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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공익활동가주간][활동가, 전환을 말하다] '공중전' 끝내고 '지상전'으로 … "우리는 고이지 않고 흘러야 하니까" - 부산 영도 '심오한연구소' 엄창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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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인터뷰 - 활동가, 전환을 말하다]

'공중전' 끝내고 '지상전'으로 … "우리는 고이지 않고 흘러야 하니까" 
부산 영도 '심오한연구소' 엄창환이 통과해 온 청년·지역·공동체의 시간



[편집자주]


대안적인 사회를 꿈꾸는 이들에게 ‘청년’은 늘 시대의 감각을 선도하는 주체였습니다. 부산 영도에 위치한 심오한연구소 엄창환 연구원은 청년기본법 제정 운동을 이끌고 전국청년정책네트워크 초대 대표를 지내며 대한민국 청년 정책의 패러다임을 중앙 무대로 밀어 올린 ‘퍼스트 펭귄’입니다. 한 달의 1/3을 KTX 위에서 보내며 청와대 간담회에서 송곳 같은 발언으로 주목받았던 그가 돌연 활동의 그라운드를 부산 영도의 골목길로 옮겼습니다. 제도화의 정점에서 골목길의 일상으로 내려와 여전히 '연결의 가능성'을 실험하고 있는 그의 우직한 활동 궤적과 미래 기획을 들어봤습니다. 5월 31일 부산 영도 심오한집에서 나눈 그와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엄창환은 자신을 "감정이 잘 안 드러나는 사람"이라고 했다. 인터뷰 내내 그는 자신의 선택을 극적인 결단이나 전환으로 포장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게 내 생각이었는지 부모님 생각이었는지 잘 모르겠다"거나 "그 연결조차도 내가 의도한 건지 사실 모르겠다"는 식의 유보를 자주 덧붙였다. 청소년기부터 지금의 영도 활동까지를 되짚는 이 대화는, 그래서 한 사람의 신념이 어떻게 만들어졌는가에 대한 단정보다, 신념이 만들어지는 과정의 우연과 검증에 대한 이야기에 가깝다.



Q. 청소년기에는 어땠나요. 활동가들은 어릴 때 어떤 계기가 있는 경우가 많던데요.

군대 갔다 오기 전까지는 사실 사회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어요. 자동차 회사에 들어가려던 것 말고는 아는 것도, 관심도 없었죠. 그저 신나게 놀았습니다. 시민사회와 연결된 경험도 없었고요. 굳이 연관을 찾자면 아버지가 노동조합 운동을 하셨다는 정도인데, 그것도 직접 들여다본 건 아니예요. 알게 모르게 영향이 있었을지는 모르겠네요.



엄창환은 아버지의 일화 하나를 기억으로 꺼냈다. 노동조합 지부장·위원장들이 서울에 모여 집회를 하기로 한 날이었다. 아버지가 혼자 운전해 출발했는데, 집회를 앞두고 위원장·지부장들이 삭발을 한 상태였다. 부산을 빠져나가는 톨게이트에서 경찰은 차에 홀로 탄, 삭발한 남성 운전자들을 통과시키지 않았다. 결국 아버지는 집으로 돌아와 가족에게 짐을 싸게 했고, 초등학생이던 그는 어머니·동생과 함께 차를 타고 서울 큰집으로 올라가 일주일 동안 학교를 가지 않고 지냈다. 다행히 그에겐 즐거운 기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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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오한집 대문 앞에서 반려견 꾸꿀(12)과 함께.


기계공학도가 마주한 세상의 틈새, 봉사활동이 바꾼 궤적



전공은 기계공학이었다. 그는 "기계를 만드는 기계", 즉 공작기계를 다루고 싶어 했다. 공학자·과학자를 동경했고 이과 계열로 진학했다. 그런 그가 자신의 방향을 처음으로 의심하게 된 것은 전공 수업이 아닌, 군 전역 후 우연히 시작한 한 번의 봉사활동에서였다.



Q. 봉사활동은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요?

대학 1학년 때 ‘유스호스텔’이라는 여행 동아리에 들어갔는데, 입단 원서가 300여 부 들어올 정도로 ‘노는’ 동아리였거든요. 아르바이트를 해서 배낭을 사고 그거 메고 여행만 다녔죠. 그러다 2005년에 입대해 2007년에 전역했는데, 복학해 보니 동아리들이 대부분 침체돼 있더라고요. 놀긴 놀아야겠는데(웃음), 그때 눈치를 덜 보고 놀 수 있는 방법으로 찾은 게 봉사활동이었어요.



그가 처음 한 봉사는 KT&G의 '천사메신저'라는 인터뷰 봉사였다. KT&G가 각 지역 복지관과 연계해 환자를 후원하는 사업이 있었고, 그 수혜자를 인터뷰해 기관지에 싣는 일이었다. 여행을 다니며 글도 썼고 DSLR 카메라도 있어서 해볼만 하겠다 싶었다. 마침 집 근처 복지관에 수혜자가 있어 신청했다.


