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만사X지리산]의식주만으로는 살 수 없는 시골살이, '하모니'로 채우다 - 임선주


오랫동안 그녀의 프사에 적힌 기도의 문장을 보면서 독실한 기독교인가 하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실상사 마야 합창단의 지휘자로 수십 명의 목소리를 매혹적인 화음으로 조율해내는 모습을 보면서, 게다가 올해부터는 원백일리의 이장님이 되었다는 소문을 듣고서는 짐작만으로는 가늠할 수 없는 그녀의 안과 밖이 궁금해졌다. 사방에 오디 열매가 익어 뽕나무 아래의 농로가 새까맣게 즙으로 물들어가는 유월 첫째 주에 임선주, 그녀를 만났다. 


늘 아이들의 웃음과 악기 소리로 분주하던 그녀의 집 너른 거실에 말끔하고 적요로운 유월의 아침 햇살이 어룽거리고 있었다. 



사진 : 실상사 앞 카페 '플래닛커피'에서는 월에 1번 재즈 공연이 열린다. 어쿠스틱 기타를 잡은 임선주 씨.




Q. 산내에 오신 지 벌써 20년이 다 되셨죠? 2005년 봄에 이사오고 나서, 그때는 귀농인이 많지도 않을 때였으니까 실상사 대중들과 한생명 식구들이 새로 마을에 들어온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는 시간이 있었는데 그때 선생님 가족과 우리 가족 모두 새로 들어온 마을주민으로 둥글게 서서 첫인사를 나누었던 기억이 있어요. 


- 오, 그랬어요? 맞아요. 2005년 봄에 우리도 산내에 들어왔으니까 벌써 그렇게 되었네요. 산내에 오기 전에는 창원에서 살았어요. 음악 학원을 하다가 그곳에서 교육 공동체 활동을 꽤 오래 하기도 했었는데 여러 일이 있었고, 몸과 마음이 지치기도 하고 아프기도 해서 곡성에서 한 7개월 아무것도 안 하고 살기도 했어요. 그러다 도법 스님이 하시던 순례 활동에 참여한 인연으로 이곳 산내에 오게 되었죠. 사실 곡성에서 살기 전에는 한번도 시골에 살아본 적이 없었던 사람이라 내가 시골에 정착하게 될 줄은 몰랐어요. 그런데 시골에는 농사짓는 사람만이 아니라 문화 예술활동을 하는 사람도 필요하다는 도법 스님의 말씀을 듣고 아, 그렇구나, 우리도 시골에서 할 일이 있겠구나 싶었죠. 오자마자 한결이 아빠는 한생명 간사로 나는 실상사 방과후 교사로 일하면서 마을에 적응하게 되었죠.

 



사진 : 산내 들어오기 전, 차별 없는 세상 만들기 걷기 행진 당시. 맨 앞이 임선주 씨.



산내로 오기 전 7개월 동안 살았던 곡성에서의 생활. 아는 이 없고, 곁에 마음 나눌 이웃 귀농인도 없었지만 오롯이 세 식구가 얽매임 없이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마음껏 자연을 누리며 살았던 그 시절은 아직도 평생 기억에 남을 소중한 시간이다. 하지만 당시 홈스쿨링을 하고있던 한결에게는 마음 나눌 친구 하나 없는 외로운 시간이기도 했다. 산내로 와서 가장 좋았던 것 중의 하나는 아이에게 평생을 같이 할 좋은 친구들이 여럿이 생겼다는 것이었다. 곧 아이는 산내의 대안학교인 작은학교에 들어갔고 물고기처럼 신나게 새로운 강물 속을 헤엄쳐나갔다. 



