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공익활동가주간]탈시설을 탈시설이라 하지, 뭐라고 하나요? - 탈시설 당사자이자 활동가 이수미

변화를만드는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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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6월 25일, 제정 2주년을 앞두고 서울시 탈시설 지원 조례가 폐지됐다. ‘중증장애인의 탈시설에 천문학적인 세금이 든다’며 장애인의 배제와 격리를 정당화하는 정치인에 대해 탈시설 당사자들은 끝까지 저항했다. 이수미는 그중 한 사람이다. 41년간은 집안에서, 이후 16년은 시설에 갇혀 살았다. 갇힌 삶을 오래 사는 동안, 지하철을 타본 적 없던 그가 어느 날부턴가 매일 매일 지하철 선전전을 나오기 시작했다. 탈시설 당사자들의 최초의 전국 자조 단체, ‘전국탈시설장애인연대’ 서울지부의 대표가 된 이수미 활동가를 만났다. 



Q. 이수미를 어떤 단어로 소개할 수 있을까요?

저는 저를 ‘생존자’라고 소개하고 싶어요. 저는 61년생이고 장애를 입은 건 4살 때인데요. 지금은 소아마비가 별로 없지만, 그 시대에는 많았대요. 대개는 발을 저는데 저는 전신으로 왔어요. 한 2~3년 전에 재활의학과 의사 선생님한테 물어봤어요. “나는 소아마비인데 왜 이렇게 장애가 심한가요?” 그랬더니, 내가 살아남아서 그렇대요. 그 시대에는 이렇게 심하면 다들 죽는다고 하더라고요. ‘아, 그래서 그렇구나.’ 나는 소아마비 장애인으로도 살아남고, 시설에서도 살아남았잖아요. 그래서 나는 내가 생존자라고 생각해요. 


Q. ‘어린 수미’는 어땠나요?

저는 서울 영등포에서 태어났고 4남매 중 둘째예요. 위로 오빠 있고 밑으로 남동생, 여동생이 있어요. 영등포에서 오래 살았는데, 41년 동안 집안에만 있었어요. 그래서 아무것도 몰랐지요. 글을 늦게 배웠어요. 아마 10대 때 글을 깨우친 것 같아요. 내가 학교를 못 다녀서 엄마한테 글을 배웠거든요. 집에서는 잡히는 대로 책을 봤어요. 뜻은 모르지만 그냥 읽는 게 좋아서요. 시를 읽거나 재미있는 소설책을 보거나 역사책을 보거나. 여동생이나 오빠가 만화책 빌려오면 보면서, 책에서 많이 위로를 받았어요. 


Q. 41년을 집에서 사셨는데 시설은 어떻게 들어가게 되신 거예요?

시설에 갈 때즘 아버지가 간경화로 돌아가셨어요. 엄마가 가장이 되신 후 살림이 점점 어려워졌죠. 내가 가족이랑 같이 사니까 수급자가 되지도 못했어요. 수급자가 아니니까 큰 시설도 못 간다고 하더라고요. 아니면 시설 문 앞에 버려진 것처럼 되어야 입소할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하지마 이 방법은 동생들이 반대해서, 내가 전화로 알아보다가 시설에 가게 된 거예요. 

몇 월인지는 기억이 안 나는데 2001년에 시설에 들어갔어요. 목사님이 운영하는 개인운영시설이었어요. 엄마가 나를 시집보낸다는 마음이었는지, 시설에 들어갈 때 TV와 서랍장, 핸드폰을 사주셨어요. 


Q. 시설에서는 어떻게 지내셨나요? 

처음 2년은 너무 힘들었어요. 너무 열악했어요. 재래식 2층 건물이었는데 계단만 있어서 바람이라도 쐬려면 집사님 등에 업혀서 나와야 했어요. 그렇게 나와서는 수동 휠체어를 타고 다녔죠. 방 1개에 한 5~6명 있었는데 사람들은 기저귀를 차고 누워있었어요. 오히려 그때는 내가 힘이 있어서 다른 사람 기저귀를 갈아주고 그랬어요. 따로 목욕하는 데도 없었고, 봉사자들이 와야만 씻을 수 있었어요. 아파도 병원에 갈 수 없었고요. 기본적인 게 참 힘들었어요. 

