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에 사는 사람들 모두가 너희들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여길 수 있도록 활동할 거야. 너와 내가 보이지 않는 끈으로 이어져 있다고 믿을 거야.”
윤주옥‧결, 『오삼으로부터』, 출판사 니은기역
문홍현경이 운영하는 출판사, 니은기역의 책은 어딘가 허전하다. 코팅이 되지 않은 책 표지에, 책 날개도 없다. 책을 펼쳐보았더니 글씨가 어딘가 흐릿해 보이고, 글 사이에 삽입된 흑백사진은 단순한 상황과 이미지만을 전달한다. 하지만 니은기역의 책을 읽다 보면 날것의 물성에 숨겨진 뜻을 알게 된다. 이것이 지구와 가장 가까운 디자인이라는 것을.
무언가를 시작하는 일에는 용기가 필요하지만, 시작한 일을 꾸준히 이어나가기 위해선 끈기가 필요하다. 문홍현경은 그런 면에서 용기와 끈기를 모두 지닌 사람이다. 지역의 어린 사람들과 함께 군청에 찾아가 문제를 해결해달라 외치거나(지구를 위한 작은 발걸음), 지역 교사들과 연계해 생태텃밭 수업을 열고(『우당탕탕 텃밭교실』), 어린 사람들에게 전하는 소농들의 편지를 책으로 엮고(『살자편지』), 한 반달곰이 인간에게 전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담은 책을 만들기도 한다(『오삼으로부터』). 이 모든 활동은 세상으로부터 부당하게 소외된 존재들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미래세대와 함께하기 위해 그가 용기 내어 끈기로 이어온 일들이다. 니은기역의 소개는 이렇게 시작한다. ‘책 짓고, 농사 짓고, 기후악당에겐 짖어요!’ 문홍현경이 덜 짖고 더 많이 짓는 세상을 꿈꿔본다.
구구단 청소년출판팀이 책 『집에서 쫓겨났어』를 준비하며 함께한 작업
Q. 지난주까지 『집에서 쫓겨났어』를 편집하고 출간하셨다고 들었어요. 올해도 많은 일을 하고 계신데, 먼저 니은기역이라는 출판사를 어떻게 시작하시게 됐는지 말씀해주세요.
저는 구례로 이주하기 전부터 편집자 일을 하고 있었어요. 전 직장을 퇴사하고 이주를 생각하고 있을 때, 지역 출판 활동이 무엇이 있을까 검색해보니 구례 ‘하사마을’에 할머니들 생애사 작업을 하고 있더라고요. 때마침 그 협동조합에서 일꾼을 한 명 모집하고 있어서 마을살이를 경험해 볼 겸 지원했어요. 책 만드는 일은 마무리할 때 출판사가 필요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출판사를 열게 됐어요. (웃음) 이전에도 환경이나 생태 관련한 이야기나 마을주민의 생애사 작업은 해보고 싶었는데 때가 잘 맞아떨어진 것 같아요.
Q. ‘필요해서 그냥 만들었다’는 이야기로 들려서 재밌어요. (웃음) ‘니은기역’이라는 이름에는 어떤 의미가 있나요?
‘니은기역’이라는 출판사명은 이름에 큰 힘을 주고 싶지 않아서 가볍게 생각해본 거예요. 나는 어떤 출판사를 만들고 싶은지, 내가 만들고 싶은 책이 무엇인지 생각해 봤더니 생태 문명으로 돌아가자는 얘기를 담고 싶었고, 전문가 영역의 글보다는 농부나 생활 공예가들, 어쨌든 몸을 사용하시는 분의 글이 들어가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처음엔 이름을 ‘큰 따옴표’나 ‘작은 따옴표’로 하고 싶었는데, 이미 하고 계신 분이 있더라고요. 그래서 다시 찾아보니 세로쓰기를 할 때 낫표(「 」)를 쓰는 걸 보고 니은기역을 생각했고, 니은-기역으로 자음 순서가 바뀐 것은 어떤 틀을 부수고 순서를 바꾼다는, 네모난 틀을 깨뜨린다는 가벼운 의미로 시작해봤어요.
생명의 편에 서는 청소년들과 함께
책 『집에서 쫓겨났어』 함께 만든 구구단 청소년출판팀 친구들과 탐방하는 모습
Q. 니은기역 출판사의 책 중에 『살자 편지』, 『벗자 편지』, 그리고 올해 출간된 반달가슴곰 KM-53의 이야기 『오삼으로부터』도 기억에 남아요. 그전에는 기록집 작업도 많이 하셨던 것 같고요. 먼저 지난주에 따끈하게 출간된 『집에서 쫓겨났어』를 소개해주실 수 있나요?
『집에서 쫓겨났어』는 구례의 중학생 세 명과 같이 활동하며 만든 기록물인데요. 구례의 지리산 골프장 예정지인 숲을 둘러보고 아이들이 만들고 싶은 책을 이야기해봤어요. 골프장 예정지에서 보고 온 것을 큰 종이에 쓰고 어떤 상황인지 이야기 나눈 다음 그곳에서 살아가는 생명체, 마을 분들의 심정이 어떤 지를 쓰다 보니 구상이 잡혔던 책이고요. 숲에 살고 있는 멸종위기종인 수달이나 팔색조, 금불초 같은 생명들이 어떤 심정일지를 대변해 봤을 때 “우리는 쫓겨났어!”라고 말하고 싶을 것 같다는 이야기를 했어요.
Q. 청소년들과 내 지역의 생태 파괴현장을 둘러보면서 비인간생명들의 마음을 느껴보는 작업이었을 것 같아요. 『집에서 쫓겨났어』 외에도 어린이, 청소년, 고령 여성들과 함께 했던 작업들이 많은데, 니은기역에 이런 작업물이 유독 많은 이유가 있을까요?
어르신들과의 작업은 저도 예상치 못했는데 지역에서 활동가로 살다 보니 종종 연결이 됐어요. 저도 마을에 왔으면 마을에서 살고 계신 분들과 얘기를 나누는 게 좋겠다, 삶을 배우고 싶다 생각해서 이주 초반에는 주로 어르신들의 작업을 하게 됐어요.
그리고 아이들과 연결된 건, 제가 마을 학교를 연 적이 있는데요. 매주 토요일마다 아이들과 놀다 보니까 아이들의 감각은 정말 경계가 없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예를 들면 기후위기나 생태 문제에 대해서 어른들과 얘기하다 보면 무엇이 더 나은 방법인지, 경제성장에 도움은 되는지 하나하나 다 따져보게 되잖아요. 그런데 아이들은 우선 생명의 편에 서려고 하는 것 같아요. 이익을 먼저 계산하지 않아요. 그래서 아이들이 아직 생명의 편에 서 있을 때 기후위기 이야기를 더 많이 나누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고학년만 돼도 여기에 반감을 갖기 시작하거든요. “왜 채식을 해야 돼요?” 이렇게 말하는 친구들이 많아지는데, 어렸을 때부터 숲에 자주 가보고, 농사, 텃밭, 작은 풀벌레도 접해보면 조금 반감이 덜하지 않을까 해서 이런 얘기들을 어린이, 청소년들에게 계속 전달하려고 했던 것 같아요.
Q. 청소년들과 학교에서 생태텃밭 교육도 하셨죠. 여기서도 어떻게 의미를 전달할 수 있을지 고민이 많으셨을 것 같아요.
맞아요. 아이들은 뭔가를 시작할 때 우선 재미있어야 하잖아요. 너무 교훈적이면 오히려 반감도 심해지니까요. 그래도 다른 지역에서 생태텃밭 수업 경험이 많은 상글, 동근이 있어서 많이 배웠어요. 아이들과 밭에 가면 감자 심을 때도 “어느 방향으로 심어요?”부터 물어보거든요. 싹이 올라올 땐 어떤 싹이 내가 심은 작물이고 어떤 풀을 뽑아줘야 하는지 구분이 어려워서 차근차근 같이 배우는 시간이었어요.