Q. 그 이후의 얘기를 좀 해볼까요? 실상사 방과후 교사로 오래 활동하진 않으셨잖아요?


- 대개 그렇겠지만 인생이란 게 계획대로 흘러가는 게 아니더라고요. 여기 오고 2년이 채 되지 않아서 개인적으로 이혼이라는 상황에 맞닥뜨린 거죠. 가족이라는 울타리만 믿고 평생 살아왔던 도시를 떠나 실상사 공동체라는 이상적인 환경 속에서 조화롭게 여생을 보낼 줄 알았는데 한동안 인생이 송두리째 뿌리 뽑히는 듯한 폭풍우 속을 떠다녔죠. 그런데 그 과정에서 내가 그동안 살아왔던 시간들을 죽 돌아보고 정리할 수 있게 되더라고요. 아, 나도 모르게 관계 속에서 옴짝달싹 못하고 억압 받았던 것들이 많았었구나. 그래, 이렇게 깨진 참에 가족이라는 틀을 벗어나서 내가 누구인지 한번 찾아보자. 실상사 부처님 앞에 엎드려 눈물도 쏟아보고, 집에서 꼼짝 않고 틀어박혀 있기도 하고, 만수천을 따라 미친듯이 걸어다니기도 하면서 최대한 자신에게 집중하며 스스로를 돌보는 시간을 가졌던 것 같아요.




사진 : 실상사 방과후 학교 음악시간




벽 속에서 문이 열리다




대학에서 성악을 전공한 클래식 음악 전공가였지만 대학 졸업 후 한동안 사회변혁 운동을 했고, 서양 클래식 음악을 반동적이고 부르주아적인 잉여문화로 취급하는 운동권 내부의 시각, 혹은 가정 내의 분위기로 인해 그녀는 오랫동안 자신이 좋아하고, 잘해왔던 것들을 부정하는 시간들을 보냈다. 역설적이게도 괴로움의 극한에서, 타의로 자의로 억압하고 부정해왔던 그녀의 평생의 사랑, 음악을 다시 만났다. 




Q. 음악 활동을 다시 시작하시게 된 건 이혼하고 나서부터였겠네요. 그전엔 방과 후에서는 음악활동을 많이 하진 않았지요? 


- 맞아요. 이혼하고 산내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내가 처음으로 한 일이 뭔 줄 아세요? 창문을 딱 열고 클래식 음악을 큰 소리로 틀어놓고 운전하는 거! 얼마나 황홀하던지 하하하...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결혼하고 나서 한 번도 클래식 음악을 제대로 틀어놓고 즐기지를 못했다니까요. 내가 알아서 나를 가두고 살았던 거지! 아무튼 한결이는 작은 학교 다니고, 남편은 이제 남이 되었고, 집에 와서 하루하루 아무것도 안 하고 지내고 있는데 하루는 엄마가 어릴 때부터 내가 치던 피아노를 보내주신 거야. 그래서 그때부터 나를 위해서 피아노를 막 치면서 놀았는데 하루는 이웃에 살던 어련이라고, 그때 초등학생이었는데 동네에 피아노 선생이 없으니 피아노를 가르쳐달라고 하더라고요. 그렇게 동네 아이들에게 피아노 가르치는 일도 우연히 시작하게 되었죠.



Q. 학교 방과후 음악 선생님도 그렇게 시작하게 되신 거군요? 지리산 북부 인근 초등학교와 중학교의 방과후 음악 활동을 모두 아우르시는 마당발 캐릭터로 거듭 나신 게 그때 즈음이었죠?


- 지금도 너무 고마운 게 집에서 멍하니 먼 산 보고 넋이 나가 있던 나를 바깥으로 끌어낸 게 아이들이야. 집에서 띵띵 치는 피아노 소리 듣고 아이들이 찾아오고, 그 이야기를 듣고 인근 학교에서 여기저기 음악 수업을 해달라고 연락이 오고 하면서 나도 내가 좋아하는 일들을 새삼스럽게 쓸모 있게 펼쳐나갈 수 있게 되었죠. 마천 초등학교에서 합주 시작하면서, 산내 초등학교에서도 밴드부를 결성해달라 해서 밴드부를 만들고, 중학교 올라가서도 밴드활동 계속하고 싶다고 애들이 졸라서 산내 중학교 밴드부도 지도하고. 또 기타 가르쳐달라 해서 기타도 가르치고, 드럼도 애들이 배우고 싶다 해서 그럼 한번 해볼까 해서 내가 먼저 배운 다음 애들을 가르쳤어요. 애들이 나를 믿어주고 기다려주니까, 이 친구들과 주고받는 리듬과 에너지로 인해서 자연스럽게 포도나무처럼 가지를 이렇게 저렇게 펼쳐나갈 수 있게 된 거죠.




