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만사X지리산]지금은 ‘어린이’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배우는 중입니다 - '엄마'가 된 어린이 활동가, 정푸른


밥을 먹으며 인터뷰를 진행해도 괜찮겠냐는 말에 푸른은 말했다. “엄마들끼리는 각자 아이를 데리고 밥 먹으면서 수다 떠는 것이 가능해요.” 한국의 엄마들은 그랬다. 아이의 행동을 주시하며 주변의 위협요소를 살피고, 자신의 밥을 챙겨 먹는 동시에 상대의 기분을 살피며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게 되는 이들은 수없이 흔들리다가 의심하고, 기뻐했다가 미워하고, 자책했다가 긍정하는 과정을 거치며 새로운 자아를 만들어간다. 2년 전 인터뷰에서 만났던 푸른에게서 느껴진 것이 바다를 유영하는 물고기떼의 분주함이라면 ‘서로’와 ‘도와’ 두 아이의 엄마가 된 푸른에게서는 깊은 바다 같은 안정감이 더해졌다. 


대안학교 자원교사로 산청에 온 푸른은 이듬해 몇몇 동료들과 함께 초등과정 대안학교인 ‘방정환하늘학교’를 1년간 운영했다. ‘어린이를 그저 한 사람으로 대하기만 해도 세상이 좋아질 것’이라 믿으며 ‘어린이 해방’을 외치던 푸른은 두 아이의 성장을 오롯이 함께하는 엄마가 되었고, 그 곁에는 남편 종혁과 산청 사람들의 조건 없는 지지와 사랑이 있었다. 최선을 다해 자신의 하루를 살아내는 일, 서로 도우며 함께하는 지역문화를 만드는 일로 삶의 새로운 레퍼런스를 만드는 푸른의 이야기는 언제나 이렇게 끝난다. “뭐야, 나 되게 만족스럽게 살고 있었네!” 어떤 일이라도 긍정할 수 있는 푸른의 힘은 이 말에서 온다고 나는 믿었다.


  





Q. 푸른은 본명이죠? 혹시 푸른이라는 이름에 대해서 부모님께 들은 이야기가 있나요?

아빠가 국문학과 출신에다 낭만적인 분이셔요. ‘푸른 바다’를 좋아하셔서 그걸 저희 자매 이름으로 지어주셨어요. 언니 이름은 ‘바다’거든요. 비하인드 스토리라면 국어국문학과 동기들이 어떻게 사람 이름을 형용사로 지을 수 있느냐, 푸른이 아니라 ‘푸름’이어야 한다고 말려서 실랑이가 있었대요. (웃음) 근데 아빠는 끝까지 푸른을 고집했고 저는 푸름이 아닌 것에 엄청 만족하고 있어요. ‘푸른’이라는 이름이 좀 더 자유로운 느낌이 들기도 하고 제가 살고 싶은 모습인 것 같기도 하고요. 푸른이라는 이름에 알게 모르게 영향을 받으며 사는 것 같아요. 그런 영향들이 마음에 들어요.


Q. 실제로 푸른과 ‘푸르다’는 이미지는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이름이에요. 첫째 아이인 ‘서로’의 이름도 독특한데 어떻게 짓게 되었나요?

아이 이름에 대해서 종혁(푸른의 짝꿍)과 일찍부터 이야기했는데, 후보로 생각해본 것들 중에 둘 다 마음에 드는 이름이 ‘서로’였어요. 종혁이 늘 꿈처럼 좌우명처럼 말하는 것이 ‘서로 도와서 다 같이 잘 사는 세상’이예요. 되게 쉽고 평범한 문장 같은데도 종혁이 이야기하니까 그 말에 엄청 깊은 힘이 느껴졌어요. 저도 그런 가치에 공감하고, 멋진 문장이란 생각이 들어서 마음에 품게 되었죠. 그 문장 속에 등장하는 ‘서로’랍니다.







