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6월에는 세계 곳곳에서 성소수자(LGBT: 레즈비언, 게이, 양성애자 및 트렌스젠더) 축제가 열린다. 다양한 성적 지향을 가진 사람들이 무지개색 깃발을 흔들며 모두에게 동등한 사랑과 성소수자의 권리를 외치며 거리를 행진한다. 대한민국에서는 서울에서 2000년에 제1회 서울퀴어문화축제를 개최한 것을 시작으로 대구, 부산, 전주, 인천 그리고 올해 대전에서 퀴어 축제가 열렸다. 하지만 여전히 축제를 반대하는 사람들과의 갈등으로 매년 힘겹게 축제가 진행된다.
미국 최대의 퀴어 축제이자 세계적으로도 손꼽히는 San Francisco Pride Festival에서 막 돌아온 박도담 심리상담사&활동가를 뜻밖의 상담소에서 만났다.
2024 서울퀴어퍼레이드에 다다름 깃발과 함께 참석한 박도담 활동가
“저는 상담실 안과 밖에서 변화를 만들어내기 위해 움직이는 활동가입니다”
Q. 샌프란시스코의 퀴어 축제를 다녀오셨는데 어땠나요?
호주, 대만, 도쿄에 이어 4번째로 방문한 해외 퀴어축제였어요. 해외 퀴어축제에 다녀오면 저의 한계가 확장되는 느낌이 들어요. 인권 감수성을 높일 수 있는 경험이라 일부러 더 찾아다니고 있어요.
이번에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갔을 때도 혐오 세력이 있더라고요. 좀 놀랐어요. 왜냐하면 호주랑 대만이랑 도쿄에서는 제가 딱히 못 봤거든요. 전 세계 공용어가 있는 것처럼 ‘동성애는 죄악이다, 회개하라, 지옥 간다’ 이 말을 한국과 너무 똑같이 말하는 걸 들으니 흥미로웠어요. 어디에서부터 이 세계 공용어가 된 혐오의 뿌리가 생긴 건지 궁금해지더라고요. 우리가 잘못 수입해 온 건가 싶기도 하고. 근데 혐오를 표현하는 사람들이 너덧 명으로 숫자가 너무 적으니까, 축제에 참여한 사람들이 신경 쓰지도 않았고, 오히려 그 앞에서 막 춤추고 놀았어요. 유쾌하게 맞받아칠 수 있는 ‘이게 축제지!!’ 싶어서 너무 재밌더라고요.
호주에 갔을 때는 LGBT 인권 컨퍼런스가 있었는데 거기서 해바라기 무늬가 있는 아이템을 착용할 수 있게 배부해줬는데 그게 보이지 않는 장애를 갖고 있는 사람이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표시였어요. ‘나는 보이지 않는 장애가 있어요’라고 가시화를 하면서 혹여나 이 사람에게 필요한 것들 지원이 뭐가 있는지를 물어볼 수 있고, 서로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는 그런 역할을 하더라구요. 퀴어축제에서 그런 새로운 문화를 접하는 게 되게 재밌는 것 같아요.
미국 퀴어축제에서 구입한 해바라기 무늬 목걸이
Q. 본인 소개 페이지에 상담실 안과 밖에서 변화를 만들어내기 위해 움직이는 활동가라고 소개하셨는데 그 이유인지 궁금합니다.
제가 대학생 때 손을 뜯는 불안 행동을 동반한 우울한 시기가 있었어요. 남들이 보기에는 좋은 대학도 갔고, 성적도 좋아서 이제 취직하면 되겠다고 생각할 수 있는 안정적인 위치에 있었는데도 저는 세상 우울한 거예요. 내가 공부한 것들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도 모르겠고, 앞으로의 삶을 대학에서 벗어나서 어떻게 헤쳐 나갈지도 자신이 없어지기도 하고. 할 수 있다면 ‘내가 이렇게 열심히 가꿔온 온 삶이니까 차라리 다른 사람에게 주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제 삶을 살고 싶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때 개인 상담을 받으면서 제가 세상을 잿빛으로 보게 만드는 색안경을 끼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게 되었어요. 그러면서 나처럼 ‘남들이 보기에는 괜찮을 수 있지만 주관적으로는 고통에 휩싸여 있는 그런 사람들의 곁에서 같이 살자고 손을 내밀고 싶다’는 생각에 상담사가 되겠다고 마음먹었어요.
