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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공익활동가주간][활동가, 전환을 말하다] 피해자의 스마트폰을 피해자에게 다시 쥐어주는 일 - 조경숙 도토리랩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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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인터뷰 - 활동가, 전환을 말하다]

피해자의 스마트폰을 피해자에게 다시 쥐어주는 일
조경숙 도토리랩스 대표


- 피해자의 입장에서 기술 설계도를 다시 그리는 사람

- 기술을 현장 지원하던 프리랜서, 점점 현장 가까이 선 기술활동가로




패턴은 언제나 비슷했다. 남편은 아무렇지 않게 휴대폰을 달라고 했다. 처음에는 항상 무언가를 보여줄듯이 말한다. 인터넷 검색창에 몇 글자를 치고, 화면을 한두 번 넘기고, “이거 봐” 하며 옆 사람에게 보여주는 식이었다. 하지만 핸드폰은 돌아오지 않았다. 검색창을 보던 손가락은 자연스럽게 SNS로 넘어갔다. 누구와 메시지를 주고받았는지, 누구의 사진에 ‘좋아요’를 눌렀는지, 어떤 댓글을 남겼는지. 그 다음은 앨범이었다. 하루의 사소한 장면들이 저장된 곳. 음식 사진, 거리 사진, 영수증 사진, 친구와 찍은 사진. 그 모든 사적인 기록들이 그의 손끝에서 빠르게 넘어갔다.


하지만 그날은 손가락이 한 장면 앞에서 멈췄다. 아내가 몰래 남겨둔 기록이었다. 폭력을 증명하기 위해, 언젠가는 누군가에게 보여줘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떨리는 손으로 저장해둔 영상이었다. 남편의 얼굴이 굳어졌고 숨은 거칠어졌다. 휴대폰은 곧장 벽으로 날아갔고, 액정은 바닥에서 깨졌다. 분을 이기지 못해 휴대폰을 내려치는 망치질 속에서, 어렵게 남겨둔 증거도 함께 사라졌다. 차라리 휴대폰만 부서졌다면 다행이다. 폭력은 그날도 되풀이됐다. 증거를 모았다는 사실 자체가 더 큰 폭력의 이유가 됐다. 


이해하기 어려운 어느 집의 풍경. 누군가는 피해자에게 왜 그렇게 당하고만 있었느냐며 쉽게 질타할지도 모를 이 장면 앞에서, 조경숙 도토리랩스 대표는 오래 멈춰서 있었다. 


그리고 피해자의 관점에서 물었다. 피해자는 왜 증거를 남기고도 더 위험해져야 했을까. 폭력을 입증하려 붙잡은 휴대폰은 왜 피해자를 지키지 못했을까. 가해자의 손에 넘어가는 순간, 왜 그 안의 기록은 보호의 증거가 아니라 또 다른 폭력의 빌미가 되어야 했을까.


그 질문을 붙잡고 2년. 석사학위 논문 '친밀관계폭력 피해자를 위한 디지털 증거 프레임워크 연구'를 발표한 조경숙 대표는 "기술 설계의 출발 질문을 피해자에게 둬야한다"며 "피해중심기술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피해중심기술. 낯선 말이지만 뜻은 분명하다. 주로 사건이 벌어진 ‘뒤’를 향해 있었던 기존의 기술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폭력이 벌어지는 ‘동안’ 피해자가 증거를 모으고 숨기고 지킬 수 있도록 설계된 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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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 피해자가 안전하게 증거를 수입할 수 있도록 설계된, 어플리케이션. 
평소에는 숫자판만 떠 있는 계산기지만 미리 정해준 수식을 입력하면 증거를 저장할 수 있다. 
(출처:  '친밀관계폭력 피해자를 위한 디지털 증거 프레임워크 연구’ 논문)



실제로 그는 논문을 통해 가정폭력 피해자가 증거를 안전하게 모으고, 들키지 않게 숨기며, 훼손되지 않은 상태로 지킬 수 있도록 단계별 설계 원칙을 제안했다. 나아가 이러한 설계 원칙을 실제로 적용한 대안을 제시했는데, 계산기로 위장한 애플리케이션이 바로 그것이다. 