콩을 심을 땐 같은 콩인데도 까치콩, 밤콩, 완두콩, 강낭콩이 모두 생김새가 다르듯이 우리도 다 달라도 괜찮다는 얘기를 편하게 주고받으려고 했던 것 같아요. ‘이래야만 해!’ ‘이게 맞아!’ 라고 말하기보다 눈으로 볼 수 있는 상황을 보여주고 아이들이 느끼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멤버들 안에서 많은 이야기를 했어요.
Q. 텃밭 교육을 하고 나서 아이들과 지역에 어떤 변화가 있었나요?
처음엔 저도 많이 겁을 먹었어요. 제 개인적인 텃밭 일과 아이들과 하는 텃밭수업은 완전 다르잖아요. 게다가 학교와 어떻게 연결하고 소통할지도 서툴렀고요. 그런데 수업이 끝나고 이 책으로 나오니까 다른 학교, 다른 지역에서 저희에게 연락을 주셔서 책을 구하고 싶다거나 우리도 텃밭 수업을 해보고 싶다 말하는 선생님이 계셨어요. 실제로 함양에서는 생태텃밭 수업으로 이어지기도 했고요.
저희가 했던 생태텃밭 수업이 단순히 작업으로 끝나지 않고 기록물로 남았기 때문에 더 큰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해요. 『우당탕탕 텃밭 수업』 은 ‘저희가 이렇게나 잘했어요’가 아니라 ‘저희도 이렇게 우당탕탕 진행했지만 텃밭수업을 시작하고 싶은 사람들은 이렇게 해보시면 어때요?’ 라고 마중물로서 쓰이길 바라고 만든 책이거든요. 책에도 텃밭 수업이 쉽지 않은 걸 알지만 우리가 어떻게 시작을 어떻게 했고, 어떤 과정들을 거쳤고, 어떤 준비물과 어떤 마음가짐이 필요했는지를 모두 써 놨어요. 어려움과 두려움까지 모두 들어있는 텃밭교육 안내서를 만들고 싶었어요.
Q. 책이 나왔을 때 수업에 참가했던 아이들도 좋아했을 것 같아요. 반응이 어땠나요?
아이들 너무 좋아했죠. 사진이 많았으면 더 아이들이 좋아했을 텐데… 그래도 텃밭 교육할 때면 아이들이 너무 즐거워해줬고 기대해 줬어요. 저희가 아이들에게 어떻게 메세지를 전달해야 하지 걱정해서 힘든 것뿐이지, 아이들은 너무 재밌게 함께해줘서 고마웠어요.
지구와 가까운 출판사
마을학교 손모내기 때 활동 모습
Q. 니은기역 출판사에서는 종이와 잉크, 글꼴 등도 최대한 친환경적으로 하는 방식을 고민하셨던 것 같아요. 혼자 고민하는 과정이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어떠셨어요?
어떤 물성을 가진 책이 나왔을 때, 출판사, 제작자를 비롯한 출판업 관계자들조차 ‘잘 나온 책’과 ‘못 나온 책’에 대한 구분된 시선이 있잖아요. 예를 들면 책 날개가 있어야 만듦새가 있어 보이고, 표지 포장이 잘 되어있어야 색깔도 선명하고 다채롭죠. 디자인 요소도 사람들이 책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더라고요.
그런데 저는 이런 요소들을 조금 줄여서 생태적인, 친환경적인 출판을 하고 싶었던 거죠. 책 날개를 만들지 않는 게 종이를 훨씬 덜 쓸 수 있고, 표지를 코팅하지 않으면 나중에 재활용하기 쉽거든요. 그리고 콩기름 잉크를 쓰면 독자도 편할 뿐 아니라 인쇄 작업자들이 편하시다고 들었어요. 항상 인쇄기를 돌리시는 인쇄소 작업자분들이 석유화학 잉크 냄새를 계속 맡고 있으면 몸에 좋지 않거든요. 일상에서도 신문이나 잡지에서 석유화학 잉크 향이 강하게 묻어날 때가 있잖아요.
그러니까, 어떤 물성에 대한 독자들의 미적 판단 기준, 유통 과정을 간소화하려는 욕구, 콩기름 잉크 인쇄를 사용했을 때 옅은 색감에 대한 걱정, 친환경 출판의 비싼 가격 같은 지점들 때문에 생태적인 출간이 좀 더 어려워진 상황인 것 같아요. 저 역시 ‘이런 것까지 다 고려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그래도 독립 출판사니까 다르게 내보고 싶다는 생각에 친환경 출판으로 해보고 있어요.
물론 책의 독자 층을 고려해야 해요. 만약 큰 글씨로 나와야 하는 어르신들의 책인데 흐릿한 에코 글꼴을 쓰면 안 되잖아요. 제가 낼 수 있는 책은 친환경 방식을 선택해도 무리가 없는 책이니 한 번 해보자고 생각했어요.
Q. 작은변화지원센터와 함께 ‘지리산이야기포럼’에서도 친환경 출판 관련한 이야기를 나눠주셨다고 들었어요.
네. 2021년에 서점이나 디자이너, 편집자, 작가처럼 출판업계에 계신 분들 대상으로 <기후위기시대, 지역 책방과 출판인이 고민하는 책 생태계>라는 주제의 지리산이야기포럼을 열었어요. 모두를 구례로 모실 수는 없으니 사전에 메일로 혹시 생태적인 출판 구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시도해본 경험이나 노하우가 있는지, 이와 관련해서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를 물었어요. 그랬더니 대부분 ‘하고는 싶은데 반품이 많아지기 때문에 하기 어렵다’고 답변 주셨어요. 표지 코팅을 하지 않으면 살짝만 까져도 바로 반품을 신청하니 반품율이 훨씬 높아지거든요. 재생지를 사용하는 문제도 누런 종이를 싫어하는 독자들이 분명히 있다는 걸 염두에 둘 수밖에 없고요. 그래서 이 문제는 유통 구조뿐만 아니라 서점의 인식과 독자들의 인식이 모두 바뀌지 않으면 안 되는, 쉽지 않은 문제라고 생각해요.
Q. 업계와 독자의 인식이 모두 변해야 하는 상황이 안타까워요. 그럼에도 편집자라면 포기할 수 없는 예쁨이나 디자인 요소가 있을 것 같아요. (웃음) 책에서 디자인이 중요한 이유가 책이 예뻐야 많이 읽기 때문이잖아요. 그래야 내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할 수 있고요. 이 지점은 어떻게 타협하고 계신가요?
맞아요. 포럼에 참가하셨던 디자이너 분도 생태적인 디자인을 시도했다가 의뢰인이 원하는 디자인이 나오지 않아 힘들었다는 이야기를 해주셨어요. 지금 그분은 의뢰인이 원하는 대로 맞춰서 디자인하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그 마음은 저도 이해가 돼요. 제가 『오삼으로부터』 낼 때도 책 날개를 넣었는데, 이때는 물성을 생각했다기보다 ‘우수 출판 콘텐츠 지원 사업 선정’ 로고를 꼭 넣어야 해서였어요. 그런데 책 날개를 넣으니 사람들이 책이 잘 나왔다고 좋아하시더라고요.
그리고 인쇄를 마치고 인쇄소에서 온 책을 배송 받으면 운송 과정에서 시달리면서 책등이 까져 있거나 상한 경우가 많아요. 그걸 보고 있으면 ‘이렇게 해서 반품이 될 것 같으면 차라리 코팅을 하는 게 나은가’ 하는 고민도 많아져요. 디자인과 예쁨을 생각하면 참 고민이 많이 되죠.
