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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공익활동가주간][활동가, 전환을 말하다] 집시를 꿈꿨던 공무원, 이주인권 활동가 되다 - 이주인권 셋 임선영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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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인터뷰 - 활동가, 전환을 말하다]

집시를 꿈꿨던 공무원, 이주인권 활동가 되다 
이주인권 셋 임선영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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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 좋아서 공무원이 된 사람



- 반갑습니다. 소개를 먼저 부탁드릴게요. 스스로를 한 단어로 설명한다면 무슨 단어일까요? 


'호기심'이라고 해야 할까요? '궁금증'이라고 해야 할까요? 어쨌든 20년 다니던 안정적인 직장을 그만두게 됐던 계기도 됐고, 제가 계속 삶에서 에너지를 얻는 것도 되고. 궁금하면 바로 검색하고 확인하고, 그래서 새롭게 뭔가 알게 되는 것들을… 그래서 여행하는 것을 엄청 좋아하는데, 매일 집 앞에서도 같은 시간대에 주변 풍경이나 날씨에 또 새로운 것들이 있어서 그런 걸 발견하는 걸 좋아해요.



- 국가인권위원회가 첫 직장이셨어요?


그렇지는 않고요. 제가 원래 여행을 좋아하다 보니까 외무 공무원 쪽을 하다 보면 안정적인 직장을 가지면서 여행처럼, 집시처럼 살 수 있겠다, 외무 공무원 준비를 하면서 공무원 시험을 오랜 기간 봤었고 그러다 합격해서 출입국 공무원을 2년 7개월 하다가 다시 시험 봐서 인권위를 20년 다니게 된 셈이었죠. 아마 인권위여서 20년을 다녔을 거예요. 저도 이렇게 오래 한 직장에 있을 줄 몰랐거든요.


출입국 공무원을 2년 7개월만 했던 이유가 뭐냐면, 저는 김포공항에 가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발령받은 것이 인천출입국사무소에서 선박 쪽 업무를 한 거예요. 막상 가봤더니 인천항에 도착하는 큰 러시아 배부터 작은 중국 배까지 직접 제가 다 배에 올라가서 검사도 하고, 여성으로서 그렇게 한 사람이 거의 없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정말 재미있고 즐거웠거든요.


근데 갑자기 연락이 온 거예요. 증명 발급하는 데 원래 여성 선배님이 있었는데 그분이 공항으로 가면서 그 자리를, 이왕이면 카운터를 젊은 여성이 맡아야 하지 않겠냐라는 것 때문에 저를 선택했다는 거예요. 그런 말을 들은 순간 '이 조직이 내가 계속 다녀야 될 조직일까?'라는 생각이 들었던 거죠. 공무원 공부 더 이상 안 하려고 했었는데 다시 결심을 해서 그 해에 합격했어요. 7급으로 다시 합격한 건데, 저는 그때 위기가 기회가 된다는 것을 아주 절감했던 것 같아요.


공무원 세계가 되게 여러 개가 있었는데 제가 좋아했던 것은 여행이나 축제 같은 것이었으니까 '문광부 가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했어요. 시험 붙으면 성적순으로 자기가 부처를 선택할 수 있었는데, 저는 중간쯤이었는데 서울에서 갈 만한 부서들이 많지 않았어요. 인권위는 잘 모르는 곳이었는데 쉬는 시간에 인권위를 소개해 주더라고요. 그리고 사무실을 봤더니 인권위는 독립 건물이라고 하는 거예요. 제가 답답한 것을 싫어해서 청사 안에 들어가면 아무래도 힘들 것 같았거든요. 그래서 '저길 가야 되겠구나.' 생각했죠. 근데 제 앞순위 분이 딱 선택을 했고 저는 여가부를 선택했는데 발령이 좀 안 나다 보니까 나중에 인권위에서 사람 뽑는다고 해서 인권위로 온 거죠.


