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획인터뷰 - 활동가, 전환을 말하다]
대기업 직원의 '부캐'는 어떻게 우리 사회의 인프라가 되는가
최요한 (주)SK브로드밴드 Web플랫폼개발팀 매니저 겸 자원봉사자
- 퇴근 후 주말에 농부시장 마르쉐, 점프, 아름다운 가게 등 비영리단체에 데이터분석 및 통계 업무 지원
- 어머니와의 약속으로 시작한 ‘돕는 사람을 돕는 일’..비영리 생태계의 빈틈을 메우고 성장의 연결망 되길 바라
도시의 밤이 아직 다 걷히기 전인 새벽. 서울 충정로의 한 작은 아파트에서 알람이 울린다. 알람 소리에 눈을 뜬 최요한씨는 몸을 일으켜 이불을 정리한 뒤, 책상 앞에 앉아 한 줄의 문장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쓰다 말다를 반복했던 일기. 코로나19로 세상이 멈춘 뒤, 그는 다시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아침에 한 편, 자기 전에 한 편. 생각과 감정이 문득 자신을 찾아올 때마다, 그것을 글자로 붙잡아 두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생각과 감정이 이렇게 문득 나를 찾아오면, 그걸 글자에 가둬 놔야 된다고 생각했어요. 글로 쓰면 그 안에 딱 가둬지니까, 내 생각과 감정을 응시할수 있고 그렇게 나를 더 잘 알게돼요.”
자신을 조금 더 알아가는 시간을 마치면, 그는 본격적으로 출근 준비를 시작한다. 셔츠를 입고 애플워치를 차는 일련의 준비 끝에는 현관 앞에 놓인 오토바이 헬멧이 기다리고 있다. 한겨울을 제외한 봄, 여름, 가을이면 그는 모터사이클을 타고 회사로 향한다.
헬멧의 턱끈을 채우고 15분. 그는 회사에 도착한다. 서울 중구 남대문 인근에 자리한 SK브로드밴드다. 신입사원으로 입사해 이직없이 계속 다니고 있다. 직급은 매니저.
그는 Web플랫폼개발팀에서 IPTV 영화·콘텐츠 추천 시스템을 기획·분석하는 일을 하고 있다. 정보수집에 동의한 고객의 시청 데이터를 분석해 "이 고객에겐 이런 걸 추천하면 좋겠다"는 추천 로직을 설계하고, 기획안·정책서·기능 정의서를 쓰고 관리하는 일이다. 최요한씨는 그런 자신을 “데이터 분석이 가능한 기획자”라고 소개했다.
야근은 개발 일정에 따라 달라진다. 한창 개발이 진행될 때는 늦게까지 일하는 날도 있지만, 개발이 마무리 단계에 들어서면 일반 회사원과 크게 다르지 않은 생활로 돌아온다. 사실 코로나19 이후에는 야근 자체가 많이 줄었다고.
하지만 올해 1월과 2월, 회사의 개발 일정이 한창이 아니었는데도 그는 밤마다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아 데이터를 들여다봐야 했다.
"회사일은 아니었어요. 하하"
회사 일이 아닌데도 왜 그렇게 바쁜 저녁을 보냈는지 묻자, 그는 한장의 PPT를 꺼내보였다.

[사진1] 최요한씨가 작업한 데이터 분석 시각화 자료 일부 Ⓒ사단법인 농부 시장 마르쉐
얼핏 보면 회사 보고서 같았지만, 자세히 보면 그의 말대로 회사일이 아닌 건 확실해보였다. IPTV 콘텐츠도, 고객 추천 로직도 아니었다. 서울 지도가 있었고, 지도 위에는 서울의 여러 자치구가 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날씨와 시간대별 흐름을 겹쳐놓은 그래프가 있었으며, 그 위에 숫자들이 빼곡히 들어찬 상관관계 표도 있었다. 마지막 장에는 전년보다 매출이 오른 팀과 줄어든 팀이 나뉘어 표시돼 있었다.

[사진2] 최요한씨가 작업한 데이터 분석 시각화 자료 일부 Ⓒ사단법인 농부 시장 마르쉐
"회사 데이터 아니고, 농부시장 마르쉐 데이터입니다."