Q. 한 가지 딜레마는 ‘친환경은 비싸다’는 거예요. 유기농 식재료, 의류 할 것 없이 지구와 가까운 재료일수록 비싸지는 딜레마가 있어요. 출판계에서는 어떤가요?
맞아요. 맞아요. 많은 사람들이 재생지가 싸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거든요. 재생지도 종류와 가격이 천차만별이고, 콩기름 잉크도 일반 잉크보다 비싸요. 제가 프리랜서로 일하는 출판사와 작업할 때도 친환경으로 해보자고 제안 드려봤는데 단가가 안 맞아서 선택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저는 출판문화산업진흥원 같은 곳에서 이런 구조를 바꿔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한 번은 인쇄소에 전화해서 콩기름 잉크를 쓰려면 왜 대량 인쇄만 가능한지, 왜 이렇게 비싼 지 물어봤어요. 그랬더니 찾는 사람이 없어서 그렇다 하셨어요. 기계를 많이 들여올 수도 없을뿐더러 일단 콩기름 잉크로 돌린 인쇄기는 계속 콩기름 잉크로만 써야 하는데 수요가 별로 없으니 하기 어렵다고요.
또 출판계에 문의해 보니 콩기름 잉크가 비싸서 안 쓴다고 하는 거예요. 이런 문제는 개인이 바꾸기는 어려우니 출판문화산업진흥원처럼 큰 조직이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닐까 싶어요. 다행히 출판계에서 친환경 이슈, 탄소배출 관련 문제를 주제로 포럼을 열기도 하는데, 이러한 토론 자리와 같이 정책적인 변화가 뒷받침되어야 할 것 같아요.
Q. 퀄리티의 좋고 나쁨을 떠나서 친환경 출판도 수요가 많아야 단가가 낮아진다는 자본 시스템에 충실하다는 거네요. 그와 동시에 만든 책들도 수없이 버려지기도 하죠. 개인적으로 책이나 자료집을 만들 때 이렇게 종이를 써도 되는 지에 대한 회의감이 자주 드는데, 이와 관련해서 현경님이 출판 업계와 창작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면요?
제가 콩기름 잉크와 재생종이를 사용하자는 이야기를 블로그에 올리면서 ‘가장 중요한 건 나무를 베서 책이 나올 만큼 가치 있는 이야기들을 전달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 그래서 책을 낼 때 이게 꼭 세상에 나와야 하는지 생각을 해보고 내자.’ 이런 얘기도 같이 했어요.
그리고 요즘은 책도 하나의 소비재잖아요. 만약 모든 출판사가 책 인쇄 부수의 상한선을 정해 놓는다면 어떨까요? 구매하고 읽지 않는 책을 집에 쌓아두는 게 아니라 도서관, 공공 건물처럼 누구든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곳에서 책을 돌려볼 수 있다면 책의 가치도 전달되고 생태계에도 덜 부담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요
Q. ‘이 책은 출판해도 된다’는 공공 가이드라인을 정하는 건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공공 시스템을 구축하는 일이 정말 필요하겠어요.
그렇죠. 그렇다고 책이 안 나오면 그것도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생태적인 활동을 시작하게 된 것도 책을 읽어서 가능했던 것이고, 친환경으로 하자고 한 극단으로 가버리면 안 되잖아요. 극단적 논리는 피하되 계속해서 절충안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과정이 가장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Q. 과거에 ‘나는 언젠가 세상에 꼭 나와야만 하는 책을 편집하고 있을 것이다.’ 라고 쓰신 글을 봤어요. 지금까지 돌아봤을 때 여전히 유효한 이야기인가요?
다행히 멀지 않은 것 같아요. 니은기역 출판사로 내는 책도 그렇고, 다른 출판사와 함께 작업할 때도 ‘이게 왜 굳이 나무를 베서 나와야 하지?’ 라는 생각을 항상 하게 되더라고요. 저는 돈이 되더라도 제 기준에 부합하지 않으면 저는 못한다 말씀을 드리려고 노력해왔어요. 다행히 멀리 가진 않았다! (웃음)
아이들에게 안전한 길은 모두에게 안전하다
2021 차 없는 거리를 만든 어린이 기후정의 활동
Q. 구례 이주 후에 ‘지구를 위한 작은 발걸음’이라는 활동을 하고 계세요. 이 활동에 대해서 조금 더 설명해 주실 수 있나요?
이제 시작한 지 3년 정도 된 단체인데요. 이 활동은 구례에 있는 활동가와 선생님 몇 명이 모여서 지구를 위해 할 수 있는 개인의 실천을 담은 캠페인 활동으로 시작했어요. 그리고 최근에는 조금 더 정책적인 변화를 목표로 활동하고 있어요.
정책을 고민하다 보니 주민들의 피부에 와닿으면서 관에 제안할 수 있는 문제가 교통 분야였어요. 시골에는 도보가 많지 않고, 자가용이 없으면 한 시간에 한 대 올까 말까 하는 버스를 기다려야 하잖아요. 그래서 보행자 중심으로 교통 체계가 바뀌도록, 비단 사람만이 아니라 동식물들에게도 안전한 교통이 될 수 있도록 제안해보고 싶어서 구례의 길을 조사하기 시작했어요. 우선, 보행자 사고가 많이 났던 세 구역을 조사해서 거기가 어떤 상황인지, 뭐가 위험하고 왜 위험한지를 정리해서 군에 제안드렸죠.
이런 취지로 시작해서 이후에는 아이들과 구례의 길을 함께 조사하고 문제점도 파악해보는 교육은 어떨까 해서 읍 소재지 초등학교 4학년 아이들과 같이 학교가 속해 있는 번화가를 조사했어요. 그곳이 학교나 가게, 도서관도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다니는 길인데 길 한 쪽엔 항상 차들이 주차되어 있거든요. 그러니 아이들이 차도로 걸어야 할 때가 많았어요.
이렇게 아이들과 조사한 내용을 토대로 군수님을 모시고 얘기를 드렸죠. 아이들이 “여기가 위험해요.” “지구를 위해서 이렇게 했으면 좋겠어요.” 얘기를 드렸더니 군에서는 당장 탈탄소 교통 정책으로의 전환은 어렵지만, 보행자 안전망 정도는 설치가 됐어요. 그런데 거기서 끝나니까 아쉽잖아요. 그 이후에 환경교통과로 찾아가서 아이들이 안전하고 보행할 수 있게 이 거리만이라도 ‘차 없는 거리’를 해보면 어떨지 이야기했죠. 실제로 지구의 날에 ‘차 없는 거리’ 행사를 열었는데 그때 아이들이 엄청 즐거워했어요. 어떤 아이는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한 행복을 느꼈다.”는 표현까지 했어요.
꾸준한 행사로 이어지진 못했지만, 그 다음 해엔 길가의 쓰레기를 싣고 군청으로 가서 저희 이야기를 들어달라 말하기도 했고, 작년에는 아이들이 이 활동에 더 쉽게 다가오면 좋겠다는 생각에 아이들의 시, 노래, 편지를 써서 발표하고 노래도 부르는 행사로 진행됐어요. 백 명이 넘는 아이들이 노래하고 소리 지르는 장면이 정말 감동적이었어요.
Q. 선생님들의 공감대 형성도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민간단체와 학교가 어떻게 활동을 같이할 수 있었나요?
다행히 구례에는 생태, 환경에 관심 많은 선생님들이 계셨어요. 덕분에 지구의 날 행사가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고 학교 수업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신경을 써 주셨어요. 거리의 쓰레기를 줍고 나면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나도 쓰레기를 버리지 말아야지’ 라고 느낄 수 있도록 수업 커리큘럼을 계획해 주셨는데, 정말 이런 선생님들이 계셔서 가능한 활동이었던 것 같아요.
