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님을 통영에서 만나게 될 줄이야.' 몇 년 전 서울시 프로젝트로 만났던 인연인데, 2018년부터 통영을 기웃하다 2019년부터 청년들과 계속 일을 벌이고 있었다. 잠깐 프로젝트를 하나 싶었는데 벌써 횟수로 통영생활 2년차다. 도대체 무슨 일을 하는지 궁금해서 통영으로 향했다. 도시재생 뉴딜사업인 한창인 통영시 봉평지구도시재생센터에서 부산 청년 최정원을 다시 만났다.
** 사진설명 : 마이크를 든, 엄지척 청년이 최정원입니다.
무엇이 되고 싶은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찾고 싶어서
정원님을 통영에서 다시 만나네요.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부산과 통영을 오가고 있죠? 통영에서 뭐해요?
부산에서 하던 청춘연구소 활동 무대를 통영으로 옮겨서 하고 있죠. 봉평지구도시재생센터 코디네이터도 겸하고 있어요.
문화기획자로 기억하는데 도시재생센터 코디네이터라니, 좀 의외였어요.
처음부터 도시재생으로 시작을 한 건 아니고요, 어찌 보면 원론적으로 교육에 대한 부분들, 특히 청년의 문제로 접근을 했죠.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까지 갔다 왔는데도 무엇을 해야 할지 명확하게 진로도 꾸려지지 않고 직업이라든가 사회적인 역할 이런 것들도 제대로 못 찾고 있는 부분들이 너무 컸어요. 이것은 교육의 문제라고 생각하고 어떻게 해결해 나갈까하는 고민에서 제일 처음 이 일을 시작했던 것 같아요.
개인 최정원의 진로가 아닌 청년의 문제?
네. 그래서 청년단체를 만들었어요. 단체의 역할이라든지 미션도 정확하게 구분하지 않은 상태에서 조직되어서 처음 그 작업부터 시작했어요. 여러 청년들 만나면서 의견도 듣고 이야기도 나누면서 조금씩 조금씩 문제들을 가시적이고 구체적으로 발굴하기 시작했죠.
저희가 1년 정도는 다른 지역들을 돌아다녔거든요. 다른 지역의 청년들은 어떤 활동을 하고 어떤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는지를 1년 동안 돌아다니면서 보고 들었죠. 같이 시작한 공동대표가 아주 특이한 곳이 있다고 해서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이 ‘최게바라기획사’였어요. ‘또라이포럼’이 연결고리가 되어 광주, 대구, 전주 다른 지역들과도 커뮤니케이션 하면서 활동가들이랑도 많이 만나게 됐죠.
그게 아마 2015년도 일거예요. 2014년에 출발해서 2015년까지 많이 돌아다녔죠. 사실 정체성 찾는 게 제일 시급했었어요. 1년을 채우고 나서 문화기획자라는 정체성을 조금씩 가지기 시작했던 거죠.
문화기획자로 개인의 정체성도 갖게 된 건가요?
예, 그렇죠. 원래는 교육을 시작했으니까 그것에 대한 프라이드가 강해서 사실 내려놓기가 굉장히 어려웠는데 교육의 흐름들이 문화로 가고 있어서 문화기획자라는 정체성을 가지기 그때 시작했었고 그러면서 활동의 폭을 조금 많이 넓혔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제일 처음에는 자조모임으로 시작했다가 축제·교육·컨설팅, 그다음에 사회활동, 환원 활동까지 이어졌어요. 그래서 처음에는 제의가 많이 오더라고요. 그런데 그런 거 다 거부하고 우리끼리 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에 대해서 연구를 많이 하고 기획해서 직접 연결해서 실행해 보는 것, 이런 것을 많이 했어요.
작은 소모임에서 활동가라는 정체성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1년 이었군요. 부산은 청년네트워크나 청년활동들이 활발한가요?
처음에는 되게 힘들었죠. 그때 당시에 그런 문화 자체가 없었어요. 지금은 상당히 많아졌고 오히려 대외활동이라는 개념으로 엄청 활성화되어 있고 조금 더 나가서 활동가 영역으로 들어오는 친구들도 제법 있고요.
청년네트워크들도 제법 있었죠. 당시에 서로 활동가들끼리 같이 교류하는 프로그램도 많이 있었어요. 저희도 했거든요. 그런데 저희가 지향점이 좀 달랐어요. 저희는 조금 더 일반적으로 대중적으로 이렇게 파고들고 싶은 마음이 강했어요. 단체끼리의 네트워크 보다는 조직 밖의 개인들, 그 중에서도 리더나 사회공헌을 하고 싶어하는 청년들을 만나서 같이 이야기하는 것, 그런 활동을 더 많이 했던 것 같아요.
통영으로 무대를 옮기다
* 사진설명 : 서포루에서 바라본 통영 앞바다, 아는 사람에게는 저멀리 봉평지구도시재생센터가 보인다.
도시재생에 원래 관심이 많았나요?
저희가 지역에서 활동하다 보니까 흐름이 문화에서 도시재생 쪽에서 가더라고요. 공공영역에서 문화를 담을 수 있는 많은 부분이 도시재생으로 이동하는. 하드웨어 기반이 되니까.
저희처럼 교육활동가들은 대부분 지역의 공동체 기반으로 해서 지역 문제들을 해결하는 쪽으로 다 가잖아요, 사실은 하드웨어가 일을 하는 게 아니라. 활동을 하면서 커뮤니티 시설이 거점 시설이 되고 이렇게 하는데 이것은 그게 아니라 처음부터 거점 시설을 만들고 인위적으로 공동체를 만들고 사람들의 인식을 개선해서 공동체를 활성화시키고 하겠다는 거니까 중간 단계를 다 건너뛰면서 갈등이 생기는 거죠.
뭔가 도시재생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해결하고 싶은 마음이 강했군요.
네, 지역에서 마을활동가, 특히 도시재생 활동가는 뉴딜이 들어오기 전과 후로 느낌이 다르긴 해요. 활동기반을 정부나 지자체의 자원 없이 민간에서 오롯이 만들어서 시작해서 공동체 기반으로 시작했던 게 처음의 흐름이었는데 뉴딜이 들어오면서 하드웨어 사업이 됐잖아요. 그러니까 돈이 막대하게 들어오니까 기존의 공동체가 깨지기 시작하는 거죠. 그런 부분들을 다시 정리해서 공동체 기반 하드웨어를 결합하는 지점들을 만드는 데 되게 소요되는 시간들이 제법 많았다고 하더라고요.
** 사진설명 : 봉평동 마을주민들과 함께 만든 지구별 혁신대학
이런 문제 의식이 통영으로 오게 된 계기가 되었나요?
사실 처음에 고민 많이 했어요. 광역단위보다는 소도시 단위로 가서 뭔가 좀 더 밀도 있게 어떤 기획들을 풀어내 보고 싶은 욕심이 조금 있었어요, 그리고 저는 자유롭게 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거든요. 그런 환경을 만들고 나서 여기로 온거죠.
사실 저도 위촉직으로 시와 협치하고 있는 거잖아요, 그래서 어찌 보면 주민과 행정 사이 가운데 매개 역할들을 정확히 하기는 좀 어려워요. 수당은 시에서 받고, 일은 주민들과 해야 하는데 서로의 입장이 다르잖아요. 그러면 제가 중간에서 입장을 잘 대 대변해줘야 하는데 그걸 중립적으로 하기가 굉장히 어려운거죠.
