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내人터뷰>는 지리산의 품 안에 자리 잡은 마을, 남원시 산내면에 사는 이웃들의 진솔한 삶의 모양을 담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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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내에서 김은미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목소리가 크고, 웃음소리가 호탕하고 몸짓이 활달해서 멀리서도 그이가 있구나, 단박에 알아차릴 만큼의 존재감.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고 경우가 아니다 싶으면 성도 잘 낸다. 행복할 때는 목젖이 보이게 크게 웃고, 본 적은 없지만 아마 슬프면 구슬프게 울기도 잘할 것이다.
어린이집 밥 선생으로 일할 때 불리었던 함박꽃이란 별명을 떠올려보라. 중기마을에서 두 딸과 함께 살며 마을 대소사에 어김없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는 사람.세상 만물이 허울을 벗고 자신의 모습을 오롯이 드러내는 겨울의 초입에서, 자신을 내보이는 것을 꺼리지 않는, 스스럼없는 은미 씨를 만난다.
| 우선 그 젊은 나이에 산내에 오게 된 이야기부터 들어볼까요.
> 2006년에 30대 초에 산내로 귀농을 했어요. 도시에서 나고 자랐는데도 늘 도시가 나에게 맞지 않다고 느꼈어요. 덩달아 직장생활도 별로 재미가 없고 해서 대전 귀농학교를 수료하고 귀농을 하려니 젊은 여자 혼자서 귀농할만한 곳이 여기하고 홍성 빼고는 없는 거예요.
근데 이제 귀농학교 하면서 도법 스님 알게 되고 실상사 공동체 이야기도 듣고 해서 괜찮겠다 싶어 들어왔죠. 마침 이곳에 들어오자마자 실상사 어린이집 밥샘을 구한다고 해서 바로 일을 시작했지요. 사실 밥도 잘 안해 보고 그랬는데 그냥 시작한거죠. 근데 몇 달 일하다가 결혼하고 첫아이 생기고 또 둘째 생기고 하면서 몇 년간 일을 쉬었죠.
| 중간에 다시 도시로 나갔다가 돌아와서 재정착했는데 초기의 산내와는 분위기나 환경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 결혼하고 산내에 사는 데 집을 구하기도 어렵고 해서 다시 대전에 갔었어요. 근데 도시 생활이 쉽지 않더라고. 경제적 차별이나 비교로 인해서 위축되고 걱정되는 것도 많고 애들 유치원 갈 때 되니까 학습지를 해야 된다, 영어를 시켜야 한다 이런 소리도 들리고. 애들을 키우기에 좋은 환경이 아니다 싶은 차에 삼화리에 작은 집이 나왔다는 얘기를 듣고, 집을 사서 들어온 거죠.
그때 막 작은 마을도 생기면서 귀농하는 사람들이 새집을 지어 이사하는 풍토가 생기고 산내 전역에 새 집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기 시작했죠. 그전에는 다들 마을에 있는 집 사서 수리해서 지내거나, 빌려서 지내곤 했어요. 그리고 귀농하는 것도 대개 혼자서 오거나 둘이 내려오거나 그랬는데 다시 돌아왔을 때는 가족 단위의 귀농이 많아진 것이 신기했어요. 좀 낯설기도 하고 혼란스럽기도 했지만 우리도 아이가 둘이니까 금세 적응이 되고 새로운 사람들과 연결이 되더라고요.
영원할 것 같던 유년 시절이 어느새 끝나버리듯 두 딸은 벌써 청소년이 되었고 은미 씨도 마을 대소사로, 밥벌이로 하루 쉴 틈이 없는 바쁘고 에너지 넘치는 생활인이 되었다.
| 요즘은 마을에서 살기가 어때요?
> 요즘엔 좋아요. 그리고 제일 좋았던 건 코로나 겪으면서 확실히 이곳을 선택해서 살기로 한 게 되게 잘한 일이었구나. 도시와는 달리 크게 달라진 것 없이 일상을 누릴 수 있었으니까.
