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를 추구하는 이들은 변화를 믿는 사람들이다. 변화의 힘을 알고, 그것의 실체가 있다고 믿으며 자신만의 방향을 설정해 나아간다. 어쩌면 활동가는 세계의 고통에 덩달아 몸이 아파지는 사람들이기도 하고, 동시에 비관으로 가득 찬 세상에 이유 없는 낙관을 갖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자주 아팠으나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나 걷고 있는 이들을 보며, 나는 아무것도 몰라서 아프지 않은 사람보다 상처를 담아두고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을 사랑하게 되었다.
햇살(강영경)은 꽁꽁 언 땅을 천천히 녹이듯 주변을 변화시키는 반농반X 활동가다. 20년간 ‘여성노동자회 부녀반’에서 여성 노동자들을 위한 지원을 해왔고, 산청 귀농 후 ‘함께평화’ 사무국장으로 평화의 소녀상 지킴이 활동과 여성, 어린이, 성소수자 등의 소수자 인권 인식 개선 활동을 펼친다. 일상에서는 ‘비온뒤햇살농장’에서 지속가능한 농사를 통해 자신의 삶이 지구에 해를 입히지 않을 방식을 고려한다.
햇살은 언제나 희망이었으니 햇볕 아래에선 좋은 일만 일어날 것 같다. 햇살 닿는 곳에 결국엔 작은 새싹이 올라오듯 햇살의 활동으로부터 산청과 지리산의 다양한 변화가 시작되고 있다.
삶의 재미는 알지 못하는 데서 온다
Q. 햇살이 산청으로 온 지 10년이 넘었다고 알고 있어요. 산청으로는 어떻게 오시게 되었나요?
저는 남편과 2010년 1월에 산청으로 왔는데요. 그 당시에 저는 부산에서 여성단체 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노동운동을 하던 남편이 나이가 들어도 일할 수 있는 곳에 가고 싶다면서 먼저 귀농을 이야기했어요. 저희 부부가 실행력이 강한 편이라서 그 길로 살림채가 딸린 재실을 소개받고 산청으로 이주했어요. 재실에서 관리하는 땅에서 농사하는 조건으로 살림채에 살기로 했죠.
Q. 현재도 농사짓는 삶을 꾸리고 계시잖아요. 이주 이후에 바로 농사를 시작한 셈이네요?
남편은 처음부터 농사를 짓고 싶어 했는데 농사만 지어서는 먹고 살기 어려우니까 저는 다른 일을 해야겠다 생각했어요. 그래서 저는 청소년 상담을 하고 남편은 농업 인턴을 했어요. 오자마자 둘 다 일을 한 거죠. 퇴근 전후로는 같이 농사 짓고요. 그렇게 1년동안 일과 농사를 겸했는데, 뭣도 모르니까 너무 재밌어서 중고로 수동 이앙기, 트랙터, 트럭까지 샀어요. 논 농사할 때도 모판 만들고 볍씨부터 키우면서 재미있게 했어요.
Q.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이 재미있었나요?
저는 어릴 때 시골에서 살았기 때문에 부모님이 모판 만드는 모습을 보긴 했어요. 그런데 제가 직접 해본 적이 없었던 거죠. 직접 모판을 키우고, 논에 물을 잡아서 심고, 벼들이 잘 크는 모습을 보는 게 너무 재밌고 신기했어요. 손으로 하나하나 해 나가는 과정이 너무 재밌었어요. 지금은 하라고 해도 그렇게는 못할 거 같아요. (웃음)
처음 감자 심던 때도 기억나요. 재를 묻히는 것까진 알겠는데, 이 방향으로 심어야 하는지, 저 방향으로 심어야 하는지 몰라서 남편이랑 싸웠잖아요. (웃음) 그러다 보니까 내가 평생 감자를 먹었는데 한 번도 심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거예요. 농부의 딸인데 감자를 어떻게 심어야 하는지 어떻게 크는지 평생 모를 뻔했다는 생각에 처음으로 남편에게 시골에 너무 잘 왔다고, 고맙다고 이야기했어요.
Q. 저도 여전히 땅에서 싹이 올라오는 순간을 좋아해요. 첫 농사에서 소득이 나오기 어려웠을 것 같아요.
다행히 첫 해 가을에 동네 어르신들이 밤나무 산을 소개해 주셨어요. 만 오천 평인데, 위에서 봤을 때 산등성이가 10개 정도 되는 어마어마한 크기예요. 어르신들에게 물어보니 다들 “에구~ 힘들어서 못 한다. 모기도 많고~!” 하시는 거예요. 그런데도 저는 오기가 생겨서 하겠다고 했어요. (웃음)
그렇게 처음 밤을 주우러 가니 온 산에 밤이 엄청나게 떨어져 있더라고요. 신나게 두 시간동안 밤을 주워서 한 포대를 채우니까 마을 분들이 농협에 가져가면 된대요. 농협에 가니 그 자리에서 크기별로 분류되어서 돈이 바로 나오더라고요. 농사도 안 짓고 주워담는데 돈이 되는 거잖아요. 그 이후부터 한 달 동안 매일 8시부터 동네 할머니 두 분 모시고 밤을 주웠어요.
그런데 제가 당시에 상담 일을 하고 있었거든요. 어려운 상황에 있는 청소년 내담자들을 상담했기 때문에 더 마음을 쏟고 집중해야 하는데, 엄청 넓은 산에서 밤이 마구 떨어지는 상황이다 보니까 저는 일하는 도중에 상담하러 가야 했던 거죠. 밤 농사와 상담을 같이하다 보니 이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2년차에는 남편이랑 둘 다 전업농으로 해보자 했어요. 1년 차처럼 감자와 양파 심고, 논 농사에 밤까지 주우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하고요. 그런데 전업농 시작하니 귀신 같이 마이너스가 됐어요. (웃음)
Q. 초심자의 행운이 있잖아요. (웃음) 지금은 농사가 안정되었나요?
저희가 산청에 와서 이사를 세 번 했거든요. 전업농에 실패하고 남편과 저는 다시 일을 겸하면서 500평 정도만 농사를 지었어요. 그러다 남편이 ‘자연농법 연구회’ 활동을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농사를 해보고 싶어했어요. 그래서 구입한 땅이 600평 비닐 하우스였고, 땅 주변에 집을 구한 게 여기예요.
