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소로우가 머물며 대자연을 예찬하고 문명사회를 비판했던 호수 ‘월든’ 그리고 불멸의 고전이 된 책 <월든>. 박성훈 씨는 한반도 끝자락 순천의 바닷가 ‘와온’을 ‘월든’이라 여기며 자연을 예찬하고 과도한 문명을 비판하는 노래를 만들고 부르며 살고 있다.
과학이 일상으로 들어온다는 건/밥과 물과 똥과 모든 것이 돌고 돈다는 것/그것은 우리가 지구를 세상 모든 생명과/ 함께 나누며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거죠/(과일집에서)
순천 국민은행 앞, 5.18기념 행사에서 노래하는 박성훈
본래 그는 생태가수가 아니라 민중가수다. 순천, 광주, 전주, 서울까지도 노래가 필요한 곳은 어디든 달려가는 길거리 가수. 전국에 알려진 유명 가수는 아니지만 순천에서 시민 활동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은 거의 다 아는 부지런한 가수다. 올해만도 순천 잡월드 해고 노동자들을 위해서, 세월호 참사 10주기를 맞아서, 5.18 광주 항쟁을 기억하는 자리에서도 그는 노래를 했다. 그런데 이렇게 가수로서 만으로도 바쁜 그에게 또 다른 직업이 있다. 그것도 ‘수’자로 끝나는 아주 번듯한 직업이다. 국립 순천대 환경공학과 교수! 어떤 사연이 있길래 국립대 교수가 민중가수, 생태 가수가 됐을까? 그의 집을 직접 찾아가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2024년 올해 초, 그는 12년 동안 살던 작은 아파트를 처분하고 12년 동안 타고 다닌 작은 중고차를 팔고 난봉산 골짜기 마을에 집을 지어 아내 김인아 씨와 함께 들어갔다. 두 사람이 크게 감명받았던 책 <조화로운 삶>을 쓴 헬렌과 스코트 니어링 부부가 뉴욕을 떠나 버몬트 산골짝에 집을 짓고 살았듯이 그들도 그렇게 한 것이다. 해발 500미터가 넘고 품이 넓어 순천시를 다 품어주고도 남는 난봉산, 그 산자락은 그의 직장 순천대학교도 품고 부부의 집도 아늑하게 품어주었다. 그리고 맑은 시냇물도 흘려 보내주었다.
난봉산 골짜기 마을에 집에 지어 함께 살고 있는 박성훈 부부와 김금일 씨
노래를 할 것이냐 과학자가 될 것이냐?
박성훈 씨가 길가에서 나를 맞았다. 부담스럽지 않은 넓이의 텃밭과 화단이 있는 마당, 그리고 아담한 2층집 두 채. 텃밭에서 쭈그리고 앉아 일하던 여인이 일어섰다. 함께 사는 이웃이었다. ‘어린이책 시민연대’ 활동을 하고 있는 김금일 선생님이라고 소개해 주었다. 즉 이 집은 박성훈, 김금일 두 가족이 함께 지은 것이다. 두 가족은 에너지 소모를 최소화하기 위해 건평 20평에 2층으로 집을 지어 1층에는 박성훈 가족이 2층에는 김금일 가족이 산다. 똑같은 평수의 건물이 한 채 더 있는데 그곳은 공유공간으로 모임이나 공연 그밖에 뭐든지 한다. 앞으로 김금일 씨 딸이 카페까지 운영할 계획이다. 사는 것을 보니 궁금한 이야기가 더 많아졌다.
"저는 노래를 취미로 하지 않습니다. 가수라는 정체성을 분명히 가지고 하는 활동입니다. 대학 졸업을 전후해서 전문 노래패 활동을 2년 정도했는데 계속 할 용기도 없었고 실력도 부족해서 전업 가수는 포기하고 취업 전선에 나갔다가 40대에 ‘중년시대’ 멤버들을 만나면서 다시 시작하게 되었어요. "
한국 과학기술원 카이스트. 그 학교에 노래패가 있었다고? ‘운동권’이라 부르던 학생들이 시위 현장에서 투쟁의 한 도구로 삼았던 민중 가요를 부르던 노래패가 ‘공부만 하는 애들’이 가는 것으로 여겨졌던 카이스트에 있었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박성훈 씨가 노래패에 들어간 연유는 뜻밖에도 1980년 전라도 광주에 있었다.