그냥 있으면 최정원이 아니죠. 뭐라도 하셔야죠
문제는 명확하기 때문에 구조를 바꾸는 것들을 먼저 하고 있어요. 민간에서 중간지원 조직을 만들 수 있는 마을관리협동조합이라든지, 주민들이 주체로 세워져서 시랑 거버넌스 구조를 만들 수 있는 기초 설계라든지. 활성화계획을 수정할 때 이런 구조들을 살짝 살짝 넣었어요.
지금의 흐름으로 정원님의 선택에 만족하십니까?
지나봐야 알죠. 2023년 될 때까지는 모르니까.
일 해보니 통영이라는 작은 도시의 도시재생 활동가, 특히 청년활동가들의 위상은 어때요? 청년들의 역할에 불만도 있을 것이고, 그나마 청년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들도 있을 것이고.
기본법도 생기고 여러 가지 법적인, 제도적인 장치들이 생기면서 사회안전망은 굉장히 탄탄해져 가지만 어찌 보면 청년이 약자가 되고 지원해야 하는 대상자가 되다 보니까 지역사회에 진입했을 때 동일한 입장으로 설정을 안 해 줘요. 저는 민-관의 이해를 이끌어내야 하다 보니 고립감을 엄청나게 많이 느끼거든요. 그래서 여기 들어왔을 때 현장센터의 입지를 만드는 게 제일 첫 번째 목표였어요. 왜냐하면 입지가 없었거든요, 아예. 입지 자체가 없었어요. 현장센터라는 개념 자체를 이해하는 사람이 일단 없었는데. 그리고 저희가 뭐 하는지도 모르고. 시에서는 과업을 줄 수도 없고. 저희는 알아서 과업을 생성해야 하는 입장이었으니까.
지역 청년들과 벌리는 일, 기록하고 지속가능한 공동체를 만들다
SNS에 올리는 글 보니 정말 뭔가를 계속 벌리더군요. 지원사업, 공모사업 선정소식도 들리고. 청년들과 마을아카이빙을 시작한 것 같던데요. 통영에서 하는 일들 하나씩 풀어보시지요.
저나 청춘연구소가 하고 싶고, 해야 할 일은 지역 안에서 청년의 역할을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도시재생, 지역에서 벌어지는 사업과 활동에 청년들이 주체로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내는 거죠. 아카이빙도 그런 차원이예요.
특히 도시재생은 개발보다는 보존의 입장인데 통영은 그런 면에서는 부족해요. 시에서 보존을 안 한 거예요. 전문가들이 들어와서 제일 먼저 지적했던 게 아카이빙이었거든요. “아카이빙 사업을 해라. 이거 왜 기록 안 하냐? 진행되는 모든 과정들에 대한 것들을 기록하고 현존하는 모든 기자재라든지 사물, 시각적으로 보이는 것들도 기록을 해 놔야 한다.”라고 했는데 지금까지는 기록된 게 전혀 없고. 사전에 LH공사가 신아조선소를 매입하면서 이곳만의 산업정체성을 남겨놔야 하는데 하나도 안 남겨 놓은 거예요. 이만큼 개발해 놓고는 아카이빙 한 개도 안 해 놨어요.
나중에 이것을 다 개발하고 나면 분명히 문제가 생길 거거든요. 그때 보존했던 기록했던 것들을 대조하면서 성찰해야 하는데 지금 그런 작업이 없으니까. 그래서 지금 섬도 ‘관광’ 하면서 개발할 것이라고 하고 있고. 이게 기존의 관광이 개발로 가버리니까 개발 위주의 관광을 하더라고요. 여기는 보존 중심의 관광을 해야 하는 곳인데 생태가 이렇게 잘 보존되어 있는 데가 차별점인데 개발로 가버리니까.
그래서 청년들과 아카이빙을 시작한 건가요?
도시재생 전체의 아카이빙은 제가 주도할 수 없어요. 할 수 있는 일을 하는거죠. 주민들의 주거 지역도 아카이빙 해야 하잖아요? 처음에 우리가 주민들을 마을기록 활동가를 양성해 놓고 그다음에 아카이빙하는 용도로 사용해야 한다고 설득을 지속적으로 했거든요. 그런데 받아들여지지 않았어요. 저희는 권한도 없으니까. “그래, 그러면 내가 할게.”하는 마음으로 언론진흥재단 공모사업에 지원해서 지원금을 받아온 거죠. 이걸로 청년들이랑 주민들을 ‘마을기록 활동가’로 양성할 계획을 가지고 있어요.
지속가능한 기록을 위한 계획이네요. 그리고?
청년들 공동체를 만들려고 해요. 활동할 청년주체들을 발굴은 해 놨는데 이 주체들을 키워가려면 재원이 들잖아요. 재원은 또 어디에서 마련하겠어요? 행정의 지원대신 지역문화우리 공모사업에 지원해서 선정되었어요. 다행히 작년에 통영에 오자마자 청년 주체들 발굴해서 경남에서 청년 연구자 사업을 했던 기반이 있어서 활동을 계속할 수 있게 된 거죠.
그래서 지역 주체 청년들을 뽑아서 교육시켜서 고용 계약 형태로 활동할 수 있는 기반을 조그마하게 만들어놓고 키워가는 거죠. 지역에 계속 남을 사람들의 일자리를 만들어내야 하지 않겠냐 생각했죠.
이 친구들이 주민협의체에 회원이기도 해서 나중에 마을관리 협동조합 만들어질 때 주민 주체들이랑 같이 결합할 수 있게끔 하려고요.
음... 그런데 얘기를 나누면서 느껴지는 이 아슬아슬함은 뭘까요?
맞아요. 엄청 민감해하더라고요. 제가 대외적인 활동들을 하고 이런 것에 대해서 엄청 예민하게 시에서도 반응을 해서 그것 때문에 스트레스 많이 받았거든요. 애초에 비상근으로 만들어놓은 것도 마찬가지로 그런 것에서 자유롭고 싶어서 였는데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 활동을 하겠다는 거네요? 하고 싶은 게 있고 함께 하려는 사람들이 있으니까요.
맞아요. 그러면서 외부 자원들을 다 끌어서 채널 연결시키고 하는 거죠. 이번에 경상남도가 청년특별도 선포하면서 붐업이 되고 있다고 봐요. 성과가 다른 소도시나 지역들은 거의 없을 거거든요. 청년 관련 이슈가 제가 봤을 때는 주체가 거의 없기 때문에. 그런데 통영이 되게 많은 이야기가 이렇게 올라오니까 좋은 거죠.
도시재생이 잘 이루어지는 곳은 균형 잡힌 거버넌스 구조가 있어요. 힘의 균형이 맞다고 해야겠죠. 통영에서 청년들이 그런 역할을 해 주면 좋을텐데요.
그렇죠 그런 부분이 있어서 행정의 자본과 상관없이 민간주체들이 독립적으로 재정활동을 할 수 있게끔 만드는 게 목표예요. 민간이 행정과 문제가 생겼을 때도 좀 더 주체적인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하니까요. 소도시일수록 지역 카르텔이 너무 강력하게 형성되어있어서 이걸 깨려면 재정적으로 독립해서 잘 활동할 수 있어야 해요. 그게 제일 큰 미션이예요.
딱히 누가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하면서 고립감과 아슬아슬한 줄타기에 둘러싸인 정원님의 스트레스는 어떻게 극복하고 있습니까?
극복 안됩니다. 전혀 극복 안돼요. 온갖 말이 다 도니까 스트레스는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지역에서 활동하는 청년들을 위한 마음건강 프로그램이 그래서 필요하죠. 몇 번 시도했지만 잘 안됐어요. 그래서 장기적으로 보고 계획하고 있어요.