대학교에 들어가서 저의 세계를 가장 확장해준 것은 친구들과 함께 배우고 실천한 페미니즘이었어요. 페미니즘을 통해 저 또한 불평등한 시스템 안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자각했고, 자연스럽게 젠더폭력 이슈가 제 삶의 영역으로 들어왔어요. 그래서 성폭력 및 가정폭력 피해자를 지원하는 심리상담소에서 상담사로서의 일을 시작하게 되었어요.
많은 상담사들이 사회 문제와 개인의 심리적 문제를 분리해서 봐요. 개인의 심리적 문제에 더 집중해서 상담을 진행하다 보니 사회 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는 분위기가 있어요. 그런데 특히 개인이 지니고 있는 소수자성은 아무리 상담실 안에서 내담자에게 ‘있는 모습 그대로 괜찮아요’라고 말해도 상담실 밖으로 나가면 끊임없이 차별과 편견을 마주하면서 살아야 되니까 그 말이 무력해지는 순간들이 많잖아요. 그래서 저도 상담실 밖으로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2021년에 많은 트랜스젠더분들이 돌아가시면서 ‘더는 못 견디겠다, 우리가 뭔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너무나 커졌어요. ‘나 같은 사람들이 어디엔가 있겠지, 없어도 나는 뭔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정말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그렇게 동참을 해주셔서 많이 놀랍기도 했고, 이제는 진짜 바뀔 때가 됐구나, 물결이 새롭게 오는구나라고 느꼈던 것 같아요.
박도담 활동가의 뜻밖의 상담소 내 상담공간
“저 스스로가 잘 살기 위해서,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친구들과 아끼는 내담자들도 함께 잘 살 수 있기 위한 방법을 찾고 있어요”
Q. 성소자와 함께하는 상담사 모임 다다름은 어떻게 활동하고 있나요?
2021년에 다다름 모임을 시작하며 냈던 성명서에 600명의 심리상담사가 함께 연명했고 지금은 한 250명 정도가 단톡방에 있어요. 회원제로 운영하지 않기 때문에 단톡방에 있다고 해서 모두 다다름 회원인 건 아니에요. 핵심 멤버라고 할 수 있는 운영진은 대표인 저를 포함해 6명이에요. 주로 운영진이 활동을 꾸리고 가끔씩 상담사분들 중에 자원활동가를 구해서 함께 활동을 진행하기도 합니다.
250명이 있지만 다 같이 활동하는 게 아니기도 하고, 제가 돈을 주고 고용할 수 있는 어떤 그런 단체도 아니에요. 선의와 자발적 의지에 의해서만 굴러가는 단체의 대표이다 보니까 어떤 틀을 잡고 지속 가능하게 활동을 운영해야 할지가 큰 고민이에요. 나의 단체라고 생각할까 봐, 그래서 나만을 위한 결정을 내리게 될까 봐, 다른 사람들과 발을 맞추지 않을까 봐 늘 조심스러운데 여전히 좋은 대표가 뭔지 모르겠어요.
어떤 경우에는 먼저 조금 더 적극적으로 의견을 내서 이끌어주면 좋겠다, 그건 대표의 권한이기도 하다고 얘기하는 경우도 있고, 어떤 경우에는 그럼에도 다양한 의견들을 더 듣고 더 반영해 주면 좋겠다고 얘기하기도 하니까 그 중간을 맞추는 게 너무 어렵더라고요. 제가 단체 이름을 다 다르다는 의미로 ‘다다름’이라고 지었거든요. 근데 진짜 생각이 다 다르더라고요.
그리고 제가 욕심이 너무 많은 대표다 보니까 어떨 때는 조직이 다 같이 무리를 하게 된 것 같기도 해요. 제 욕심만큼 함께하는 동료들이 따라와주지 않는다고 느낄 때는 서운하기도 하고 외롭다고 느낄 때도 있었어요. 단체를 어떻게 운영하면 좋을지 모르겠고 책임질 게 많아서 힘들다고 토로하니, 제 동료가 ‘그게 대표의 일이야’라고 말하더라고요. 그 말을 듣고 대표의 무게를 그대로 받아들여야겠다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내가 상담사인데, 또는 내가 대표인데 이래도 되나‘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어요. 그렇지만 ’나도 인간이다.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할 수 있는 만큼 하려고 해요.