불완전해도 괜찮아
Q. ‘기후위기나 생태 문제에 대해서 책으로 접했다’고 말씀해 주셨어요. 이러한 사회 문제들에 관심 갖게 된 계기가 있으셨나요?
저도 이전엔 육식을 많이 좋아했는데 대학 도서관에서 이것저것 잡히는 대로 책을 읽으면서 자연스레 채식을 지향하게 됐어요.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구나, 그럼 나도 시작해볼까?’ 하면서요. 그러면서 동물권에도 관심 갖게 되고, 특히 아이 낳고 나서는 ‘아이에게 어떤 걸 먹여야 할까?’ ‘어떤 걸 줘야 할까?’ 생각하다 보니 그 범위가 더 확장됐어요. 생태 주제의 책을 더 많이 읽게 되면서 비슷한 생각을 가진 친구들도 더 생겼고요.
Q. 요즘 기후정의 활동가, 생태 활동가는 허탈감이나 좌절감을 많이 느낄 것 같아요. 현경님은 이에 대해서 어떻게 느끼고 계신가요?
맞아요. 맞아요. 구례 국궁장 확장 공사로 봉성산이 파헤쳐질 때는 저희 활동을 반대하시는 분들과 직접 몸이 부딪히는 상황도 있었어요. 골프장 이슈 때도 거기 계셨던 작업자나 연관된 사람들의 적대적인 태도를 대면하면 무섭기도 해요. 활동하면서 제 주변인들에게 피해가 갈까봐 몸을 사리게 되는 경우도 있고요.
그런데 이렇게 무서운 상황보다도 제가 제일 힘들었던 건 ‘이제 다 끝난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예요. 이제 안 바뀔 것 같아, 뭘 해도 지구는 다 이제 힘들어졌다,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그때가 제일 힘들고 아무것도 하기 싫어져요.
Q. 그럴 때 회복하는 현경 님만의 방식이 있나요?
우울해지면 그냥 햇빛 받으러 나가요. 그러면 조금 나아지더라고요. 신기하게 햇빛 받고 노래 듣고 책 읽다 보면 괜찮아지고… 그리고 제가 밖에 잘 나가지 않는 편인데, 활동이 있으면 나가야 하잖아요. 나가기 힘든 마음을 억누르고 나가보면 친구들의 활동과 이야기가 너무 힘이 돼요. 그런 날엔 ‘맞아, 변화가 크게 보이지 않아도 작게 계속해 나가는 거지 뭐.’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Q. 기후위기를 마주할 때 개인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어떤 분은 이런 이야기를 하세요. “그러면 너는 택배도 안 시키고 일회용품도 안 쓰고 사니?” 근데 그렇게 완벽한 사람은 없잖아요. 하지만 완벽하지 않다고 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그것도 방임일 수 있죠. 그래서 우리가 다 불완전하다는 걸 인정하고, 한쪽에서 조금 에너지를 많이 썼다면 다른 쪽에서 줄이면 된다고 생각해요. 저 스스로도 그렇게 물어보고 대답하면서 제가 무너지지 않으려고 해요.
개인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가능하면 채식하려고 노력하는 거예요. 저도 육식을 좋아했기 때문에 한 번에 확 끊어버리는 건 쉽지 않잖아요. 그래서 연중 15일 정도는 먹고 싶은 게 있다면 편하게 먹자는 마인드로 실천하고 있어요. 또 가능하면 일회용품 안 쓰고, 만약 쓰더라도 다른 부분에서 줄이고요. 완벽하지 않더라도 밸런스를 맞추려고 노력하는 것이 개인의 실천을 이어가는 데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2023 지구의날 어린이기후정의행동 때 '지금 당장 시작해' 노래 함께 부르고 율동하는 모습
자급은 건강한 공동체로부터
Q. 생태적인 삶, 지속 가능한 삶을 위해서 ‘자급’을 키워드로 뽑아주신 걸 봤어요. 현경 님이 생각하는 자급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자급은 의식주 전부를 혼자서만 해결한다는 의미는 아닌 것 같아요. 오히려 자급을 위해서는 여러 사람이 같이 있어야만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먹거리를 기를 때도 내가 모든 종류의 작물을 다 기를 수 없으니 서로 나눠서 길러 먹고, 또 생산물을 공유하거나 사고 팔 수 있는 지역 내 공동체가 있어야 해요. 거기에 거대한 자본의 힘을 빌리지 않으면 더 좋고요. 너무 먼 곳에서 착취가 이루어지지 않게 공동체의 구조를 만드는 것이 가장 자급에 가까운 형태가 아닐까 생각해요.
Q. 자급을 위해 내딛어야 하는 첫 번째 발걸음으로 어떤 일을 제안할 수 있을까요?
일단 거대한 흐름에서 빠져나와야 한다. 내가 하는 노동이 적어도 뭘 위해서 하고 있는 지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기업에서 일하다 보면 결과물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를 때가 있고, 그 결과물이 나오기까지 착취되는 대상은 전혀 안 보이는 구조잖아요. 저 역시 도시에서 누군가의 노동으로 만든 것을 사 먹을 때 위안을 얻곤 했는데, 이것을 너무 당연하고 편한 것으로 느끼는 것에 경계심을 갖고 싶어서 구례로 오게 됐거든요. 소비나 편리함에서 조금 멀어지는 일이 자급의 시작이라고 생각해요.
초록초록한 세상을 위한 작은 발걸음
Q. 현경님의 일과 활동을 지속할 수 있게 해주는 동력은 어디서 얻으세요?
동력은 ‘그냥 아무것도 안 하면 안 될 것 같다’는 마음에서 얻어요. 그리고 같이 활동하는 친구들에게 힘을 얻고요. 변화가 전혀 보이지 않을 때도 있는데 그럴 땐 변화하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마음을 가져요. 마음을 굳게 먹고 하는 것보다 하나씩 천천히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하자고 생각하고 있어요.
Q. 활동가로 활동하면서 가장 좋은 점은 무엇인가요?
세상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는 마음이요. 실제로 도움이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나은 활동을 하고 있다는 마음이 들 때 보람을 느껴요. 내가 좋다고 믿는 가치를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고 나눌 수 있을 때 가장 행복해요. 사실 타인을 변화시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잖아요. 그런데 활동하면서 우선 제가 초록초록하게 변하고 다른 사람들도 조금씩 초록색 물이 들어가는 걸 보면 이런 활동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Q. 앞으로 어떤 활동을 계획하고 계신가요?
출판사는 단순히 책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회계나 마케팅, 다양한 서류 작업까지 다양한 일이 있기 때문에 혼자서 이걸 다 하려다 보니 힘에 부쳤어요. 책을 내면 이 책이 잘 알려질 수 있게 해야 하는데 그게 저에게는 참 어렵고 회계, 정산이나 포장, 배송 같은 일도 해야 하니 스트레스를 많아 받아서 사실 폐업까지도 고려했어요. 하지만 만약 계속하게 된다면 대중적으로 잘 이야기되지 않는 지방의 일들이나 기후위기, 생태 이야기, 커다란 장에서 나오기 어려운 이야기들을 저는 계속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출판 이외의 활동에서는 내년 지구의 날 행사를 준비하고 있어요. 최근에 구례에 청소년 활동을 함께하고 싶은 친구들이 이주해오면서 반드시 제가 없더라도 아이들과 마을 주민, 학교가 서로 연결될 수 있는 바탕을 깔아 놓고 싶어요. 계속해서 아이들과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지면 좋겠고, 지금은 주로 초등학생들과 활동하는데 앞으로는 중학교, 고등학교 청소년과도 함께 해보고 싶어요.
