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디로 튈지 모르는 쾌활함과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활동가 ‘맹달’의
‘당연하지만 아직 갖지 못한 권리’를 찾는 유쾌한 방법
‘맹달’ 이라는 이름 들어보셨나요?
경기도 용인, 수원 지역에서는 대안교육/마을 활동가로 이름난 유명인사입니다. 과장 아니냐구요? 아니, 정말입니다. 맹달께서 몸 담고 있는 단체만 해도 무려 6개나 되는데다 그 밖에 크고 작은 지역 이슈에도 틈틈이 참여를 해 온 세월이 벌써 10년이 넘었으니 알만 한 사람은 다 안다는 말이 그리 큰 과장은 아닐 겁니다.
[참여 중인 단체]
- 경기대협 사무국장
- 평등교육실현을 위한 경기학부모회 사무국
- 수원4.16연대 운영위원
- 10.29이태원참사 수원대책회의
- 세월호를 기억하는 용인시민모임
- 수지장애인자립생활센터 운영위원장
[최근 활동 했던 이슈]
- 경기 민주교육감 단일화 추진 위원
- 용인 수지구 말구리고개 공사차량 통행 반대 대책위원
활동 범위가 넓다는 점 말고도 맹달이 유명한 이유가 또 있습니다. 바로 그녀 특유의 발랄함과 밝은 에너지입니다. 커다란 노란색(또는 보라색) 리본이 달린 머리띠와 색색깔의 귀여운 프린트가 돋보이는 원피스가 그녀의 트레이드 마크입니다. 세상 귀엽고 고운 차림으로 시청 앞에서, 거리에서, 광장에서 피켓을 들고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비장한 구호를 외치는 그녀를 모습을 보면 인상에 깊게 남을 수 밖에 없을 겁니다. 매일매일,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지치지도 않고 생글생글 미소를 지으며 ‘세상을 향해 웃으며 화내는’ 방법을 몸소 보여주고 있는 맹달. 매력적인 그녀를 소개합니다.

편견 제로!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은 시선으로 ‘사람’을 바라보는 맹달, 그녀를 만든 건 ‘방황’
Q. 맹달의 과거가 궁금합니다. 오늘날의 당찬 맹달은 어떤 시간을 통과해 만들어진 걸까요?
“중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출석 일수도 그렇게 좋지도 않고 맨날 지각하고 그랬었거든요.
근데 궁금한 건 너무 많은 거야. 예를 들어서 춘천에서 마임 축제 한다 그러면 학교 안 가고 그냥 거기 가. 버스 타고.”
“학교에서 친구가 신발 때문에 선도부에 걸릴 것 같다고 하면 ‘알았어. 내 신발 해. 나는 화장실 청소해도 괜찮아.’ 그러니까 친구들이 너무 좋아하는 거야. 그런데 선생님한테 대들거나 하진 않아. ‘네 알겠어요.’ 하고 말을 하나도 안 듣는 거야. 그래서 별명이 ‘착한 사이코’였어.”
“그런데 엄마가 엄청나게 헬리콥터맘이었어요. 우리집에 엄마들이 와가지고 수다 떨면서 우리 애 학원 어디 보내고 이러면 무조건 나도 그 학원 보내주고, 공부 잘하는 애랑 친구 시켜주려고 하고. 근데 그렇게 공부 잘하는 친구들이랑 같이 붙여준 게 나한테는 자존감이 엄청나게 깎이는 이유였어요.”
“20대 때도 하고 싶은 거 막 하면서 클럽도 진짜 많이 다니고, 맨날 술 먹고 이러니까 몇몇 친한 친구들은 그냥 당장 내일 죽을 사람처럼 왜 그러고 사느냐고 하기도 했었고. 그러면서 나 이렇게 살아도 되나.. 어느 순간 인생이 너무 패배자 같고 우울증도 좀 왔었던 것 같아요. 그러다가 다 놓고 해외 봉사활동이나 가야겠다.”
기존 사회의 틀에 끼워 맞추기에는 너무 자유로운 영혼을 가졌던 어린 맹달은 긴 방황 끝에 장기 해외봉사단 활동에 지원했고 중국 지린성 룽징시(용정시)에 있는 고아원에 봉사 활동을 떠나기로 결정합니다. 학습 지도인 줄만 알고 떠난 길이었는데 가서 보니 4살부터 19살까지 8명의 아이들과 한 집에서 지내면서 엄마처럼, 때로는 교사처럼 돌보아주는 일이었습니다. 영하 30도까지 내려가는 날씨에 세탁기도 없이 손빨래를 해야 하는 혹독한 환경이었지요. 게다가 낯선 젊은 자원 봉사자가 하는 말을 사사건건 무시하는 아이들을 이끌어가야 했으니 쉽지 않았습니다. 이 때 빛을 발했던 건 다름 아닌 마음껏 방황하고 반항했던 학창시절의 경험이었습니다. 거침없으면서 따뜻한 ‘착한 사이코’ 맹달의 방식으로 아이들의 마음을 휘어잡으며 든든한 큰누나가 될 수 있었으니까요.