그러나 막상 약속한 날, 인터뷰는 성사되지 못했다. 인터뷰 대상자는 수술 중 다른 질병이 발견돼, 치료를 다 마치지도 못하고 중환자실로 옮겨진 상태였다. 그저 묵묵히 죽음을 기다리는 것처럼 보이는 인터뷰 대상자와, 눈물 밖에 흘릴 수 없던 그의 가족. 인터뷰를 위해 방문한 엄창환이 마주한 장면이었다.



Q. 그날 인터뷰는 결국 어떻게 됐나요.

이후 담당 복지사와 세 시간 넘게 이야기를 나눴어요. 원래 경찰을 준비하던 유단자였는데, 사회를 의롭게 만들고 싶어 사회복지사로 전향한 분이셨죠. 그분이 제게 요즘의 오디션 프로그램 같은 경쟁 구조의 후원 시스템을 설명해 주더라고요. 이 후원금을 받기 위한 경쟁에서 떨어지면 환자를 죽게 내버려 두어야 하는 것이 우리나라 사회복지의 현실이라는 거였습니다. 그날 처음 듣는 단어와 사회 구조의 문제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어요. 

집에 돌아와 정리해보니, 기업 기관지에 좋게 써줄 말이 아무 것도 없더라고요. 기업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어 사실대로 말했더니 그냥 느끼는 대로 적어달라고 하더군요. 아마 실리지 않았을 거에요. 문화상품권과 봉사시간만 받았죠. 



이 일에는 짧은 후일담이 붙는다. 그는 복지관에서 그 환자의 딸을 만났다. 꿈이 사진작가라고 해서, 다음에 카메라를 가져가 직접 사진을 찍게 했다. 그런데 복지사에게 들은 이야기는 전혀 달랐다. 그 아이의 꿈은 사진작가가 아니라고. 만나는 사람이 가진 물건이나 상황에 맞춰 이야기를 바꿀 뿐, 정작 자기 꿈은 없는 것이라고. 꿈을 상상하기 어려운 상태라는 뜻이었다.


이 경험 이후 그가 보던 세상이 달라졌다. 그는 그 변화를 전공 수업에서 가장 먼저 체감했다.



A. 산업공학 수업이었던 것 같아요. 컨베이어벨트에서 TV를 조립한다고 하면, 노동자가 부품을 붙이는 동작을 초 단위로, 소수점 두 자리까지 계산하거든요. 생산성을 높이려면 벨트가 빨리 지나가야 하니, 부품과 용접 기계를 어떻게 배치할지 고민하는 게 산업공학이에요. 기계공학의 정수는 결국 자동화거든요. 예전엔 그 수업을 들으면서 한 번도 그렇게 못 느꼈는데, 이상해 보이더라고요. 그때가 IMF 외환위기 이후라 청년 실업이 터지고 '고용 없는 성장' 얘기가 나오던 시기였어요. 공장을 잘 설계해 자동화 설비를 만들면 그게 좋은 세상이 되는 게 맞나, 그럼 그 일자리는 어디로 가나. 그런 고민이 들더라고요. 봉사활동 한 번 잘못한 탓에(웃음) 이대로는 안되겠다 싶었던 거죠.



진로에 대한 회의는 곧 대안 탐색으로 이어졌다. 그는 외국 사례를 뒤지다 사회적경제와 협동조합을 알게 됐다. 사회적기업 인증제도가 자리 잡기 전이었다. 유럽 어느 도시에서 주민들이 모여 동네 건물을 사들이고 지역 부동산 가격을 통제하는 사례를 보며, "사람들이 같이 잘 살 수 있는 방법이 있는 상태에서 과학도 발전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됐다.



Q. 처음부터 사회적기업 창업을 하려 했던 건가요?

대학 때는 그랬어요. 게시판에 글을 올려 관심 있는 사람을 모으고, 소셜벤처 창업대회도 준비했고요. 그러면서 전공대로 졸업해 취업하는 것 말고 다른 걸 해야겠다는 생각이 굳어졌고, 그 때문에 부모님과 크게 다퉜어요. 아버지가 자동차 회사에 다니고 계셨고, 저도 그 진로를 원하고 있다고 여겼으니까. 다만 어머니보다 아버지가, 노동조합 운동을 하셨던 분이라 그런지 조금 먼저 이해해 주시긴 하셨어요.



그렇게 만든 단체가 '지구인'이다. 2012년 졸업 전후로 활동했는데, 사실 하고 싶었던 건 기업이 아니라 중간지원조직 같은 것이었다고 그는 회고한다. 아이템을 가지고 창업하는 이야기보다, 시스템의 가운데에서 무언가를 만들고 자원을 연결하고 싶었던 것이다. 몇 년간 활동하며 그는 "이건 민간에서 청년들이 모여 할 수 있는 수준의 일이 아니다"라는 걸 알게 됐다. 마침 서울에선 박원순 시정의 서울혁신파크가 만들어지고 청년허브 같은 기관이 생기던 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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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배워 다시 내려오다



Q. 이후 서울로 올라가 사회적경제 중간지원조직(서울시사회적경제지원센터)에서 일하시게 됐어요. 서울에서의 경험은 어땠나요?

재미있었어요. 필요하다고 생각한 일을 내 돈 들이지 않고 공적 자원으로, 임금까지 받으며 할 수 있었으니까요. 한국 사회에 사회적경제 지원 구조를 막 만들어 가던 시점이라 새로 해야 할 것도 많았어요. 기반 조성 사업, 사회적경제 동아리 지원, 사회적경제 제품을 모은 마켓몰과 공공조달 기반 만들기, 청년혁신활동가 사업 같은 걸 했죠. 