쉴 시간을 행복으로 채우는 엄마의 삶



Q. 외부에서 바라보면 서로가 없었을 때의 푸른과 2년이 지난 지금의 푸른은 엄청나게 다른 모습이에요. 변화의 폭이 큰데 마치 원래 그랬던 것처럼 당연한 상태로 보여요. 오히려 편안해 보이기까지 해요. 

맞아요. 매년 연말이 되면 활동가들이 “올해 일을 너무 많이 했어. 내년에는 조금만 할 거야!”라고들 다짐하지만 잘 안되잖아요. 작년 연말에 제가 ‘2023년은 다른 사람들, 다른 활동들보다 가족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많이 보내고 싶다’고 했는데 실제로 그렇게 되었어요. 아이를 처음 키우니까 그렇기도 했고, 집안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중요한 사건사고와 이벤트가 많기도 했지만요. 이전의 저라면 사람들이 모이는 재미난 행사들에 안 가고 못 견디거든요. 그날의 사진에 제가 없는 걸 견딜 수 없는 사람이었는데, 올해엔 좀 아쉬워도 그럭저럭 참아지고, 집안 일들과 식구들을 돌보는 게 자연스레 우선순위가 되더라고요. 저 스스로도 이런 큰 변화가 어쩐지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느껴졌어요.



Q. 지난 10월에 ‘잠깐 멈추고 싶다’고 이야기한 걸 봤어요. 요즘 마음이 어때요?

전세로 지내던 집을 최근에 매입하며 리모델링도 하게 되고, 처음으로 대출도 해봤어요. 거기다 양가 부모님도 각각 리모델링과 이사로 도움을 드려야 할 상황이었고요. 그런 일들을 나서서 해결하고, 제 수업 준비에 외부 모임까지 하고 다녔으니 정말 정신이 없었어요. 그래서 사실 완전히 멈추진 못했어요. 

그래도 멈추고 싶다고 말하고 나니까 개운해지더라고요. 사람들이 내가 멈추고 싶다는 걸 알기라도 해주니까. 모임에 꾸준히 나가지 못할 때 같이 하던 사람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쌓이는데, 제가 ‘모든 걸 잠시 멈추고 이불 속에 가만히 웅크려 있고 싶다’고 말하고 나니까 사람들이 오히려 그걸 받아들여주고 응원해줬어요. 모임원들이 그래요. “아직 이불 속에 있어도 되는데 왜 벌써 나왔어~”

제 상태를 스스로 알아차리고, 또 알리면서 짝꿍으로부터, 주변으로부터 이해와 배려를 많이 받았어요. 그러니까 실제로 못 쉬는 건 마찬가지지만 마치 조금은 쉰 것처럼 힘이 또 나더라고요. 



Q. 푸른의 하루를 설명해줄 수 있나요?

우선 내가 눈 뜨기 전에 서로가 먼저 깨 있고요. (웃음) 종혁과 같이 서로를 돌보면서 밥 주고 정리하고 설거지해 놓죠. 아빠가 일하러 가면서 부모님 댁에 서로를 맡겨요. 돌봄 선생님이 부모님 댁으로 와 주시고요. 저는 그럼 방해받지 않고 집에서 일하거나 외출해서 볼일을 보곤 해요. 하지만 돌봄 선생님이 맡아 주시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아서 돌봄을 마칠 시간에 제가 서로를 데리고 들어오면 그때부터는 거의 둘이서 붙어있어요. 

저녁엔 서로 밥 먹이고, 일찍 재우고 싶지만… 마음처럼 일찍은 안자고요. (웃음) 서로를 잘 재우기 위해 다 같이 자는 척을 하면서 수면환경을 만들거든요. 근데 자는 척하다 보면 진짜로 잠이 스르르 들어요. 그럴 때 다시 일어나는 게 너무 힘들어요. 정신력으로 잠을 물리치고서 조심스레 설거지, 빨래, 각종 집안일과 내일 하루가 굴러갈 준비도 하다 보면 새벽이 돼요. 그때 누우면 바로 기절하듯 자고요. 그리고 잠깐 눈 감았다 뜨면 다시 아침… 이런 생활의 반복이었어요.



