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에겐 페미니즘이 퀴어랑 분리된 적이 한 번도 없어.”
퀴어 페미니스트 활동가 나기 인터뷰
나기를 알게 된 건 2015년, 내가 노래를 부르고 싶어서 ‘언니네트워크’의 합창단 ‘아는 언니들’ 단원이 되면서부터다. 나기는 알토 파트, 나는 메조 소프라노 파트라서 교류가 많지는 않았지만 나기는 왠지 존재만으로 든든한 사람이었다. 나중에 나기가 세무사이고 본업을 하면서도 많은 활동을 척척 해낸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런 일상을 오래 이어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저 사람은 어떤 동력으로 저렇게 활동할 수 있는 거지?’ 참 궁금했다.
나기는 현재 12~13년 동안 해 왔던 언니네트워크 활동에서는 잠시 물러나 있는 상태이며, 가족구성권 연구소 대표를 맡고 있다.

퀴어 페미니스트, 최초의 문제의식은 ‘가족’에서부터
- 나기는 대학 때 페미니즘 활동을 한 것으로 아는데 이후에 어떻게 퀴어 페미니즘 운동을 하게 된 거야? 많은 활동 영역 중에 왜 퀴어 페미니즘이었을까?
"나에게는 처음부터 페미니즘이 퀴어랑 한 번도 분리된 적이 없어서 이걸 선택했다 말았다 이런 게 아니야. 나의 최초의 화두는 가족이고, 가족 안에서 딸로서 받는 차별적 대우에 대해서 문제의식을 가지고 살았어. 그런데 이게 '내가 여자이기 때문에 차별을 받는다'가 아니라 여자가 도대체 무엇이기에... 여자가 아니라면 이렇게 대우 안 받아도 되나? 여자가 아닐 수 있는 방법이 뭐지? '남자가 되고 싶다'가 아니야. 여자도 남자도 아니고 싶다. 성별이 기표가 되지 않는 사회였으면 좋겠다, 성별 자체가 이 사회에서 아무 정보값을 안 가졌으면 좋겠다…. 이게 내 최초의 문제의식이었기 때문에 나한테 항상 페미니즘은 퀴어한 것이었어."
- 그럼 나기는 스스로를 시스젠더 여성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어?
(*시스젠더 : 지정성별과 성별정체성이 같은 경우)
"한 번도 없어. 십대 때 트랜지션(지정성별로 젠더화된 기존의 외모, 신체 특징, 성 역할 등을 자신의 성별정체성에 맞도록 변화시키는 과정)을 되게 심각하게 고민했었어. 그런데 사실은 트랜지션을 하고 싶었다기 보다는 성별 자체가 없었으면 했던 거지. 나는 신체적으로도 2차 성징이 그렇게 크게 나타나지 않았고. 내 몸이 과연 여성으로서 기능하는 몸인가에 대한 의문을 오래 가지고 살았지. ‘염색체 검사나 호르몬 검사를 해 보면 나는 다르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고. <IS 남자도 여자도 아닌 성>이란 만화를 보면서 인터섹스(염색체, 생식샘, 성 호르몬, 생식기 등에서 전형적인 남성 또는 여성의 신체 정의에 맞지 않는 성적 특성을 가진 상태)인 주인공의 상황에 공감을 하기도 하고. 내가 중성이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하면서 살았어... 지금은 요즘 용어로 굳이 설명을 하자면 젠더 플루이드(성별 정체성이 고정적이지 않고 유동적으로 변하는 사람)에 가깝겠지. 어떤 성별 감각이 강하게 느껴지는 시기가 있고 아닌 시기가 있고. 예전보다는 훨씬 더 여성이라는 걸 잘 받아들이고 있지만 그렇다고 시스젠더 여성이라는 정체성이 나와 잘 맞는다고 생각하지는 않아."
- 나기는 지금 세무사로 풀타임잡을 하면서 활동에도 만만치 않은 시간과 에너지와 돈을 투자하고 있잖아.