"우리집은 광주 시내에서 꽤 떨어진 외곽에 있었어요. 그래서 당시 현장을 직접 보지는 못했는데 대학을 갓 졸업한 형이 집에 있어서 식구들 모두 엄청 무서워하며 숨어 있었죠. 젊은 사람들은 눈에 띄는 대로 군인들이 무조건 다 잡아갔기 때문에요. 그러던 어느 날 우리 동네 앞으로 한 부대가 행군하면서 사람만 보이면 무조건 총을 쏴댔어요. 우리 식구들은 이불을 방문 앞에 쌓아놓고 숨어 있었는데 결국 옆집 큰 형이 총에 맞아 죽었죠. 정말 벌벌 떨면서 며칠을 보냈던 기억이 나요. 하지만 휴교가 끝나고 학교에 다시 갔을 때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학교가 돌아갔고 아픈 기억은 희미해져 갔죠. 그러다가 고2 때 동아리 선생님이 시내에서 행사를 하니 가보라고 해서 갔는데 광주항쟁 사진전을 하는 거에요. 그때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어요. 4학년 때 겪었던 일이 바로 이것이었구나! 진실을 그제야 알게 된 거죠. 그 때가 1987년이라 6월 항쟁도 겪었고 노태우가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하는 것도 봤어요. 그런 혼란 속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들어갔는데 가만히 공부만 하고 있을 수가 없었어요. "
공부 잘 하던 박성훈 학생은 과학 고등학교를 2년 만에 졸업하고 과학자의 길로 가는 직행 터미널 카이스트에 들어갔지만 전공(화학공학)에 대한 애정은 없고 오로지 노래패 ‘푸른 소리’ 활동에 심취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전문 노래패를 하겠다는 꿈을 꾸며 친구들과 함께 ‘하늘과 소나무’라는 팀을 결성하여 열심히 했지만 결국 먹고 사는 일에 발목을 잡혀 해산하고 각자 취업 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 그러나 그가 들어간 회사는 연구원들마저 구사대 취급하며 노조를 몸으로 막으라 했고 그런 현실을 견디다 못해 사표를 쓰고 대학원에 진학했다. 그 때 선배들을 따라 환경공학과를 선택, 국내에서 박사 학위까지 따고 환경 선진국 캐나다에 가서 연수, 그야말로 환경공학계의 석학이 되는 길을 밟은 것이다.
"제 전공은 ‘미세먼지’에요. 당시에 우리나라에서는 ‘미세먼지’라는 단어가 과학기술 용어로만 쓰였고 일반인들은 거의 모르던 시절이었죠. 그런데 캐나다에서는 이미 미세먼지를 체계적으로 모델링하고 연구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어요. 정부에서 대기환경을 바라보는 태도도 우리나라와 매우 달랐죠. 대기환경 연구 분야는 캐나다 정부에서 반드시 지원해 주는 분야였어요. 자동차매연(검댕 미세먼지)이 인체에 해로울 뿐만 아니라 지구 온난화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것도 연구하던 시절이죠. 우리나라에서는 미세먼지로 취업할 곳이 없었는데 거기는 그런 전공으로 취업이 되는 나라였던 거에요. 그래서 두 번째로 캐나다에 갈 때는 아예 영주권을 받아 이민을 갔었어요."
형, 윤선애 팬카페가 생겼대!
그렇게 이민자가 되어 가족을 데리고 캐나다로 다시 떠났던 그가 한국에 정착하게 된 계기 중 하나는 바로 ‘노래’였다.
“형, 윤선애 팬카페가 생겼대!”