Q.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그려지네요. 그럼에도 서로 때문에 지치기보다 많은 힘이 된다고 하셨어요.

육아는 너무 특이한 영역인 것 같아요. 만약 지금 일상에서 육아만 빠져도 제 모든 일정을 아무런 무리 없이 소화할 수 있을 것 같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탓을 하든지 다른 일 탓을 할지 언정 육아 탓은 하지 않게 돼요. 육아가 제일 중요하다고 의식해서 생각하는 것이 아닌데도 그래요. 마치 본능적으로 화장실을 가고 싶은 상황에서 ‘내가 왜 화장실이 가장 급하지?’ 라고 하지 않는 것 처럼요.

저는 하고 싶은 게 많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아이를 낳기 전엔) 만약 제가 하고싶은 일에 아이가 방해 요소로 작용하면 아이를 탓하게 되진 않을까 걱정했거든요. 그런데 전혀 아니에요. 그걸 감내하지 못하는 내 체력만 탓하게 돼요. 그런 제가 신기하기도 하고, 한편으론 자연스럽다는 느낌이 들어요. 가끔 서로가 없었던 때의 느낌을 떠올려보면 ‘내가 뭐든지 더 할 수 있었구나’, ‘더 자유로웠구나’ 싶지만, 지금 느끼는 행복은 전혀 다른 종류의 행복이에요. 서로가 저에게 주는 사랑은 ‘무조건적인 사랑’이라는 말로도 표현이 안 되거든요. 제가 서로를 돌보고 있지만, 서로가 저를 무한정 신뢰하고 오히려 저를 돌보는 것 같아요. 어쩌면 그 사랑이 더 큰 것 같아요. 서로를 생각하기만 해도 힘이 솟아요.



Q. 이제는 둘째 찹쌀이까지 생겼잖아요. 그 과정에서 느껴지는 푸른 개인의 변화들이 있나요?

종혁과 저는 앞으로 아이를 많이 낳겠다는 계획이 있었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가졌을 때는 모든 게 처음이라 내가 앞으로 얼마나 육아에 에너지를 써야 하는지, 활동을 얼마나 포기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어서 우당탕탕 했어요. 하지만 이제는 한 번 해봤으니까 ‘당분간 내가 이런 활동은 꿈도 못 꾸겠구나’하고 마음 편히(?) 포기할 수 있어요. 멋지고 재미난 활동을 열심히 하는 친구들을 보면 부럽기도 하지만, 그때마다 저는 더 후회없는 육아를 해야겠다 생각해요. 지금 이 시간이 미래의 내가 활동하는 데 있어서 양분이 될 거라고 믿고 있어요. (인터뷰 당시 '찹쌀이'라는 태명으로 불리던 아이는 '도와'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엄마가 되고 세상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Q. 시골엔 청년들도 없지만 특히 임산부, 엄마, 양육자는 더더욱 없어요. 커뮤니티, 인프라가 부족해서 어려운 지점도 있었을 것 같은데 개인(비양육자)일 때와 비교해서 양육자가 되었을 때 사회를 보는 시각의 변화가 있었나요? 

임신 기간과 아이가 신생아였던 시절에는 사회생활에 어려움을 많이 느꼈어요. 예를 들면 늘 가던 지역 행사나 장터에 ‘왜 수유실을 설치하지 않지?’, ‘공공시설인데 기저귀 교환대가 왜 없지?’, ‘이때까지 엄마들은 다 어디서 한 거야?’ 하는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그래서 저는 일부러 어디에서나 수유하려고 했던 편인데, 수유하는 모습을 가린다 해도 여전히 편하게 수유할 수 없는 사회적 분위기가 있어요. 당연히 기본적으로 갖춰져 있어야 할 인프라와 문화가 없는 거죠. 수유하는 엄마들이 어디로도 못 다니는 이유가 있더라고요.