애초부터 활동을 직업으로 할 생각은 없었어?
"10대 때부터 내 최대의 목표는 가족을 벗어나는 것이었어. 가정폭력이 있거나 그래서가 아니라, 가족이라는 게 이분법적인 성별 구조 안에 나를 욱여 넣어야 되는 가장 최초의 체제였기 때문에. 당시에는 대학에 가기 위해 (비서울)지역에서 상경하거나 하지 않는 이상 20대 초반의 여성이 지역 이주가 아닌 형태로 독립하는 게 너무 어려운 시대였어. 우리 가족은 서울 근교에 살았고 ‘결혼이 아니면 여자는 절대 독립 못 한다’라는 주의였기 때문에 내가 빨리 돈을 벌지 않으면 아무도 나를 독립시켜 주지 않을 상황이었지. 그래서 보증금 벌어서 독립하는 게 지상 최대의 목표가 된 거야. 그때 주거권운동을 알았거나 했다면 또 다른 경로가 펼쳐졌겠지만. "
- 그래서 계획대로 됐어?
"한 2~3년 일하고 나서는 목표했던 보증금 금액을 모았지. 그 돈으로 구할 수 있는 집의 컨디션을 무시한다면 일단 집을 나갈 수는 있을 정도였는데, 그동안 가족이랑 이미 너무 많이 싸워서, 그리고 부모님의 나이듦으로 인해서 더 이상 내 삶의 형태를 가지고 그렇게 크게 싸우지 않아도 되는 상태가 된 거야. 2004년에 비혼을 결심하고 나서 한 7~8년을 싸운 거니까 서로가 소강상태가 된 거지. 그러다가 서른에 동성 파트너가 생기면서 독립을 한 거야."

비혼 운동에서 퀴어 페미니즘 운동으로
- 언니네트워크가 비혼 운동을 오랫동안 적극적으로 해 온 곳이니, 나기와 언니네트워크의 만남은 운명적이었다는 생각이 드네.
"2012년에 언니네트워크에서 회원 대상 세미나를 모집해서 참여하게 됐는데 너무 재밌어서 빠져들었어. 학교에서는 만날 수 없었던 비혼이자 퀴어인 동료들이 득실득실하니까 기운이 뻐렁쳐 가지고 밤낮을 안 가리고 자료 찾고…. 그러다보니까 팀 활동을 제안받아서 발을 들이게 되었어. ‘여성이 어떻게 가족을 경유하지 않고 시민으로서 살 수 있을까’가 언니네트워크의 중심 의제였지."
- 지금까지 12~13년 동안 언니네트워크 활동을 이어오면서 제일 기억에 남는 활동이나 시기가 있다면?
"2015년은 언니네트워크가 어떤 운동을 해 나갈 것인가 비전을 다시 세우는 시기였어. 레즈비언 페미니즘, 문화운동, 네트워크라는 키워드로 언니네트워크의 운동을 다시 정립해나가는데 '레즈비언 페미니즘'이라는 말이 지금 우리가 하려고 하는 운동에 맞느냐, 라는 논의를 하게 된 거지. 당시에 트랜스젠더 등 여러 정체성의 퀴어 단체들이 막 태동하던 시기였고. 언니네트워크는 그동안 남성들의 여성 혐오적인 문화에 대항하면서 여성들이 자유롭고 안전하게 말할 수 있는 배타적인 공동체 문화를 만들어왔기 때문에 굉장히 시스젠더 중심적인 공동체였거든. 그랬던 우리가 ‘퀴어 페미니즘’을 할 수 있겠냐 엄청 논의를 많이 했어. 언니네트워크의 운동을 돌아볼 때, ‘여성’이 하는 운동이 아니라 무엇이 ‘여성’을 ‘여성’이게 만드는가- 라는 고민이 우리의 시작이었기 때문에 결론은 “우리의 역량이 갖춰졌든 아니든, 앞으로 나가야 할 방향은 퀴어 페미니즘이다.” 이렇게 지향을 정리했지.