저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이라 함께하는 사람이 없었다면 이 모든 것이 다 가능하지 않았을 거예요. 다다름을 통해서 함께하는 동료들을 만나고 ‘이렇게 활동을 해도 되는구나, 이 아이디어들이 이렇게 실현되는구나!’ 싶은 경험을 많이 했어요. 뭔가 하자고 했을 때 같이 고민해 보고 ‘예스’ 해 줄 수 있는 사람, 또 저를 걱정해 주고 브레이크를 잠깐 걸어주면서 숨을 고를 수 있게 해주기도 하고. 상담사로서도, 활동가로서도 든든한 동료들을 지금은 얻은 것 같아서 너무 좋아요. 함께 하는 게 너무 고맙고 앞으로도 계속 함께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대담한 쫄보 박도담 활동가의 뒷모습
Q. 원래 적극적으로 나서서 움직이는 리더형의 사람인가요?
저는 원래 나서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에요. 되게 내향적인 사람이에요. 근데 정말 목소리를 안 낼 수가 없는 때가 온 거죠. ‘아무도 안 한다면, 나라도 해야겠다’ 해서 하다 보니까 이렇게 온 거에요. 주변에는 농담처럼 ‘저는 생계적 외향형이다’라고 얘기하곤 해요.
정말 어떤 역할과 목적이 뚜렷할 때만 외향적인 모습을 하지 사실은 새로운 사람 만나는게 무서워요. 유명해지고 싶지도 않고 그냥 제가 하고 싶은 걸 자유롭게 하고 싶어요. 조용조용하게 살고 싶은데 그게 안 되는 것 같아요. 제가 목소리를 내면 문제의식을 갖고 참여할 수 있는 사람들이 생길 수 있으니까 이렇게 인터뷰도 하는데, 얼굴을 공개하는 건 아직 쑥스럽답니다. 저를 스스로 ‘대담한 쫄보’라고 생각해요.
Q. 스스로를 ‘모난돌’이라고 생각했다고 들었는데 그 이유가 있나요?
고3 때까지는 정말로 그냥 잘 만든 돌이었어요. 공부 잘하고, 학교에서 시키는 거 잘하는 학생으로 너무나 반듯한 돌이었는데 사실은 그 안에 반항의 씨앗을 계속 늘 품고 있었어요. 아버지가 전교조 교사여서 어릴 때부터 저를 집회 현장에 데려갈 때도 있다 보니까 내 권리를 얻으려면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는 걸 되게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어요.
스스로 ‘운동권 금수저였다’고 생각해요. 어렸을 때부터 겉으로는 선생님들이나 어른들이 좋아하는 그런 모범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안에서는 ‘대학 가면 이 불평등한 사회를 뒤집어 놓겠다’ 이런 생각을 했었거든요. 전공책을 끼고 집회에 가는 게 제가 고등학생 시절에 갖고 있던 로망이었어요.
그래서 대학에 들어온 후에 실컷 여러 집회를 다녔어요. 아무리 집회에 가도 사회 변화는 멀게 느껴졌지만, 페미니즘을 만나게 되면서 제 삶은 크게 달라졌어요. 이전에 내가 설명할 수 없었던 불편했던 경험들이 페미니즘의 언어를 통해 명확해지면서 이제 이전처럼 못 살겠더라고요. 일상 곳곳에서 일어나는 차별을 더 민감하게 알아차리게 되니까, 너무 화가 나고 불편해지더라고요. 그래서 그때는 진짜 일상을 전사처럼 살았어요. 가족과도 싸우고, 애인과도 싸우고, 친구랑도 싸우면서 되게 외로워지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지금도 저는 제가 모난 돌이라고 생각해요. 사실 사회 시스템에 잘 못 어울리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때가 많아요. 그런데 이젠 ‘모난 돌이면 뭐 어때’라고 생각하면서 저만이 지니고 있는 결을 소중하게 여기려 하고 있어요. 또 저의 유별날 수 있는 모습을 좋아해주는 사람들이 곁에 있으니 든든해요. 그래서 모난 돌들끼리 서로 부둥부둥하면서 돌봄의 공동체를 만드는 것에 관심이 많아요.
사람을 찾아가서 만나고 관계를 쌓아야지만 뭔가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잖아요. 저는 저 스스로가 잘 살기 위해서,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친구들과 아끼는 내담자들도 함께 잘 살 수 있기 위한 방법을 찾고 있어요.