“내가 중국어를 전혀 못하니까.. 일기를 매일 똑같은 이야기를 썼는데도 나는 모르니까 ‘잘했어’ 하고. 그런데 하루는 내가 청소를 하고 있는데 등에 있는 타투가 보여서 애들이 너무 놀란 거예요. 깡패 아니었냐고. 그 다음부터 애들이 말을 듣기 시작하는데, 순수하더라고. 나중에는 진짜 너무 재밌게 잘 지냈어.”
한국에 돌아와서 잠시 일했던 청소년 쉼터에서 중고등 아이들의 검정고시 준비를 도와주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검정고시 붙으면 클럽 데려가 줄게’라는 파격적인 공약을 걸고 진짜로 약속을 지켰습니다. 수업 약속을 50번이나 어겼던 소년원 출신의 아이와 몸싸움을 하기도 했고, 서로의 합의 하에 결국 매를 들기도 했습니다. 요즘 정서와는 거리가 먼 이야기지만 긴 시간 동안 서로의 신뢰가 쌓여 있었기에 가능했지요. 그 사건 이후 아이는 시험에 붙었고 맹달과도 계속해서 잘 지냈습니다. 그런데 당시 아이가 덤벼들 때는 진짜 무서웠다고 하네요.
“진짜 웃겼던 건, 나한테 욕했던 애 있잖아요. 그 아이 부모님이 검정고시 붙을 수 있게만 해달라고, 때려도 된다는 거예요. 근데 아이가 나를 되게 순하게 봤던 거야. 진짜 몇 번 경고를 했어요. 나랑 약속했으니 꼭 수업 나와야 된다. 그러다 ‘50번 약속 어기면 너 몇 대 맞을래?’ 그랬더니 아이가 ‘한 50대 맞죠?’ 그랬었거든. 그래도 걔랑 잘 지냈어요. 나중에는 오히려 그 아이가 내가 너무 무서웠다고 그러더라고. 욕하고 했던 자신의 과거를 반성하고.”
이후 발달장애 아이들을 위한 대안학교인 ‘큰나무 학교’ 교사로도 몇 년을 지냈습니다. 지금은 장애 비장애인을 위한 마을 공동체 ‘큰나무 캠프힐’로 이어져 오는 그곳에서 보냈던 시간이 행복했다는 맹달. 큰나무 학교에서 만났던 한 아이는 성인이 된 지금도 매일같이 맹달에게 전화로 안부를 물어오곤 합니다.
“내 인생이 바뀌었던 건 중국 고아원에서의 자원봉사, 즐거웠던 건 청소년 쉼터에서의 대안 교육이었어요. 거기도 나름 대안 교육이니까. 그 다음 (큰나무 학교에서의) 특수 교육까지, 너무 좋았어요. 큰나무 학교가 진짜 우리 수지꿈 교육 공동체처럼 교사랑 학부모님들이랑 너무 사이가 좋기도 했고요.”

당당하게, ‘당연한 권리’를 찾아서
Q. 대안교육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결혼하고 자연스럽게 아이를 대안학교에 보냈어요. 육아하면서 대안교육잡지인 민들레 읽기모임도 나가고 수지꿈학교에 입학해서는 대안교육연대 학부모 모임이 있는데 경기 인천 모임을 같이 하다가 이제 경기 지역만 따로 모임을 갖는다고, 창립총회를 한다고 해서 여백(동료 학부모)이 나를 데리고 갔어요. 그래서 총회를 갔다가 발을 빼지 못하고 여기까지 온 거예요.”
Q. 아이들을 직접 만나는 것과 대안교육 활동가로서의 경험이 서로 많이 다를 텐데, 어떠셨나요?
“권리에 눈을 떴다고 해야 하나….”