저는 제가 공무원을 하리라는 생각도 별로 안 했고, 인생이 계속 집시였고, 여행이었고, 그러다 보니까 사실 사회라든가, 정치라든가 이런 것에 대한 생각도 많지 않았거든요. 직업이라는 것도 내가 여행을 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인권위에 들어가서 세상에 대해서, 그리고 어른이라는 것에 대해서 많이 배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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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인권위원회에서 일하던 시절. 여행에서 마주치는 우연한 풍경처럼, 인권위원회에서 일하게 되었고 그 경험이 이주인권 활동가로 이어졌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임선영은 여전히 여행 중인 게 아닐까. (본인 제공)



- 인권위에서 20년이나 근무하셨는데 주로 어떤 일을 하셨어요?


2004년도 1월에 바로 총무과에서 발령받았을 때, 그때 인권위가 세계 인권기구 대회를 개최해서, 전 세계 70여 개 국가에서 200명 가까운 사람들을 초청하는 행사를 했어요. 사무국으로 행사 운영하는 것을 9월까지 경험했어요. 그것도 엄청 큰 의미를 가졌어요. 그러고 나서 조직이나 인사 쪽을 한 3년 하다가 '교육'을 한 6년 정도 했어요. 교육에 워낙 관심이 있었거든요. 제가 스페인으로 유학 간 것도 원래 스페인 여행 가고 싶었던 것도 있었지만 시민 교육으로 전공을 선택해서 바르셀로나 대학에서 대학원을 다녔거든요.


학생인권 조례를 제가 유학 가기 전에 전담해서 했어요. 그때 인권교육센터들하고 같이, 배경내 선생님이나 류은숙 선생님이 실태조사를 한 결과를 토대로 권역별 토론회를 개최하며 조례에 실질적으로 반영하는 것을 초창기에 하다가 마무리는 못하고 유학을 갔죠. 스페인을 선택한 것도 당시 다산인권센터 박진 활동가님, 우리(인권위) 사무총장도 하셨지만, 그분의 글에 소개된 <벤포스타 어린이 공화국>을 감명 깊게 봐서 그런 것들도 좀 영향은 있었죠. 중간에 잠깐 차별조사 업무를 한 1년 반 했고, 현병철 위원장 때 '북한인권'을 6개월 했어요. 그리고 마지막 '이주인권'을 9년을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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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1월에 제네바 갔을 때. 레만호수에서 만난 백조. 가만히 있어서 다가갔는데 덩치가 커서 당황하는 모습. (본인 제공)


인권위 공무원, 이주인권단체 활동가가 되다 


- 이주인권 관련 활동을 해오고 있다는 점에서는 연속성이 있지만, 인권위 공무원과 시민사회단체 활동가의 삶은 제법 다를 거 같아요. 인권위원회에서도 이주인권 관련 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어떻게, 왜 활동가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하셨어요? 


저는 인권위에서 일을 하면서 인권에 대해서 배우면서도, 여전히 얼른 퇴사하고 스페인으로 가고 싶었어요. 근데 제가 2016년부터 인권위에서 이주전문관으로 일을 했는데, 그때 이주 활동가들을 보면서 '저 사람들은 뭐지?' 싶었어요. '어떻게 저렇게까지 할 수 있을까?' 그러면서 거기에 많이 감명받은 것도 있었고, 영향도 받고. 제가 회사를 퇴사하면서 NGO를 하게 된 계기가 되었죠.


제가 이주업무를 할 때 이주단체와의 소통을 위해 여러 네트워크에 들어가 있는데 선원 인터뷰나 모니터링을 위해 섬에도 들어가고, 이렇게 다 같이 활동가들하고 많이 했었거든요. NGO 활동을 할 결심을 한 후 어떤 영역으로 해야 할까 고민하던 중에 텔레그램 단체 메신저에 일요일 저녁에 경주 쪽에서 노동자 분들이 잡혀간 소식이 올라오고, 그래서 활동가들이 경찰서 쫓아가고, 그것을 보는 순간 '아 내가 여기까지는 못하겠구나.' 싶었어요. 처음에는 내가 한 인권위 첫 정책권고가 이주민 관련해서도 인신매매라든가, 노동력 착취 이런 것이어서 단체의 색깔을 이런 쪽으로 할까, 쉼터도 하고, 거기까지 큰 꿈도 그려보고는 했어요. 그런데 내가 활동 경험은 전무했고 그래서 한 발 물러섰어요. 인식 개선이나, 교육이나, 활동가 지원 같은 일이 내가 해왔고 그래도 앞으로도 할 수 있는 일 같았던 거죠.