농부시장 마르쉐는 도시의 한복판에서 농부와 요리사, 수공예가와 소비자가 직접 만나는 직거래장터다. 단순히 농산물을 사고파는 시장이라기보다, 누가 어떤 방식으로 농사를 짓고, 음식을 만들고, 계절의 재료를 다루는지 이야기가 오가는 자리다. 생산자는 자신의 이름을 걸고 농산물과 먹거리를 내놓고, 소비자는 그 물건이 어디서 어떻게 왔는지를 들으며 장을 본다.
최요한씨는 바로 그 이야기들을 숫자로 확인하고 드러내는 일을 하고 있었다. 어느 지역에서 사람들이 찾아오는지, 날씨와 시간대에 따라 매출은 어떻게 달라지는지, 어떤 팀의 매출이 오르고 줄었는지. 시장이 끝난 뒤 남은 숫자들을 모아, 그는 장터의 흐름을 데이터로 읽고 있었다.
부업으로 하시는 일인 거냐고 묻자, 그는 웃으며 말했다.
"아니요. 돈 안 받습니다. 그냥 봉사활동입니다. 겸업을 금지하는 회사의 윤리경영 실천 가이드를 아주 잘 준수하고 있습니다.(웃음)"
그렇다. 한창 개발도 아니었던 올해 1월과 2월. 그가 퇴근 후 집에서 구글 시트를 붙잡고 씨름한 것은 회사 일이 아니었다. 누가 시킨 일도 아니었고, 돈을 받고 하는 아르바이트도 아니었다.
매년 2월, 농부시장 마르쉐에서는 겨울 계절모임이 열린다. 농부팀, 요리팀, 수공예팀 등 한 해 동안 시장을 함께 꾸려온 출점팀들이 한자리에 모여 지난 시간을 돌아보고, 다음 시장을 준비하는 자리다. 일종의 결산과도 같은 그 모임에서 공유할 리포트를 만들기 위해, 최요한씨는 1월부터 2월까지 저녁마다 데이터를 열었던 것이다.

[사진3] 2025년 2월, 최요한씨가 농부시장 마르쉐의 겨울 계절모임에 참석해 지난해 활동들을 데이터로 정리해 발표하고 있다. Ⓒ사단법인 농부시장 마르쉐
데이터는 우리가 보는 보고서처럼 처음부터 보고서처럼 정돈돼 있지 않다. 현장의 기록은 언제나 조금씩 어긋나 있었다. 이름 표기가 다른 팀도 있었고, 빠진 값도 있었고, 같은 항목이 다른 방식으로 적힌 경우도 있었다. 최요한씨는 그런 자료를 하나씩 맞추고, 지우고, 다시 채우며 분석 가능한 형태로 바꿔갔다.
그렇게 정리한 숫자들은 다시 그래프가 됐고, 표가 됐고, 지도 위의 색이 됐다. 장터를 지키던 사람들의 감각은 데이터로 번역됐다. “이 시장은 어떤 날 잘되는가”, “누가 어디서 찾아오는가”, “무엇이 달라지고 있는가” 같은 질문들이 비로소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문소라 마르쉐 사무국장은, 그가 합류한 2023년의 전과 후를 비교하며 이렇게 말했다.
"요한님의 합류전과 그 후를 비교해 보면, 데이터에 기반한 전략 설계가 출점 팀들 사이에서 가능해졌어요. 기존엔 경험대로, 감대로 하셨던 부분들이 3년 사이에 굉장히 많이 전략적으로 바뀌었죠."
데이터는 시장이 어디에 힘을 써야 하는지도 알려주었다. 농부들은 이제 어느 시간대에 매출이 오르는지, 어떤 품목을 손님들이 고르는지를 숫자로 보고 그날을 준비한다. 새 출점 팀이 첫 시장에서 유독 고전한다는 분석은 신규 팀을 위한 온보딩 교육으로 이어졌고, 국립극장에서 농부시장이 열릴 때, 유독 먼 동네 손님이 특히 많았던 이유가 ‘주차’에 있다는 발견은 이후 시장을 알릴 때 주차 정보를 주요하게 내세우는 변화로 이어졌다.
