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람이 없으면 운동도 없습니다"
'구시대의 부스러기'라 말하지만,
승리를 예비하며 사람과 사람을 잇는 대구 시민사회 활동가
장지혁 대구시민단체연대회의 운영위원장 인터뷰

어디선가 누군가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그는 늘 거기에 있다. 기자회견장에서는 사회를 보고, 집회 현장에서는 의자를 나르고, 토론회에서는 발언 순서를 조율한다. 아시바(비계)를 세우고 현수막을 들고 있다가 어느새 마이크를 잡고 있다. 대구 시민사회에서 장지혁은 그런 존재다. 같이 있으면 든든하고, 그가 빠진 자리를 상상하기 어려운 사람. 누군가는 그를 두고 ‘대구 시민사회의 연결선’이라고 말한다. 또 누군가는 ‘빈틈을 메우는 활동가’라고 부른다.
때때로 그는 투머치토커(too much talker) 이기도 하지만 집회와 기자회견, 성명서와 회의록 뒤에 가려진 한 사람의 삶은 어떤 모습인지, 한 번씩은 궁금해졌다. 대구시민단체연대회의 운영위원장이자 20여 년 가까이 지역 시민운동 현장을 지켜온 장지혁을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대구에서 데모하는 사람입니다."
짧은 한마디였지만 그 안에 그의 삶이 들어 있었다. 기자회견을 하고, 집회를 준비하고, 정책을 검토하고, 행정정보를 찾아보고, 민원을 제기하고, 토론회를 연다. 누가 시켜서 하는 일도 아니고 정해진 업무분장도 없다. 필요한 일이 생기면 하는 것이다. 현재 그는 대구시민단체연대회의 운영위원장을 맡고 있다. 하지만 스스로는 그 직함보다 ‘조율하는 사람’이라는 표현을 더 편하게 여긴다. 지역 시민사회 안의 다양한 단체들이 함께 움직일 수 있도록 연결하고, 서로 다른 의견을 조정하고, 때로는 브레이크를 걸기도 하고, 필요할 때는 등을 떠미는 역할을 한다. 공식적인 업무보다 비공식적인 만남과 전화, 조율이 훨씬 많은 자리다. 다음 주쯤 되면 좀 한가해지겠거니 해도 그런 날은 잘 안 오지 않는다.
그가 신입 활동가였던 시절 보다 지금 시민사회 활동가는 줄었고, 해야 할 일들은 여전하다. 남아 있는 사람들은 더 바빠졌다. 예전처럼 편하게 활동가들이 술 마시고 하는 빈도수는 줄어들었다. 그렇다고 젊은 활동가들이 잘 안 모인다고 하는 말들에는 반대한다. 우리도 이제 짬바가 되어 청년 활동과는 멀어진 거지 있는지 없는지 우리는 모른다고, 그렇게 단언하지 말자고 말한다.

장지혁은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했다. 그에게 철학은 세상의 정답을 알려주는 학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질문을 더 깊게 만드는 학문이었다.
“세상은 왜 이 모양인가를 묻는 게 아니라, 세상이란 무엇인가, 왜라고 묻는 사람은 누구인가 그리고 묻는다면 누구에게 묻는 것인가를 따져 묻는 것처럼 생각과 언어, 대상을 분석하는 거죠. 철학은 그런 근본적인 것들을 계속 문제를 제기하는 거라서 그런 것들이 저는 재밌어요. 여전히 어렵고요.”
그는 여전히 철학을 좋아한다. 철학책을 읽는 즐거움을 무협지에 비유했다. 고수의 비급을 읽는 것처럼 논리가 전개되고 세계가 해체되고 다시 조립되는 과정이 재미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책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현실의 세계가 있었다. 부조리한 현실을 마주하면서 그는 자연스럽게 운동 현장으로 향했다. 2002년 지방선거, 민주노동당의 약진은 그에게 큰 충격이었다. 그에게 노동자들이 정치의 주체로 등장하는 장면은 그 자체로 흥미로운 사건이었다. 그렇게 학생 운동과 사회 운동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았지만, 운동을 계속하는 것에는 고민이 깊어졌다. 군대에 갔다 오곤 대학원에 진학했지만, 엉덩이가 무거운 체질이 아니라 빨리빨리 반응하는 게 내 기질에 더 맞다는걸 보게 되었다. 일반 취업도 고민했지만, 대학생 시절 무엇을 했냐는 질문에 대추리 투쟁과 노동 현장 연대를 적을 수는 없었다. 이런 활동들을 빼고 이력서를 쓰려니 적을 것이 없었다. 그러다 대구참여연대에서의 상근활동가로, 삶은 점점 운동이 되어 갔다.