이주 활동가들을 지원하는 일을 하고 싶은 것 같아요. 말하자면 인권재단 사람처럼 이주 영역에서 그게 되고 싶은 로망이랄까, 포부랄까, 그런 게 있어요. 저는 몰랐는데 작년에 지리산포럼 갔을 때 거기서 우리 같은 성격을 중간지원조직이라고 하더라고요.



- 20년 공무원 생활을 접고 단체를 만들겠다고 생각했을 때, 그 결심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단체나 활동가들이 있을 거 같아요. 한국 사회에 이렇게 훌륭한 사람들, 단체가 있다는 걸 소개해주셔도 좋을 거 같아요. 


이주인권 셋이라는 이름을 들을 때 사람들이 셋을 네트워크의 '넷'으로 생각하기도 하고, 셋이 도대체 무슨 뜻이냐, 이렇게 묻기도 해요. "선주민, 이주민, 그 사이에 활동가." 이렇게 얘기를 하지만 사실은 3명이라는 뜻에서 셋이었어요. 제가 인권위 밖으로 나올 때 친한 이주활동가 둘을 붙잡고 "나랑 같이 해줘." 그래서 그분들 이사로 모셔서, 저까지 그렇게 셋이어서 이름이 '이주인권 셋'이에요.


한 분은 이완 활동가고, 또 한 분은 류지호 활동가로 이주노동 쪽에서 20년 가까이 하셨던 분이에요. 가장 가까운 분들은 그분들이에요. 영향을 끼쳤던 분은 부산의 '이주와 인권연구소'에 이한숙 소장님이라고, 활동도 하시고 연구도 하시고, 너무나 명료한 인식과 시각 때문에 옆에 있으면 진짜 존경이라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고 해야 할까요?


제가 공무원을 했잖아요. 제도라든가 정책을 봐왔던 사람인데, 공무원들이 탁상에서 발표하는 정책이 어떻게 보면 별것도 아닌데 사실은 당사자들한테 미치는 영향이 어마어마한 거잖아요. 근데 그것을 바꾸려고 하면 너무 힘들고. 제가 이주 활동을 했을 때 진짜 보람도 많이 느꼈고, 감명도 받았던 것이 뭐냐면, 끊임없이 연대하고 혼자 힘으로는 어렵지만 지치지 않고 계속 연대하면서 결국은 안 바뀔 것 같은 것들을 바꾸어 내는 것을 보면서 '아 이게 진짜 활동이구나.'라는 걸 많이 느꼈거든요.



- 단체 만드는 게 쉬운 일은 아니잖아요. 의지와 의미만 가지고 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내용에 대한 전문성은 인권위에서 이주 인권을 오랫동안 하셨으니까 그렇다 해도, 단체 운영은 또 달라서 현실적인 문제들이 정말 어려울텐데, 단체 만들고 해보니까 어떠세요?


운영에서 두 가지 측면이 있잖아요. 하나는 재정 문제고 하나는 실무 문제잖아요. 재정은 제가 인권위 퇴사할 때 일찍 퇴사를 한 것이어서 퇴직수당 같은 것을 받았어요. 그중에서 일부를 단체에 부을 것이라고 생각을 했기 때문에 재정에 대해서는 사실은 고민을 안 했어요. 후원도 당장은 받을 생각은 없고, 왜냐하면 절차가 너무 복잡하더라고요. 올해는 인건비도 나가는 것이 있는데 일단은 제가 일정 부분을 어느 정도 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괜찮아요. 근데 실무적인 것이, 인권위에서는 저는 제 것만 하면 되는 거죠. 근데 이제는 혼자, 1인으로 단체를 설립해 가지고 홈페이지 관리부터 여러 가지를 해야해요. 직원 채용하고 나서는 그와 관련한 업무도... 산업인력공단에 아직 보험도 해결을 못했는데 그런 것이 너무 어렵더라고요. 회계 교육도 들었는데 솔직히 무슨 얘기인지 모르겠고. 그래서 일단 차근차근 하나씩 하자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 이주인권 셋은 이주활동가들을 돌보는 중간지원조직을 꿈꾼다고 했는데요, 그건 아마 장기적인 목표일 거고 지금 당장 하려는 핵심 활동, 사업이 있을 거 같아요. 