“용인시 학교 밖 청소년 지원 조례 만들기 활동을 하면서, 처음에는 우리 아이들 불쌍하니, 학교에서 급식 먹을 수 있게 제발 도와주세요 막 이러고. 박민형 선생님(대안교육연대 정책위원장) 도움을 받았었는데 처음에는 박민형 선생님이 너무 이상해 보였어요. 사람이 날카로워가지고 의원들한테 화내고 그래서. ‘도와주러 와서는 왜 싸우고 난리야’ 이러면서.”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그동안 우리가 화를 내야 하는데 못 냈던 거죠. 당연히 우리가 받아야 하는 권리인데. (도와달라며 읍소할 게 아니라) 당연히 해야 하는 건데 왜 안 하지? 이런 시선으로 바뀐 거는 확실해요. 그래서 어디 가면은 이제 막 나도 화내고. 문제 제기도 하고.”
맹달은 대안교육기관에 다니는 아이들이 마땅히 누려야 할 기본권인 ‘교육권’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여러 교육 지원 정책으로부터 배제되고 있는 현실과 맞서 싸우는 과정을 ‘권리 찾기’라고 표현했습니다. 처음엔 몰랐습니다. 학교 밖 아이들이 급식비 지원을 받지 못하고 있을 때, 급식비 지원이 명시된 조례 만들기 활동을 막 시작했을 때만 해도 아이들이 밥 먹을 수 있게 ‘도와달라’는 말이 먼저 나가는 게 자연스러웠지요. 그런데 함께 활동하던 분들을 보면서 깨달은 것이 바로 ‘권리 찾기’ 입니다. 도움이 아니라 우리가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도록 요구하여야 하는 것이고, 그럼으로써 변화를 만들어 갈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혼자서는 아무 것도 못해요. 같이 하면 돼요.
Q. ‘활동가’라는 자각을 하게 된 계기가 있다면 언제였나요?
“세월호 활동이요. 경기대협은 사무국장 하면서 일을 많이 한 거고. 그에 비해 활동가로서는 세월호 활동이 의미가 더 컸어요.”
세월호 참사 이후, 맹달은 함께 하고 싶은 마음에 이끌려 ‘용인 노란 리본 공작소’ 활동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번화가에서 피케팅을 하기도 하고 노란 리본을 만들어 시민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주거지인 수원에서도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바로 ‘영통 노란 리본 공작소’ 입니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1,000일이 지난 무렵이었을 거예요. 수원에서 지역 카페에 ‘매주 무슨 요일에 모여서 리본 만들까요?’하고 글을 올렸는데 놀랍게도 스물 몇 명이 오신 거예요. 10년째죠. 지금도 10명 정도가 모여서 계속 활동하고 있어요.”
“이태원 참사가 일어났어요. 그런데 이태원 참사에도 수원 지역 분들이 계신 거예요. 그래서 시민사회 단체들이 ‘우리도 피해자들이 있으니까 연대하자’ 하면서 10.29 이태원 참사 소환 대책회의가 만들어졌어요. 그렇게 수원416연대 추천으로 제가 거기(이태원 참사 대책회의)에 들어가게 된 거예요. 피해자 가족들이랑 같이 모여서 노래하고 밥 먹고. 가족분들도 맨날 투쟁하고 힘들잖아요. 그러니 여기 와서는 그냥 밥 먹고 수다도 떨고. 편한 모임 하나 만들었으면 좋겠다 해서. 성공회 신부님이 그 모임을 제안하신 거예요.”
Q. ‘활동가’로서의 자각이라면 구체적으로 어떤 느낌일까요?
“그러니까 사실은 어느 동네나 어느 단체가 바뀌려고 할 때 항상 다수결의 원칙을 따르잖아요. 다수의 의견도 함께 해야 되잖아요. 그런데 혼자 하면 이게 잘 되지 않는 거예요. 그냥 좋은 얘기한다 이 정도에서 끝나거나, 다음에 얘기해 이런 식으로 밀려나거나. 여럿이 같이 목소리를 내야 뭔가 조금씩 바뀔 수 있어요.”
“아파트 입주자 대표 회의 활동 같은 것도, 뭔가 활동을 하면 바뀌는 거예요. 사람들의 의식도 바뀌고 내가 생활하고 있는 반경도 바뀌고. 그러니까 왜, 사람들이 맨날 아파트 욕하고 그러잖아요. 그러면 ‘그러지 말고 회의 들어가서 바꿔보자’라고 하죠. 그래서, 예를 들어서 경비 아저씨나 미화 여성 노동자분들에 대한 처우가 좋아지면 이분들이 그만두지 않게 돼요. 또 그만큼 잘하는 거야. 그러니까 아파트가 관리도 잘 되고. 뭔가 소통도 잘 되니까 ‘저 아파트 관리 잘 된다’ 이렇게 동네에서 소문날 정도로 괜찮은 아파트가 되고. 혼자는 안 돼. 여럿이 활동하고 할수록 모두가 좋아지는 거지.”
