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은성 활동가는 오랫동안 시를 쓰고 대학 내에서 문학 연구를 해온 사람이다. 그랬던 그가 숱한 존재들이 겪는 기후생태위기와 삶의 위기를 마주하며 더는 책상 앞에만 앉아 있기 어려웠다고 말한다. 그는 폐허 속에 연대라는 불빛을 비춰 공동체를 다시 세울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그 믿음으로 몸을 움직이는 사람이다. 아프고 고통받는 자리, 그러나 여전히 존엄한 자리를 찾아 자신의 한 몸을 보태는 사람이다.
#. 나는 여전히 허둥지둥하면서도 배워가는 사람, 몸을 움직이는 사람.
Q. 2년 전쯤 우리가 서로를 처음 알았을 때 은성 님은 시인이었거든요. 시인이라는 정체성이 거의 전부를 이루고 있었어요. 지금은 어떤가요? 지금은 어떤 사람이 되어 있는지 얘기해주실 수 있을까요?
저는 지금 배워가고 있는 사람이에요. 또 예전에도 매우 허둥지둥하던 사람이었는데 지금도 허둥지둥하는 사람이고요. 그렇지만 몸을 움직이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만은 확실히 달라진 부분인 것 같아요.지금 기후생태 활동가가 되어 있기도 한데, 그건 단지 생명에 대한 감수성 때문은 아니었어요. 당시 뭔가가 잘못되어 돌아가고 있는데 당장 내가 무엇을 해야 될지 모르겠더라고요. 분명 계속 구체적으로 느껴지는 아픔이 있는데 그 아픔을 사회적인 현상 속에서 짚어내지 못하고 있었어요.
그 아픔이 정확히 어디에서 연유하는지를 좀 짚고 병명만이라도 알아가는 그런 기분으로 배워보려 했어요. 그 와중에 동료들의 행보를 보면서 저 또한 삶의 방향을 틀어볼 수 있었고요. 그 여정이 완결되었다기보다는 지금도 허둥지둥하면서 좀 배워가는 중이죠. 여전히 허둥지둥하지만 몸을 움직이는 사람이고, 생태적 감수성을 동료들과 함께 키워가게 된 사람인 것 같습니다.
#. 내게 시는 삶 자체이자 고통에 대한 말하기.
Q. 병명을 알게 된다는 말이 너무 좋네요. 그럼 지금 은성 님은 시인, 문학연구자, 기후생태 활동가라는 정체성을 다 가지고 있는 건데, 그 정체성들 간의 관계는 어떨까 하는 궁금증이 있어요. 정체성들 간에 바람직한 영향을 주고받는지, 혹은 모종의 긴장이 있는지 하는 것 말예요.
이 질문은 제가 활동가로서 살아가는 한 계속 직면하게 될 수밖에 없는 질문일 것 같아요.그에 대한 답은 어쩌면 매번 바뀔 수도 있는 것이겠고요. 그럼에도 바로 선명한 답이 떠오르지는 않았어요. 왜냐하면 그 질문은 ‘시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기도 하기 때문이에요.
제 경우엔,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그런 시기에 뭐라도 적어보려고 펜을 놀려서 일기를 쓰듯 시를 썼고, 그것이 나만의 사적인 기록에 머무르지 않고 타인에게 읽히도록 수정하는 과정을 거쳤어요. 그 과정이 참 아름답게 느껴졌고, 그게 타인들에게 가닿는 것들을 볼 때엔 뿌듯함과 자부심도 느꼈어요.
저의 시 쓰기의 대부분은 저의 고통과 관련된 것이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론 저 개인에게만 골몰하는 작업이 아니라 사회와 소통하는 그런 객관화의 결과물이기도 했어요. 기후생태위기라는 건 아주 큰 사회적 맥락을 살펴볼 것을 요청하는 그런 주제라 할 수 있는데, 거의 모든 것이 파괴된 기후생태위기 상황 속에 나를 놓고 봤을 때 쓸 수밖에 없는 말들이 제 시의 주제 중 하나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해요.
하지만 이 상황을 외치는 걸 목적으로 하지는 않죠. 예컨대 활동가의 언어가 직선적이고 옳고 그름에 대해 분명한 방향성을 지시하는 언어라면, 문학의 언어는 옳고 그름을 정확하게 가르는 언어라기보다는 문학적 옳음이라고 할 만한 것을 지향하는 언어라고 할 수 있을 거예요. 이렇게 이분법적으로 나눠 말하기는 어렵겠지만요. 저는 삶의 무수히 많은 복잡다단한 측면을 입체적으로 가져가는 문학의 언어가 이 삶과 사회를 포괄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품 넓은 형식 중 하나일 수 있다는 기대를 조금은 하고 있어요. 그 언어를 아주 잘 쓸 수 있다면 말예요. 이 같은 기대를 여전히 놓지 못하고 있어요.
