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노동시간은 OECD 평균보다 높은 1915시간으로, 중남미 3개국을 제외한 OECD 국가 중 가장 높다. 장시간 노동으로 스트레스와 번아웃을 호소하는 노동자들이 많으며, 불안정한 고용 환경으로 생계 위협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한국의 노동조합에 가입해 있는 노동자는 2022년 기준 13.1%에 불과하다. 다른 선진국들에 비해 매우 낮은 수준이다. 지민주는 이러한 대한민국의 열악한 노동 현장의 한중간에 있는 인물이다. 노동자들이 자신의 권리를 외치는 현장과 연대하는 그는 노동 가수다. 그의 공연에는 화려한 조명이 따로 없다. 아스팔트 위가, 허름한 공장 앞이 그의 공연장이다. 우리 사회 소외된 이들을 위로하고 희망을 주는 그의 노래가 오늘도 거리 위에서 울려 퍼진다.
또한 10여 년 전부터는 더 나은 노동문화를 만들고자 동료들과 ‘일과노래’라는 문화공동체를 만들어 사라져가는 노동문화를 세상에 알리고 있다. 노동계 내에서도 소외된 여성노동자, 장애인노동자 등에 대한 기획공연, 교육사업이 그것이다. 30여 년간 투쟁하는 노동자들의 친구로 늘 함께해온 지민주를 만났다.
Q. 인터뷰 시작 전에 오래전 기억 하나를 소환할게요. 예전 직장에서 노동조합을 만들었어요. 공익재단 최초의 노조였는데. 조직의 투명성, 공익성을 위해 만든 노조였지만 ‘공익단체에서 무슨 노조냐’는 따가운 시선을 받아야 했죠. 추웠던 2월, 이사회가 열리는 서울 시청 앞에서 노조원들이 함께 작은 집회를 했어요. 보도블록 한편에서 20명도 되지 않는 사람들이 모여 앉아 집회하는데 어찌나 춥고 뻘쭘한지. 그때 지민주 씨가 공연을 왔는데, “왜 이렇게 쳐져 있냐, 어깨 펴고 자신 있게 구호 외치라”며 노래를 힘차게 불러주는데, 움츠렸던 어깨가 절로 펴지고 힘이 났어요. 지민주 씨를 그때 처음 봤는데 ‘저분 참 멋지다’는 생각했어요.
하하, 저도 기억나네요. 많지 않은 분들이 모여 있는데 이런 집회는 익숙지 않은지 쭈뼛쭈뼛하는 모습에 부끄러워하는구나 느꼈죠. 저도 그럴 때 많아요. 번듯한 무대가 있는 것도 아니고 거리에서 노래 부를 때면 그런 감정을 느끼곤 하죠. 그때는 스스로 주문을 외워요. 사람들이 주눅 들지 않게 응원해주는 게 내 역할이니 그 역할에 충실하자라고.
#노래로 희망을 전하며 노동현장과 함께한 30여 년
Q. 노동 가수로 활동한지 오래 되셨죠. 어떻게 활동을 하게 된 건가요?
25세에 시작했으니 내년이면 30년이네요. 대학시절 노래패에서 활동했어요. 졸업 후에는 저처럼 대구에서 노래하는 사람들과 ‘좋은친구들’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활동을 했어요. 그런데 공연비만으론 생계가 어려우니 다들 투잡, 쓰리잡을 뛰었어요. 저도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미술교습소 운영, 학교방과후 미술강사 등 일을 겸업했죠. 그야말로 노래를 부르기 위해 일을 한 셈이죠.
Q. 30년이면 강산이 세 번도 변한 시간인데. 어려운 환경에서도 그 긴 시간을 활동할 수 있었다는 게 대단해요. 스스로도 이렇게 오래 활동할 줄 알았나요?
솔직히 전문 노동 가수로 활동할 생각은 하지 못했어요. 당시에는 서울 출신이 아니면 중앙 무대에서 활동하기가 어려운 분위기였어요. 지방 출신에 여성인 제가 학연, 지연도 없이 서울에 와서 혈혈단신으로 활동 영역을 넓혀가는 게 쉽지는 않다고 생각했죠.
