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는 끝내 자신을 공익활동가라고 부르지 않았다
여성긴급전화 1366대전센터 류경화 국장

사진 : 여성긴급전화1366대전센터 류경화 국장을 만났다.
"나는 공익활동가가 아닙니다."
류 국장은 인터뷰 내내 그 말을 여러 번 반복했다.
처음에는 겸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 시간 남짓 그의 삶을 따라가다 보니, 그 말은 자신을 낮추는 표현이 아니라 삶의 출발점을 설명하는 문장이었다.
그는 세상을 바꾸겠다는 꿈을 품고 시민단체의 문을 두드린 사람이 아니었다. 남편을 잃고 두 아이를 먹여 살려야 했던 마흔 살의 가장이었다.
류 국장의 첫 직장은 금융기관이었다.
1990년대 초, 남성 직원들은 양복값을 지원받았고 여성 직원들은 제복을 입었다. 창구는 여성들의 자리였고 승진은 대부분 남성들의 몫이었다.
“권위적인 상사한테는 많이 혼났어요.”
성과를 어렵게 만들어도 휴가를 다녀온 상사가 자기 몫이라고 가져가려 했다.
신혼여행을 다녀온 뒤에는 휴가 기간에 생긴 문제의 책임이 그의 이름으로 돌아오기도 했다. 그는 그냥 넘기지 않았다.
"그게 왜 제 책임입니까?"
지금의 류 국장은 당시 자신을 ‘뾰족한 사람’이었다고 말한다. 세상을 바꾸겠다는 거창한 뜻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눈앞의 불합리를 외면하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결혼과 출산은 그를 조금씩 바꾸기 시작했다. 첫아이는 잠을 자지 않았고 먹지도 않았다. 밤이면 아이를 안고 거실을 서성이는 날이 이어졌다.
“동서가 그러더라고요. 형님은 아이 낳기 전에는 차갑고 예민했는데, 많이 둥글어졌다고.”
아이를 키우는 시간은 아이만 자라는 시간이 아니었다. 한 사람의 마음도 함께 자라고 있었다.
그러나 삶은 또 한 번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렀다.
2009년 남편이 세상을 떠났다. 두 아이는 아직 어렸고 산재 소송은 길어졌다. 슬픔을 견딜 틈보다 살아갈 방법을 먼저 찾아야 했다.
“먹고 살아야 했어요.”
그는 길게 설명하지 않았다. 그 한 문장 안에 마흔 살의 시간이 모두 들어 있었다.
생계를 위해 찾은 곳이 대전YWCA였다. 그는 시민운동을 꿈꾸던 사람이 아니었다. 아이들의 저녁밥을 책임져야 하는 엄마였다. 하지만 그 선택은, 훗날 그의 삶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삶도 조금씩 바꾸기 시작했다.

사진 : 여성폭력 예방 및 근절 합동 캠페인
사람을 만나며 사람이 바뀌었다
그가 처음 맡은 일은 간병사들을 관리하는 업무였다. 100명이 넘는 간병사들이 병원 곳곳에서 일하고 있었다. 새벽에도 전화가 울렸고, 토요일과 일요일에도 병원으로 달려가야 했다.
처음에는 생계를 위한 직장이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간병사들의 삶을 들여다보게 됐다.
“환자만 돌보는 게 아니에요.”
간병사는 환자를 돌보지만, 실제로는 훨씬 더 많은 사람을 상대한다. 보호자의 요구를 들어야 하고, 의료진의 지시를 따라야 하며, 같은 병실 환자와 보호자의 시선까지 견뎌야 한다. 하루에도 몇 번씩 “왜 이렇게 했느냐”, “저 사람은 다르게 하더라”는 말을 듣는다.
그들의 이야기는 대부분 전화로 시작됐다. “국장님, 저한테 좀 와주세요.”
한 번은 충남대학교병원에서 간병비를 받지 못했다는 연락이 왔다. 보호자는 며칠만 기다려 달라고 하더니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류 국장은 병원으로 향했다. 병실 안에서 이야기를 시작했지만, 보호자는 밖으로 나가기를 거부했다. 언성이 높아지자 다른 병실 사람들이 하나둘 고개를 내밀었다. 결국 경찰까지 출동했다.
병실 밖으로 나온 뒤에도 그는 같은 말을 반복했다.
“노동을 하셨잖아요. 대가는 주셔야 합니다.”
한참 뒤 보호자는 밀린 간병비를 건넸다.