처음엔 메론, 애플 수박 같은 작물을 길러봤는데, 친환경 방제나 작물 당도 맞추는 일이 쉽지 않아서 포기하게 됐어요. 다양한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일을 병행할 수 있는 작물로 생강을 찾은 거죠. 올해는 600평 하우스에 생강을 심었고, 다른 밭 200평에는 마을로 귀촌한 젊은 부부와 같이 퍼머컬처 방식으로 농사짓고 있어요. 양파, 마늘, 고추, 참깨, 배추, 무 이런 것들 심으면서요. 지금 생각하면 퍼머컬처 농사는 행복한 농사이고, 하우스는 경제적으로 도움되기 위해서 하는, 환금을 위한 농사죠.
사실 돈 버는 농사를 안 지으면 훨씬 더 자유로울 것 같은데, 그럼에도 생강 농사는 포기하고 싶진 않아요. 생강을 기르면 김 매고 북 줄 때 생강 잎에서도 향이 나거든요. 너무 매력 있어요. 또 제가 추위를 많이 타는데 생강이 몸을 따뜻하게 해주잖아요. 생강이 진짜 매력적이라서 5년째 짓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하고 싶어요.
Q. 스스로 하고 있는 일을 ‘반농반X(지속가능한 작은 농업을 실천하고 자신만의 다양한 재주인 X를 활용하는 삶의 방식, 시오미 나오키 『반농반X의 삶』)’라고 표현하기도 했어요. 햇살의 반농반X는 무엇인가요?
처음 책에서 이 단어를 알게 됐는데요. 저도 되돌아보니 전업농 몇 년을 제외하면 직장과 농사를 겸하고 있는 거예요. 시골에 와도 반드시 농사짓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좋아서 제게는 어떤 X가 있는지 생각해봤어요. 현재는 우선 ‘산청간디학교’에서 기숙사 생활교사로 일하고 있고요. ‘함께평화’나 ‘산청케이블카 대책위원회’, ‘산책여’ 책 모임도 하고 있어요. 다양한 X를 하면서 정체성을 정리하게 된 단어라서 좋았어요.
딸인 듯 친구인 듯
Q. 최근엔 딸과 함께 농사 지으며 살고 계시죠? 가족과 함께 지내는 삶이 이전과는 다르게 느껴질 것 같아요.
작년에 남편이 많이 지치고 방전되는 번아웃 시기가 왔어요. 저도 갱년기 지나면서 겪어본 일이라 이해가 되더라고요. 산청을 떠나 외국에서 살아보기도 하고 지금은 다른 지역에서 일하고 있어요. 올 여름에는 딸이 시골에 살고 싶다고 완전히 이곳으로 이주했어요. 딸도 저에게 ‘햇살’이라고 부르기 때문에 지금은 ‘엄마와 딸’이라기 보다는 그냥 동거인, 동업자이자 친구라고 느껴져요. 딸은 저에게 농사를 배우고, 저는 딸 덕분에 산청의 청년들과 더 많이 친하게 됐어요. 저희 집에서 청년모임을 하기도 하고요.
이전과의 변화라면, 남편과 살 때는 아내라는 의무가 많았다면 지금은 딸과 함께 역할을 나누고 만들어가는 부분이 큰 것 같아요. 또 딸이 오면서 집의 빈 공간들을 잘 활용할 수 있게 됐어요. 딸의 손을 거치니까 집이 전보다 사랑스러워졌어요.
사람으로 회복하는 시간
Q. 산청에 와서 침잠하는 시간을 가졌다고 하셨어요. 그 에너지가 바깥으로 전환되었던 계기가 있나요?
제가 산청에 왔을 때 마흔다섯 살이었는데, 갱년기가 겹치면서 힘들었어요. 20년 간 늘 활동(과 사람들) 속에 있다가 산청에 오니 새로 시작하는 1학년 초등학생이 된 기분이었어요. 일을 하긴 했지만 진심으로 사람들과 관계 맺지 못했어요. 2017년엔 우리나라 여기저기를 걷는 시간을 가졌어요. 마음이 풀렸던 건 2018년 책 모임 ‘산책여’를 시작하면서 였어요. ‘산청에서 책 읽는 여신들’이라는 뜻이예요. (웃음) 제가 그때 여신에 꽂혀 있어서… 처음으로 산청에 마음 붙일 수 있는 친구들이 생긴 모임이기도 하고 지금까지 5년째 이어지고 있어요. 식물을 이식하면 실뿌리를 내리는 것처럼 저에게는 눈에 안 보이는 뿌리들을 내리기 시작한 게 그때였던 것 같아요.
2020년에는 산청 평화의 소녀상을 세우는 프로젝트가 있었어요. 저도 처음엔 산청에서 이게 가능할까, 비용과 장소를 구할 수 있을까 반신반의하면서 한 발만 담가 두고 진행 과정을 지켜봤는데, 그걸 추진했던 ‘산청군평화비건립위원회’ 분들이 너무 열심히 하는 거예요. 1년 내로 평화의 소녀상을 건립하는 걸 목표로 정말 많은 분들이 참여하셨고, 결국은 이뤘거든요. 그 과정이 너무 감동적이었어요. 그걸 보면서 ‘나도 함께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면서 저에게도 변화가 있었던 것 같아요.
평화의 소녀상 건립 이후에는 남은 예산을 어떻게 사용할 지에 대해서 논의했어요. 그때 저는 평화의 소녀상이 주는 의미와 가치를 확장해서 인권, 평화 교육을 하는 장을 만들면 좋겠다고 했는데, 소녀상 건립 이후에 집행을 맡았던 분들은 다들 지쳐 있던 참에 제가 후속 모임을 맡아보겠다 했어요. 그게 2021년에 만들어진 ‘함께평화’예요. 우선 그릇만 만들고 여기에 뭘 담을지는 우리가 만들어 갈 수 있다고 사람들을 설득해서 지금은 다양한 분들과 함께하고 있어요. 도시에서 활동했던 20년간 해내야 하는 의무로 느껴지던 일들이 많았는데 그땐 제가 나서서 하고 싶다는 마음이 새롭게 생겨났어요.
Q. 그 마음이 이어져서 산청 뿐 아니라 지리산권까지 활동 폭이 넓어진 것 같아요.
올해 ‘작은변화지원센터’에서 ‘지리산활동가대회’할 때 윤주옥 선생님을 처음 만났어요. ‘지리산운동’을 함께 하자고 말하는 선생님의 말씀이 인상 깊었어요. 올해 다녀온 구례 탐방에서 지리산과 반달곰에 대해서 알게 되고, 지리산에 마음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나게 될 때마다 너무 좋았어요.
지금 저는 산청에 있지만 산 너머에 얼굴을 아는 누군가가 있다는 생각을 하니 다같이 뭔가를 하고 있음에 굉장히 든든하고 커다란 안정감으로 다가와요. 지리산 케이블카를 비롯해서 지리산의 이슈들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알게 되면서 지리산 운동이 저에게 새로운 주제가 됐어요.
