재작년에 저스트스탑오일(Just Stop Oil)이라는 단체에서 반 고흐의 작품 ‘해바라기’에 토마토수프를 붓는 직접행동을 했잖아요. 이후, 그 사건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정도로 크게 논쟁이 일었고 그 행동을 욕하는 사람도 꽤나 많았지만, 그 이슈 하나로 그렇게 많은 시민들이 이야기를 나누도록 했다는 게 굉장히 고무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나라에서도 비폭력 직접행동을 통해서 세 건의 재판이 만들어졌고 그 재판들이 법적으로 어느 정도 의미 있는 결과들을 이끌어냈어요. 또 사안이 언론에도 보도되면서 많은 이들에게 알려지기도 했어요. 저는 그 점이 의미 있게 느껴져요.
사실 저스트스탑오일 활동가들이 아스팔트 도로에다 손바닥을 접착제로 붙이는 액션도 하곤 하거든요. 그 활동 중에, 지나가던 시민이랑 언쟁이 붙은 거예요. 해당 영상이 유튜브에 올라왔어요. 그때 저스트스탑오일의 공식 입장을 담은 대답이 뭐였냐면, 지난 수십 년간 우리가 캠페인하고 제도 변화시켜보려고 온갖 다양한 수단을 써서 요구를 했지만 변한 게 없었고, 그래서 직접행동을 하는 거라는 내용이었거든요.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듣고 한국의 상황을 봤을 때 2024년은 직접행동에 대한 세 건의 재판이 다 끝나는 해인데, 그 뒤에도 우리가 다시 예전에 했던 것만 반복하고 있는 상황이 되는 것 같은 거예요. 다시 조용하게 캠페인하고, 제도 개선 제안하고 정치인들 설득하려 하고... 그런 움직임도 당연히 필요하겠지만 사실 지금 필요한 거는 더 큰 목소리를 들리게 하기 위한 액션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제가 멸종반란에 들어가게 된 거고요.
#사회운동은 같이 놀고 같이 춤추는 것. 이를 위한 리젠(돌봄) 앞으로.
Q. 멸종반란이 표방하는 가치 중에서 리젠문화를 중요시하는 것 또한 형욱 님이 눈여겨본 것이라는 말씀을 들은 적 있는데요, 형욱 님의 리젠(돌봄)에 대한 생각을 들려주실 수 있나요?
한 사람의 삶을 볼 때, 사회 활동의 영역이 있고 가정의 영역이 있고 친구나 동료로 살아가는 영역이 있고, 또 나 스스로와의 관계를 구성하는 영역도 있잖아요. 그런데 우리가 그 모든 영역에 대해 일일이 신경 쓰지는 못해요. 특히 활동가들은 눈앞에 있는 문제, 갑자기 대응해야 하는 문제가 있으면 이리저리 뛰어다니기 바쁘죠. 하지만 계속 달리기만 하면 어느 순간에는 지속하지 못하는 상황들이 생기더라고요.
요즘 제 일상 속에선 이런 생각을 해요. 곁에서 제어하는 힘이 없으면 저는 활동을 야금야금 늘리는 경향이 있더라고요. 그러면 저녁 시간에 집을 비우게 되고 아내에게 육아 부담을 지워주게 되거든요. 그때마다 아이가 저랑 되게 놀고 싶어 하면서 “아빠 왜 오늘 안 들어와?” 하고 얘기를 해요. 그게 저의 삶을 지키기 위해서 브레이크를 걸어주는 일이 아닌가 싶더라고요. 그게 되게 소중하게 느껴졌어요. 사람이 하나의 문제에만 집중하면 되게 삭막해지고 치열해지잖아요. 그런데 그때마다 아이가 제게 같이 놀자고 하는 거예요. 바꿔 말하면 제가 놀이로 초대를 받는 거죠.
사람이라는 게 어찌 보면 놀기 위해 지어졌다고 하잖아요. 저는 그 말에 깊이 공감하거든요. 노는 시간은 창조적인 시간이고, 그 시간을 통해서 활동의 감각을 회복하게 되기도 하니까요. 사회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어쩌면 자꾸 놀자고, 같이 춤추자고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아닐까 싶어요.