평소에는 화면에 숫자판만 떠 있는 그냥 계산기지만 미리 정해 둔 수식을 입력하면 숨어 있던 화면이 열리고, 거기에 그날의 날짜와 상황, 그리고 사진을 저장할 수 있다. 저장된 사진은 그대로 남지 않고 꽃이나 풍경 같은 다른 이미지 속으로 숨으며, 나중에 정해진 암호를 넣어야만 원래 모습으로 다시 꺼낼 수 있다. 가해자가 휴대폰을 빼앗아 열어 봐도, 끝까지 보이는 것은 계산기뿐이다.


지난 17일, 피해자의 스마트폰을 다시 피해자의 편으로 돌려놓으려는 기술활동가, 조경숙 도토리랩스 대표를 만났다. 



기술은 중립적이지 않다. 


앞선 서두의 상황은 특별한 누군가에게만 닥치는 게 아니다. 우리가 매일 쥐고 있는 평범한 휴대폰에도 이같은 비대칭이 숨어 있다.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은 상대가 마음만 먹으면 캡처할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빠져나간 얼굴 한 장은 딥페이크 성범죄의 재료가 될 수 있다. SNS에 별생각 없이 올린 일상이, 기본 공개 범위와 공유 설정에 따라 낯선 사람에게까지 닿을 수 있는 거다. 


심지어는 차단 조차 불가능한 스토킹이 있다. 이른바 '송금 스토킹'. 협박 문자는 차단할 수 있어도 송금은 막기 어렵다는 점을 악용한 괴롭힘이다. 연락처나 계좌번호만 있으면 돈을 주고 받는 게 어렵지 않은 시대. 소액의 돈을 건내며 송금 메모 칸에는 “어디야, 찾아간다” 같은 말이 실려 온다고. 계좌를 없애지 않는 한, 피해자는 그 메시지를 완전히 피하기 어렵다.



“전부 평범한 기능이에요.”



조 대표는 그렇게 말했다. 누군가를 해치려고 만든 기술이 아니다. 프로필 사진, 공개 설정, 송금 메모, 알림, 위치 기록. 모두 편의를 위해 만들어진 기능들이다. 문제는 그 평범한 기능들이 폭력의 관계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약한 쪽에 불리하게 작동할 수 있다는 점이다. 기술은 중립적인 물건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늘 누군가의 상황을 기본값으로 삼아 설계된다. 그 기본값 안에 피해자의 처지가 들어 있지 않을 때, 같은 기술은 누군가에게는 편의가 되고 누군가에게는 위협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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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2] 조경숙 대표가 n번방·박사방 같은 텔레그램 성착취 범죄가 어떻게 생겨나고, 퍼지고, 지하로 숨는지를 
판결문과 보도로 추적해 그 ‘생태계’를 분석한 연구 내용에 대하 설명하고 있다. Ⓒ 정재훈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다. SNS 계정의 기본값을 ‘전체 공개’가 아니라 ‘친구 공개’로 두는 것만으로도 상당수 위험을 줄일 수 있다. 송금 메모에 담긴 협박성 문구를 자동으로 감지해 차단하거나 신고할 수 있게 만드는 것도 가능하다. 기술이 없어서 못 하는 일이 아니다. 그렇게 설계하기로 결정한 사람이 없었을 뿐이다.


조 대표의 논문 제목에 ‘프레임워크’, 곧 ‘틀’이라는 말이 들어간 이유도 여기에 있다. 피해중심기술은 단순히 피해자에게 필요한 앱 하나를 만드는 일이 아니다. 피해자에게 더 조심하라고 말하는 대신, 기술이 먼저 피해자의 조건을 상상해야 한다는 거다. 피해가 벌어진 뒤에야 책임을 묻는 데서 그치지 않고, 피해가 확산되기 전 멈출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는 설명이다. 



기술이 시민의 도구가 되는 방법, 예산이 뒷받침된 거버넌스


조경숙 대표는 기술이 시민의 도구가 될 수 있느냐는 질문에 “결국 거버넌스의 문제”라고 답했다. 어떤 기술을 어디에 쓰고 어디엔 쓰지 말지, 누구의 목소리가 그 결정에 들어가는지가 관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보기에 지금 AI 기술의 방향을 정하는 자리에는 두 목소리만 있다. AI를 발전시키는 데는 기업의 니즈와 국가의 니즈만 있지, 시민이나 여성, 소수자의 목소리는 들어가 있지 않다. 그 빠진 목소리들을 다 넣어, ‘우리가 지향하는 AI 기술은 무엇인가’의 그림을 함께 만들어 가는 합의의 과정이 그가 말하는 거버넌스다. 