굉장히 공격적인 활동가 같아요. 어릴 때부터 활동가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나요?
하하하 아니, 전혀 없었어요. 대학도 안 가려고 했고 직업군인 하려고 했었고. 왜냐하면 집안의 가정형편도 어렵고 옛날부터 꿈, 이런 게 전혀 없었거든요. 그래서 비전, 이런 것들이 있지는 않았어요. 이런 생각을 한 것은 사실 한참 후였어요. 군대 갔다 오고 나서 진로에 대한 고민은 그때부터 차근차근 시작된 거고. 어쩌다보니 대학원까지 갔잖아요. 대학도 안 가려던 놈이 대학교까지 가냐고 저희 누나가 아직도 그걸로 놀려요.
꿈이 없던 사람에게 꿈이 생기다니! 군대가 이렇게 사람을 변화시키는 곳인가요?
아니, 그렇지는 않고요. 진로라기보다는 개인적인 어려움들이 너무 컸어요. 너무 많은 힘든 일들을 어렸을 때부터 겪어서 심리적으로 다 망가져 있고 그렇게 컸기 때문에 자기 극복을 하는 기간이 저는 되게 컸어요. 그래서 자기 극복이 19살, 고2~3 이때부터 시작된 거고. 그러고 나서 어느 정도 그게 정리가 되는 시점이 군대를 제대하는 시점이었던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도 그런 정비들을 하고 나서 사회적인 이슈에 대한 부분들은 사실 그 이후에 조금씩 공부를 하면서 생긴 것 같아요. 평생교육 이쪽으로 계열로 들어와서 공부를 시작하고 공부를 열심히 하다 보니까 뭔가 하고 싶은 것들이 생겼고. 여태 또는 한 번도 개발되지 않은 역량이라든지 자기 주관이라든지 이런 것들이 급격하게 이후로 개발이 된 느낌이었어요.
그래서 공부가 필요하다니까요.
네. 공부는 필요한 것 같아요. 저도 처음 알았어요. 제가 직업군에 연구 계열이 있는 것을. 공부랑 거의 담을 쌓고 살았기 때문에 사실 공부를 해야 하는 직업은 전혀 생각도 못 해 봤거든요.
아직 사업이 진행중이고, 아직 통영에서 지내야 할 시간이 남아 있어 조심스럽겠지만 지금 대한민국에서 통영처럼 작은 도시에서 도시재생이 제대로 되려면 무엇이 가장 필요할까요?
소도시에서 도시재생이 성공하려면 무조건적인 주민, 시민 주체의식들이 있어야 할 것 같아요. 단일화 되어있는 특정 시민 주체들이나 카르텔이 아닌 굉장히 다양한 주체의식들. 주민 주도의 현장에서부터 행정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의 개인 주체들과 분야별 주체들도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죠. 그리고 나서 첫 번째 미션은 거버넌스인 것 같아요. 도시재생 뉴딜 사업이 들어오기 전에는 거버넌스도 별로 필요 없었어요. 그 전에는 말 그대로 주민 공동체가, 주체가 제대로 세워져서 마을 자치가 되느냐 안 되느냐의 문제였던 거고. 그런데 행정이 들어오면서 뉴딜이 들어오고 공공의 돈이 들어오면서 돈이 투입되는 거잖아요. ‘어떻게 쓸거냐’부터 시작해서 ‘왜 이렇게 쓸거냐’까지 결정하는 것이 거버넌스 안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거죠. 그게 안 되면 기존의 공동체를 파괴하고 공격하는 쪽으로 행정이 가버릴 수밖에 없으니까요.
더 들어가면 대천 마을이라든지 그리고 산리협동조합 이런 데를 보면 뉴딜 사업이 들어오기 전부터 마을에서 이미 공동체가 형성돼 있던 곳이거든요. 자치권이 있던 데예요. 그런 지역은 뉴딜 사업이 들어와도 10년, 20년이 된 곳이니 방어를 해낸 거예요. 주체의식과 자치권이 형성이 돼 있고 시민의식이 고양된 지역은 자본이 어떻게 들어왔을 때 마을주민과 공동체를 파괴하는지를 이미 겪어본 데인 거예요. 그러니까 방어가 되고 거버넌스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진거죠.
그리고 영도도 거버넌스가 잘 된 동네 중 하나예요, 제가 봤을 때는. 영도는 뉴딜 사업의 굉장히 성공적인 거버넌스 구조라고 저는 생각해요. 그런데 거기에서 가장 큰 역할을 했던 사람들이 있겠죠?
기승전청년. 그 역할을 해야 할 주체가 통영에서는 역시 청년인가요? 잘 될까요?
그렇죠. 청년이 되어야 하는 거죠. 왜냐하면 여기는 힘의 균형이 굉장히 아슬아슬해요. 깨질 수가 없는 거예요. 힘의 균형이 깨질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니까. 이것을 깨뜨릴 수 있는 주체는 청년밖에 없는 거죠. 외부 인적 자원이 들어와서 할 수 있는 것도 아닌 거고. 그러면 청년들이 와서 밀접하게 지역 주민들을 설득해 내고, 지역 주민들의 설득을 기반으로 해서 어쨌든 구조들을 바꿔내는 것들을 해야겠죠. 힘의 균형이 안 깨지면 통영은 힘들 것 같아요. 점점 개발로 갈 것 같거든요. 그러면 지역 사람들이 대부분 여기 있는 분들이 집주인이잖아요. 다 팔고 나가면 원주민들은 모두 사라질거고.
어른들은 대부분 자녀에게 자원을 물려주고 돌아가시잖아요. 가시고 나면 여기로 돌아와서 사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어요? 없지. 다 팔고 자기들은 외부에 있는 다른 지역으로 가서 살겠죠. 그러면 여기 인구감소는 불 보듯 뻔하고.
어떻게 보면 이 마을을 지키는 건 그분들의 미션이 아니에요, 다음 세대에 대한 생각보다는 이제 할 만큼 했고 노후를 보내다가 그냥 자연스럽게 떠나가실 분들인 거예요. 자기 미션이 아닌 것을 가지고 오면 사실 힘들죠. 노후를 좀 편안하게 보내고 안락하게 보내고 싶은데 자꾸 와서 옆에서 뭐 하라고 하면 힘들지.
** 사진설명 : 청년문제 뿐 아니라 2019년에는 울산에서 시작된 #주문을잊은카페를 통영형 커뮤니티케어 모델로 구축, 10월 부터 3개월 간 카페를 운영하기도 했다. 덕분에 TV 인터뷰도 여러번 했다는.
지역 어르신들이 별로 협조적이지 않다는 얘기로 들리는데요?
예, 그래서 처음에는 엄청 힘들었죠. 그래서 그런 의식들을 조금씩 바꿔 가는 것들을 해야 해요. 예를 들어서 그렇잖아요. 자식들이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손자, 손녀가 생겨서 여기에서 잘 살겠다고 하면 마음이 바뀌어요. 지금은 그런 게 없잖아요. 여기는 그냥 살다가 떠날 데인 거예요. 그런데 “나 여기 살 거예요.” 하는 청년들이 생기고 손자와 손녀 같은 사람들이 생겨 봐요. 그러면 마음이 바뀌지 않을까요? 그래서 아직도 끙끙거리면서 하고 있어요. ㅎㅎㅎ.
도시재생은 개발보다 보존에 지향점을 두어야 해요. 지역의 산업과 문화, 공동체를 보존해 다음세대로 상속하는 것이죠.
잠시 머무는 것이 아닌 이 곳에서 삶을 꾸리면서 지키는 청년이 필요한 거네요.