뜻밖의 상담실 곳곳에 있는 성소수자 지지와 환대
“앞으로 어떤 사람이고 싶냐고 하면 저는 ‘퀴어링(queering)’하는 사람이라고 말할게요.”
Q. 다다름의 비전과 활동가 박도담의 비전은 무엇인가요?
다다름의 비전이 뭐냐, 활동의 목표가 뭐냐, 이 단체는 결국 어떤 단체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답을 하기가 너무 어렵더라고요. 저는 어쩌다 대표가 됐을 뿐이에요. 제가 그때그때마다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좋아하는 활동들을 막 해 왔어요.
그런데 올해는 이제 정말로 점검하고 정비해야 하는 시기인 것 같아요. 여태까지 운영 규칙이 딱히 있지도 않았고, 대표도 임기라든지, 어떻게 선출할 것인지 이런 것들이 진짜 하나도 없었어요. 저희 운영진도 이제는 이런 방식으로 계속 가기는 어렵겠다고 느끼고 있거든요. 우리가 어떻게 평등한 관계를 맺을 것인지 약속문도 만들고 있고, 어떻게 운영 체계를 만들 건지 고민하는 시점인 것 같아요. 지속가능한 운영을 위한 토대를 만드는 것이 저희의 올해 핵심 과제인 것 같아요.
다다름에서는 그동안 상담사들의 성소수자 상담에 대한 전문성, 감수성을 증진시키는 것에 초점을 맞췄다면, 올해는 ‘더 많은 당사자들 만나고 싶다, 상담의 문턱이 아직 높으니까 꼭 상담이 아니더라도 서로가 서로를 돌볼 수 있는 그런 망을 만들고 싶다’는 마음으로 활동을 하고 있어요. 이 다음엔 무엇을 하겠다는 비전은 특별히 없어요.
하지만 앞으로 어떤 사람이 되고 싶냐고 하면 저는 ‘퀴어링(queering)’하는 사람이라고 말할게요. 어떤 것이든 퀴어하게 바라보고 퀴어하게 행동을 할 수 있는, 그래서 사회에서 말하는 정상과 비정상의 규범을 비틀어버려서 새로운 가능성을 만들어내는 사람. 사실 잘 들여다보면 우리 모두에게는 퀴어하다고 할 수 있는 ‘별난’, ‘무른’ 부분들이 다 있거든요. 각자의 퀴어함으로 모두 연결될 수 있으면 좋겠어요.
예전에는 모난 돌들끼리 잘 사는 것에 집중했다면 이제 좀 확장돼서 우리가 다 같이 진짜 잘 살 수 있게끔 하는 방안이 뭘까를 고민하는 것 같아요. 사회를 바꾸는 건 늘 어렵지만, 조금씩이라도 관심 있고 의지가 있는 사람들이 서로 모여서 소통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면 언젠가 바뀔 수 있을 거라 믿어요. 겁은 많지만 가능한 많이많이 연결되고 싶은 것 같아요. 결국에는 다 같이 살아야 되잖아요.
박도담 활동가는 인터뷰 내내 참 다정했고, 인간에 대한 애정이 가득했다. 그는 평소에 다람쥐처럼 본인을 지지하고 함께하는 이들의 눈빛을 잘 모아두었다가 지치고 힘들어서 마음이 황량해질 때마다 하나씩 꺼내 쓴다고 말했다. 이 말을 듣고 다람쥐가 부지런히 산 이곳저곳에 도토리를 저장해 두는 모습이 떠올랐다. 다람쥐가 묻어둔 수많은 도토리 중 일부는 추운 겨울을 지나 새봄에 싹을 틔운다. 다람쥐의 이기적인 마음에서 비롯된 도토리 저장은 결국 숲에 더 많은 도토리나무를 만드는 씨앗인 셈이다. 박도담 활동가가 본인의 관심과 호기심을 따라 해 온 활동들은 언젠가 더 많은 다양성을 포용하는 평등하고 다정한 세상이 될 수 있는 씨앗이 될 것 같다는 묵직한 기대감이 차올랐다.