사진 : 다양한 연령층의 마을 구성원과 함께 어우러지는 음악활동을 지속하고 이어오고 있다.



Q. 그렇게 인근 학교들의 방과후 음악을 도맡으신지가 벌써 15년이 넘었지요?. 힘든 일도 겪으셨지만, 살아오신 그간의 세월이나 행적이 그래도 어떤 유기적인 흐름 속에서 자연스럽게 한 단계에서 다른 단계로 이어지는 느낌이네요. 음악 선생님과 합창단 지휘자, 마을 이장님 등등...혹시 이렇게 다양한 역할이나 활동들로 인해 일상이 번잡해지거나 스트레스를 받지는 않으시는지?


- 예전에는 그랬어요. 나와 다른 사람들을 비교하고, 나 자신에 대해서도 엄격하고 모진 시선으로 책망하는 일이 많았죠. 근데 이혼하고 그 과정에서 바닥을 한번 치고 나니까 내가 내 자신에게 엄청 너그럽게 되었어요. 완벽하지 않아도 내가 좋아하고 나를 원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래, 한번 던져보자. 그런 마음으로 하는 일이라, 최선을 다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 만큼만 하는 거라 최대한 허물없고 자유롭게 할 수 있게 되었어요. 마야 합창단 지휘를 하게 된 것도 내가 불자이거나 신심이 깊어서라기보다는, 합창단 지도 선생님으로 시작해서는 서로 위안과 힘이 되는 노래들을 같이 부르는 과정 속에서 자연스럽게 합창단원들과도 친해지고. 불교의 가르침에도 어느덧 스며들게 되었고, 그랬죠. 사실 내 입장에서는 딱히 불교나 기독교나 깊은 가르침의 근본을 보면 다를 것도 없는 것 같아요. 다 자기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거니까. 



사진 : 콘트라베이스 연주자인 아들 한결 씨와 임선주 씨




세대를 이어가다



Q. 이제 어엿한 청년이 되어 산내에서 음악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아들, 한결과도 서로 연결되는 부분이 많겠어요. 청년이 되어 산내로 돌아온 한결이나 산내의 친구들을 보면서 마음이 뿌듯하신지? 


- 한결이가 미국에서 음악 공부를 하고 왔잖아요. 예전에 내가 운동 시작하기 전에 유학 가고 싶었던 로망도 있었고, 아들이 더 넓은 세상에서 배우고, 맘껏 꿈을 펼칠 기회를 갖게 되어서 좋았어요. 근데 처음엔 돈도 없고 해서 일단 가자, 가보고 한 일 년은 살아보자, 했는데 장학금도 받고 어떻게 계속 동력이 생겨서 졸업까지 했으니 다행이죠. 아무튼 아들과는 미국에 있을 때 오히려 더 관계가 끈끈해졌던 것 같아. 아들이지만 독립된 사람이 되어가는 과정을 자주 연락하면서 보면서 이제 각자의 삶을 살더라도 서로가 행복할 수 있겠다는 믿음이 커진 거죠. 


공부하고 미국에서 정착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졸업하고 산내에 돌아와서 음악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 또한 새로운 길이 되겠구나 싶어요. 산내는 시골이긴 해도 뜻이 맞는 또래 청년들이 다른 곳보다 많고, 콘트라 베이스 연주자로서 한결이 꿈꾸는 연주 활동을 할 수 있는 공간도 생겼으니(한결은 지난해부터 마음맞는 음악하는 친구들과 재즈밴드를 만들어 카페 '플래닛커피'에서 정기적으로 재즈 공연도 해오고 있다.) 이곳을 거점으로 삼아 본격적으로 연주자로서의 길을 넓혀갈 수도 있지 않을까 응원하는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죠.  