Q. 그럼에도 핸디캡을 딛고 지금은 ‘노동 현장에서 지민주를 모르면 간첩’일 정도로 유명하잖아요. 30여 년을 활동했으니 정말 많은 곳을 가셨을 듯한데 특히 기억에 남는 현장이 있나요?
아무래도 사람이 죽어 나가는 현장이 기억에 오래 남아요.
솔로 활동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천안의 작은 금속사업장의 파업 현장을 갔어요. 노동조합을 무력화하기 위해 사측에서 구사대를 꾸리고 경찰도 와있었는데, 대치 중 한 노동자가 경찰이 휘두르는 물체에 얼굴을 맞고 중태에 빠졌어요. 당시 이 사건으로 충남 최초의 연대파업이 일어나기도 했는데요. 결국 노동자분은 사망하고, 사업장의 지부장님도 유서를 남기고 분신했어요. 지부장님이 정말 선한 분이셨어요. 노조 사무실이 너무 추워서 ‘왜 난방하지 않냐’고 했더니, 현장은 더 추운데 자신만 따뜻하게 있을 수 없다고 얘기하는 분이셨죠, 그런 분이 죽었다고 하니 큰 충격이었어요. 열사는 특별한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내가 아는 평범한 사람이 죽는 모습을 보며 많은 생각이 들었어요.
2003년에는 근로복지공단 비정규 노동자가 제 눈앞에서 분신했던 일도 있었어요. IMF 이후 비정규직이 대거 늘던 시기였는데, 홀어머니와 약혼녀까지 있던 30대 청년의 죽음이 너무 안타까웠어요. 그 사건을 계기로 전면파업이 일어났고 사측이 정규직 전환을 약속하면서 상급단체를 한국노총으로 바꾸고, 집행부 전원 해고를 조건으로 내걸었는데 결국 조합원들에 의해 가결되었죠. 그때 소식을 듣고 참 씁쓸했어요.
이런 열사들의 죽음을 지켜보며 노동문화가 변해야 한다는 걸 느꼈고, 누군가는 그걸 위해 역할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노동문화활동가가 된 이유기도 합니다.
#노동을 혐오하는 사회, 다양한 문화 아우르는 실천 이어져야
Q. 우리나라에서 ‘노동’이라는 단어가 주는 이미지가 좋지 않아요. 그런 걸 많이 느낄 듯한데요.
노동이라는 용어를 혐오하는 분위기가 팽배하죠. 언젠가 청소노동자들의 투쟁 현장에 갔는데, 집회 중간에 인근 빌딩의 화장실을 이용하려는 청소노동자들에게 노조 조끼를 벗고 들어가라는 거예요. 우리나라에서는 노동조합이 자랑스러운 게 아니라 숨겨야 할 대상이구나 느낀 순간이었어요. 여성 노동자에 대한 인식은 더 안 좋죠. ‘밥하는 아줌마’는 우리나라에서 혐오의 단어로 쓰일 정도예요.
Q. 맞아요. 정말 안타까운 현실이죠. 한 번에 바뀌긴 어렵겠지만 조금씩 바꿔가야 할텐데요.
저는 노동조합이 임금 투쟁도 중요하지만 사회, 여성, 성소수자 등 다양한 문화를 아우르는 눈을 가지고 그걸 바꾸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 또한 여성노동, 장애노동, 안전노동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한 기획공연, 노동인권 교육 등을 꾸준히 하고 있어요.
