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동운동 아저씨가 페미니스트가 되고 조직 문화와 공동체를 말하기까지
평등하고 안전한 활동공간을 위한 네트워크 <우리가잇다> 활동가 정인
그때는 내가 단체를 그만두(ㅁ 당하)고는 리더십이니 조직 문화니 하는 것들의 교육이며, 워크샵, 코칭, 모임들을 닥치는 대로 찾아다녔던 때였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내가 조직 내에서 겪었던 일들이 너무 기가 막혀서, 잘못된 건 내가 아니라 그 사람들이라는 걸 확인하고 싶어서 그랬던 것 같다.
<평등하고 안전한 활동공간 만들기> 자조모임(현 평등하고 안전한 활동공간을 위한 네트워크 <우리가잇다>)에 참여한 것도 그 일환이었다.
모임 당일, 홍대 근처의 꽤 큰 스터디룸은 참여자들로 꽉 차 있었다. 모임을 주최한 활동가도 이렇게 많은 사람 들이 올 줄은 몰랐다고 했다. 예상했던 대로 참여자 대부분은 청년이거나 여성이었다. 각자 활동의 영역은 달랐지만 비슷한 경험들을 했다. 딱 한 사람을 빼고.
검정 일색의 옷차림. 무거워 보이는 가방. 정인 님은 보통의 중년 남성 활동가처럼 보였다. 그는 소위 말하는 운동권이었고, 노동운동을 했고, 관리자였다고 했다. 나는 속으로 저 사람은 여기 왜 왔을까 생각했다.
<우리가잇다>는 몇 차례 모임을 더 가졌다. 모임이 으레 그렇듯이 <우리가잇다>에도 새로 합류하는 멤버도 빠지는 멤버도 생겼다. 드문드문 참석하는 멤버들도 있었다. 정작 그는 멀리서 오면서도 모임에 거의 빠진 적이 없었다. 그는 평소에는 본인은 활동가가 아니라며 손사래를 쳤고 말을 아끼는 편이었지만, 모임이나 다른 멤버들이 어려움을 겪을 때면 적극 나섰다. 나는 약간 부끄러워졌다.
모임을 지속하며 그에 대해서 조금 더 알게 됐다. 그는 운동권이었고, 노동운동을 했고, 관리자였다. 하지만 동시에 돌봄을 경험했고, 성폭력 피해자지원 활동을 했고, 페미니즘과 조직 문화와 공동체의 책임을 말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의 별로 어울리는 것 같지 않은 내력들이 궁금해졌다.

사진 : <우리가잇다> 활동가 정인. 뒤쪽으로 책방 들락날락에서 발행하는 시사비평지 프라우다 및 그의 책 철학의 기원 등이 보인다.
- 안녕하세요, 정인 님. 먼저 저를 믿고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 <우리가잇다>에서 만났죠. 정인 님과 <우리가잇다>를 소개한다면.
"이게 첫 질문부터 너무 어려운데(웃음) 저는 학생운동을 하다가, 90년대 말부터 노동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을 했어요. 노동운동은 한라하청노조 이후로 주로 대공장 사내하청운동에 관심을 갖고 노조 건설 사업을 지원했었고, 2000년대 중반부터는 성폭력 사건 지원활동도 해왔던 거 같아요.
몇 년 전에 오래 했던 단체를 해산하고, 지역에 아는 활동가들이랑 북카페 만드는 사업에 발을 걸쳤다가 코를 꿰서 요즘은 그 연장으로 책읽기모임이랑 소식지 내는 일을 하고 있긴 한데, 사실 활동가로서는 퇴직했다고 생각합니다. 활동가가 나이 들면 나대지 말고 시간 나면 이런저런 집회 가서 조용히 머릿수나 하나 보태주는 게 제일 좋은 거 같아요. (웃음)
사실 저는 <우리가잇다>에 가기가 뭣했어요. 저는 운동의 피해자라고 보기는 좀 그런 게 사실 일찍 관리자가 돼서 관리자 역할을 오래 했었거든요. 물론 크게 봐서 운동문화의 피해는 저도 입었고, 그런 차원에서는 피해자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웃음). <우리가잇다> 만들 때, 같이 하시는 분들 중에 성폭력 사건 지원활동 같이 하셨던 분들이 불러서 왔다가 여기까지 오게 됐네요.
실제로 최근 몇 년 사이에, 운동 진영에서 조직문화에 대한 문제제기가 계속 늘어나고 있거든요. 사실 반성폭력 운동이 조직 문화를 바꾸는데 엄청난 역할을 했다고 생각하지만, 또 모든 게 다 성폭력 피해로 환원되지 않는 것도 있잖아요. 보통 조직 내에서 문제를 제기하면 조직 문화가 위계적인 곳에서 문제 제기를 받아들이지 않거나 축소하면서 같이 문제가 되는 경우가 굉장히 많았어요. 저도 그런 사건들을 몇 개를 지원했었고요.
반성폭력 운동이 결국 조직문화의 문제로 이어지는 경우가 굉장히 많은데, <우리가잇다>가 제기하는, 잘못된 운동 문화에 문제를 제기하고 바꾸자는 의의에 공감해서 계속 함께하게 된 것 같아요."
- <우리가잇다>는 아직 자조모임 형태지만, 말씀해주셨던 것처럼 운동 진영 내의 조직문화 변화와 관련된 것들을 많이 모색을 하고 있는 중이긴 합니다. 정인 님은 <우리가잇다>의 최연장자 멤버인데요. 아무래도 <우리가잇다>에는 위계폭력에 취약한 청년, 여성 활동가들의 참여가 많았는데, 정인 님도 원래부터 조직문화에 관심이 많았나요?
"예전에는 불합리하다 생각만 했지 바꿀 생각이나 이런 건 별로 안 했던 거 같아요.
옛날에 단체에서 재정사업 한다고 뭘 한 적이 있는데, 그때 같이 일하던 동료가 같이 밥 먹으면서 ‘거기 한번 가봐, 일하는 분들을 좀 막 대하더라, 그래서는 안 되는 거 아니야’라는 거예요. 그 동지는 운동하는 사람이 그럼 안 되지 않냐는 뜻으로 말했는데, 저는 사실 그게 크게 문제 있다고 생각 안 했거든요. 조직에서 재정사업 하는 사람이 돈만 잘 벌면 되지 않나, 그렇게 생각했던 거 같아요. 당시 대부분 운동권들처럼 능력주의, 효율주의자였던 거죠.
그래도 불합리한 것에 대한 생각은 계속 있었어요. 운동권 치고 좀 독특하게 개인주의적이라는 말도 많이 들었던 거 같네요. 쓸데없는 운동권 문화도 별로 안 좋아했고요. 그런 건 많이 없애려고 했던 것 같아요. 학생운동 할 때 선거운동을 총괄한 적이 있는데, 선거 운동원 대상화하는 짓이라고 마임 같은 거 없애고. 차라리 그럴 시간에 정책교육을 한 시간이라도 더 하자고 했었죠. 후보들이 양복 입는 것도 없애려고 했는데, 그건 후보들이 싫다고 하더라고요. (웃음) 후보 구분이 안 된다나?"

사진 : 평등하고 안전한 활동공간을 위한 네트워크 <우리가잇다> 미션 비전 워크샵
- 그럼 혹시 생각이 바뀌신 계기나 사건이 있나요?
"제가 언더에 있다가 2000년대 초에 단체를 만들어서 나왔어요. 사회주의 언론을 표방한 공개 단체였는데, 단체를 만들어 놓으니까 2000년대 중반 즈음 학생운동에서 사회운동하려고 넘어가는 젊은 후배 활동가들이 들어오기 시작을 하는데 그분들이 대부분 페미니스트였어요. 근데 그 위 세대들은 전혀 아니었거든요.