네 그러니까 청년들이, 세대적으로 다음세대가 있어야 도시재생도 의미가 있는 거예요. 보존이잖아요. 보존도 유산을 물려줄 다음 세대가 있어야 가치가 있는 거지요. 물려줄 데가 없다면 ‘왜 보존해?’ 지금 당장 개발해서 먹고 잘 살면 되지가 되어 버려요. 내 터전에서 계속해서 살아갈 자손이 없는데 굳이 보존을 해야겠다고 책임감을 가지는 주민은 거의 없을테니까요. 또한, 지역을 떠나간 자녀의 입장에서도 부모로부터 상속된 지역의 유산은 판매하여 가계경제에 보탬이 될 자원으로 활용할 가능성이 커요.
그런 의미에서 자신의 터전을 계속하여 이어받을 다음세대인 청년의 존재여부는 도시재생의 성공여부와 결부될 수 밖에 없어요.
지역 안에서 경제가 잘 돌아가고 문화 예술적으로도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져야 하고요.
맞아요. 청년들이 어찌 보면 명분이 되어 주고 고리가 되어 주는 역할들인 거죠. 그런 기회를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을 지금 하는 거죠. 지금 청년들과 하는 활동들은 통영시 예산이나 자원을 끌어다 쓰는 게 전혀 없어요. 대부분 중앙부처나 재단지원공모사업으로 하고 있어요.
정원님의 아슬아슬한 줄타기는 계속되겠군요. 그렇지만 정원님도 언젠가는 통영을 떠날 사람이잖아요.
그래서 그것은 여기 세워질 청년들이 할 몫이고, 자기들이 선택해야 하는 문제인 거예요. 제가 선택해줄 수 있는 문제는 아니고. 통영을 떠나기 전 목표 중 하나가 건강한 청년공동체와 생태계를 조성하는 거예요. 그 때까지 지치지 않고 정주행할 수 있도록 바짝 정신 차려야죠.
라떼는 말이야. 기꺼이 청년꼰대가 되겠습니다
오늘 얘기하다보니 저보다 더 어르신 같아요. 약간 청년꼰대 같기도 하고.
4050들은 꼰대라는 얘기를 들을까 봐 전전긍긍하는데 자발적으로 청년꼰대라는 말을 많이 쓰더라고요. 저는 ‘꼰대라는 용어가 청년들 사이에서는 또 다른 권력을 의미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지난 연말, 다른 지역에서 오랫동안 활동하면서 자리도 잡고 리더가 된 선배가 ‘우리 청년꼰대들끼리 한번 모여보자’제안해서 모였어요. 거기서 “이제 청년 감수성이 떨어지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했어요. 다른 청년들이 이야기를 하면 공감이 안 된대요, 이제는. 청년 감수성이 떨어지는 거지. 왜냐하면 너무 사회를 많이 알아버린 거예요. 우리도 많이 바뀐 거죠. 예전에는 어떤 문제들을 이야기하면 되게 공감이 됐는데 이제는 ‘너희도 노력을 좀 해야지.’라는 느낌이나 생각들이 생기는 거예요. ‘그게 왜 문제야?’ 이렇게 생각하는 거지요. 그것도. 소통이 안 되니까 공감이 떨어지고. 그러면서 “나 이제 청년 하면 안 되겠다. 청년이라는 말 쓰면 안 되겠다.”라는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정원님도 그래요? 청년꼰대 등극입니까?
그런 부분들이 없지 않아 있죠. ‘왜 안 되지? 이런 것 좀 해 줬으면 좋겠다.’이런 어떤 측면이었다면 ‘그거 왜 못해? 그게 왜 문제야?’ 이렇게 되는 거예요. 저도 이미 청년 감수성이 많이 떨어진 거죠. 그래서 이제 청년을 대변하는 것들이라든지 현장에서의 역할들을 많이 내려놔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현장에서 물러난다고요?
아니오. 새로운 청년들이 유입되고 그들이 자기의 입장을 대변하게 하자는 거죠. 저희는 과거의 경험들을 더해 주면서 청년이라는 타이틀을 빼고 활동가로서의 역할들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좀 있죠. 왜냐하면 청년 타이틀이 앞에 딱 들어가 버리면 거기로 카테고리가 묶여버리더라고요.
2023년 최정원의 삶은 어떻게 달라져 있을까요? 통영에서의 시한부 활동은 마무리가 되었을 것 같고, 통영에 있을지 없을지는 알 수 없고.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모르겠어요. 딱 정해놓고 가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뭔가 실험적인 삶을 사는 것 자체가 저한테도 되게 버거운 일이었거든요. 그러니까 조금은 안정적인 쪽으로 가고 있겠죠? 어떤 활동들을 이어가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관심 있는 주제나 분야로 계속해서 파고들지 않을까 싶어요.
사회문제를 발견하고 해결하면서 새로운 자신을 발견하면서?
도시재생 영역의 다음 스텝은 지방 분권, 지방 자치가 될 것 같아요. 이 분야를 계속 공부하면서 실험을 하겠죠. 그리고 그 모델을 가지고 다음 스텝으로 가지 않을까 싶어요.
연구를 기반으로 현장 경험을 살리면서 기획하는 최정원이 되려고요
앞으로 연구자의 삶의 살겠다는 의지로 들립니다.
저는 연구 기획자로 정의하고 싶어요. 제가 청춘연구소라고 이름 짓기는 했는데 연구자라는 타이틀이 이렇게 저한테 적합할지는 몰랐어요. 지금의 저는 연구자의 삶을 사는 것 같아요. 현장 연구자의 삶을.
연구를 기반으로 기획하는 사람인 거죠. 그래서 그냥 어찌 보면 이슈 메이킹 위주였던 기획이 아니라 지역에 들어와서 밀접하게 연구하고 현장 참여와 조사, 탐색을 통해서 도출된 것을 연구에 기반해 지역에 필요한 기획들을 설계해 내는 것, 그게 기획자 최정원의 정체성에 제일 잘 맞는 것 같아요.
완전 멋져요. 우리가 현장을 모르는 연구자들의 논리에 제일 공감할 수 없다고 하잖아요. 반대로 현장에 계신 분들의 다양한 활동 경험을 모아서 체계화하고 구조화하는 것을 어려워하는데 ‘연구를 기반으로 현장 경험을 살리면서 기획하는’사람의 삶이라. 기대됩니다. 앞으로도 쭉 그렇게 나가기를.
공식인터뷰가 끝나고 그냥 헤어지기가 아쉬워 저녁을 먹었다. 이번 인터뷰 옵저버였던 공공프로젝트 에이전시 비타민컴 정수진 대표와 고향으로 돌아와 새롭게 지역활동가가 된 통영청년이 함께 했다. 우리는 변화를 만드는 사람들, 기획자가 인정받는 사회를 위해 건배했다. 그리고 고향에서 소신껏 일하고 싶지만 한계를 느낀다는 통영청년의 잔에 용기를 듬뿍 담아주었다. 정원님이 새롭게 활동가의 삶을 시작한 통영청년에게 든든한 방패막이 되어주기를 바라는 마음도 함께. 7월 어느 날, 정원님이 또 일 벌렸다. 이번엔 통영청년들과 마스크 쓰고 옥상에 모여 축제를 한단다.
_ 인터뷰어 이경원
#통영 #도시재생 #청년 #문화기획 #이경원 #최정원 #청춘연구소 #경상남도 #경남 #축제 #2020년
2020년 활동가이야기주간 프로젝트 일환으로 기획/진행한 '활동가 인터뷰'입니다.