관심 사업으로 유학생 문제를 생각하고 있어요. 유학생이 지금 한 31만 명이거든요. 어마어마해요. 갑자기 확 늘었어요. 서울에도 많지만 지역에도 많고. 작년에 사망한 뚜안 씨 같은 경우도 유학생 출신이었는데 6년을 한국에서 공부했는데 취업이 가능한 분야가 제한되어 있어서 취업이 쉽지 않았어요. 출입국 제도가, 비자가 이 사람의 취업을 막은 것이지 일자리가 없었던 건 아니었거든요. 근데 한국 정책에 이분들의 목소리가 전달이 안 돼요. 그래서 저는 유학생들의 목소리를 전달하는 통로를 만들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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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인권활동가들을 지원하는 단체를 만들고 싶다는 이주인권셋 대표 임선영. (본인제공)


공무원과 활동가, 두 세계를 경험한 사람



- 인권위에서 일하면서 본 이주활동가들의 모습에 감명받아 단체를 만들었다고 했는데, 직접 활동가가 되어 보니 인권위에서 일하면서 본 활동가들의 모습과는 어떤 게 같거나 다른지 궁금해요. 


그냥 역시 일당백이구나, 활동가들은. 저희는 공무원으로서 경제적인 여유도 있지만 이 업무의 강도가 … 저는 스스로 인권위에서 일하면서 소위 빡세게 일했다고 생각했지만 24시간 상시 가동 중인 활동가들이 쳐내는 업무랑은 다른 거였죠. 공무원들도 일부 주말에 일하는 경우가 있지만 마음가짐이 다르달까… 주말에 어쩔 수 없이 일하는 것과 활동에 필요해서 자발적으로 하는 것은 차이가 크죠. 작년에 제네바 현지에 시민사회단체 사무국으로 9명이 가서 대응을 했었을 때, 제가 여태껏 간 해외 출장 중 가장 빡센 출장이었어요. 업무 강도가 이렇게 세구나.(웃음)


매년 3월 21일은 세계인종차별철폐의 날로 그동안 기념대회를 이주 시민사회단체에서 꾸준히 해 왔었는데 2025년 제가 활동가로는 처음으로 기념대회 준비에 합류했을 때, 한 번 만나고 그다음에 온라인으로 하더니 현장에서 보니까 되게 뚝딱뚝딱 다 된 거예요. 공무원 사회에서는 사전 연습도 가고, 체크를 하고, 준비할 것이 많다고 하고, 절차가 많았거든요. 그런데 활동가들은 내가 그 얘기를 했더니 "그동안 해온 게 얼만데" 라면서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하시더라고요. '이 세계에서 이렇게 버틴 사람들은 다 일당백이구나.' 싶었어요.



- 같은 주제로 다른 경험을 한 거잖아요. 공무원을 했던 경험이 활동가로 새로운 직업을 하는 데 좀 도움이 되는 측면도 있나요?


그렇죠. 활동가들 중에는 공직사회를 믿지 않는 사람도 있고, 경계하기도 하고. 저는 공직사회에 있으면서 일이 되게 하는 방향에 대해서 고민할 수 있었고, 루트가 어떻게 있다는 것을 아니까 되도록이면 어떻게 정보를 이용하고, 저 사람들(공무원들)을 어떻게 활용해야 우리 일이 되게 할 수 있을까, 이런 것에 대해서는 조금은 열린 마음이거든요. 그리고 나름 그쪽 인간관계도 남아 있고요.


사실 시민사회단체에서 하는 일들이 되게 많이 있는데 이게 안 알려지는 거잖아요. 근데 정부 정책 안으로 들어가기만 해도 당사자들한테 미치는 영향은 크거든요. 그런 것들을 계속 뚫어보려고 하는 것은 제가 공무원 했었던 경험이 있어서, 그리고 정부 정책이 어떻게 이루어진다는 것을 아니까 그런 것 같아요. '시민활동 쪽에서도 어떻게 정책적으로 접근할 수 있을지…' 이런 것들은 어쨌든 20년의 경험 덕분이라고 생각을 해요.