#구례 #전남 #지리산 #문홍현경 #니은기역 #지구를위한작은발걸음
#변화를만드는사람들 #피플포체인지 #브라이언임팩트 #지리산이음
글쓴이 : 승현
지리산 귀촌 6년차, 세상의 본질에 대한 호기심을 동력삼아 시골에서 살고 있습니다. 내 주변 존재들의 이야기를 더 많이 알리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지리산 귀촌인 인터뷰집 《어디에나 우리가》를 썼습니다.
문홍현경이 운영하는 출판사, 니은기역의 책은 어딘가 허전하다. 코팅이 되지 않은 책 표지에, 책 날개도 없다. 책을 펼쳐보았더니 글씨가 어딘가 흐릿해 보이고, 글 사이에 삽입된 흑백사진은 단순한 상황과 이미지만을 전달한다. 하지만 니은기역의 책을 읽다 보면 날것의 물성에 숨겨진 뜻을 알게 된다. 이것이 지구와 가장 가까운 디자인이라는 것을.
무언가를 시작하는 일에는 용기가 필요하지만, 시작한 일을 꾸준히 이어나가기 위해선 끈기가 필요하다. 문홍현경은 그런 면에서 용기와 끈기를 모두 지닌 사람이다. 지역의 어린 사람들과 함께 군청에 찾아가 문제를 해결해달라 외치거나(지구를 위한 작은 발걸음), 지역 교사들과 연계해 생태텃밭 수업을 열고(『우당탕탕 텃밭교실』), 어린 사람들에게 전하는 소농들의 편지를 책으로 엮고(『살자편지』), 한 반달곰이 인간에게 전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담은 책을 만들기도 한다(『오삼으로부터』). 이 모든 활동은 세상으로부터 부당하게 소외된 존재들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미래세대와 함께하기 위해 그가 용기 내어 끈기로 이어온 일들이다. 니은기역의 소개는 이렇게 시작한다. ‘책 짓고, 농사 짓고, 기후악당에겐 짖어요!’ 문홍현경이 덜 짖고 더 많이 짓는 세상을 꿈꿔본다.
구구단 청소년출판팀이 책 『집에서 쫓겨났어』를 준비하며 함께한 작업
Q. 지난주까지 『집에서 쫓겨났어』를 편집하고 출간하셨다고 들었어요. 올해도 많은 일을 하고 계신데, 먼저 니은기역이라는 출판사를 어떻게 시작하시게 됐는지 말씀해주세요.
저는 구례로 이주하기 전부터 편집자 일을 하고 있었어요. 전 직장을 퇴사하고 이주를 생각하고 있을 때, 지역 출판 활동이 무엇이 있을까 검색해보니 구례 ‘하사마을’에 할머니들 생애사 작업을 하고 있더라고요. 때마침 그 협동조합에서 일꾼을 한 명 모집하고 있어서 마을살이를 경험해 볼 겸 지원했어요. 책 만드는 일은 마무리할 때 출판사가 필요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출판사를 열게 됐어요. (웃음) 이전에도 환경이나 생태 관련한 이야기나 마을주민의 생애사 작업은 해보고 싶었는데 때가 잘 맞아떨어진 것 같아요.
Q. ‘필요해서 그냥 만들었다’는 이야기로 들려서 재밌어요. (웃음) ‘니은기역’이라는 이름에는 어떤 의미가 있나요?
‘니은기역’이라는 출판사명은 이름에 큰 힘을 주고 싶지 않아서 가볍게 생각해본 거예요. 나는 어떤 출판사를 만들고 싶은지, 내가 만들고 싶은 책이 무엇인지 생각해 봤더니 생태 문명으로 돌아가자는 얘기를 담고 싶었고, 전문가 영역의 글보다는 농부나 생활 공예가들, 어쨌든 몸을 사용하시는 분의 글이 들어가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처음엔 이름을 ‘큰 따옴표’나 ‘작은 따옴표’로 하고 싶었는데, 이미 하고 계신 분이 있더라고요. 그래서 다시 찾아보니 세로쓰기를 할 때 낫표(「 」)를 쓰는 걸 보고 니은기역을 생각했고, 니은-기역으로 자음 순서가 바뀐 것은 어떤 틀을 부수고 순서를 바꾼다는, 네모난 틀을 깨뜨린다는 가벼운 의미로 시작해봤어요.
생명의 편에 서는 청소년들과 함께
책 『집에서 쫓겨났어』 함께 만든 구구단 청소년출판팀 친구들과 탐방하는 모습
Q. 니은기역 출판사의 책 중에 『살자 편지』, 『벗자 편지』, 그리고 올해 출간된 반달가슴곰 KM-53의 이야기 『오삼으로부터』도 기억에 남아요. 그전에는 기록집 작업도 많이 하셨던 것 같고요. 먼저 지난주에 따끈하게 출간된 『집에서 쫓겨났어』를 소개해주실 수 있나요?
『집에서 쫓겨났어』는 구례의 중학생 세 명과 같이 활동하며 만든 기록물인데요. 구례의 지리산 골프장 예정지인 숲을 둘러보고 아이들이 만들고 싶은 책을 이야기해봤어요. 골프장 예정지에서 보고 온 것을 큰 종이에 쓰고 어떤 상황인지 이야기 나눈 다음 그곳에서 살아가는 생명체, 마을 분들의 심정이 어떤 지를 쓰다 보니 구상이 잡혔던 책이고요. 숲에 살고 있는 멸종위기종인 수달이나 팔색조, 금불초 같은 생명들이 어떤 심정일지를 대변해 봤을 때 “우리는 쫓겨났어!”라고 말하고 싶을 것 같다는 이야기를 했어요.
Q. 청소년들과 내 지역의 생태 파괴현장을 둘러보면서 비인간생명들의 마음을 느껴보는 작업이었을 것 같아요. 『집에서 쫓겨났어』 외에도 어린이, 청소년, 고령 여성들과 함께 했던 작업들이 많은데, 니은기역에 이런 작업물이 유독 많은 이유가 있을까요?
어르신들과의 작업은 저도 예상치 못했는데 지역에서 활동가로 살다 보니 종종 연결이 됐어요. 저도 마을에 왔으면 마을에서 살고 계신 분들과 얘기를 나누는 게 좋겠다, 삶을 배우고 싶다 생각해서 이주 초반에는 주로 어르신들의 작업을 하게 됐어요.
그리고 아이들과 연결된 건, 제가 마을 학교를 연 적이 있는데요. 매주 토요일마다 아이들과 놀다 보니까 아이들의 감각은 정말 경계가 없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예를 들면 기후위기나 생태 문제에 대해서 어른들과 얘기하다 보면 무엇이 더 나은 방법인지, 경제성장에 도움은 되는지 하나하나 다 따져보게 되잖아요. 그런데 아이들은 우선 생명의 편에 서려고 하는 것 같아요. 이익을 먼저 계산하지 않아요. 그래서 아이들이 아직 생명의 편에 서 있을 때 기후위기 이야기를 더 많이 나누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고학년만 돼도 여기에 반감을 갖기 시작하거든요. “왜 채식을 해야 돼요?” 이렇게 말하는 친구들이 많아지는데, 어렸을 때부터 숲에 자주 가보고, 농사, 텃밭, 작은 풀벌레도 접해보면 조금 반감이 덜하지 않을까 해서 이런 얘기들을 어린이, 청소년들에게 계속 전달하려고 했던 것 같아요.
Q. 청소년들과 학교에서 생태텃밭 교육도 하셨죠. 여기서도 어떻게 의미를 전달할 수 있을지 고민이 많으셨을 것 같아요.
맞아요. 아이들은 뭔가를 시작할 때 우선 재미있어야 하잖아요. 너무 교훈적이면 오히려 반감도 심해지니까요. 그래도 다른 지역에서 생태텃밭 수업 경험이 많은 상글, 동근이 있어서 많이 배웠어요. 아이들과 밭에 가면 감자 심을 때도 “어느 방향으로 심어요?”부터 물어보거든요. 싹이 올라올 땐 어떤 싹이 내가 심은 작물이고 어떤 풀을 뽑아줘야 하는지 구분이 어려워서 차근차근 같이 배우는 시간이었어요.