‘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전신 ‘새벽’에서 노래했던 전설의 여가수 윤선애! 민주, 벗이여 해방이 온다, 언제나 시작은 눈물로, 저 평등의 땅에 같은 불후의 명곡을 부른 가수 윤선애 가수의 팬카페가 생겼다는 소식이 40대 가장이 된 박성훈의 가슴을 뒤흔들어 놓았다. 그동안 한쪽 가슴에서 불쑥불쑥 올라오던 노래의 기운을 억지로 꾹꾹 누르며 살아왔던 과학자의 마음을 ‘윤선애’ 그 이름 석 자가 헤집어 놓은 것이다. 그리고 마침 한반도의 끄트머리지만 국립 순천대학교의 교수 자리와도 인연이 닿았다. 순천에서는 일하고 서울에서는 음악 동지들과 너무나도 좋아하는 ‘선애 누나’의 노래를 듣고. 그렇게 박성훈 씨의 생활은 한국에서 음악과 함께 안착되었다. (참고로 이 부분을 얘기할 때 박성훈 씨의 눈빛은 사뭇 흔들렸고 목소리는 매우 빨라졌다.)
그러던 어느날 윤선애 가수의 공연을 보조해 줄 코러스 남성 중창단을 만든다는 얘기에 박성훈 씨는 손을 번쩍 들었다. 그때 모인 중창단이 나중에는 그룹 ‘중년시대’를 결성하여 독립된 음악활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40대 중반 가장들의 삶의 무게는 노래를 계속하도록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광주에서 열리는 ‘2015년 제5회 전국 오월 창작가요제’에 나가 마지막으로 노래하고 해산하기로 결정한다. 그런데 거기서 ‘다시 부르는 노래’로 금상을 타내는 큰 성과를 거두고 말았다. 그렇지만 이별은 정해진 일, 그들은 2019년 <우리들의 푸른>이라는 1집 음반을 내고 눈물을 머금고 흩어졌다.
<중년 시대>로 활동을 하던 중에 박성훈 씨는 마음이 맞는 동료들과 함께 ‘노래를 찾아 듣는 사람들의 모임’인 ’그루터기‘도 만들었다. 월 만원씩 모아 공연비를 만들어 좋은 음악인을 초청해 음악을 듣는 모임이다. 처음엔 1년에 한 팀을 겨우 초대했는데 지금은 봄여름가을겨울 년 4회 초청 공연을 하고 있다. 그루터기 회원 중에 혁신학교인 별량중학교 아빠들로 꾸려진 ’파파스 중창단‘ 단원이 있었는데 그 인연으로 박성훈 씨는 파파스 중창단과 함께 2016년 오월 창작 가요제에 다시 도전, 이번에는 은상을 받는 기쁨을 누렸다.
혁신학교인 별량중학교 학부모들과 함께 만든 그룹 ‘등걸’
남보다 더 가진 것을 미안해 할 줄 아는 세상/ 책과 음악이 가장 큰 즐거움인 세상
일하고 싶을 때 일할 수 있는 세상/ 아이들이 농사를 꿈꿀 수 있는 세상
똑똑한 사람보다 착한 사람이 많은 세상/ 차이는 있어도 차별은 없는 세상......
예전에 어느 봄날 그런 세상 본 적 있죠/ 찬란한 오월의 햇살이 비추던그 날
이제는 우리가 만들어 나가야 할 우리가 꿈꾸는 세상
이 노래는 별량중학교 아빠들과 박성훈 씨가 아이들에게 물려주고 싶은 세상을 함께 쓰고 작곡한 ‘우리가 꿈꾸는 세상’이다. 1980년 5월 그 봄날, 고립되었던 광주 시민들이 시민군을 만들어 스스로 지키고 직업 빈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서로 도우며 두려움을 견뎌냈던 잠깐의 해방구. 그런 해방구 같은 세상을 꿈꾸며 함께 만들어 부른 노래다. 큰 성과를 낸 이들은 얼마 뒤 ‘등걸’이라는 밴드를 조직해 정식으로 음악을 함께 한다. 그러나 역시 직장인들로 구성된 ‘등걸’은 박성훈 씨의 욕구만큼 음악을 자주 함께 하지 못했다. 박성훈 씨는 좁 더 많은 노래를 만들고 싶었고 좀 더 많이 노래를 부르고 싶었고 좀 더 많이 공연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혼자 그렇게 했고 2018년 인천평화창작가요제에 나가 ‘느티나무를 위하여’라는 곡으로 대상을 거머쥐고야 말았다. 그러나 그는 ‘내 노래가 아니라 내 노래가 응원하고자 했던 바들이 응원을 받게 되기를’ 바랐다.