그 후에 페미니즘 리부트가 일어났고, 여성의 권리를 말할 때 그 ‘여성’이 누구인가에 대한 격렬한 논쟁이 꽃피었잖아. 2015년에 여성가족부가 대전시 성평등기본조례 중 성소수자 관련 조항을 삭제하라고 하면서 ‘성소수자를 지원하는 건 양성평등기본법의 취지에서 어긋난다’라고 해서 우리가 ‘나는 여성이 아닙니까’라고 외치면서 여성성소수자 궐기대회를 열었지. 그리고 페미니즘 리부트 후에 일부 페미니스트들이 가졌던 인식- ‘여성만이 피해자이고 소수자이고 여성들만 모였을 때는 안전하다’-을 깨고 싶었어. 그런 대응의 하나로 퀴어페미니스트 매거진 ‘펢’을 발간했던 게 나한테는 의미있는 사업인 것 같아."

동료 난새의 죽음과 ‘퀴어한 애도’
- 난새랑 같이 활동한 시간이 길었는데 2021년에 난새가 자살로 생을 마감했잖아. 그때 어땠어? 되게 충격이 컸을텐데….
"다른 활동가들이 활동을 종료하고 상근활동가도 없이 난새랑 둘만 2015년에 활동을 같이 했었어. 난새는 나에게 매우 중요한 사람이었으니까 충격이 컸지. 그때를 생각해 보면 난새 장례에서부터 49재까지 애도의 과정이 되게 집단적으로 이루어졌어. 나에겐 그게 일이기도 했고... 혼자 소화한 게 아니어서 다행이었지. 난새의 파트너가 상주가 돼서 장례를 치르고 언니네트워크 활동 같이 했던 난새의 친구들이 장례지도사나 장례식장이랑 소통하고 사람들 안내하고... 49제도 난새가 언니네트워크에서 활동했던 것의 의미, 난새가 어떤 가치를 가지고 살아온 사람이었는지를 설명하는 행사로 기획했는데 그 시간들이 다 애도의 과정이었던 거지."
(난새의 49제는 ‘난새의 마지막 페미니즘 캠프’라는 제목의 행사로 기획되었다.)
- 집단적이고 운동적인 방식의 애도였던 거네.
"집단적이면서 또 개인적인 애도이기도 했어. 어떤 한 사람이 사라졌을 때 그 사람하고 생전에 맺고 있던 관계가 다 다르니까, 같은 사람을 추모하지만 사실 추모하는 내용은 다 다른 거잖아. 어떻게 말해도 공유되지 않는 구석이 있으니까. 나에게는 난새가 언니네트워크 활동을 밀도 높게 같이 하던 동료이자 엄청난 선배였기 때문에 지금도 언니네트워크에 대한 생각을 하거나 어떤 결정을 내릴 때 ‘난새라면 어떻게 했을까?’라고 생각할 때가 많아. 그런 과정이 나한테는 지금까지도 다 애도의 과정인 것 같아."
- 끝나지 않는 애도의 과정이네.
"그렇지 않을까. 가수 김광석이나 서지원이 되게 옛날에 죽었잖아. 친구들이 50~60대인데 그 사람들이 TV에 나와서 눈물 흘리는 걸 보면서 ‘시간이 지나도 저렇게 슬플까’라고 생각했었거든? 그런데 슬프더라고. 매일 슬픈 건 아니지만‥.. 엄청 자주 생각을 해. 출근할 때도 생각하고 퇴근할 때도, 출장갈 때도 생각하고‥.. 난새 봉안당이 내가 일하는 곳 근처여서 더 그런 것 같아."

가족을 구성할 권리는 누구에게 있는가
- 가족구성권연구소 활동도 나기의 행보에서는 뭔가 필연적인 것 같아 보이는데?