또 다른 날에는 한 간병사가 울먹이며 전화를 걸었다. 환자가 “환자를 골라 받는다”, “남자 보호자에게 꼬리를 친다”는 말을 퍼뜨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류 국장은 병실로 찾아갔다.
“하실 말씀이 있으면 제 앞에서 말씀해 주세요.”
전화기 너머에서는 거칠던 사람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그 뒤로 그 간병사는 같은 일을 겪지 않았다고 했다. 류 국장은 그 일들을 특별한 사건처럼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인터뷰 내내 가장 많이 한 말은 다른 것이었다.
“그분들이 저를 많이 바꿨어요.”
죽음을 앞둔 환자를 끝까지 지키는 간병사들, 자신의 삶도 버거운데 다른 사람의 마지막 시간을 함께하는 사람들. 그들을 가까이에서 보며 그는 자꾸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됐다.
“저는 소진되지 않았어요.”
잠시 생각하던 그가 말을 이었다.
“오히려 제가 얼마나 행복하게 살아왔는지를 알게 됐어요.”
그 말은 의외였다. 힘든 현장에서 일했는데도 그는 지쳤다고 말하지 않았다. 대신 자신이 얼마나 많은 것을 가진 사람이었는지를 깨달았다고 했다. 사람을 돕는 일이 사람을 바꾸고 있었다.
2년 3개월 뒤 그는 YWCA를 잠시 떠났다. 아버지의 암 투병이 시작됐고, 아이들을 돌봐주던 어머니도 더 이상 손주를 맡아줄 수 없었다.
그는 직업상담사 자격증을 취득해 다른 복지기관 면접도 봤다. 그런데 면접장에서 뜻밖의 말을 했다.
“YWCA에 자리가 생기면 저는 그곳으로 다시 가겠습니다.”
면접관 앞에서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이었다. 그만큼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생계를 위해 들어온 직장이 어느새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 있는 곳이 되어 있었다는 것을.
2014년 그는 다시 YWCA로 돌아왔다. 청소년시설인 위캔센터에서 회계와 총무를 맡았다. 적성에 꼭 맞는 일은 아니었다. 그래도 조직이 필요로 하는 자리라면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그것을 ‘희생’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조직이 더 좋은 방향으로 가는 일이라면 하는 거죠.”
언젠가부터 그는 조직보다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사진 : 폭력피해여성 생활지원금 전달 '숨'

사진 : 스토킹 피해자 지원 유관기관 회의
폭력은 한 사람에게서 끝나지 않았다
2022년, 류 국장은 여성긴급전화 1366 대전센터 사무국장을 맡았다.
1366은 전화를 받는 곳이면서 동시에 지역사회의 연결망이었다. 가정폭력과 성폭력, 스토킹, 교제폭력 피해자가 도움을 요청하면 경찰과 상담소, 쉼터, 병원, 법률기관을 잇는다. 피해자 한 사람의 삶은 어느 한 기관만으로는 지켜낼 수 없었다.
“한 사람을 살리려면 여러 기관이 함께 움직여야 해요.”
그 말은 업무 설명이라기보다 현장에서 얻은 결론처럼 들렸다. 그래서 그는 사무실보다 밖에 있는 시간이 많았다. 경찰서를 찾아가 협조를 부탁하고, 행정복지센터를 찾아 주민등록 열람 제한이나 긴급지원 절차를 설명했다. 병원과 종교시설, 지역아동센터와 편의점을 돌며 폭력 피해자를 만나면 1366을 알려 달라고 당부했다.
거창한 운동이라기보다 끊어진 줄을 하나씩 다시 잇는 일이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사례를 묻자 류 국장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한 가족이 있었어요.”
처음 접수된 내용은 단순했다. 아들이 어머니를 폭행했다는 사건이었다. 그러나 사례를 들여다볼수록 전혀 다른 삶이 드러났다.
남편에게 오랫동안 폭력을 당했던 어머니는 아이를 학대했고, 학대받으며 자란 아이는 성인이 되어 다시 어머니를 폭행하고 있었다.
폭력은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었다. 한 세대에서 끝나지 않고 다음 세대로 옮겨갔다.
류 국장은 그 가족을 ‘가해자’와 ‘피해’라는 단어만으로 설명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피해자였던 사람이 나중에는 가해자가 되기도 해요.”
짧은 한 문장이었다. 그 말 속에는 수많은 상담 기록과 현장에서 만난 사람들의 얼굴이 겹쳐져 있는 듯했다.
센터는 경찰과 상담소, 복지기관을 연결했고, 가족은 가해자로부터 분리됐다. 새로운 보금자리를 마련했고, 생활을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여러 기관이 함께 도왔다.