활동가란 무엇일까 되돌아보았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함께 한다’는 감각입니다. 지역에서 세월호 참사를 추모하며 리본을 만드는 모임을 처음 만들고자 했을 때 기꺼이 집 밖으로 나와 맹달의 손을 잡아 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후 10년이란 세월 동안 매 주 만나면서 서로 위로하고 의지할 수 있는 관계를 맺었습니다. 그리고 이태원 참사 대책회의로 네트워크가 확장되는 경험을 하면서 연대의 감각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혼자서는 안되고, 함께 하면 돼요.”
맹달이 말하는 활동가의 의미, 변화의 시작은 다름 아닌 ‘함께 하는 것’ 이었습니다.

힘든 순간에도 동력을 잃지 않는 노하우 – 천천히, 그러나 꾸준하게
아무리 에너지가 넘치는 맹달일지라도 쉽게 변하지 않는 현실을 마주할 때면 지치고 힘들지 않을까, 궁금하여 질문을 던져 보았습니다.
Q. 변화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 지난하게 느껴지고 지치지는 않나요?
“재밌잖아요. 처음 급식비 지원해달라고 했을 때 일부 공교육 교장 선생님들은 ‘(공교육) 학교 다니기 싫다고 스스로 박차고 나갔는데, 우리가 왜 세금으로 밥까지 차려줘야 하느냐’고까지 했어요. 그런데 여럿이 모여서 ‘용인에는 가장 많은 학교 밖 청소년들이 있고 대안교육기관이 있고 밥 먹는 건 기본권이다’ 이런 식으로 사람들을 설득해내고 그러면서 밥도 먹게 되고 경기도 교육청 조례도 만들어지고요.”
“아직 실현이 되지 않고 있더라도 뭔가 조금씩 만들어 간다는 거는 너무 재미있는 것 같아요. 옛날에는 밥도 안 준다고 난리 치더니 지금은 인건비까지 줄 수도 있다고 하는 상황까지 온 거잖아요. 손톱 만큼 씩이라도 나아지고 있다는 효능감을 느끼는 거예요.”
Q. 십 수년간 활동을 이어올 수 있었던 노하우가 있다면?
“옛날에는 우리 말에 공감 안되는, 움직이지 않는 사람들에게 되게 화가 났었어요. 그랬는데 지금은 지켜 봐야지, 넓은 마음을 갖고 설득해야지라고 생각해요. 될 때 되면 되겠지 이런 거 있잖아. 그런데 가끔 울화는 터지죠.(웃음)”
“정말 한계를 느낄 때는 사회적 참사 재판에 가거나 했을 때예요. 엄청난 현타가 오기도 하죠. 법이 피해자 편이 아니고, 정치인도 피해자 편이 아니고, 언론에서도 잠깐 관심 갖다가 금방 관심이 없어지고 그러면. 그럴 땐 되게 슬프고 힘들고 괴로우니까, 처음에는 감당이 안되다가 지금은 그런 감정을 집까지 가지고 오지 않으려고 노력해요. ”
“정의가 이긴다, 착한 사람이 복을 받는다, 이런 말은 믿지도 않아요. 너무 동화 같잖아요. 내 세상이 동화 같진 않으니까. 그냥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사람이 이기는 거라 생각해요.”
‘세상은 동화가 아니고, 정의가 늘 이기는 것도 아니다’라는 냉정한 현실을 인식하면서도 ‘손톱 만큼 씩이라도 나아지고 있지 않은가’, ‘안되면 될 때까지 설득하면 된다’라고 힘주어 말하는 맹달을 보면서 그녀의 단단한 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유쾌하게 달려가는 맹달의 직진 본능은 계속된다
인터뷰 전, 맹달은 늘 눈코 뜰 새 없이 바빠 보였습니다. 인터뷰를 끝내고 나니 맹달이 자유로워 보입니다. 기존 질서나 권위에 구애 받지 않고, 쉽게 변하지 않는 현실 앞에서 낙담하지도 않으며 그녀의 마음이 향하는 사람들 속으로 훅 들어갑니다. 너무 먼 미래를 고민하기보다 지금 당장 필요한 사람들 곁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해냅니다. 유쾌하게, 발랄하게, 미소를 잃지 않으면서 말이지요.
“인터뷰 하면서 추억이 아롱아롱했어요. 고마워요.” 라는 맹달께, 고맙다는 인사를 되돌려 드리고 싶습니다.
아무렇지 않게 함께 손을 잡아 주어서 감사합니다.
인터뷰어 : 나디
맹달과 함께 아이를 대안교육기관 수지꿈학교에 보내며 ‘권리 찾기’를 배우고 있습니다. 동천동 마을 활동을 기록하는 모임(기록동천)에서 뉴스레터(마당발.신) 발행에도 참여하고 있습니다.