농부시장 마르쉐가 그동안 이야기로 이야기로 전해온 가치에 숫자와 데이터라는 근거가 더해진 것 역시 중요한 변화다. 문소라 사무국장은 이렇게 말했다.
"농부시장 마르쉐가 14년을 이어 왔는데, 이 활동이 공익적으로·사회적으로·환경적으로 가치가 있다는 걸 그동안은 '이야기'로만 설명했어요. 요한님과 함께 그 이야기를 숫자로 보여주기 시작하니까 임팩트가 훨씬 분명해졌어요. 시장이 1년에 몇 번 열렸는지, 몇 명의 농부가 참여했는지, 그분들의 연간 매출이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보여주니까 비로소 더 큰 설득력을 갖게 된 거죠."

[사진4] 농부시장 마르쉐의 데이터 분석 및 시각화 작업 결과를 설명하는 최요한씨. Ⓒ정재훈
퇴근 후의 밤과 주말을 쪼개 데이터를 정리하고, 다시 검산하고, 그래프로 옮긴 최요한씨의 무급 부업은 그렇게 마르쉐의 빈틈을 메웠다. 그가 데이터로 손을 보탠 곳은 마르쉐만이 아니다. 대학생들에게 통계를 가르치는 사단법인 점프에서도, 아름다운가게에서도 그는 같은 방식으로 일손을 더해 왔다.
그런 최요한씨를 우리는 흔히 ‘자원봉사자’라고 부른다. 다만 정작 요한씨는 다른 표현을 더 좋아한다며 이렇게 자신을 소개했다.
“돕는 사람을 돕는 사람. 저는 돕는 사람을 돕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하하"
어머니와의 약속, 아니 어머니가 내게 남겨주신 선물
이유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돕는 사람들을 돕고 싶은 이유 말이다. 한참 생각에 잠긴 요한씨 입에서 나온 단어는 뜻밖이었다. 바로 어머니였다.
어느 날 어머니를 모시고 병원에서 돌아오던 길이었다. 어머니가 문득 물었다. “너 회사 그만두면 뭐 할 거야?”
그는 대답했다. “나는 돕는 사람을 도와줄 거야.”
어머니는 다시 물었다. “불쌍한 사람들을?”
그는 아니라고 했다. “주변을 둘러보니까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돕는 사람들은 생각보다 많아. 그런데 그런 사람들 보면 자기 자신을 너무 많이 희생하면서 버티는 것 같더라고. 나는 그런 사람들을 돕고 싶어. 누군가를 돕는 사람들을, 내가 뒤에서 좀 도와주는 사람이 되고 싶어.”
며칠 뒤 저녁 식탁에서 어머니가 다시 그 이야기를 꺼냈다.
“요한아, 너 그렇게 누구 도와주러 갈 거면 나도 데리고 가라.”
밥상 위에 잠시 놓였다가 사라질 수도 있었던 말이었다. 그러나 그 말은 오래 남았다.
2022년 10월 15일, 요한씨가 아버지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어머니가 갑자기 쓰러졌다는 소식이었다. 뇌출혈이었다. 작별 인사를 나눌 시간도 없었다.
“그날은 눈물도 안 났어요. 그런데 다음 날 어머니 친구분들이 오셔서 우시는데, 그때부터 저도 눈물이 나더라고요.”
장례를 치른 뒤에도 그는 한동안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러다 어머니에게 했던 말들을 하나씩 떠올리기 시작했다. 학교를 세우겠다, 교회를 세우겠다 같은 약속도 있었다. 긴 시간과 큰 준비가 필요한 약속들이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 지킬 수 있는 약속도 있었다. 바로 돕는 사람을 돕는 일이었다. 큰돈이 없어도, 회사를 그만두지 않아도, 자신이 가진 시간과 기술로 시작할 수 있는 일.
“돕는 사람을 돕는 건, 큰 자본이 드는 게 아니라 내가 지금 바로 할 수 있는 일이잖아요.”
어머니와 식탁 위에서 나눴던 말은 그때부터 더 이상 막연한 다짐이 아니었다. 먼 미래의 약속이 아니라, 지금의 삶 안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이어갈 수 있는 일이 됐다. 최요한씨는 그걸 "어머니가 내게 주신 선물"이라고 표현했다.