Q. 앞으로 더 하고 싶은 활동이 있으세요?
‘함께평화’에서 하는 활동들이 있어요. 올해는 영화제와 평화 감수성 워크숍을 열었고, 일상적으로는 평화의 소녀상과 피해자 할머니 묘소를 관리하는 일을 하고 있어요. 이런 활동들은 앞으로도 유지될 것 같고요.
새로운 주제가 앞서 말한 지리산 운동이에요. 그간 ‘지리산사람들’ 중심으로 지리산 지역별 식생이나 주목 생장 모니터링을 하고 있었는데, 산청에서는 사람이 없어서 하동, 구례 분들이 산청권역까지 맡고 계셨다고 해요. 앞으로는 산청 단체들이 연계해서 산청권역 모니터링을 같이할 수도 있을 것 같고요. 케이블카 이슈도 단순 반대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지리산을 더 알게 되고 사랑할 수 있는 프로그램들을 통해서 이것을 왜 반대해야 하는지 많은 사람들이 느낄 수 있도록 하고 싶어요.
그리고 농사 규모를 줄이고 공부를 더 하고 싶어요. 지금까지는 퍼머컬처 같은 생태적 농사를 제대로 할 만큼의 여유가 없었거든요. 그런데 최근에 다큐멘터리 <위대한 작은 농장>, <타샤 튜더>를 보고, 영국 전원마을 토트네스에 관한 이야기도 들으면서 지역의 관계성, 지역 공동체 부분에 더 관심이 생겼고, 이 부분들을 앞으로 공부해 나가야 할 것 같아요.
마지막으로는 집을 많이 활용하고 싶어요. 제 나이가 더 많이 들면 여기에 혼자 살기는 어려울 것 같거든요. 시골생활에 관심있거나 공간이 필요한 사람이 저희 집을 잘 활용할 수 있도록 방법을 찾아보고 싶어요. 같이 농사일을 돕거나 해보고 싶은 일을 같이 하면서요.
Q. 하고싶은 활동을 위해서 햇살 스스로에게 어떤 것이 가장 필요하다고 생각하세요?
우선 관계가 중요한 것 같아요. 일단 관계가 맺어져야 상대방이 뭐가 필요한 지 알잖아요. 저는 지금 산청이라는 느슨한 공동체에 속해 있다고 생각해요. 실제로 제가 농사 일하다 다쳤을 때도 119보다 산청 분들이 더 빨리 병원에 도착해서 저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너무 감동적이었고 든든했거든요. 이렇게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과 서로 나눌 수 있는 관계를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런 생각을 많이 해요.
엄마가 된다는 건 내가 ‘여성’임을 깨닫는 일
Q. 산청에서 여성 모임을 만든 후기를 봤어요. 이 활동은 어떻게 시작하셨어요?
저는 농촌에 있는 여성들을 조직해서 여성 모임을 하고 싶었어요. 그러다 농민회에서 ‘작은변화 공모지원사업’을 알게 돼서 ‘산청군농민회 여성회원 타로 워크숍’을 기획했어요. 우선 농민회 회원을 대상으로 얼굴은 알지만 깊이 얘기 나눠본 적 없는 여성회원들 10명이서 시작했는데, 되게 좋았어요. 처음으로 마음 속 깊은 이야기들을 터놓고 이야기했고, 소통하는 기분을 느낀 모임이었거든요. 그런데 다들 처지가 다르다 보니 꾸준한 모임으로 이어지기는 쉽지가 않았어요. 농부, 농산물 판매, 학원 강사, 교사, 직장인까지 구성원이 다양했거든요.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코로나19도 왔고요. 정기 모임은 어려웠지만 그분들과는 끈끈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어요.
Q. 과거부터 여성에 대한 이슈를 개인적 과제로 가져오신 것 같아요. 여성활동은 어떤 마음으로 시작하게 되셨어요?
저는 결혼하는 과정에서 제가 ‘여성’이라는 걸 처음으로 자각하게 됐어요. 어린 시절엔 특별히 여성 차별을 느껴본 적이 없어요.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결혼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불합리함을 느끼고 나서 현실이 충격적으로 다가오더라고요. 임신을 하게 되면서 힘들어 하던 차에 남편이 ‘여성노동자회 부녀반’이라는 기혼 여성 모임을 소개해줬어요. 가보니 출산 경험이 많은 언니들도 있고, 저보다 더 어려운 상황에 있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엄마들 모임으로 만나서 밥도 먹고, 양육 팁을 공유하는 형태였는데, 다양한 사람들이 제 얘길 들어주니까 응어리가 풀어지더라고요. 그때 당시 남편은 밤낮으로 노동운동 하느라 바빠서 독박 육아에 답답하고 힘들었는데 부녀반 활동하면서 숨통이 트였어요. 저희 아이들이 어린이집 들어간 이후엔 상근자로 활동하게 됐고요.
Q. 여성노동자회 부녀반에선 어떤 일들을 맡으셨어요?
지역에서 활동들을 조직하는 지역 조직 사업이나 여성노동자 권리 교육, 양성평등 교육을 했고, 직장내 성차별이나 임금체불 같은 고용 문제에서 겪게 되는 어려움을 상담하고 해결을 지원하는 활동을 했어요. 상담도 교육도 말로 하는 일이어서 제가 잘할 수 있는 영역이었던 것 같아요.
그러다가 나중엔 단체 안에서 정당 활동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저는 경쟁이 힘들고 상처 주고받는 게 싫어서 정당 활동이 어렵더라고요. 정당 활동을 계속해 나가려면 지역구 선거도 필연적으로 나가야 해서 부담감이 정말 심했어요. 일찍부터 활동을 시작했기 때문에 연차가 많았지만 나이는 어렸던 거죠. 내 몸에 맞지 않는 무거운 짐들을 늘 지고 있는 것 같았어요. 거리를 두고 보니 이전 활동에서 답답함이나 어려움도 많았네요. 제가 남편 때문에 귀농했다고 이야기했지만, 사실은 ‘이 참에 도망가자’ 하는 저만의 이유도 있었어요.