그 위 세대들은 사실 페미니즘이 적이었어요. 페미니즘은 90년대 초중반에 운동권이 붕괴되던 시점에 그 붕괴를 가속화시킨 것 중에 하나였다고 생각을 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예컨대 우리는 마르크스주의 세미나 하고 있는데 운동 관둔 여자애들이 갑자기 페미니즘 이런 거 해가지고 무슨 모임 만들고 학생회 멤버들 빼앗아가고, 저하고 비슷한 나잇대 같이 일하던 분들은 그런 비슷한 생각이 있는 거예요. 부르주아 사상이 애들을 빼앗아가고 어쩌고저쩌고. 그러니까 이게 세대가 확 갈라지는 거예요. 그게 조직의 단결을 저해하는 거잖아요.
제가 있던 조직도 전 같으면 이게 씨알도 안 먹혔을 것 같은데(웃음) 2007년쯤에는 제가 단체에서 제일 발언력 있는 사람이 되었고, 과거 조직 문화에서 제가 느꼈던 불합리한 측면들을 쇄신해야겠다, 이런 생각을 했었죠. 그 당시 젊은 후배 활동가들이 단체 안에서 계속 페미니즘 세미나 하자고 해서, 같이 페미니즘 세미나도 하고 했어요."
- 세미나 좀 한다고 자동으로 위계를 이해하고 페미니스트가 되는 건 아니잖아요(웃음).
"사실은 처음에는 진정성이 있기보단 정치 테크닉에 가까웠죠. 새로 들어오는 사람들은 다 본인을 페미니스트라고 하는데, 대화를 해서 '통일'을 하든지, '교정'하든지 해야 한다, 이런 생각으로 했던 거죠. 근데 얘기를 들어봤더니 다 맞는 말인 것 같아 보이고, 별로 해 될 건 없는 거 같은 거예요. (웃음) 대충 그래, 맞네 (웃음). 근데 그때까지는 조직이 분열되니까 정치 공학적으로 생각했던 면이 컸던 거고, 후배 활동가들의 요구를 어느 정도는 받아주자, 뭐 이런 생각이었던 거 같아요.
결정적인 건 아까 얘기했던 2007년인가, 8년인가 통합 비슷하게 하려고 했던 다른 조직이 성폭력 사건이 나서, 그 해결 과정에 초청을 받아가지고 봤는데, 너무 우리랑 똑같은 거예요. 해결 과정에 참여해서 이 조직이 돌아가는 여러 가지 문서들을 보니까 조직 운영 원리가 똑같은 거예요. 평활동가끼리는 대화를 못하게 하는 거라든가, 그게 우리랑 너무 비슷하더라고요. 예를 들어서, 저희도 조직의 공식적인 계통이나 총회 같은 공식 회의를 통해서만 정치적 문제를 논의해야 한다, 이런 규정이 있었거든요. 이게 사실상 평조직원들끼리 얘기하는 걸 막는 건데, 이걸 저희는 횡적유통 금지라고 불렀는데, 이름만 다르고 똑같은 게 있더라고요.
저는 그전까지는 이런 조직 운영 원리는 개인이 왜곡을 시켜서 문제였지, 우리가 그때 '민주집중제'리고 믿었던 운영 원리 자체는 잘 구현하면 된다고. 그러니까 우리 조직 대표였던 사람이 문제가 많았고, 이 사람이 너무 이런 걸 자기중심적으로 왜곡시켰을 뿐이지 이걸 잘 구현하면 되는 거고, 내가 할 수 있다, 이렇게 생각을 하고 했었던 거 같아요."

사진 : A학교 성폭력 사안 공익제보교사 부당전보 철회를 위한 거리행진
- 어쨌든 조직문화를 쇄신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으셨다고요. 아까 정인 님도 운동 문화의 피해자라고 하셨는데, 운동을 하면서 구체적으로 그런 걸 느꼈던 때가 언제였나요?
"예를 들어, 저도 옆지기랑 결혼하기 직전에 애가 한 번 생긴 적이 있는데 그때는 어차피 못 낳을 처지라 임신중지를 하긴 했어요. 근데 그러고 나니까 조직 대표가 저보고 정관 수술하라 그러는 거예요. 이 조직이 사람이 적으니까 한 명이라도 관두거나 활동력이 떨어지면 안 된다고 생각을 하는 거죠. 저희 조직 뿐 아니라, 이런 조그만 조직들에 그런 곳이 되게 많았어요. 듣기로 1명 이상 낳으면 징계한다고 명문화 된 곳도 있고, 명문화 된 건 아니지만 혁명적 결의를 통해 애를 낳지 않기로 했다는 얘기도 들어봤고.
근데 옆지기는 애를 낳고 싶다는 얘기를 계속 했었거든요. 그래서 대표한테 옆지기가 동의를 안 할 것 같다고 그랬더니 몰래 하래요. 자기도 했다고. 수술비 10만 원 준다고. 그때 정부에서도 정관수술을 권장하던 때라 비용이 얼마 안 했거든요. 그러면서 포장하기로는 우리 조직은 여성 동지들을 위해서 남성 동지들이 정관 수술하면 지원을 해준다, 이런 얘기나 하고. 그래서 결국 저도 10만 원 받고 정관 수술을 했어요.
근데 나중에 옆지기가 진짜 아이 낳으려고 계획을 잡았는데, 애가 안 생기니까 왜 안 생기지 그래서, 너무 양심에 찔려가지고 이실직고를 했어요. 그날 벽에 걸린 결혼사진 박살나고. 그때는 그 대표가 그만두고 없을 때라, 옆지기가 바로 복구하고 오라고 그래서 훨씬 더 많은 돈을 들여 복구했어요. 지금은 애가 둘이죠. (웃음)
아무튼 이런 개인의 연애, 결혼, 출산 같은 사적인 영역의 문제들을 통제하려는 시도가 당시만 해도 너무 많았고, 활동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죠. 자기 뜻에 안 맞으면 징계하고. 제가 단체에서 최고참이 되고 나서, 이런 걸 바꿔 보려고 과거 조직의 과도한 조치에 피해 입은 분들한테 사과도 하고, 페미니즘 세미나도 하고 했던 건데, 사실 내적으로 완전히 바뀐 건 아니었죠.
근데 문제가 된 조직에 있었던 젊은 분들이랑 얘기를 해보니까… 그때가 2008년이고 밖에서 촛불집회 한다고 난리가 났고, 사회는 번개처럼 변하고 있는데, 조직 내부는 무슨 19세기처럼 살고 있는, 그러니까 21세기 한복판에 후배 활동가들을 무슨 19세기 혁명가나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처럼 키우려고 하고 있었던 거예요. 우리가 가던 방향이 애초부터 잘못된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던 거죠."
- 이전에 자기를 소개하실 때 ‘언저리 운동권’ 이라고 표현하셨던 기억이 나는데요. 그래도 운동을 계속 하셨었나봐요?
"제가 대학에 아무것도 모르고 들어갔는데, 80년대에 경상도에서 중고등학교 다녔는데 뭘 알겠어요. (웃음) 들어간 대학이 뭐랄까 당시에는 학생운동에서 메이저라고 불리는 대학 중에 하나였고, 그때만 해도 지방에서 올라온 애들이 상대적으로 많아서 집단성이 강한 걸로 유명한 학교였는데, 제가 들어간 과가 그중에서도 제일 심한 데였어요. 학교에서 성적도 좀 떨어지고, 인문대가 학교에서 대접받는 데도 아니고, 저희 학교는 법대 중심이었잖아요. (법대하고는) 건물도 많이 떨어져 있어서, 그쪽 갈 일도 별로 없고, 문과대는 뭔가 학교 구석에 약간 공부 못하는 애들이 모여가지고 맨날 술 먹고 데모 하러 가고.