이야기를 들려주는 내내 류 국장은 자신의 공을 말하지 않았다.
“직원들이 정말 많이 애썼어요.”
그는 늘 ‘우리’라고 말했다. 성과는 직원들에게 돌렸고, 부족함은 자신의 몫으로 남겨두었다.
“직원들이 그러더라고요. 국장님, 해결해 달라는 게 아니라 공감해 달라는 겁니다.”
그 말을 하며 그는 웃었지만, 그 웃음에는 스스로를 돌아보는 마음이 묻어 있었다.
문제를 해결하는 일에는 익숙했지만, 사람의 마음을 오래 듣는 일은 아직도 배우는 중이라고 했다.
인터뷰가 끝날 무렵, 그는 오래 기억해 온 성경 구절 하나를 꺼냈다.
“나는 매일 죽는다.” 젊은 시절에는 이해할 수 없었던 말이었다.
“지금은 조금 알 것 같아요. 내 생각을 먼저 내려놓는 연습인 것 같아요.”
인터뷰를 마치고 사무실을 나서는데 직원 한 사람이 급히 그를 찾았다. 결재를 받아야 할 서류가 있었고, 다른 직원은 회의 시간을 확인했다. 전화벨도 다시 울렸다.
조금 전까지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던 사람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다.

사진 : 공중화장실 불법촬영 카메라 탐지 서비스
그 모습을 보며 인터뷰 첫머리에 들었던 말이 다시 떠올랐다.
“나는 공익활동가가 아닙니다.”
그는 여전히 자신을 그렇게 부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한 시간 남짓 그의 삶을 따라가며 나는 다른 사실을 보게 됐다.
사회는 거대한 구호만으로 바뀌지 않는다. 새벽 전화를 받고 병원으로 달려가는 사람, 간병 노동자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병실 앞에 서는 사람, 경찰과 행정복지센터를 찾아다니며 폭력 피해자가 다시 살아갈 길을 잇는 사람들이 사회를 조금씩 움직인다.
변화를 만드는 사람은 처음부터 세상을 바꾸겠다고 나선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 주어진 자리에서 한 사람을 끝까지 외면하지 않는 사람.
류 국장은 끝내 자신을 공익활동가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삶은 오래전부터 이미 그 이름으로 세상과 만나고 있었다.
인터뷰어 : 이은하
논픽션 작가. 한 사람의 생애를 통해 사회의 변화를 기록한다.
『페미니스트 비긴스』와 『어딘가에는 아는 사람만 아는 맞춤복 거리가 있다』를 펴냈으며, 『대덕연구단지 50년 삶과 이야기』 집필에 참여했다.
활동가 인터뷰 프로젝트 〈변화를 만드는 사람들〉 은 공익활동가의 지역·영역·세대를 잇는 사회적 지지와 연대의 플랫폼, 2026 공익활동가주간과 함께합니다. 공익활동, 캠페인의 성과보다 그 일을 한 활동가 개인의 이야기에 시선을 맞추는 이 프로젝트는 다양한 지역과 분야에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변화를 위해 노력하는 활동가들을 직접 만나 이들의 일과 삶을 기록합니다.
이 프로젝트는 아름다운재단의 지원으로 지리산이음이 기획·운영하고 있습니다.
그는 끝내 자신을 공익활동가라고 부르지 않았다
여성긴급전화 1366대전센터 류경화 국장
사진 : 여성긴급전화1366대전센터 류경화 국장을 만났다.
"나는 공익활동가가 아닙니다."
류 국장은 인터뷰 내내 그 말을 여러 번 반복했다.
처음에는 겸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 시간 남짓 그의 삶을 따라가다 보니, 그 말은 자신을 낮추는 표현이 아니라 삶의 출발점을 설명하는 문장이었다.
그는 세상을 바꾸겠다는 꿈을 품고 시민단체의 문을 두드린 사람이 아니었다. 남편을 잃고 두 아이를 먹여 살려야 했던 마흔 살의 가장이었다.
류 국장의 첫 직장은 금융기관이었다.
1990년대 초, 남성 직원들은 양복값을 지원받았고 여성 직원들은 제복을 입었다. 창구는 여성들의 자리였고 승진은 대부분 남성들의 몫이었다.
성과를 어렵게 만들어도 휴가를 다녀온 상사가 자기 몫이라고 가져가려 했다.
신혼여행을 다녀온 뒤에는 휴가 기간에 생긴 문제의 책임이 그의 이름으로 돌아오기도 했다. 그는 그냥 넘기지 않았다.