또한 아동청소년에 대한 노동인권교육이 더 활발해져야 한다고 봅니다. 학교에서 청소년에게 노동인권 교육하러 가면, 부모님이 노동자이고 본인도 당장 1~2년 후에 사회에 나가는 특성화고 학생들조차 근로기준법에 대해 전혀 몰라요. 영어보다 저는 이게 더 중요하다고 보거든요. 해외에는 초등학교 교과서에 교섭하는 방법 등이 실려있고 노동에 대해 어릴 때부터 배워요.
Q. 청소년 얘기가 나오니 생각나는데 중학생 아이가 있는 걸로 알아요. 노동가수, 노동문화활동가가 흔한 직업은 아니기에 아이가 부모님의 일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궁금하네요.
남편도 저도 같은 일을 하다 보니 어릴 때는 아이가 친구들에게 “너희 부모님은 어디로 노래하러 가니?” 이렇게 묻기도 했죠.(웃음) 어릴 때는 공연 현장에 많이 데리고 다녀서 이해가 높은 편이예요. 다행히 아직은(?) 우리가 하는 활동을 자랑스러워하고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이라 생각해줘요. 고맙죠.
Q. 공연이 투쟁 현장에서 주로 이루어지다 보니 지방도 많이 다녔을 텐데 체력적 한계를 많이 느끼지 않나요?
30여 년 동안 지방을 숱하게 다녔죠. 어떤 날은 운전해서 거제-대전-서울 이렇게 이동한 적도 있어요. 요즘은 체력의 한계로 기차를 자주 이용해요. 그래도 과거에는 단위 사업장 공연이 많아 지방을 자주 갔는데, 요즘은 지역본부, 중앙본부 요청으로 가는 공연이 많아서 예전보다는 지방가는 일이 많이 줄었죠.
Q. 힘든 순간도 많겠지만 그래도 노래하고 공연할 때 가장 많이 힘이 날 것 같아요. 어떠세요?
맞아요. 제 관객들이 대부분 열악한 환경에 놓인 사람들이잖아요. 그런 분들이 제 노래를 듣고 힘을 얻을 때 저도 힘이 나요.
더불어 나 스스로가 잘했다고 느꼈던 순간도 있어요. 변호사의 재판 노쇼로 피해를 입었던 학교폭력 피해자 유족인 이기철 씨 사연을 언론에서 접하고 저 또한 아이를 키우는 부모로서 마음이 아팠어요. 제 음반 중 ‘힘내라 마음아’ 노래가 수록된 음반과 함께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드렸는데 많은 위로가 되었다는 답을 받았어요. 그때 공감하고 함께하는 문화가 중요하다는 걸 다시금 느꼈죠.
#문턱 높은 노동문화 세상에 알리는 역할 계속 할 터
Q. 스스로를 노동 가수가 아닌 노동문화활동가로 지칭하시는데요.
노동문화=집회문화 또는 노조공연이 아니예요. 저는 차별받지 않고 동등하다는 뜻이 담긴 ‘대동’이 노동문화에 가깝다고 봐요. 그럼에도 노동자 내에서 정규직-비정규직, 여성-남성, 장애-비장애로 나뉘고 차별이 생겨요. 지금 우리 사회에는 다양한 문제가 산적해 있죠. 실제 저도 10여 년 전부터는 노동현장뿐만 아니라 장애인, 기후, 여성, 사회(전세 사기, 세월호 참사 등) 영역의 공연이 많이 늘었어요. 우리 사회의 노동을 혐오하는 문화를 바꾸기 위해서는 노동에 대한 인식, 노동문화가 변해야 합니다.
특히 저는 여성노동자 문제에 관심이 많아요. 1998년 울산 현대자동차에 국내 첫 정리해고 파업이 있었어요. 3시간 넘게 땡볕에서 같이 투쟁하고도 여성 노동자들만 식당에 들어가 식사 준비를 하는 모습을 보며 충격을 받았어요. 당시 한 영상팀이 현대자동차 파업투쟁을 촬영하러 갔다 그곳의 여성 노동자들의 삶을 찍었는데, 그 다큐가 바로 <밥꽃양>이예요. 이후 사측에서 정리해고를 철회하는 조건으로 여성노동자만 해고시킨다고 했는데, 다행히 노조원들의 부결로 무산되기도 했죠.