다만 그는 처음부터 "배워서 다시 지역으로 내려가자"는 생각이었다. 함께 활동하던 친구들에게도 그렇게 공언했다. 서울에서 결혼을 준비하며 그와 배우자(보라, 현 심오한연구소 대표)는 같은 결론에 이른다. 서울은 사람 살 만한 곳이 아니라는 것. 두 사람 모두 시민사회 영역에서 나쁘지 않은 직장을 가지고 있었는데도, 서울에서 잘 살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A. 독일 탐방을 가서 100년 넘은 협동조합 이사들에게 "어떻게 협동조합을 만들게 됐느냐"고 물으면 질문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거예요. 그분들에겐 그게 옛날부터 당연한 것이었으니까. "돈 벌려면 왜 주식회사를 만드냐"고 묻는 것과 똑같은 질문인 거죠. 어떤 도시의 50대 기업 중 30개가 협동조합이면, 거기 연결돼 사는 게 곧 삶의 안정성이 높아지는 일인 거잖아요. 그렇다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대안적 경제조직 자체보다, 그걸 떠받칠 수 있는 시민 조직이 먼저 있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어요.



여기서 그는 자신의 활동을 관통하는 단어 하나를 처음 꺼냈다. 두 사람이 부산으로 내려오기로 한 배경에도, 이후 영도에서의 모든 시도에도 그 단어가 깔려 있었다. 그는 부산에서 활동하던 때부터, 사회적경제와 청년이라는 두 관심사를 들고 전국을 다니며 사람을 만났다. 수소문해 찾아가고, 소개받아 만났다. 그렇게 만난 이들을 한자리에 모으고 싶어 연 모임에는 전국에서 30~40명이 찾아왔다. '청춘여락(靑出與樂)'이라는 이름으로, 한 달에 한 번씩 각자의 지역을 돌며 만나는 활동이었다. 배우자 심보라도 그 무렵 만난 동료였다.

2015년, 두 사람은 일을 그만두고 부산으로 내려온다. 어디로 갈지는 정하기 어려웠다. 원래는 더 시골로, "여지가 많은 넓은 땅"으로 가고 싶었지만 연고가 없었다. 그가 아는 곳은 부산, 배우자가 아는 곳은 서울뿐이었다. 결국 부산에서도 한적한 영도로 정했다.



Q. 부산으로 돌아온 데에는 약속의 의미도 있었다고 들었어요.

대학 때부터 이래저래 활동을 하며 부끄러운 실수도 있었거든요. 내가 내뱉은 말을 지키지 못해 생긴 문제 같은 것들이요. 그래서 "부산으로 다시 돌아오겠다"고 한 말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의지가 강한 말일수록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걸 그때부터 중요하게 여기게 되기도 했고요.



집은 단순한 거처가 아니었다. 그는 청춘여락 시절, 사람을 만나려 해도 모일 공간이 없어 늘 자원을 구하러 다녔던 경험을 떠올렸다. 공간이 있어야 사람을 모으고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봤다. 그래서 처음부터 나눠 쓸 수 있는 큰 공간을 찾았다. 화장실이 세 개, 부엌이 두 개인 집이었다. 1층을 누구든 쉬어갈 수 있는 공용 공간으로, 2층은 신혼집과 사무실로 꾸몄다. 한 켠의 방이 아니라 꽤 넓은 공간을 함께 내어주는 선택은, 든든한 동지 아내와 함께였기에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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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오한집 2층에서 3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옆에 마련된 작은 다락방.



청년기본법과 청와대, 그리고 '연결의 가능성'



부산에 자리 잡은 뒤에도 그의 활동은 전국을 향했다. 2017년 4월 16일 창립총회를 연 전국청년정책네트워크(전청넷)다. 한 달에 열흘은 서울에 있었다. 덕분에 ‘코레일 포인트 부자’가 됐었다며 웃는다.