#서울 #박도담 #뜻밖의상담소 #성소수자 #페니미즘 #심리상담 #활동가인터뷰
글쓴이 : 문은옥
진달래먹고 물장구치는 깡시골에서 자연과과 함께하는 어린시절을 보내다가 인간이란 동물이 궁금해져서 심리학도가 되어 20대를 보냈고, 시민단체 상근활동가로 30대를 보내고 있다. 나와 내 동료 활동가들이 몸도 마음도 건강히 활동할 수 있도록 돕는 정신건강 활동에 큰 관심을 갖고 있다.
매년 6월에는 세계 곳곳에서 성소수자(LGBT: 레즈비언, 게이, 양성애자 및 트렌스젠더) 축제가 열린다. 다양한 성적 지향을 가진 사람들이 무지개색 깃발을 흔들며 모두에게 동등한 사랑과 성소수자의 권리를 외치며 거리를 행진한다. 대한민국에서는 서울에서 2000년에 제1회 서울퀴어문화축제를 개최한 것을 시작으로 대구, 부산, 전주, 인천 그리고 올해 대전에서 퀴어 축제가 열렸다. 하지만 여전히 축제를 반대하는 사람들과의 갈등으로 매년 힘겹게 축제가 진행된다.
미국 최대의 퀴어 축제이자 세계적으로도 손꼽히는 San Francisco Pride Festival에서 막 돌아온 박도담 심리상담사&활동가를 뜻밖의 상담소에서 만났다.
2024 서울퀴어퍼레이드에 다다름 깃발과 함께 참석한 박도담 활동가
“저는 상담실 안과 밖에서 변화를 만들어내기 위해 움직이는 활동가입니다”
Q. 샌프란시스코의 퀴어 축제를 다녀오셨는데 어땠나요?
호주, 대만, 도쿄에 이어 4번째로 방문한 해외 퀴어축제였어요. 해외 퀴어축제에 다녀오면 저의 한계가 확장되는 느낌이 들어요. 인권 감수성을 높일 수 있는 경험이라 일부러 더 찾아다니고 있어요.
이번에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갔을 때도 혐오 세력이 있더라고요. 좀 놀랐어요. 왜냐하면 호주랑 대만이랑 도쿄에서는 제가 딱히 못 봤거든요. 전 세계 공용어가 있는 것처럼 ‘동성애는 죄악이다, 회개하라, 지옥 간다’ 이 말을 한국과 너무 똑같이 말하는 걸 들으니 흥미로웠어요. 어디에서부터 이 세계 공용어가 된 혐오의 뿌리가 생긴 건지 궁금해지더라고요. 우리가 잘못 수입해 온 건가 싶기도 하고. 근데 혐오를 표현하는 사람들이 너덧 명으로 숫자가 너무 적으니까, 축제에 참여한 사람들이 신경 쓰지도 않았고, 오히려 그 앞에서 막 춤추고 놀았어요. 유쾌하게 맞받아칠 수 있는 ‘이게 축제지!!’ 싶어서 너무 재밌더라고요.
호주에 갔을 때는 LGBT 인권 컨퍼런스가 있었는데 거기서 해바라기 무늬가 있는 아이템을 착용할 수 있게 배부해줬는데 그게 보이지 않는 장애를 갖고 있는 사람이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표시였어요. ‘나는 보이지 않는 장애가 있어요’라고 가시화를 하면서 혹여나 이 사람에게 필요한 것들 지원이 뭐가 있는지를 물어볼 수 있고, 서로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는 그런 역할을 하더라구요. 퀴어축제에서 그런 새로운 문화를 접하는 게 되게 재밌는 것 같아요.
미국 퀴어축제에서 구입한 해바라기 무늬 목걸이
Q. 본인 소개 페이지에 상담실 안과 밖에서 변화를 만들어내기 위해 움직이는 활동가라고 소개하셨는데 그 이유인지 궁금합니다.
제가 대학생 때 손을 뜯는 불안 행동을 동반한 우울한 시기가 있었어요. 남들이 보기에는 좋은 대학도 갔고, 성적도 좋아서 이제 취직하면 되겠다고 생각할 수 있는 안정적인 위치에 있었는데도 저는 세상 우울한 거예요. 내가 공부한 것들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도 모르겠고, 앞으로의 삶을 대학에서 벗어나서 어떻게 헤쳐 나갈지도 자신이 없어지기도 하고. 할 수 있다면 ‘내가 이렇게 열심히 가꿔온 온 삶이니까 차라리 다른 사람에게 주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제 삶을 살고 싶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때 개인 상담을 받으면서 제가 세상을 잿빛으로 보게 만드는 색안경을 끼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게 되었어요. 그러면서 나처럼 ‘남들이 보기에는 괜찮을 수 있지만 주관적으로는 고통에 휩싸여 있는 그런 사람들의 곁에서 같이 살자고 손을 내밀고 싶다’는 생각에 상담사가 되겠다고 마음먹었어요.