현대자동차뿐만 아니라 많은 투쟁 사업장에서 여성 노동자들이 차별받는 모습을 목격하면서 한국 사회에서 노동문제 해결을 위해 넘어야 할 가장 큰 산은 여성문제이며, 나중에 여건이 되면 그런 주제로 활동하고 싶다 막연히 생각했어요.
Q. 몇 해 전 열린 최초의 여성노동자 투쟁 콘서트 <내 이름을 불러주오>가 그런 과정에서 탄생한 거군요. 생각만 하던 걸 현실로 만든 셈이네요.
맞아요. <내 이름을 불러주오>는 1970년대 동일방직부터 2022년 파리바게뜨 여성노동자의 투쟁까지 싸우는 여성 노동자의 눈으로 따라가는 최초의 여성 노동자 투쟁 콘서트예요. 노동자의 투쟁에 ‘성(性)의 다름으로 인한 차이와 차별’이 아니라 함께 했기에 힘든 산들을 넘을 수 있었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여성노동자의 시선으로 본 여성 노동운동사를 노래와 영상 등으로 엮어 작품을 만들었고, 그걸 많은 현장의 여성노동자들과 나누어 함께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 노동의 주체로서 변화 발전시켜야 할 우리의 마음을 토닥여주고 싶었어요.
Q. 멋진 기획이네요. 그걸 혼자 힘만으로는 어려웠을 듯한데요.
물론이죠. 2013년에 창단된 문화노동자들의 문화공동체인 ‘일과노래’ 팀이 함께 제작한거죠. 일과노래는 오랜시간 현장에서 함께한 개인들이 모여 좀 더 나은 노동문화를 만들고자 만든 프로젝트 그룹이예요. 현장과 소통하며 노동가요 창작과 음반제작, 기획공연, 노조 문화교육, 찾아가는 콘서트 등의 활동을 하고, 기획공연 '탈환의 시작 <고백>-싸우는 노동자를 지키는 우리의 노래와 사무금융 민주화투쟁, 장애인 자존감 뿜뿜 프로젝트 <우리가 가는 길이 역사다> 등을 기획했죠.
Q. 최근에는 유튜브 활동도 시작하셨어요. 이름이 <채널 세지마(세상에 지지마)>네요.
‘노동’이라는 단어가 아직 문턱이 높잖아요. 노동문화를 더 대중적으로 알리기 위해 일과노래 팀에서 만든 채널이예요. 노동문화의 플랫폼이 되어서 노동문화에 대한 교육, 긍정적 인식을 확장해가고 싶어요. 최근 이 채널에 올린 뮤직비디오 ‘투쟁하는 열사의 눈으로 세상을 노래하라’ 영상은 마석모란공원에서 노동가수들이 노래로 열사를 기리는 모습을 담아 많은 호응을 얻기도 했어요.
Q. 10년 후에도 노동 현장에서 지민주 씨를 볼 수 있을까요? 어떤 활동가로 기억되고 싶으세요.
아마 있을 거예요. 다만 노래를 계속하기보다는 노동문화를 만들어가는데 힘을 보태는 사람으로 활동하고 있을 거 같아요. 많은 분이 이 영역을 떠났지만 마지막까지 노동문화를 끝까지 지키는 사람으로 남고 싶어요.
#서울 #지민주 #노동 #문화 #공익활동가주간
글쓴이 나현윤
사회변화를 만들어가는 개인 또는 작은 조직의 고유 가치를 발굴하고 스토리를 담아 세상의 가치로 확산하는 프리랜서로 일하고 있습니다.