2023년 3월 15일, 그는 마르쉐 사무실을 찾아갔다.
"농부시장 마르쉐가 떠오르더라구요. 예전에 마르쉐에 몇 번 가본 적이 있었거든요. 시장이면 매출 데이터가 있을 거잖아요. 그런데 아마 엑셀로 결산만 하고 있거나, 분석까지는 못 하고 있을 수도 있겠다 싶었어요. 제가 그 관계성을 찾아드리면 시장이 더 좋아지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었죠. 그래서 그냥 이메일을 보냈습니다.”
그렇게 사무실에서 농부시장 마르쉐의 이보은 대표를 만났다. 설명을 들은 이 대표는 반가워했다. 실제로 그곳에는 매출 기록이 있었지만, 주로 결산용으로 정리돼 있었다. 그 안에서 시장 운영의 단서를 읽어 내는 일은 충분히 시도되지 못한 상태였다. 최요한씨가 보기에 그곳에는 자신이 메울 수 있는 빈틈이 있었다.
처음에는 한 시즌이면 끝날 줄 알았다. 그러나 일은 계속됐다. 시장은 매년 자랐고, 분석할수록 새 이야기가 나왔다. 무엇보다 친구가 생겼다. 그동안 만날 수 없던 농부친구. 덕분에 마르쉐를 돕기 시작한 뒤로 그의 삶은 조금 달라졌다. 농장에 놀러 가고, 흙냄새 나는 밭에서 농부와 나란히 걷고, 서로의 일을 묻는 사이가 생겼다. 처음에는 데이터로 시작한 일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며 그것은 우정이 되었다. 그는 그 관계가 자신을 계속 이 일로 돌아오게 만든다고 말했다.
관계가 가장 큰 소득이라고 말한 사람은 최요한씨만이 아니었다. 문소라 사무국장 역시 그의 역할을 데이터 분석에만 한정하지 않았다. “AI 시대에 최요한씨가 아니어도 분석은 가능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는 망설임 없이 답했다.
“요한님 굉장히 중요하죠(웃음). 저희 미션이 ‘먹거리로 세상을 연결한다’인데, 요한 님은 데이터로 도움을 주실 뿐만 아니라 본인이 활동하는 다양한 네트워크와도 저희를 연결해 주세요. 그분을 통해 저희 저변이 확실히 넓어졌어요. 지금 기자님이 연락 주신 것도 그렇잖아요. 사람을 통한 연결, 네트워크의 힘과 선한 의지가 멀리 퍼지는 것. 이건 AI가 못 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일까. 그가 요즘 가장 많이 고민하는 일도 결국 ‘연결’이다. 한 사람이 한 단체를 돕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사람이 비영리의 현장과 만날 수 있는 길을 만드는 일을 준비하고 있다. 특히 젊은 사람들. 대학생들이 비영리단체와 실제로 협업해 보는 경험을 만들고 싶어 한다. 마케팅, 국문학, 빅데이터를 공부하는 대학생 연합 동아리와 일손이 모자란 비영리단체를 잇는 계획을 준비 중이다. 학생들은 실제 데이터를 만져 보고, 단체는 전문가의 가이드를 받은 결과물을 얻는다. 이를 통해 학생들은 현장의 문제를 직접 다뤄보는 경험을 얻고, 단체에는 실제 도움이 남는다.
무엇보다 젊은 사람들이 비영리의 세계와 좋은 첫 관계를 맺게 된다. 그는 그것이 생태계의 크기를 키우는 일이라고 본다. 감사하게도 그를 지켜본 사람들이 하나둘 “함께 하고 싶다.”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고. 혼자였던 일이 둘이 되고, 둘이 여럿이 된다. 한 직장인의 주말이 점점 더 많은 사람의 주말로 번지고 있다. 그가 빈틈 하나를 메운 사이, 그를 지켜본 또 한 사람이 다음 빈틈을 발견하고 들어오고 있는 셈. 그렇게 우리 사회를 조금 더 따뜻하고 안전하게 지탱하는, 하지만 보이지 않는 인프라가 한 겹씩 두꺼워지고 있다.
끝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 요한씨.