대학교에 들어가서 저의 세계를 가장 확장해준 것은 친구들과 함께 배우고 실천한 페미니즘이었어요. 페미니즘을 통해 저 또한 불평등한 시스템 안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자각했고, 자연스럽게 젠더폭력 이슈가 제 삶의 영역으로 들어왔어요. 그래서 성폭력 및 가정폭력 피해자를 지원하는 심리상담소에서 상담사로서의 일을 시작하게 되었어요.
많은 상담사들이 사회 문제와 개인의 심리적 문제를 분리해서 봐요. 개인의 심리적 문제에 더 집중해서 상담을 진행하다 보니 사회 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는 분위기가 있어요. 그런데 특히 개인이 지니고 있는 소수자성은 아무리 상담실 안에서 내담자에게 ‘있는 모습 그대로 괜찮아요’라고 말해도 상담실 밖으로 나가면 끊임없이 차별과 편견을 마주하면서 살아야 되니까 그 말이 무력해지는 순간들이 많잖아요. 그래서 저도 상담실 밖으로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2021년에 많은 트랜스젠더분들이 돌아가시면서 ‘더는 못 견디겠다, 우리가 뭔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너무나 커졌어요. ‘나 같은 사람들이 어디엔가 있겠지, 없어도 나는 뭔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정말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그렇게 동참을 해주셔서 많이 놀랍기도 했고, 이제는 진짜 바뀔 때가 됐구나, 물결이 새롭게 오는구나라고 느꼈던 것 같아요.
박도담 활동가의 뜻밖의 상담소 내 상담공간
“저 스스로가 잘 살기 위해서,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친구들과 아끼는 내담자들도 함께 잘 살 수 있기 위한 방법을 찾고 있어요”
Q. 성소자와 함께하는 상담사 모임 다다름은 어떻게 활동하고 있나요?
2021년에 다다름 모임을 시작하며 냈던 성명서에 600명의 심리상담사가 함께 연명했고 지금은 한 250명 정도가 단톡방에 있어요. 회원제로 운영하지 않기 때문에 단톡방에 있다고 해서 모두 다다름 회원인 건 아니에요. 핵심 멤버라고 할 수 있는 운영진은 대표인 저를 포함해 6명이에요. 주로 운영진이 활동을 꾸리고 가끔씩 상담사분들 중에 자원활동가를 구해서 함께 활동을 진행하기도 합니다.
250명이 있지만 다 같이 활동하는 게 아니기도 하고, 제가 돈을 주고 고용할 수 있는 어떤 그런 단체도 아니에요. 선의와 자발적 의지에 의해서만 굴러가는 단체의 대표이다 보니까 어떤 틀을 잡고 지속 가능하게 활동을 운영해야 할지가 큰 고민이에요. 나의 단체라고 생각할까 봐, 그래서 나만을 위한 결정을 내리게 될까 봐, 다른 사람들과 발을 맞추지 않을까 봐 늘 조심스러운데 여전히 좋은 대표가 뭔지 모르겠어요.
어떤 경우에는 먼저 조금 더 적극적으로 의견을 내서 이끌어주면 좋겠다, 그건 대표의 권한이기도 하다고 얘기하는 경우도 있고, 어떤 경우에는 그럼에도 다양한 의견들을 더 듣고 더 반영해 주면 좋겠다고 얘기하기도 하니까 그 중간을 맞추는 게 너무 어렵더라고요. 제가 단체 이름을 다 다르다는 의미로 ‘다다름’이라고 지었거든요. 근데 진짜 생각이 다 다르더라고요.
그리고 제가 욕심이 너무 많은 대표다 보니까 어떨 때는 조직이 다 같이 무리를 하게 된 것 같기도 해요. 제 욕심만큼 함께하는 동료들이 따라와주지 않는다고 느낄 때는 서운하기도 하고 외롭다고 느낄 때도 있었어요. 단체를 어떻게 운영하면 좋을지 모르겠고 책임질 게 많아서 힘들다고 토로하니, 제 동료가 ‘그게 대표의 일이야’라고 말하더라고요. 그 말을 듣고 대표의 무게를 그대로 받아들여야겠다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내가 상담사인데, 또는 내가 대표인데 이래도 되나‘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어요. 그렇지만 ’나도 인간이다.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할 수 있는 만큼 하려고 해요.