콩을 심을 땐 같은 콩인데도 까치콩, 밤콩, 완두콩, 강낭콩이 모두 생김새가 다르듯이 우리도 다 달라도 괜찮다는 얘기를 편하게 주고받으려고 했던 것 같아요. ‘이래야만 해!’ ‘이게 맞아!’ 라고 말하기보다 눈으로 볼 수 있는 상황을 보여주고 아이들이 느끼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멤버들 안에서 많은 이야기를 했어요.
Q. 텃밭 교육을 하고 나서 아이들과 지역에 어떤 변화가 있었나요?
처음엔 저도 많이 겁을 먹었어요. 제 개인적인 텃밭 일과 아이들과 하는 텃밭수업은 완전 다르잖아요. 게다가 학교와 어떻게 연결하고 소통할지도 서툴렀고요. 그런데 수업이 끝나고 이 책으로 나오니까 다른 학교, 다른 지역에서 저희에게 연락을 주셔서 책을 구하고 싶다거나 우리도 텃밭 수업을 해보고 싶다 말하는 선생님이 계셨어요. 실제로 함양에서는 생태텃밭 수업으로 이어지기도 했고요.
저희가 했던 생태텃밭 수업이 단순히 작업으로 끝나지 않고 기록물로 남았기 때문에 더 큰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해요. 『우당탕탕 텃밭 수업』 은 ‘저희가 이렇게나 잘했어요’가 아니라 ‘저희도 이렇게 우당탕탕 진행했지만 텃밭수업을 시작하고 싶은 사람들은 이렇게 해보시면 어때요?’ 라고 마중물로서 쓰이길 바라고 만든 책이거든요. 책에도 텃밭 수업이 쉽지 않은 걸 알지만 우리가 어떻게 시작을 어떻게 했고, 어떤 과정들을 거쳤고, 어떤 준비물과 어떤 마음가짐이 필요했는지를 모두 써 놨어요. 어려움과 두려움까지 모두 들어있는 텃밭교육 안내서를 만들고 싶었어요.
Q. 책이 나왔을 때 수업에 참가했던 아이들도 좋아했을 것 같아요. 반응이 어땠나요?
아이들 너무 좋아했죠. 사진이 많았으면 더 아이들이 좋아했을 텐데… 그래도 텃밭 교육할 때면 아이들이 너무 즐거워해줬고 기대해 줬어요. 저희가 아이들에게 어떻게 메세지를 전달해야 하지 걱정해서 힘든 것뿐이지, 아이들은 너무 재밌게 함께해줘서 고마웠어요.
지구와 가까운 출판사
마을학교 손모내기 때 활동 모습
Q. 니은기역 출판사에서는 종이와 잉크, 글꼴 등도 최대한 친환경적으로 하는 방식을 고민하셨던 것 같아요. 혼자 고민하는 과정이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어떠셨어요?
어떤 물성을 가진 책이 나왔을 때, 출판사, 제작자를 비롯한 출판업 관계자들조차 ‘잘 나온 책’과 ‘못 나온 책’에 대한 구분된 시선이 있잖아요. 예를 들면 책 날개가 있어야 만듦새가 있어 보이고, 표지 포장이 잘 되어있어야 색깔도 선명하고 다채롭죠. 디자인 요소도 사람들이 책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더라고요.
그런데 저는 이런 요소들을 조금 줄여서 생태적인, 친환경적인 출판을 하고 싶었던 거죠. 책 날개를 만들지 않는 게 종이를 훨씬 덜 쓸 수 있고, 표지를 코팅하지 않으면 나중에 재활용하기 쉽거든요. 그리고 콩기름 잉크를 쓰면 독자도 편할 뿐 아니라 인쇄 작업자들이 편하시다고 들었어요. 항상 인쇄기를 돌리시는 인쇄소 작업자분들이 석유화학 잉크 냄새를 계속 맡고 있으면 몸에 좋지 않거든요. 일상에서도 신문이나 잡지에서 석유화학 잉크 향이 강하게 묻어날 때가 있잖아요.
그러니까, 어떤 물성에 대한 독자들의 미적 판단 기준, 유통 과정을 간소화하려는 욕구, 콩기름 잉크 인쇄를 사용했을 때 옅은 색감에 대한 걱정, 친환경 출판의 비싼 가격 같은 지점들 때문에 생태적인 출간이 좀 더 어려워진 상황인 것 같아요. 저 역시 ‘이런 것까지 다 고려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그래도 독립 출판사니까 다르게 내보고 싶다는 생각에 친환경 출판으로 해보고 있어요.
물론 책의 독자 층을 고려해야 해요. 만약 큰 글씨로 나와야 하는 어르신들의 책인데 흐릿한 에코 글꼴을 쓰면 안 되잖아요. 제가 낼 수 있는 책은 친환경 방식을 선택해도 무리가 없는 책이니 한 번 해보자고 생각했어요.
Q. 작은변화지원센터와 함께 ‘지리산이야기포럼’에서도 친환경 출판 관련한 이야기를 나눠주셨다고 들었어요.
네. 2021년에 서점이나 디자이너, 편집자, 작가처럼 출판업계에 계신 분들 대상으로 <기후위기시대, 지역 책방과 출판인이 고민하는 책 생태계>라는 주제의 지리산이야기포럼을 열었어요. 모두를 구례로 모실 수는 없으니 사전에 메일로 혹시 생태적인 출판 구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시도해본 경험이나 노하우가 있는지, 이와 관련해서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를 물었어요. 그랬더니 대부분 ‘하고는 싶은데 반품이 많아지기 때문에 하기 어렵다’고 답변 주셨어요. 표지 코팅을 하지 않으면 살짝만 까져도 바로 반품을 신청하니 반품율이 훨씬 높아지거든요. 재생지를 사용하는 문제도 누런 종이를 싫어하는 독자들이 분명히 있다는 걸 염두에 둘 수밖에 없고요. 그래서 이 문제는 유통 구조뿐만 아니라 서점의 인식과 독자들의 인식이 모두 바뀌지 않으면 안 되는, 쉽지 않은 문제라고 생각해요.
Q. 업계와 독자의 인식이 모두 변해야 하는 상황이 안타까워요. 그럼에도 편집자라면 포기할 수 없는 예쁨이나 디자인 요소가 있을 것 같아요. (웃음) 책에서 디자인이 중요한 이유가 책이 예뻐야 많이 읽기 때문이잖아요. 그래야 내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할 수 있고요. 이 지점은 어떻게 타협하고 계신가요?
맞아요. 포럼에 참가하셨던 디자이너 분도 생태적인 디자인을 시도했다가 의뢰인이 원하는 디자인이 나오지 않아 힘들었다는 이야기를 해주셨어요. 지금 그분은 의뢰인이 원하는 대로 맞춰서 디자인하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그 마음은 저도 이해가 돼요. 제가 『오삼으로부터』 낼 때도 책 날개를 넣었는데, 이때는 물성을 생각했다기보다 ‘우수 출판 콘텐츠 지원 사업 선정’ 로고를 꼭 넣어야 해서였어요. 그런데 책 날개를 넣으니 사람들이 책이 잘 나왔다고 좋아하시더라고요.
그리고 인쇄를 마치고 인쇄소에서 온 책을 배송 받으면 운송 과정에서 시달리면서 책등이 까져 있거나 상한 경우가 많아요. 그걸 보고 있으면 ‘이렇게 해서 반품이 될 것 같으면 차라리 코팅을 하는 게 나은가’ 하는 고민도 많아져요. 디자인과 예쁨을 생각하면 참 고민이 많이 되죠.