Q. 유독 많은 활동을 해온 활동가들이 부담감 역시 크게 느끼는 것 같아요. 활동가로서 가장 원했던 변화는 어떤 것이었나요?
이 세상에 태어나서 제가 태어나기 전보다 세상이 좀 더 나아진다면 만족한다 생각했어요. 정말 조금이라도 세상이 나아지는 데 기여하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고, 우리 아이들이 지금보다 더 좋은 세상에서 살길 바랐어요. 지금은 산청에서 저만의 방식으로 기여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다름을 이해하는 방법
Q. 시골에서 성평등이나 성인지 감수성을 기대하기 어려운 때가 많은 것 같아요. 지역에서 성평등을 위한 활동은 무엇이 있을까요?
제가 여성 모임을 하고 싶었던 이유도 그런 부분 때문이었어요. 평소에 이야기가 통하는 사람들도 ‘여성’을 주제로 하면 이야기 나누기 쉽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함께평화’에서는 평화와 인권으로 활동 주제를 넓혀서 행사를 기획하고 있어요. 올해 여름 영화제에서도 성소수자와 그 양육자 가족의 이야기를 다룬 <너에게 가는 길>을 상영했거든요. 준비하면서 ‘누가 뭐라고 하면 어떡하지?’, ‘홍보가 많이 안 되면 어떡하지?’ 하는 불안감이 있었는데 그 행사에 참여했던 50대 남자 관객분도 눈물을 흘리셨어요. 이런 영화를 보게 해줘서 고맙다면서요.
그래서 저는 상대방을 ‘내가 아는 사람’으로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듣는 건 방송이나 매체를 통해서 보는 것과는 다른 거죠. <너에게 가는 길>에서 부모가 자녀의 성 정체성을 인정하게 되는 과정과 그 이후에 자녀의 행복에 대해 고민하게 되는 것처럼, 지역에서는 타인에 대해 판단하기 전에 관계를 맺어가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면 상대를 단순히 ‘성소수자’로 판단하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된 후에 관계를 시작한다면 더 다양하고 안전한 관계망이 생겨나지 않을까요? 저는 이런 방식의 관계 맺기 활동을 계속해 나가고 싶은데, 그러려면 제가 먼저 성에 대해서 더 공부해야 해요.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산청에서도 성 다양성 축제를 열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요?
Q. 영화 상영이나 교육 프로그램처럼 간접적인 경험을 통해 논의의 장을 만들고 사람들이 생각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 주는 일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까만 종이를 하얗게 칠하는 건 어렵지만, 각자의 색을 조금씩 희석하면서 만날 수 있는 접점을 만들 수 있다면 좋겠어요. 그러기 위해선 다양한 사람들이 더 많이 섞여야 하고요. 정색하고 싸우기보다 서로 좋은 관계를 맺어가면서 성평등 같은 주제에 대해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기회를 더 만들어야 하는 거죠. 이것도 쉽지 않지만 이것 말고 별다른 방법도 없는 것 같아요. 그런 의미에서 교육이나 영화 상영이 혐오나 차별의 정의, 기준에 대해서 알려줄 수 있는 좋은 기회인 것 같아요.
Q. 나와 가치관이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면서 나아가는 과정이 쉽지 않잖아요. 햇살은 그런 상황을 어떻게 헤쳐 가시나요?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 활동으로 이어 나가는 힘은 어디서 나오나요?
공동체의 장(場)에서 누구나 자기 표현을 하는 건 괜찮다고 생각해요. 성향이나 정치적 입장이 다를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혐오와 차별의 글을 쓰거나 말을 하고, 욕설하거나 비난한다면 그건 잘못됐다고 생각해요. 장이라는 건 다양한 사람들이 모두 함께 있어야 하잖아요. 한쪽으로만 쏠려도 안 되고요. 그런 사람을 만나면 혐오와 차별의 방식으로는 우리의 공동체가 계속해 나갈 수 없다는 걸 따끔하게 알려주고 대화를 통해서 풀어내고 싶어요.
저와 정치적 입장이 다른 사람들이 만약 저와 같은 경험을 했더라면 그렇게 달라지지 않았을 거잖아요. 그러니까 한 사람의 성향은 어쩔 수 없는 환경이나 조건이 작용한 것이지, 그 사람이 선택한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 사실을 인정하면서 변화할 수 있다고 믿는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그 사람의 환경과 경험이 나와 달랐을 뿐, 내가 그 사람을 통째로 바꿀 수는 없다는 걸 담담하게 인정하는 거죠. 결국 사람은 다른 경험을 하거나 상황이 달라지면 변하거든요. 타인의 문제였던 일이 내 문제가 되면 변하게 되는 것처럼요. 담담하게 바라보면 작은 희망이 생겨요.
다른 이에게 햇살이 되는 사람
Q. 스스로를 ‘연결술사’라고 정의하신 걸 봤어요. 햇살에게 연결은 어떤 의미인가요?
연결술사는 산청의 한 친구가 저를 표현해 준 말인데요. 처음 들은 말인데 그 단어가 너무 좋아서 쓰기 시작했어요. 저는 어떤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이 무엇이 필요할까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그 사람에게 필요한 정보나 사람을 연결시키는 일을 좋아해요. 제가 귀농귀촌 상담사로 일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연결시키기도 했고, 저 역시 시골 이주 후에 도움을 참 많이 받았어요. 그래서 어떤 것과 어떤 것을 연결했을 때 그 사람에게 중요한 무언가가 해결되는 걸 보면 저는 크게 보람을 느껴요. 그러고 보면 결국 사람이 가장 중요한 것 같아요. 어떤 것도 다 사람에게서 나오기 때문에.
Q. 만약 엄마, 아내, 농부, 활동가가 아닌 다른 삶을 산다면 어떤 삶을 살고 싶나요?
이 질문을 사전에 받았을 때 너무 좋았어요. 생각만 해도 행복해요. 떠올려 보니 스무 살 때 영어로 자기 소개를 하는 시간에 저는 여행자가 되고 싶다고 했어요. 그때는 1980년대니까 여행이라는 개념이 익숙하지 않을 때거든요. 그래서 사람들이 막 웃었어요. 어떻게 그게 가능하냐, 부자 남편을 만나야 하는 것 아니냐, 하면서요. 아무튼 새로운 곳에 가서 새로운 사람 만나는 게 되게 재미있을 것 같아요. 해외가 아니라도 사람을 만나러 여기저기 다닐 것 같아요.
우리 쉬엄쉬엄 하자
Q. 마지막 질문입니다. 지리산권에서 활동하는 활동가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해주고 싶나요?
“자기 몸 잘 돌보면서 일하자”, “너무 달리지 말자”, “최선을 다하면 죽는다”, “너무 욕심 내지 말자” 이런 얘기하고 싶어요. 이건 과거의 나에게 해주고 싶었던 말이기도 해요. 그래서 지금은 내가 하고 싶은 활동을 할 수 있는 만큼 하려고 해요. 굉장히 가볍고 즐겁게. 소소하게 지내는 게 더 행복하고 귀한 시간인 것 같아요.