Q. 전청넷 대표는 어떻게 맡게 됐나요? 몇 번 만나진 못했지만 창환 님을 보면 굉장한 리더십이 있다고 느껴지는데, 어릴 때 반장이나 회장을 많이 했나요?

한 번도 안 했어요(웃음). 전청넷은 만들어진 과정부터 재미있어요. 한창 전국에서 청년들이 모이던 무렵, 서울에서 전국 모임이 있어 초대를 받았는데, 마지막에 다 같이 소회를 나누다가 "전국적으로 계속하려면 일을 나눠서 하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했거든요. 그렇게 실무를 같이 나누게 되었고, 시간이 흘러 함께하는 동료들과 단체를 만들게 됐는데, 첫 대표를 제비뽑기로 뽑았어요. 기성 시민사회의 대표성 행사 방식에 문제의식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그만 그 제비뽑기에서 제가 뽑힌 거예요. 물론 처음엔 각자의 부담을 덜기 위해 단체 등록을 위한 명의자 정도로만 역할을 규정했지만요. 후에는 대표성을 ‘위임’받았다는 확신을 조직 안에서 더 강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되면서, 현재는 선출직으로 전환된 상태예요. 



그가 청년정책에 매달린 이유는 분명했다. 그에게 청년정책은 청년 문제 해결의 수단을 넘어, 대안적 사회를 만드는 수단이었다.



Q. 왜 청년 문제를 핵심으로 봤던 걸까요?

사회에 홀로 서는 때가 청년기인데, 이 시기가 너무 불안해요. 이 시기의 삶을 안정적으로 만들어야 한 사람이 노년까지 겪을 문제가 줄어든다고 봤어요. 또 청년은 기성화되지 않은 감각으로 사회를 볼 수 있는 집단이기도 하잖아요. 그래서 저는 그때도 지금도 한국 사회에서 풀어야 할 핵심 문제를 청년 문제라고 생각해요. 지금 같은 사회를 반복하지 않기 위한 최우선 조치라는 의미에서요.



그는 매년 들여다보는 지표로 노년부양비를 꼽았다. 생산가능인구 대비 노인 인구 비율인데, 지표를 보기 시작한 이래 한 번도 좋아진 적이 없다고 했다. 현재 생산가능인구 약 3~4명이 노인 1명을 부양하는 구조인데, 통계청 추계상 2070년경에는 0.9대 1로 역전된다는 것이다. 한 명이 벌어 한 명을 부양하는 사회는 지금 구조로 유지될 수 없다고 그는 말했다. 이런 데이터 기반의 전망은 이과 출신이라는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 수식으로 설명되지 않는 사회 문제가 많지만, 적어도 근거와 팩트를 확인하려 노력하는 면모 중 하나다. 


그의 이름이 전국에 알려진 것은 2019년 청와대 시민사회단체 간담회에서였다. 문재인 대통령 앞에서 그는 정부가 청년 문제를 인식하는 방식이 단편적이라며, 청년 문제를 바라보는 관점과 해결방법을 달리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이 발언은 주요 일간지 1면에 실렸다.



당시 간담회 이후 그를 인터뷰한 기사 | “제 눈물, 정치적 이용하지 마세요” 청년대표 인터뷰 [바로가기]




Q. 2019년 문재인 대통령 정초 시민사회 간담회에서 청년 정책의 '소비' 문제를 지적해 조중동 등 주요 언론 1면에 실리며 큰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당시 상황을 복기해 주신다면요?

그 자리에 가기까지 정말 지난한 과정이 있었어요. 전청넷, 청년유니온, 민달팽이유니온 같은 동료 단체들이 청년 정책의 전국화를 위해 토론회며, 지방정부협의회 미팅이며,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하던 때였습니다. 

가장 공고했던 벽은 행정의 칸막이였죠. 새로운 의제를 담당할 부처가 없어 청년정책을 두고도 “이건 어디 일이냐”며 1년 가까이 떠돌았어요. 똑같은 이야기를 수십 번씩 반복하며 겨우 공감대를 이뤘는데 정작 책임지고 추진할 주체가 없는 공전 상태가 지속됐습니다. 

그러던 차에 시민사회 간담회가 잡혔어요. 저는 열이 오를 대로 오른 상태였고요(웃음). 사실 눈앞에 있던 대통령이나 정부에 대한 문제제기라기보다 “사회에 정말 답이 없다”는 절망감, 답답함의 표현이었어요. 넘어야 할 이해관계자와 기득권의 벽이 너무 두터웠으니까요. 청년기본법 제정 운동을 하며 전국에서 1만여 명의 서명을 받았지만, 판을 흔들려면 10만 명, 100만 명을 모아야 하나 라는 생각과 함께, 청년단체 여력으로 그게 가능한가, 이런 여러 생각이 들었죠.



그날 현장에서 그의 발언으로 막막했던 벽 앞에 물꼬가 트인다. 간담회 직후 부산으로 내려가는 기차 안에서 인터뷰 섭외가 쏟아졌고, 그는 일주일 동안 집에 가지 못한 채 언론 대응팀을 꾸려야 했다. 가장 인상에 남은 건, 전화 통화를 하며 울먹이던 방송 작가들이었다. 


정치권과 언론의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지만, 그 이면엔 대출을 받아 활동비를 충당해야 하는 고단한 민간 활동가의 현실도 있다. 자부심과 사회적 인정만으로는 해소되지 않는 재정 압박과 소진의 연속. 