생태 귀농학교에 다니던 시절 단란한 박성훈 씨 가족
"2004년에 귀농을 꿈꾸며 가족과 함께 생태귀농학교에 다녔어요. 그때 교장 선생님 같은 분이 서정홍 선생님(시집 <58년 개띠> 시인)이셨는데 선생님 출판 기념회 때 그분의 시 ‘내가 가장 착해질 때’에 곡을 붙여서 노래를 했어요. 그 자리에서 ‘경남 어린이 이뿐 노랫말 공모’를 해서 노래로 만들고 계신 고승하 선생님을 만났죠. 그 인연으로 해마다 공모에서 뽑힌 좋은 어린이 시 가운데 두 곡씩을 맡아 노래로 만들고 있어요. 1집 음반 대표 곡 <꿈에서>도 그렇게 탄생한 노래에요."
꿈에서/ 외할머니를 만났다/ 좋았다/ 그런데/무슨 말을/하는지 모르겠다/
우리 외할머니는/베트남 사람이시다/우리 엄마도 (2018.정현희 어린이시)
순천 기적의 도서관에서 어린이들과 함께 동요를 부르는 박성훈 씨
기타 하나 둘러메고 아파하는 사람들 곁으로 달려가는 키다리 아저씨
이렇게 주로 어린이들이 쓴 시와 시인들의 시에 곡을 붙이던 그는 <사이언스 월든> 음반을 만들면서 ‘의식적으로’ 가사를 쓰기 시작했다. 그 전에도 가사를 쓰긴 했지만 좋은 가사를 쓰기 위해 제대로 훈련을 시작했던 것이다. 직업이 환경공학과 교수인데다가 환경단체 회원이고 귀농학교까지 다니다 보니 자연히 노랫말에는 생태주의 세계관이 담겼다. ‘민중 가수’라는 색깔에다가 ‘생태 가수’라는 색깔이 덧칠해진 것이다. 그리고 서정홍 선생님 따라 삶도 그렇게 만들어 갔다.
‘월간 박성훈’ 7월 공연과 ‘그루터기’ 2024년 여름 레벤드 초청 공연
‘월간 박성훈’은 잡지책 이름이 아니다. 매월 첫 번째 목요일 저녁에 작은 공간에서 하는 박성훈 가수의 정기 공연 이름이다. 내가 처음 갔던 올 2월 ‘월간 박성훈’은 순천만 잡월드에서 해직된 노동자들을 위한 공연으로 꾸며져 많은 사람들이 함께 무대에 올랐다. 그러나 본래 ‘월간 박성훈’은 주로 최상진 기타리스트와 둘이서 꾸민다. 이 인터뷰를 진행하고 사흘 뒤 마침 ‘월간 박성훈’ 7월 공연이 있었다. 1시간이 조금 넘는 시간동안 다른 가수의 노래와 본인의 노래, 그리고 잔잔한 이야기로 엮은 공연 ‘사이언스 월든’. 맨 뒷자리 푹신하고 넓은 소파에 앉아 몰입해서 구경하고 나오는데 머리와 가슴이 무척 가볍고 시원해져 있음을 느꼈다. 깊고 넓은 잔잔한 호숫가에 앉아 좋은 책 한권을 읽고 나온 기분!
그리고 다음날 노래를 찾아 듣는 사람들의 모임 ‘그루터기’의 여름행사가 이어졌다. 이번에 초대한 밴드는 포크 밴드 ‘레밴드’. 공연장을 찾아갔더니 박성훈 씨의 아내 김인아 씨가 입장료를 받으며 안내를 하고 있었고 시간이 되자 박성훈 씨가 마이크를 잡고 초대 가수들을 소개했다. 회원들은 좋은 밴드의 공연을 즐길 수 있어서 좋고 초청된 가수들은 본인들의 곡을 관객들 앞에서 실컷 부를 수 있게 해줘서 고맙다고 했다. 유명한 가수, 유명한 노래 중심으로 짜여 지는 일반 공연장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 박성훈 씨라서 가능한 일이다.