근데 허구한 날 노동자 민중이 어쩌고 하는데, 저는 엄청 가난하고 그러진 않았지만 고향에서 뭐랄까 서민층에 가까웠어요. 어머니는 동네 분식점 하시고 도심 슬럼가 비슷한 동네에서 컸어요. 저는 노동자 민중이 맨날 아무 것도 아닌 일로 머리채 잡고 싸우던 동네에서 자랐는데, 대학 와보니 거의 다 중산층 자식들인데 노동자 민중을 너무 이상화한다고 해야 하나 (웃음). 그래서 약간 그런 데 대한 반발심도 있고 해서 저도 학생회 간부이긴 했는데, 맨날 학생회실에서 스포츠 신문 보고 바둑 두고 그랬죠. 선배들이나 열성 운동권들이 별로 안 좋아하더라고요. (웃음)"
- 핵심(?) 운동권들도 많이들 정치나 (NPO) 단체 같은 것으로 선회했는데. 정작 ‘언저리 운동권’인 정인 님은 끝까지 운동에 남았네요.
"그 당시에는 학생회가 있으면, 정치조직이 재생산되는 구조는 비선 구조로 운영되곤 했어요. 어느 날 선배가, 제가 아웃사이더고 친구들도 그래서 그런지, 너 친구들은 (비선) 제안도 못 받는데, 너는 간당간당한 경계에 있어서 제안을 한다, 뭐 이런 식으로 얘기를 하더라고요. 나중에 눈치로 누가 (비선) 하는지 대충 알았는데, 도통 기준이 뭔지도 모르겠고. (웃음) 내가 볼 때는 이 선배들도 운동 끝까지 하겠나 싶고, 거절하면 또 여러 가지로 불이익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제안을 받아들였는데 조직이 망했어요. 국가보안법 사건이 났는데, 우리 과도 선배들이 다 도망가서 없어졌죠. 도망간 기간에도 한두 번 은밀히 만났었는데, 조직은 해체되지 않았다, 걱정마라, 어쩌고저쩌고 이런 얘기했었는데, 나중에 한 반 년 정도 지나고 나서 보니까 그 사람들이 다 관둔 거예요.
그 당시에 그런 일이 정말 많았을 거예요. 시대 자체가 80년대 이후 형성된 대중운동이 붕괴되는 시기다 보니, 조직 사건 같은 탄압이 정말 문제였다기보다는, 이미 전망이 안 보인다고 생각을 많이들 했고. 억지로 하면서 뜰 기회를 보고 있다 사건이 핑계가 되는 거죠. 저희 과 같은 경우도, 제일 위에 선배가 하나가 이 건을 계기로 도망을 가니까, 주르륵 그냥 다. 그래서 제 위로 서너 학번 정도가 다 없어졌어요.
화가 났죠. 근데 밑에는 학생회도 남아 있고 후배들이 아직 운동한다고 이렇게 있는데, 위에 선배들은 맨날 노동자 민중 얘기하더니, 다 그냥 무책임하게 도망가 버리고. 그래서 책임감으로 조직을 다시 만들고 이어주고 하는 역할을 했어요. 성격이 보수적이라서 그랬던 것도 있고. 하던 거 하는 게 편하잖아요. (웃음) 선배, 동기들이 몽땅 없어지고 한 1년 정도 더 학생운동을 하다가 공익요원으로 군대 갔는데, 개인적으로 그때 경험이 좋았던 것 같아요. 뭔가 좀 만들어 나가고 다시 재건이 되고 이런 거에 대해서 뭐랄까 성취감도 느끼고 책임감도 많이 느꼈던 것 같고. 사실 많은 사람한테 영향을 끼친 거잖아요.
학생운동을 1년 더 하고, 학교 나가서도 운동을 계속 할 생각을 했어요. 어머니한테 마지막 효도다 싶어서, 그래도 대학은 일단 졸업을 해야 되겠다고 생각을 했고. (웃음) 제가 복학했을 때 학교 후배가 나한테 형은 뭐 하려고 하냐고 해서, 현장 간다고 했어요. 돈도 벌면서 운동도 오래 하려고. 그런데 결국은 못 갔죠."

사진 : 안산 동네책방 들락날락. 책읽기모임을 준비하는 모습
- 운동 바깥이 아니라, 운동 안에서 오랫동안 차곡차곡 쌓여온 정인 님의 경험과 생각들이 때마침 페미니즘을 만나서 확장된 느낌이네요.
"페미니즘을 접하고 그전 경험들도 새롭게 또 많이 해석이 됐어요. 예전에 ‘운동사회 성폭력 뿌리뽑기 100인 위원회’라고, 운동판에서 유명한 사람들이 포함된 가해자들 십 수 명을 공개적으로 공론화 했던 건인데, 그 사건 터졌을 때도 노동운동판 사람들 반응은 대부분 말조심해야 겠네, 말도 함부로 못하겠네, 약간 다 이런 분위기였거든요. 그 활동을 하는 활동가 분들이 대공장 활동가들 모여 있는 회의 같은 데 오시면 꼭 은근히 놀리며 시비 거는 자들이 있었는데. 그냥 웃으면서 넘기는 걸 보고 그때는 속으로 그런 생각했거든요. 아니 페미니스트라면서 저런 거 대응을 해야지 왜 말을 못해.
근데 나중에 돌아보니 저는 아예 대응한 적도 없는 거예요. 주로 대공장 남성중심 노동운동을 하다 보니까 그런 거 되게 많이 봤거든요. 연대하러 온 여성 대학생 활동가들 손잡고 만지고 이런 거 되게 많았고, 기혼자인데 젊은 여성 연대자들 밤늦게까지 붙들고 얘기하면서 사귀자고 하는 놈들도 엄청 많았거든요. 근데 성폭력 그런 거 다 부차적인 거라고 눈 감은 경우가 많았고, 구조적으로 제기하기 보단 특정인에 대해 조심하라는 경고 이상의 것을 안 했던 거죠.
술자리에서 나름 힘 있는 남성 현장 활동가가 술 취해서 여성 활동가한테 '너 나랑 같이 잘래'라고 노골적인 언어성폭력을 하는데, 그냥 도망가서 자는 척 한 적도 있었고. 그때는 그런 일이 사실 좀 비일비재했던 일이고 별일 아닌 걸로 알았는데, 나중에도 이 자가 그 여성 활동가에게 더 큰 가해를 저질렀다는 걸 알게 돼서 크게 충격을 받은 적도 있었어요.
나 자신도 고착화된 그런 문화 속에서 아무 것도 못해놓고, 그런 생각을 한 게 너무 부끄러워졌던 거죠. 아까 말씀드렸듯이 초기에는 이런 문제를 도구적으로 받아들인 게 사실이었지만, 이후에 다른 조직 사건 지원이나 단체 내부의 성폭력 사건을 다루면서 많이 받아들이게 된 것 같아요."
- 조직 내에서 관리자를 오래 하셨다고 했는데, 공동체 내부의 역량을 비롯한 자원이 부족한 시민사회의 상황에서 좋은 조직문화에 대한... 리더 세대의 활동가로서 현실적인 고민도 있을 것 같은데.