Q. 활동 과정에서 겪은 경제적 어려움이나 번아웃은 어떻게 버텼나요?

"못해먹겠다"고 나자빠진 적도 있어요. 개인 사정이 어려워지면 그렇게 되더라고요. 그때 버틴 건, 제가 좋아하는 '연결의 가능성'이라는 말로 설명할 수 있을 거 같아요. 세상에 혼자 하는 일은 없잖아요? 요즘 보면 "내가 다 만들었다"는 사람이 많은데, 진짜 현장에 있었다면 그런 말을 쉽게 못 하죠. 알지 못하는 누군가들의 수고가 다 모인 일이니까요. 제 활동에 자기 월급을 떼어 보탠 동료들이 있었고, 운도 좋았어요. 제비뽑기로 대표가 됐고, 청년정책을 처음 말한 사람 중 하나라는 위치에서 받은 혜택이 분명 존재하거든요.


그는 이 위치를 ‘초기 개척자’라는 표현으로 정리하면서도, 그 경험을 일반화하는 데는 선을 그었다. 먼저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등 떠밀리든 어떤 상황에서든 그 위치에 있었기에 받은 혜택"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청년운동을 하는 이들에게 자기 경험을 빗대 조언하기는 어렵다고 했다. 옆을 지켜준 배우자 그리고 함께 저렴하게 집을 사 둔 개인적 조건이 없었다면 버티기 어려웠을 거라는 말도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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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러설 때를 아는 일 - 세대교체와 자기 객관화



엄창환은 2020년 5월, 전청넷 대표를 그만뒀다. 이유는 하나였다.



Q. 청년기본법이 통과된 직후 전청넷 대표직을 내려놓으셨습니다. 한창 주가를 올리던 시기에 사퇴를 결심한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만류도 많았을 거 같은데요.

전청넷 첫 대표를 제비뽑기로 뽑으려 했던 시도처럼, 청년단체 대표성은 누군가의 독점이 아닌 계속 흐르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당시 전청넷은 청년기본법 청년 연령을 29세로 하자고 주장하기도 했고요. 청년 연령을 넘어서는 사람이 대표를 맡고 있는 건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단체의 안정성을 위해 연임해야 한다는 반대도 많았지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대표 교체가 매번 유보될 우려도 있어 정리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습니다.

전청넷을 만들던 시기에 우리가 하던 운동이 '청년세대 운동'인가 '밀레니얼 세대 운동'인가에 대한 논쟁도 있었습니다. 밀레니얼 세대 운동이라면 우리가 40대, 50대가 되어서도 그 운동을 이어가는 것이고, 청년세대 운동이라면 연령기가 지나면 물러나 다음 청년들이 주도하게 해야 합니다. 단체의 지향을 따라 결정한 것이죠.



Q. 당사자 운동은 당사자가 해야 한다는 말에 대한 동의일까요?

당사자를 존중하고 앞세워야 하는 건 맞아요. 하지만 그 문제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같이 다뤄야 하죠. 다른 운동도 마찬가지잖아요. 다만 우리 사회는 저연령층을 당사자로 하는 운동에서, 기득권을 내려놓는 방법을 해보지 않아서 어려운 것 같아요. 시간이 지날수록 저연령층은 전체 세대 구간에서 소수일 수밖에 없으니, 적어도 동등한 수준까지는 목소리를 낼 수 있게 해야 합니다.



그는 청년 문제를 고립된 문제로 보지 않았다. "청년 문제는 청년기 부모의 문제이기도 하고 노인 문제와도 연결되며, 현재 중장년·노인 문제의 시작점"이라는 것이다. 자신이 노인이 됐을 때 지금과 같은 사회라면, 청년도 노인도 함께 집회하고 있을 거라는 말로 그는 이 연결을 설명했다. ‘연결의 가능성’이라는 그의 단어가, 세대 사이의 구조를 잇는 말이기도 한 셈이다.

대표직 사퇴 이후 청년 정책에 대한 발언을 아끼던 그는 최근 다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청년단체들은 어렵게 세대교체를 하며 현장 대응을 위해 노력하는데, 청년정책 관련 다른 영역에서는 청년 당사자를 존중하는 모습이 줄어들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는 '청년정책 패러다임 전환'이라는 구호가 여전히 선언에 그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려를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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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터로서의 지역, 관계망이라는 문제



부산으로 돌아오며 그가 기대한 건 골목과 동네였다. 사람들과 어울리며 자연스럽게 지역을 이야기하고 함께 돌아보는 것, 이른바 풀뿌리 운동이다.



Q. 청년기본법까지 만들었는데, 무엇이 부족하다고 봤던 건가요.

전청넷이 처음 크게 열었던 행사의 슬로건이 "배운 대로 사는 세상은 끝났다"였어요. 정규직 취업, 결혼, 출산, 내 집, 고급 자동차라는 정설로서의 삶의 룰이 끝났으니, 청년정책으로 한국 사회의 패러다임을 바꾸자는 거였죠. 그런데 법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니 이것만으론 쉽지 않겠더라고요. 결국 지역사회에서부터 사람들을 설득해 나가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그는 같은 일을 층위를 바꿔갔다. 운동 현장의 표현을 빌리면 중앙 단위의 '공중전'과 지역 단위의 '지상전'을 오갔고, 부산청년센터장을 맡으며 광역 단위도 경험했다. 하지만 그가 정말 하고 싶었던 건 2015~2016년에 구상한, 기초 단위 지역에서부터 다시 조직을 만들어 작은 모델을 세우는 일이었다. 