기후생태위기 앞에 서면 모든 게 다 소용 없구나 하는 회의적인 마음이 들 때가 많아요. 문학 또한 제게는 그렇게 회의하는 대상 영역 중 한 영역이기도 해요. (문학이라는 형식이 이 세상 모든 것을 포괄하는 절대적인 형식이라고는 생각지 않아요.) 문학은 사회문화적 산물이기도 한데요. 짚고 싶은 것은, 시 장르가 순수한 장르일 것이라는 기대를 일반적으로 하게 되는 장르라는 점이에요. 하지만 순수함이랄지, 개인의 고독이나 고통을 수용하기에 유용한 장르라는 이유로, 파편적인 개인이 고립되어 혼자 예술적 작업을 하는 것이 정당화되는 흐름은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Q. 그런데 시의 언어가 설령 개인적인 언어에 가깝다고 하더라도, 시 쓰기가 고통에 대해서 말하는 행위라고 한다면 그건 은성 님이 기후생태 활동에 대해 말씀하신 비유인, 병명을 알아가는 과정과도 닮아 있는 게 아닌가 싶어요. 맞아요.
비슷한 얘기가 될 수 있을 텐데 그렇기에 시 쓰기와 기후생태 활동 사이의 긴장이 그리 크지는 않아요. 왜냐하면 그냥 내가 내 삶을 쓰는 게 또 시라고도 생각하거든요. 어떤 시인은 그 언어의 조형적인 체제에 집중한다거나 언어라는 틀을 깨기 위한 작업을 언어 기표를 통해서 하는 실험을 시에 담아내기도 하는데요, 그런 작업들을 충분히 존중할 만하다 생각하면서도, 저는 그와는 다른 방식을 따라요. 제게 시는 삶 자체이자 고통에 대한 말하기예요.
제가 다른 문학 작품들을 읽는 위치에선 어떤 분노 때문에 긴장이라 할 만한 걸 종종 느껴요. 주디스 버틀러의 책 제목처럼 “지금은 대체 어떤 시대인가”를 말할 수 있을 것인지, 요즘 출판된 작품들을 읽으면서 묻게 되거든요. 우리가 이 세계, 이 시대에 대한 공통된 감각을 갖고 있는지 묻고 싶어져요.
#. 수라갯벌이 알려준 생태 파괴, 그 앞에서 구체적인 실천을 생각하기
Q. 문제의식에 동의해요. 이제는 은성 님의 지리적인 정체성에 대해서도 여쭙고 싶어요. 은성 님은 지금 전남에 와서 전남녹색연합 활동가로 일하고 계시는데요, 현재 머무르는 지역에 대해, 또 이동에 대해 이야기 들려주실 수 있나요?
저는 해남에서 태어나 20년을 거기서 살았어요. 그래선지 그 이후에 서울을 비롯해 여러 곳을 이동해 다니면서 살았어요. 제게 있어 주거지를 이동하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운 문제는 아닌 것 같아요. 하지만 제게 매혹적인 동시에 지리멸렬하게 느껴지는 서울에 살면서 이른바 ‘지방’이라는 곳들에 대한 마음을 놓지 못했어요.
제 고향이 지방이기도 해서 그렇겠지만, 서울 외의 지역이 소외된다는 느낌이 들 때 제가 가진 생각은 이것이 부당하다는 것이었어요. 하지만 제 삶의 편리함과 제 모든 관계와 제가 누려온 모든 기반이 있는 서울을 떠나는 선택을 하는 것이, 단지 그 부당함 때문이어선 안 되겠다는 생각도 동시에 했어요. 복잡한 마음이 있었고, 그만큼 이동하는 게 쉽지 않았다는 뜻이에요.
Q. 그 이동을 은성 님의 기후생태 활동과 연결 지어 조금 더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활동하는 동료들을 하나하나 만나게 되고 기후생태위기를 보다 구체적인 나의 문제로 여기기 시작한 이후 ‘실천’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어요. 제가 그동안 몸담았던 대학원을 중심으로 바라봤던 일상의 구조에 새로운 렌즈를 들여오기 시작하던 그때, 제 새로운 생각의 방식을 구체적으로 실천에 옮겨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거죠.
그때 제게 크나큰 현안으로 다가왔던 게 새만금 간척 사업 관련 이슈였어요. 그곳에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작은 갯벌인 수라갯벌이 새만금 신공항 개최 예정지가 될 거라는 이야기를 접하면서 생태 학살이라는 게 무엇인지가 너무도 생생하게 몸으로 느껴졌어요. 어쩌면 추상적으로 느끼기 쉬운 생태계의 파괴라는 게, 그 당시 너무 직접적으로 체감되었던 거죠. 그러면서 관련 활동가로 지원을 해볼 계기가 있었고 그렇게 활동가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어요.
그전에도 이런저런 활동에 참여하려고 노력은 했지만 본격적으로 제 삶의 모양을 바꾼 건 그때라고 할 수 있어요. 하지만 조직에 대한 고민 끝에 지금은 더 넓게 보면서 활동가의 일에 대해 더 배우고 제 삶을 돌보는 일에 대해서도 균형을 잃지 않으려고 활동 지역과 영역을 옮겼어요. 서울을 떠난 게 제게 또 다시 이동을 해야하는 상황을 마주한 게 아주 어려운 일은 아니었지만, 누구나 쉽게 택할 만큼 쉬운 일은 아니라고 봐요.