그렇지만 시설에서 나쁜 일만 있던 건 아니에요. 원장이 바뀌고 나선 전동 휠체어도 생겨서 태워주기만 하면 나 혼자 나갈 수 있었어요. 저에겐 어느 정도의 자유가 주어졌지만 문제라고 여겨지는 발달장애인은 다른 데로 옮겨졌어요. 



Q. 우리 나라는 장애인은 시설에 살아야 한다는 인식이 강한데요.

사람들은 ‘시설’을 잘 이해 못 하는 것 같아요. 심지어 부모, 형제도요. 시설은 우리 사회 인권의 가장 낮은 단계예요. 어릴 때, 저에게도 환상 같은 게 있었어요. ‘멋진 남자가 나를 구해주겠구나.’ 테레비 보면 멋진 남자들이 나와서 구해주잖아요. 하지만 시설에서 생활하면서 알았어요. 꿈이라는걸. ‘이 세상은 냉정하구나.’ 시설은 그런 곳이잖아요. 사람을 구하는 게 아니라 버리는 곳이잖아요. 


Q. 살던 시설은 왜 폐쇄가 된 거예요? 시설이 폐쇄된 후, 수미 님은 어디로 가시게 됐나요?

어이없게 폐쇄됐어요. 개인운영시설에 국가가 조건부로 2억을 대출해 주는 사업이 있었나 봐요. 그때 다른 시설운영자들은 그 돈으로 땅을 사고 대출을 더 받아서 건물을 지었대요. 그런데 이 시설 원장님은 시내에 있는 큰 건물을 전세로 빌린 거예요. 운영유지비만도 엄청나니 결국 건물을 유지하지도 못한 거죠. 정부가 요구한 조건도 지키지 못해서 환수 조치가 내려왔다고 했어요. 

시설이 폐쇄될 때, 동생한테 나는 자립하고 싶다고 부탁했어요. ‘돈을 마련해 주면 내가 어떻게 해서든 갚겠다’고 했는데 생각해 보니까 한 3~4천만 원 필요한 거예요. 결국 자립은 포기하고, 2016년 5월에 은평구 단기보호센터으로 가게 됐죠. 거기서 한 1년을 살았어요. 


Q. 단기보호센터에서 탈시설을 결심하게 된 이유는 뭔가요?

내가 은평구 단기보호센터에 있어서 은평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 동료상담을 받았죠. 그 무렵에 탈시설 할 수 있는 방법을 알게 된 거죠. 깊은 고민에 빠졌어요. 시설로 갈 것인가? 탈시설 할 것인가? 하지만 다시 다른 시설로 가고 싶진 않았어요. 다시 시설에 맞게 적응하는 게 싫었죠. 아마도 나는 시설이 폐쇄되지 않았으면 계속 살았을 거예요. 하지만 나중에 후회했겠죠. 65세가 되면 다른 시설로 가야 하거든요. 


Q. 그럼 최종적인 자립은 언제 하시게 된 거예요?

단기보호센터에서는 2017년 11월에 나왔어요. 그땐 내가 별로 말이 없었어요. 왜냐하면, 내가 말실수 할까 봐 그렇기도 했고. 무슨 말을 해야 될지 잘 안 떠올랐어요. 눈치를 많이 봤죠. 탈시설 직후라 자존감도 많이 낮은 상태였다고 생각해요. 

퇴소 후에는 성북장애인자립생활센터 체험홈에서 살게 됐어요. 하지만 체험홈도 단기니까 내가 살 집을 알아봐야 했죠. 집을 알아보는 게 너무 힘들었어요. 집이 나왔다고 해서 가봤는데 편의시설이 아무것도 안 되어있는 집, 언덕배기인 집, 죄다 개조를 해야 하는 집, 지하 집.. 결국 월세로 계약을 해서 완전히 자립했어요. 그게 2019년이에요. 