Q. 한 가지 딜레마는 ‘친환경은 비싸다’는 거예요. 유기농 식재료, 의류 할 것 없이 지구와 가까운 재료일수록 비싸지는 딜레마가 있어요. 출판계에서는 어떤가요?
맞아요. 맞아요. 많은 사람들이 재생지가 싸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거든요. 재생지도 종류와 가격이 천차만별이고, 콩기름 잉크도 일반 잉크보다 비싸요. 제가 프리랜서로 일하는 출판사와 작업할 때도 친환경으로 해보자고 제안 드려봤는데 단가가 안 맞아서 선택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저는 출판문화산업진흥원 같은 곳에서 이런 구조를 바꿔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한 번은 인쇄소에 전화해서 콩기름 잉크를 쓰려면 왜 대량 인쇄만 가능한지, 왜 이렇게 비싼 지 물어봤어요. 그랬더니 찾는 사람이 없어서 그렇다 하셨어요. 기계를 많이 들여올 수도 없을뿐더러 일단 콩기름 잉크로 돌린 인쇄기는 계속 콩기름 잉크로만 써야 하는데 수요가 별로 없으니 하기 어렵다고요.
또 출판계에 문의해 보니 콩기름 잉크가 비싸서 안 쓴다고 하는 거예요. 이런 문제는 개인이 바꾸기는 어려우니 출판문화산업진흥원처럼 큰 조직이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닐까 싶어요. 다행히 출판계에서 친환경 이슈, 탄소배출 관련 문제를 주제로 포럼을 열기도 하는데, 이러한 토론 자리와 같이 정책적인 변화가 뒷받침되어야 할 것 같아요.
Q. 퀄리티의 좋고 나쁨을 떠나서 친환경 출판도 수요가 많아야 단가가 낮아진다는 자본 시스템에 충실하다는 거네요. 그와 동시에 만든 책들도 수없이 버려지기도 하죠. 개인적으로 책이나 자료집을 만들 때 이렇게 종이를 써도 되는 지에 대한 회의감이 자주 드는데, 이와 관련해서 현경님이 출판 업계와 창작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면요?
제가 콩기름 잉크와 재생종이를 사용하자는 이야기를 블로그에 올리면서 ‘가장 중요한 건 나무를 베서 책이 나올 만큼 가치 있는 이야기들을 전달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 그래서 책을 낼 때 이게 꼭 세상에 나와야 하는지 생각을 해보고 내자.’ 이런 얘기도 같이 했어요.
그리고 요즘은 책도 하나의 소비재잖아요. 만약 모든 출판사가 책 인쇄 부수의 상한선을 정해 놓는다면 어떨까요? 구매하고 읽지 않는 책을 집에 쌓아두는 게 아니라 도서관, 공공 건물처럼 누구든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곳에서 책을 돌려볼 수 있다면 책의 가치도 전달되고 생태계에도 덜 부담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요
Q. ‘이 책은 출판해도 된다’는 공공 가이드라인을 정하는 건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공공 시스템을 구축하는 일이 정말 필요하겠어요.
그렇죠. 그렇다고 책이 안 나오면 그것도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생태적인 활동을 시작하게 된 것도 책을 읽어서 가능했던 것이고, 친환경으로 하자고 한 극단으로 가버리면 안 되잖아요. 극단적 논리는 피하되 계속해서 절충안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과정이 가장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Q. 과거에 ‘나는 언젠가 세상에 꼭 나와야만 하는 책을 편집하고 있을 것이다.’ 라고 쓰신 글을 봤어요. 지금까지 돌아봤을 때 여전히 유효한 이야기인가요?
다행히 멀지 않은 것 같아요. 니은기역 출판사로 내는 책도 그렇고, 다른 출판사와 함께 작업할 때도 ‘이게 왜 굳이 나무를 베서 나와야 하지?’ 라는 생각을 항상 하게 되더라고요. 저는 돈이 되더라도 제 기준에 부합하지 않으면 저는 못한다 말씀을 드리려고 노력해왔어요. 다행히 멀리 가진 않았다! (웃음)
아이들에게 안전한 길은 모두에게 안전하다
2021 차 없는 거리를 만든 어린이 기후정의 활동
Q. 구례 이주 후에 ‘지구를 위한 작은 발걸음’이라는 활동을 하고 계세요. 이 활동에 대해서 조금 더 설명해 주실 수 있나요?
이제 시작한 지 3년 정도 된 단체인데요. 이 활동은 구례에 있는 활동가와 선생님 몇 명이 모여서 지구를 위해 할 수 있는 개인의 실천을 담은 캠페인 활동으로 시작했어요. 그리고 최근에는 조금 더 정책적인 변화를 목표로 활동하고 있어요.
정책을 고민하다 보니 주민들의 피부에 와닿으면서 관에 제안할 수 있는 문제가 교통 분야였어요. 시골에는 도보가 많지 않고, 자가용이 없으면 한 시간에 한 대 올까 말까 하는 버스를 기다려야 하잖아요. 그래서 보행자 중심으로 교통 체계가 바뀌도록, 비단 사람만이 아니라 동식물들에게도 안전한 교통이 될 수 있도록 제안해보고 싶어서 구례의 길을 조사하기 시작했어요. 우선, 보행자 사고가 많이 났던 세 구역을 조사해서 거기가 어떤 상황인지, 뭐가 위험하고 왜 위험한지를 정리해서 군에 제안드렸죠.
이런 취지로 시작해서 이후에는 아이들과 구례의 길을 함께 조사하고 문제점도 파악해보는 교육은 어떨까 해서 읍 소재지 초등학교 4학년 아이들과 같이 학교가 속해 있는 번화가를 조사했어요. 그곳이 학교나 가게, 도서관도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다니는 길인데 길 한 쪽엔 항상 차들이 주차되어 있거든요. 그러니 아이들이 차도로 걸어야 할 때가 많았어요.
이렇게 아이들과 조사한 내용을 토대로 군수님을 모시고 얘기를 드렸죠. 아이들이 “여기가 위험해요.” “지구를 위해서 이렇게 했으면 좋겠어요.” 얘기를 드렸더니 군에서는 당장 탈탄소 교통 정책으로의 전환은 어렵지만, 보행자 안전망 정도는 설치가 됐어요. 그런데 거기서 끝나니까 아쉽잖아요. 그 이후에 환경교통과로 찾아가서 아이들이 안전하고 보행할 수 있게 이 거리만이라도 ‘차 없는 거리’를 해보면 어떨지 이야기했죠. 실제로 지구의 날에 ‘차 없는 거리’ 행사를 열었는데 그때 아이들이 엄청 즐거워했어요. 어떤 아이는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한 행복을 느꼈다.”는 표현까지 했어요.
꾸준한 행사로 이어지진 못했지만, 그 다음 해엔 길가의 쓰레기를 싣고 군청으로 가서 저희 이야기를 들어달라 말하기도 했고, 작년에는 아이들이 이 활동에 더 쉽게 다가오면 좋겠다는 생각에 아이들의 시, 노래, 편지를 써서 발표하고 노래도 부르는 행사로 진행됐어요. 백 명이 넘는 아이들이 노래하고 소리 지르는 장면이 정말 감동적이었어요.
Q. 선생님들의 공감대 형성도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민간단체와 학교가 어떻게 활동을 같이할 수 있었나요?
다행히 구례에는 생태, 환경에 관심 많은 선생님들이 계셨어요. 덕분에 지구의 날 행사가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고 학교 수업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신경을 써 주셨어요. 거리의 쓰레기를 줍고 나면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나도 쓰레기를 버리지 말아야지’ 라고 느낄 수 있도록 수업 커리큘럼을 계획해 주셨는데, 정말 이런 선생님들이 계셔서 가능한 활동이었던 것 같아요.