"그게 왜 제 책임입니까?"
지금의 류 국장은 당시 자신을 ‘뾰족한 사람’이었다고 말한다. 세상을 바꾸겠다는 거창한 뜻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눈앞의 불합리를 외면하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결혼과 출산은 그를 조금씩 바꾸기 시작했다. 첫아이는 잠을 자지 않았고 먹지도 않았다. 밤이면 아이를 안고 거실을 서성이는 날이 이어졌다.
아이를 키우는 시간은 아이만 자라는 시간이 아니었다. 한 사람의 마음도 함께 자라고 있었다.
그러나 삶은 또 한 번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렀다.
2009년 남편이 세상을 떠났다. 두 아이는 아직 어렸고 산재 소송은 길어졌다. 슬픔을 견딜 틈보다 살아갈 방법을 먼저 찾아야 했다.
그는 길게 설명하지 않았다. 그 한 문장 안에 마흔 살의 시간이 모두 들어 있었다.
생계를 위해 찾은 곳이 대전YWCA였다. 그는 시민운동을 꿈꾸던 사람이 아니었다. 아이들의 저녁밥을 책임져야 하는 엄마였다. 하지만 그 선택은, 훗날 그의 삶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삶도 조금씩 바꾸기 시작했다.
사진 : 여성폭력 예방 및 근절 합동 캠페인
사람을 만나며 사람이 바뀌었다
그가 처음 맡은 일은 간병사들을 관리하는 업무였다. 100명이 넘는 간병사들이 병원 곳곳에서 일하고 있었다. 새벽에도 전화가 울렸고, 토요일과 일요일에도 병원으로 달려가야 했다.
처음에는 생계를 위한 직장이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간병사들의 삶을 들여다보게 됐다.
간병사는 환자를 돌보지만, 실제로는 훨씬 더 많은 사람을 상대한다. 보호자의 요구를 들어야 하고, 의료진의 지시를 따라야 하며, 같은 병실 환자와 보호자의 시선까지 견뎌야 한다. 하루에도 몇 번씩 “왜 이렇게 했느냐”, “저 사람은 다르게 하더라”는 말을 듣는다.
그들의 이야기는 대부분 전화로 시작됐다. “국장님, 저한테 좀 와주세요.”
한 번은 충남대학교병원에서 간병비를 받지 못했다는 연락이 왔다. 보호자는 며칠만 기다려 달라고 하더니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류 국장은 병원으로 향했다. 병실 안에서 이야기를 시작했지만, 보호자는 밖으로 나가기를 거부했다. 언성이 높아지자 다른 병실 사람들이 하나둘 고개를 내밀었다. 결국 경찰까지 출동했다.
병실 밖으로 나온 뒤에도 그는 같은 말을 반복했다.
“노동을 하셨잖아요. 대가는 주셔야 합니다.”
한참 뒤 보호자는 밀린 간병비를 건넸다.
또 다른 날에는 한 간병사가 울먹이며 전화를 걸었다. 환자가 “환자를 골라 받는다”, “남자 보호자에게 꼬리를 친다”는 말을 퍼뜨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류 국장은 병실로 찾아갔다.
“하실 말씀이 있으면 제 앞에서 말씀해 주세요.”
전화기 너머에서는 거칠던 사람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그 뒤로 그 간병사는 같은 일을 겪지 않았다고 했다. 류 국장은 그 일들을 특별한 사건처럼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인터뷰 내내 가장 많이 한 말은 다른 것이었다.
죽음을 앞둔 환자를 끝까지 지키는 간병사들, 자신의 삶도 버거운데 다른 사람의 마지막 시간을 함께하는 사람들. 그들을 가까이에서 보며 그는 자꾸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됐다.
잠시 생각하던 그가 말을 이었다.
그 말은 의외였다. 힘든 현장에서 일했는데도 그는 지쳤다고 말하지 않았다. 대신 자신이 얼마나 많은 것을 가진 사람이었는지를 깨달았다고 했다. 사람을 돕는 일이 사람을 바꾸고 있었다.
2년 3개월 뒤 그는 YWCA를 잠시 떠났다. 아버지의 암 투병이 시작됐고, 아이들을 돌봐주던 어머니도 더 이상 손주를 맡아줄 수 없었다.
그는 직업상담사 자격증을 취득해 다른 복지기관 면접도 봤다. 그런데 면접장에서 뜻밖의 말을 했다.
“YWCA에 자리가 생기면 저는 그곳으로 다시 가겠습니다.”