대화는 그가 최근 부쩍 자주 말한다는 주제로 옮겨갔다. 사회적 관계망이다. 그가 경험한 첫 관계망은 청춘여락이나 전청넷 같은 동료 집단이었다. 그는 이 모임을 "해우소"라고 불렀다. 한 지역에서 기득권의 벽에 부딪혀 좌절한 청년이 모임에 와 보면,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다들 그러고 있더라는 것이다. 위로가 되고, 때때로 다른 지역을 벤치마킹하는 학습의 장이 됐다.


데이터도 이를 뒷받침한다고 그는 말한다. 청년 실태조사를 보면 지역을 떠나는 이유 1·2순위는 일자리와 주거 문제이지만, 떠나고 싶으냐고 물으면 70~80%는 계속 살고 싶다고 답한다. 그 이유는 대부분 관계망과 관련돼 있다. 다만 그는 "청년 문제의 핵심은 여전히 일자리"라는 입장도 분명히 했다. 20년을 지켜보니 기존 방식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는 판단이 섰을 뿐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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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지 청년이 동네에 스며드는 법



낯선 지역에서 새로운 일을 벌이면 응원만 받는 것은 아니다. "밖에서 들어온 애들"이라는 시선이 따라붙기도 한다. 그러나 엄창환은 이 대목에서도 "운이 좋았다"고 했다.


Q. 외부에서 들어온 청년 활동가들이 지역에 정착할 때 기존 주민이나 커뮤니티와의 갈등을 겪는 경우가 많습니다. 영도에서는 어땠나요?

현실적인 팁을 드리자면, 지역 어르신들에게 인정받는 수식어는 '결혼한 신혼부부'라는 타이틀입니다(웃음). 미혼 청년 혼자 왔을 때보다 어른으로 대접해 주는 게 확실히 있습니다. 신혼부부가 영도로 이사 와서 집을 고친다니 옆 동네까지 소문이 나서 구경 오실 정도였으니까요.

당시 지역 어르신들에게 청년의 모습은 '길거리에서 슬리퍼 끌고 다니며 담배 피우는 사람' 같은 것이었습니다. 동네에 애 우는 소리 안 난다고 애 낳으면 같이 키워주겠다고 하시면서도, 정작 청년에 대한 이야기는 어디선가 봤던 단편적인 모습으로만 판단을 하고 계셨던 거죠. "회장님, 저 청년들이 이 동네에서 잘 정착해야 결혼도 하고 애도 낳죠"라고 받아치기도 합니다만, 어쨋든 '계속 살 거 같은 애들'이라는 신뢰를 주는 데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견제나 갈등이 아주 없지도 않았다. 그러나 도움을 준 사람이 훨씬 많았다고 그는 강조했다. 2024년 그가 꾸린 영도 지역 청년 네트워크 ‘영도로 연결될지-도’의 1주년 행사가 대표적이다. 청년 회원의 부모가 운영하거나 아는 가게 30여 곳에서 후원을 받았다. 목욕탕은 쿠폰을, 술집은 50% 할인권을, 미용실은 미용권을 만들어 줬고, 누군가는 영상을 찍어 주고, 공간을 무료로 빌려줬다. 이 환대는 그날 온 사람들과 나눴다.



Q. 그렇다면, 지역사회와의 충돌은 어디서 생긴다고 보시나요.

기획자가 정해진 시간 안에 무언가를 해야 하면, 주민이 그 속도를 맞춰야 하잖아요. 그러면 같이 하기가 어려워지죠. 반대로 주민 대 주민으로 만나면 위상이 같으니 이해하며 이야기할 수 있고요. 초기엔 우리를 "언제까지 있을 애들이냐"고 본 분도 있었을 거예요. 그러다 "계속 있을 애들이네" 하는 전환 지점도 있었을 거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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멤버십, 그리고 공간의 효능



그가 아내와 함께 영도에 연 공간 ‘심오한집’은 여러 차례 운영 방식을 바꿔 왔다. 심오한집은 활동가, 청년들에게 ‘연결의 가능성’이라는 제목의 멤버십을 운영하기도 했다. 물론, 그 운영이 쉽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Q. 커뮤니티 공간을 운영하시며 무상 개방과 폐쇄를 반복하는 동안 겪은 실험의 과정도 궁금합니다.

A. 초기에는 완주, 순천 등 타 지역의 대안 공간들과 연계해 멤버십 가입자들이 자유롭게 오가게 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임대 공간이거나 지자체 지원 사업으로 묶인 공간들은 유기적으로 연계하기 어렵다는 한계가 있어 출자금을 다 돌려주고 정리했습니다.