2024공익활동가주간을 맞아 다양한 지역과 분야에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변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는 활동가들을 만나 이들의 일과 삶에 대한 이야기를 기록하는 활동가인터뷰 공모 프로젝트를 진행했습니다. 인터뷰 공모에는 여러 지역의 활동가들이 참여해주셨습니다. 이 프로젝트는 <공익활동가사회적협동조합 동행>, <한국시민사회지원조직네트워크>, <지리산이음>이 공동주최하고, <아름다운재단>이 지원했습니다. |
우리나라 노동시간은 OECD 평균보다 높은 1915시간으로, 중남미 3개국을 제외한 OECD 국가 중 가장 높다. 장시간 노동으로 스트레스와 번아웃을 호소하는 노동자들이 많으며, 불안정한 고용 환경으로 생계 위협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한국의 노동조합에 가입해 있는 노동자는 2022년 기준 13.1%에 불과하다. 다른 선진국들에 비해 매우 낮은 수준이다. 지민주는 이러한 대한민국의 열악한 노동 현장의 한중간에 있는 인물이다. 노동자들이 자신의 권리를 외치는 현장과 연대하는 그는 노동 가수다. 그의 공연에는 화려한 조명이 따로 없다. 아스팔트 위가, 허름한 공장 앞이 그의 공연장이다. 우리 사회 소외된 이들을 위로하고 희망을 주는 그의 노래가 오늘도 거리 위에서 울려 퍼진다.
또한 10여 년 전부터는 더 나은 노동문화를 만들고자 동료들과 ‘일과노래’라는 문화공동체를 만들어 사라져가는 노동문화를 세상에 알리고 있다. 노동계 내에서도 소외된 여성노동자, 장애인노동자 등에 대한 기획공연, 교육사업이 그것이다. 30여 년간 투쟁하는 노동자들의 친구로 늘 함께해온 지민주를 만났다.
Q. 인터뷰 시작 전에 오래전 기억 하나를 소환할게요. 예전 직장에서 노동조합을 만들었어요. 공익재단 최초의 노조였는데. 조직의 투명성, 공익성을 위해 만든 노조였지만 ‘공익단체에서 무슨 노조냐’는 따가운 시선을 받아야 했죠. 추웠던 2월, 이사회가 열리는 서울 시청 앞에서 노조원들이 함께 작은 집회를 했어요. 보도블록 한편에서 20명도 되지 않는 사람들이 모여 앉아 집회하는데 어찌나 춥고 뻘쭘한지. 그때 지민주 씨가 공연을 왔는데, “왜 이렇게 쳐져 있냐, 어깨 펴고 자신 있게 구호 외치라”며 노래를 힘차게 불러주는데, 움츠렸던 어깨가 절로 펴지고 힘이 났어요. 지민주 씨를 그때 처음 봤는데 ‘저분 참 멋지다’는 생각했어요.
하하, 저도 기억나네요. 많지 않은 분들이 모여 있는데 이런 집회는 익숙지 않은지 쭈뼛쭈뼛하는 모습에 부끄러워하는구나 느꼈죠. 저도 그럴 때 많아요. 번듯한 무대가 있는 것도 아니고 거리에서 노래 부를 때면 그런 감정을 느끼곤 하죠. 그때는 스스로 주문을 외워요. 사람들이 주눅 들지 않게 응원해주는 게 내 역할이니 그 역할에 충실하자라고.
#노래로 희망을 전하며 노동현장과 함께한 30여 년
Q. 노동 가수로 활동한지 오래 되셨죠. 어떻게 활동을 하게 된 건가요?
25세에 시작했으니 내년이면 30년이네요. 대학시절 노래패에서 활동했어요. 졸업 후에는 저처럼 대구에서 노래하는 사람들과 ‘좋은친구들’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활동을 했어요. 그런데 공연비만으론 생계가 어려우니 다들 투잡, 쓰리잡을 뛰었어요. 저도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미술교습소 운영, 학교방과후 미술강사 등 일을 겸업했죠. 그야말로 노래를 부르기 위해 일을 한 셈이죠.