"그거 많이 고민을 했어요. 저도 이제 사실 세대가 바뀐 사람들하고 같이 일을 좀 하니까. 10살 차이 나는 활동가들하고 일하다 보면, 저희 세대랑 다른 거예요. 저희는 까라면 까는 분위기가 있었는데, 그렇지 않으니까, 혼자 끙끙 앓고 그랬던 때도 있었죠. 우리 때는 아파서 쉬고, 이런 게 없었거든요. (웃음)
사실 모든 것이 망하던 90년대 초중반 이후에도 운동에 계속 남았던 사람들은 가슴 속에 분노가 좀 있어요. 그러니까 그 도망간 자들에 대한, 아마 다 있을 거예요. 그게 저는 그것도 문제라고 생각하는데. 사람들 보면 한, 정념, 악다구니 같은 건 있지만, 자기가 배운 가닥에 대한 반성은 별로 없었던 거예요. 그러니까 80년대, 90년대 배웠던 것들에 대한 제대로 된 정리가 안 된 거예요. 도망간 사람들은 '나는 이런 거 더 이상 안 믿어'하고 그냥 우르르 다 도망간 거 버린 거고, 남았던 사람들은 또 운동을 계속해야 하는 사람이니까 과거의 것들이 반성이나 성찰하기 어려웠던 거고. 그게 운동 지형을 좀 만들어 놓은 게 아닌가 싶어요.
제가 활동가들을 보면 가장 안 변하고 있는 것이 상시적인 전시문화예요. 항상 뭔가를 해야 된다고 생각을 해. 그러니까 운동에 전시만 있지, 평시가 없는 거예요. 근데 실제로 그렇게까지 급한 일은 없거든요. 예를 들어서, 민주노총이 장애인 채용 안 해요. 아는 사람 다 알죠. 왜 그러냐, 장애인 분들이 들어와서 여유 있게 활동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거죠. 우리는 싸우는 조직이고, 되게 효율적이어야 되는 조직이니까 차라리 돈 내고 만다, 그리고 전장연 같은 당사자 단체도 굳이 여기에 대해서 별로 얘기 안 하거든요. 몸에 배인 능력주의, 그러니까 부품이 돼야 되고, 능력이 있어야 되고 더 효율적이어야 되고, 그러기 위해서는 지도부 비판 하고 지도부를 바꿀 권리는 있지만 지도부를 바꿀 때까지 무조건 따라야 된다, 이게 소위 민주집중제란 건데, 저희 세대는 한 세대 전체가 그게 진리라고 배웠거든요. 그런 것들이 다 몸으로 체화돼 있는 게 안 바뀌는 거죠. 그게 저는 운동에서 그 세대 전체에 좀 남아 있는 문제라고 생각을 해요. 그런 부분들을 근본적으로 성찰하고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사진 : 동물권행동 카라 민주주의 회복과 노조탄압 중단을 위한 집중행동
- 어렵지만 그래도 지금 여기서 시도해 볼 수 있는 게 있을까요?
"작은 걸로는 서로 갈구지 않기 이런 거? 운동 판에 있는 사람들이 서로한테 너무 가혹한 면이 많다고 생각하는데, 좀 관대해질 필요도 있어요. 너무 모든 것들 스케줄에 맞춰 가지고 하려고 그러지 말고 저는 자원도 적은데 약간 널널해질 필요가 있다고 봐요. 물론 저도 잘 못하지만요.
활동가들이 맨날 화가 나 있는 상태는 자신에게도 타인에게도 안 좋고 그렇죠. 스트레스 쌓이는 상태가 누구한테 가겠어요? 그래서 저는 활동가는 감정노동자 돼야 된다, 이 얘기 한 10여 년 전부터 많이 했는데 우리가 활동하는 게 사람을 조직하고 기본적으로 운동을 키워야 되는 거잖아요. 그러면은 사람들의 감정을 받아주고 할 필요가 있는, 정말 자기가 스트레스 받는 감정노동자가 될 필요는 없지만, 기본적으로 그런 거 일정 정도 가지고 있어야 되는데, 운동하는 사람들은 대개 우리는 투사가 돼야 된다, 이렇게 생각하는 거죠.
어쩔 수 없는 부분이 분명히 있죠. 하지만 쓸 데 없는 것도 많아요. 저는 기자회견 같은 건, 반으로 줄여도 된다는 말 많이 하는데, 기자도 안 오는데 사실 다 활동가가 준비하는 거잖아요. 아니 정말 이 집중하거나 딱 할 수 있는 거에 하고 일을 위한 일을 좀 없애고 그리고 투사로 보이기 위한 일도 좀 많이 줄이고. 맨날 사람 수는 적은데, 일은 많고 돈은 적게 주고, 그게 반복되는 거잖아요. 그러다 보니 프로젝트나 지원사업에 목을 매야 되는데. 정말 원하는 운동이면 상근자 중심으로 가지 말고 조금 조금씩 일을 나눌 수 있는 사람들 중심으로 가는 사고도 좀 필요해 보여요. 꼭 이걸 다 해야 되냐 약간 이런 고민도 좀 필요하고.
싸울 때는 싸우고, 그렇지만 이것들이 자기의 생활이라든가 일상생활에 침투되지 않는 어떤 문화, 그리고 그런 것들을 좀 권하지 않는 문화로 운동문화가 바뀌어야 되지 않을까 생각 많이 해요. 사실 반성폭력 운동도 조직 문화에 부딪쳐 내적 성과 없이 싸움만 하다가 스러져 가는 것도 많이 봤고. 반성폭력 운동이 결국 조직 문화를 바꿔야 한다는 문제의식으로 많이 귀결되었듯이, 조직 문화 자체에 대한 환기가 필요한 시점인 것 같아요. 저도 최근 한 5~6년 동안 조직 내부의 갈등과 문제가 불거지는 걸 많이 듣기도 했고, 이런 고민들이 좀 정리되고 문서화되고, 알려질 때가 된 것 같아요."
- 활동가 아니시라면서 운동 엄청 열심히 하셨고 하시네요(웃음). 마지막 질문이에요. 사실 운동이 점점 더 힘들어지고 문제가 반복되고 변화하지 않는 이런 상황 속에서도 활동을 지속해오셨는데, 혹 활동을 지속할 수 있게 했던 원동력 같은 게 있었나요? 그래도 이 운동판에서 희망을 보셨는지(웃음).
"운동이 중독이라서 그래요. (웃음). 이게 사실 또 자부심 이런 게 있거든 활동가들 나름 다 운동 부심이 있어요. 저는 이것도 과도한 뽕은 위험하다고 생각하는데, 이 운동 뽕 진짜 못 고칩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아무리 운동판이 욕 많이 먹어도 일반 사회보다는 발톱만큼이라도 나아요. 여기도 나쁜 놈도 많고 꼰대도 많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사악함의 한계는 있거든요. (웃음) 좋은 문화들이 빨리 퍼지는 것도 있고요. "
인터뷰어 : 지연주(블루)
IT활동가, 퍼실리테이터, 그 밖에도 이것저것 뭔가 하는 사람. 지역단체에서 거의 유일한 젊은 활동가로 오래 활동했다 보니 홈페이지 만드는 것부터 코로나 시기 온라인 행사며 전산화 작업 등을 도맡아 했고 안으로는 단체 내 장연차 활동가들을 설득하고 밖으로는 IT인들과 소통하려 애쓰다 보니 IT활동가 겸 퍼실리테이터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돌봄이나 (지역)공동체에도 관심이 많아요. 최근에는 평등하고 안전한 활동공간을 위한 네트워크 <우리가잇다>에 함께하고 있습니다.