"제가 하는 노래 운동은 앞장 서는 운동이 아닙니다. 그들 옆에서 응원해 주고 힘을 북돋아 주는 활동이죠. 그러니 당연히 그들보다는 덜 힘들죠. 너무나 힘든 상황에서도 계속 활동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그만 둘 수가 없어서 계속 그들을 찾아가서 노래를 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활동해도 바뀌지 않는 세상, 힘들지 않느냐? 왜 계속 이런 활동을 하느냐는 질문에 돌아 온 답이다.
‘어떤 일을 하는 보람은 그 일이 쉬운가 어려운가, 또는 그 일에 성공할 수 있는가 아닌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희망과 인내, 그 일에 쏟아 붓는 노력에 있다.’
스코트 니어링이 <조화로운 삶>마지막 장에 쓴 문장이다. 성공을 하든지 못 하든지 힘들어 하는 그들 곁에서, 아파하는 지구와 함께 인내하면서 계속 노력을 퍼붓고 있는 박성훈 씨. 올 해만 해도 그는 밀양(송전탑 건설 반대), 전주(전주 페이퍼 노동자 추모), 서울(홍세화 선생님 추모) 그밖에 여러 지역으로 기타 하나 메고 뛰어다녔다. 노래보다 가르치는 일을 더 잘하지만(여수MBC 다큐에세이 박성훈 참고) 교수보다 가수로서 정체성이 더 강해 보이는 사람, 그의 곁에 꿀이 뚝뚝 떨어지는 눈빛으로 변함없이 지켜봐주는 반려자 김인아 씨가 있기에 그의 발걸음은 더 거침없고 씩씩해 보인다.
전주 페이퍼에서 사망한 뒤 23일 만에 장례를 치르게 된 순천 청년의 추모식. 박성훈 씨가 고개 숙인 순천 청년의 친구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다.
#순천 #박성훈 #전남 #공익활동가주간
글쓴이 : 김양오
전라북도 남원에서 15년 살면서 지리산권 작은변화 활동가와 기록활동가를 했고 역사동화 네 권을 썼다. 올 1월에 전라남도 순천에 와서 새로운 역사를 배우고 사람을 사귀고 있다.
2024공익활동가주간을 맞아 다양한 지역과 분야에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변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는 활동가들을 만나 이들의 일과 삶에 대한 이야기를 기록하는 활동가인터뷰 공모 프로젝트를 진행했습니다. 인터뷰 공모에는 여러 지역의 활동가들이 참여해주셨습니다. 이 프로젝트는 <공익활동가사회적협동조합 동행>, <한국시민사회지원조직네트워크>, <지리산이음>이 공동주최하고, <아름다운재단>이 지원했습니다. |
헨리 소로우가 머물며 대자연을 예찬하고 문명사회를 비판했던 호수 ‘월든’ 그리고 불멸의 고전이 된 책 <월든>. 박성훈 씨는 한반도 끝자락 순천의 바닷가 ‘와온’을 ‘월든’이라 여기며 자연을 예찬하고 과도한 문명을 비판하는 노래를 만들고 부르며 살고 있다.
과학이 일상으로 들어온다는 건/밥과 물과 똥과 모든 것이 돌고 돈다는 것/그것은 우리가 지구를 세상 모든 생명과/ 함께 나누며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거죠/(과일집에서)
순천 국민은행 앞, 5.18기념 행사에서 노래하는 박성훈
본래 그는 생태가수가 아니라 민중가수다. 순천, 광주, 전주, 서울까지도 노래가 필요한 곳은 어디든 달려가는 길거리 가수. 전국에 알려진 유명 가수는 아니지만 순천에서 시민 활동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은 거의 다 아는 부지런한 가수다. 올해만도 순천 잡월드 해고 노동자들을 위해서, 세월호 참사 10주기를 맞아서, 5.18 광주 항쟁을 기억하는 자리에서도 그는 노래를 했다. 그런데 이렇게 가수로서 만으로도 바쁜 그에게 또 다른 직업이 있다. 그것도 ‘수’자로 끝나는 아주 번듯한 직업이다. 국립 순천대 환경공학과 교수! 어떤 사연이 있길래 국립대 교수가 민중가수, 생태 가수가 됐을까? 그의 집을 직접 찾아가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2024년 올해 초, 그는 12년 동안 살던 작은 아파트를 처분하고 12년 동안 타고 다닌 작은 중고차를 팔고 난봉산 골짜기 마을에 집을 지어 아내 김인아 씨와 함께 들어갔다. 두 사람이 크게 감명받았던 책 <조화로운 삶>을 쓴 헬렌과 스코트 니어링 부부가 뉴욕을 떠나 버몬트 산골짝에 집을 짓고 살았듯이 그들도 그렇게 한 것이다. 해발 500미터가 넘고 품이 넓어 순천시를 다 품어주고도 남는 난봉산, 그 산자락은 그의 직장 순천대학교도 품고 부부의 집도 아늑하게 품어주었다. 그리고 맑은 시냇물도 흘려 보내주었다.