“세상을 바꾸자고 말하는 건 쉽죠. 그런데 의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면 뭘 어떻게 바꾸겠어요.”
장지혁 활동가는 스스로를 거대한 비전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구체적인 현장을 신뢰한다. 대구시의회 회의록을 읽고, 예산서를 들여다보고, 정책 자료를 비교하는 일. 그런 것이 그의 취향이다. 지역과 현장은 답답하고 느리지만 살아 움직인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과는 다른 느낌이 있다고, 거대한 담론보다 실제 사람들의 삶이 더 중요하다. 그래서 그는 서울로 가지 않았다. 누군가는 그것을 선택이라고 말하지만, 어쩌면 그것은 그의 성격이었는지도 모른다.
코로나19로 인해 회의도, 행사도 할 수 없었다. 육체적으로는 편했지만,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다는 것이 권력화되어 이걸 넘기기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너리즘에 빠져 있었던 것도 같았다. 사람들이 고생 많다고 하는데 뭐가 고생하는지 잘 와닿지 않았다. 그렇게 그는 10여 년간 몸담았던 단체 활동을 정리하고 재정비의 시간을 가진 뒤 대구시민단체연대회의 운영위원장으로서 활동을 재개했다.
사실 그는 ‘운영위원장’이라는 자리를 썩 좋아하지 않는다. 큰 비전을 던지는 ‘장(將)’들도 있지만, 그는 그런 비전을 갖고 돌파하는 스타일이라기보다 자료를 읽고, 정책을 분석하고, 현장을 찾아가고, 사람을 만나 이야기하는 일을 좋아한다. 하지만 운영위원장이 된 이후 그의 일상은 달라졌다. 회의와 조정, 갈등 관리와 판단이 대부분이다. 원래는 2~3년 정도만 맡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사회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시민사회의 대응 과제가 늘어나면서 그는 자리를 쉽게 떠날 수 없게 됐다.

아버지가 된 활동가
집회 현장에서의 장지혁은 늘 바쁘다. 하지만 집에 돌아가면 두 아이의 아버지다. 말 없는 경상도 남자라는 문화 속에서 다정한 아버지의 모습을 볼 롤모델이 없었다고, 스스로 다정한 아빠는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아이들을 진보적으로 키우겠다는 생각도 하지 않는다. 대신 사람을 존중하는 법을 가르친다. 예를 들어 딸에게 반에 이주민인 친구가 있다고 한다면, “걔는 베트남 외갓집 가니까 좋겠네.” 정도로 말이다. 대신 유튜브 이상한 것을 보고 질문했을 때는 인간으로서 그런 생각과 하면 안 되는 행동들은 분명히 주지시킨다.