활동가 인터뷰 프로젝트 〈변화를 만드는 사람들〉 은 공익활동가의 지역·영역·세대를 잇는 사회적 지지와 연대의 플랫폼, 2026 공익활동가주간과 함께합니다. 공익활동, 캠페인의 성과보다 그 일을 한 활동가 개인의 이야기에 시선을 맞추는 이 프로젝트는 다양한 지역과 분야에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변화를 위해 노력하는 활동가들을 직접 만나 이들의 일과 삶을 기록합니다.
이 프로젝트는 아름다운재단의 지원으로 지리산이음이 기획·운영하고 있습니다.
노동운동 아저씨가 페미니스트가 되고 조직 문화와 공동체를 말하기까지
평등하고 안전한 활동공간을 위한 네트워크 <우리가잇다> 활동가 정인
그때는 내가 단체를 그만두(ㅁ 당하)고는 리더십이니 조직 문화니 하는 것들의 교육이며, 워크샵, 코칭, 모임들을 닥치는 대로 찾아다녔던 때였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내가 조직 내에서 겪었던 일들이 너무 기가 막혀서, 잘못된 건 내가 아니라 그 사람들이라는 걸 확인하고 싶어서 그랬던 것 같다.
<평등하고 안전한 활동공간 만들기> 자조모임(현 평등하고 안전한 활동공간을 위한 네트워크 <우리가잇다>)에 참여한 것도 그 일환이었다.
모임 당일, 홍대 근처의 꽤 큰 스터디룸은 참여자들로 꽉 차 있었다. 모임을 주최한 활동가도 이렇게 많은 사람 들이 올 줄은 몰랐다고 했다. 예상했던 대로 참여자 대부분은 청년이거나 여성이었다. 각자 활동의 영역은 달랐지만 비슷한 경험들을 했다. 딱 한 사람을 빼고.
검정 일색의 옷차림. 무거워 보이는 가방. 정인 님은 보통의 중년 남성 활동가처럼 보였다. 그는 소위 말하는 운동권이었고, 노동운동을 했고, 관리자였다고 했다. 나는 속으로 저 사람은 여기 왜 왔을까 생각했다.
<우리가잇다>는 몇 차례 모임을 더 가졌다. 모임이 으레 그렇듯이 <우리가잇다>에도 새로 합류하는 멤버도 빠지는 멤버도 생겼다. 드문드문 참석하는 멤버들도 있었다. 정작 그는 멀리서 오면서도 모임에 거의 빠진 적이 없었다. 그는 평소에는 본인은 활동가가 아니라며 손사래를 쳤고 말을 아끼는 편이었지만, 모임이나 다른 멤버들이 어려움을 겪을 때면 적극 나섰다. 나는 약간 부끄러워졌다.
모임을 지속하며 그에 대해서 조금 더 알게 됐다. 그는 운동권이었고, 노동운동을 했고, 관리자였다. 하지만 동시에 돌봄을 경험했고, 성폭력 피해자지원 활동을 했고, 페미니즘과 조직 문화와 공동체의 책임을 말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의 별로 어울리는 것 같지 않은 내력들이 궁금해졌다.
사진 : <우리가잇다> 활동가 정인. 뒤쪽으로 책방 들락날락에서 발행하는 시사비평지 프라우다 및 그의 책 철학의 기원 등이 보인다.
- 안녕하세요, 정인 님. 먼저 저를 믿고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 <우리가잇다>에서 만났죠. 정인 님과 <우리가잇다>를 소개한다면.
"이게 첫 질문부터 너무 어려운데(웃음) 저는 학생운동을 하다가, 90년대 말부터 노동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을 했어요. 노동운동은 한라하청노조 이후로 주로 대공장 사내하청운동에 관심을 갖고 노조 건설 사업을 지원했었고, 2000년대 중반부터는 성폭력 사건 지원활동도 해왔던 거 같아요.
몇 년 전에 오래 했던 단체를 해산하고, 지역에 아는 활동가들이랑 북카페 만드는 사업에 발을 걸쳤다가 코를 꿰서 요즘은 그 연장으로 책읽기모임이랑 소식지 내는 일을 하고 있긴 한데, 사실 활동가로서는 퇴직했다고 생각합니다. 활동가가 나이 들면 나대지 말고 시간 나면 이런저런 집회 가서 조용히 머릿수나 하나 보태주는 게 제일 좋은 거 같아요. (웃음)
사실 저는 <우리가잇다>에 가기가 뭣했어요. 저는 운동의 피해자라고 보기는 좀 그런 게 사실 일찍 관리자가 돼서 관리자 역할을 오래 했었거든요. 물론 크게 봐서 운동문화의 피해는 저도 입었고, 그런 차원에서는 피해자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웃음). <우리가잇다> 만들 때, 같이 하시는 분들 중에 성폭력 사건 지원활동 같이 하셨던 분들이 불러서 왔다가 여기까지 오게 됐네요.
실제로 최근 몇 년 사이에, 운동 진영에서 조직문화에 대한 문제제기가 계속 늘어나고 있거든요. 사실 반성폭력 운동이 조직 문화를 바꾸는데 엄청난 역할을 했다고 생각하지만, 또 모든 게 다 성폭력 피해로 환원되지 않는 것도 있잖아요. 보통 조직 내에서 문제를 제기하면 조직 문화가 위계적인 곳에서 문제 제기를 받아들이지 않거나 축소하면서 같이 문제가 되는 경우가 굉장히 많았어요. 저도 그런 사건들을 몇 개를 지원했었고요.
반성폭력 운동이 결국 조직문화의 문제로 이어지는 경우가 굉장히 많은데, <우리가잇다>가 제기하는, 잘못된 운동 문화에 문제를 제기하고 바꾸자는 의의에 공감해서 계속 함께하게 된 것 같아요."
- <우리가잇다>는 아직 자조모임 형태지만, 말씀해주셨던 것처럼 운동 진영 내의 조직문화 변화와 관련된 것들을 많이 모색을 하고 있는 중이긴 합니다. 정인 님은 <우리가잇다>의 최연장자 멤버인데요. 아무래도 <우리가잇다>에는 위계폭력에 취약한 청년, 여성 활동가들의 참여가 많았는데, 정인 님도 원래부터 조직문화에 관심이 많았나요?
"예전에는 불합리하다 생각만 했지 바꿀 생각이나 이런 건 별로 안 했던 거 같아요.
옛날에 단체에서 재정사업 한다고 뭘 한 적이 있는데, 그때 같이 일하던 동료가 같이 밥 먹으면서 ‘거기 한번 가봐, 일하는 분들을 좀 막 대하더라, 그래서는 안 되는 거 아니야’라는 거예요. 그 동지는 운동하는 사람이 그럼 안 되지 않냐는 뜻으로 말했는데, 저는 사실 그게 크게 문제 있다고 생각 안 했거든요. 조직에서 재정사업 하는 사람이 돈만 잘 벌면 되지 않나, 그렇게 생각했던 거 같아요. 당시 대부분 운동권들처럼 능력주의, 효율주의자였던 거죠.
그래도 불합리한 것에 대한 생각은 계속 있었어요. 운동권 치고 좀 독특하게 개인주의적이라는 말도 많이 들었던 거 같네요. 쓸데없는 운동권 문화도 별로 안 좋아했고요. 그런 건 많이 없애려고 했던 것 같아요. 학생운동 할 때 선거운동을 총괄한 적이 있는데, 선거 운동원 대상화하는 짓이라고 마임 같은 거 없애고. 차라리 그럴 시간에 정책교육을 한 시간이라도 더 하자고 했었죠. 후보들이 양복 입는 것도 없애려고 했는데, 그건 후보들이 싫다고 하더라고요. (웃음) 후보 구분이 안 된다나?"