Q. 30년이면 강산이 세 번도 변한 시간인데. 어려운 환경에서도 그 긴 시간을 활동할 수 있었다는 게 대단해요. 스스로도 이렇게 오래 활동할 줄 알았나요?
솔직히 전문 노동 가수로 활동할 생각은 하지 못했어요. 당시에는 서울 출신이 아니면 중앙 무대에서 활동하기가 어려운 분위기였어요. 지방 출신에 여성인 제가 학연, 지연도 없이 서울에 와서 혈혈단신으로 활동 영역을 넓혀가는 게 쉽지는 않다고 생각했죠.
Q. 그럼에도 핸디캡을 딛고 지금은 ‘노동 현장에서 지민주를 모르면 간첩’일 정도로 유명하잖아요. 30여 년을 활동했으니 정말 많은 곳을 가셨을 듯한데 특히 기억에 남는 현장이 있나요?
아무래도 사람이 죽어 나가는 현장이 기억에 오래 남아요.
솔로 활동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천안의 작은 금속사업장의 파업 현장을 갔어요. 노동조합을 무력화하기 위해 사측에서 구사대를 꾸리고 경찰도 와있었는데, 대치 중 한 노동자가 경찰이 휘두르는 물체에 얼굴을 맞고 중태에 빠졌어요. 당시 이 사건으로 충남 최초의 연대파업이 일어나기도 했는데요. 결국 노동자분은 사망하고, 사업장의 지부장님도 유서를 남기고 분신했어요. 지부장님이 정말 선한 분이셨어요. 노조 사무실이 너무 추워서 ‘왜 난방하지 않냐’고 했더니, 현장은 더 추운데 자신만 따뜻하게 있을 수 없다고 얘기하는 분이셨죠, 그런 분이 죽었다고 하니 큰 충격이었어요. 열사는 특별한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내가 아는 평범한 사람이 죽는 모습을 보며 많은 생각이 들었어요.
2003년에는 근로복지공단 비정규 노동자가 제 눈앞에서 분신했던 일도 있었어요. IMF 이후 비정규직이 대거 늘던 시기였는데, 홀어머니와 약혼녀까지 있던 30대 청년의 죽음이 너무 안타까웠어요. 그 사건을 계기로 전면파업이 일어났고 사측이 정규직 전환을 약속하면서 상급단체를 한국노총으로 바꾸고, 집행부 전원 해고를 조건으로 내걸었는데 결국 조합원들에 의해 가결되었죠. 그때 소식을 듣고 참 씁쓸했어요.
이런 열사들의 죽음을 지켜보며 노동문화가 변해야 한다는 걸 느꼈고, 누군가는 그걸 위해 역할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노동문화활동가가 된 이유기도 합니다.
#노동을 혐오하는 사회, 다양한 문화 아우르는 실천 이어져야
Q. 우리나라에서 ‘노동’이라는 단어가 주는 이미지가 좋지 않아요. 그런 걸 많이 느낄 듯한데요.
노동이라는 용어를 혐오하는 분위기가 팽배하죠. 언젠가 청소노동자들의 투쟁 현장에 갔는데, 집회 중간에 인근 빌딩의 화장실을 이용하려는 청소노동자들에게 노조 조끼를 벗고 들어가라는 거예요. 우리나라에서는 노동조합이 자랑스러운 게 아니라 숨겨야 할 대상이구나 느낀 순간이었어요. 여성 노동자에 대한 인식은 더 안 좋죠. ‘밥하는 아줌마’는 우리나라에서 혐오의 단어로 쓰일 정도예요.
Q. 맞아요. 정말 안타까운 현실이죠. 한 번에 바뀌긴 어렵겠지만 조금씩 바꿔가야 할텐데요.
저는 노동조합이 임금 투쟁도 중요하지만 사회, 여성, 성소수자 등 다양한 문화를 아우르는 눈을 가지고 그걸 바꾸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 또한 여성노동, 장애노동, 안전노동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한 기획공연, 노동인권 교육 등을 꾸준히 하고 있어요.