이후 2년간 완전 개방을 해봤는데, 사회 구조적 대안을 고민하는 이들과 문화 기획 프로젝트에 흥미를 느끼는 이들 사이의 질감 차이가 너무 컸습니다. 불특정 다수에게 무조건 개방하는 것보다, 주말에 워크숍을 오는 청년 단체나 전청넷, 청년유니온 같은 동료 활동가들이 눈치 보지 않고 편히 쉬다 갈 수 있는 느슨한 안전망으로 다시 닫아두는 게 맞다고 배우자와 평가했습니다.

부산에 강의하러 온 타 지역 활동가가 편히 자고 갈 수 있는 곳, 덕분에 부산 활동가들이 다 모여 한잔할 수 있는 그런 아지트로 쓰이기도 하고요. 요즘은 동네 청년들이 구청장 바뀌면 행정용 청년 공간을 제대로 만들어달라고 압박하자는 당사자 정치 논의를 여기서 하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도 좋은 점이 있었다. 영도 밖으로 나가는 걸 귀찮아하는 그에게, 공간이 있으니 사람들이 찾아오는 게 당연해졌다는 게 그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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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터로 환원되지 않는 것



청년과 지역소멸 논의는 늘 인구수라는 정량 지표와 부딪힌다. 관계의 깊이를 데이터화하기는 어렵다.



Q. 이 간극을 행정이 알아듣게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행정이 내놓아야 할 수치는 삶의 만족도 같은 것이라고 봐요. 서울시 청년수당은 초기 설계 때 사회효능감 같은 지표도 썼거든요. 청년 개인이 자신이 사는 지역을 얼마나 애착하고 신뢰하는지를, 수당을 받기 전과 받은 후 6개월 뒤로 비교한 거죠. 정책이 제대로 작동했다면 효능감이 늘 수밖에 없으니까. 그런데 이런 선례를 지역에 가져다 쓰기 어려운 이유는, 지역사회가 정책 관리나 평가에 큰 돈을 쓰기 어렵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그는 농어촌기본소득을 예로 들었다. 정해진 금액을 정기 지급하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되며, 주민들이 필요로 하는 것에 자원을 매칭해 주는 식의 촘촘한 관리가 들어가야 정책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려면 중간지원조직과 인력, 별도 사업이 필요한데 지역에서는 거기까지 가기가 어렵다. 서울 청년수당 모델도 활성화 조치는 사라진 채 수당 지급이라는 형태만 부산에 도입된 상태라고 그는 봤다. 그래서 청년의 삶이 어떻게 변했는지 확인할 방법도, 관련 조사도 없다는 것이다.



Q. 결국 성과지표를 바꾸자는 이야기인가요?

심플하게 보면 그렇지만, 사실 이건 사회 패러다임을 바꾸자는 얘기에 가까워요. 한국 사회가 성공이라 말해 온 기준들을 어떻게 바꿀 거냐의 문제이기 때문이죠. 인구 수로는 성과를 낼 수 없어요. 계속 줄어드는데 무슨 수로 내겠어요?. 그리고 지역에 살고 있는 청년조차 지역의 삶에 만족하지 못하는데, 유입되는 청년은 만족할 수 있겠느냐는 질문을 해야 해요.



그는 청년정책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자리한 구조적 장벽, 거버넌스 구조를 짚었다. 그는 우리 사회의 위원회제 거버넌스가 전문가, 교수, 단체 대표 등에게만 자리를 내어주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 같은 ‘전문가들만’ 머리를 맞대고 있으니 20년을 모여도 문제가 풀리지 않는다. 



A.여전히 50·60대 교수들은 '청년 전문가'로 위원회에 초청 받고, 당사자 청년들이 위원회에 들어가려면 그러한 전문가들에게 심사를 받아야 하는 상황인 거죠. 초청받은 나이 많은 전문가와, 그들에게 선택받은 젊은 청년이 같은 위원회에 동급으로 앉아 논의하는 희한한 구조예요. 이것도 결국 기득권과의 싸움이에요. 저는 청년정책에서만큼은 학문적 전문성이 보조적 역할로 내려가야 한다고 보는 편입니다. 학문은 본래 느리고, 차곡차곡 쌓여야 빛나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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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진은 없다, 만나야 한다


오랜 활동을 거치며 그가 도달한 운동관은 비교적 단순했다.


A. 문제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꾸준히 이야기하고, 설명하고, 동의하는 사람이 생기면 같이 이야기하고, 그게 쌓여야 하는 거죠. 급진적인 변화는 세상에 상처를 남겨요.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사회 의제를 논쟁·토론하게끔 장을 만들어 밀어 올리는 일이 중요합니다. 그 과정에 많은 사람과 함께 하며 사회는 조금씩 좋은 방향으로 간다고, 요즘은 생각해요. 그 기준을 놓아 버리면 운동이 너무 힘들어지는 거 같아요.



그래서 그는 ‘작은 사례’를 중시한다. 엄청난 공을 들여야 하는 일이 아니라, 자신의 여력 안에서 할 수 있는 작은 것을 만드는 일이 중요하다는 믿음이다. 