"2019년에 가족구성권연구소에 들어갔어. 내가 들어갔을 때가 가족구성권 연구모임(‘다양한 가족형태에 따른 차별 해소와 가족구성권 보장을 위한 연구모임’의 약칭)에서 가족구성권연구소로 전환하던 때야. 다양한 가족은 늘 있었지만 그때는 가구 구성의 변화가 심화되면서 (과거와 달리) 1인 가구, 2인 가구가 대세고 자녀를 두지 않는 사람들도 많아지고, 결혼을 하지 않은 채로 서로를 돌보고 있거나 결혼을 했다고 하더라도 이혼을 하고, 또 재혼하지 않은 상태에서 상대의 아이를 돌보기도 하고, 노년 공동체를 꾸리기도 하고... 여러 가족 형태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점점 더, 급격하게 많아지는 시대가 된 거야. 이런 가족의 변화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 어떻게 해야 다양한 가족 구성권을 보장하는 사회가 될 수 있을 것인지, 논의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됐지."
-그동안 가족구성권을 둘러싼 운동의 내용에도 변화가 있었을 것 같은데 어때?
"처음에는 한국사회에서 법적으로 인정받지는 못하지만 실제로 서로 돌보고 부양하고 양육하는 관계들, 이런 관계를 포착하고 그들의 권리를 누락시키지 않는 차원에서 가족 구성의 권리를 이야기했었어. 성소수자 파트너십이나 비혼 동거 같은 관계들을 누락시키지 않는 제도적 개선이 운동의 주된 내용이었지.
지금은 생활동반자법이 발의되고 동성결혼 법제화 운동이 본격화되고 있는 시점이잖아. 그런데 법이 우리의 실제의 삶을 다 포괄할 수는 없는 거니까 이 법제화라는 과정을 통해서 국가가 인정하려고 하는 정상적인 시민의 내용은 무엇이고 또 누락되고 은폐되고 낙인 찍힌 관계는 무엇인가, 왜 그런 차이가 나타나는가.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시설에 있어서, 또 어떤 사람들은 빈곤해서 ‘친밀성’이라는 것을 가지기 어려운데 그런 자원의 한계와 불평등을 해소하지 않으면 다양한 가족 구성권은 보장되지 않는 거라고 봐. 가족을 구성할 수 있는 실질적인 권리의 보장에 대한 논의를 심화시켜가는 중인 것 같아."

“퀴어 페미니스트 은행 같은 걸 만들어보고 싶어”
- 이제 나기도 40대가 되었는데 관심사에 좀 변화가 있어? 앞으로는 어떤 활동을 하고 싶어?
"가족이라는 자원이 없는 사람한테 어떤 종류의 지원 체계가 가능한지 고민해 보고 싶어. 한국은 성년이 되면 가족하고 연결이 끊어져 있어도 어쨌든 노동을 해야 생활 수급이 주어지잖아. 그런데 노동을 할 수 없는 조건에 있는 사람들도 있단 말이야. 특히나 청소년기에서 청년으로 넘어가는 20대 초중반의 사람들. 청소년은 지원 체계가 있지만, 청소년이 아니게 되는 순간 모든 지원 제도에서 누락돼 버리는데, (어떤 이유에서든) 노동을 할 수 없는데 가족이라는 자원도 없는 이들에게 어떤 지원이 필요할지 알아보고 싶어. 자본을 순환시키면서 대응을 하는 퀴어 페미니스트 은행이 될지 지원단체가 될지 아직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가족 자원이 없을 때 퀴어로서, 페미니스트로서 계속 살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체계를 만들어 보고 싶어. "
인터뷰어 : 나랑
심리상담가이자 치유하는 글쓰기 안내자. 전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기자. 여성과 소수자들이 자기 자신과 좀 더 친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상담을 하고 글쓰기를 안내한다. 그 길에서 나도 함께 성장하기를 꿈꾼다. 인스타그램 @orot_writing
활동가 인터뷰 프로젝트 〈변화를 만드는 사람들〉 은 공익활동가의 지역·영역·세대를 잇는 사회적 지지와 연대의 플랫폼, 2026 공익활동가주간과 함께합니다. 공익활동, 캠페인의 성과보다 그 일을 한 활동가 개인의 이야기에 시선을 맞추는 이 프로젝트는 다양한 지역과 분야에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변화를 위해 노력하는 활동가들을 직접 만나 이들의 일과 삶을 기록합니다.