활동가 인터뷰 프로젝트 〈변화를 만드는 사람들〉 은 공익활동가의 지역·영역·세대를 잇는 사회적 지지와 연대의 플랫폼, 2026 공익활동가주간과 함께합니다. 공익활동, 캠페인의 성과보다 그 일을 한 활동가 개인의 이야기에 시선을 맞추는 이 프로젝트는 다양한 지역과 분야에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변화를 위해 노력하는 활동가들을 직접 만나 이들의 일과 삶을 기록합니다.
이 프로젝트는 아름다운재단의 지원으로 지리산이음이 기획·운영하고 있습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쾌활함과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활동가 ‘맹달’의
‘당연하지만 아직 갖지 못한 권리’를 찾는 유쾌한 방법
‘맹달’ 이라는 이름 들어보셨나요?
경기도 용인, 수원 지역에서는 대안교육/마을 활동가로 이름난 유명인사입니다. 과장 아니냐구요? 아니, 정말입니다. 맹달께서 몸 담고 있는 단체만 해도 무려 6개나 되는데다 그 밖에 크고 작은 지역 이슈에도 틈틈이 참여를 해 온 세월이 벌써 10년이 넘었으니 알만 한 사람은 다 안다는 말이 그리 큰 과장은 아닐 겁니다.
활동 범위가 넓다는 점 말고도 맹달이 유명한 이유가 또 있습니다. 바로 그녀 특유의 발랄함과 밝은 에너지입니다. 커다란 노란색(또는 보라색) 리본이 달린 머리띠와 색색깔의 귀여운 프린트가 돋보이는 원피스가 그녀의 트레이드 마크입니다. 세상 귀엽고 고운 차림으로 시청 앞에서, 거리에서, 광장에서 피켓을 들고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비장한 구호를 외치는 그녀를 모습을 보면 인상에 깊게 남을 수 밖에 없을 겁니다. 매일매일,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지치지도 않고 생글생글 미소를 지으며 ‘세상을 향해 웃으며 화내는’ 방법을 몸소 보여주고 있는 맹달. 매력적인 그녀를 소개합니다.
편견 제로!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은 시선으로 ‘사람’을 바라보는 맹달, 그녀를 만든 건 ‘방황’
Q. 맹달의 과거가 궁금합니다. 오늘날의 당찬 맹달은 어떤 시간을 통과해 만들어진 걸까요?
“중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출석 일수도 그렇게 좋지도 않고 맨날 지각하고 그랬었거든요.
근데 궁금한 건 너무 많은 거야. 예를 들어서 춘천에서 마임 축제 한다 그러면 학교 안 가고 그냥 거기 가. 버스 타고.”
“학교에서 친구가 신발 때문에 선도부에 걸릴 것 같다고 하면 ‘알았어. 내 신발 해. 나는 화장실 청소해도 괜찮아.’ 그러니까 친구들이 너무 좋아하는 거야. 그런데 선생님한테 대들거나 하진 않아. ‘네 알겠어요.’ 하고 말을 하나도 안 듣는 거야. 그래서 별명이 ‘착한 사이코’였어.”
“그런데 엄마가 엄청나게 헬리콥터맘이었어요. 우리집에 엄마들이 와가지고 수다 떨면서 우리 애 학원 어디 보내고 이러면 무조건 나도 그 학원 보내주고, 공부 잘하는 애랑 친구 시켜주려고 하고. 근데 그렇게 공부 잘하는 친구들이랑 같이 붙여준 게 나한테는 자존감이 엄청나게 깎이는 이유였어요.”
“20대 때도 하고 싶은 거 막 하면서 클럽도 진짜 많이 다니고, 맨날 술 먹고 이러니까 몇몇 친한 친구들은 그냥 당장 내일 죽을 사람처럼 왜 그러고 사느냐고 하기도 했었고. 그러면서 나 이렇게 살아도 되나.. 어느 순간 인생이 너무 패배자 같고 우울증도 좀 왔었던 것 같아요. 그러다가 다 놓고 해외 봉사활동이나 가야겠다.”