또한 아동청소년에 대한 노동인권교육이 더 활발해져야 한다고 봅니다. 학교에서 청소년에게 노동인권 교육하러 가면, 부모님이 노동자이고 본인도 당장 1~2년 후에 사회에 나가는 특성화고 학생들조차 근로기준법에 대해 전혀 몰라요. 영어보다 저는 이게 더 중요하다고 보거든요. 해외에는 초등학교 교과서에 교섭하는 방법 등이 실려있고 노동에 대해 어릴 때부터 배워요.
Q. 청소년 얘기가 나오니 생각나는데 중학생 아이가 있는 걸로 알아요. 노동가수, 노동문화활동가가 흔한 직업은 아니기에 아이가 부모님의 일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궁금하네요.
남편도 저도 같은 일을 하다 보니 어릴 때는 아이가 친구들에게 “너희 부모님은 어디로 노래하러 가니?” 이렇게 묻기도 했죠.(웃음) 어릴 때는 공연 현장에 많이 데리고 다녀서 이해가 높은 편이예요. 다행히 아직은(?) 우리가 하는 활동을 자랑스러워하고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이라 생각해줘요. 고맙죠.
Q. 공연이 투쟁 현장에서 주로 이루어지다 보니 지방도 많이 다녔을 텐데 체력적 한계를 많이 느끼지 않나요?
30여 년 동안 지방을 숱하게 다녔죠. 어떤 날은 운전해서 거제-대전-서울 이렇게 이동한 적도 있어요. 요즘은 체력의 한계로 기차를 자주 이용해요. 그래도 과거에는 단위 사업장 공연이 많아 지방을 자주 갔는데, 요즘은 지역본부, 중앙본부 요청으로 가는 공연이 많아서 예전보다는 지방가는 일이 많이 줄었죠.
Q. 힘든 순간도 많겠지만 그래도 노래하고 공연할 때 가장 많이 힘이 날 것 같아요. 어떠세요?
맞아요. 제 관객들이 대부분 열악한 환경에 놓인 사람들이잖아요. 그런 분들이 제 노래를 듣고 힘을 얻을 때 저도 힘이 나요.
더불어 나 스스로가 잘했다고 느꼈던 순간도 있어요. 변호사의 재판 노쇼로 피해를 입었던 학교폭력 피해자 유족인 이기철 씨 사연을 언론에서 접하고 저 또한 아이를 키우는 부모로서 마음이 아팠어요. 제 음반 중 ‘힘내라 마음아’ 노래가 수록된 음반과 함께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드렸는데 많은 위로가 되었다는 답을 받았어요. 그때 공감하고 함께하는 문화가 중요하다는 걸 다시금 느꼈죠.
#문턱 높은 노동문화 세상에 알리는 역할 계속 할 터
Q. 스스로를 노동 가수가 아닌 노동문화활동가로 지칭하시는데요.
노동문화=집회문화 또는 노조공연이 아니예요. 저는 차별받지 않고 동등하다는 뜻이 담긴 ‘대동’이 노동문화에 가깝다고 봐요. 그럼에도 노동자 내에서 정규직-비정규직, 여성-남성, 장애-비장애로 나뉘고 차별이 생겨요. 지금 우리 사회에는 다양한 문제가 산적해 있죠. 실제 저도 10여 년 전부터는 노동현장뿐만 아니라 장애인, 기후, 여성, 사회(전세 사기, 세월호 참사 등) 영역의 공연이 많이 늘었어요. 우리 사회의 노동을 혐오하는 문화를 바꾸기 위해서는 노동에 대한 인식, 노동문화가 변해야 합니다.