이 프로젝트는 아름다운재단의 지원으로 지리산이음이 기획·운영하고 있습니다.
“나에겐 페미니즘이 퀴어랑 분리된 적이 한 번도 없어.”
퀴어 페미니스트 활동가 나기 인터뷰
나기를 알게 된 건 2015년, 내가 노래를 부르고 싶어서 ‘언니네트워크’의 합창단 ‘아는 언니들’ 단원이 되면서부터다. 나기는 알토 파트, 나는 메조 소프라노 파트라서 교류가 많지는 않았지만 나기는 왠지 존재만으로 든든한 사람이었다. 나중에 나기가 세무사이고 본업을 하면서도 많은 활동을 척척 해낸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런 일상을 오래 이어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저 사람은 어떤 동력으로 저렇게 활동할 수 있는 거지?’ 참 궁금했다.
나기는 현재 12~13년 동안 해 왔던 언니네트워크 활동에서는 잠시 물러나 있는 상태이며, 가족구성권 연구소 대표를 맡고 있다.
퀴어 페미니스트, 최초의 문제의식은 ‘가족’에서부터
- 나기는 대학 때 페미니즘 활동을 한 것으로 아는데 이후에 어떻게 퀴어 페미니즘 운동을 하게 된 거야? 많은 활동 영역 중에 왜 퀴어 페미니즘이었을까?
"나에게는 처음부터 페미니즘이 퀴어랑 한 번도 분리된 적이 없어서 이걸 선택했다 말았다 이런 게 아니야. 나의 최초의 화두는 가족이고, 가족 안에서 딸로서 받는 차별적 대우에 대해서 문제의식을 가지고 살았어. 그런데 이게 '내가 여자이기 때문에 차별을 받는다'가 아니라 여자가 도대체 무엇이기에... 여자가 아니라면 이렇게 대우 안 받아도 되나? 여자가 아닐 수 있는 방법이 뭐지? '남자가 되고 싶다'가 아니야. 여자도 남자도 아니고 싶다. 성별이 기표가 되지 않는 사회였으면 좋겠다, 성별 자체가 이 사회에서 아무 정보값을 안 가졌으면 좋겠다…. 이게 내 최초의 문제의식이었기 때문에 나한테 항상 페미니즘은 퀴어한 것이었어."
- 그럼 나기는 스스로를 시스젠더 여성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어?
(*시스젠더 : 지정성별과 성별정체성이 같은 경우)
"한 번도 없어. 십대 때 트랜지션(지정성별로 젠더화된 기존의 외모, 신체 특징, 성 역할 등을 자신의 성별정체성에 맞도록 변화시키는 과정)을 되게 심각하게 고민했었어. 그런데 사실은 트랜지션을 하고 싶었다기 보다는 성별 자체가 없었으면 했던 거지. 나는 신체적으로도 2차 성징이 그렇게 크게 나타나지 않았고. 내 몸이 과연 여성으로서 기능하는 몸인가에 대한 의문을 오래 가지고 살았지. ‘염색체 검사나 호르몬 검사를 해 보면 나는 다르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고. <IS 남자도 여자도 아닌 성>이란 만화를 보면서 인터섹스(염색체, 생식샘, 성 호르몬, 생식기 등에서 전형적인 남성 또는 여성의 신체 정의에 맞지 않는 성적 특성을 가진 상태)인 주인공의 상황에 공감을 하기도 하고. 내가 중성이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하면서 살았어... 지금은 요즘 용어로 굳이 설명을 하자면 젠더 플루이드(성별 정체성이 고정적이지 않고 유동적으로 변하는 사람)에 가깝겠지. 어떤 성별 감각이 강하게 느껴지는 시기가 있고 아닌 시기가 있고. 예전보다는 훨씬 더 여성이라는 걸 잘 받아들이고 있지만 그렇다고 시스젠더 여성이라는 정체성이 나와 잘 맞는다고 생각하지는 않아."