기존 사회의 틀에 끼워 맞추기에는 너무 자유로운 영혼을 가졌던 어린 맹달은 긴 방황 끝에 장기 해외봉사단 활동에 지원했고 중국 지린성 룽징시(용정시)에 있는 고아원에 봉사 활동을 떠나기로 결정합니다. 학습 지도인 줄만 알고 떠난 길이었는데 가서 보니 4살부터 19살까지 8명의 아이들과 한 집에서 지내면서 엄마처럼, 때로는 교사처럼 돌보아주는 일이었습니다. 영하 30도까지 내려가는 날씨에 세탁기도 없이 손빨래를 해야 하는 혹독한 환경이었지요. 게다가 낯선 젊은 자원 봉사자가 하는 말을 사사건건 무시하는 아이들을 이끌어가야 했으니 쉽지 않았습니다. 이 때 빛을 발했던 건 다름 아닌 마음껏 방황하고 반항했던 학창시절의 경험이었습니다. 거침없으면서 따뜻한 ‘착한 사이코’ 맹달의 방식으로 아이들의 마음을 휘어잡으며 든든한 큰누나가 될 수 있었으니까요.
“내가 중국어를 전혀 못하니까.. 일기를 매일 똑같은 이야기를 썼는데도 나는 모르니까 ‘잘했어’ 하고. 그런데 하루는 내가 청소를 하고 있는데 등에 있는 타투가 보여서 애들이 너무 놀란 거예요. 깡패 아니었냐고. 그 다음부터 애들이 말을 듣기 시작하는데, 순수하더라고. 나중에는 진짜 너무 재밌게 잘 지냈어.”
한국에 돌아와서 잠시 일했던 청소년 쉼터에서 중고등 아이들의 검정고시 준비를 도와주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검정고시 붙으면 클럽 데려가 줄게’라는 파격적인 공약을 걸고 진짜로 약속을 지켰습니다. 수업 약속을 50번이나 어겼던 소년원 출신의 아이와 몸싸움을 하기도 했고, 서로의 합의 하에 결국 매를 들기도 했습니다. 요즘 정서와는 거리가 먼 이야기지만 긴 시간 동안 서로의 신뢰가 쌓여 있었기에 가능했지요. 그 사건 이후 아이는 시험에 붙었고 맹달과도 계속해서 잘 지냈습니다. 그런데 당시 아이가 덤벼들 때는 진짜 무서웠다고 하네요.
“진짜 웃겼던 건, 나한테 욕했던 애 있잖아요. 그 아이 부모님이 검정고시 붙을 수 있게만 해달라고, 때려도 된다는 거예요. 근데 아이가 나를 되게 순하게 봤던 거야. 진짜 몇 번 경고를 했어요. 나랑 약속했으니 꼭 수업 나와야 된다. 그러다 ‘50번 약속 어기면 너 몇 대 맞을래?’ 그랬더니 아이가 ‘한 50대 맞죠?’ 그랬었거든. 그래도 걔랑 잘 지냈어요. 나중에는 오히려 그 아이가 내가 너무 무서웠다고 그러더라고. 욕하고 했던 자신의 과거를 반성하고.”
이후 발달장애 아이들을 위한 대안학교인 ‘큰나무 학교’ 교사로도 몇 년을 지냈습니다. 지금은 장애 비장애인을 위한 마을 공동체 ‘큰나무 캠프힐’로 이어져 오는 그곳에서 보냈던 시간이 행복했다는 맹달. 큰나무 학교에서 만났던 한 아이는 성인이 된 지금도 매일같이 맹달에게 전화로 안부를 물어오곤 합니다.
“내 인생이 바뀌었던 건 중국 고아원에서의 자원봉사, 즐거웠던 건 청소년 쉼터에서의 대안 교육이었어요. 거기도 나름 대안 교육이니까. 그 다음 (큰나무 학교에서의) 특수 교육까지, 너무 좋았어요. 큰나무 학교가 진짜 우리 수지꿈 교육 공동체처럼 교사랑 학부모님들이랑 너무 사이가 좋기도 했고요.”
당당하게, ‘당연한 권리’를 찾아서
Q. 대안교육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결혼하고 자연스럽게 아이를 대안학교에 보냈어요. 육아하면서 대안교육잡지인 민들레 읽기모임도 나가고 수지꿈학교에 입학해서는 대안교육연대 학부모 모임이 있는데 경기 인천 모임을 같이 하다가 이제 경기 지역만 따로 모임을 갖는다고, 창립총회를 한다고 해서 여백(동료 학부모)이 나를 데리고 갔어요. 그래서 총회를 갔다가 발을 빼지 못하고 여기까지 온 거예요.”
Q. 아이들을 직접 만나는 것과 대안교육 활동가로서의 경험이 서로 많이 다를 텐데, 어떠셨나요?
“권리에 눈을 떴다고 해야 하나….”