이런 맥락 속에서 제가 어떤 문제에 삭막하게 집중할 때 아이가 저를 찾는다는 건, 저를 놀이로 초대하는 길을 여는 것과 같아요. 활동과 돌봄이, 놀이와 활동이 서로의 경계를 넘는 순간인 거죠. 이 연장선상에서 활동을 마냥 힘들고 어렵게 견디듯이 하는 게 아니라, 함께 재밌게 할 수 있는 동료들을 많이 만나고 싶다는 생각으로 멸종반란에 들어간 것이기도 해요.
#기후위기 #공익활동가주간 #변화를만드는사람들
인터뷰어 : 희음
시 쓰기와 기록노동을 겸한다. 기후정의운동을 해왔고, 돌봄의 인식론 및 실천을 확장하는 데 관심이 많다. <김용균, 김용균들>, <우리 힘세고 사나운 용기>를 함께 썼고, 시집 <치마들은 마주 본다 들추지 않고>와 그림책 <무르무르의 유령>을 펴냈다.
2024공익활동가주간을 맞아 다양한 지역과 분야에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변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는 활동가들을 만나 이들의 일과 삶에 대한 이야기를 기록하는 활동가인터뷰 공모 프로젝트를 진행했습니다. 인터뷰 공모에는 여러 지역의 활동가들이 참여해주셨습니다. 이 프로젝트는 <공익활동가사회적협동조합 동행>, <한국시민사회지원조직네트워크>, <지리산이음>이 공동주최하고, <아름다운재단>이 지원했습니다. |
기후위기 상황 앞에서 기독교의 오랜 기만과 모순과 패착을 말하며 사과문을 읽는 기독인이 있다. 그는 동료 한 사람과 함께 단 둘이서, 기후위기 대응을 위해 기독인들이 연합하고 연결되고 대화할 수 있는 장을 만들기도 했다. 기후위기 기독인 연대의 문형욱 활동가다. 그의 이야기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기후위기는 이 사회 시스템이 오랜 기간 야기해온 문제.
이에 대한 기독인들의 선명한 인식과 책임의식 일어야.
Q. 형욱 님을 가장 잘 대표할 수 있는 말이 기후위기 기독인 연대라고 생각되는데요, 이곳은 어떤 곳이며 형욱 님은 이곳과 어떻게 관계를 맺게 되었는지 소개해주실 수 있을까요?
일단 기후위기 기독인 연대를 소개한다면, 이곳은 단체 이름이 말해주는 것처럼 기독인들의 연대를 도모하는 단체라고 할 수 있어요. 첫 번째 의미는, 기독교 쪽에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가지신 분들을 대표해서 단체를 만들었다고 할 수 있겠고요, 두 번째 의미는 그들을 조직해서 기후위기에 같이 대응한다는 취지로 만든 것이라 할 수 있어요.
Q. 그럼 형욱 님이 기후위기 기독인 연대를 처음 만들거나 꾸린 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그 계기는 어떤 것이었나요?
제 경우는 원래 이전에 기독교 안에서 시민단체 활동을 하고 있었고 그 안에서 기후위기 대응하는 그룹에도 있었거든요. 그런데 좀 더 고유한 운동을 만들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당시 윤석열 대통령이 대선 후보로 나오게 되면서 위기의식을 크게 느꼈어요. 사실 이번 총선도 그랬듯이 정치권력이라는 게 양당에 집중되어 있잖아요. 그래서 그 양당 체제 안에서는 기후위기 대응이라는 것, 기후위기를 극복하는 어떤 제도적인 전환이라든지 하는 것들을 전혀 할 수 없는 막막한 상황이라는 걸 자각하곤, 좀 다른 목소리를 좀 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기후위기에 대응하려면 양당 후보를 떠나서 진짜 어떤 후보가 대선 후보로 적당하냐 이런 메시지부터 저희가 시작을 한 거죠. 그렇게 대선, 지방선거에 대응하면서 저희 단체가 이제 만들어지기도 하고 자리도 잡아가고 그랬어요.