- 나기는 지금 세무사로 풀타임잡을 하면서 활동에도 만만치 않은 시간과 에너지와 돈을 투자하고 있잖아.
애초부터 활동을 직업으로 할 생각은 없었어?
"10대 때부터 내 최대의 목표는 가족을 벗어나는 것이었어. 가정폭력이 있거나 그래서가 아니라, 가족이라는 게 이분법적인 성별 구조 안에 나를 욱여 넣어야 되는 가장 최초의 체제였기 때문에. 당시에는 대학에 가기 위해 (비서울)지역에서 상경하거나 하지 않는 이상 20대 초반의 여성이 지역 이주가 아닌 형태로 독립하는 게 너무 어려운 시대였어. 우리 가족은 서울 근교에 살았고 ‘결혼이 아니면 여자는 절대 독립 못 한다’라는 주의였기 때문에 내가 빨리 돈을 벌지 않으면 아무도 나를 독립시켜 주지 않을 상황이었지. 그래서 보증금 벌어서 독립하는 게 지상 최대의 목표가 된 거야. 그때 주거권운동을 알았거나 했다면 또 다른 경로가 펼쳐졌겠지만. "
- 그래서 계획대로 됐어?
"한 2~3년 일하고 나서는 목표했던 보증금 금액을 모았지. 그 돈으로 구할 수 있는 집의 컨디션을 무시한다면 일단 집을 나갈 수는 있을 정도였는데, 그동안 가족이랑 이미 너무 많이 싸워서, 그리고 부모님의 나이듦으로 인해서 더 이상 내 삶의 형태를 가지고 그렇게 크게 싸우지 않아도 되는 상태가 된 거야. 2004년에 비혼을 결심하고 나서 한 7~8년을 싸운 거니까 서로가 소강상태가 된 거지. 그러다가 서른에 동성 파트너가 생기면서 독립을 한 거야."
비혼 운동에서 퀴어 페미니즘 운동으로
- 언니네트워크가 비혼 운동을 오랫동안 적극적으로 해 온 곳이니, 나기와 언니네트워크의 만남은 운명적이었다는 생각이 드네.
"2012년에 언니네트워크에서 회원 대상 세미나를 모집해서 참여하게 됐는데 너무 재밌어서 빠져들었어. 학교에서는 만날 수 없었던 비혼이자 퀴어인 동료들이 득실득실하니까 기운이 뻐렁쳐 가지고 밤낮을 안 가리고 자료 찾고…. 그러다보니까 팀 활동을 제안받아서 발을 들이게 되었어. ‘여성이 어떻게 가족을 경유하지 않고 시민으로서 살 수 있을까’가 언니네트워크의 중심 의제였지."
- 지금까지 12~13년 동안 언니네트워크 활동을 이어오면서 제일 기억에 남는 활동이나 시기가 있다면?
"2015년은 언니네트워크가 어떤 운동을 해 나갈 것인가 비전을 다시 세우는 시기였어. 레즈비언 페미니즘, 문화운동, 네트워크라는 키워드로 언니네트워크의 운동을 다시 정립해나가는데 '레즈비언 페미니즘'이라는 말이 지금 우리가 하려고 하는 운동에 맞느냐, 라는 논의를 하게 된 거지. 당시에 트랜스젠더 등 여러 정체성의 퀴어 단체들이 막 태동하던 시기였고. 언니네트워크는 그동안 남성들의 여성 혐오적인 문화에 대항하면서 여성들이 자유롭고 안전하게 말할 수 있는 배타적인 공동체 문화를 만들어왔기 때문에 굉장히 시스젠더 중심적인 공동체였거든. 그랬던 우리가 ‘퀴어 페미니즘’을 할 수 있겠냐 엄청 논의를 많이 했어. 언니네트워크의 운동을 돌아볼 때, ‘여성’이 하는 운동이 아니라 무엇이 ‘여성’을 ‘여성’이게 만드는가- 라는 고민이 우리의 시작이었기 때문에 결론은 “우리의 역량이 갖춰졌든 아니든, 앞으로 나가야 할 방향은 퀴어 페미니즘이다.” 이렇게 지향을 정리했지.