지금은 진짜 이제 여기가 진짜 내 고향 같은 느낌으로 살고 있어요. 한 4년 전부터 생계형으로 노인 맞춤 돌봄 일을 하면서 새로운 세상을 접하게 된 거잖아요. 지리산 자락의 마을에 살면서 온갖 드라마틱한 삶을 경험한 80, 90대 어르신들의 삶에 일상적으로 관여하면서 이분들과의 관계가 너무 밀도가 높은 거야. 내가 돌보는 이분들이 정서적으로도 나에게 의지하고 정을 주시니까, 나도 막 사랑받는 느낌에 행복해지고(웃음) 내가 좀 인정 욕구가 있는 데다 정서적으로 굶주린 느낌이 늘 있었는데 이 일을 하면서 어르신들 정을 듬뿍 받아서 그런지 그런 게 없어졌어요(하하)
| 애정 결핍은 없어졌지만, 또 다른 고뇌도 있을 것 같은데
> 당연하죠. 이렇게 가깝게 일상을 나누던 노인분들이 돌아가시거나 이럴 때는 사실 되게 힘들고 좀 감당하기가 되게 어려워. 나는 가족도 아니고 하니까 이분들이 돌아가셨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다가 나중에 가보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기도 하고. 노인 돌봄 일을 하다 보면 내 삶이 죽음과 너무 맞닿아있다는 생각도 많이 들어요. 나도 이곳에서 살고 늙어갈 텐데 어떤 자세로 이 리듬을 받아들여야 하나, 우리가 늙으면 어떤 돌봄을 받게 될까 하는 고민도 자연스럽게 하게 되고요.
| 이야기를 전환해보죠. 최근에는 마을 일에도 많이 참여하잖아요. 그중에서 음식과 관련된 일에도 많이 참여하는 것 같은데요
> 일단 ‘제철 학교’라고 음식연구가 고은정 선생님이 운영하시는 음식 수업을 한 학기 수강했어요. 그리고 몇 년 전부터 ‘맛있는 부엌’이라고 역시 고은정샘이 하시는 프로그램에서 스텝으로 참여해왔어요. 올해부터는 필요할 때만 함께하고 있고요.
나에게는 ‘맛있는 부엌’이나 고은정샘이 아주 중요한 한 축이거든요. ‘제철 학교’와 ‘맛있는 부엌’에서 음식에 대해 배우고 실습하면서 음식에 대한 가치관이랄까 하는 게 좀 정립이 되고 내가 잘하고 좋아하는 게 뭔지를 깨달았다고나 할까요. 그동안 음식하는 걸 되게 좋아하고 그걸 여러 번 업으로 삼기도 했는데, 그에 걸맞은 존중을 못 받는다고 느꼈거든요. 고은정샘의 부엌에서 음식 재료 하나하나를 소중하게 다루고, 또 음식하는 사람들을 존중하고 그에 응당한 대접을 해주는 문화를 접하면서, 내가 하는 일에 대한 자부심도 갖게 되고 음식 문화에 대해 더욱 진지하게 공부할 수 있게 되었어요..
제철 학교를 통해 은미씨는 음식 만드는 것에는 기술이나 식재료의 선별보다는 제철 재료와 환경, 그것을 요리하는 사람과의 조화가 무엇보다 중요하며 그것은 삶의 전반에 두루두루 연결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올해부터 은미 씨는 이음의 활동가를 위한 캠프에서 같이 음식을 만들어 먹는 ‘환대의 식탁’이라는 프로그램을 꾸리며, 자신이 가꾸어 온 음식 시계를 사람들과 나누고 있다.
| 그럼 앞으로도 음식과 관련한 일들을 계속하고 싶은거죠?