'정원님을 통영에서 만나게 될 줄이야.' 몇 년 전 서울시 프로젝트로 만났던 인연인데, 2018년부터 통영을 기웃하다 2019년부터 청년들과 계속 일을 벌이고 있었다. 잠깐 프로젝트를 하나 싶었는데 벌써 횟수로 통영생활 2년차다. 도대체 무슨 일을 하는지 궁금해서 통영으로 향했다. 도시재생 뉴딜사업인 한창인 통영시 봉평지구도시재생센터에서 부산 청년 최정원을 다시 만났다.
** 사진설명 : 마이크를 든, 엄지척 청년이 최정원입니다.
무엇이 되고 싶은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찾고 싶어서
정원님을 통영에서 다시 만나네요.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부산과 통영을 오가고 있죠? 통영에서 뭐해요?
부산에서 하던 청춘연구소 활동 무대를 통영으로 옮겨서 하고 있죠. 봉평지구도시재생센터 코디네이터도 겸하고 있어요.
문화기획자로 기억하는데 도시재생센터 코디네이터라니, 좀 의외였어요.
처음부터 도시재생으로 시작을 한 건 아니고요, 어찌 보면 원론적으로 교육에 대한 부분들, 특히 청년의 문제로 접근을 했죠.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까지 갔다 왔는데도 무엇을 해야 할지 명확하게 진로도 꾸려지지 않고 직업이라든가 사회적인 역할 이런 것들도 제대로 못 찾고 있는 부분들이 너무 컸어요. 이것은 교육의 문제라고 생각하고 어떻게 해결해 나갈까하는 고민에서 제일 처음 이 일을 시작했던 것 같아요.
개인 최정원의 진로가 아닌 청년의 문제?
네. 그래서 청년단체를 만들었어요. 단체의 역할이라든지 미션도 정확하게 구분하지 않은 상태에서 조직되어서 처음 그 작업부터 시작했어요. 여러 청년들 만나면서 의견도 듣고 이야기도 나누면서 조금씩 조금씩 문제들을 가시적이고 구체적으로 발굴하기 시작했죠.
저희가 1년 정도는 다른 지역들을 돌아다녔거든요. 다른 지역의 청년들은 어떤 활동을 하고 어떤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는지를 1년 동안 돌아다니면서 보고 들었죠. 같이 시작한 공동대표가 아주 특이한 곳이 있다고 해서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이 ‘최게바라기획사’였어요. ‘또라이포럼’이 연결고리가 되어 광주, 대구, 전주 다른 지역들과도 커뮤니케이션 하면서 활동가들이랑도 많이 만나게 됐죠.
그게 아마 2015년도 일거예요. 2014년에 출발해서 2015년까지 많이 돌아다녔죠. 사실 정체성 찾는 게 제일 시급했었어요. 1년을 채우고 나서 문화기획자라는 정체성을 조금씩 가지기 시작했던 거죠.
문화기획자로 개인의 정체성도 갖게 된 건가요?
예, 그렇죠. 원래는 교육을 시작했으니까 그것에 대한 프라이드가 강해서 사실 내려놓기가 굉장히 어려웠는데 교육의 흐름들이 문화로 가고 있어서 문화기획자라는 정체성을 가지기 그때 시작했었고 그러면서 활동의 폭을 조금 많이 넓혔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제일 처음에는 자조모임으로 시작했다가 축제·교육·컨설팅, 그다음에 사회활동, 환원 활동까지 이어졌어요. 그래서 처음에는 제의가 많이 오더라고요. 그런데 그런 거 다 거부하고 우리끼리 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에 대해서 연구를 많이 하고 기획해서 직접 연결해서 실행해 보는 것, 이런 것을 많이 했어요.
작은 소모임에서 활동가라는 정체성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1년 이었군요. 부산은 청년네트워크나 청년활동들이 활발한가요?
처음에는 되게 힘들었죠. 그때 당시에 그런 문화 자체가 없었어요. 지금은 상당히 많아졌고 오히려 대외활동이라는 개념으로 엄청 활성화되어 있고 조금 더 나가서 활동가 영역으로 들어오는 친구들도 제법 있고요.
청년네트워크들도 제법 있었죠. 당시에 서로 활동가들끼리 같이 교류하는 프로그램도 많이 있었어요. 저희도 했거든요. 그런데 저희가 지향점이 좀 달랐어요. 저희는 조금 더 일반적으로 대중적으로 이렇게 파고들고 싶은 마음이 강했어요. 단체끼리의 네트워크 보다는 조직 밖의 개인들, 그 중에서도 리더나 사회공헌을 하고 싶어하는 청년들을 만나서 같이 이야기하는 것, 그런 활동을 더 많이 했던 것 같아요.
통영으로 무대를 옮기다
* 사진설명 : 서포루에서 바라본 통영 앞바다, 아는 사람에게는 저멀리 봉평지구도시재생센터가 보인다.
도시재생에 원래 관심이 많았나요?
저희가 지역에서 활동하다 보니까 흐름이 문화에서 도시재생 쪽에서 가더라고요. 공공영역에서 문화를 담을 수 있는 많은 부분이 도시재생으로 이동하는. 하드웨어 기반이 되니까.
저희처럼 교육활동가들은 대부분 지역의 공동체 기반으로 해서 지역 문제들을 해결하는 쪽으로 다 가잖아요, 사실은 하드웨어가 일을 하는 게 아니라. 활동을 하면서 커뮤니티 시설이 거점 시설이 되고 이렇게 하는데 이것은 그게 아니라 처음부터 거점 시설을 만들고 인위적으로 공동체를 만들고 사람들의 인식을 개선해서 공동체를 활성화시키고 하겠다는 거니까 중간 단계를 다 건너뛰면서 갈등이 생기는 거죠.
뭔가 도시재생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해결하고 싶은 마음이 강했군요.
네, 지역에서 마을활동가, 특히 도시재생 활동가는 뉴딜이 들어오기 전과 후로 느낌이 다르긴 해요. 활동기반을 정부나 지자체의 자원 없이 민간에서 오롯이 만들어서 시작해서 공동체 기반으로 시작했던 게 처음의 흐름이었는데 뉴딜이 들어오면서 하드웨어 사업이 됐잖아요. 그러니까 돈이 막대하게 들어오니까 기존의 공동체가 깨지기 시작하는 거죠. 그런 부분들을 다시 정리해서 공동체 기반 하드웨어를 결합하는 지점들을 만드는 데 되게 소요되는 시간들이 제법 많았다고 하더라고요.
** 사진설명 : 봉평동 마을주민들과 함께 만든 지구별 혁신대학
이런 문제 의식이 통영으로 오게 된 계기가 되었나요?
사실 처음에 고민 많이 했어요. 광역단위보다는 소도시 단위로 가서 뭔가 좀 더 밀도 있게 어떤 기획들을 풀어내 보고 싶은 욕심이 조금 있었어요, 그리고 저는 자유롭게 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거든요. 그런 환경을 만들고 나서 여기로 온거죠.
사실 저도 위촉직으로 시와 협치하고 있는 거잖아요, 그래서 어찌 보면 주민과 행정 사이 가운데 매개 역할들을 정확히 하기는 좀 어려워요. 수당은 시에서 받고, 일은 주민들과 해야 하는데 서로의 입장이 다르잖아요. 그러면 제가 중간에서 입장을 잘 대 대변해줘야 하는데 그걸 중립적으로 하기가 굉장히 어려운거죠.