특히 저는 여성노동자 문제에 관심이 많아요. 1998년 울산 현대자동차에 국내 첫 정리해고 파업이 있었어요. 3시간 넘게 땡볕에서 같이 투쟁하고도 여성 노동자들만 식당에 들어가 식사 준비를 하는 모습을 보며 충격을 받았어요. 당시 한 영상팀이 현대자동차 파업투쟁을 촬영하러 갔다 그곳의 여성 노동자들의 삶을 찍었는데, 그 다큐가 바로 <밥꽃양>이예요. 이후 사측에서 정리해고를 철회하는 조건으로 여성노동자만 해고시킨다고 했는데, 다행히 노조원들의 부결로 무산되기도 했죠.
현대자동차뿐만 아니라 많은 투쟁 사업장에서 여성 노동자들이 차별받는 모습을 목격하면서 한국 사회에서 노동문제 해결을 위해 넘어야 할 가장 큰 산은 여성문제이며, 나중에 여건이 되면 그런 주제로 활동하고 싶다 막연히 생각했어요.
Q. 몇 해 전 열린 최초의 여성노동자 투쟁 콘서트 <내 이름을 불러주오>가 그런 과정에서 탄생한 거군요. 생각만 하던 걸 현실로 만든 셈이네요.
맞아요. <내 이름을 불러주오>는 1970년대 동일방직부터 2022년 파리바게뜨 여성노동자의 투쟁까지 싸우는 여성 노동자의 눈으로 따라가는 최초의 여성 노동자 투쟁 콘서트예요. 노동자의 투쟁에 ‘성(性)의 다름으로 인한 차이와 차별’이 아니라 함께 했기에 힘든 산들을 넘을 수 있었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여성노동자의 시선으로 본 여성 노동운동사를 노래와 영상 등으로 엮어 작품을 만들었고, 그걸 많은 현장의 여성노동자들과 나누어 함께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 노동의 주체로서 변화 발전시켜야 할 우리의 마음을 토닥여주고 싶었어요.
Q. 멋진 기획이네요. 그걸 혼자 힘만으로는 어려웠을 듯한데요.
물론이죠. 2013년에 창단된 문화노동자들의 문화공동체인 ‘일과노래’ 팀이 함께 제작한거죠. 일과노래는 오랜시간 현장에서 함께한 개인들이 모여 좀 더 나은 노동문화를 만들고자 만든 프로젝트 그룹이예요. 현장과 소통하며 노동가요 창작과 음반제작, 기획공연, 노조 문화교육, 찾아가는 콘서트 등의 활동을 하고, 기획공연 '탈환의 시작 <고백>-싸우는 노동자를 지키는 우리의 노래와 사무금융 민주화투쟁, 장애인 자존감 뿜뿜 프로젝트 <우리가 가는 길이 역사다> 등을 기획했죠.
Q. 최근에는 유튜브 활동도 시작하셨어요. 이름이 <채널 세지마(세상에 지지마)>네요.
‘노동’이라는 단어가 아직 문턱이 높잖아요. 노동문화를 더 대중적으로 알리기 위해 일과노래 팀에서 만든 채널이예요. 노동문화의 플랫폼이 되어서 노동문화에 대한 교육, 긍정적 인식을 확장해가고 싶어요. 최근 이 채널에 올린 뮤직비디오 ‘투쟁하는 열사의 눈으로 세상을 노래하라’ 영상은 마석모란공원에서 노동가수들이 노래로 열사를 기리는 모습을 담아 많은 호응을 얻기도 했어요.
Q. 10년 후에도 노동 현장에서 지민주 씨를 볼 수 있을까요? 어떤 활동가로 기억되고 싶으세요.
아마 있을 거예요. 다만 노래를 계속하기보다는 노동문화를 만들어가는데 힘을 보태는 사람으로 활동하고 있을 거 같아요. 많은 분이 이 영역을 떠났지만 마지막까지 노동문화를 끝까지 지키는 사람으로 남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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