#. 내가 속해 있는 지역의 고유한 시간을 알아간다는 것.
Q. 현재의 어려움에는 어떤 게 있어요? 큰 용기를 내고 결의하는 마음으로 왔을 텐데 현실은 만만치가 않잖아요.
제가 어떤 현안에 관심이 있는지를 넘어서서 내가 현재 속해 있는 지역의 고유한 시간을 알기 위해 연구를 해야 하고, 또 연구에 그치는 게 아니라 그걸 바탕으로 지역 관련 기후생태 의제 쪽으로 사람들이 모이도록 조직하는 작업을 해야 하잖아요. 그런데 이 같은 실질적인 활동가의 업무에 대한 경험치가 적다 보니 아무래도 어려움이 따르죠.
제가 기존에 책으로만 봐왔던 그런 기후생태위기 대응과는 많이 달라요. 저마다 다르게 감각하고 경험하는 기후생태위기의 당사자로서 각각이 구체적으로 어떤 피해를 받고 있는지를, 또 생태계가 어떤 양상으로 피해를 입는지를 가시화시키는 게 중요하거든요. 그런데 지금의 저로서는 지금 속한 지역을 읽어내고 지역에 적응하는 것과 함께 그 작업을 해나가는 일이 아직은 만만치 않은 것 같아요.
Q. 이곳으로 완전히 영역 옮기기 전에, 잠깐 여기 와서 아기 두꺼비들 옮기는 일도 하셨잖아요. 그 얘기 좀 해주실 수 있을까요?
활동가 한 분이 저에게 갑자기 아기 두꺼비 사진을 보내면서 함께 일해보지 않겠냐고 하더라고요. 사진을 두 번이나 보내주셨는데, 새끼손톱만 한 아주 여리고 조그마한 두꺼비들이 너무 사랑스러운 거예요.사진만 봤을 때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을 하던 차였는데, 와서 봉사활동이라도 해보지 않겠냐고 하셔서 봉사활동을 하러 갔죠. 두꺼비들이 도로를 건너서 산으로 올라가야 하는데 그 도로 위에서 로드킬을 당하거나 햇볕에 말라서 죽게 되는 일이 빈번한데, 그 아이들을 안전하게 옮겨주는 봉사활동이었어요.
그곳 산란지와 서식지 일대가 인간의 개발로 인해 두꺼비들이 이동하기 어려운 곳이 됐어요. 환경단체의 요구로 대체 산란지도 마련이 됐는데 두꺼비들이 결코 대체 산란지에서는 산란을 하지 않더래요. 그래서 이들이 원래 산란하는 곳에 가서 산란을 하고는 위험한 도로를 건너 산으로 올라갔다가, 산란할 때가 돌아오면 또다시 내려오고요. 아기 두꺼비들도 알에서 깨어나면 그렇게 살 곳을 찾아 위험한 이동을 하고요. 직접 가서 그 두꺼비들을 손으로 만지니 너무 귀하단 생각이 들었고, 몸이 그곳에 간 뒤로 제 마음도 거기로 가버렸더라고요. 그래서 일하기로 결정을 하게 됐죠.
#. 가장 낮은 곳부터 기후위기의 피해를 받는다는 이야기는 바로 나의 이야기이기도.
Q. 그렇다면 은성 님이 기후생태위기를 감각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 혹은 구체적인 활동을 해야겠다고 마음먹게 한 특별한 장면이나 경험을 든다면 어떤 게 있을까요?
대답이 어쩌면 너무 인간중심주의적일 수 있지만 분명한 시작이기는 해서 말씀드려볼게요. 물론 방금 들려드린 두꺼비 이동 돕기와 같은, 생태적인 접촉의 장면들도 주요했다고 할 수 있어요. 수라갯벌을 생생하게 느꼈던 경험도 중요했고요. 하지만 저를 움직인 결정적인 감각은, 제 고립의 순간에 그 고립이 사회구조적으로 너무 필연적인 것이겠다는 깨달음이었어요.
정말 얼마 안 됐는데 2022년에 여름에 폭우 참사가 있었잖아요. 그 직전에 기후위기 앞에 선 창작자들 활동에 막 함께하게 되었고요. 그 바로 전에는 제가 제주도 강정마을의 평화 순례를 다녀오기도 했어요. 거기서 문형욱이라는 친구를 만났는데, 제가 알고 있던 친구가 기후 활동가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지금 뭐하고 있나 하는 생각을 되게 많이 하게 됐어요.