#산청 #경남 #지리산 #강영경 #햇살
#변화를만드는사람들 #피플포체인지 #브라이언임팩트 #지리산이음
글쓴이 : 승현
지리산 귀촌 6년차, 세상의 본질에 대한 호기심을 동력삼아 시골에서 살고 있습니다. 내 주변 존재들의 이야기를 더 많이 알리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지리산 귀촌인 인터뷰집 《어디에나 우리가》를 썼습니다.
변화를 추구하는 이들은 변화를 믿는 사람들이다. 변화의 힘을 알고, 그것의 실체가 있다고 믿으며 자신만의 방향을 설정해 나아간다. 어쩌면 활동가는 세계의 고통에 덩달아 몸이 아파지는 사람들이기도 하고, 동시에 비관으로 가득 찬 세상에 이유 없는 낙관을 갖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자주 아팠으나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나 걷고 있는 이들을 보며, 나는 아무것도 몰라서 아프지 않은 사람보다 상처를 담아두고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을 사랑하게 되었다.
햇살(강영경)은 꽁꽁 언 땅을 천천히 녹이듯 주변을 변화시키는 반농반X 활동가다. 20년간 ‘여성노동자회 부녀반’에서 여성 노동자들을 위한 지원을 해왔고, 산청 귀농 후 ‘함께평화’ 사무국장으로 평화의 소녀상 지킴이 활동과 여성, 어린이, 성소수자 등의 소수자 인권 인식 개선 활동을 펼친다. 일상에서는 ‘비온뒤햇살농장’에서 지속가능한 농사를 통해 자신의 삶이 지구에 해를 입히지 않을 방식을 고려한다.
햇살은 언제나 희망이었으니 햇볕 아래에선 좋은 일만 일어날 것 같다. 햇살 닿는 곳에 결국엔 작은 새싹이 올라오듯 햇살의 활동으로부터 산청과 지리산의 다양한 변화가 시작되고 있다.
삶의 재미는 알지 못하는 데서 온다
Q. 햇살이 산청으로 온 지 10년이 넘었다고 알고 있어요. 산청으로는 어떻게 오시게 되었나요?
저는 남편과 2010년 1월에 산청으로 왔는데요. 그 당시에 저는 부산에서 여성단체 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노동운동을 하던 남편이 나이가 들어도 일할 수 있는 곳에 가고 싶다면서 먼저 귀농을 이야기했어요. 저희 부부가 실행력이 강한 편이라서 그 길로 살림채가 딸린 재실을 소개받고 산청으로 이주했어요. 재실에서 관리하는 땅에서 농사하는 조건으로 살림채에 살기로 했죠.
Q. 현재도 농사짓는 삶을 꾸리고 계시잖아요. 이주 이후에 바로 농사를 시작한 셈이네요?
남편은 처음부터 농사를 짓고 싶어 했는데 농사만 지어서는 먹고 살기 어려우니까 저는 다른 일을 해야겠다 생각했어요. 그래서 저는 청소년 상담을 하고 남편은 농업 인턴을 했어요. 오자마자 둘 다 일을 한 거죠. 퇴근 전후로는 같이 농사 짓고요. 그렇게 1년동안 일과 농사를 겸했는데, 뭣도 모르니까 너무 재밌어서 중고로 수동 이앙기, 트랙터, 트럭까지 샀어요. 논 농사할 때도 모판 만들고 볍씨부터 키우면서 재미있게 했어요.
Q.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이 재미있었나요?
저는 어릴 때 시골에서 살았기 때문에 부모님이 모판 만드는 모습을 보긴 했어요. 그런데 제가 직접 해본 적이 없었던 거죠. 직접 모판을 키우고, 논에 물을 잡아서 심고, 벼들이 잘 크는 모습을 보는 게 너무 재밌고 신기했어요. 손으로 하나하나 해 나가는 과정이 너무 재밌었어요. 지금은 하라고 해도 그렇게는 못할 거 같아요. (웃음)
처음 감자 심던 때도 기억나요. 재를 묻히는 것까진 알겠는데, 이 방향으로 심어야 하는지, 저 방향으로 심어야 하는지 몰라서 남편이랑 싸웠잖아요. (웃음) 그러다 보니까 내가 평생 감자를 먹었는데 한 번도 심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거예요. 농부의 딸인데 감자를 어떻게 심어야 하는지 어떻게 크는지 평생 모를 뻔했다는 생각에 처음으로 남편에게 시골에 너무 잘 왔다고, 고맙다고 이야기했어요.
Q. 저도 여전히 땅에서 싹이 올라오는 순간을 좋아해요. 첫 농사에서 소득이 나오기 어려웠을 것 같아요.
다행히 첫 해 가을에 동네 어르신들이 밤나무 산을 소개해 주셨어요. 만 오천 평인데, 위에서 봤을 때 산등성이가 10개 정도 되는 어마어마한 크기예요. 어르신들에게 물어보니 다들 “에구~ 힘들어서 못 한다. 모기도 많고~!” 하시는 거예요. 그런데도 저는 오기가 생겨서 하겠다고 했어요. (웃음)
그렇게 처음 밤을 주우러 가니 온 산에 밤이 엄청나게 떨어져 있더라고요. 신나게 두 시간동안 밤을 주워서 한 포대를 채우니까 마을 분들이 농협에 가져가면 된대요. 농협에 가니 그 자리에서 크기별로 분류되어서 돈이 바로 나오더라고요. 농사도 안 짓고 주워담는데 돈이 되는 거잖아요. 그 이후부터 한 달 동안 매일 8시부터 동네 할머니 두 분 모시고 밤을 주웠어요.
그런데 제가 당시에 상담 일을 하고 있었거든요. 어려운 상황에 있는 청소년 내담자들을 상담했기 때문에 더 마음을 쏟고 집중해야 하는데, 엄청 넓은 산에서 밤이 마구 떨어지는 상황이다 보니까 저는 일하는 도중에 상담하러 가야 했던 거죠. 밤 농사와 상담을 같이하다 보니 이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2년차에는 남편이랑 둘 다 전업농으로 해보자 했어요. 1년 차처럼 감자와 양파 심고, 논 농사에 밤까지 주우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하고요. 그런데 전업농 시작하니 귀신 같이 마이너스가 됐어요. (웃음)
Q. 초심자의 행운이 있잖아요. (웃음) 지금은 농사가 안정되었나요?
저희가 산청에 와서 이사를 세 번 했거든요. 전업농에 실패하고 남편과 저는 다시 일을 겸하면서 500평 정도만 농사를 지었어요. 그러다 남편이 ‘자연농법 연구회’ 활동을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농사를 해보고 싶어했어요. 그래서 구입한 땅이 600평 비닐 하우스였고, 땅 주변에 집을 구한 게 여기예요.