- 인권위에서 이주인권팀장으로 일하면서, 이주인권 셋의 활동가로 일하면서 마주한 한국 이주 인권의 실상은 어떤가요? 지난 20년 동안 이주인권의 현장은 어떤 변화가 있었다고 생각하는지 궁금해요. 


인권위에서 만든 <여섯 개의 시선> 영화에 나왔던 '네버엔딩 스토리' 찬드라 씨 이야기가 따지고 보면 1990년대나 2000년대 초반까지 한국 사회에서 이주민의 현실이었죠. 우리랑 외모가 비슷한 사람이 외국인일 거라 생각 못하는.


지금은 한국에 들어온 사람들의 출신 국가 수가 이탈리아 안의 독립국 산마리노 공화국부터 이런 것까지 다 합치면 200개가 넘었어요. 유엔 회원국 숫자보다 많아요. 이 사람들이 단순히 노동으로, 관광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한국에서 상당 기간 머물거나 정착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죠.


이 사람들을 대상으로 보느냐, 정책 주제로 보느냐, 권리를 가진 사람으로 보느냐, 이 부분이 중요해요. 전에는 이주민을 볼 때, 이주 노동자, 결혼 이주 여성, 난민, 이주 아동, 재외동포, 미등록 체류자 같은 식으로 대상으로 생각해서 정책이나 사회운동이나 조직도 다 이렇게 만들어졌거든요.


근데 사실 복합적인 거예요. 유학생으로 들어온 외국인들이 노동도 하고, 결혼도 하고, 이주 배경 아동이 자라 다양한 모습으로 사회 구성원이 되는. 그러니까 한 사람이 여러 개의 신분을 갖고 있는데 한국의 체제는 체류 자격이라는 것이 대상화된 거거든요. 그런 부분들이 계속 정책과 삶이 너무나 떨어져 있는, 그러니까 한국 사회 수많은 정책 중에 이주 정책이야말로 가장 실제의 삶과 정책이 분리되어 있고 제도개선이 많이 요구되는 분야죠.



- 이주민들이 겪는 여러 문제들이 정책이나 제도만의 문제는 아닐 거 같아요. 


한국 사람이 이주민을 바라보는 시각이 두 가지가 있어요. 첫째는 어쨌든 한국 사람과 외국인, 이렇게 바라보는, 그래서 "우리도 힘들다. 이주민만 챙기지마라"는… 그리고 또 최근에는 젊은 층 같은 경우 혐오의 대상으로 이주민을 생각하기도 해요. 혐오가 한참 사회적 문제가 되었을 때 인권위에서 여성, 성소수자, 장애인, 노인, 이주민에 대한 혐오를 체크했는데, 여성이나 장애인은 온라인과 오프가 차이가 엄청 커요. 근데 이주는 똑같아요. 온라인과 오프라인이. 이주민에 대해서 그렇게 혐오를 드러내는 것에 대해서 어떤 경계가 없는 거였죠.


또 하나 그 안에 깔린 것이 뭐가 있냐면, 외국인을 대하는 시선이 이중적인 거죠. 2021년 3월에 코로나 검사를 의무적으로 하라는 행정명령을 지자체에서 내렸거든요. 그 행정명령의 대상이 외국인이 한 명이라도 일하고 있는 사업장인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어디가 해당되냐면 대학도 되고, 병원도 된 거예요. 중소업체 이주노동자 사업장뿐만 아니라 소위 화이트칼라의 직장도 해당되는 거죠. 당시 이주단체뿐만 아니라 대사관에서도 인종차별이라며 비판했죠.


그때 제가 그 업무를 맡았을 때, 인종차별 철폐의 날 시기였기에 기존에 해오던 것처럼 위원장 성명으로 "인종차별적 행위이다. 철회해라"라는 취지의 성명을 내려고 했었는데 갑자기 위원장, 상임위원들이 참석하는 긴급회의가 열려서는 인권위가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정책 권고를 해야 된다고… 그래서 제가 금토일 3일 밤을 새워서 권고를 냈다니까요. 다른 이슈에도 이렇게 열정적인(?) 조치를 취했을까... 조금 씁쓸해지더라구요. 다문화수용성 조사에서 미국·유럽 등 서구 출신에 대한 수용성은 상대적으로 높은 반면, 동남아시아와 남아시아 출신 이주민에 대한 수용성은 낮게 나타났듯이요.