> 잘난 척하는 건 아니라 우리가 여기 살면서 좋은 식재료를 누리고 사는데 이걸로 같이 건강한 음식을 만들어 먹으면 좋겠다. 간장이나 된장 같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맛있는 음식을 만드는 레시피 같은 것을 공유하고, 우리나라에는 너무 좋은 식재료가 많으니 그런 걸 좀 활용해서 채식주의자를 위한 밥상 같은 것도 차리고. 나는 이걸 사업모델로 한다기보다는 그냥 사람들과 같이 음식 해 먹고 어울리는 시간이 너무 좋아요.
| 생활 지원사로 생계 활동을 하고 ‘환대의 부엌’과 같은 외부 프로그램도 종종 하고 또 중기마을 안에서 부녀회장으로 맡은 일도 많은데, 자신의 정체성을 짚는다면?
> 사실 어느 하나를 콕 짚어서 내 정체성으로 삼기엔 무리가 있고요, 이 모든 것이 연결되어서 나라는 사람을 형성하고 있다고 할 수 있죠. 노인 맞춤 돌봄 일을 하다 보면 좋은 식재료를 얻게 되는 경우가 많아요. 또 어르신들이 나를 믿고 지지해주셔서 부녀회장 일을 맡기도 하고, 나를 둘러싼 주변과의 관계가 좋으면 그것이 일로도, 생계로도 이어지는 게 시골 마을의 특성이기도 한 거죠.
사람을 좋아하고, 음식 나누는 것을 좋아하다 보니 그것들이 전체적으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서 내 삶을 이루고 있는 것 같아요. 내년에는 어르신들을 위한 음식 나눔 프로그램 같은 것을 해보고 싶기도 하네요.
노인맞춤돌봄 일을 하면서 알게 된 동네 어르신과 마을카페 토닥에서 차를 마시고 있는 김은미씨
| 산내에 처음 들어왔을 때가 거의 20년 전이고 잠시 나갔다가 다시 들어와서 다시 십몇 년을 살았으니 앞으로 우리 마을 산내에 이런 게 좀 더 있었으면 좋겠다, 아니면 이런 방향으로 갔으면 좋겠다 싶은 것이 있을까요?
> 제가 처음 내려왔을 때만 하더라도 산내의 귀농공동체가 작아서 모두 같이 어우러지는 분위기였다면 그 후엔 사람들도 다양해지고 많아지면서 오히려 구심점이 없어지고 끼리끼리 소규모로 어울리는 분위기가 강했죠. 그러다 오히려 요즘에 좀 더 같이 만날 기회가 많아진 것 같아요. 살래장 환경축제 같은 것도 그렇고, 중심지 활성화 사업 같은 것도 생기면서 원주민과 귀농인들이 같이 의논하고 뭔가를 만들어가는 분위기도 있고, 그래서 그런지 나는 요즘 이 마을에서 사는 게 보람도 있고 만족스러워요. 그리고 앞으로도 귀농인들이 마을로 들어가서 좀 더 적극적으로 마을 분들과 교류하려고 노력했으면 좋겠어요.
| 이음과도 올 한해 이런저런 일을 같이했는데 이음에 대해 생각하고 기대하는 부분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 아까도 얘기했지만 생활지원사로 노인 돌봄 일을 하는 것은 구체적인 성과가 있어요. 스트레스도 크지만, 어르신들이 편안해하고 행복해하는 모습을 볼 수 있어서 보람도 많은 편이죠. 그런데 올해 이음과 ‘환대의 식탁’이라든가 마을 조사 활동을 하면서 이음이라는 공간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알게 되었고요, 바로 드러나는 성과로 나타나진 않지만, 지리산에 깃들어 사는 사람들의 삶과 마을을 변화시키는 데 굉장히 큰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동의하고 지지하게 되었어요.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필요한 요소와 접점을 찾아 연결하는 어려운 일을 꾸준히 하고 있구나.
한 마을에서 오래 산 사람은 시간이 몸을 통과해 느리게 흘러가는 것을 경험한 사람이다. 낯설고 어렵던 마을 사람들과 풍경, 햇빛과 공기를 여러 해 겪으면서 비로소 땅에 발을 제대로 디딜 수 있게 된다. 불안했던 청년으로 처음 이곳에 도착했던 은미씨가 20년이 지나 이제야 삶의 평안과 만족을 얻었다면, 그이가 하루하루 성실하게 통과해 온, 이곳에서의 시간의 덕이 아니겠는가.