예전엔 지인이 육아 때문에 밖에 나오기 어렵다고 하면 ‘아이 데리고 나오면 되지~’ 하는 생각이 들었고, 모임 자리에서도 아이 때문에 일찍 들어가야 한다고 하면 ‘하루쯤 좀 늦게 재우면 안 되나?’ 생각하기도 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집집마다 육아 방식과 환경이 모두 다르다는 걸 알게 됐고, ‘하루쯤 늦게 재우는’ 게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배웠죠. 아이가 어릴수록 하루 생활 패턴이 어긋났을 때 다음날 양육자의 시간이 얼마나 고생일지 이해하게 됐어요.



Q. 푸른이 느꼈던 양육자 인프라 문제에서 작게 나마 변화를 시도했던 경험이 있나요?

실제로 해보지는 못했는데 이야기를 나눠본 적은 있어요. 함양 ‘문화놀이 장날’ 행사를 기획하는 회의에서 제가 수유실 운영부스를 해보고 싶다고 제안했어요. 그 당시 생각으로는 행사에 수유실만 있어도 많은 엄마들이 밖으로 나올 수 있고, 거기에서 엄마들이 친해질 수도 있지 않을까 상상했어요. 제안이 실제로 실행되진 못했지만, 수유실의 필요성에 대한 다른 활동가들의 공감대를 확인하는 자리였어요.

또, 산청 양육자 온라인 카페를 만든 적이 있어요. 만들기만 하고 아무도 활동하지 않는 유령 카페인데 언젠가 장터에서 만난 양육자 분께서 저의 자연주의 출산 후기 글을 보셨다는 얘길 들었을 때 정말 반가웠어요. 이런 사례를 퍼뜨리는 것 자체로 지역사회에 의미가 있을 것 같고, 앞으로 자연주의 출산이나 자연주의 출산동반자인 ‘둘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자연주의 출산 토크쇼>같은 기획도 상상해볼 수 있게 됐어요. 하고 싶은 일과 그에 필요한 사람은 준비되었기 때문에 자금과 시간만 있다면 언제든지 해볼 수 있을 것 같아요.



Q. 시골에서 양육자는 어떤 경로로 육아를 배우게 되나요? 

비양육자가 상상했을 때 양육자들끼리 서로 정보를 공유하면서 여유 있게 차츰차츰 육아를 배워 나갈 것 같지만, 제 경험상 그런 건 거의 없었어요. (웃음) 육아는 결국 자기 취향이나 믿음대로 하게 되는 것 같아요. 처음엔 인터넷, 책 찾아보는 걸로 시작해서 주변에도 물어보다가 점점 자기 방식이 찾아지더라고요. ‘엄마’라는 존재는 모든 감각을 열어놓고 닥치는 대로 정보를 흡수하는 사람 같아요. 저도 온 몸에 빨판을 장착해둔 기분이에요. 어디서든 배워요.

한 번은 육아 고민을 나누는 양육자 모임을 기획해본 적도 있는데, 쉽지 않더라고요. 시골에서는 양육자 수도 많지 않은데 거기서 마음도 맞고, 자녀의 나이도 비슷하고, 양육 가치관도 비슷하면서, 양육자들의 활동가능한 시간대까지 맞는 사람들을 모으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것 같았어요. 함께 아이를 키울 동료 양육자를 만난다는 게 시골에서는 훨씬 더 어려운 일 같아요. 마음 맞는 엄마는 너무나 필요하지만 그렇다고 ‘일단 엄마인 사람들은 모두 모이세요!’ 해서 거기서 마음 맞는 엄마를 찾을 여유나 에너지는 없더라고요.