처음엔 메론, 애플 수박 같은 작물을 길러봤는데, 친환경 방제나 작물 당도 맞추는 일이 쉽지 않아서 포기하게 됐어요. 다양한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일을 병행할 수 있는 작물로 생강을 찾은 거죠. 올해는 600평 하우스에 생강을 심었고, 다른 밭 200평에는 마을로 귀촌한 젊은 부부와 같이 퍼머컬처 방식으로 농사짓고 있어요. 양파, 마늘, 고추, 참깨, 배추, 무 이런 것들 심으면서요. 지금 생각하면 퍼머컬처 농사는 행복한 농사이고, 하우스는 경제적으로 도움되기 위해서 하는, 환금을 위한 농사죠.
사실 돈 버는 농사를 안 지으면 훨씬 더 자유로울 것 같은데, 그럼에도 생강 농사는 포기하고 싶진 않아요. 생강을 기르면 김 매고 북 줄 때 생강 잎에서도 향이 나거든요. 너무 매력 있어요. 또 제가 추위를 많이 타는데 생강이 몸을 따뜻하게 해주잖아요. 생강이 진짜 매력적이라서 5년째 짓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하고 싶어요.
Q. 스스로 하고 있는 일을 ‘반농반X(지속가능한 작은 농업을 실천하고 자신만의 다양한 재주인 X를 활용하는 삶의 방식, 시오미 나오키 『반농반X의 삶』)’라고 표현하기도 했어요. 햇살의 반농반X는 무엇인가요?
처음 책에서 이 단어를 알게 됐는데요. 저도 되돌아보니 전업농 몇 년을 제외하면 직장과 농사를 겸하고 있는 거예요. 시골에 와도 반드시 농사짓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좋아서 제게는 어떤 X가 있는지 생각해봤어요. 현재는 우선 ‘산청간디학교’에서 기숙사 생활교사로 일하고 있고요. ‘함께평화’나 ‘산청케이블카 대책위원회’, ‘산책여’ 책 모임도 하고 있어요. 다양한 X를 하면서 정체성을 정리하게 된 단어라서 좋았어요.
딸인 듯 친구인 듯
Q. 최근엔 딸과 함께 농사 지으며 살고 계시죠? 가족과 함께 지내는 삶이 이전과는 다르게 느껴질 것 같아요.
작년에 남편이 많이 지치고 방전되는 번아웃 시기가 왔어요. 저도 갱년기 지나면서 겪어본 일이라 이해가 되더라고요. 산청을 떠나 외국에서 살아보기도 하고 지금은 다른 지역에서 일하고 있어요. 올 여름에는 딸이 시골에 살고 싶다고 완전히 이곳으로 이주했어요. 딸도 저에게 ‘햇살’이라고 부르기 때문에 지금은 ‘엄마와 딸’이라기 보다는 그냥 동거인, 동업자이자 친구라고 느껴져요. 딸은 저에게 농사를 배우고, 저는 딸 덕분에 산청의 청년들과 더 많이 친하게 됐어요. 저희 집에서 청년모임을 하기도 하고요.
이전과의 변화라면, 남편과 살 때는 아내라는 의무가 많았다면 지금은 딸과 함께 역할을 나누고 만들어가는 부분이 큰 것 같아요. 또 딸이 오면서 집의 빈 공간들을 잘 활용할 수 있게 됐어요. 딸의 손을 거치니까 집이 전보다 사랑스러워졌어요.
사람으로 회복하는 시간
Q. 산청에 와서 침잠하는 시간을 가졌다고 하셨어요. 그 에너지가 바깥으로 전환되었던 계기가 있나요?
제가 산청에 왔을 때 마흔다섯 살이었는데, 갱년기가 겹치면서 힘들었어요. 20년 간 늘 활동(과 사람들) 속에 있다가 산청에 오니 새로 시작하는 1학년 초등학생이 된 기분이었어요. 일을 하긴 했지만 진심으로 사람들과 관계 맺지 못했어요. 2017년엔 우리나라 여기저기를 걷는 시간을 가졌어요. 마음이 풀렸던 건 2018년 책 모임 ‘산책여’를 시작하면서 였어요. ‘산청에서 책 읽는 여신들’이라는 뜻이예요. (웃음) 제가 그때 여신에 꽂혀 있어서… 처음으로 산청에 마음 붙일 수 있는 친구들이 생긴 모임이기도 하고 지금까지 5년째 이어지고 있어요. 식물을 이식하면 실뿌리를 내리는 것처럼 저에게는 눈에 안 보이는 뿌리들을 내리기 시작한 게 그때였던 것 같아요.
2020년에는 산청 평화의 소녀상을 세우는 프로젝트가 있었어요. 저도 처음엔 산청에서 이게 가능할까, 비용과 장소를 구할 수 있을까 반신반의하면서 한 발만 담가 두고 진행 과정을 지켜봤는데, 그걸 추진했던 ‘산청군평화비건립위원회’ 분들이 너무 열심히 하는 거예요. 1년 내로 평화의 소녀상을 건립하는 걸 목표로 정말 많은 분들이 참여하셨고, 결국은 이뤘거든요. 그 과정이 너무 감동적이었어요. 그걸 보면서 ‘나도 함께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면서 저에게도 변화가 있었던 것 같아요.
평화의 소녀상 건립 이후에는 남은 예산을 어떻게 사용할 지에 대해서 논의했어요. 그때 저는 평화의 소녀상이 주는 의미와 가치를 확장해서 인권, 평화 교육을 하는 장을 만들면 좋겠다고 했는데, 소녀상 건립 이후에 집행을 맡았던 분들은 다들 지쳐 있던 참에 제가 후속 모임을 맡아보겠다 했어요. 그게 2021년에 만들어진 ‘함께평화’예요. 우선 그릇만 만들고 여기에 뭘 담을지는 우리가 만들어 갈 수 있다고 사람들을 설득해서 지금은 다양한 분들과 함께하고 있어요. 도시에서 활동했던 20년간 해내야 하는 의무로 느껴지던 일들이 많았는데 그땐 제가 나서서 하고 싶다는 마음이 새롭게 생겨났어요.
Q. 그 마음이 이어져서 산청 뿐 아니라 지리산권까지 활동 폭이 넓어진 것 같아요.
올해 ‘작은변화지원센터’에서 ‘지리산활동가대회’할 때 윤주옥 선생님을 처음 만났어요. ‘지리산운동’을 함께 하자고 말하는 선생님의 말씀이 인상 깊었어요. 올해 다녀온 구례 탐방에서 지리산과 반달곰에 대해서 알게 되고, 지리산에 마음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나게 될 때마다 너무 좋았어요.