#남원 #전북 #지리산 #김은미 #생활지원사
#변화를만드는사람들 #피플포체인지 #브라이언임팩트 #지리산이음
인터뷰어 | 이덕임
살 곳을 찾아 지구 곳곳을 떠돌다 2005년에 지리산 산내에 정착했다. 지금까지 약 30여권의 책을 우리말로 옮겼다. 텃밭과 꽃밭 가꾸기, 이웃과 산책하기를 본업만큼 좋아하는 뼛속까지 시골 생활자이다.
산내에서 김은미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목소리가 크고, 웃음소리가 호탕하고 몸짓이 활달해서 멀리서도 그이가 있구나, 단박에 알아차릴 만큼의 존재감.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고 경우가 아니다 싶으면 성도 잘 낸다. 행복할 때는 목젖이 보이게 크게 웃고, 본 적은 없지만 아마 슬프면 구슬프게 울기도 잘할 것이다.
어린이집 밥 선생으로 일할 때 불리었던 함박꽃이란 별명을 떠올려보라. 중기마을에서 두 딸과 함께 살며 마을 대소사에 어김없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는 사람.세상 만물이 허울을 벗고 자신의 모습을 오롯이 드러내는 겨울의 초입에서, 자신을 내보이는 것을 꺼리지 않는, 스스럼없는 은미 씨를 만난다.
| 우선 그 젊은 나이에 산내에 오게 된 이야기부터 들어볼까요.
> 2006년에 30대 초에 산내로 귀농을 했어요. 도시에서 나고 자랐는데도 늘 도시가 나에게 맞지 않다고 느꼈어요. 덩달아 직장생활도 별로 재미가 없고 해서 대전 귀농학교를 수료하고 귀농을 하려니 젊은 여자 혼자서 귀농할만한 곳이 여기하고 홍성 빼고는 없는 거예요.
근데 이제 귀농학교 하면서 도법 스님 알게 되고 실상사 공동체 이야기도 듣고 해서 괜찮겠다 싶어 들어왔죠. 마침 이곳에 들어오자마자 실상사 어린이집 밥샘을 구한다고 해서 바로 일을 시작했지요. 사실 밥도 잘 안해 보고 그랬는데 그냥 시작한거죠. 근데 몇 달 일하다가 결혼하고 첫아이 생기고 또 둘째 생기고 하면서 몇 년간 일을 쉬었죠.
| 중간에 다시 도시로 나갔다가 돌아와서 재정착했는데 초기의 산내와는 분위기나 환경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 결혼하고 산내에 사는 데 집을 구하기도 어렵고 해서 다시 대전에 갔었어요. 근데 도시 생활이 쉽지 않더라고. 경제적 차별이나 비교로 인해서 위축되고 걱정되는 것도 많고 애들 유치원 갈 때 되니까 학습지를 해야 된다, 영어를 시켜야 한다 이런 소리도 들리고. 애들을 키우기에 좋은 환경이 아니다 싶은 차에 삼화리에 작은 집이 나왔다는 얘기를 듣고, 집을 사서 들어온 거죠.
그때 막 작은 마을도 생기면서 귀농하는 사람들이 새집을 지어 이사하는 풍토가 생기고 산내 전역에 새 집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기 시작했죠. 그전에는 다들 마을에 있는 집 사서 수리해서 지내거나, 빌려서 지내곤 했어요. 그리고 귀농하는 것도 대개 혼자서 오거나 둘이 내려오거나 그랬는데 다시 돌아왔을 때는 가족 단위의 귀농이 많아진 것이 신기했어요. 좀 낯설기도 하고 혼란스럽기도 했지만 우리도 아이가 둘이니까 금세 적응이 되고 새로운 사람들과 연결이 되더라고요.
| 요즘은 마을에서 살기가 어때요?