사진 : 평등하고 안전한 활동공간을 위한 네트워크 <우리가잇다> 미션 비전 워크샵
- 그럼 혹시 생각이 바뀌신 계기나 사건이 있나요?
"제가 언더에 있다가 2000년대 초에 단체를 만들어서 나왔어요. 사회주의 언론을 표방한 공개 단체였는데, 단체를 만들어 놓으니까 2000년대 중반 즈음 학생운동에서 사회운동하려고 넘어가는 젊은 후배 활동가들이 들어오기 시작을 하는데 그분들이 대부분 페미니스트였어요. 근데 그 위 세대들은 전혀 아니었거든요.
그 위 세대들은 사실 페미니즘이 적이었어요. 페미니즘은 90년대 초중반에 운동권이 붕괴되던 시점에 그 붕괴를 가속화시킨 것 중에 하나였다고 생각을 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예컨대 우리는 마르크스주의 세미나 하고 있는데 운동 관둔 여자애들이 갑자기 페미니즘 이런 거 해가지고 무슨 모임 만들고 학생회 멤버들 빼앗아가고, 저하고 비슷한 나잇대 같이 일하던 분들은 그런 비슷한 생각이 있는 거예요. 부르주아 사상이 애들을 빼앗아가고 어쩌고저쩌고. 그러니까 이게 세대가 확 갈라지는 거예요. 그게 조직의 단결을 저해하는 거잖아요.
제가 있던 조직도 전 같으면 이게 씨알도 안 먹혔을 것 같은데(웃음) 2007년쯤에는 제가 단체에서 제일 발언력 있는 사람이 되었고, 과거 조직 문화에서 제가 느꼈던 불합리한 측면들을 쇄신해야겠다, 이런 생각을 했었죠. 그 당시 젊은 후배 활동가들이 단체 안에서 계속 페미니즘 세미나 하자고 해서, 같이 페미니즘 세미나도 하고 했어요."
- 세미나 좀 한다고 자동으로 위계를 이해하고 페미니스트가 되는 건 아니잖아요(웃음).
"사실은 처음에는 진정성이 있기보단 정치 테크닉에 가까웠죠. 새로 들어오는 사람들은 다 본인을 페미니스트라고 하는데, 대화를 해서 '통일'을 하든지, '교정'하든지 해야 한다, 이런 생각으로 했던 거죠. 근데 얘기를 들어봤더니 다 맞는 말인 것 같아 보이고, 별로 해 될 건 없는 거 같은 거예요. (웃음) 대충 그래, 맞네 (웃음). 근데 그때까지는 조직이 분열되니까 정치 공학적으로 생각했던 면이 컸던 거고, 후배 활동가들의 요구를 어느 정도는 받아주자, 뭐 이런 생각이었던 거 같아요.
결정적인 건 아까 얘기했던 2007년인가, 8년인가 통합 비슷하게 하려고 했던 다른 조직이 성폭력 사건이 나서, 그 해결 과정에 초청을 받아가지고 봤는데, 너무 우리랑 똑같은 거예요. 해결 과정에 참여해서 이 조직이 돌아가는 여러 가지 문서들을 보니까 조직 운영 원리가 똑같은 거예요. 평활동가끼리는 대화를 못하게 하는 거라든가, 그게 우리랑 너무 비슷하더라고요. 예를 들어서, 저희도 조직의 공식적인 계통이나 총회 같은 공식 회의를 통해서만 정치적 문제를 논의해야 한다, 이런 규정이 있었거든요. 이게 사실상 평조직원들끼리 얘기하는 걸 막는 건데, 이걸 저희는 횡적유통 금지라고 불렀는데, 이름만 다르고 똑같은 게 있더라고요.
저는 그전까지는 이런 조직 운영 원리는 개인이 왜곡을 시켜서 문제였지, 우리가 그때 '민주집중제'리고 믿었던 운영 원리 자체는 잘 구현하면 된다고. 그러니까 우리 조직 대표였던 사람이 문제가 많았고, 이 사람이 너무 이런 걸 자기중심적으로 왜곡시켰을 뿐이지 이걸 잘 구현하면 되는 거고, 내가 할 수 있다, 이렇게 생각을 하고 했었던 거 같아요."
사진 : A학교 성폭력 사안 공익제보교사 부당전보 철회를 위한 거리행진
- 어쨌든 조직문화를 쇄신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으셨다고요. 아까 정인 님도 운동 문화의 피해자라고 하셨는데, 운동을 하면서 구체적으로 그런 걸 느꼈던 때가 언제였나요?
"예를 들어, 저도 옆지기랑 결혼하기 직전에 애가 한 번 생긴 적이 있는데 그때는 어차피 못 낳을 처지라 임신중지를 하긴 했어요. 근데 그러고 나니까 조직 대표가 저보고 정관 수술하라 그러는 거예요. 이 조직이 사람이 적으니까 한 명이라도 관두거나 활동력이 떨어지면 안 된다고 생각을 하는 거죠. 저희 조직 뿐 아니라, 이런 조그만 조직들에 그런 곳이 되게 많았어요. 듣기로 1명 이상 낳으면 징계한다고 명문화 된 곳도 있고, 명문화 된 건 아니지만 혁명적 결의를 통해 애를 낳지 않기로 했다는 얘기도 들어봤고.
근데 옆지기는 애를 낳고 싶다는 얘기를 계속 했었거든요. 그래서 대표한테 옆지기가 동의를 안 할 것 같다고 그랬더니 몰래 하래요. 자기도 했다고. 수술비 10만 원 준다고. 그때 정부에서도 정관수술을 권장하던 때라 비용이 얼마 안 했거든요. 그러면서 포장하기로는 우리 조직은 여성 동지들을 위해서 남성 동지들이 정관 수술하면 지원을 해준다, 이런 얘기나 하고. 그래서 결국 저도 10만 원 받고 정관 수술을 했어요.
근데 나중에 옆지기가 진짜 아이 낳으려고 계획을 잡았는데, 애가 안 생기니까 왜 안 생기지 그래서, 너무 양심에 찔려가지고 이실직고를 했어요. 그날 벽에 걸린 결혼사진 박살나고. 그때는 그 대표가 그만두고 없을 때라, 옆지기가 바로 복구하고 오라고 그래서 훨씬 더 많은 돈을 들여 복구했어요. 지금은 애가 둘이죠. (웃음)
아무튼 이런 개인의 연애, 결혼, 출산 같은 사적인 영역의 문제들을 통제하려는 시도가 당시만 해도 너무 많았고, 활동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죠. 자기 뜻에 안 맞으면 징계하고. 제가 단체에서 최고참이 되고 나서, 이런 걸 바꿔 보려고 과거 조직의 과도한 조치에 피해 입은 분들한테 사과도 하고, 페미니즘 세미나도 하고 했던 건데, 사실 내적으로 완전히 바뀐 건 아니었죠.
근데 문제가 된 조직에 있었던 젊은 분들이랑 얘기를 해보니까… 그때가 2008년이고 밖에서 촛불집회 한다고 난리가 났고, 사회는 번개처럼 변하고 있는데, 조직 내부는 무슨 19세기처럼 살고 있는, 그러니까 21세기 한복판에 후배 활동가들을 무슨 19세기 혁명가나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처럼 키우려고 하고 있었던 거예요. 우리가 가던 방향이 애초부터 잘못된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던 거죠."