불완전해도 괜찮아
Q. ‘기후위기나 생태 문제에 대해서 책으로 접했다’고 말씀해 주셨어요. 이러한 사회 문제들에 관심 갖게 된 계기가 있으셨나요?
저도 이전엔 육식을 많이 좋아했는데 대학 도서관에서 이것저것 잡히는 대로 책을 읽으면서 자연스레 채식을 지향하게 됐어요.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구나, 그럼 나도 시작해볼까?’ 하면서요. 그러면서 동물권에도 관심 갖게 되고, 특히 아이 낳고 나서는 ‘아이에게 어떤 걸 먹여야 할까?’ ‘어떤 걸 줘야 할까?’ 생각하다 보니 그 범위가 더 확장됐어요. 생태 주제의 책을 더 많이 읽게 되면서 비슷한 생각을 가진 친구들도 더 생겼고요.
Q. 요즘 기후정의 활동가, 생태 활동가는 허탈감이나 좌절감을 많이 느낄 것 같아요. 현경님은 이에 대해서 어떻게 느끼고 계신가요?
맞아요. 맞아요. 구례 국궁장 확장 공사로 봉성산이 파헤쳐질 때는 저희 활동을 반대하시는 분들과 직접 몸이 부딪히는 상황도 있었어요. 골프장 이슈 때도 거기 계셨던 작업자나 연관된 사람들의 적대적인 태도를 대면하면 무섭기도 해요. 활동하면서 제 주변인들에게 피해가 갈까봐 몸을 사리게 되는 경우도 있고요.
그런데 이렇게 무서운 상황보다도 제가 제일 힘들었던 건 ‘이제 다 끝난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예요. 이제 안 바뀔 것 같아, 뭘 해도 지구는 다 이제 힘들어졌다,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그때가 제일 힘들고 아무것도 하기 싫어져요.
Q. 그럴 때 회복하는 현경 님만의 방식이 있나요?
우울해지면 그냥 햇빛 받으러 나가요. 그러면 조금 나아지더라고요. 신기하게 햇빛 받고 노래 듣고 책 읽다 보면 괜찮아지고… 그리고 제가 밖에 잘 나가지 않는 편인데, 활동이 있으면 나가야 하잖아요. 나가기 힘든 마음을 억누르고 나가보면 친구들의 활동과 이야기가 너무 힘이 돼요. 그런 날엔 ‘맞아, 변화가 크게 보이지 않아도 작게 계속해 나가는 거지 뭐.’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Q. 기후위기를 마주할 때 개인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어떤 분은 이런 이야기를 하세요. “그러면 너는 택배도 안 시키고 일회용품도 안 쓰고 사니?” 근데 그렇게 완벽한 사람은 없잖아요. 하지만 완벽하지 않다고 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그것도 방임일 수 있죠. 그래서 우리가 다 불완전하다는 걸 인정하고, 한쪽에서 조금 에너지를 많이 썼다면 다른 쪽에서 줄이면 된다고 생각해요. 저 스스로도 그렇게 물어보고 대답하면서 제가 무너지지 않으려고 해요.
개인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가능하면 채식하려고 노력하는 거예요. 저도 육식을 좋아했기 때문에 한 번에 확 끊어버리는 건 쉽지 않잖아요. 그래서 연중 15일 정도는 먹고 싶은 게 있다면 편하게 먹자는 마인드로 실천하고 있어요. 또 가능하면 일회용품 안 쓰고, 만약 쓰더라도 다른 부분에서 줄이고요. 완벽하지 않더라도 밸런스를 맞추려고 노력하는 것이 개인의 실천을 이어가는 데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2023 지구의날 어린이기후정의행동 때 '지금 당장 시작해' 노래 함께 부르고 율동하는 모습
자급은 건강한 공동체로부터
Q. 생태적인 삶, 지속 가능한 삶을 위해서 ‘자급’을 키워드로 뽑아주신 걸 봤어요. 현경 님이 생각하는 자급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자급은 의식주 전부를 혼자서만 해결한다는 의미는 아닌 것 같아요. 오히려 자급을 위해서는 여러 사람이 같이 있어야만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먹거리를 기를 때도 내가 모든 종류의 작물을 다 기를 수 없으니 서로 나눠서 길러 먹고, 또 생산물을 공유하거나 사고 팔 수 있는 지역 내 공동체가 있어야 해요. 거기에 거대한 자본의 힘을 빌리지 않으면 더 좋고요. 너무 먼 곳에서 착취가 이루어지지 않게 공동체의 구조를 만드는 것이 가장 자급에 가까운 형태가 아닐까 생각해요.
Q. 자급을 위해 내딛어야 하는 첫 번째 발걸음으로 어떤 일을 제안할 수 있을까요?
일단 거대한 흐름에서 빠져나와야 한다. 내가 하는 노동이 적어도 뭘 위해서 하고 있는 지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기업에서 일하다 보면 결과물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를 때가 있고, 그 결과물이 나오기까지 착취되는 대상은 전혀 안 보이는 구조잖아요. 저 역시 도시에서 누군가의 노동으로 만든 것을 사 먹을 때 위안을 얻곤 했는데, 이것을 너무 당연하고 편한 것으로 느끼는 것에 경계심을 갖고 싶어서 구례로 오게 됐거든요. 소비나 편리함에서 조금 멀어지는 일이 자급의 시작이라고 생각해요.
초록초록한 세상을 위한 작은 발걸음
Q. 현경님의 일과 활동을 지속할 수 있게 해주는 동력은 어디서 얻으세요?
동력은 ‘그냥 아무것도 안 하면 안 될 것 같다’는 마음에서 얻어요. 그리고 같이 활동하는 친구들에게 힘을 얻고요. 변화가 전혀 보이지 않을 때도 있는데 그럴 땐 변화하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마음을 가져요. 마음을 굳게 먹고 하는 것보다 하나씩 천천히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하자고 생각하고 있어요.
Q. 활동가로 활동하면서 가장 좋은 점은 무엇인가요?
세상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는 마음이요. 실제로 도움이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나은 활동을 하고 있다는 마음이 들 때 보람을 느껴요. 내가 좋다고 믿는 가치를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고 나눌 수 있을 때 가장 행복해요. 사실 타인을 변화시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잖아요. 그런데 활동하면서 우선 제가 초록초록하게 변하고 다른 사람들도 조금씩 초록색 물이 들어가는 걸 보면 이런 활동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Q. 앞으로 어떤 활동을 계획하고 계신가요?
출판사는 단순히 책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회계나 마케팅, 다양한 서류 작업까지 다양한 일이 있기 때문에 혼자서 이걸 다 하려다 보니 힘에 부쳤어요. 책을 내면 이 책이 잘 알려질 수 있게 해야 하는데 그게 저에게는 참 어렵고 회계, 정산이나 포장, 배송 같은 일도 해야 하니 스트레스를 많아 받아서 사실 폐업까지도 고려했어요. 하지만 만약 계속하게 된다면 대중적으로 잘 이야기되지 않는 지방의 일들이나 기후위기, 생태 이야기, 커다란 장에서 나오기 어려운 이야기들을 저는 계속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출판 이외의 활동에서는 내년 지구의 날 행사를 준비하고 있어요. 최근에 구례에 청소년 활동을 함께하고 싶은 친구들이 이주해오면서 반드시 제가 없더라도 아이들과 마을 주민, 학교가 서로 연결될 수 있는 바탕을 깔아 놓고 싶어요. 계속해서 아이들과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지면 좋겠고, 지금은 주로 초등학생들과 활동하는데 앞으로는 중학교, 고등학교 청소년과도 함께 해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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