지금 저는 산청에 있지만 산 너머에 얼굴을 아는 누군가가 있다는 생각을 하니 다같이 뭔가를 하고 있음에 굉장히 든든하고 커다란 안정감으로 다가와요. 지리산 케이블카를 비롯해서 지리산의 이슈들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알게 되면서 지리산 운동이 저에게 새로운 주제가 됐어요.
Q. 앞으로 더 하고 싶은 활동이 있으세요?
‘함께평화’에서 하는 활동들이 있어요. 올해는 영화제와 평화 감수성 워크숍을 열었고, 일상적으로는 평화의 소녀상과 피해자 할머니 묘소를 관리하는 일을 하고 있어요. 이런 활동들은 앞으로도 유지될 것 같고요.
새로운 주제가 앞서 말한 지리산 운동이에요. 그간 ‘지리산사람들’ 중심으로 지리산 지역별 식생이나 주목 생장 모니터링을 하고 있었는데, 산청에서는 사람이 없어서 하동, 구례 분들이 산청권역까지 맡고 계셨다고 해요. 앞으로는 산청 단체들이 연계해서 산청권역 모니터링을 같이할 수도 있을 것 같고요. 케이블카 이슈도 단순 반대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지리산을 더 알게 되고 사랑할 수 있는 프로그램들을 통해서 이것을 왜 반대해야 하는지 많은 사람들이 느낄 수 있도록 하고 싶어요.
그리고 농사 규모를 줄이고 공부를 더 하고 싶어요. 지금까지는 퍼머컬처 같은 생태적 농사를 제대로 할 만큼의 여유가 없었거든요. 그런데 최근에 다큐멘터리 <위대한 작은 농장>, <타샤 튜더>를 보고, 영국 전원마을 토트네스에 관한 이야기도 들으면서 지역의 관계성, 지역 공동체 부분에 더 관심이 생겼고, 이 부분들을 앞으로 공부해 나가야 할 것 같아요.
마지막으로는 집을 많이 활용하고 싶어요. 제 나이가 더 많이 들면 여기에 혼자 살기는 어려울 것 같거든요. 시골생활에 관심있거나 공간이 필요한 사람이 저희 집을 잘 활용할 수 있도록 방법을 찾아보고 싶어요. 같이 농사일을 돕거나 해보고 싶은 일을 같이 하면서요.
Q. 하고싶은 활동을 위해서 햇살 스스로에게 어떤 것이 가장 필요하다고 생각하세요?
우선 관계가 중요한 것 같아요. 일단 관계가 맺어져야 상대방이 뭐가 필요한 지 알잖아요. 저는 지금 산청이라는 느슨한 공동체에 속해 있다고 생각해요. 실제로 제가 농사 일하다 다쳤을 때도 119보다 산청 분들이 더 빨리 병원에 도착해서 저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너무 감동적이었고 든든했거든요. 이렇게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과 서로 나눌 수 있는 관계를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런 생각을 많이 해요.
엄마가 된다는 건 내가 ‘여성’임을 깨닫는 일
Q. 산청에서 여성 모임을 만든 후기를 봤어요. 이 활동은 어떻게 시작하셨어요?
저는 농촌에 있는 여성들을 조직해서 여성 모임을 하고 싶었어요. 그러다 농민회에서 ‘작은변화 공모지원사업’을 알게 돼서 ‘산청군농민회 여성회원 타로 워크숍’을 기획했어요. 우선 농민회 회원을 대상으로 얼굴은 알지만 깊이 얘기 나눠본 적 없는 여성회원들 10명이서 시작했는데, 되게 좋았어요. 처음으로 마음 속 깊은 이야기들을 터놓고 이야기했고, 소통하는 기분을 느낀 모임이었거든요. 그런데 다들 처지가 다르다 보니 꾸준한 모임으로 이어지기는 쉽지가 않았어요. 농부, 농산물 판매, 학원 강사, 교사, 직장인까지 구성원이 다양했거든요.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코로나19도 왔고요. 정기 모임은 어려웠지만 그분들과는 끈끈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어요.
Q. 과거부터 여성에 대한 이슈를 개인적 과제로 가져오신 것 같아요. 여성활동은 어떤 마음으로 시작하게 되셨어요?
저는 결혼하는 과정에서 제가 ‘여성’이라는 걸 처음으로 자각하게 됐어요. 어린 시절엔 특별히 여성 차별을 느껴본 적이 없어요.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결혼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불합리함을 느끼고 나서 현실이 충격적으로 다가오더라고요. 임신을 하게 되면서 힘들어 하던 차에 남편이 ‘여성노동자회 부녀반’이라는 기혼 여성 모임을 소개해줬어요. 가보니 출산 경험이 많은 언니들도 있고, 저보다 더 어려운 상황에 있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엄마들 모임으로 만나서 밥도 먹고, 양육 팁을 공유하는 형태였는데, 다양한 사람들이 제 얘길 들어주니까 응어리가 풀어지더라고요. 그때 당시 남편은 밤낮으로 노동운동 하느라 바빠서 독박 육아에 답답하고 힘들었는데 부녀반 활동하면서 숨통이 트였어요. 저희 아이들이 어린이집 들어간 이후엔 상근자로 활동하게 됐고요.
Q. 여성노동자회 부녀반에선 어떤 일들을 맡으셨어요?
지역에서 활동들을 조직하는 지역 조직 사업이나 여성노동자 권리 교육, 양성평등 교육을 했고, 직장내 성차별이나 임금체불 같은 고용 문제에서 겪게 되는 어려움을 상담하고 해결을 지원하는 활동을 했어요. 상담도 교육도 말로 하는 일이어서 제가 잘할 수 있는 영역이었던 것 같아요.
그러다가 나중엔 단체 안에서 정당 활동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저는 경쟁이 힘들고 상처 주고받는 게 싫어서 정당 활동이 어렵더라고요. 정당 활동을 계속해 나가려면 지역구 선거도 필연적으로 나가야 해서 부담감이 정말 심했어요. 일찍부터 활동을 시작했기 때문에 연차가 많았지만 나이는 어렸던 거죠. 내 몸에 맞지 않는 무거운 짐들을 늘 지고 있는 것 같았어요. 거리를 두고 보니 이전 활동에서 답답함이나 어려움도 많았네요. 제가 남편 때문에 귀농했다고 이야기했지만, 사실은 ‘이 참에 도망가자’ 하는 저만의 이유도 있었어요.