Q. 대선이면 2022년이었나요?
네, 맞아요. 22년 1월 즈음이었어요. 당시, 기독교 내에서 기후위기와 관련해서는 대선 대응 활동이 없었거든요. 그걸 자각하곤 급히 현 기후위기 기독인 연대의 공동대표인 김영준 님을 만나, 지금 이 상황에서 우리가 뭔가 행동을 해야 되지 않겠냐는 이야기를 했어요. 그렇게 회의를 시작하고, 기자회견 기획을 하고 보도자료와 웹자보를 만들게 되면서, 그렇게 모든 게 순식간에 시작이 된 거예요.
그런데 어쨌든 그동안 기독교 안에서는 기후위기가 여러 제안 공약 중에 “환경” 공약으로 끼어들어가 있었던 건데, 사실은 기후 문제가 단지 “환경”으로 치환되는 문제는 아니잖아요. 기후위기라는 것은 이 사회 시스템이 오랜 기간 야기해온 문제이기 때문에, 시스템 전체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되는데 그런 목소리나 인식이 아직까지는 많이 부족하잖아요.기후위기가 도대체 얼마만큼 큰 이야기를 담고 있고 얼마만큼 큰 변화를 만들어내야 되는 일인지에 대해 시민들이나 기독교인들 대부분이 아직 그 인식이 부족하니까, 그에 대한 운동과 선명한 목소리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 기후위기 기독인 연대를 만들었다고 할 수 있겠어요.
#보여주기 식의 코로나 대응, 그린뉴딜 정책 등 정치권에 대한 실망과 무기력을 넘기 위해.
Q. 형욱 님이 크리스천이니까 그 크리스천 정체성으로서 연대체를 만들어보자는 뜻도 있었을 것 같고, 기후위기라는 이 절체절명의 문제 앞에서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는 마음과, 또 이에 대한 보다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문제에 대한 인식론을 강화해야 한다는 문제의식도 있었을 것 같아요. 그런데 왜 하필 기독교 사회 내에서 이 문제에 대응해야 하는지에 대한 강력한 연결고리가 필요했을 것도 같은데요, 개신교 자체가 어떻게 기후위기하고 관련이 되어 있는지에 대한 성찰이나 고민이 있었을 텐데 그에 대해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우선 개인적인 차원에서 얘기를 한번 해볼게요. 제가 속해 있던 공동체나 그 교회 문화권 안에서는 일반적으로는 제가 어떤 문제를 마주하고 내 문제로 받아들이게 될 경우, 그것을 기독교인이라는 정체성이 아니라 일반 시민사회에서, 교회 바깥의 영역에서 그와 관련된 활동과 대응을 하도록 하는 게 일반적인 메시지였어요. 저도 오랫동안 그렇게 배워왔고요. 그런데 저 같은 경우는 종교적인 언어와 하나님 나라라는 개념이 너무 중요해서 이것 자체를 사회적 삶과 엮어서 이야기하는 게 저한테는 되게 중요했던 것 같아요.
또 보다 큰 차원에서 얘기할 수도 있어요. 한국 사회에 기독교인들이 굉장히 많은데 대개가 많이 보수화되어 있고 진보적 담론을 계속 후퇴시키는 역할들을 하고 있죠. 여러 영역에서 안 좋은 모습을 많이 보이고 있어요. 그러니 기독교인들을 설득해야겠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제게는 기독교라는 게 고향 같은 것이고 집 같은 곳인데 그곳에서조차도 내부적으로 목소리가 제대로 안 나오고 있으니, 제겐 꼭 필요한 목소리를 어떻게든 일게 해야겠다는 마음도 있었죠.
Q. 그렇겠네요. 또 어째서 대선이 계기였을까 하고 생각을 해보면, 말씀하신 대로 이 사회가 기독교와 정치권 간의 유착이 심한 사회이니 더더욱 문제의식이 있으셨을 것도 같아요.
사실 아주 보수화된 교회라고 하면 전광훈 목사로 대표되는 집단들이 있을 테지만, 제가 속했던 소위 진보적이라 하는 그리스도인 그룹에선 사실 민주당 쪽에 많은 연결고리가 있었어요. 박근혜 대통령 탄핵되면서 문재인 정권이 들어서고, 총선은 크게 승리해서 민주당이 180석을 넘겨버렸잖아요. 그때 저는 되게 두려움을 느꼈어요. 왜냐하면 이렇게 180석을 만들어놓고 대통령까지 민주당인데 지금의 위기를 전혀 해결 못할 것 같은 거예요.