그리고 합의는 예산이 뒷받침될 때 비로소 작동한다. 그가 "거버넌스의 핵심은 결국 예산"이라고 강조하는 이유다. 누군가 문제를 꺼내고, 사람들이 모여 연구하고, 대안을 내놓고, 그 결과물을 다시 토론하고 고쳐 가는 그런 공론의 장을 여는 데는 비용이 들기 때문이다.



“대학원에 있다 보면 마약 수사, 도박 수사 같은 연구 과제가 떨어져요. 그러면 그 과제를 기반으로 연구자들이 모여 연구하고, 논문도 쓰고, 기술도 개발하죠. 성범죄 대응이나 피해 중심 기술도 다르지 않다. 연구 과제가 생겨야, 꼭 의지가 없던 연구자들조차 ‘이 분야가 필요하구나’ 느껴 새로 들어오고, 활동가와 만나 현장의 고민을 나눠요. 그렇게 사람이 모여야 비로소 거버넌스가 활성화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생태계를 만들기 위해, 지속적인 연구 과제 예산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래서 조 대표는 젠더와 기술에 관한 예산이 문제를 떠안은 부처(성평등가족부)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본다. 기술을 실제로 움직이는 부처(과학기술정보통신부) 안에도 이 문제가 들어가야 한다. 피해자가 있는 곳에만 책임을 묻는 것이 아니라, 기술을 설계하고 유통하고 지원하는 구조 전체가 책임을 나눠야 하기 때문이다.



폭력의 현장이 버린 기술, 점점 현장에 가까이 선 기술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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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3] 도토리랩스가 녹색연합과 함께 개발한 ‘곰 이삿짐센터’ 캠페인 사이트. 
‘곰 이삿짐센터’는 사육곰 280마리를 구조해 보호소로 옮기기 위한 비용을 모금하는 프로젝트였다. Ⓒ 도토리랩스 인스타그램



조경숙 대표가 그동안 해온 일들은 대부분 잘 드러나지 않는 곳에 있었다. 수백 명의 시민이 발로 뛰어 모은 휠체어 환승 정보를 지하철 지도 웹서비스로 만들고, 한 상담소가 십 년간 쌓은 고발 기록을 전산화해 통계로 바꾸고, 사육곰을 더 나은 보호소로 옮기려는 환경단체의 캠페인을 조 대표는 "그저 기술로 거들었을 뿐"이라고 말했다. 이 때까지만 해도 조 대표는 "이슈를 끌고 나가는 사람들을 살짝 지원해주는, 말 그대로 도토리(사업체 이름) 같은 일들을 해왔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사이 기술의 위치가 달라졌다. 그동안 조 대표에게 기술은 활동을 뒤에서 돕는 도구였지만, 성범죄가 채팅 앱과 클라우드, 메신저에서 벌어지면서 기술 그 자체가 폭력의 현장이 됐다. 



“제 위치가 바뀐 게 아니라, 여성폭력 현장에서 기술의 위상 자체가 바뀐 거예요.” 



2018년, 조진경 십대여성인권센터 대표를 만났다. 조진경 대표는 “여성 개발자를 만나고 싶다”고 했다. 십대여성인권센터가 마주한 현장이 달라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센터는 오랫동안 ‘가출팸’ 안에서 벌어지는 여성 청소년 성매매 문제를 다뤄왔다. 가출팸이란 집을 나온 청소년들이 한데 모여 ‘가족’처럼 함께 사는 무리를 말하는데, 당장의 생계를 위해 그 안으로 들어온 여중·여고생을 성매매로 내모는 일이 벌어지곤 했는데, 이러한 성매매의 경로가 랜덤채팅 애플리케이션 안으로 옮겨갔다. 모르는 사람끼리 익명으로 즉석에서 연결해주는 이 앱에서는, 신원 확인도 없이 미성년자에게 직접 접근해 돈을 매개로 만남을 흥정하는 일이 가능했다. 거리에서 벌어지던 일이 화면 뒤로 숨어버린 것이다. 현장이 거리에서 앱으로 넘어가자, 십대여성인권센터 그 기술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읽어내고 플랫폼의 빈틈을 짚어낼 개발자가 필요했고 그렇게 조 대표와 만났다. 