당시에 저는 대학원 생활을 하면서 문학 연구자로서 사는 일에 대해 의심하지 않으면서 혼자 외로움을 견디며 책상 앞에 앉아 있던 사람이었어요. 그땐 제가 마치 이 세상 모든 좋은 것들을 다 포기하고서 문학에만 매진하는 사람인 양 했는데, 이마저도 실은 온갖 욕망 속에서 대학원이라는 곳을 택했다는 걸 지금은 느껴요. 물론 당시 공부에 매진하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이 없었다 할 수는 없지만 그때 제가 왜 대학원 밖을 꿈꾸지 않았는지, 사실 그때의 제가 불쌍해요.
저는 기독인이기도 해서 기독인의 사회 참여의 역할 역시도 좀 깊이 있게 생각하는 편이었거든요. 제가 접해왔던 기독교는 이 사회에 대한 공공성을 고민하고 여러 방식으로 참여하는 가치를 가르치는 문화가 있었는데, 기후위기 상황을 인지하고 보니 기독교가 이 세계에 역사적으로 끼쳐온 해악이 있다는 걸 더욱 명확히 알게 됐거든요. 오랜 식민주의도 그렇고, 신앙과 축복의 결과로서 성실함과 자본 축적을 강조하는 가르침이 이 사회의 지배적 착취의 흐름에 큰 근거를 마련해줬다는 생각이 들어서 슬프고 화가 났어요.
그러면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한편으론 고립감을 느끼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사회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으로 내가 풀어가야 하는 과제는 무엇일지 고민을 하던 차였는데 폭우가 쏟아졌거든요. 제가 반지하에 살고 있었는데 한참을 지속되는 폭우 속에서 밖으로 못 나가니까 어디 연락할 데도 없더라고요. 당시 그 집이 너무 노후화된 집이어서 침수도 되고 누수도 있었어요. 그래서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마음이 온통 다 너덜너덜해진 채로 지냈어요.
그때 폭우 참사 소식을 들었어요. 그 모든 게 다른 이들의 일이 아니라 고스란히 제 일로 느껴졌어요. 가장 낮은 곳부터 기후위기의 피해를 받는다는 이야기가 단지 문장이 아니라 너무 정확하게 이 사회를 설명하고 있는 말이구나, 그리고 그게 나까지도 포함하는 말이구나 하는 걸 느꼈어요. 그러면서 기후위기로 인해 피해를 입을 숱한 존재들이 떠올랐어요.
그 폭우가 계기였을 것 같아요. 외로웠던 중에 계속 이 문제에 대해서 말할 동료들이 있다는 것, 지금 당장 이것을 멈출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계속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에 감사했어요. 한편으론 너무 당연하고 옳은 말을 하는데 이게 목소리를 높여서 말해야만 하는 상황이라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죠. 동료들과 함께 외치며 다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얻은 이 같은 연대감이 저를 활동가의 길로 이끌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 연대는 지켜야 할 것을 지키는 사람의 존엄성이 드러나는 자리. 연대를 통해, 폐허 속에서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일을 생각할 것.
Q. 그럼 마지막 질문을 해볼게요. 은성 님께서 요즘에 느끼는 가장 중요한 가치, 가장 소중히 여기는 방향성을 설명해주는 핵심 키워드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저는 지금 조직 안에 있는 활동가잖아요. 조직 안에 있지 않았다면 긴급하게 사람을 필요로 하는 다양한 연대 현장에 시간이 닿는 한 빠르게 참여했을 것 같아요. 지금은 그럴 수가 없어 한편으론 아쉽지만, 들여다보니 지역 내에도 연대가 필요한 크고 작은 현장들이 발견되더라고요. 기후생태위기가 우리 삶 전반의 문제임을 더 알리는 차원에서 지역을 기반으로 한 시민사회 내 타 단체 분들에게 연대를 요청 드리면서 저 또한 그 단체들에 대해 알아가며 관계를 쌓아가고 있어요. 요즘은 지역사회에서 커먼즈를 확장하기 위해선 어떤 연대가 필요한지를 더 많이 고민하는 중이고요.
최근 밀양 송전탑 행정 대집행 10주년 결의대회에 다녀온 이후로는 연대에 대한 생각이 조금 더 깊어지기도 했어요. 연대라는 게 단순히 활동가로서의 품앗이가 아니라 지켜야 할 것을 지키는 사람의 존엄성이 드러나는 자리이자, 굉장히 외로울 싸움 당사자의 편이 되는 일이라는 생각. 이때의 연대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공동체를 이루게 하는 힘인 것 같아요. 폐허 속에서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일을 생각하면서 현재는 연대라는 키워드를 제 마음속에서 가장 힘껏 붙들고 있어요.
#기후위기 #공익활동가주간 #변화를만드는사람들 #전남
인터뷰어 : 희음
시 쓰기와 기록노동을 겸한다. 기후정의운동을 해왔고, 돌봄의 인식론 및 실천을 확장하는 데 관심이 많다. <김용균, 김용균들>, <우리 힘세고 사나운 용기>를 함께 썼고, 시집 <치마들은 마주 본다 들추지 않고>와 그림책 <무르무르의 유령>을 펴냈다.