그 두려움이 괜한 게 아니었어요. 지난 21대 국회에서 여실히 드러난 면면들을 보면요. 문재인 정부에서 보여주기 식으로 코로나 대응이나 그린뉴딜 정책을 해나갔는데 그것들이 전혀 기후위기 대응의 실질적인 차원으로 연결되지 못하고 시장주의적으로 흘렀잖아요.
그런데 교회 내에서는 “민주당이 하나님 나라다”라는 말을 대놓고 하는 어른들이 있었고 그 내용을 담은 성명서에 원로 목사님들이 연서명을 해주시기도 했어요. 그걸 보고 젊은 진보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충격을 적지 않게 받았죠. 그런 맥락 속에서 우리는 민주당이 아니라 다른 대선 후보, 다른 정치인, 다른 지방선거에 대한 얘기를 해보자고 하는 맥락이 굉장히 컸던 것 같아요.
#관계를 회복시키고 세상을 회복시키기 위해 그리스도인이 나서야.
Q. 여기서 중간 질문을 하나 해볼게요. 그리스도인 정체성과 사회운동 활동가라는 정체성과는 어떻게 만난다고 생각하세요?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 기본적으로 성서가 말하는 것을 수용한 이들인 거잖아요. 물론 그리스도인들 중에도 어떤 교육 아래 어떤 입장을 가지게 되느냐는 갈리겠지만, 기본적으로는 사랑과 정의의 관점이 가장 중요한 이제 관점이라고 보거든요. 그 관점을 각자의 삶에서 실현해 나가는 과정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할 수 있겠죠. 활동가라고 하면 사회에 대해 목소리를 내고 움직이는 활동을 나의 업으로 생각하는 거잖아요. 시대적인 과제 앞에서 이 문제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그리스도인들한테도 계속 전달하고, 그리스도인들을 대표해서 이 문제에 적극적으로 뛰어드는 일이 ‘활동가 그리스도인’ 또는 ‘기독인 활동가’라는 포지션인 것 같아요.
Q. 말씀을 들으니 예수의 걸음이 생각나기도 해요. 예수님은 어디든 몸을 써서 돌아다니고 계속 만나고, 접촉하고, 만져서 바꿔내는 활동을 한 거잖아요. ‘기독인 활동가’의 걸음은 예수의 걸음과 어느 정도 닮아 있는 듯해요.
과분한 말씀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누구나 예수를 따라가고 닮아가야 한다고 생각하긴 해요. 예수님은 요한복음에서 “하나님이 이처럼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라고 말씀하시거든요. “하나님이 이처럼 유대인을 사랑하사”라고 말하지 않고 “하나님이 이처럼 세상을 사랑하사”라고 말한단 말이에요. 하나님이 예수를 보낸 건 흔히 ‘선민’으로 대표되는 유대인을 위해서 보낸 것도, 단지 인간을 위해서 보낸 것도 아니라는 뜻이에요. 하나님이 세상 전체를 만들고 세상을 위에서 사람을 둔 건데, 기후생태위기 상황은 그 관계가 다 깨진 상황이라 할 수 있잖아요.
그러니 관계를 회복시키고 세상을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잘못 흘러가고 있는 부분들에 대해서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참여하고 헌신하고 희생하고 바꿔내려고 노력하는 게 맞는 거라고 봐요. 사실 그게 1순위라고 생각을 해요. 그래서 기후위기 기독인 연대의 1순위도 이와 다르지 않고, 세상을 같이 바꿔내는 일에 기독교인들을 어떻게 참여시킬 것인가가 큰 목표인 거죠.