Q. 지역사회의 기성 세대나 관공서에서 청년을 바라볼 때 갖는 시각도 비슷해요. 일단 청년들끼리 모아 놓고서 일을 만들어보라고 할 때가 있거든요. 하지만 누구라도 취향이나 성향이 맞아야 건강한 커뮤니티가 만들어지잖아요. 

산청에는 큰 장벽 없이 느슨하게 운영하는 청년모임이 있어요. 카톡방 이름이 ‘우리 동네 친구들’인데 벌써 스무 명 넘는 친구들이 있어요. (나이는 모두 다르지만 서로를 ‘친구’라고 부른다.) 거기서는 공통의 관심사를 발견하면 “헤쳐 모여!” 하는 식으로 재미난 일을 함께하곤 해요. 이번 연말엔 비슷한 추억을 공유하는 세 명의 친구가 어린이 장기 자랑을 곁들인 하우스 콘서트 행사를 준비하고 있어요. 먹거리 자립에 관심있는 사람들은 같이 모여서 장을 담그기도 했고요. 앞으로 파이가 커져서 각자 취향에 맞는 모임들이 생기면 좋겠고, 산청에 이런 느슨하고 커다란 모임이 생겼다는 것만 해도 고마운 일 같아요.





아이와 함께 자라는 산청 ‘엄마들’



Q. 산청에는 원래 육아와 교육에 대해 고민했던 사람들이 만든 ‘민들레 읽기 모임’이 있었잖아요. 푸른도 함께해왔나요?

민들레모임은 제가 ‘방정환하늘학교’에서 교사로 활동할 때부터 유일한 비양육자로 참여하던 모임이에요. 하지만 기존 멤버들의 자녀가 청년기로 접어들면서 양육, 교육 이슈를 자주 다루지 못하고 있던 때가 있었죠. 그러다 처음 취지처럼 모임 주제를 양육과 교육으로 되가져가자는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고, 마침 그때쯤 젊은 양육자 멤버들이 새롭게 들어오면서 민들레 시즌2를 맞이한 것 같아요. 그러면서 모임 이름도 ‘다시 민들레’로 정의하게 됐고요. 지금은 자녀가 청소년 혹은 청년이 된 선배 양육자와 저 같은 후배 양육자가 골고루 모여 있는 모임이 되었죠. 그래서 더 풍성하고 새로운 흐름으로 모임을 이어가고 있어요.

지금은 어디를 가도 민들레 식구들이 가장 든든한 육아 지원단이에요. 가는 곳마다 서로의 엄마가 여럿 대기중인 셈이죠. 그분들의 도움이 없었으면 제가 활동하는 것에도 커다란 한계가 있었을 거예요. 친정 식구들처럼 임신도 함께 기뻐해주고, 임산부를 배려해주고, 잠시라도 제가 덜 힘들도록 애써 주시고, 제가 말하기도 전에 모두 나서서 아이 돌보는 일을 도와주세요.



Q. 그 힘이 여실히 느껴졌던 게 서로의 돌잔치인 것 같아요. 푸른, 종혁, 서로 세 식구가 산청에서 정말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고 느꼈거든요. 돌잔치는 어떻게 계획하게 되었나요?

사실 돌잔치를 그렇게 크게 할 계획은 아니었어요. 원래는 생각이 없었는데, 서로에게 노래를 만들어 불러주겠다는 이웃이 있어서 ‘그럼 한 번 해볼까?’하는 정도였죠. 제가 어떤 일을 시작하면 디테일까지 제 취향대로 하고 싶은 강박이 있는데, 그 당시에 제가 그렇게 꼼꼼하게 돌잔치를 준비할 여력이 없었거든요. 그런데 친구가 사회를 봐주고, 지역 뮤지션들께서 축하 공연을 해주고, 이웃들이 아침부터 다같이 공간을 꾸며줬어요. 제가 주문한 게 아닌데도요. 그렇게 여러 사람의 손길로 만들어진 돌잔치라 제가 혼자 준비한 것보다 훨씬 행복하고 만족스러운 잔치가 된 것 같아요.  