구시대의 부스러기
그 스스로 생각해 볼 때, 1세대 운동이 식민지 시기와 한국전쟁 이후 인혁당이라는 사건이든지 일부 남았던 한 60대까지 왔던 운동이 하나 있었고, 두 번째 큰 흐름이 이제 80년 광주에 있었던 80년대 대학생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이어져 온 운동의 끝의 ‘구시대의 부스러기’라고 자신을 표현한다. 2세대 운동이 큰 싸움 중심으로 이어져 왔기에 12.3 계엄선언 때에도 즉각적으로 반발할 수 있었다고 본다. 2세대 운동이 끝이라고 표현하지만,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게 아니라, 지금의 모습이 그렇다는 것이다. 이게 운동의 장엄한 마무리일지, 새로운 시작의 기반이 될지 모른다. 언젠가 계엄처럼 군부가 시민을 물리적으로 언제든지 탄압하는 그런 시기가 되면 이렇게 할 수 있다고 말을 해주는 사람 정도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한단다. 요즘 그의 고민은 새로운 운동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지나온 운동을 어떻게 잘 마무리하고 기록할 것인가에 가깝다. 서울 위주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역 활동가들의 삶이 잘 기록되기를 바란다. 전선을 연결하던 사람들, 현수막을 달던 사람들, 집회가 끝난 뒤 의자를 정리하던 사람들의 이야기. 그런 기록이 남아야 한다고 말한다. ‘야마모토 요시타카(山本義隆)’라는 일본의 전공투 운동의 리더로 유명한 과학사가의 1960년대 한창 투쟁했던 시기를 회고한 본인의 자서전 같은 책(나의 1960년대, 2017, 돌배게)이 있는데, 투쟁에 대한 큰 내용만큼이나 그 기록물의 마지막 부분이 동지들에 대한 소소한 편지들이 더 좋더란다. 그처럼 선배들의 활동을 잘 남기는 것도 지금의 중견 세대 활동가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선배 활동가들도 나이가 들면 또 기억의 왜곡이 더 심해지니 아직 많이들 살아 있을 때 교차 검증하며 잘 기록해두면 이것으로 나중에 연구하는 사람들이 기록을 정리한 또 개별 기록을 모아서 공통된 기록을 또 만들어낼 수 있도록 말이다.
또 요즘 같은 선거국면에서 후보자들과 정책 제안을 하고 후보자들에게 공약 이행을 요구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운동의 목표가 그것만 남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지금의 시민사회가 조금 서글플 때가 있다고 한다. 노동자도, 장애인도, 이주민도, 소수자도, 누군가에게 부탁하는 존재가 아니라 세상의 주체가 되는 것이 우리의 운동 목표인데, 지금은 정치인들에게 약속을 받아내는 것이 운동의 목표처럼 보일 때가 있다. 그래서 핸드폰 컬러링의 곡이 “친애하는 소년에게”인 것도 밝은 곡인 듯 하지만 가사에서처럼 우리가 꿈을 잃어버린 건 아닌지 묻고 싶은 마음이었단다. 그 말은 어쩌면 지금 한국 시민사회 전체를 향한 질문처럼 들렸다. 우리는 여전히 처음 꿈꾸었던 세상을 향해 가고 있는가.

사람이 없으면 운동도 없다.
요즘 그의 고민이자 목표는 건강하게, 소소하게 사는 것이다. 그러나 활동가의 일은 늘 많다. 감당하지 못 할 일 들을 떠안다 보면 인간 장지혁으로서의 목표가 깨진다고, 감당하는 데까지만 하고자 한다. 특정 한 시기에 인생을 걸어볼 수 있지만, 존재 자체를 걸지 말자고. 이 지점에서 인간 장지혁과 활동가 장지혁으로 구분해두려고 계속 애쓰고 있다. 인터뷰하면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가 끊임없이 사람 이야기를 한다는 점이었다. 그는 이념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사람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고 말한다. 그람시의 지식인론이나 사르트르의 지식인을 위한 변명에 나오는 지식인도 사실은 여러 가지 복잡하지만, 결국 현장에 가서 노동자 계급하고 열심히 조직하라는 얘기라고 그는 해석하며, 주변에 있는 활동가들에게 잔소리도 하고 잘하면 응원도 하고 격려도 하고 이런 관계들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도 서로 돌봄이라고, 사람이 병들면 운동도 병든다고 말한다. 사람이 떠나면 조직도 무너진다. 그래서 그는 활동가들이 건강하게 오래 살아남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런 돌봄의 공동체는 가능하다고, 성과보다 돌봄. 헌신보다 지속가능성. 그것이 지금의 장지혁이 생각하는 운동의 가치다.