저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이라 함께하는 사람이 없었다면 이 모든 것이 다 가능하지 않았을 거예요. 다다름을 통해서 함께하는 동료들을 만나고 ‘이렇게 활동을 해도 되는구나, 이 아이디어들이 이렇게 실현되는구나!’ 싶은 경험을 많이 했어요. 뭔가 하자고 했을 때 같이 고민해 보고 ‘예스’ 해 줄 수 있는 사람, 또 저를 걱정해 주고 브레이크를 잠깐 걸어주면서 숨을 고를 수 있게 해주기도 하고. 상담사로서도, 활동가로서도 든든한 동료들을 지금은 얻은 것 같아서 너무 좋아요. 함께 하는 게 너무 고맙고 앞으로도 계속 함께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대담한 쫄보 박도담 활동가의 뒷모습
Q. 원래 적극적으로 나서서 움직이는 리더형의 사람인가요?
저는 원래 나서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에요. 되게 내향적인 사람이에요. 근데 정말 목소리를 안 낼 수가 없는 때가 온 거죠. ‘아무도 안 한다면, 나라도 해야겠다’ 해서 하다 보니까 이렇게 온 거에요. 주변에는 농담처럼 ‘저는 생계적 외향형이다’라고 얘기하곤 해요.
정말 어떤 역할과 목적이 뚜렷할 때만 외향적인 모습을 하지 사실은 새로운 사람 만나는게 무서워요. 유명해지고 싶지도 않고 그냥 제가 하고 싶은 걸 자유롭게 하고 싶어요. 조용조용하게 살고 싶은데 그게 안 되는 것 같아요. 제가 목소리를 내면 문제의식을 갖고 참여할 수 있는 사람들이 생길 수 있으니까 이렇게 인터뷰도 하는데, 얼굴을 공개하는 건 아직 쑥스럽답니다. 저를 스스로 ‘대담한 쫄보’라고 생각해요.
Q. 스스로를 ‘모난돌’이라고 생각했다고 들었는데 그 이유가 있나요?
고3 때까지는 정말로 그냥 잘 만든 돌이었어요. 공부 잘하고, 학교에서 시키는 거 잘하는 학생으로 너무나 반듯한 돌이었는데 사실은 그 안에 반항의 씨앗을 계속 늘 품고 있었어요. 아버지가 전교조 교사여서 어릴 때부터 저를 집회 현장에 데려갈 때도 있다 보니까 내 권리를 얻으려면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는 걸 되게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어요.
스스로 ‘운동권 금수저였다’고 생각해요. 어렸을 때부터 겉으로는 선생님들이나 어른들이 좋아하는 그런 모범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안에서는 ‘대학 가면 이 불평등한 사회를 뒤집어 놓겠다’ 이런 생각을 했었거든요. 전공책을 끼고 집회에 가는 게 제가 고등학생 시절에 갖고 있던 로망이었어요.
그래서 대학에 들어온 후에 실컷 여러 집회를 다녔어요. 아무리 집회에 가도 사회 변화는 멀게 느껴졌지만, 페미니즘을 만나게 되면서 제 삶은 크게 달라졌어요. 이전에 내가 설명할 수 없었던 불편했던 경험들이 페미니즘의 언어를 통해 명확해지면서 이제 이전처럼 못 살겠더라고요. 일상 곳곳에서 일어나는 차별을 더 민감하게 알아차리게 되니까, 너무 화가 나고 불편해지더라고요. 그래서 그때는 진짜 일상을 전사처럼 살았어요. 가족과도 싸우고, 애인과도 싸우고, 친구랑도 싸우면서 되게 외로워지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지금도 저는 제가 모난 돌이라고 생각해요. 사실 사회 시스템에 잘 못 어울리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때가 많아요. 그런데 이젠 ‘모난 돌이면 뭐 어때’라고 생각하면서 저만이 지니고 있는 결을 소중하게 여기려 하고 있어요. 또 저의 유별날 수 있는 모습을 좋아해주는 사람들이 곁에 있으니 든든해요. 그래서 모난 돌들끼리 서로 부둥부둥하면서 돌봄의 공동체를 만드는 것에 관심이 많아요.