[사진5] 최요한씨(왼쪽)와 돌아가신 최요한씨의 어머니. Ⓒ최요한
“돌이켜보면 저는 어렸을 때부터 누나의 도움을 많이 받고 자랐어요. 그 뿐인가요. 힘든 환경에서도 자녀를 잘 키우려고 헌신하셨던 어머니와 아버지의 희생이 없었다면 지금의 제가 없었을 겁니다. 그래서 저는 누군가를 돕는 사람이기 전에 도움을 받는 사람입니다. 이 말을 꼭 하고 싶었어요. 아, 마지막으로 조금 특이한 제 봉사활동을 지지해주는 여자친구도 있네요. 여자친구에게도 참 고마워요. 감사합니다.”
인터뷰어 : 정재훈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하고 기록하는 일을 합니다. 제가 빚는 작은 노동이 누군가에게 즐거움이 되길 희망합니다.
2026 공익활동가주간의 〈활동가 인터뷰 프로젝트〉는 다양한 지역과 분야에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변화를 위해 노력하는 활동가들의 일과 삶 이야기를 듣고 인터뷰로 기록하는 활동을 지원합니다.
2026년에는 〈활동가, 전환을 말하다〉를 주제로 기획인터뷰를 진행했습니다. 공익활동가가 되는 데 정해진 경로는 없습니다. 교사였던 사람, 광장에서 처음 마이크를 잡았던 사람, 기존 활동의 궤적 위에서 변화를 만드는 방식 자체를 '전환'해 온 사람들도 있습니다. '공익활동'이 더 많은 사람의 선택지가 되길 바라며, 다채로운 전환의 이야기를 기록했습니다.
활동가 인터뷰 프로젝트는 아름다운재단과 지리산이음이 함께 기획·운영하고 있습니다.
[기획인터뷰 - 활동가, 전환을 말하다]
대기업 직원의 '부캐'는 어떻게 우리 사회의 인프라가 되는가
최요한 (주)SK브로드밴드 Web플랫폼개발팀 매니저 겸 자원봉사자
- 퇴근 후 주말에 농부시장 마르쉐, 점프, 아름다운 가게 등 비영리단체에 데이터분석 및 통계 업무 지원
- 어머니와의 약속으로 시작한 ‘돕는 사람을 돕는 일’..비영리 생태계의 빈틈을 메우고 성장의 연결망 되길 바라
도시의 밤이 아직 다 걷히기 전인 새벽. 서울 충정로의 한 작은 아파트에서 알람이 울린다. 알람 소리에 눈을 뜬 최요한씨는 몸을 일으켜 이불을 정리한 뒤, 책상 앞에 앉아 한 줄의 문장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쓰다 말다를 반복했던 일기. 코로나19로 세상이 멈춘 뒤, 그는 다시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아침에 한 편, 자기 전에 한 편. 생각과 감정이 문득 자신을 찾아올 때마다, 그것을 글자로 붙잡아 두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신을 조금 더 알아가는 시간을 마치면, 그는 본격적으로 출근 준비를 시작한다. 셔츠를 입고 애플워치를 차는 일련의 준비 끝에는 현관 앞에 놓인 오토바이 헬멧이 기다리고 있다. 한겨울을 제외한 봄, 여름, 가을이면 그는 모터사이클을 타고 회사로 향한다.
헬멧의 턱끈을 채우고 15분. 그는 회사에 도착한다. 서울 중구 남대문 인근에 자리한 SK브로드밴드다. 신입사원으로 입사해 이직없이 계속 다니고 있다. 직급은 매니저.
그는 Web플랫폼개발팀에서 IPTV 영화·콘텐츠 추천 시스템을 기획·분석하는 일을 하고 있다. 정보수집에 동의한 고객의 시청 데이터를 분석해 "이 고객에겐 이런 걸 추천하면 좋겠다"는 추천 로직을 설계하고, 기획안·정책서·기능 정의서를 쓰고 관리하는 일이다. 최요한씨는 그런 자신을 “데이터 분석이 가능한 기획자”라고 소개했다.
야근은 개발 일정에 따라 달라진다. 한창 개발이 진행될 때는 늦게까지 일하는 날도 있지만, 개발이 마무리 단계에 들어서면 일반 회사원과 크게 다르지 않은 생활로 돌아온다. 사실 코로나19 이후에는 야근 자체가 많이 줄었다고.