2024공익활동가주간을 맞아 다양한 지역과 분야에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변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는 활동가들을 만나 이들의 일과 삶에 대한 이야기를 기록하는 활동가인터뷰 공모 프로젝트를 진행했습니다. 인터뷰 공모에는 여러 지역의 활동가들이 참여해주셨습니다. 이 프로젝트는 <공익활동가사회적협동조합 동행>, <한국시민사회지원조직네트워크>, <지리산이음>이 공동주최하고, <아름다운재단>이 지원했습니다. |
윤은성 활동가는 오랫동안 시를 쓰고 대학 내에서 문학 연구를 해온 사람이다. 그랬던 그가 숱한 존재들이 겪는 기후생태위기와 삶의 위기를 마주하며 더는 책상 앞에만 앉아 있기 어려웠다고 말한다. 그는 폐허 속에 연대라는 불빛을 비춰 공동체를 다시 세울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그 믿음으로 몸을 움직이는 사람이다. 아프고 고통받는 자리, 그러나 여전히 존엄한 자리를 찾아 자신의 한 몸을 보태는 사람이다.
#. 나는 여전히 허둥지둥하면서도 배워가는 사람, 몸을 움직이는 사람.
Q. 2년 전쯤 우리가 서로를 처음 알았을 때 은성 님은 시인이었거든요. 시인이라는 정체성이 거의 전부를 이루고 있었어요. 지금은 어떤가요? 지금은 어떤 사람이 되어 있는지 얘기해주실 수 있을까요?
저는 지금 배워가고 있는 사람이에요. 또 예전에도 매우 허둥지둥하던 사람이었는데 지금도 허둥지둥하는 사람이고요. 그렇지만 몸을 움직이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만은 확실히 달라진 부분인 것 같아요.지금 기후생태 활동가가 되어 있기도 한데, 그건 단지 생명에 대한 감수성 때문은 아니었어요. 당시 뭔가가 잘못되어 돌아가고 있는데 당장 내가 무엇을 해야 될지 모르겠더라고요. 분명 계속 구체적으로 느껴지는 아픔이 있는데 그 아픔을 사회적인 현상 속에서 짚어내지 못하고 있었어요.
그 아픔이 정확히 어디에서 연유하는지를 좀 짚고 병명만이라도 알아가는 그런 기분으로 배워보려 했어요. 그 와중에 동료들의 행보를 보면서 저 또한 삶의 방향을 틀어볼 수 있었고요. 그 여정이 완결되었다기보다는 지금도 허둥지둥하면서 좀 배워가는 중이죠. 여전히 허둥지둥하지만 몸을 움직이는 사람이고, 생태적 감수성을 동료들과 함께 키워가게 된 사람인 것 같습니다.
#. 내게 시는 삶 자체이자 고통에 대한 말하기.
Q. 병명을 알게 된다는 말이 너무 좋네요. 그럼 지금 은성 님은 시인, 문학연구자, 기후생태 활동가라는 정체성을 다 가지고 있는 건데, 그 정체성들 간의 관계는 어떨까 하는 궁금증이 있어요. 정체성들 간에 바람직한 영향을 주고받는지, 혹은 모종의 긴장이 있는지 하는 것 말예요.
이 질문은 제가 활동가로서 살아가는 한 계속 직면하게 될 수밖에 없는 질문일 것 같아요.그에 대한 답은 어쩌면 매번 바뀔 수도 있는 것이겠고요. 그럼에도 바로 선명한 답이 떠오르지는 않았어요. 왜냐하면 그 질문은 ‘시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기도 하기 때문이에요.
제 경우엔,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그런 시기에 뭐라도 적어보려고 펜을 놀려서 일기를 쓰듯 시를 썼고, 그것이 나만의 사적인 기록에 머무르지 않고 타인에게 읽히도록 수정하는 과정을 거쳤어요. 그 과정이 참 아름답게 느껴졌고, 그게 타인들에게 가닿는 것들을 볼 때엔 뿌듯함과 자부심도 느꼈어요.
저의 시 쓰기의 대부분은 저의 고통과 관련된 것이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론 저 개인에게만 골몰하는 작업이 아니라 사회와 소통하는 그런 객관화의 결과물이기도 했어요. 기후생태위기라는 건 아주 큰 사회적 맥락을 살펴볼 것을 요청하는 그런 주제라 할 수 있는데, 거의 모든 것이 파괴된 기후생태위기 상황 속에 나를 놓고 봤을 때 쓸 수밖에 없는 말들이 제 시의 주제 중 하나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해요.
하지만 이 상황을 외치는 걸 목적으로 하지는 않죠. 예컨대 활동가의 언어가 직선적이고 옳고 그름에 대해 분명한 방향성을 지시하는 언어라면, 문학의 언어는 옳고 그름을 정확하게 가르는 언어라기보다는 문학적 옳음이라고 할 만한 것을 지향하는 언어라고 할 수 있을 거예요. 이렇게 이분법적으로 나눠 말하기는 어렵겠지만요. 저는 삶의 무수히 많은 복잡다단한 측면을 입체적으로 가져가는 문학의 언어가 이 삶과 사회를 포괄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품 넓은 형식 중 하나일 수 있다는 기대를 조금은 하고 있어요. 그 언어를 아주 잘 쓸 수 있다면 말예요. 이 같은 기대를 여전히 놓지 못하고 있어요.