Q. 앞의 이야기에 조금씩 담기기도 했지만 기후위기 문제에 딱 이렇게 집중하게 된 계기가 있다면 어떤 것일까요?
제가 대학 1학년 때 경제학 전공이었고 2학년 때 경영학 전공이었는데 3학년 때 전공을 다 포기했거든요. 대학에서 전문성을 쌓는다기보다는 시야를 넓히는 게 맞겠다는 걸 깨닫고는 사회, 문화, 역사, 철학을 전반적으로 되게 폭넓게 들어야겠다는 결단을 내렸죠. 그러면서 환경 수업을 3개 정도 들었는데 그때 처음으로 기후위기, IPCC 문제를 비롯해, 엄청난 기술력을 가진 전기차 개발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왜 대대적인 상용화가 안 되고 있는지에 대한 것, 즉 석탄화력발전 기업, 정유회사 등의 막대한 로비나 정치세력과의 유착 관계에 대한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런데 그땐 저런 교수님 같은 분들이 있으니까 잘 해결되겠지, 하는 생각만 했죠.
그 한참 뒤인 2018년에 한 관측 기사가 엄청나게 올라왔는데 그게 이제 한 번도 녹지 않았던 빙하가 녹기 시작했다는 거였어요. 그 당시 과학자들이 최후의 빙하라고 불렀던, 인류 역사상 단 한 번도 녹아내린 적이 없었던 그 지점의 빙하가 녹기 시작했다는 결과였어요. 그때 저는 하나님이 우리한테 허락해주신 이 지구의 시스템이 인간의 산업 문명 때문에 망가졌구나, 회복 불가능한 상태로 가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두려웠어요.
방금 언급했던 그 교수님 말씀을 들었던 순간부터 기사를 읽게 된 2018년까지는 상당히 시간이 있었는데 그 시간 동안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는 사실, 외려 더 심각한 상황이 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제게는 굉장히 크나큰 인생의 경종처럼 울렸던 것 같아요. 그때 이것이 내가 뛰어들어야 될 문제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Q. 말씀을 들으니 2022년의 924 기후정의행진 오픈마이크 생각이 나요. 그때 형욱 님께서 발언을 해주셨잖아요. 기독교, 개신교를 대표해서 사과한다고 하면서 엄청난 사과문을 작성해서 읽어주셨잖아요. 진짜 놀라웠고, 모인 사람들 모두가 너무 반가워했어요. 그 얘기 조금 해주실 수 있나요?
자본주의 시스템이 계속해서 과도하게 발전하는 동안 기독교가 해온 일은 계속해서 생태 학살하고 착취하라고 옹호하고 부추긴 일이라고 생각해요. 이게 괜한 말이 아니고 이 흐름을 분석한 논문들도 이미 있거든요.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이 대부분이죠. 성서의 말씀은 진짜 가난한 자들 곁에 있는 것, 이방인들과 고아와 나그네와 과부들의 피난처가 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책무인데, 지금은 그 모든 소수자, 약자, 가난한 자들을 배척하는 것은 물론 자본주의 질서를 옹호하는 집단이 된 것이 사실이에요. 저는 그게 너무 안타까운데 그에 대해 그 사람들한테 사과를 요구를 해봐야 통할 리 없으니, 내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먼저 사과를 하는 게 맞겠구나, 시민사회에서 기독교인들이 가장 먼저 해야 되는 건 사과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목소리가 더 멀리까지 들릴 수 있도록 비폭력 직접행동을.
Q. 그 사과는 말이 아니라 행동에 가깝다고 느껴질 정도로 굉장히 강력한 인상을 남겼어요. 그런데 최근엔 또 직접행동이 중요하다는 생각에서 멸종반란에도 합류를 하셨는데요, 어떤 문제의식에서 이처럼 새로운 걸음을 더하게 되었는지 궁금해요.
많은 것들이 단절되고 관계망 또한 파편화되어 있는 지금의 세상에선 시민사회 활동도 대중에게 다가가기 참 어려운 구조라는 생각을 해요.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이 뭐가 있을까를 고민할 때, 비폭력 직접행동이라는 수단이 가장 적절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재작년에 저스트스탑오일(Just Stop Oil)이라는 단체에서 반 고흐의 작품 ‘해바라기’에 토마토수프를 붓는 직접행동을 했잖아요. 이후, 그 사건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정도로 크게 논쟁이 일었고 그 행동을 욕하는 사람도 꽤나 많았지만, 그 이슈 하나로 그렇게 많은 시민들이 이야기를 나누도록 했다는 게 굉장히 고무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나라에서도 비폭력 직접행동을 통해서 세 건의 재판이 만들어졌고 그 재판들이 법적으로 어느 정도 의미 있는 결과들을 이끌어냈어요. 또 사안이 언론에도 보도되면서 많은 이들에게 알려지기도 했어요. 저는 그 점이 의미 있게 느껴져요.