그 후에 페미니즘 리부트가 일어났고, 여성의 권리를 말할 때 그 ‘여성’이 누구인가에 대한 격렬한 논쟁이 꽃피었잖아. 2015년에 여성가족부가 대전시 성평등기본조례 중 성소수자 관련 조항을 삭제하라고 하면서 ‘성소수자를 지원하는 건 양성평등기본법의 취지에서 어긋난다’라고 해서 우리가 ‘나는 여성이 아닙니까’라고 외치면서 여성성소수자 궐기대회를 열었지. 그리고 페미니즘 리부트 후에 일부 페미니스트들이 가졌던 인식- ‘여성만이 피해자이고 소수자이고 여성들만 모였을 때는 안전하다’-을 깨고 싶었어. 그런 대응의 하나로 퀴어페미니스트 매거진 ‘펢’을 발간했던 게 나한테는 의미있는 사업인 것 같아."
동료 난새의 죽음과 ‘퀴어한 애도’
- 난새랑 같이 활동한 시간이 길었는데 2021년에 난새가 자살로 생을 마감했잖아. 그때 어땠어? 되게 충격이 컸을텐데….
"다른 활동가들이 활동을 종료하고 상근활동가도 없이 난새랑 둘만 2015년에 활동을 같이 했었어. 난새는 나에게 매우 중요한 사람이었으니까 충격이 컸지. 그때를 생각해 보면 난새 장례에서부터 49재까지 애도의 과정이 되게 집단적으로 이루어졌어. 나에겐 그게 일이기도 했고... 혼자 소화한 게 아니어서 다행이었지. 난새의 파트너가 상주가 돼서 장례를 치르고 언니네트워크 활동 같이 했던 난새의 친구들이 장례지도사나 장례식장이랑 소통하고 사람들 안내하고... 49제도 난새가 언니네트워크에서 활동했던 것의 의미, 난새가 어떤 가치를 가지고 살아온 사람이었는지를 설명하는 행사로 기획했는데 그 시간들이 다 애도의 과정이었던 거지."
(난새의 49제는 ‘난새의 마지막 페미니즘 캠프’라는 제목의 행사로 기획되었다.)
- 집단적이고 운동적인 방식의 애도였던 거네.
"집단적이면서 또 개인적인 애도이기도 했어. 어떤 한 사람이 사라졌을 때 그 사람하고 생전에 맺고 있던 관계가 다 다르니까, 같은 사람을 추모하지만 사실 추모하는 내용은 다 다른 거잖아. 어떻게 말해도 공유되지 않는 구석이 있으니까. 나에게는 난새가 언니네트워크 활동을 밀도 높게 같이 하던 동료이자 엄청난 선배였기 때문에 지금도 언니네트워크에 대한 생각을 하거나 어떤 결정을 내릴 때 ‘난새라면 어떻게 했을까?’라고 생각할 때가 많아. 그런 과정이 나한테는 지금까지도 다 애도의 과정인 것 같아."
- 끝나지 않는 애도의 과정이네.
"그렇지 않을까. 가수 김광석이나 서지원이 되게 옛날에 죽었잖아. 친구들이 50~60대인데 그 사람들이 TV에 나와서 눈물 흘리는 걸 보면서 ‘시간이 지나도 저렇게 슬플까’라고 생각했었거든? 그런데 슬프더라고. 매일 슬픈 건 아니지만‥.. 엄청 자주 생각을 해. 출근할 때도 생각하고 퇴근할 때도, 출장갈 때도 생각하고‥.. 난새 봉안당이 내가 일하는 곳 근처여서 더 그런 것 같아."