기후생태위기 앞에 서면 모든 게 다 소용 없구나 하는 회의적인 마음이 들 때가 많아요. 문학 또한 제게는 그렇게 회의하는 대상 영역 중 한 영역이기도 해요. (문학이라는 형식이 이 세상 모든 것을 포괄하는 절대적인 형식이라고는 생각지 않아요.) 문학은 사회문화적 산물이기도 한데요. 짚고 싶은 것은, 시 장르가 순수한 장르일 것이라는 기대를 일반적으로 하게 되는 장르라는 점이에요. 하지만 순수함이랄지, 개인의 고독이나 고통을 수용하기에 유용한 장르라는 이유로, 파편적인 개인이 고립되어 혼자 예술적 작업을 하는 것이 정당화되는 흐름은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Q. 그런데 시의 언어가 설령 개인적인 언어에 가깝다고 하더라도, 시 쓰기가 고통에 대해서 말하는 행위라고 한다면 그건 은성 님이 기후생태 활동에 대해 말씀하신 비유인, 병명을 알아가는 과정과도 닮아 있는 게 아닌가 싶어요. 맞아요.
비슷한 얘기가 될 수 있을 텐데 그렇기에 시 쓰기와 기후생태 활동 사이의 긴장이 그리 크지는 않아요. 왜냐하면 그냥 내가 내 삶을 쓰는 게 또 시라고도 생각하거든요. 어떤 시인은 그 언어의 조형적인 체제에 집중한다거나 언어라는 틀을 깨기 위한 작업을 언어 기표를 통해서 하는 실험을 시에 담아내기도 하는데요, 그런 작업들을 충분히 존중할 만하다 생각하면서도, 저는 그와는 다른 방식을 따라요. 제게 시는 삶 자체이자 고통에 대한 말하기예요.
제가 다른 문학 작품들을 읽는 위치에선 어떤 분노 때문에 긴장이라 할 만한 걸 종종 느껴요. 주디스 버틀러의 책 제목처럼 “지금은 대체 어떤 시대인가”를 말할 수 있을 것인지, 요즘 출판된 작품들을 읽으면서 묻게 되거든요. 우리가 이 세계, 이 시대에 대한 공통된 감각을 갖고 있는지 묻고 싶어져요.
#. 수라갯벌이 알려준 생태 파괴, 그 앞에서 구체적인 실천을 생각하기
Q. 문제의식에 동의해요. 이제는 은성 님의 지리적인 정체성에 대해서도 여쭙고 싶어요. 은성 님은 지금 전남에 와서 전남녹색연합 활동가로 일하고 계시는데요, 현재 머무르는 지역에 대해, 또 이동에 대해 이야기 들려주실 수 있나요?
저는 해남에서 태어나 20년을 거기서 살았어요. 그래선지 그 이후에 서울을 비롯해 여러 곳을 이동해 다니면서 살았어요. 제게 있어 주거지를 이동하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운 문제는 아닌 것 같아요. 하지만 제게 매혹적인 동시에 지리멸렬하게 느껴지는 서울에 살면서 이른바 ‘지방’이라는 곳들에 대한 마음을 놓지 못했어요.
제 고향이 지방이기도 해서 그렇겠지만, 서울 외의 지역이 소외된다는 느낌이 들 때 제가 가진 생각은 이것이 부당하다는 것이었어요. 하지만 제 삶의 편리함과 제 모든 관계와 제가 누려온 모든 기반이 있는 서울을 떠나는 선택을 하는 것이, 단지 그 부당함 때문이어선 안 되겠다는 생각도 동시에 했어요. 복잡한 마음이 있었고, 그만큼 이동하는 게 쉽지 않았다는 뜻이에요.
Q. 그 이동을 은성 님의 기후생태 활동과 연결 지어 조금 더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활동하는 동료들을 하나하나 만나게 되고 기후생태위기를 보다 구체적인 나의 문제로 여기기 시작한 이후 ‘실천’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어요. 제가 그동안 몸담았던 대학원을 중심으로 바라봤던 일상의 구조에 새로운 렌즈를 들여오기 시작하던 그때, 제 새로운 생각의 방식을 구체적으로 실천에 옮겨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거죠.
그때 제게 크나큰 현안으로 다가왔던 게 새만금 간척 사업 관련 이슈였어요. 그곳에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작은 갯벌인 수라갯벌이 새만금 신공항 개최 예정지가 될 거라는 이야기를 접하면서 생태 학살이라는 게 무엇인지가 너무도 생생하게 몸으로 느껴졌어요. 어쩌면 추상적으로 느끼기 쉬운 생태계의 파괴라는 게, 그 당시 너무 직접적으로 체감되었던 거죠. 그러면서 관련 활동가로 지원을 해볼 계기가 있었고 그렇게 활동가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어요.