그냥 있으면 최정원이 아니죠. 뭐라도 하셔야죠
문제는 명확하기 때문에 구조를 바꾸는 것들을 먼저 하고 있어요. 민간에서 중간지원 조직을 만들 수 있는 마을관리협동조합이라든지, 주민들이 주체로 세워져서 시랑 거버넌스 구조를 만들 수 있는 기초 설계라든지. 활성화계획을 수정할 때 이런 구조들을 살짝 살짝 넣었어요.
지금의 흐름으로 정원님의 선택에 만족하십니까?
지나봐야 알죠. 2023년 될 때까지는 모르니까.
일 해보니 통영이라는 작은 도시의 도시재생 활동가, 특히 청년활동가들의 위상은 어때요? 청년들의 역할에 불만도 있을 것이고, 그나마 청년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들도 있을 것이고.
기본법도 생기고 여러 가지 법적인, 제도적인 장치들이 생기면서 사회안전망은 굉장히 탄탄해져 가지만 어찌 보면 청년이 약자가 되고 지원해야 하는 대상자가 되다 보니까 지역사회에 진입했을 때 동일한 입장으로 설정을 안 해 줘요. 저는 민-관의 이해를 이끌어내야 하다 보니 고립감을 엄청나게 많이 느끼거든요. 그래서 여기 들어왔을 때 현장센터의 입지를 만드는 게 제일 첫 번째 목표였어요. 왜냐하면 입지가 없었거든요, 아예. 입지 자체가 없었어요. 현장센터라는 개념 자체를 이해하는 사람이 일단 없었는데. 그리고 저희가 뭐 하는지도 모르고. 시에서는 과업을 줄 수도 없고. 저희는 알아서 과업을 생성해야 하는 입장이었으니까.
지역 청년들과 벌리는 일, 기록하고 지속가능한 공동체를 만들다
SNS에 올리는 글 보니 정말 뭔가를 계속 벌리더군요. 지원사업, 공모사업 선정소식도 들리고. 청년들과 마을아카이빙을 시작한 것 같던데요. 통영에서 하는 일들 하나씩 풀어보시지요.
저나 청춘연구소가 하고 싶고, 해야 할 일은 지역 안에서 청년의 역할을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도시재생, 지역에서 벌어지는 사업과 활동에 청년들이 주체로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내는 거죠. 아카이빙도 그런 차원이예요.
특히 도시재생은 개발보다는 보존의 입장인데 통영은 그런 면에서는 부족해요. 시에서 보존을 안 한 거예요. 전문가들이 들어와서 제일 먼저 지적했던 게 아카이빙이었거든요. “아카이빙 사업을 해라. 이거 왜 기록 안 하냐? 진행되는 모든 과정들에 대한 것들을 기록하고 현존하는 모든 기자재라든지 사물, 시각적으로 보이는 것들도 기록을 해 놔야 한다.”라고 했는데 지금까지는 기록된 게 전혀 없고. 사전에 LH공사가 신아조선소를 매입하면서 이곳만의 산업정체성을 남겨놔야 하는데 하나도 안 남겨 놓은 거예요. 이만큼 개발해 놓고는 아카이빙 한 개도 안 해 놨어요.
나중에 이것을 다 개발하고 나면 분명히 문제가 생길 거거든요. 그때 보존했던 기록했던 것들을 대조하면서 성찰해야 하는데 지금 그런 작업이 없으니까. 그래서 지금 섬도 ‘관광’ 하면서 개발할 것이라고 하고 있고. 이게 기존의 관광이 개발로 가버리니까 개발 위주의 관광을 하더라고요. 여기는 보존 중심의 관광을 해야 하는 곳인데 생태가 이렇게 잘 보존되어 있는 데가 차별점인데 개발로 가버리니까.
그래서 청년들과 아카이빙을 시작한 건가요?
도시재생 전체의 아카이빙은 제가 주도할 수 없어요. 할 수 있는 일을 하는거죠. 주민들의 주거 지역도 아카이빙 해야 하잖아요? 처음에 우리가 주민들을 마을기록 활동가를 양성해 놓고 그다음에 아카이빙하는 용도로 사용해야 한다고 설득을 지속적으로 했거든요. 그런데 받아들여지지 않았어요. 저희는 권한도 없으니까. “그래, 그러면 내가 할게.”하는 마음으로 언론진흥재단 공모사업에 지원해서 지원금을 받아온 거죠. 이걸로 청년들이랑 주민들을 ‘마을기록 활동가’로 양성할 계획을 가지고 있어요.
지속가능한 기록을 위한 계획이네요. 그리고?
청년들 공동체를 만들려고 해요. 활동할 청년주체들을 발굴은 해 놨는데 이 주체들을 키워가려면 재원이 들잖아요. 재원은 또 어디에서 마련하겠어요? 행정의 지원대신 지역문화우리 공모사업에 지원해서 선정되었어요. 다행히 작년에 통영에 오자마자 청년 주체들 발굴해서 경남에서 청년 연구자 사업을 했던 기반이 있어서 활동을 계속할 수 있게 된 거죠.
그래서 지역 주체 청년들을 뽑아서 교육시켜서 고용 계약 형태로 활동할 수 있는 기반을 조그마하게 만들어놓고 키워가는 거죠. 지역에 계속 남을 사람들의 일자리를 만들어내야 하지 않겠냐 생각했죠.
이 친구들이 주민협의체에 회원이기도 해서 나중에 마을관리 협동조합 만들어질 때 주민 주체들이랑 같이 결합할 수 있게끔 하려고요.
음... 그런데 얘기를 나누면서 느껴지는 이 아슬아슬함은 뭘까요?
맞아요. 엄청 민감해하더라고요. 제가 대외적인 활동들을 하고 이런 것에 대해서 엄청 예민하게 시에서도 반응을 해서 그것 때문에 스트레스 많이 받았거든요. 애초에 비상근으로 만들어놓은 것도 마찬가지로 그런 것에서 자유롭고 싶어서 였는데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 활동을 하겠다는 거네요? 하고 싶은 게 있고 함께 하려는 사람들이 있으니까요.
맞아요. 그러면서 외부 자원들을 다 끌어서 채널 연결시키고 하는 거죠. 이번에 경상남도가 청년특별도 선포하면서 붐업이 되고 있다고 봐요. 성과가 다른 소도시나 지역들은 거의 없을 거거든요. 청년 관련 이슈가 제가 봤을 때는 주체가 거의 없기 때문에. 그런데 통영이 되게 많은 이야기가 이렇게 올라오니까 좋은 거죠.
도시재생이 잘 이루어지는 곳은 균형 잡힌 거버넌스 구조가 있어요. 힘의 균형이 맞다고 해야겠죠. 통영에서 청년들이 그런 역할을 해 주면 좋을텐데요.
그렇죠 그런 부분이 있어서 행정의 자본과 상관없이 민간주체들이 독립적으로 재정활동을 할 수 있게끔 만드는 게 목표예요. 민간이 행정과 문제가 생겼을 때도 좀 더 주체적인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하니까요. 소도시일수록 지역 카르텔이 너무 강력하게 형성되어있어서 이걸 깨려면 재정적으로 독립해서 잘 활동할 수 있어야 해요. 그게 제일 큰 미션이예요.
딱히 누가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하면서 고립감과 아슬아슬한 줄타기에 둘러싸인 정원님의 스트레스는 어떻게 극복하고 있습니까?
극복 안됩니다. 전혀 극복 안돼요. 온갖 말이 다 도니까 스트레스는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지역에서 활동하는 청년들을 위한 마음건강 프로그램이 그래서 필요하죠. 몇 번 시도했지만 잘 안됐어요. 그래서 장기적으로 보고 계획하고 있어요.