말로 표현 못할 정도로 사랑을 받아서 너무 감사했는데 사실 제 안에는 괴로움도 있었어요. 우리가 스스로를 특별한 사람처럼 만드는 것 같아서요. 서로 백일 때도 저희가 애착을 가지고 있는 ‘산청 목화장터’에서 백일 떡을 나누기도 했는데요. 같이 기쁨을 나누고 싶은 마음에서 그런 일을 벌이다가도 가끔은 ‘우리가 뭐라고…’ 하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저는 이웃들하고 같이 어울려서 산다는 느낌이 좋아서 그렇게 하는 건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까진 안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우리가 튀는 것 같아요. 저나 짝꿍이 워낙 여기저기서 활동하다 보니 사랑도 시선도 많이 받게 돼요. 

그러다 보니 저희도 잘 모르는 분들이나 기억하지 못하는 분들이 서로를 알아보는 경우들도 많아요. 이런 일들로 인해서 서로가 너무 많은 시선을 받아야 하는 게 부담스럽기도 했고, 만약 서로가 자라서도 낯선 사람들이 서로에게 아는 척을 하는 일이 잦아졌을 때 서로가 싫어하진 않을까 걱정이 되더라고요. 뭔가를 하다 보면 이웃과 함께하고 싶은데 그랬을 때 일이 이렇게 커지는 게 딜레마예요.



Q. 제 경우엔 특별한 날에 축하하고 응원해줄 수 있도록 돌잔치를 바깥에 열어준 게 고마웠어요. 푸른의 삶과 활동을 좋아하고 응원하고 싶은 사람들이 모이다 보니까 커지는 것 아닐까요? 

그러니까요. 저는 너무 고마워서 어쩔 줄 모르겠어요. 저는 다른 사람 돌잔치 가본 적이 없는데 멀리서 여기까지 와주는 마음을 잘 모르겠으니까 고맙고 미안했어요. 내가 이걸 갚을 수 있을까, 어떻게 보답할 수 있을까 생각도 들고요. 





처음부터 혼자였던 적 없습니다



Q. 산청에서 개인 활동가로 활동할 때와 커뮤니티 안에서의 푸른의 활동은 변화가 있나요?

산청에 와서 살면서 저를 개인 활동가로 생각한 적은 없는 것 같아요. 늘 관계 속에 있었고, 그들이 없으면 내가 있을 수 없는 그런 관계였던 것 같아요. 처음 산청을 내려왔을 때만 해도 저는 어린이와 교육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이고 싶었는데 외부에서는 ‘어린이를 좋아하는 젊은 애’ 정도로 봤거든요. 제가 교육에 대해서, 어린이에 대해서 얼마나 진지하게 고민하는지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 것 같았어요. 대안학교 교사를 그만뒀을 때 사람들이 일자리를 연결시켜 주기도 했는데 제 관심사와는 전혀 다른 일이었어요. 제가 하고싶은 건 따로 있는데, ‘뭐든지 할 수 있는 젊은이’로 소비되는 기분이 당시엔 정말 괴로웠어요.

그때 한범(산청 청소년공간 ‘명왕성’ 지기)과 은진(함양 커뮤니티공간 ‘빈둥’ 지기/청소년 활동가)이 저를 구해준 거죠. 대외적으로 신뢰가 있는 선배들이 교육과 어린이, 청소년에 대해 얘기하는 자리에 저를 데리고 다녀주면서 사람들이 서서히 저를 어린이 활동가로 인식해 줬다고 생각해요. 그러지 않았다면 저는 그저 ‘젊은이’였을 수도 있는데 그들 덕분에 제가 원하는 모습으로 활동하고 사람들에게 인식될 수 있도록 길이 열린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시작부터 혼자였던 적이 없어요.