그전에도 이런저런 활동에 참여하려고 노력은 했지만 본격적으로 제 삶의 모양을 바꾼 건 그때라고 할 수 있어요. 하지만 조직에 대한 고민 끝에 지금은 더 넓게 보면서 활동가의 일에 대해 더 배우고 제 삶을 돌보는 일에 대해서도 균형을 잃지 않으려고 활동 지역과 영역을 옮겼어요. 서울을 떠난 게 제게 또 다시 이동을 해야하는 상황을 마주한 게 아주 어려운 일은 아니었지만, 누구나 쉽게 택할 만큼 쉬운 일은 아니라고 봐요.
#. 내가 속해 있는 지역의 고유한 시간을 알아간다는 것.
Q. 현재의 어려움에는 어떤 게 있어요? 큰 용기를 내고 결의하는 마음으로 왔을 텐데 현실은 만만치가 않잖아요.
제가 어떤 현안에 관심이 있는지를 넘어서서 내가 현재 속해 있는 지역의 고유한 시간을 알기 위해 연구를 해야 하고, 또 연구에 그치는 게 아니라 그걸 바탕으로 지역 관련 기후생태 의제 쪽으로 사람들이 모이도록 조직하는 작업을 해야 하잖아요. 그런데 이 같은 실질적인 활동가의 업무에 대한 경험치가 적다 보니 아무래도 어려움이 따르죠.
제가 기존에 책으로만 봐왔던 그런 기후생태위기 대응과는 많이 달라요. 저마다 다르게 감각하고 경험하는 기후생태위기의 당사자로서 각각이 구체적으로 어떤 피해를 받고 있는지를, 또 생태계가 어떤 양상으로 피해를 입는지를 가시화시키는 게 중요하거든요. 그런데 지금의 저로서는 지금 속한 지역을 읽어내고 지역에 적응하는 것과 함께 그 작업을 해나가는 일이 아직은 만만치 않은 것 같아요.
Q. 이곳으로 완전히 영역 옮기기 전에, 잠깐 여기 와서 아기 두꺼비들 옮기는 일도 하셨잖아요. 그 얘기 좀 해주실 수 있을까요?
활동가 한 분이 저에게 갑자기 아기 두꺼비 사진을 보내면서 함께 일해보지 않겠냐고 하더라고요. 사진을 두 번이나 보내주셨는데, 새끼손톱만 한 아주 여리고 조그마한 두꺼비들이 너무 사랑스러운 거예요.사진만 봤을 때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을 하던 차였는데, 와서 봉사활동이라도 해보지 않겠냐고 하셔서 봉사활동을 하러 갔죠. 두꺼비들이 도로를 건너서 산으로 올라가야 하는데 그 도로 위에서 로드킬을 당하거나 햇볕에 말라서 죽게 되는 일이 빈번한데, 그 아이들을 안전하게 옮겨주는 봉사활동이었어요.
그곳 산란지와 서식지 일대가 인간의 개발로 인해 두꺼비들이 이동하기 어려운 곳이 됐어요. 환경단체의 요구로 대체 산란지도 마련이 됐는데 두꺼비들이 결코 대체 산란지에서는 산란을 하지 않더래요. 그래서 이들이 원래 산란하는 곳에 가서 산란을 하고는 위험한 도로를 건너 산으로 올라갔다가, 산란할 때가 돌아오면 또다시 내려오고요. 아기 두꺼비들도 알에서 깨어나면 그렇게 살 곳을 찾아 위험한 이동을 하고요. 직접 가서 그 두꺼비들을 손으로 만지니 너무 귀하단 생각이 들었고, 몸이 그곳에 간 뒤로 제 마음도 거기로 가버렸더라고요. 그래서 일하기로 결정을 하게 됐죠.
#. 가장 낮은 곳부터 기후위기의 피해를 받는다는 이야기는 바로 나의 이야기이기도.
Q. 그렇다면 은성 님이 기후생태위기를 감각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 혹은 구체적인 활동을 해야겠다고 마음먹게 한 특별한 장면이나 경험을 든다면 어떤 게 있을까요?
대답이 어쩌면 너무 인간중심주의적일 수 있지만 분명한 시작이기는 해서 말씀드려볼게요. 물론 방금 들려드린 두꺼비 이동 돕기와 같은, 생태적인 접촉의 장면들도 주요했다고 할 수 있어요. 수라갯벌을 생생하게 느꼈던 경험도 중요했고요. 하지만 저를 움직인 결정적인 감각은, 제 고립의 순간에 그 고립이 사회구조적으로 너무 필연적인 것이겠다는 깨달음이었어요.
정말 얼마 안 됐는데 2022년에 여름에 폭우 참사가 있었잖아요. 그 직전에 기후위기 앞에 선 창작자들 활동에 막 함께하게 되었고요. 그 바로 전에는 제가 제주도 강정마을의 평화 순례를 다녀오기도 했어요. 거기서 문형욱이라는 친구를 만났는데, 제가 알고 있던 친구가 기후 활동가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지금 뭐하고 있나 하는 생각을 되게 많이 하게 됐어요.