굉장히 공격적인 활동가 같아요. 어릴 때부터 활동가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나요?
하하하 아니, 전혀 없었어요. 대학도 안 가려고 했고 직업군인 하려고 했었고. 왜냐하면 집안의 가정형편도 어렵고 옛날부터 꿈, 이런 게 전혀 없었거든요. 그래서 비전, 이런 것들이 있지는 않았어요. 이런 생각을 한 것은 사실 한참 후였어요. 군대 갔다 오고 나서 진로에 대한 고민은 그때부터 차근차근 시작된 거고. 어쩌다보니 대학원까지 갔잖아요. 대학도 안 가려던 놈이 대학교까지 가냐고 저희 누나가 아직도 그걸로 놀려요.
꿈이 없던 사람에게 꿈이 생기다니! 군대가 이렇게 사람을 변화시키는 곳인가요?
아니, 그렇지는 않고요. 진로라기보다는 개인적인 어려움들이 너무 컸어요. 너무 많은 힘든 일들을 어렸을 때부터 겪어서 심리적으로 다 망가져 있고 그렇게 컸기 때문에 자기 극복을 하는 기간이 저는 되게 컸어요. 그래서 자기 극복이 19살, 고2~3 이때부터 시작된 거고. 그러고 나서 어느 정도 그게 정리가 되는 시점이 군대를 제대하는 시점이었던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도 그런 정비들을 하고 나서 사회적인 이슈에 대한 부분들은 사실 그 이후에 조금씩 공부를 하면서 생긴 것 같아요. 평생교육 이쪽으로 계열로 들어와서 공부를 시작하고 공부를 열심히 하다 보니까 뭔가 하고 싶은 것들이 생겼고. 여태 또는 한 번도 개발되지 않은 역량이라든지 자기 주관이라든지 이런 것들이 급격하게 이후로 개발이 된 느낌이었어요.
그래서 공부가 필요하다니까요.
네. 공부는 필요한 것 같아요. 저도 처음 알았어요. 제가 직업군에 연구 계열이 있는 것을. 공부랑 거의 담을 쌓고 살았기 때문에 사실 공부를 해야 하는 직업은 전혀 생각도 못 해 봤거든요.
아직 사업이 진행중이고, 아직 통영에서 지내야 할 시간이 남아 있어 조심스럽겠지만 지금 대한민국에서 통영처럼 작은 도시에서 도시재생이 제대로 되려면 무엇이 가장 필요할까요?
소도시에서 도시재생이 성공하려면 무조건적인 주민, 시민 주체의식들이 있어야 할 것 같아요. 단일화 되어있는 특정 시민 주체들이나 카르텔이 아닌 굉장히 다양한 주체의식들. 주민 주도의 현장에서부터 행정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의 개인 주체들과 분야별 주체들도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죠. 그리고 나서 첫 번째 미션은 거버넌스인 것 같아요. 도시재생 뉴딜 사업이 들어오기 전에는 거버넌스도 별로 필요 없었어요. 그 전에는 말 그대로 주민 공동체가, 주체가 제대로 세워져서 마을 자치가 되느냐 안 되느냐의 문제였던 거고. 그런데 행정이 들어오면서 뉴딜이 들어오고 공공의 돈이 들어오면서 돈이 투입되는 거잖아요. ‘어떻게 쓸거냐’부터 시작해서 ‘왜 이렇게 쓸거냐’까지 결정하는 것이 거버넌스 안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거죠. 그게 안 되면 기존의 공동체를 파괴하고 공격하는 쪽으로 행정이 가버릴 수밖에 없으니까요.
더 들어가면 대천 마을이라든지 그리고 산리협동조합 이런 데를 보면 뉴딜 사업이 들어오기 전부터 마을에서 이미 공동체가 형성돼 있던 곳이거든요. 자치권이 있던 데예요. 그런 지역은 뉴딜 사업이 들어와도 10년, 20년이 된 곳이니 방어를 해낸 거예요. 주체의식과 자치권이 형성이 돼 있고 시민의식이 고양된 지역은 자본이 어떻게 들어왔을 때 마을주민과 공동체를 파괴하는지를 이미 겪어본 데인 거예요. 그러니까 방어가 되고 거버넌스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진거죠.
그리고 영도도 거버넌스가 잘 된 동네 중 하나예요, 제가 봤을 때는. 영도는 뉴딜 사업의 굉장히 성공적인 거버넌스 구조라고 저는 생각해요. 그런데 거기에서 가장 큰 역할을 했던 사람들이 있겠죠?
기승전청년. 그 역할을 해야 할 주체가 통영에서는 역시 청년인가요? 잘 될까요?
그렇죠. 청년이 되어야 하는 거죠. 왜냐하면 여기는 힘의 균형이 굉장히 아슬아슬해요. 깨질 수가 없는 거예요. 힘의 균형이 깨질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니까. 이것을 깨뜨릴 수 있는 주체는 청년밖에 없는 거죠. 외부 인적 자원이 들어와서 할 수 있는 것도 아닌 거고. 그러면 청년들이 와서 밀접하게 지역 주민들을 설득해 내고, 지역 주민들의 설득을 기반으로 해서 어쨌든 구조들을 바꿔내는 것들을 해야겠죠. 힘의 균형이 안 깨지면 통영은 힘들 것 같아요. 점점 개발로 갈 것 같거든요. 그러면 지역 사람들이 대부분 여기 있는 분들이 집주인이잖아요. 다 팔고 나가면 원주민들은 모두 사라질거고.
어른들은 대부분 자녀에게 자원을 물려주고 돌아가시잖아요. 가시고 나면 여기로 돌아와서 사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어요? 없지. 다 팔고 자기들은 외부에 있는 다른 지역으로 가서 살겠죠. 그러면 여기 인구감소는 불 보듯 뻔하고.
어떻게 보면 이 마을을 지키는 건 그분들의 미션이 아니에요, 다음 세대에 대한 생각보다는 이제 할 만큼 했고 노후를 보내다가 그냥 자연스럽게 떠나가실 분들인 거예요. 자기 미션이 아닌 것을 가지고 오면 사실 힘들죠. 노후를 좀 편안하게 보내고 안락하게 보내고 싶은데 자꾸 와서 옆에서 뭐 하라고 하면 힘들지.
** 사진설명 : 청년문제 뿐 아니라 2019년에는 울산에서 시작된 #주문을잊은카페를 통영형 커뮤니티케어 모델로 구축, 10월 부터 3개월 간 카페를 운영하기도 했다. 덕분에 TV 인터뷰도 여러번 했다는.
지역 어르신들이 별로 협조적이지 않다는 얘기로 들리는데요?
예, 그래서 처음에는 엄청 힘들었죠. 그래서 그런 의식들을 조금씩 바꿔 가는 것들을 해야 해요. 예를 들어서 그렇잖아요. 자식들이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손자, 손녀가 생겨서 여기에서 잘 살겠다고 하면 마음이 바뀌어요. 지금은 그런 게 없잖아요. 여기는 그냥 살다가 떠날 데인 거예요. 그런데 “나 여기 살 거예요.” 하는 청년들이 생기고 손자와 손녀 같은 사람들이 생겨 봐요. 그러면 마음이 바뀌지 않을까요? 그래서 아직도 끙끙거리면서 하고 있어요. ㅎㅎㅎ.
도시재생은 개발보다 보존에 지향점을 두어야 해요. 지역의 산업과 문화, 공동체를 보존해 다음세대로 상속하는 것이죠.
잠시 머무는 것이 아닌 이 곳에서 삶을 꾸리면서 지키는 청년이 필요한 거네요.