- 이전에 자기를 소개하실 때 ‘언저리 운동권’ 이라고 표현하셨던 기억이 나는데요. 그래도 운동을 계속 하셨었나봐요?
"제가 대학에 아무것도 모르고 들어갔는데, 80년대에 경상도에서 중고등학교 다녔는데 뭘 알겠어요. (웃음) 들어간 대학이 뭐랄까 당시에는 학생운동에서 메이저라고 불리는 대학 중에 하나였고, 그때만 해도 지방에서 올라온 애들이 상대적으로 많아서 집단성이 강한 걸로 유명한 학교였는데, 제가 들어간 과가 그중에서도 제일 심한 데였어요. 학교에서 성적도 좀 떨어지고, 인문대가 학교에서 대접받는 데도 아니고, 저희 학교는 법대 중심이었잖아요. (법대하고는) 건물도 많이 떨어져 있어서, 그쪽 갈 일도 별로 없고, 문과대는 뭔가 학교 구석에 약간 공부 못하는 애들이 모여가지고 맨날 술 먹고 데모 하러 가고.
근데 허구한 날 노동자 민중이 어쩌고 하는데, 저는 엄청 가난하고 그러진 않았지만 고향에서 뭐랄까 서민층에 가까웠어요. 어머니는 동네 분식점 하시고 도심 슬럼가 비슷한 동네에서 컸어요. 저는 노동자 민중이 맨날 아무 것도 아닌 일로 머리채 잡고 싸우던 동네에서 자랐는데, 대학 와보니 거의 다 중산층 자식들인데 노동자 민중을 너무 이상화한다고 해야 하나 (웃음). 그래서 약간 그런 데 대한 반발심도 있고 해서 저도 학생회 간부이긴 했는데, 맨날 학생회실에서 스포츠 신문 보고 바둑 두고 그랬죠. 선배들이나 열성 운동권들이 별로 안 좋아하더라고요. (웃음)"
- 핵심(?) 운동권들도 많이들 정치나 (NPO) 단체 같은 것으로 선회했는데. 정작 ‘언저리 운동권’인 정인 님은 끝까지 운동에 남았네요.
"그 당시에는 학생회가 있으면, 정치조직이 재생산되는 구조는 비선 구조로 운영되곤 했어요. 어느 날 선배가, 제가 아웃사이더고 친구들도 그래서 그런지, 너 친구들은 (비선) 제안도 못 받는데, 너는 간당간당한 경계에 있어서 제안을 한다, 뭐 이런 식으로 얘기를 하더라고요. 나중에 눈치로 누가 (비선) 하는지 대충 알았는데, 도통 기준이 뭔지도 모르겠고. (웃음) 내가 볼 때는 이 선배들도 운동 끝까지 하겠나 싶고, 거절하면 또 여러 가지로 불이익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제안을 받아들였는데 조직이 망했어요. 국가보안법 사건이 났는데, 우리 과도 선배들이 다 도망가서 없어졌죠. 도망간 기간에도 한두 번 은밀히 만났었는데, 조직은 해체되지 않았다, 걱정마라, 어쩌고저쩌고 이런 얘기했었는데, 나중에 한 반 년 정도 지나고 나서 보니까 그 사람들이 다 관둔 거예요.
그 당시에 그런 일이 정말 많았을 거예요. 시대 자체가 80년대 이후 형성된 대중운동이 붕괴되는 시기다 보니, 조직 사건 같은 탄압이 정말 문제였다기보다는, 이미 전망이 안 보인다고 생각을 많이들 했고. 억지로 하면서 뜰 기회를 보고 있다 사건이 핑계가 되는 거죠. 저희 과 같은 경우도, 제일 위에 선배가 하나가 이 건을 계기로 도망을 가니까, 주르륵 그냥 다. 그래서 제 위로 서너 학번 정도가 다 없어졌어요.
화가 났죠. 근데 밑에는 학생회도 남아 있고 후배들이 아직 운동한다고 이렇게 있는데, 위에 선배들은 맨날 노동자 민중 얘기하더니, 다 그냥 무책임하게 도망가 버리고. 그래서 책임감으로 조직을 다시 만들고 이어주고 하는 역할을 했어요. 성격이 보수적이라서 그랬던 것도 있고. 하던 거 하는 게 편하잖아요. (웃음) 선배, 동기들이 몽땅 없어지고 한 1년 정도 더 학생운동을 하다가 공익요원으로 군대 갔는데, 개인적으로 그때 경험이 좋았던 것 같아요. 뭔가 좀 만들어 나가고 다시 재건이 되고 이런 거에 대해서 뭐랄까 성취감도 느끼고 책임감도 많이 느꼈던 것 같고. 사실 많은 사람한테 영향을 끼친 거잖아요.
학생운동을 1년 더 하고, 학교 나가서도 운동을 계속 할 생각을 했어요. 어머니한테 마지막 효도다 싶어서, 그래도 대학은 일단 졸업을 해야 되겠다고 생각을 했고. (웃음) 제가 복학했을 때 학교 후배가 나한테 형은 뭐 하려고 하냐고 해서, 현장 간다고 했어요. 돈도 벌면서 운동도 오래 하려고. 그런데 결국은 못 갔죠."
사진 : 안산 동네책방 들락날락. 책읽기모임을 준비하는 모습
- 운동 바깥이 아니라, 운동 안에서 오랫동안 차곡차곡 쌓여온 정인 님의 경험과 생각들이 때마침 페미니즘을 만나서 확장된 느낌이네요.
"페미니즘을 접하고 그전 경험들도 새롭게 또 많이 해석이 됐어요. 예전에 ‘운동사회 성폭력 뿌리뽑기 100인 위원회’라고, 운동판에서 유명한 사람들이 포함된 가해자들 십 수 명을 공개적으로 공론화 했던 건인데, 그 사건 터졌을 때도 노동운동판 사람들 반응은 대부분 말조심해야 겠네, 말도 함부로 못하겠네, 약간 다 이런 분위기였거든요. 그 활동을 하는 활동가 분들이 대공장 활동가들 모여 있는 회의 같은 데 오시면 꼭 은근히 놀리며 시비 거는 자들이 있었는데. 그냥 웃으면서 넘기는 걸 보고 그때는 속으로 그런 생각했거든요. 아니 페미니스트라면서 저런 거 대응을 해야지 왜 말을 못해.
근데 나중에 돌아보니 저는 아예 대응한 적도 없는 거예요. 주로 대공장 남성중심 노동운동을 하다 보니까 그런 거 되게 많이 봤거든요. 연대하러 온 여성 대학생 활동가들 손잡고 만지고 이런 거 되게 많았고, 기혼자인데 젊은 여성 연대자들 밤늦게까지 붙들고 얘기하면서 사귀자고 하는 놈들도 엄청 많았거든요. 근데 성폭력 그런 거 다 부차적인 거라고 눈 감은 경우가 많았고, 구조적으로 제기하기 보단 특정인에 대해 조심하라는 경고 이상의 것을 안 했던 거죠.
술자리에서 나름 힘 있는 남성 현장 활동가가 술 취해서 여성 활동가한테 '너 나랑 같이 잘래'라고 노골적인 언어성폭력을 하는데, 그냥 도망가서 자는 척 한 적도 있었고. 그때는 그런 일이 사실 좀 비일비재했던 일이고 별일 아닌 걸로 알았는데, 나중에도 이 자가 그 여성 활동가에게 더 큰 가해를 저질렀다는 걸 알게 돼서 크게 충격을 받은 적도 있었어요.