> 요즘엔 좋아요. 그리고 제일 좋았던 건 코로나 겪으면서 확실히 이곳을 선택해서 살기로 한 게 되게 잘한 일이었구나. 도시와는 달리 크게 달라진 것 없이 일상을 누릴 수 있었으니까.
지금은 진짜 이제 여기가 진짜 내 고향 같은 느낌으로 살고 있어요. 한 4년 전부터 생계형으로 노인 맞춤 돌봄 일을 하면서 새로운 세상을 접하게 된 거잖아요. 지리산 자락의 마을에 살면서 온갖 드라마틱한 삶을 경험한 80, 90대 어르신들의 삶에 일상적으로 관여하면서 이분들과의 관계가 너무 밀도가 높은 거야. 내가 돌보는 이분들이 정서적으로도 나에게 의지하고 정을 주시니까, 나도 막 사랑받는 느낌에 행복해지고(웃음) 내가 좀 인정 욕구가 있는 데다 정서적으로 굶주린 느낌이 늘 있었는데 이 일을 하면서 어르신들 정을 듬뿍 받아서 그런지 그런 게 없어졌어요(하하)
| 애정 결핍은 없어졌지만, 또 다른 고뇌도 있을 것 같은데
> 당연하죠. 이렇게 가깝게 일상을 나누던 노인분들이 돌아가시거나 이럴 때는 사실 되게 힘들고 좀 감당하기가 되게 어려워. 나는 가족도 아니고 하니까 이분들이 돌아가셨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다가 나중에 가보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기도 하고. 노인 돌봄 일을 하다 보면 내 삶이 죽음과 너무 맞닿아있다는 생각도 많이 들어요. 나도 이곳에서 살고 늙어갈 텐데 어떤 자세로 이 리듬을 받아들여야 하나, 우리가 늙으면 어떤 돌봄을 받게 될까 하는 고민도 자연스럽게 하게 되고요.
| 이야기를 전환해보죠. 최근에는 마을 일에도 많이 참여하잖아요. 그중에서 음식과 관련된 일에도 많이 참여하는 것 같은데요
> 일단 ‘제철 학교’라고 음식연구가 고은정 선생님이 운영하시는 음식 수업을 한 학기 수강했어요. 그리고 몇 년 전부터 ‘맛있는 부엌’이라고 역시 고은정샘이 하시는 프로그램에서 스텝으로 참여해왔어요. 올해부터는 필요할 때만 함께하고 있고요.
나에게는 ‘맛있는 부엌’이나 고은정샘이 아주 중요한 한 축이거든요. ‘제철 학교’와 ‘맛있는 부엌’에서 음식에 대해 배우고 실습하면서 음식에 대한 가치관이랄까 하는 게 좀 정립이 되고 내가 잘하고 좋아하는 게 뭔지를 깨달았다고나 할까요. 그동안 음식하는 걸 되게 좋아하고 그걸 여러 번 업으로 삼기도 했는데, 그에 걸맞은 존중을 못 받는다고 느꼈거든요. 고은정샘의 부엌에서 음식 재료 하나하나를 소중하게 다루고, 또 음식하는 사람들을 존중하고 그에 응당한 대접을 해주는 문화를 접하면서, 내가 하는 일에 대한 자부심도 갖게 되고 음식 문화에 대해 더욱 진지하게 공부할 수 있게 되었어요..
| 그럼 앞으로도 음식과 관련한 일들을 계속하고 싶은거죠?
> 잘난 척하는 건 아니라 우리가 여기 살면서 좋은 식재료를 누리고 사는데 이걸로 같이 건강한 음식을 만들어 먹으면 좋겠다. 간장이나 된장 같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맛있는 음식을 만드는 레시피 같은 것을 공유하고, 우리나라에는 너무 좋은 식재료가 많으니 그런 걸 좀 활용해서 채식주의자를 위한 밥상 같은 것도 차리고. 나는 이걸 사업모델로 한다기보다는 그냥 사람들과 같이 음식 해 먹고 어울리는 시간이 너무 좋아요.
| 생활 지원사로 생계 활동을 하고 ‘환대의 부엌’과 같은 외부 프로그램도 종종 하고 또 중기마을 안에서 부녀회장으로 맡은 일도 많은데, 자신의 정체성을 짚는다면?