네 그러니까 청년들이, 세대적으로 다음세대가 있어야 도시재생도 의미가 있는 거예요. 보존이잖아요. 보존도 유산을 물려줄 다음 세대가 있어야 가치가 있는 거지요. 물려줄 데가 없다면 ‘왜 보존해?’ 지금 당장 개발해서 먹고 잘 살면 되지가 되어 버려요. 내 터전에서 계속해서 살아갈 자손이 없는데 굳이 보존을 해야겠다고 책임감을 가지는 주민은 거의 없을테니까요. 또한, 지역을 떠나간 자녀의 입장에서도 부모로부터 상속된 지역의 유산은 판매하여 가계경제에 보탬이 될 자원으로 활용할 가능성이 커요.
그런 의미에서 자신의 터전을 계속하여 이어받을 다음세대인 청년의 존재여부는 도시재생의 성공여부와 결부될 수 밖에 없어요.
지역 안에서 경제가 잘 돌아가고 문화 예술적으로도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져야 하고요.
맞아요. 청년들이 어찌 보면 명분이 되어 주고 고리가 되어 주는 역할들인 거죠. 그런 기회를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을 지금 하는 거죠. 지금 청년들과 하는 활동들은 통영시 예산이나 자원을 끌어다 쓰는 게 전혀 없어요. 대부분 중앙부처나 재단지원공모사업으로 하고 있어요.
정원님의 아슬아슬한 줄타기는 계속되겠군요. 그렇지만 정원님도 언젠가는 통영을 떠날 사람이잖아요.
그래서 그것은 여기 세워질 청년들이 할 몫이고, 자기들이 선택해야 하는 문제인 거예요. 제가 선택해줄 수 있는 문제는 아니고. 통영을 떠나기 전 목표 중 하나가 건강한 청년공동체와 생태계를 조성하는 거예요. 그 때까지 지치지 않고 정주행할 수 있도록 바짝 정신 차려야죠.
라떼는 말이야. 기꺼이 청년꼰대가 되겠습니다
오늘 얘기하다보니 저보다 더 어르신 같아요. 약간 청년꼰대 같기도 하고.
4050들은 꼰대라는 얘기를 들을까 봐 전전긍긍하는데 자발적으로 청년꼰대라는 말을 많이 쓰더라고요. 저는 ‘꼰대라는 용어가 청년들 사이에서는 또 다른 권력을 의미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지난 연말, 다른 지역에서 오랫동안 활동하면서 자리도 잡고 리더가 된 선배가 ‘우리 청년꼰대들끼리 한번 모여보자’제안해서 모였어요. 거기서 “이제 청년 감수성이 떨어지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했어요. 다른 청년들이 이야기를 하면 공감이 안 된대요, 이제는. 청년 감수성이 떨어지는 거지. 왜냐하면 너무 사회를 많이 알아버린 거예요. 우리도 많이 바뀐 거죠. 예전에는 어떤 문제들을 이야기하면 되게 공감이 됐는데 이제는 ‘너희도 노력을 좀 해야지.’라는 느낌이나 생각들이 생기는 거예요. ‘그게 왜 문제야?’ 이렇게 생각하는 거지요. 그것도. 소통이 안 되니까 공감이 떨어지고. 그러면서 “나 이제 청년 하면 안 되겠다. 청년이라는 말 쓰면 안 되겠다.”라는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정원님도 그래요? 청년꼰대 등극입니까?
그런 부분들이 없지 않아 있죠. ‘왜 안 되지? 이런 것 좀 해 줬으면 좋겠다.’이런 어떤 측면이었다면 ‘그거 왜 못해? 그게 왜 문제야?’ 이렇게 되는 거예요. 저도 이미 청년 감수성이 많이 떨어진 거죠. 그래서 이제 청년을 대변하는 것들이라든지 현장에서의 역할들을 많이 내려놔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현장에서 물러난다고요?
아니오. 새로운 청년들이 유입되고 그들이 자기의 입장을 대변하게 하자는 거죠. 저희는 과거의 경험들을 더해 주면서 청년이라는 타이틀을 빼고 활동가로서의 역할들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좀 있죠. 왜냐하면 청년 타이틀이 앞에 딱 들어가 버리면 거기로 카테고리가 묶여버리더라고요.
2023년 최정원의 삶은 어떻게 달라져 있을까요? 통영에서의 시한부 활동은 마무리가 되었을 것 같고, 통영에 있을지 없을지는 알 수 없고.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모르겠어요. 딱 정해놓고 가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뭔가 실험적인 삶을 사는 것 자체가 저한테도 되게 버거운 일이었거든요. 그러니까 조금은 안정적인 쪽으로 가고 있겠죠? 어떤 활동들을 이어가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관심 있는 주제나 분야로 계속해서 파고들지 않을까 싶어요.
사회문제를 발견하고 해결하면서 새로운 자신을 발견하면서?
도시재생 영역의 다음 스텝은 지방 분권, 지방 자치가 될 것 같아요. 이 분야를 계속 공부하면서 실험을 하겠죠. 그리고 그 모델을 가지고 다음 스텝으로 가지 않을까 싶어요.
연구를 기반으로 현장 경험을 살리면서 기획하는 최정원이 되려고요
앞으로 연구자의 삶의 살겠다는 의지로 들립니다.
저는 연구 기획자로 정의하고 싶어요. 제가 청춘연구소라고 이름 짓기는 했는데 연구자라는 타이틀이 이렇게 저한테 적합할지는 몰랐어요. 지금의 저는 연구자의 삶을 사는 것 같아요. 현장 연구자의 삶을.
연구를 기반으로 기획하는 사람인 거죠. 그래서 그냥 어찌 보면 이슈 메이킹 위주였던 기획이 아니라 지역에 들어와서 밀접하게 연구하고 현장 참여와 조사, 탐색을 통해서 도출된 것을 연구에 기반해 지역에 필요한 기획들을 설계해 내는 것, 그게 기획자 최정원의 정체성에 제일 잘 맞는 것 같아요.
완전 멋져요. 우리가 현장을 모르는 연구자들의 논리에 제일 공감할 수 없다고 하잖아요. 반대로 현장에 계신 분들의 다양한 활동 경험을 모아서 체계화하고 구조화하는 것을 어려워하는데 ‘연구를 기반으로 현장 경험을 살리면서 기획하는’사람의 삶이라. 기대됩니다. 앞으로도 쭉 그렇게 나가기를.
공식인터뷰가 끝나고 그냥 헤어지기가 아쉬워 저녁을 먹었다. 이번 인터뷰 옵저버였던 공공프로젝트 에이전시 비타민컴 정수진 대표와 고향으로 돌아와 새롭게 지역활동가가 된 통영청년이 함께 했다. 우리는 변화를 만드는 사람들, 기획자가 인정받는 사회를 위해 건배했다. 그리고 고향에서 소신껏 일하고 싶지만 한계를 느낀다는 통영청년의 잔에 용기를 듬뿍 담아주었다. 정원님이 새롭게 활동가의 삶을 시작한 통영청년에게 든든한 방패막이 되어주기를 바라는 마음도 함께. 7월 어느 날, 정원님이 또 일 벌렸다. 이번엔 통영청년들과 마스크 쓰고 옥상에 모여 축제를 한단다.
_ 인터뷰어 이경원
#통영 #도시재생 #청년 #문화기획 #이경원 #최정원 #청춘연구소 #경상남도 #경남 #축제 #2020년
2020년 활동가이야기주간 프로젝트 일환으로 기획/진행한 '활동가 인터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