인터뷰 말미, 그 역시 자신이 겪어온 궤적이 '전환'이 아닌 '우직한 직관의 연결'이었다고 회고했다. 근거는 없었지만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주저하지 않았고, 십여 년간 그가 던진 화두에 주변의 동료들이 공감과 지지로 검증해 주었기에 길을 잃지 않았다고 말이다. 



Q. 앞으로의 10년, 영도와 심오한연구소는 어떤 풍경을 그리길 바라시나요?

A. 최근 '영도로 연결될지-도'의 운영진 12명과 함께 은평구 살림협동조합의 사례를 다룬 책을 읽고 본격적인 논의를 시작하려 합니다. 지난 시기 동안 동네 청년들과 선거 때마다 후보자 간담회를 두 번 열었는데, 정치적 수사를 떠나 후보자가 자기 앞에 앉아 이야기를 들어준다는 사실 자체에 청년들이 큰 효능감을 느끼더군요. 이제는 워크숍을 통해 정책 질의서를 만들어 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만큼 이 지역에서 잘 살기 위한 다음 스텝으로, 저는 작은 골목을 우리 것으로 만들어 보는 협동조합 식당을 이야기하고 있어요. ‘심오한 집’은 사적 공간의 경계가 있어 청년들이 상시로 문 두드리고 오기 어려우니, 완전히 열린 식당 겸 카페를 공동체 기반으로 만드는 겁니다. 딱 한 명의 청년을 상시 고용하고 한 달간 돌아갈 예산을 잡은 뒤, 조합원 몇 명이 정기적으로 식사를 해줘야 이 구조가 유지되는지 케이스별로 시뮬레이션을 돌려보려 합니다. 대안적인 비즈니스 모델을 골목길에서 직접 증명해 내는 것, 그게 향후 10년의 비전입니다.



Q. 마지막으로 동료 공익활동가들과 청년들에게 전하고 싶은 연대의 한마디가 있다면 부탁드립니다.

A. 현재 사회나 자신의 미래 모습에 문제를 느끼고 있다면, 활동 의제를 넘어서 일단 만나고 섞여야 해요. 요즘 공적 자원이 줄어들어서인지 서로 단절되어 있다는 느낌을 종종 받습니다.

어제 동료들과 나눈 아이디어인데, 전국 17개 시도에서 4년 동안 딱 500만 원에서 1,000만 원씩 모아 지방선거에 무소속 공동 후보 17명을 내는 '무소속 17인 프로젝트' 같은 정치 기획을 해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공공 의료, 청년, 기후위기, 여성 등 17개의 핵심 의제만 딱 걸고 전국에서 똑같은 메시지로 싸우는 겁니다. 4년 동안 같이 워크숍을 하며 역량을 기를 수도 있고요. 실제 당선자가 나오면 대박인 거고, 그렇지 않더라도 선거를 통해 사회에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를 전국으로 함께 내보는 것이죠.

어쨌든, 당장 우리가 하나로 일치되는 의제를 만들진 못하더라도 다 섞여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섞이는 것이 곧 대안적 사회의 모습이 될 거라고 보고요. 새로운 정치 기획, 시민운동 기획이 필요한 시점인데, 그 역시 만나서 이야기해야 나오는 것이죠.



두 시간이 넘는 대화는 ‘연결의 가능성’을 이야기하며 끝났다. 사회에 관심 없던 청소년이 한 번의 봉사활동에서 마주친 질문을, 그는 형태를 바꿔 가며 지금까지 물어 왔다. 그것을 전환이라 부르든 연결이라 부르든, 분명한 것은 그가 줄곧 같은 곳을 향해 왔다는 사실이다.




인터뷰어 : 박누리
‘왜 모두 지역을 떠날까’라는 질문을 품고 2010년 충북 옥천에 정착했다. 옥천신문 편집부장, 지역잡지 〈월간 옥이네〉 편집장으로 일하며 지역의 이야기를 기록해왔고, 지금은 '농촌기록활동가'로서 이전과 다르게 일하는 실험의 시간을 보내는 중이다. 콘텐츠 스튜디오 누리:사를 통해 지역의 다양한 이야기를 연결하고 전파하는 일을 이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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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공익활동가주간의 〈활동가 인터뷰 프로젝트〉는 다양한 지역과 분야에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변화를 위해 노력하는 활동가들의 일과 삶 이야기를 듣고 인터뷰로 기록하는 활동을 지원합니다.

2026년에는 〈활동가, 전환을 말하다〉를 주제로 기획인터뷰를 진행했습니다. 공익활동가가 되는 데 정해진 경로는 없습니다. 교사였던 사람, 광장에서 처음 마이크를 잡았던 사람, 기존 활동의 궤적 위에서 변화를 만드는 방식 자체를 '전환'해 온 사람들도 있습니다. '공익활동'이 더 많은 사람의 선택지가 되길 바라며, 다채로운 전환의 이야기를 기록했습니다.

활동가 인터뷰 프로젝트는 
아름다운재단과 지리산이음이 함께 기획·운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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