Q. 과거에 ‘방정환하늘학교’를 하면서 산청의 진짜 매력을 알게 됐다고 이야기했어요. 푸른이 산청이라는 지역에서 느끼는 가장 큰 매력은 역시 사람들인가요?

네, 저에게 산청은 ‘산청 사람들’인 것 같아요. 이곳 사람들이 산청에서 살아가는 방식이 저에게 제일 매력적으로 다가온 것 같아요. 그들이 없는 산청이면 이곳만의 지역성을 느끼지 못했을 거예요. 여기선 내 마음에도 들고 큰 마음을 쓰지 않아도 되는, 적당히 느슨한 관계망을 만드는 게 가능했어요. 산청의 매력은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다 커뮤니티 관계망 안에 있다고 생각해요.




내 일상도 누군가에겐 레퍼런스



Q. 푸른이 지역의 활동가라면 스스로 어떤 활동가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요? 혹은 어떤 활동가가 되고 싶나요?

지금은 육아에 집중해야 할 시기이기 때문에 외부 활동에 중심을 두고 있지 않아요. 그래서 어떤 활동가라고 해야할까 고민되는데요. 원래는 ‘어린이가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드는 활동가’이고 싶었죠. 지금은 그 ‘어린이’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배우는 중이라고 할까요. 짧은 시간에 계속해서 성장하고, 많은 것이 변하는 아이와 있다 보니 도무지 다른 존재에 신경 쓸 겨를이 없는 것 같아요. 서로의 성장 과정을 따라 배울 것이 많아서 어린이, 청소년 문제를 깊이 고민할 여력은 없지만 서로의 눈높이에서, 서로가 자라는 시간에 맞춰서 제가 그간 보지 못했던 새로운 세상들을 배워가고 있어요.

최근엔 이런 생각도 했어요. 다른 또래 활동가들은 열심히 멋지게 세상을 바꿔나가고 있는데, 나는 왜 욕심만 많고 잘하는 것이 없는가 하는 생각이요. 내가 원하는 내 모습도 되지 못하고, 원하는 세상을 만들지도 못하는 제 자신을 한탄했어요. 저는 멋있어 보이고 옳아 보이는 일을 하는 사람들을 봤을 때, 저도 그렇게 될 수 있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저의 특성과 한계를 더 잘 알게 되면서 ‘되고 싶은 나’와 ‘실제 나’ 사이에서 괴리감이 들더라고요. 

계속 고민하다 보니 꼭 멋있는 사람이 되지 않더라도 저 같은 사람이 소소하게 만들 수 있는 변화도 분명 있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유아차가 인도에 다니기 어렵다면 면사무소에 민원을 넣어서 변할 수 있게 하다든가, 안전하고 느슨한 공동체에서 아이를 함께 기르는 모습을 보여주는 일 같은 것들이요. 

방정환하늘학교를 꾸려갈 당시에도 구성원들끼리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훌륭한 시설이나 재정, 많은 아이들이 오는 학교가 되지 못해도 괜찮다고요. 우리가 하고자 했던 교육을 실천해서 단 한 명의 아이라도 잘 길러낼 수 있으면 좋겠다고요. 내가 더 낫다고 믿는 것들을 잘 실천하고 그런 삶을 유지하는 것만으로 세상에 보여주는 메시지가 있다고 생각해요. 제 머릿속을 더 잘 설명하기가 어렵네요. 아무튼 제가 매 순간 저의 일상을 건강하게 잘 사는 것이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아이들이 그저 한 아이로 존재할 수 있도록



Q. 아이를 기르고, 어린이와 함께 활동하면서 지역에서 가장 필요한 인프라는 어떤 것이라고 느꼈나요? 

이건 우리 동네에서 이미 만들어지고 있는 것 같아요. 이렇게 지금처럼 사는 모습, 동네 이모 삼촌들이 연결돼 있는 튼튼한 관계망을 갖추는 거요. 길에서 만나면 인사할 수 있는 이모 삼촌들이 있다는 게 우리동네 어린이들에게 가장 좋은 점일 것 같아요. “아는 삼촌이라도 문 열어주면 안 돼~”가 아니라 “삼촌, 저기까지만 태워주면 안 돼요?” 할 수 있는 동네로 만드는 거죠. 그런 신뢰 관계를 우리가 계속 만들어가고 보여주는 게 가장 중요한 인프라 같아요. 