사실 저스트스탑오일 활동가들이 아스팔트 도로에다 손바닥을 접착제로 붙이는 액션도 하곤 하거든요. 그 활동 중에, 지나가던 시민이랑 언쟁이 붙은 거예요. 해당 영상이 유튜브에 올라왔어요. 그때 저스트스탑오일의 공식 입장을 담은 대답이 뭐였냐면, 지난 수십 년간 우리가 캠페인하고 제도 변화시켜보려고 온갖 다양한 수단을 써서 요구를 했지만 변한 게 없었고, 그래서 직접행동을 하는 거라는 내용이었거든요.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듣고 한국의 상황을 봤을 때 2024년은 직접행동에 대한 세 건의 재판이 다 끝나는 해인데, 그 뒤에도 우리가 다시 예전에 했던 것만 반복하고 있는 상황이 되는 것 같은 거예요. 다시 조용하게 캠페인하고, 제도 개선 제안하고 정치인들 설득하려 하고... 그런 움직임도 당연히 필요하겠지만 사실 지금 필요한 거는 더 큰 목소리를 들리게 하기 위한 액션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제가 멸종반란에 들어가게 된 거고요.
#사회운동은 같이 놀고 같이 춤추는 것. 이를 위한 리젠(돌봄) 앞으로.
Q. 멸종반란이 표방하는 가치 중에서 리젠문화를 중요시하는 것 또한 형욱 님이 눈여겨본 것이라는 말씀을 들은 적 있는데요, 형욱 님의 리젠(돌봄)에 대한 생각을 들려주실 수 있나요?
한 사람의 삶을 볼 때, 사회 활동의 영역이 있고 가정의 영역이 있고 친구나 동료로 살아가는 영역이 있고, 또 나 스스로와의 관계를 구성하는 영역도 있잖아요. 그런데 우리가 그 모든 영역에 대해 일일이 신경 쓰지는 못해요. 특히 활동가들은 눈앞에 있는 문제, 갑자기 대응해야 하는 문제가 있으면 이리저리 뛰어다니기 바쁘죠. 하지만 계속 달리기만 하면 어느 순간에는 지속하지 못하는 상황들이 생기더라고요.
요즘 제 일상 속에선 이런 생각을 해요. 곁에서 제어하는 힘이 없으면 저는 활동을 야금야금 늘리는 경향이 있더라고요. 그러면 저녁 시간에 집을 비우게 되고 아내에게 육아 부담을 지워주게 되거든요. 그때마다 아이가 저랑 되게 놀고 싶어 하면서 “아빠 왜 오늘 안 들어와?” 하고 얘기를 해요. 그게 저의 삶을 지키기 위해서 브레이크를 걸어주는 일이 아닌가 싶더라고요. 그게 되게 소중하게 느껴졌어요. 사람이 하나의 문제에만 집중하면 되게 삭막해지고 치열해지잖아요. 그런데 그때마다 아이가 제게 같이 놀자고 하는 거예요. 바꿔 말하면 제가 놀이로 초대를 받는 거죠.
사람이라는 게 어찌 보면 놀기 위해 지어졌다고 하잖아요. 저는 그 말에 깊이 공감하거든요. 노는 시간은 창조적인 시간이고, 그 시간을 통해서 활동의 감각을 회복하게 되기도 하니까요. 사회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어쩌면 자꾸 놀자고, 같이 춤추자고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아닐까 싶어요.
이런 맥락 속에서 제가 어떤 문제에 삭막하게 집중할 때 아이가 저를 찾는다는 건, 저를 놀이로 초대하는 길을 여는 것과 같아요. 활동과 돌봄이, 놀이와 활동이 서로의 경계를 넘는 순간인 거죠. 이 연장선상에서 활동을 마냥 힘들고 어렵게 견디듯이 하는 게 아니라, 함께 재밌게 할 수 있는 동료들을 많이 만나고 싶다는 생각으로 멸종반란에 들어간 것이기도 해요.
#기후위기 #공익활동가주간 #변화를만드는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