"우리는 결국 삶을 남기는 거죠.“
선배 활동가들에게는 ‘무병장수’를 기원한다면, 후배 활동가들에게는 자기 한계에 너무 갇히지 말라고 말한다. 젊을 때부터 각을 좁혀놓고 생각하고 행동하고 말할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우리는 평생 승리를 못 볼 수도 있다고, 5년이고 10년 활동해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고, 사회는 생각보다 느리게 변하지만, 그럼에도 포기할 수 없다고. 변화는 언제, 어느 순간, 어떻게 올지 모른다고 말한다. 그래서 승리를 예비하고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언젠가 올 승리를 위해 준비하는 사람들. 그 승리를 자신이 직접 보지 못할 수도 있지만, 누군가는 이어받을 것이라는 믿음의 표현이었다. 어쩌면 그것이 운동의 가장 오래된 윤리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계속 나아가는 삶
인터뷰의 마지막. 자신에게 한마디를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잠시 골똘히 생각하다가 말했다. "비록 성공하지 못했더라도 계속 나아가는 삶."이라고 그는 말한다. 누군가의 시각에서 말하는 사회적 성공이 아니더라도 계속 나아가고 있는 삶이라고. 그에게 세상은 여전히 신기하고 재미있다. 어르신들이 왜 바람 부는 거 멍하니 보고 있나 했는데 요즘은 그렇게 바람 부는 것을 보며 시간도 흐르고 공간도 흐르고 노을도 흘러가는 걸 보는 것도 좋고, 오래된 공장 소리를 듣는 일도 좋단다. 언젠가 모든 것은 사라질 것이지만. 하지만 그 사라짐 속에서도 사람들은 살아가고, 또 누군가는 세상을 조금씩 바꾸려 애쓴다.
활동가 장지혁은 거대한 영웅도 아니고, 세상을 뒤집는 혁명가도 아니다. 다만 누군가가 필요할 때 가장 먼저 달려가고, 사람들이 지치면 서로를 돌보자고 말하고, 승리가 오지 않더라도 승리를 준비하자고 말하는 사람. 어디선가 누군가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늘 그 자리에 있는 사람. 아마 그것이 그를 가장 잘 설명하는 문장일 것이다.
인터뷰어 : 김선주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대구경북지회 사무국장이자 대구시민공익활동지원센터 운영위원장.
나도 좋고 너도 좋은 일을 찾다 보니 이 세계에 발을 들이게 되었습니다. 느리지만 꾸준히 차근차근 같이 가요 :)
활동가 인터뷰 프로젝트 〈변화를 만드는 사람들〉 은 공익활동가의 지역·영역·세대를 잇는 사회적 지지와 연대의 플랫폼, 2026 공익활동가주간과 함께합니다. 공익활동, 캠페인의 성과보다 그 일을 한 활동가 개인의 이야기에 시선을 맞추는 이 프로젝트는 다양한 지역과 분야에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변화를 위해 노력하는 활동가들을 직접 만나 이들의 일과 삶을 기록합니다.
이 프로젝트는 아름다운재단의 지원으로 지리산이음이 기획·운영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없으면 운동도 없습니다"
'구시대의 부스러기'라 말하지만,
승리를 예비하며 사람과 사람을 잇는 대구 시민사회 활동가
장지혁 대구시민단체연대회의 운영위원장 인터뷰
어디선가 누군가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그는 늘 거기에 있다. 기자회견장에서는 사회를 보고, 집회 현장에서는 의자를 나르고, 토론회에서는 발언 순서를 조율한다. 아시바(비계)를 세우고 현수막을 들고 있다가 어느새 마이크를 잡고 있다. 대구 시민사회에서 장지혁은 그런 존재다. 같이 있으면 든든하고, 그가 빠진 자리를 상상하기 어려운 사람. 누군가는 그를 두고 ‘대구 시민사회의 연결선’이라고 말한다. 또 누군가는 ‘빈틈을 메우는 활동가’라고 부른다.