Q. 활동은 어떤 계기로 시작하게 되셨나요?

깔끔한 계기예요. 음.. 나는 수급자인데요. 수급자 생활이 최저 생활이잖아요. 엄마한테도 쓰고 싶고, 나 자신에게도 쓰고 싶고, 또 여러 사람들에게 쓰고 싶잖아요. 특히 엄마한테 “나 이렇게 잘 살고 있어요.” 뭘 해주고 싶은데.. 그런데 수급생활로 그게 어렵더라고요. 일을 하면 수급이 중단되냐, 마냐가 걸렸어요. 그걸 알고 싶어서 빈곤사회연대가 효자동 길거리에서 여는 수급자 교육도 듣게 됐죠. 이 정도의 급여는 수급에 문제가 없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일을 시작하게 된 거예요. 그러다 나중에 노들장애인야학과도 연계되고, 노들장애인자립생활센터도 알게 되었고요. 



Q. 언젠가부터 매일 아침 지하철 선전전에 나오시더라고요. 어제도 이수미, 오늘도 이수미, 내일도 이수미. 작년에 정태수상 수상도 하셨어요.

(웃음) 그러게요. 난 진짜 정태수상 받을 줄 몰랐거든요. 나 다시 전화해서 확인했다니까? ‘이거 제가 받는 거 맞아요?’ 맞대요. 저는 활동한지 그렇게 오래 안 됐잖아요. 활동 많이 하시는 다른 분들 많이 계신데… 그래서 내가 받을 상이 아닌데 받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좀 민망하면서도 쑥스럽고 내가 정말 받아도 되는 상인가? 아직 나는 초보자인데... 그래서 올해는 책임감이 무거워졌다고 할까요? 점점 부담감이 많아져요. 요청이 많이 오는데 컨디션 조절 때문에 거절은 해야 돼서 미안하죠.


Q. 지하철은 이동의 공간, 장애인의 권리보장 공간이기도 하지만 장애인에 대한 폭력의 상징이 되기도 한 것 같아요. 

사실 나는 지하철 타는 법도 몰랐거든요. 어렸을 때부터 집안에서만 살았잖아요. 탈시설을 준비하면서 지하철을 타는 연습을 했어요. 역마다 왼쪽, 오른쪽 내리는 문 방향이 다르잖아요? 처음엔 분간이 안 됐어요. 

제가 지하철 선전전을 처음 간 건 2021년 당고개역이에요. 대선 시기, 대통령 후보들에게 장애인 권리보장을 요구하면서 타고 내리는 걸 반복했어요. 성신여대역부터 난리가 났었어요. 그때 나는 일반 참여자니까 폭력이 심하진 않았어요. 주로 이형숙 대표님이 많이 당했죠. 장애인이고 여성이니까 더 무시하는 것 같았어요. 같은 여성으로서 울컥하고 분노를 느꼈어요. 

올해 420 장애인차별철폐의날 기념행사를 할 때 혜화역 승강장 엘리베이터가 고장 났어요. 서울교통공사 직원들이 그러는 거예요. 지하철 탈 거냐 안 탈거냐, 안 타면 끌어내겠다고. 근데 정말 저를 한 6명이 저를 휠체어 탄 채로 들어서 계단으로 끌고 나왔어요. 그것도 남자들은 안 끌고 가. 여자인 나만 들려 나왔어요.


Q. 매일 폭력에 시달리니 마음도 체력도 쉽게 소진되는 것 같아요. 수미 님은 어떻게 힐링하시나요?

카페에 가서 달콤한 커피를 마셔요. 그래서 커피만 늘어가죠. (웃음) 저도 겉으론 다른 사람한테 강하고 좋은 모습만 보이려고 노력하는 것 같아요. 공부할 때 보니까 이걸 사회적 가면. , ‘페르소나’라던데요? 제가 힐링하는 또 다른 방법은 집에서 테레비 보는 거예요. 요즘은 ‘더글로리’를 재밌게 봐요. 고급 진 복수극이더라고요. 