> 사실 어느 하나를 콕 짚어서 내 정체성으로 삼기엔 무리가 있고요, 이 모든 것이 연결되어서 나라는 사람을 형성하고 있다고 할 수 있죠. 노인 맞춤 돌봄 일을 하다 보면 좋은 식재료를 얻게 되는 경우가 많아요. 또 어르신들이 나를 믿고 지지해주셔서 부녀회장 일을 맡기도 하고, 나를 둘러싼 주변과의 관계가 좋으면 그것이 일로도, 생계로도 이어지는 게 시골 마을의 특성이기도 한 거죠.
사람을 좋아하고, 음식 나누는 것을 좋아하다 보니 그것들이 전체적으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서 내 삶을 이루고 있는 것 같아요. 내년에는 어르신들을 위한 음식 나눔 프로그램 같은 것을 해보고 싶기도 하네요.
노인맞춤돌봄 일을 하면서 알게 된 동네 어르신과 마을카페 토닥에서 차를 마시고 있는 김은미씨
| 산내에 처음 들어왔을 때가 거의 20년 전이고 잠시 나갔다가 다시 들어와서 다시 십몇 년을 살았으니 앞으로 우리 마을 산내에 이런 게 좀 더 있었으면 좋겠다, 아니면 이런 방향으로 갔으면 좋겠다 싶은 것이 있을까요?
> 제가 처음 내려왔을 때만 하더라도 산내의 귀농공동체가 작아서 모두 같이 어우러지는 분위기였다면 그 후엔 사람들도 다양해지고 많아지면서 오히려 구심점이 없어지고 끼리끼리 소규모로 어울리는 분위기가 강했죠. 그러다 오히려 요즘에 좀 더 같이 만날 기회가 많아진 것 같아요. 살래장 환경축제 같은 것도 그렇고, 중심지 활성화 사업 같은 것도 생기면서 원주민과 귀농인들이 같이 의논하고 뭔가를 만들어가는 분위기도 있고, 그래서 그런지 나는 요즘 이 마을에서 사는 게 보람도 있고 만족스러워요. 그리고 앞으로도 귀농인들이 마을로 들어가서 좀 더 적극적으로 마을 분들과 교류하려고 노력했으면 좋겠어요.
| 이음과도 올 한해 이런저런 일을 같이했는데 이음에 대해 생각하고 기대하는 부분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 아까도 얘기했지만 생활지원사로 노인 돌봄 일을 하는 것은 구체적인 성과가 있어요. 스트레스도 크지만, 어르신들이 편안해하고 행복해하는 모습을 볼 수 있어서 보람도 많은 편이죠. 그런데 올해 이음과 ‘환대의 식탁’이라든가 마을 조사 활동을 하면서 이음이라는 공간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알게 되었고요, 바로 드러나는 성과로 나타나진 않지만, 지리산에 깃들어 사는 사람들의 삶과 마을을 변화시키는 데 굉장히 큰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동의하고 지지하게 되었어요.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필요한 요소와 접점을 찾아 연결하는 어려운 일을 꾸준히 하고 있구나.
한 마을에서 오래 산 사람은 시간이 몸을 통과해 느리게 흘러가는 것을 경험한 사람이다. 낯설고 어렵던 마을 사람들과 풍경, 햇빛과 공기를 여러 해 겪으면서 비로소 땅에 발을 제대로 디딜 수 있게 된다. 불안했던 청년으로 처음 이곳에 도착했던 은미씨가 20년이 지나 이제야 삶의 평안과 만족을 얻었다면, 그이가 하루하루 성실하게 통과해 온, 이곳에서의 시간의 덕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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