때때로 그는 투머치토커(too much talker) 이기도 하지만 집회와 기자회견, 성명서와 회의록 뒤에 가려진 한 사람의 삶은 어떤 모습인지, 한 번씩은 궁금해졌다. 대구시민단체연대회의 운영위원장이자 20여 년 가까이 지역 시민운동 현장을 지켜온 장지혁을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짧은 한마디였지만 그 안에 그의 삶이 들어 있었다. 기자회견을 하고, 집회를 준비하고, 정책을 검토하고, 행정정보를 찾아보고, 민원을 제기하고, 토론회를 연다. 누가 시켜서 하는 일도 아니고 정해진 업무분장도 없다. 필요한 일이 생기면 하는 것이다. 현재 그는 대구시민단체연대회의 운영위원장을 맡고 있다. 하지만 스스로는 그 직함보다 ‘조율하는 사람’이라는 표현을 더 편하게 여긴다. 지역 시민사회 안의 다양한 단체들이 함께 움직일 수 있도록 연결하고, 서로 다른 의견을 조정하고, 때로는 브레이크를 걸기도 하고, 필요할 때는 등을 떠미는 역할을 한다. 공식적인 업무보다 비공식적인 만남과 전화, 조율이 훨씬 많은 자리다. 다음 주쯤 되면 좀 한가해지겠거니 해도 그런 날은 잘 안 오지 않는다.
그가 신입 활동가였던 시절 보다 지금 시민사회 활동가는 줄었고, 해야 할 일들은 여전하다. 남아 있는 사람들은 더 바빠졌다. 예전처럼 편하게 활동가들이 술 마시고 하는 빈도수는 줄어들었다. 그렇다고 젊은 활동가들이 잘 안 모인다고 하는 말들에는 반대한다. 우리도 이제 짬바가 되어 청년 활동과는 멀어진 거지 있는지 없는지 우리는 모른다고, 그렇게 단언하지 말자고 말한다.
장지혁은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했다. 그에게 철학은 세상의 정답을 알려주는 학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질문을 더 깊게 만드는 학문이었다.
그는 여전히 철학을 좋아한다. 철학책을 읽는 즐거움을 무협지에 비유했다. 고수의 비급을 읽는 것처럼 논리가 전개되고 세계가 해체되고 다시 조립되는 과정이 재미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책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현실의 세계가 있었다. 부조리한 현실을 마주하면서 그는 자연스럽게 운동 현장으로 향했다. 2002년 지방선거, 민주노동당의 약진은 그에게 큰 충격이었다. 그에게 노동자들이 정치의 주체로 등장하는 장면은 그 자체로 흥미로운 사건이었다. 그렇게 학생 운동과 사회 운동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았지만, 운동을 계속하는 것에는 고민이 깊어졌다. 군대에 갔다 오곤 대학원에 진학했지만, 엉덩이가 무거운 체질이 아니라 빨리빨리 반응하는 게 내 기질에 더 맞다는걸 보게 되었다. 일반 취업도 고민했지만, 대학생 시절 무엇을 했냐는 질문에 대추리 투쟁과 노동 현장 연대를 적을 수는 없었다. 이런 활동들을 빼고 이력서를 쓰려니 적을 것이 없었다. 그러다 대구참여연대에서의 상근활동가로, 삶은 점점 운동이 되어 갔다.
장지혁 활동가는 스스로를 거대한 비전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구체적인 현장을 신뢰한다. 대구시의회 회의록을 읽고, 예산서를 들여다보고, 정책 자료를 비교하는 일. 그런 것이 그의 취향이다. 지역과 현장은 답답하고 느리지만 살아 움직인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과는 다른 느낌이 있다고, 거대한 담론보다 실제 사람들의 삶이 더 중요하다. 그래서 그는 서울로 가지 않았다. 누군가는 그것을 선택이라고 말하지만, 어쩌면 그것은 그의 성격이었는지도 모른다.
코로나19로 인해 회의도, 행사도 할 수 없었다. 육체적으로는 편했지만,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다는 것이 권력화되어 이걸 넘기기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너리즘에 빠져 있었던 것도 같았다. 사람들이 고생 많다고 하는데 뭐가 고생하는지 잘 와닿지 않았다. 그렇게 그는 10여 년간 몸담았던 단체 활동을 정리하고 재정비의 시간을 가진 뒤 대구시민단체연대회의 운영위원장으로서 활동을 재개했다.