나 자신도 고착화된 그런 문화 속에서 아무 것도 못해놓고, 그런 생각을 한 게 너무 부끄러워졌던 거죠. 아까 말씀드렸듯이 초기에는 이런 문제를 도구적으로 받아들인 게 사실이었지만, 이후에 다른 조직 사건 지원이나 단체 내부의 성폭력 사건을 다루면서 많이 받아들이게 된 것 같아요."
- 조직 내에서 관리자를 오래 하셨다고 했는데, 공동체 내부의 역량을 비롯한 자원이 부족한 시민사회의 상황에서 좋은 조직문화에 대한... 리더 세대의 활동가로서 현실적인 고민도 있을 것 같은데.
"그거 많이 고민을 했어요. 저도 이제 사실 세대가 바뀐 사람들하고 같이 일을 좀 하니까. 10살 차이 나는 활동가들하고 일하다 보면, 저희 세대랑 다른 거예요. 저희는 까라면 까는 분위기가 있었는데, 그렇지 않으니까, 혼자 끙끙 앓고 그랬던 때도 있었죠. 우리 때는 아파서 쉬고, 이런 게 없었거든요. (웃음)
사실 모든 것이 망하던 90년대 초중반 이후에도 운동에 계속 남았던 사람들은 가슴 속에 분노가 좀 있어요. 그러니까 그 도망간 자들에 대한, 아마 다 있을 거예요. 그게 저는 그것도 문제라고 생각하는데. 사람들 보면 한, 정념, 악다구니 같은 건 있지만, 자기가 배운 가닥에 대한 반성은 별로 없었던 거예요. 그러니까 80년대, 90년대 배웠던 것들에 대한 제대로 된 정리가 안 된 거예요. 도망간 사람들은 '나는 이런 거 더 이상 안 믿어'하고 그냥 우르르 다 도망간 거 버린 거고, 남았던 사람들은 또 운동을 계속해야 하는 사람이니까 과거의 것들이 반성이나 성찰하기 어려웠던 거고. 그게 운동 지형을 좀 만들어 놓은 게 아닌가 싶어요.
제가 활동가들을 보면 가장 안 변하고 있는 것이 상시적인 전시문화예요. 항상 뭔가를 해야 된다고 생각을 해. 그러니까 운동에 전시만 있지, 평시가 없는 거예요. 근데 실제로 그렇게까지 급한 일은 없거든요. 예를 들어서, 민주노총이 장애인 채용 안 해요. 아는 사람 다 알죠. 왜 그러냐, 장애인 분들이 들어와서 여유 있게 활동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거죠. 우리는 싸우는 조직이고, 되게 효율적이어야 되는 조직이니까 차라리 돈 내고 만다, 그리고 전장연 같은 당사자 단체도 굳이 여기에 대해서 별로 얘기 안 하거든요. 몸에 배인 능력주의, 그러니까 부품이 돼야 되고, 능력이 있어야 되고 더 효율적이어야 되고, 그러기 위해서는 지도부 비판 하고 지도부를 바꿀 권리는 있지만 지도부를 바꿀 때까지 무조건 따라야 된다, 이게 소위 민주집중제란 건데, 저희 세대는 한 세대 전체가 그게 진리라고 배웠거든요. 그런 것들이 다 몸으로 체화돼 있는 게 안 바뀌는 거죠. 그게 저는 운동에서 그 세대 전체에 좀 남아 있는 문제라고 생각을 해요. 그런 부분들을 근본적으로 성찰하고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사진 : 동물권행동 카라 민주주의 회복과 노조탄압 중단을 위한 집중행동
- 어렵지만 그래도 지금 여기서 시도해 볼 수 있는 게 있을까요?
"작은 걸로는 서로 갈구지 않기 이런 거? 운동 판에 있는 사람들이 서로한테 너무 가혹한 면이 많다고 생각하는데, 좀 관대해질 필요도 있어요. 너무 모든 것들 스케줄에 맞춰 가지고 하려고 그러지 말고 저는 자원도 적은데 약간 널널해질 필요가 있다고 봐요. 물론 저도 잘 못하지만요.
활동가들이 맨날 화가 나 있는 상태는 자신에게도 타인에게도 안 좋고 그렇죠. 스트레스 쌓이는 상태가 누구한테 가겠어요? 그래서 저는 활동가는 감정노동자 돼야 된다, 이 얘기 한 10여 년 전부터 많이 했는데 우리가 활동하는 게 사람을 조직하고 기본적으로 운동을 키워야 되는 거잖아요. 그러면은 사람들의 감정을 받아주고 할 필요가 있는, 정말 자기가 스트레스 받는 감정노동자가 될 필요는 없지만, 기본적으로 그런 거 일정 정도 가지고 있어야 되는데, 운동하는 사람들은 대개 우리는 투사가 돼야 된다, 이렇게 생각하는 거죠.
어쩔 수 없는 부분이 분명히 있죠. 하지만 쓸 데 없는 것도 많아요. 저는 기자회견 같은 건, 반으로 줄여도 된다는 말 많이 하는데, 기자도 안 오는데 사실 다 활동가가 준비하는 거잖아요. 아니 정말 이 집중하거나 딱 할 수 있는 거에 하고 일을 위한 일을 좀 없애고 그리고 투사로 보이기 위한 일도 좀 많이 줄이고. 맨날 사람 수는 적은데, 일은 많고 돈은 적게 주고, 그게 반복되는 거잖아요. 그러다 보니 프로젝트나 지원사업에 목을 매야 되는데. 정말 원하는 운동이면 상근자 중심으로 가지 말고 조금 조금씩 일을 나눌 수 있는 사람들 중심으로 가는 사고도 좀 필요해 보여요. 꼭 이걸 다 해야 되냐 약간 이런 고민도 좀 필요하고.
싸울 때는 싸우고, 그렇지만 이것들이 자기의 생활이라든가 일상생활에 침투되지 않는 어떤 문화, 그리고 그런 것들을 좀 권하지 않는 문화로 운동문화가 바뀌어야 되지 않을까 생각 많이 해요. 사실 반성폭력 운동도 조직 문화에 부딪쳐 내적 성과 없이 싸움만 하다가 스러져 가는 것도 많이 봤고. 반성폭력 운동이 결국 조직 문화를 바꿔야 한다는 문제의식으로 많이 귀결되었듯이, 조직 문화 자체에 대한 환기가 필요한 시점인 것 같아요. 저도 최근 한 5~6년 동안 조직 내부의 갈등과 문제가 불거지는 걸 많이 듣기도 했고, 이런 고민들이 좀 정리되고 문서화되고, 알려질 때가 된 것 같아요."
- 활동가 아니시라면서 운동 엄청 열심히 하셨고 하시네요(웃음). 마지막 질문이에요. 사실 운동이 점점 더 힘들어지고 문제가 반복되고 변화하지 않는 이런 상황 속에서도 활동을 지속해오셨는데, 혹 활동을 지속할 수 있게 했던 원동력 같은 게 있었나요? 그래도 이 운동판에서 희망을 보셨는지(웃음).
"운동이 중독이라서 그래요. (웃음). 이게 사실 또 자부심 이런 게 있거든 활동가들 나름 다 운동 부심이 있어요. 저는 이것도 과도한 뽕은 위험하다고 생각하는데, 이 운동 뽕 진짜 못 고칩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아무리 운동판이 욕 많이 먹어도 일반 사회보다는 발톱만큼이라도 나아요. 여기도 나쁜 놈도 많고 꼰대도 많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사악함의 한계는 있거든요. (웃음) 좋은 문화들이 빨리 퍼지는 것도 있고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