Q. 탈시설 정책이 후퇴하는 요즘이에요.

정치인이나 행정가들은 ‘탈시설’이란 용어를 부담스러워하는 것 같아요. 하지만 우리는 당연히, 주장하는 게 맞아요. 우리는 탈시설이 필요해서 필요하다고 말하는 거예요. 탈시설을 탈시설이라고 하지, 뭐라고 하나요? 우리는 탈시설을 대체할 용어가 없어요. 용어를 바꾼다고 본질이 없어지나요? 아니, 용어를 바꾸면 탈시설 해주나요? 그렇지 않아요. 안 해주잖아요. 정책을 없애고 예산을 줄이고 있잖아요. 지원이 되냐 안 되냐, 법이 되냐 안 되냐, 예산이 되냐 안 되냐 이런 게 중요한 거잖아요.



Q. 활동 기간이 짧다고 표현하셨지만 수미 님의 활동으로 우리 사회는 어떤 변화를 이뤘을까요?

나 같은 장애인이 지역사회에서 살게 된 게 변화이지 않나요? 중증장애인이 지역사회에서 살 수 있고 일할 수 있는 거요. 더 많은 장애인이 이런 삶을 살 수 있게 변화해야 하죠. 그런데 시대가 뒤로 다시 돌아가고 있는 것 같아요. 하지만 될 때까지 싸우는 수밖에 없잖아요. 그날까지 잘 버텨야 하는 것도 내게 책임감으로 있는 것 같아요.


Q. 수미 님에게 탈시설 운동은 어떤 존재인가요?

‘동굴의 우상’이 생각나네요. 어두운 동굴에 살았던 사람들은 바깥세상을 잘 모르죠. 그러다 어떤 사람이 밖을 나가게 됐는데, 바깥은 새로운 세상인 거예요. 나무도, 풀도, 새도 있는 자유로운 세상. 이런 세계가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어서 동굴 속으로 돌아가 사람들한테 말하죠. 그런데 동굴 속의 사람들은 동굴 속 세계가 전부인 줄 알고 오히려 그 사람을 붙잡고 놔주지 않았다는 거예요. 시설 안에 사람들은 그 세계가 전부인 줄 알아요. 시설에서만 살아봤으니까요. 새로운 세계를 도전한다는 건 힘들죠. 나도 시설에서 살아봤으니까 알아요. 그런데 다른 세상을 꿈꿀 수도 있잖아요. 


Q. 다른 세상을 꿈꾸는 수미 님의 앞으로의 활동이 기대되네요.

나는 활동하면서 이 사회가 장애인에게 얼마나 부당하고 차별적인지 알게 됐어요. 그리고 이 사회를 변화시킨다는 게 얼마나 힘든지도 깨달았죠. 제도를 변화시킨다는 건 결국 사회를 변화시키는 거잖아요. 하지만 나는 그 길을 가야 하는 것 같아요. 장애해방 세상이 오지 않아도, 그만큼의 큰 비전을 갖고 있어야 도달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래도 가다 보면, 나의 세대는 아니지만 다음 사람은 될 거라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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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조아라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에서 ‘모두의 탈시설 사회’를 꿈꾸며 활동하고 있다.


2024공익활동가주간을 맞아 다양한 지역과 분야에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변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는 활동가들을 만나 이들의 일과 삶에 대한 이야기를 기록하는 활동가인터뷰 공모 프로젝트를 진행했습니다. 인터뷰 공모에는 여러 지역의 활동가들이 참여해주셨습니다. 이 프로젝트는 <공익활동가사회적협동조합 동행>, <한국시민사회지원조직네트워크>, <지리산이음>이 공동주최하고, <아름다운재단>이 지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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