사실 그는 ‘운영위원장’이라는 자리를 썩 좋아하지 않는다. 큰 비전을 던지는 ‘장(將)’들도 있지만, 그는 그런 비전을 갖고 돌파하는 스타일이라기보다 자료를 읽고, 정책을 분석하고, 현장을 찾아가고, 사람을 만나 이야기하는 일을 좋아한다. 하지만 운영위원장이 된 이후 그의 일상은 달라졌다. 회의와 조정, 갈등 관리와 판단이 대부분이다. 원래는 2~3년 정도만 맡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사회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시민사회의 대응 과제가 늘어나면서 그는 자리를 쉽게 떠날 수 없게 됐다.
아버지가 된 활동가
집회 현장에서의 장지혁은 늘 바쁘다. 하지만 집에 돌아가면 두 아이의 아버지다. 말 없는 경상도 남자라는 문화 속에서 다정한 아버지의 모습을 볼 롤모델이 없었다고, 스스로 다정한 아빠는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아이들을 진보적으로 키우겠다는 생각도 하지 않는다. 대신 사람을 존중하는 법을 가르친다. 예를 들어 딸에게 반에 이주민인 친구가 있다고 한다면, “걔는 베트남 외갓집 가니까 좋겠네.” 정도로 말이다. 대신 유튜브 이상한 것을 보고 질문했을 때는 인간으로서 그런 생각과 하면 안 되는 행동들은 분명히 주지시킨다.
구시대의 부스러기
그 스스로 생각해 볼 때, 1세대 운동이 식민지 시기와 한국전쟁 이후 인혁당이라는 사건이든지 일부 남았던 한 60대까지 왔던 운동이 하나 있었고, 두 번째 큰 흐름이 이제 80년 광주에 있었던 80년대 대학생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이어져 온 운동의 끝의 ‘구시대의 부스러기’라고 자신을 표현한다. 2세대 운동이 큰 싸움 중심으로 이어져 왔기에 12.3 계엄선언 때에도 즉각적으로 반발할 수 있었다고 본다. 2세대 운동이 끝이라고 표현하지만,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게 아니라, 지금의 모습이 그렇다는 것이다. 이게 운동의 장엄한 마무리일지, 새로운 시작의 기반이 될지 모른다. 언젠가 계엄처럼 군부가 시민을 물리적으로 언제든지 탄압하는 그런 시기가 되면 이렇게 할 수 있다고 말을 해주는 사람 정도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한단다. 요즘 그의 고민은 새로운 운동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지나온 운동을 어떻게 잘 마무리하고 기록할 것인가에 가깝다. 서울 위주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역 활동가들의 삶이 잘 기록되기를 바란다. 전선을 연결하던 사람들, 현수막을 달던 사람들, 집회가 끝난 뒤 의자를 정리하던 사람들의 이야기. 그런 기록이 남아야 한다고 말한다. ‘야마모토 요시타카(山本義隆)’라는 일본의 전공투 운동의 리더로 유명한 과학사가의 1960년대 한창 투쟁했던 시기를 회고한 본인의 자서전 같은 책(나의 1960년대, 2017, 돌배게)이 있는데, 투쟁에 대한 큰 내용만큼이나 그 기록물의 마지막 부분이 동지들에 대한 소소한 편지들이 더 좋더란다. 그처럼 선배들의 활동을 잘 남기는 것도 지금의 중견 세대 활동가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선배 활동가들도 나이가 들면 또 기억의 왜곡이 더 심해지니 아직 많이들 살아 있을 때 교차 검증하며 잘 기록해두면 이것으로 나중에 연구하는 사람들이 기록을 정리한 또 개별 기록을 모아서 공통된 기록을 또 만들어낼 수 있도록 말이다.