당시에 저는 대학원 생활을 하면서 문학 연구자로서 사는 일에 대해 의심하지 않으면서 혼자 외로움을 견디며 책상 앞에 앉아 있던 사람이었어요. 그땐 제가 마치 이 세상 모든 좋은 것들을 다 포기하고서 문학에만 매진하는 사람인 양 했는데, 이마저도 실은 온갖 욕망 속에서 대학원이라는 곳을 택했다는 걸 지금은 느껴요. 물론 당시 공부에 매진하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이 없었다 할 수는 없지만 그때 제가 왜 대학원 밖을 꿈꾸지 않았는지, 사실 그때의 제가 불쌍해요.
저는 기독인이기도 해서 기독인의 사회 참여의 역할 역시도 좀 깊이 있게 생각하는 편이었거든요. 제가 접해왔던 기독교는 이 사회에 대한 공공성을 고민하고 여러 방식으로 참여하는 가치를 가르치는 문화가 있었는데, 기후위기 상황을 인지하고 보니 기독교가 이 세계에 역사적으로 끼쳐온 해악이 있다는 걸 더욱 명확히 알게 됐거든요. 오랜 식민주의도 그렇고, 신앙과 축복의 결과로서 성실함과 자본 축적을 강조하는 가르침이 이 사회의 지배적 착취의 흐름에 큰 근거를 마련해줬다는 생각이 들어서 슬프고 화가 났어요.
그러면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한편으론 고립감을 느끼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사회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으로 내가 풀어가야 하는 과제는 무엇일지 고민을 하던 차였는데 폭우가 쏟아졌거든요. 제가 반지하에 살고 있었는데 한참을 지속되는 폭우 속에서 밖으로 못 나가니까 어디 연락할 데도 없더라고요. 당시 그 집이 너무 노후화된 집이어서 침수도 되고 누수도 있었어요. 그래서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마음이 온통 다 너덜너덜해진 채로 지냈어요.
그때 폭우 참사 소식을 들었어요. 그 모든 게 다른 이들의 일이 아니라 고스란히 제 일로 느껴졌어요. 가장 낮은 곳부터 기후위기의 피해를 받는다는 이야기가 단지 문장이 아니라 너무 정확하게 이 사회를 설명하고 있는 말이구나, 그리고 그게 나까지도 포함하는 말이구나 하는 걸 느꼈어요. 그러면서 기후위기로 인해 피해를 입을 숱한 존재들이 떠올랐어요.
그 폭우가 계기였을 것 같아요. 외로웠던 중에 계속 이 문제에 대해서 말할 동료들이 있다는 것, 지금 당장 이것을 멈출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계속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에 감사했어요. 한편으론 너무 당연하고 옳은 말을 하는데 이게 목소리를 높여서 말해야만 하는 상황이라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죠. 동료들과 함께 외치며 다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얻은 이 같은 연대감이 저를 활동가의 길로 이끌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 연대는 지켜야 할 것을 지키는 사람의 존엄성이 드러나는 자리. 연대를 통해, 폐허 속에서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일을 생각할 것.
Q. 그럼 마지막 질문을 해볼게요. 은성 님께서 요즘에 느끼는 가장 중요한 가치, 가장 소중히 여기는 방향성을 설명해주는 핵심 키워드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저는 지금 조직 안에 있는 활동가잖아요. 조직 안에 있지 않았다면 긴급하게 사람을 필요로 하는 다양한 연대 현장에 시간이 닿는 한 빠르게 참여했을 것 같아요. 지금은 그럴 수가 없어 한편으론 아쉽지만, 들여다보니 지역 내에도 연대가 필요한 크고 작은 현장들이 발견되더라고요. 기후생태위기가 우리 삶 전반의 문제임을 더 알리는 차원에서 지역을 기반으로 한 시민사회 내 타 단체 분들에게 연대를 요청 드리면서 저 또한 그 단체들에 대해 알아가며 관계를 쌓아가고 있어요. 요즘은 지역사회에서 커먼즈를 확장하기 위해선 어떤 연대가 필요한지를 더 많이 고민하는 중이고요.
최근 밀양 송전탑 행정 대집행 10주년 결의대회에 다녀온 이후로는 연대에 대한 생각이 조금 더 깊어지기도 했어요. 연대라는 게 단순히 활동가로서의 품앗이가 아니라 지켜야 할 것을 지키는 사람의 존엄성이 드러나는 자리이자, 굉장히 외로울 싸움 당사자의 편이 되는 일이라는 생각. 이때의 연대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공동체를 이루게 하는 힘인 것 같아요. 폐허 속에서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일을 생각하면서 현재는 연대라는 키워드를 제 마음속에서 가장 힘껏 붙들고 있어요.
#기후위기 #공익활동가주간 #변화를만드는사람들 #전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