하지만 올해 1월과 2월, 회사의 개발 일정이 한창이 아니었는데도 그는 밤마다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아 데이터를 들여다봐야 했다.
회사 일이 아닌데도 왜 그렇게 바쁜 저녁을 보냈는지 묻자, 그는 한장의 PPT를 꺼내보였다.
[사진1] 최요한씨가 작업한 데이터 분석 시각화 자료 일부 Ⓒ사단법인 농부 시장 마르쉐
얼핏 보면 회사 보고서 같았지만, 자세히 보면 그의 말대로 회사일이 아닌 건 확실해보였다. IPTV 콘텐츠도, 고객 추천 로직도 아니었다. 서울 지도가 있었고, 지도 위에는 서울의 여러 자치구가 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날씨와 시간대별 흐름을 겹쳐놓은 그래프가 있었으며, 그 위에 숫자들이 빼곡히 들어찬 상관관계 표도 있었다. 마지막 장에는 전년보다 매출이 오른 팀과 줄어든 팀이 나뉘어 표시돼 있었다.
[사진2] 최요한씨가 작업한 데이터 분석 시각화 자료 일부 Ⓒ사단법인 농부 시장 마르쉐
농부시장 마르쉐는 도시의 한복판에서 농부와 요리사, 수공예가와 소비자가 직접 만나는 직거래장터다. 단순히 농산물을 사고파는 시장이라기보다, 누가 어떤 방식으로 농사를 짓고, 음식을 만들고, 계절의 재료를 다루는지 이야기가 오가는 자리다. 생산자는 자신의 이름을 걸고 농산물과 먹거리를 내놓고, 소비자는 그 물건이 어디서 어떻게 왔는지를 들으며 장을 본다.
최요한씨는 바로 그 이야기들을 숫자로 확인하고 드러내는 일을 하고 있었다. 어느 지역에서 사람들이 찾아오는지, 날씨와 시간대에 따라 매출은 어떻게 달라지는지, 어떤 팀의 매출이 오르고 줄었는지. 시장이 끝난 뒤 남은 숫자들을 모아, 그는 장터의 흐름을 데이터로 읽고 있었다.
부업으로 하시는 일인 거냐고 묻자, 그는 웃으며 말했다.
그렇다. 한창 개발도 아니었던 올해 1월과 2월. 그가 퇴근 후 집에서 구글 시트를 붙잡고 씨름한 것은 회사 일이 아니었다. 누가 시킨 일도 아니었고, 돈을 받고 하는 아르바이트도 아니었다.
매년 2월, 농부시장 마르쉐에서는 겨울 계절모임이 열린다. 농부팀, 요리팀, 수공예팀 등 한 해 동안 시장을 함께 꾸려온 출점팀들이 한자리에 모여 지난 시간을 돌아보고, 다음 시장을 준비하는 자리다. 일종의 결산과도 같은 그 모임에서 공유할 리포트를 만들기 위해, 최요한씨는 1월부터 2월까지 저녁마다 데이터를 열었던 것이다.
[사진3] 2025년 2월, 최요한씨가 농부시장 마르쉐의 겨울 계절모임에 참석해 지난해 활동들을 데이터로 정리해 발표하고 있다. Ⓒ사단법인 농부시장 마르쉐
데이터는 우리가 보는 보고서처럼 처음부터 보고서처럼 정돈돼 있지 않다. 현장의 기록은 언제나 조금씩 어긋나 있었다. 이름 표기가 다른 팀도 있었고, 빠진 값도 있었고, 같은 항목이 다른 방식으로 적힌 경우도 있었다. 최요한씨는 그런 자료를 하나씩 맞추고, 지우고, 다시 채우며 분석 가능한 형태로 바꿔갔다.
그렇게 정리한 숫자들은 다시 그래프가 됐고, 표가 됐고, 지도 위의 색이 됐다. 장터를 지키던 사람들의 감각은 데이터로 번역됐다. “이 시장은 어떤 날 잘되는가”, “누가 어디서 찾아오는가”, “무엇이 달라지고 있는가” 같은 질문들이 비로소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문소라 마르쉐 사무국장은, 그가 합류한 2023년의 전과 후를 비교하며 이렇게 말했다.