Q. 올 겨울 ‘산청에도 몰래산타’도 기획하고 있죠?

‘사랑의 몰래산타’라는 사업은 처음에 수도권에서 시작되었는데 소외계층의 어린이들에게 산타가 찾아가는 프로그램이에요. 짝꿍인 종혁이 사랑의 몰래산타가 만들어지던 그때 몰래산타 활동을 했어요. 그리고 그때의 기억을 살려 ‘산청에도 몰래산타’를 기획하게 됐죠. 저는 산타랑 같이 살다 보니 자연스레 매년 함께 기획하고 실행하게 됐는데, 종혁이 워낙 바빠서 언젠가부터 제가 더 주도적으로 하고 있어요. 산타가 저만 믿고 겨울이 오는지도 모르기 때문에… (웃음) 일을 할 때가 됐는데도 산타가 움직일 생각을 안 해요. 그래서 “산타야, 정신차려~ 이제 사연 모집을 해야지!” 하고 산타 모드로 전환해줘야 해요. 

그런데 산청은 작은 지역이다 보니 각 가정의 사연을 공개하거나 어린이들과 함께한 사진을 올리는 것이 조심스러워요. 그래서 이 활동의 과정이나 결과를 널리 공유하진 못하고 저희끼리 소박하게 소회를 나누는 정도라서 아쉽지만 꾸준히 이어나가고 싶은 활동이에요.






행복은 늘 가까이에 있었다



Q. 2년 전 인터뷰에서 마지막에 ‘하고 싶은 게 너무나도 많다’고 하셨어요. 혹시 남는 시간이 생긴다면 해보고 싶은 일이 있나요? 

…남는 시간? 요즘은 그런 걸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어요. (웃음) 지금은 그때와 비교하자면 상황이 많이 변했어요. 하고싶은 일을 상상하는 시간은 거의 없고, 현실에 두 발을 푹 담그고 살아가는 사람이 된 것 같아요. 아이와 함께 생활하다 보니 다른 걸 생각할 여유는 없어서 어떤 재미난 일을 한다는 상상이 너무나도 아득하게 느껴져요. 고맙게도 “푸른, 이런 거 하고싶어 했잖아!”, ”우리 나중에 이거 하자!”, “나중에라도 이런 거 해보면 어때?” “하고싶은 일 잘 기록해 둬!” 하고 계속 물어봐 주는 친구가 있어서 그 감각(내가 하고싶은 일을 마구 상상하고 펼치는 감각!)도 완전히 잃지 않으려고 노력해요. 



Q. 마지막으로, 스스로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이야기가 있다면요? 

지금도 여러 가지로 힘든 순간들은 있지만 전체적인 내 생활이나 삶을 놓고 보면 엄청 만족도 높은 시기인 것 같아요. 육아든 살림이든 가족관계든 내가 만족스러운 방식으로 나름 잘하고 있는 것 같아요. 지금의 나에게 필요한 얘기가 이 이야기였던 것 같아요. 나 지금 되게 행복한 거네! 하고 방금 깨달았어요. 힘들 때 이 생각을 하면 될 것 같아요. ‘사실은 다 잘 되어가고 있는 거야. 잘 생각해봐. 넌 이미 행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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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승현
지리산 귀촌 6년차, 세상의 본질에 대한 호기심을 동력삼아 시골에서 살고 있습니다. 내 주변 존재들의 이야기를 더 많이 알리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지리산 귀촌인 인터뷰집 《어디에나 우리가》를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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