난봉산 골짜기 마을에 집에 지어 함께 살고 있는 박성훈 부부와 김금일 씨
노래를 할 것이냐 과학자가 될 것이냐?
박성훈 씨가 길가에서 나를 맞았다. 부담스럽지 않은 넓이의 텃밭과 화단이 있는 마당, 그리고 아담한 2층집 두 채. 텃밭에서 쭈그리고 앉아 일하던 여인이 일어섰다. 함께 사는 이웃이었다. ‘어린이책 시민연대’ 활동을 하고 있는 김금일 선생님이라고 소개해 주었다. 즉 이 집은 박성훈, 김금일 두 가족이 함께 지은 것이다. 두 가족은 에너지 소모를 최소화하기 위해 건평 20평에 2층으로 집을 지어 1층에는 박성훈 가족이 2층에는 김금일 가족이 산다. 똑같은 평수의 건물이 한 채 더 있는데 그곳은 공유공간으로 모임이나 공연 그밖에 뭐든지 한다. 앞으로 김금일 씨 딸이 카페까지 운영할 계획이다. 사는 것을 보니 궁금한 이야기가 더 많아졌다.
한국 과학기술원 카이스트. 그 학교에 노래패가 있었다고? ‘운동권’이라 부르던 학생들이 시위 현장에서 투쟁의 한 도구로 삼았던 민중 가요를 부르던 노래패가 ‘공부만 하는 애들’이 가는 것으로 여겨졌던 카이스트에 있었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박성훈 씨가 노래패에 들어간 연유는 뜻밖에도 1980년 전라도 광주에 있었다.
공부 잘 하던 박성훈 학생은 과학 고등학교를 2년 만에 졸업하고 과학자의 길로 가는 직행 터미널 카이스트에 들어갔지만 전공(화학공학)에 대한 애정은 없고 오로지 노래패 ‘푸른 소리’ 활동에 심취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전문 노래패를 하겠다는 꿈을 꾸며 친구들과 함께 ‘하늘과 소나무’라는 팀을 결성하여 열심히 했지만 결국 먹고 사는 일에 발목을 잡혀 해산하고 각자 취업 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 그러나 그가 들어간 회사는 연구원들마저 구사대 취급하며 노조를 몸으로 막으라 했고 그런 현실을 견디다 못해 사표를 쓰고 대학원에 진학했다. 그 때 선배들을 따라 환경공학과를 선택, 국내에서 박사 학위까지 따고 환경 선진국 캐나다에 가서 연수, 그야말로 환경공학계의 석학이 되는 길을 밟은 것이다.
형, 윤선애 팬카페가 생겼대!
그렇게 이민자가 되어 가족을 데리고 캐나다로 다시 떠났던 그가 한국에 정착하게 된 계기 중 하나는 바로 ‘노래’였다.
“형, 윤선애 팬카페가 생겼대!”