사람을 찾아가서 만나고 관계를 쌓아야지만 뭔가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잖아요. 저는 저 스스로가 잘 살기 위해서,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친구들과 아끼는 내담자들도 함께 잘 살 수 있기 위한 방법을 찾고 있어요.
뜻밖의 상담실 곳곳에 있는 성소수자 지지와 환대
“앞으로 어떤 사람이고 싶냐고 하면 저는 ‘퀴어링(queering)’하는 사람이라고 말할게요.”
Q. 다다름의 비전과 활동가 박도담의 비전은 무엇인가요?
다다름의 비전이 뭐냐, 활동의 목표가 뭐냐, 이 단체는 결국 어떤 단체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답을 하기가 너무 어렵더라고요. 저는 어쩌다 대표가 됐을 뿐이에요. 제가 그때그때마다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좋아하는 활동들을 막 해 왔어요.
그런데 올해는 이제 정말로 점검하고 정비해야 하는 시기인 것 같아요. 여태까지 운영 규칙이 딱히 있지도 않았고, 대표도 임기라든지, 어떻게 선출할 것인지 이런 것들이 진짜 하나도 없었어요. 저희 운영진도 이제는 이런 방식으로 계속 가기는 어렵겠다고 느끼고 있거든요. 우리가 어떻게 평등한 관계를 맺을 것인지 약속문도 만들고 있고, 어떻게 운영 체계를 만들 건지 고민하는 시점인 것 같아요. 지속가능한 운영을 위한 토대를 만드는 것이 저희의 올해 핵심 과제인 것 같아요.
다다름에서는 그동안 상담사들의 성소수자 상담에 대한 전문성, 감수성을 증진시키는 것에 초점을 맞췄다면, 올해는 ‘더 많은 당사자들 만나고 싶다, 상담의 문턱이 아직 높으니까 꼭 상담이 아니더라도 서로가 서로를 돌볼 수 있는 그런 망을 만들고 싶다’는 마음으로 활동을 하고 있어요. 이 다음엔 무엇을 하겠다는 비전은 특별히 없어요.
하지만 앞으로 어떤 사람이 되고 싶냐고 하면 저는 ‘퀴어링(queering)’하는 사람이라고 말할게요. 어떤 것이든 퀴어하게 바라보고 퀴어하게 행동을 할 수 있는, 그래서 사회에서 말하는 정상과 비정상의 규범을 비틀어버려서 새로운 가능성을 만들어내는 사람. 사실 잘 들여다보면 우리 모두에게는 퀴어하다고 할 수 있는 ‘별난’, ‘무른’ 부분들이 다 있거든요. 각자의 퀴어함으로 모두 연결될 수 있으면 좋겠어요.
예전에는 모난 돌들끼리 잘 사는 것에 집중했다면 이제 좀 확장돼서 우리가 다 같이 진짜 잘 살 수 있게끔 하는 방안이 뭘까를 고민하는 것 같아요. 사회를 바꾸는 건 늘 어렵지만, 조금씩이라도 관심 있고 의지가 있는 사람들이 서로 모여서 소통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면 언젠가 바뀔 수 있을 거라 믿어요. 겁은 많지만 가능한 많이많이 연결되고 싶은 것 같아요. 결국에는 다 같이 살아야 되잖아요.
박도담 활동가는 인터뷰 내내 참 다정했고, 인간에 대한 애정이 가득했다. 그는 평소에 다람쥐처럼 본인을 지지하고 함께하는 이들의 눈빛을 잘 모아두었다가 지치고 힘들어서 마음이 황량해질 때마다 하나씩 꺼내 쓴다고 말했다. 이 말을 듣고 다람쥐가 부지런히 산 이곳저곳에 도토리를 저장해 두는 모습이 떠올랐다. 다람쥐가 묻어둔 수많은 도토리 중 일부는 추운 겨울을 지나 새봄에 싹을 틔운다. 다람쥐의 이기적인 마음에서 비롯된 도토리 저장은 결국 숲에 더 많은 도토리나무를 만드는 씨앗인 셈이다. 박도담 활동가가 본인의 관심과 호기심을 따라 해 온 활동들은 언젠가 더 많은 다양성을 포용하는 평등하고 다정한 세상이 될 수 있는 씨앗이 될 것 같다는 묵직한 기대감이 차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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