또 요즘 같은 선거국면에서 후보자들과 정책 제안을 하고 후보자들에게 공약 이행을 요구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운동의 목표가 그것만 남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지금의 시민사회가 조금 서글플 때가 있다고 한다. 노동자도, 장애인도, 이주민도, 소수자도, 누군가에게 부탁하는 존재가 아니라 세상의 주체가 되는 것이 우리의 운동 목표인데, 지금은 정치인들에게 약속을 받아내는 것이 운동의 목표처럼 보일 때가 있다. 그래서 핸드폰 컬러링의 곡이 “친애하는 소년에게”인 것도 밝은 곡인 듯 하지만 가사에서처럼 우리가 꿈을 잃어버린 건 아닌지 묻고 싶은 마음이었단다. 그 말은 어쩌면 지금 한국 시민사회 전체를 향한 질문처럼 들렸다. 우리는 여전히 처음 꿈꾸었던 세상을 향해 가고 있는가.
사람이 없으면 운동도 없다.
요즘 그의 고민이자 목표는 건강하게, 소소하게 사는 것이다. 그러나 활동가의 일은 늘 많다. 감당하지 못 할 일 들을 떠안다 보면 인간 장지혁으로서의 목표가 깨진다고, 감당하는 데까지만 하고자 한다. 특정 한 시기에 인생을 걸어볼 수 있지만, 존재 자체를 걸지 말자고. 이 지점에서 인간 장지혁과 활동가 장지혁으로 구분해두려고 계속 애쓰고 있다. 인터뷰하면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가 끊임없이 사람 이야기를 한다는 점이었다. 그는 이념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사람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고 말한다. 그람시의 지식인론이나 사르트르의 지식인을 위한 변명에 나오는 지식인도 사실은 여러 가지 복잡하지만, 결국 현장에 가서 노동자 계급하고 열심히 조직하라는 얘기라고 그는 해석하며, 주변에 있는 활동가들에게 잔소리도 하고 잘하면 응원도 하고 격려도 하고 이런 관계들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도 서로 돌봄이라고, 사람이 병들면 운동도 병든다고 말한다. 사람이 떠나면 조직도 무너진다. 그래서 그는 활동가들이 건강하게 오래 살아남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런 돌봄의 공동체는 가능하다고, 성과보다 돌봄. 헌신보다 지속가능성. 그것이 지금의 장지혁이 생각하는 운동의 가치다.
선배 활동가들에게는 ‘무병장수’를 기원한다면, 후배 활동가들에게는 자기 한계에 너무 갇히지 말라고 말한다. 젊을 때부터 각을 좁혀놓고 생각하고 행동하고 말할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우리는 평생 승리를 못 볼 수도 있다고, 5년이고 10년 활동해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고, 사회는 생각보다 느리게 변하지만, 그럼에도 포기할 수 없다고. 변화는 언제, 어느 순간, 어떻게 올지 모른다고 말한다. 그래서 승리를 예비하고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언젠가 올 승리를 위해 준비하는 사람들. 그 승리를 자신이 직접 보지 못할 수도 있지만, 누군가는 이어받을 것이라는 믿음의 표현이었다. 어쩌면 그것이 운동의 가장 오래된 윤리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계속 나아가는 삶
인터뷰의 마지막. 자신에게 한마디를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잠시 골똘히 생각하다가 말했다. "비록 성공하지 못했더라도 계속 나아가는 삶."이라고 그는 말한다. 누군가의 시각에서 말하는 사회적 성공이 아니더라도 계속 나아가고 있는 삶이라고. 그에게 세상은 여전히 신기하고 재미있다. 어르신들이 왜 바람 부는 거 멍하니 보고 있나 했는데 요즘은 그렇게 바람 부는 것을 보며 시간도 흐르고 공간도 흐르고 노을도 흘러가는 걸 보는 것도 좋고, 오래된 공장 소리를 듣는 일도 좋단다. 언젠가 모든 것은 사라질 것이지만. 하지만 그 사라짐 속에서도 사람들은 살아가고, 또 누군가는 세상을 조금씩 바꾸려 애쓴다.
활동가 장지혁은 거대한 영웅도 아니고, 세상을 뒤집는 혁명가도 아니다. 다만 누군가가 필요할 때 가장 먼저 달려가고, 사람들이 지치면 서로를 돌보자고 말하고, 승리가 오지 않더라도 승리를 준비하자고 말하는 사람. 어디선가 누군가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늘 그 자리에 있는 사람. 아마 그것이 그를 가장 잘 설명하는 문장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