그 만남은 조 대표에게도 큰 전환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기술은 좋은 거다, 유용한 도구다, 이런 생각을 많이 했어요. 그런데 랜덤채팅 앱이 성범죄의 플랫폼으로 쓰이고 있는데도 개발 회사들이 가만히 있다는 걸 알게 되면서 생각이 바뀌었어요. 그때부터 공부를 진짜 열심히 했던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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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4] 도토리랩스가 십대여성인권센터 IT지원단과 함께 만든 디지털 성범죄 대응 정보 사이트. 
랜덤채팅 앱과 N번방 등 온라인 플랫폼에서 벌어지는 젠더폭력에 대응하기 위해, 관련 자료와 영상을 한곳에 모은 페이지다. Ⓒ 도토리랩스 인스타그램



이후 그는 조진경 대표와 함께 약 3년 동안 IT지원단을 꾸려 활동했다. 랜덤채팅 앱을 비롯한 디지털 플랫폼이 어떻게 젠더폭력의 현장이 되는지 살피고, 기술 기업의 책임과 플랫폼의 구조를 함께 들여다봤다. 기술을 더 이상 중립적인 도구로만 보이지 않았다. 어떤 기술은 이미 정치적이었고, 어떤 플랫폼은 이미 폭력의 조건을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연구가 마무리될 무렵, N번방 사건이 터졌다. 조 대표에게 그것은 갑자기 나타난 예외적 사건처럼 보이지 않았다. 이미 기술을 기반으로 한 젠더폭력의 구조를 보고 있던 중이었다. 그래서 그는 사건 이후의 분노에만 머물 수 없었다. 이 문제를 더 깊이 공부해야겠다는 필요가 생겼고, 마침 과학수사학과 교수와의 인연이 이어지면서 대학원에 진학했다. 


솔직히 이렇게 점점 현장으로 가까이 가는 과정이 쉽지는 않다. 매일 범죄를 들여다보고, 피해자의 고통을 듣고, 기술이 어떻게 사람을 통제하고 협박하고 파괴하는지 분석하는 일은 마음을 갉아먹는다. 조경숙은 정서적으로 소진될 뿐 아니라 사람 자체를 미워하게 될 때가 있다고 했다. 인류애를 어떻게 회복할지가 숙제인데 아직 답을 찾지 못했다고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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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5] 조경숙 도토리랩스 대표 Ⓒ 조경숙



그럼에도 그는 멈출 생각은 없다고. 이유는 단순하다. 자신이 가장 힘들 때, 친구들이 자신을 혼자 내버려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도 누군가 힘들 때 혼자 내버려 두지 않겠다고 마음먹으며 오늘도 노트북을 연다. 기술이 누군가의 삶을 더 위험하게 만들지 않게 하는 일. 적어도 피해자의 스마트폰만큼은 더 이상 가해자의 손에서 흉기가 되지 않게 하는 일. 제자리를 지키는 도토리가 언젠가 참나무가 된다고 믿어 사업체 이름을 지었듯, 조경숙 대표는 오늘도 그 믿음으로 자신의 자리를 지킨다.




인터뷰어 : 정재훈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하고 기록하는 일을 합니다. 제가 빚는 작은 노동이 누군가에게 즐거움이 되길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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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공익활동가주간의 〈활동가 인터뷰 프로젝트〉는 다양한 지역과 분야에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변화를 위해 노력하는 활동가들의 일과 삶 이야기를 듣고 인터뷰로 기록하는 활동을 지원합니다.

2026년에는 〈활동가, 전환을 말하다〉를 주제로 기획인터뷰를 진행했습니다. 공익활동가가 되는 데 정해진 경로는 없습니다. 교사였던 사람, 광장에서 처음 마이크를 잡았던 사람, 기존 활동의 궤적 위에서 변화를 만드는 방식 자체를 '전환'해 온 사람들도 있습니다. '공익활동'이 더 많은 사람의 선택지가 되길 바라며, 다채로운 전환의 이야기를 기록했습니다.

활동가 인터뷰 프로젝트는 
아름다운재단과 지리산이음이 함께 기획·운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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