Q. 유독 많은 활동을 해온 활동가들이 부담감 역시 크게 느끼는 것 같아요. 활동가로서 가장 원했던 변화는 어떤 것이었나요?
이 세상에 태어나서 제가 태어나기 전보다 세상이 좀 더 나아진다면 만족한다 생각했어요. 정말 조금이라도 세상이 나아지는 데 기여하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고, 우리 아이들이 지금보다 더 좋은 세상에서 살길 바랐어요. 지금은 산청에서 저만의 방식으로 기여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다름을 이해하는 방법
Q. 시골에서 성평등이나 성인지 감수성을 기대하기 어려운 때가 많은 것 같아요. 지역에서 성평등을 위한 활동은 무엇이 있을까요?
제가 여성 모임을 하고 싶었던 이유도 그런 부분 때문이었어요. 평소에 이야기가 통하는 사람들도 ‘여성’을 주제로 하면 이야기 나누기 쉽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함께평화’에서는 평화와 인권으로 활동 주제를 넓혀서 행사를 기획하고 있어요. 올해 여름 영화제에서도 성소수자와 그 양육자 가족의 이야기를 다룬 <너에게 가는 길>을 상영했거든요. 준비하면서 ‘누가 뭐라고 하면 어떡하지?’, ‘홍보가 많이 안 되면 어떡하지?’ 하는 불안감이 있었는데 그 행사에 참여했던 50대 남자 관객분도 눈물을 흘리셨어요. 이런 영화를 보게 해줘서 고맙다면서요.
그래서 저는 상대방을 ‘내가 아는 사람’으로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듣는 건 방송이나 매체를 통해서 보는 것과는 다른 거죠. <너에게 가는 길>에서 부모가 자녀의 성 정체성을 인정하게 되는 과정과 그 이후에 자녀의 행복에 대해 고민하게 되는 것처럼, 지역에서는 타인에 대해 판단하기 전에 관계를 맺어가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면 상대를 단순히 ‘성소수자’로 판단하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된 후에 관계를 시작한다면 더 다양하고 안전한 관계망이 생겨나지 않을까요? 저는 이런 방식의 관계 맺기 활동을 계속해 나가고 싶은데, 그러려면 제가 먼저 성에 대해서 더 공부해야 해요.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산청에서도 성 다양성 축제를 열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요?
Q. 영화 상영이나 교육 프로그램처럼 간접적인 경험을 통해 논의의 장을 만들고 사람들이 생각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 주는 일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까만 종이를 하얗게 칠하는 건 어렵지만, 각자의 색을 조금씩 희석하면서 만날 수 있는 접점을 만들 수 있다면 좋겠어요. 그러기 위해선 다양한 사람들이 더 많이 섞여야 하고요. 정색하고 싸우기보다 서로 좋은 관계를 맺어가면서 성평등 같은 주제에 대해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기회를 더 만들어야 하는 거죠. 이것도 쉽지 않지만 이것 말고 별다른 방법도 없는 것 같아요. 그런 의미에서 교육이나 영화 상영이 혐오나 차별의 정의, 기준에 대해서 알려줄 수 있는 좋은 기회인 것 같아요.
Q. 나와 가치관이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면서 나아가는 과정이 쉽지 않잖아요. 햇살은 그런 상황을 어떻게 헤쳐 가시나요?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 활동으로 이어 나가는 힘은 어디서 나오나요?
공동체의 장(場)에서 누구나 자기 표현을 하는 건 괜찮다고 생각해요. 성향이나 정치적 입장이 다를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혐오와 차별의 글을 쓰거나 말을 하고, 욕설하거나 비난한다면 그건 잘못됐다고 생각해요. 장이라는 건 다양한 사람들이 모두 함께 있어야 하잖아요. 한쪽으로만 쏠려도 안 되고요. 그런 사람을 만나면 혐오와 차별의 방식으로는 우리의 공동체가 계속해 나갈 수 없다는 걸 따끔하게 알려주고 대화를 통해서 풀어내고 싶어요.
저와 정치적 입장이 다른 사람들이 만약 저와 같은 경험을 했더라면 그렇게 달라지지 않았을 거잖아요. 그러니까 한 사람의 성향은 어쩔 수 없는 환경이나 조건이 작용한 것이지, 그 사람이 선택한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 사실을 인정하면서 변화할 수 있다고 믿는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그 사람의 환경과 경험이 나와 달랐을 뿐, 내가 그 사람을 통째로 바꿀 수는 없다는 걸 담담하게 인정하는 거죠. 결국 사람은 다른 경험을 하거나 상황이 달라지면 변하거든요. 타인의 문제였던 일이 내 문제가 되면 변하게 되는 것처럼요. 담담하게 바라보면 작은 희망이 생겨요.
다른 이에게 햇살이 되는 사람
Q. 스스로를 ‘연결술사’라고 정의하신 걸 봤어요. 햇살에게 연결은 어떤 의미인가요?
연결술사는 산청의 한 친구가 저를 표현해 준 말인데요. 처음 들은 말인데 그 단어가 너무 좋아서 쓰기 시작했어요. 저는 어떤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이 무엇이 필요할까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그 사람에게 필요한 정보나 사람을 연결시키는 일을 좋아해요. 제가 귀농귀촌 상담사로 일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연결시키기도 했고, 저 역시 시골 이주 후에 도움을 참 많이 받았어요. 그래서 어떤 것과 어떤 것을 연결했을 때 그 사람에게 중요한 무언가가 해결되는 걸 보면 저는 크게 보람을 느껴요. 그러고 보면 결국 사람이 가장 중요한 것 같아요. 어떤 것도 다 사람에게서 나오기 때문에.
Q. 만약 엄마, 아내, 농부, 활동가가 아닌 다른 삶을 산다면 어떤 삶을 살고 싶나요?
이 질문을 사전에 받았을 때 너무 좋았어요. 생각만 해도 행복해요. 떠올려 보니 스무 살 때 영어로 자기 소개를 하는 시간에 저는 여행자가 되고 싶다고 했어요. 그때는 1980년대니까 여행이라는 개념이 익숙하지 않을 때거든요. 그래서 사람들이 막 웃었어요. 어떻게 그게 가능하냐, 부자 남편을 만나야 하는 것 아니냐, 하면서요. 아무튼 새로운 곳에 가서 새로운 사람 만나는 게 되게 재미있을 것 같아요. 해외가 아니라도 사람을 만나러 여기저기 다닐 것 같아요.
우리 쉬엄쉬엄 하자
Q. 마지막 질문입니다. 지리산권에서 활동하는 활동가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해주고 싶나요?
“자기 몸 잘 돌보면서 일하자”, “너무 달리지 말자”, “최선을 다하면 죽는다”, “너무 욕심 내지 말자” 이런 얘기하고 싶어요. 이건 과거의 나에게 해주고 싶었던 말이기도 해요. 그래서 지금은 내가 하고 싶은 활동을 할 수 있는 만큼 하려고 해요. 굉장히 가볍고 즐겁게. 소소하게 지내는 게 더 행복하고 귀한 시간인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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