사진 : 임선주 씨가 이장을 맡고 있는 원백일리의 정월대보름 행사




현장이 곧 삶이다



Q. 올해부터 원백일리 이장님이 되셨지요? 여성으로서 귀농인으로서 마을의 이장님 역할을 하는 데 어려움은 없으신지, 맡은 일로 인해 일상이 너무 번잡하지는 않으신지 궁금하네요.


- 원백일리가 지금은 마을 뒤쪽에 새롭게 생긴 전원주택 동네에다 작은 마을까지 포함해서 많이 커졌지만 원래는 굉장히 마을도 작고 원주민도 수가 얼마 되지 않았어요, 게다가 원주민 어르신들도 굉장히 따뜻하고 넉넉하신 분들이라 들어온 젊은 귀농인들을 다들 환영하고 자리를 내주시는 분위기여서 이 마을에 마음 붙이고 살기가 참 수월했어요. 

나도 이 동네에 온지 근 20년이 다 되고 했으니까, 마침 올해 이장 선거도 있고 해서 한번 내가 이장이 되어보면 어떨까 용기를 내보기로 했죠. 지난 1년간 부녀회장 하면서 부딪혀보니 마을 사람들과 행정기관 사이에서 중간자 역할을 하면서 의사소통의 창구 역할만 제대로 해도 되겠다 싶더라고요. 사실 여자라서 이장 역할을 맡는 데 딱히 어려움은 없어요. 세상도 많이 변했고, 저기 뱀사골에 젊은 여자 이장님도 동지로 계시고, 응원해주는 마을분들도 많고, 하하. 



Q. 여러 일을 하시잖아요. 아이들한테 음악 가르치는 선생님, 마야 합창단 지휘자, 이장님, 그리고 아들과 같이 사는 엄마 등등...뭐 이런 역할 중에서 선생님이 그래도 가장 중요하거나 애착을 가지고 있는 역할이 있거나 하시는 일에 굳이 순위를 매긴다면 어떨까요?


- 역할이라고 하긴 그렇고, 하고 있는 일이나 맡은 일이 다 나름 재미있고 크게 부담이 없는 편이라 딱히 순위를 매기긴 그런데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일은 있어요. 아침에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거. 명상을 하거나 산책을 하거나, 혼자 차를 마시거나 피아노를 치거나, 언젠가부터 무조건 오전 시간은 나를 위해서 쓰고 있어요. 오롯이 혼자 충만한 시간에서 나머지의 시간을 아낌없이 쓸 수 있는 힘이 나오는 것 같거든요. 아, 또 하나 있어요. 예전에 어느 프로그램을 봤는데 어느 작은 베트남 할머니가 아이들 합창을 지휘하고 계시더라고요. 그게 너무 아름답고 행복해 보여서 언젠가부터 내 꿈이 되었어요. 호호 할머니가 되어서도 아이들과 음악을 같이 하는 삶을 살아가는 거. 





사진 : 임선주 씨와 그에게 큰 영향을 준 어머니



살면서 가장 막막하고 어두웠던 때, 어린 시절 딸이 치던 피아노를 산내의 작은 집에 옮겨주면서 괴로우면 피아노를 치라고 위로를 건넸던 그녀의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스스로 투석을 해가면서 요양병원 의사로서의 일을 기꺼이, 즐겁게 하셨다고 한다. 삶의 폭풍우에 지지 않고, 벽에 무너지지 않고, 그늘 아래에 누워있다 불현듯 일어나서 스스로 창문을 여는 저 반짝이는 낙천성은 어쩌면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멋진 유산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런 훌륭한 어머니를 둔 임선주 그녀를 부러워하며 나의 박복을 탓할 일이 아니라, 나부터 좀 더 여여하고 의연한 어른이 되어야겠다는 결심을 느닷없이 하게 만든 솔직하고 홀가분했던 그녀와의 시간. 삶이 곧 현장이고 현장이 곧 삶이라는 그녀의 목소리가 짱짱하게 귀를 울린다. 



사진 : 합창단 연습을 지도하는 임선주씨. 오늘도 산내의 문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음악이라는 축을 세워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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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어 | 이덕임

살 곳을 찾아 지구 곳곳을 떠돌다 2005년에 지리산 산내에 가족과 함께 들어왔다. 2003년부터 전문 번역가로 일해왔으며 지금까지 약 30여권의 책을 우리말로 옮겼다. 텃밭 가꾸기와 정원일, 이웃(들)과 산책하기가 본업보다 즐겁고 중요해질 때가 많은 시골 생활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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