‘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전신 ‘새벽’에서 노래했던 전설의 여가수 윤선애! 민주, 벗이여 해방이 온다, 언제나 시작은 눈물로, 저 평등의 땅에 같은 불후의 명곡을 부른 가수 윤선애 가수의 팬카페가 생겼다는 소식이 40대 가장이 된 박성훈의 가슴을 뒤흔들어 놓았다. 그동안 한쪽 가슴에서 불쑥불쑥 올라오던 노래의 기운을 억지로 꾹꾹 누르며 살아왔던 과학자의 마음을 ‘윤선애’ 그 이름 석 자가 헤집어 놓은 것이다. 그리고 마침 한반도의 끄트머리지만 국립 순천대학교의 교수 자리와도 인연이 닿았다. 순천에서는 일하고 서울에서는 음악 동지들과 너무나도 좋아하는 ‘선애 누나’의 노래를 듣고. 그렇게 박성훈 씨의 생활은 한국에서 음악과 함께 안착되었다. (참고로 이 부분을 얘기할 때 박성훈 씨의 눈빛은 사뭇 흔들렸고 목소리는 매우 빨라졌다.)
그러던 어느날 윤선애 가수의 공연을 보조해 줄 코러스 남성 중창단을 만든다는 얘기에 박성훈 씨는 손을 번쩍 들었다. 그때 모인 중창단이 나중에는 그룹 ‘중년시대’를 결성하여 독립된 음악활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40대 중반 가장들의 삶의 무게는 노래를 계속하도록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광주에서 열리는 ‘2015년 제5회 전국 오월 창작가요제’에 나가 마지막으로 노래하고 해산하기로 결정한다. 그런데 거기서 ‘다시 부르는 노래’로 금상을 타내는 큰 성과를 거두고 말았다. 그렇지만 이별은 정해진 일, 그들은 2019년 <우리들의 푸른>이라는 1집 음반을 내고 눈물을 머금고 흩어졌다.
<중년 시대>로 활동을 하던 중에 박성훈 씨는 마음이 맞는 동료들과 함께 ‘노래를 찾아 듣는 사람들의 모임’인 ’그루터기‘도 만들었다. 월 만원씩 모아 공연비를 만들어 좋은 음악인을 초청해 음악을 듣는 모임이다. 처음엔 1년에 한 팀을 겨우 초대했는데 지금은 봄여름가을겨울 년 4회 초청 공연을 하고 있다. 그루터기 회원 중에 혁신학교인 별량중학교 아빠들로 꾸려진 ’파파스 중창단‘ 단원이 있었는데 그 인연으로 박성훈 씨는 파파스 중창단과 함께 2016년 오월 창작 가요제에 다시 도전, 이번에는 은상을 받는 기쁨을 누렸다.
혁신학교인 별량중학교 학부모들과 함께 만든 그룹 ‘등걸’
이 노래는 별량중학교 아빠들과 박성훈 씨가 아이들에게 물려주고 싶은 세상을 함께 쓰고 작곡한 ‘우리가 꿈꾸는 세상’이다. 1980년 5월 그 봄날, 고립되었던 광주 시민들이 시민군을 만들어 스스로 지키고 직업 빈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서로 도우며 두려움을 견뎌냈던 잠깐의 해방구. 그런 해방구 같은 세상을 꿈꾸며 함께 만들어 부른 노래다. 큰 성과를 낸 이들은 얼마 뒤 ‘등걸’이라는 밴드를 조직해 정식으로 음악을 함께 한다. 그러나 역시 직장인들로 구성된 ‘등걸’은 박성훈 씨의 욕구만큼 음악을 자주 함께 하지 못했다. 박성훈 씨는 좁 더 많은 노래를 만들고 싶었고 좀 더 많이 노래를 부르고 싶었고 좀 더 많이 공연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혼자 그렇게 했고 2018년 인천평화창작가요제에 나가 ‘느티나무를 위하여’라는 곡으로 대상을 거머쥐고야 말았다. 그러나 그는 ‘내 노래가 아니라 내 노래가 응원하고자 했던 바들이 응원을 받게 되기를’ 바랐다.