가족을 구성할 권리는 누구에게 있는가
- 가족구성권연구소 활동도 나기의 행보에서는 뭔가 필연적인 것 같아 보이는데?
"2019년에 가족구성권연구소에 들어갔어. 내가 들어갔을 때가 가족구성권 연구모임(‘다양한 가족형태에 따른 차별 해소와 가족구성권 보장을 위한 연구모임’의 약칭)에서 가족구성권연구소로 전환하던 때야. 다양한 가족은 늘 있었지만 그때는 가구 구성의 변화가 심화되면서 (과거와 달리) 1인 가구, 2인 가구가 대세고 자녀를 두지 않는 사람들도 많아지고, 결혼을 하지 않은 채로 서로를 돌보고 있거나 결혼을 했다고 하더라도 이혼을 하고, 또 재혼하지 않은 상태에서 상대의 아이를 돌보기도 하고, 노년 공동체를 꾸리기도 하고... 여러 가족 형태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점점 더, 급격하게 많아지는 시대가 된 거야. 이런 가족의 변화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 어떻게 해야 다양한 가족 구성권을 보장하는 사회가 될 수 있을 것인지, 논의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됐지."
-그동안 가족구성권을 둘러싼 운동의 내용에도 변화가 있었을 것 같은데 어때?
"처음에는 한국사회에서 법적으로 인정받지는 못하지만 실제로 서로 돌보고 부양하고 양육하는 관계들, 이런 관계를 포착하고 그들의 권리를 누락시키지 않는 차원에서 가족 구성의 권리를 이야기했었어. 성소수자 파트너십이나 비혼 동거 같은 관계들을 누락시키지 않는 제도적 개선이 운동의 주된 내용이었지.
지금은 생활동반자법이 발의되고 동성결혼 법제화 운동이 본격화되고 있는 시점이잖아. 그런데 법이 우리의 실제의 삶을 다 포괄할 수는 없는 거니까 이 법제화라는 과정을 통해서 국가가 인정하려고 하는 정상적인 시민의 내용은 무엇이고 또 누락되고 은폐되고 낙인 찍힌 관계는 무엇인가, 왜 그런 차이가 나타나는가.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시설에 있어서, 또 어떤 사람들은 빈곤해서 ‘친밀성’이라는 것을 가지기 어려운데 그런 자원의 한계와 불평등을 해소하지 않으면 다양한 가족 구성권은 보장되지 않는 거라고 봐. 가족을 구성할 수 있는 실질적인 권리의 보장에 대한 논의를 심화시켜가는 중인 것 같아."
“퀴어 페미니스트 은행 같은 걸 만들어보고 싶어”
- 이제 나기도 40대가 되었는데 관심사에 좀 변화가 있어? 앞으로는 어떤 활동을 하고 싶어?
"가족이라는 자원이 없는 사람한테 어떤 종류의 지원 체계가 가능한지 고민해 보고 싶어. 한국은 성년이 되면 가족하고 연결이 끊어져 있어도 어쨌든 노동을 해야 생활 수급이 주어지잖아. 그런데 노동을 할 수 없는 조건에 있는 사람들도 있단 말이야. 특히나 청소년기에서 청년으로 넘어가는 20대 초중반의 사람들. 청소년은 지원 체계가 있지만, 청소년이 아니게 되는 순간 모든 지원 제도에서 누락돼 버리는데, (어떤 이유에서든) 노동을 할 수 없는데 가족이라는 자원도 없는 이들에게 어떤 지원이 필요할지 알아보고 싶어. 자본을 순환시키면서 대응을 하는 퀴어 페미니스트 은행이 될지 지원단체가 될지 아직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가족 자원이 없을 때 퀴어로서, 페미니스트로서 계속 살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체계를 만들어 보고 싶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