- 이제 마지막 질문입니다. 하고 싶은 게 굉장히 많고 해야 할 일도 많은 거 같아요. 앞으로 어떤 계획을 갖고 계시나요? 


이주는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비주류 영역이에요. 문재인 대통령이 당선됐었을 때 인권 주제가 앞에 나오면서 이주 쪽도 제도개선이 이루어질까 싶었는데, 오히려 그때 '국민'을 강조하다 보니까 오히려 이주는 정부 정책 안으로 포섭되지 못했어요. 이재명 정부에서도 사실 그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유럽이나 미국이나 OECD 국가에서는 '이주'가 되게 중요한 이슈거든요. 근데 한국 정치나 정책에서 '이주'는 계속 중요하지는 않아요. 이미 한국 산업과 지역사회를 지탱하는 큰 역할을 하고 있는데. 그래서 이런 부분들에 대해서 이주인권 셋이 청년들한테 이주 이슈를 많이 알려서 마치 누구나 기후위기에 관심을 갖고 행동하듯 '이주'에 대해서 같이 관심을 기울이는 것, 이주 운동의 저변을 확대하는 것, 그게 가장 큰 목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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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유오피스 엔피오피아에 자리잡은 이주인권 셋의 책상.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Curiosity killed the cat)는 외국 속담을 비틀어 '호기심이 고양이를 살린다'고 쓴 문장을 입구에 붙여놨다.




[인터뷰이의 말]

전환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세상은 안정적인 직장을 그만두고 상대적으로 가난한(?) 일에 뛰어드는 사람들을 대단하게 바라본다. 대학 교수를 그만두고 농부가 된다든지, 대기업을 그만두고 인권단체 활동가가 된다든지. 나는 그런 시선이 못내 불편했는데, 활동가가 전문직이나 돈 많이 버는 직업보다 못하거나 부족한 일처럼 여겨지는 거 같아서였다. 임선영 님의 이야기를 ‘안정적인 직업인 공무원을 그만두고 활동가가 된 사람’ 이런 식으로 전달하지 않고 싶었다. 


기우였다. 직접 만나본 임선영 님은 두 세계를 경험해본 사람, 두 가지의 언어를 쓸 줄 아는 사람이었다. 공무원의 자리에서 바라볼 줄 알면서 활동가처럼 생각하는 사람. 활동가의 심장을 가지고 있지만, 정책과 제도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직접 경험해본 사람. 너무나 부러운 능력인데, 가장 부러웠던 것은 이제 막 활동을 시작하는 사람, 시작하는 단체 만이 가질 수 있는 특유의 기운이었다. 생각해보면 ‘전환’의 가장 큰 의미는 무언가를 새롭게 시작한다는 것, 초심이라는 뻔한 말로는 다 담을 수 없는 시작점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가 아닐까. 




인터뷰어 : 이용석
평화운동단체 전쟁없는세상 활동가. 병역거부자가 되기 위해 평화에 대해 공부하고 고민하다 보니 평화활동가가 되었다. 프로야구 기록지 살피기, 보드게임 하기, 라디오 듣기, 책 읽기를 좋아한다. <평화는 처음이라>, <병역거부의 질문들>, <전쟁 없는 세상을 만들고 싶어>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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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공익활동가주간의 〈활동가 인터뷰 프로젝트〉는 다양한 지역과 분야에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변화를 위해 노력하는 활동가들의 일과 삶 이야기를 듣고 인터뷰로 기록하는 활동을 지원합니다.

2026년에는 〈활동가, 전환을 말하다〉를 주제로 기획인터뷰를 진행했습니다. 공익활동가가 되는 데 정해진 경로는 없습니다. 교사였던 사람, 광장에서 처음 마이크를 잡았던 사람, 기존 활동의 궤적 위에서 변화를 만드는 방식 자체를 '전환'해 온 사람들도 있습니다. '공익활동'이 더 많은 사람의 선택지가 되길 바라며, 다채로운 전환의 이야기를 기록했습니다.

활동가 인터뷰 프로젝트는 
아름다운재단과 지리산이음이 함께 기획·운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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