데이터는 시장이 어디에 힘을 써야 하는지도 알려주었다. 농부들은 이제 어느 시간대에 매출이 오르는지, 어떤 품목을 손님들이 고르는지를 숫자로 보고 그날을 준비한다. 새 출점 팀이 첫 시장에서 유독 고전한다는 분석은 신규 팀을 위한 온보딩 교육으로 이어졌고, 국립극장에서 농부시장이 열릴 때, 유독 먼 동네 손님이 특히 많았던 이유가 ‘주차’에 있다는 발견은 이후 시장을 알릴 때 주차 정보를 주요하게 내세우는 변화로 이어졌다.
농부시장 마르쉐가 그동안 이야기로 이야기로 전해온 가치에 숫자와 데이터라는 근거가 더해진 것 역시 중요한 변화다. 문소라 사무국장은 이렇게 말했다.
[사진4] 농부시장 마르쉐의 데이터 분석 및 시각화 작업 결과를 설명하는 최요한씨. Ⓒ정재훈
퇴근 후의 밤과 주말을 쪼개 데이터를 정리하고, 다시 검산하고, 그래프로 옮긴 최요한씨의 무급 부업은 그렇게 마르쉐의 빈틈을 메웠다. 그가 데이터로 손을 보탠 곳은 마르쉐만이 아니다. 대학생들에게 통계를 가르치는 사단법인 점프에서도, 아름다운가게에서도 그는 같은 방식으로 일손을 더해 왔다.
그런 최요한씨를 우리는 흔히 ‘자원봉사자’라고 부른다. 다만 정작 요한씨는 다른 표현을 더 좋아한다며 이렇게 자신을 소개했다.
어머니와의 약속, 아니 어머니가 내게 남겨주신 선물
이유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돕는 사람들을 돕고 싶은 이유 말이다. 한참 생각에 잠긴 요한씨 입에서 나온 단어는 뜻밖이었다. 바로 어머니였다.
어느 날 어머니를 모시고 병원에서 돌아오던 길이었다. 어머니가 문득 물었다. “너 회사 그만두면 뭐 할 거야?”
그는 대답했다. “나는 돕는 사람을 도와줄 거야.”
어머니는 다시 물었다. “불쌍한 사람들을?”
그는 아니라고 했다. “주변을 둘러보니까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돕는 사람들은 생각보다 많아. 그런데 그런 사람들 보면 자기 자신을 너무 많이 희생하면서 버티는 것 같더라고. 나는 그런 사람들을 돕고 싶어. 누군가를 돕는 사람들을, 내가 뒤에서 좀 도와주는 사람이 되고 싶어.”
며칠 뒤 저녁 식탁에서 어머니가 다시 그 이야기를 꺼냈다.
“요한아, 너 그렇게 누구 도와주러 갈 거면 나도 데리고 가라.”
밥상 위에 잠시 놓였다가 사라질 수도 있었던 말이었다. 그러나 그 말은 오래 남았다.
2022년 10월 15일, 요한씨가 아버지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어머니가 갑자기 쓰러졌다는 소식이었다. 뇌출혈이었다. 작별 인사를 나눌 시간도 없었다.
장례를 치른 뒤에도 그는 한동안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러다 어머니에게 했던 말들을 하나씩 떠올리기 시작했다. 학교를 세우겠다, 교회를 세우겠다 같은 약속도 있었다. 긴 시간과 큰 준비가 필요한 약속들이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 지킬 수 있는 약속도 있었다. 바로 돕는 사람을 돕는 일이었다. 큰돈이 없어도, 회사를 그만두지 않아도, 자신이 가진 시간과 기술로 시작할 수 있는 일.
어머니와 식탁 위에서 나눴던 말은 그때부터 더 이상 막연한 다짐이 아니었다. 먼 미래의 약속이 아니라, 지금의 삶 안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이어갈 수 있는 일이 됐다. 최요한씨는 그걸 "어머니가 내게 주신 선물"이라고 표현했다.
2023년 3월 15일, 그는 마르쉐 사무실을 찾아갔다.