생태 귀농학교에 다니던 시절 단란한 박성훈 씨 가족
꿈에서/ 외할머니를 만났다/ 좋았다/ 그런데/무슨 말을/하는지 모르겠다/
우리 외할머니는/베트남 사람이시다/우리 엄마도 (2018.정현희 어린이시)
순천 기적의 도서관에서 어린이들과 함께 동요를 부르는 박성훈 씨
기타 하나 둘러메고 아파하는 사람들 곁으로 달려가는 키다리 아저씨
이렇게 주로 어린이들이 쓴 시와 시인들의 시에 곡을 붙이던 그는 <사이언스 월든> 음반을 만들면서 ‘의식적으로’ 가사를 쓰기 시작했다. 그 전에도 가사를 쓰긴 했지만 좋은 가사를 쓰기 위해 제대로 훈련을 시작했던 것이다. 직업이 환경공학과 교수인데다가 환경단체 회원이고 귀농학교까지 다니다 보니 자연히 노랫말에는 생태주의 세계관이 담겼다. ‘민중 가수’라는 색깔에다가 ‘생태 가수’라는 색깔이 덧칠해진 것이다. 그리고 서정홍 선생님 따라 삶도 그렇게 만들어 갔다.
‘월간 박성훈’ 7월 공연과 ‘그루터기’ 2024년 여름 레벤드 초청 공연
‘월간 박성훈’은 잡지책 이름이 아니다. 매월 첫 번째 목요일 저녁에 작은 공간에서 하는 박성훈 가수의 정기 공연 이름이다. 내가 처음 갔던 올 2월 ‘월간 박성훈’은 순천만 잡월드에서 해직된 노동자들을 위한 공연으로 꾸며져 많은 사람들이 함께 무대에 올랐다. 그러나 본래 ‘월간 박성훈’은 주로 최상진 기타리스트와 둘이서 꾸민다. 이 인터뷰를 진행하고 사흘 뒤 마침 ‘월간 박성훈’ 7월 공연이 있었다. 1시간이 조금 넘는 시간동안 다른 가수의 노래와 본인의 노래, 그리고 잔잔한 이야기로 엮은 공연 ‘사이언스 월든’. 맨 뒷자리 푹신하고 넓은 소파에 앉아 몰입해서 구경하고 나오는데 머리와 가슴이 무척 가볍고 시원해져 있음을 느꼈다. 깊고 넓은 잔잔한 호숫가에 앉아 좋은 책 한권을 읽고 나온 기분!
그리고 다음날 노래를 찾아 듣는 사람들의 모임 ‘그루터기’의 여름행사가 이어졌다. 이번에 초대한 밴드는 포크 밴드 ‘레밴드’. 공연장을 찾아갔더니 박성훈 씨의 아내 김인아 씨가 입장료를 받으며 안내를 하고 있었고 시간이 되자 박성훈 씨가 마이크를 잡고 초대 가수들을 소개했다. 회원들은 좋은 밴드의 공연을 즐길 수 있어서 좋고 초청된 가수들은 본인들의 곡을 관객들 앞에서 실컷 부를 수 있게 해줘서 고맙다고 했다. 유명한 가수, 유명한 노래 중심으로 짜여 지는 일반 공연장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 박성훈 씨라서 가능한 일이다.
아무리 열심히 활동해도 바뀌지 않는 세상, 힘들지 않느냐? 왜 계속 이런 활동을 하느냐는 질문에 돌아 온 답이다.
‘어떤 일을 하는 보람은 그 일이 쉬운가 어려운가, 또는 그 일에 성공할 수 있는가 아닌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희망과 인내, 그 일에 쏟아 붓는 노력에 있다.’
스코트 니어링이 <조화로운 삶>마지막 장에 쓴 문장이다. 성공을 하든지 못 하든지 힘들어 하는 그들 곁에서, 아파하는 지구와 함께 인내하면서 계속 노력을 퍼붓고 있는 박성훈 씨. 올 해만 해도 그는 밀양(송전탑 건설 반대), 전주(전주 페이퍼 노동자 추모), 서울(홍세화 선생님 추모) 그밖에 여러 지역으로 기타 하나 메고 뛰어다녔다. 노래보다 가르치는 일을 더 잘하지만(여수MBC 다큐에세이 박성훈 참고) 교수보다 가수로서 정체성이 더 강해 보이는 사람, 그의 곁에 꿀이 뚝뚝 떨어지는 눈빛으로 변함없이 지켜봐주는 반려자 김인아 씨가 있기에 그의 발걸음은 더 거침없고 씩씩해 보인다.
전주 페이퍼에서 사망한 뒤 23일 만에 장례를 치르게 된 순천 청년의 추모식. 박성훈 씨가 고개 숙인 순천 청년의 친구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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