면접관 앞에서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이었다. 그만큼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생계를 위해 들어온 직장이 어느새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 있는 곳이 되어 있었다는 것을.
2014년 그는 다시 YWCA로 돌아왔다. 청소년시설인 위캔센터에서 회계와 총무를 맡았다. 적성에 꼭 맞는 일은 아니었다. 그래도 조직이 필요로 하는 자리라면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그것을 ‘희생’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언젠가부터 그는 조직보다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사진 : 폭력피해여성 생활지원금 전달 '숨'
사진 : 스토킹 피해자 지원 유관기관 회의
폭력은 한 사람에게서 끝나지 않았다
2022년, 류 국장은 여성긴급전화 1366 대전센터 사무국장을 맡았다.
1366은 전화를 받는 곳이면서 동시에 지역사회의 연결망이었다. 가정폭력과 성폭력, 스토킹, 교제폭력 피해자가 도움을 요청하면 경찰과 상담소, 쉼터, 병원, 법률기관을 잇는다. 피해자 한 사람의 삶은 어느 한 기관만으로는 지켜낼 수 없었다.
그 말은 업무 설명이라기보다 현장에서 얻은 결론처럼 들렸다. 그래서 그는 사무실보다 밖에 있는 시간이 많았다. 경찰서를 찾아가 협조를 부탁하고, 행정복지센터를 찾아 주민등록 열람 제한이나 긴급지원 절차를 설명했다. 병원과 종교시설, 지역아동센터와 편의점을 돌며 폭력 피해자를 만나면 1366을 알려 달라고 당부했다.
거창한 운동이라기보다 끊어진 줄을 하나씩 다시 잇는 일이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사례를 묻자 류 국장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처음 접수된 내용은 단순했다. 아들이 어머니를 폭행했다는 사건이었다. 그러나 사례를 들여다볼수록 전혀 다른 삶이 드러났다.
남편에게 오랫동안 폭력을 당했던 어머니는 아이를 학대했고, 학대받으며 자란 아이는 성인이 되어 다시 어머니를 폭행하고 있었다.
폭력은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었다. 한 세대에서 끝나지 않고 다음 세대로 옮겨갔다.
류 국장은 그 가족을 ‘가해자’와 ‘피해’라는 단어만으로 설명하지 않았다.
짧은 한 문장이었다. 그 말 속에는 수많은 상담 기록과 현장에서 만난 사람들의 얼굴이 겹쳐져 있는 듯했다.
센터는 경찰과 상담소, 복지기관을 연결했고, 가족은 가해자로부터 분리됐다. 새로운 보금자리를 마련했고, 생활을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여러 기관이 함께 도왔다.
이야기를 들려주는 내내 류 국장은 자신의 공을 말하지 않았다.
그는 늘 ‘우리’라고 말했다. 성과는 직원들에게 돌렸고, 부족함은 자신의 몫으로 남겨두었다.
그 말을 하며 그는 웃었지만, 그 웃음에는 스스로를 돌아보는 마음이 묻어 있었다.
문제를 해결하는 일에는 익숙했지만, 사람의 마음을 오래 듣는 일은 아직도 배우는 중이라고 했다.
인터뷰가 끝날 무렵, 그는 오래 기억해 온 성경 구절 하나를 꺼냈다.
“나는 매일 죽는다.” 젊은 시절에는 이해할 수 없었던 말이었다.
인터뷰를 마치고 사무실을 나서는데 직원 한 사람이 급히 그를 찾았다. 결재를 받아야 할 서류가 있었고, 다른 직원은 회의 시간을 확인했다. 전화벨도 다시 울렸다.
조금 전까지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던 사람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다.
사진 : 공중화장실 불법촬영 카메라 탐지 서비스
그 모습을 보며 인터뷰 첫머리에 들었던 말이 다시 떠올랐다.
“나는 공익활동가가 아닙니다.”
그는 여전히 자신을 그렇게 부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한 시간 남짓 그의 삶을 따라가며 나는 다른 사실을 보게 됐다.
사회는 거대한 구호만으로 바뀌지 않는다. 새벽 전화를 받고 병원으로 달려가는 사람, 간병 노동자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병실 앞에 서는 사람, 경찰과 행정복지센터를 찾아다니며 폭력 피해자가 다시 살아갈 길을 잇는 사람들이 사회를 조금씩 움직인다.
변화를 만드는 사람은 처음부터 세상을 바꾸겠다고 나선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 주어진 자리에서 한 사람을 끝까지 외면하지 않는 사람.
류 국장은 끝내 자신을 공익활동가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삶은 오래전부터 이미 그 이름으로 세상과 만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