그렇게 사무실에서 농부시장 마르쉐의 이보은 대표를 만났다. 설명을 들은 이 대표는 반가워했다. 실제로 그곳에는 매출 기록이 있었지만, 주로 결산용으로 정리돼 있었다. 그 안에서 시장 운영의 단서를 읽어 내는 일은 충분히 시도되지 못한 상태였다. 최요한씨가 보기에 그곳에는 자신이 메울 수 있는 빈틈이 있었다.
처음에는 한 시즌이면 끝날 줄 알았다. 그러나 일은 계속됐다. 시장은 매년 자랐고, 분석할수록 새 이야기가 나왔다. 무엇보다 친구가 생겼다. 그동안 만날 수 없던 농부친구. 덕분에 마르쉐를 돕기 시작한 뒤로 그의 삶은 조금 달라졌다. 농장에 놀러 가고, 흙냄새 나는 밭에서 농부와 나란히 걷고, 서로의 일을 묻는 사이가 생겼다. 처음에는 데이터로 시작한 일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며 그것은 우정이 되었다. 그는 그 관계가 자신을 계속 이 일로 돌아오게 만든다고 말했다.
관계가 가장 큰 소득이라고 말한 사람은 최요한씨만이 아니었다. 문소라 사무국장 역시 그의 역할을 데이터 분석에만 한정하지 않았다. “AI 시대에 최요한씨가 아니어도 분석은 가능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는 망설임 없이 답했다.
그래서일까. 그가 요즘 가장 많이 고민하는 일도 결국 ‘연결’이다. 한 사람이 한 단체를 돕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사람이 비영리의 현장과 만날 수 있는 길을 만드는 일을 준비하고 있다. 특히 젊은 사람들. 대학생들이 비영리단체와 실제로 협업해 보는 경험을 만들고 싶어 한다. 마케팅, 국문학, 빅데이터를 공부하는 대학생 연합 동아리와 일손이 모자란 비영리단체를 잇는 계획을 준비 중이다. 학생들은 실제 데이터를 만져 보고, 단체는 전문가의 가이드를 받은 결과물을 얻는다. 이를 통해 학생들은 현장의 문제를 직접 다뤄보는 경험을 얻고, 단체에는 실제 도움이 남는다.
무엇보다 젊은 사람들이 비영리의 세계와 좋은 첫 관계를 맺게 된다. 그는 그것이 생태계의 크기를 키우는 일이라고 본다. 감사하게도 그를 지켜본 사람들이 하나둘 “함께 하고 싶다.”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고. 혼자였던 일이 둘이 되고, 둘이 여럿이 된다. 한 직장인의 주말이 점점 더 많은 사람의 주말로 번지고 있다. 그가 빈틈 하나를 메운 사이, 그를 지켜본 또 한 사람이 다음 빈틈을 발견하고 들어오고 있는 셈. 그렇게 우리 사회를 조금 더 따뜻하고 안전하게 지탱하는, 하지만 보이지 않는 인프라가 한 겹씩 두꺼워지고 있다.
끝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 요한씨.
[사진5] 최요한씨(왼쪽)와 돌아가신 최요한씨의 어머니. Ⓒ최요한
인터뷰어 : 정재훈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하고 기록하는 일을 합니다. 제가 빚는 작은 노동이 누군가에게 즐거움이 되길 희망합니다.
2026 공익활동가주간의 〈활동가 인터뷰 프로젝트〉는 다양한 지역과 분야에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변화를 위해 노력하는 활동가들의 일과 삶 이야기를 듣고 인터뷰로 기록하는 활동을 지원합니다.
2026년에는 〈활동가, 전환을 말하다〉를 주제로 기획인터뷰를 진행했습니다. 공익활동가가 되는 데 정해진 경로는 없습니다. 교사였던 사람, 광장에서 처음 마이크를 잡았던 사람, 기존 활동의 궤적 위에서 변화를 만드는 방식 자체를 '전환'해 온 사람들도 있습니다. '공익활동'이 더 많은 사람의 선택지가 되길 바라며, 다채로운 전환의 이야기를 기록했습니다.
활동가 인터뷰 프로젝트는 아름다운재단과 지리산이음이 함께 기획·운영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