“용인시 학교 밖 청소년 지원 조례 만들기 활동을 하면서, 처음에는 우리 아이들 불쌍하니, 학교에서 급식 먹을 수 있게 제발 도와주세요 막 이러고. 박민형 선생님(대안교육연대 정책위원장) 도움을 받았었는데 처음에는 박민형 선생님이 너무 이상해 보였어요. 사람이 날카로워가지고 의원들한테 화내고 그래서. ‘도와주러 와서는 왜 싸우고 난리야’ 이러면서.”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그동안 우리가 화를 내야 하는데 못 냈던 거죠. 당연히 우리가 받아야 하는 권리인데. (도와달라며 읍소할 게 아니라) 당연히 해야 하는 건데 왜 안 하지? 이런 시선으로 바뀐 거는 확실해요. 그래서 어디 가면은 이제 막 나도 화내고. 문제 제기도 하고.”
맹달은 대안교육기관에 다니는 아이들이 마땅히 누려야 할 기본권인 ‘교육권’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여러 교육 지원 정책으로부터 배제되고 있는 현실과 맞서 싸우는 과정을 ‘권리 찾기’라고 표현했습니다. 처음엔 몰랐습니다. 학교 밖 아이들이 급식비 지원을 받지 못하고 있을 때, 급식비 지원이 명시된 조례 만들기 활동을 막 시작했을 때만 해도 아이들이 밥 먹을 수 있게 ‘도와달라’는 말이 먼저 나가는 게 자연스러웠지요. 그런데 함께 활동하던 분들을 보면서 깨달은 것이 바로 ‘권리 찾기’ 입니다. 도움이 아니라 우리가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도록 요구하여야 하는 것이고, 그럼으로써 변화를 만들어 갈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혼자서는 아무 것도 못해요. 같이 하면 돼요.
Q. ‘활동가’라는 자각을 하게 된 계기가 있다면 언제였나요?
“세월호 활동이요. 경기대협은 사무국장 하면서 일을 많이 한 거고. 그에 비해 활동가로서는 세월호 활동이 의미가 더 컸어요.”
세월호 참사 이후, 맹달은 함께 하고 싶은 마음에 이끌려 ‘용인 노란 리본 공작소’ 활동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번화가에서 피케팅을 하기도 하고 노란 리본을 만들어 시민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주거지인 수원에서도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바로 ‘영통 노란 리본 공작소’ 입니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1,000일이 지난 무렵이었을 거예요. 수원에서 지역 카페에 ‘매주 무슨 요일에 모여서 리본 만들까요?’하고 글을 올렸는데 놀랍게도 스물 몇 명이 오신 거예요. 10년째죠. 지금도 10명 정도가 모여서 계속 활동하고 있어요.”
“이태원 참사가 일어났어요. 그런데 이태원 참사에도 수원 지역 분들이 계신 거예요. 그래서 시민사회 단체들이 ‘우리도 피해자들이 있으니까 연대하자’ 하면서 10.29 이태원 참사 소환 대책회의가 만들어졌어요. 그렇게 수원416연대 추천으로 제가 거기(이태원 참사 대책회의)에 들어가게 된 거예요. 피해자 가족들이랑 같이 모여서 노래하고 밥 먹고. 가족분들도 맨날 투쟁하고 힘들잖아요. 그러니 여기 와서는 그냥 밥 먹고 수다도 떨고. 편한 모임 하나 만들었으면 좋겠다 해서. 성공회 신부님이 그 모임을 제안하신 거예요.”
Q. ‘활동가’로서의 자각이라면 구체적으로 어떤 느낌일까요?
“그러니까 사실은 어느 동네나 어느 단체가 바뀌려고 할 때 항상 다수결의 원칙을 따르잖아요. 다수의 의견도 함께 해야 되잖아요. 그런데 혼자 하면 이게 잘 되지 않는 거예요. 그냥 좋은 얘기한다 이 정도에서 끝나거나, 다음에 얘기해 이런 식으로 밀려나거나. 여럿이 같이 목소리를 내야 뭔가 조금씩 바뀔 수 있어요.”
“아파트 입주자 대표 회의 활동 같은 것도, 뭔가 활동을 하면 바뀌는 거예요. 사람들의 의식도 바뀌고 내가 생활하고 있는 반경도 바뀌고. 그러니까 왜, 사람들이 맨날 아파트 욕하고 그러잖아요. 그러면 ‘그러지 말고 회의 들어가서 바꿔보자’라고 하죠. 그래서, 예를 들어서 경비 아저씨나 미화 여성 노동자분들에 대한 처우가 좋아지면 이분들이 그만두지 않게 돼요. 또 그만큼 잘하는 거야. 그러니까 아파트가 관리도 잘 되고. 뭔가 소통도 잘 되니까 ‘저 아파트 관리 잘 된다’ 이렇게 동네에서 소문날 정도로 괜찮은 아파트가 되고. 혼자는 안 돼. 여럿이 활동하고 할수록 모두가 좋아지는 거지.”
활동가란 무엇일까 되돌아보았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함께 한다’는 감각입니다. 지역에서 세월호 참사를 추모하며 리본을 만드는 모임을 처음 만들고자 했을 때 기꺼이 집 밖으로 나와 맹달의 손을 잡아 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후 10년이란 세월 동안 매 주 만나면서 서로 위로하고 의지할 수 있는 관계를 맺었습니다. 그리고 이태원 참사 대책회의로 네트워크가 확장되는 경험을 하면서 연대의 감각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혼자서는 안되고, 함께 하면 돼요.”
맹달이 말하는 활동가의 의미, 변화의 시작은 다름 아닌 ‘함께 하는 것’ 이었습니다.
힘든 순간에도 동력을 잃지 않는 노하우 – 천천히, 그러나 꾸준하게
아무리 에너지가 넘치는 맹달일지라도 쉽게 변하지 않는 현실을 마주할 때면 지치고 힘들지 않을까, 궁금하여 질문을 던져 보았습니다.
Q. 변화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 지난하게 느껴지고 지치지는 않나요?
“재밌잖아요. 처음 급식비 지원해달라고 했을 때 일부 공교육 교장 선생님들은 ‘(공교육) 학교 다니기 싫다고 스스로 박차고 나갔는데, 우리가 왜 세금으로 밥까지 차려줘야 하느냐’고까지 했어요. 그런데 여럿이 모여서 ‘용인에는 가장 많은 학교 밖 청소년들이 있고 대안교육기관이 있고 밥 먹는 건 기본권이다’ 이런 식으로 사람들을 설득해내고 그러면서 밥도 먹게 되고 경기도 교육청 조례도 만들어지고요.”
“아직 실현이 되지 않고 있더라도 뭔가 조금씩 만들어 간다는 거는 너무 재미있는 것 같아요. 옛날에는 밥도 안 준다고 난리 치더니 지금은 인건비까지 줄 수도 있다고 하는 상황까지 온 거잖아요. 손톱 만큼 씩이라도 나아지고 있다는 효능감을 느끼는 거예요.”
Q. 십 수년간 활동을 이어올 수 있었던 노하우가 있다면?
“옛날에는 우리 말에 공감 안되는, 움직이지 않는 사람들에게 되게 화가 났었어요. 그랬는데 지금은 지켜 봐야지, 넓은 마음을 갖고 설득해야지라고 생각해요. 될 때 되면 되겠지 이런 거 있잖아. 그런데 가끔 울화는 터지죠.(웃음)”
“정말 한계를 느낄 때는 사회적 참사 재판에 가거나 했을 때예요. 엄청난 현타가 오기도 하죠. 법이 피해자 편이 아니고, 정치인도 피해자 편이 아니고, 언론에서도 잠깐 관심 갖다가 금방 관심이 없어지고 그러면. 그럴 땐 되게 슬프고 힘들고 괴로우니까, 처음에는 감당이 안되다가 지금은 그런 감정을 집까지 가지고 오지 않으려고 노력해요. ”
“정의가 이긴다, 착한 사람이 복을 받는다, 이런 말은 믿지도 않아요. 너무 동화 같잖아요. 내 세상이 동화 같진 않으니까. 그냥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사람이 이기는 거라 생각해요.”
‘세상은 동화가 아니고, 정의가 늘 이기는 것도 아니다’라는 냉정한 현실을 인식하면서도 ‘손톱 만큼 씩이라도 나아지고 있지 않은가’, ‘안되면 될 때까지 설득하면 된다’라고 힘주어 말하는 맹달을 보면서 그녀의 단단한 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유쾌하게 달려가는 맹달의 직진 본능은 계속된다
인터뷰 전, 맹달은 늘 눈코 뜰 새 없이 바빠 보였습니다. 인터뷰를 끝내고 나니 맹달이 자유로워 보입니다. 기존 질서나 권위에 구애 받지 않고, 쉽게 변하지 않는 현실 앞에서 낙담하지도 않으며 그녀의 마음이 향하는 사람들 속으로 훅 들어갑니다. 너무 먼 미래를 고민하기보다 지금 당장 필요한 사람들 곁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해냅니다. 유쾌하게, 발랄하게, 미소를 잃지 않으면서 말이지요.
“인터뷰 하면서 추억이 아롱아롱했어요. 고마워요.” 라는 맹달께, 고맙다는 인사를 되돌려 드리고 싶습니다.
아무렇지 않게 함께 손을 잡아 주어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