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의 세월 동안 원주의 도심을 지켜온 아카데미 극장은 단순한 건축물을 넘어 지역민들의 희로애락이 스며든 근현대 문화유산이었습니다. 지난 2023년 원주시의 일방적인 결정으로 극장은 끝내 철거되었지만, 그 공간을 지키기 위해 모였던 청년들과 시민들의 저항은 새로운 공동체 운동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공익활동가 주간’을 맞아 원주 '아카데미의 친구들(아친)' 신동화 사무국장을 만나 공간을 잃은 투쟁이 어떻게 시민 주권과 지역 생태계 운동으로 확장되었는지, 그리고 활동가로서 지치지 않고 걷는 법에 대해 이야기 나누었습니다.
서울에서 ‘쉬러’ 원주에 온 한 사람이 책방 주인에서 출판인을 거쳐 ‘활동가’로 호명되기까지의 10년을, 그리고 ‘극장 철거’라는 한 도시의 사건을 기록해봅니다. 인터뷰는 2026년 5월 21일 ‘아카데미의 친구들’ 사무실에서 진행됐습니다.
쉬러 온 원주에서 ‘벼락 활동가’가 되기까지
신동화가 원주에 처음 닿은 것은 2014년 무렵. 서울 토박이였던 그가 20대 초중반을 거치며 도시 생활에 지쳐 있을 때다. 회사 일에 매여 있었고, 반지하를 전전했고, 서로 스쳐갈 뿐인 도시 안 관계에서 스스로를 ‘이방인’처럼 느끼곤 했다. 경의선 출퇴근길에 녹초가 되곤 했던 그는, 어느날 문득 원주로 향하게 된다. 마침 부모님이 먼저 원주로 이주해 있던 터였다.
Q. 처음 원주에 왔을 때, 이 지역은 어떤 공간이었나요.
A. 일단 산이 있어서 너무 좋았어요. 제가 사는 단구동 쪽에 메타세쿼이아길이 있는데, 그 가로수길에서 보는 치악산 풍경이 아름다워요. 눈 쌓이고 단풍 들면 정말 이국적이에요. 집 앞엔 바로 원주천이 있고요. 그게 좀 ‘고향’ 같은 느낌이었어요. 그때만 해도 원주가 많이 개발되지 않아서 무실동도 크지 않았고, 장터가 있고 새벽시장이 열리고, 아카데미극장도 문화극장도 모두 철거 전이었어요. 그런 옛날 건물이 원도심에 남아 있고, 기찻길도 있던 게 좋았어요.
Q. 이주 초기엔 일자리를 찾는 것도 쉽지 않았을 거 같은데요.
A. 맞아요. 제가 원래 웹디자인 일을 했는데, 일감을 찾기가 쉽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그냥 창업을 했죠. 서울에 있을 때부터 제 브랜드를 하나 만들고 싶었는데 여건이 안 됐거든요. 집 근처에 작은 공간이 있어서 거기서 작업을 시작했어요. 처음엔 반려견 용품 쇼핑몰을 만들어서 수제 목줄 같은 걸 제작·판매하고 백화점에 납품도 했고, 나중엔 캔들·드라이플라워 같은 공방까지 확장했고요.
“처음엔 그냥 쉬러 왔고, 언젠가 다시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야 하지 않을까 했다”던 그이지만, 원주에서의 생활은 예상보다 길어졌다.
어느새 이곳에서 결혼을 하고, 아이가 생기면서 그의 삶도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무엇보다, 원래 하던 일을 계속 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공방 작업과 육아를 병행하기가 어려워졌던 것이다. 2년 가까이 집에서 아이 양육에 전념하던 그는 산후우울증을 심하게 겪게 된다. 그만큼 자아 성취에 대한 갈증이 커지기 시작했다.
Q. 그 시기를 어떻게 지나 오셨나요.
A. 우울증이 올 때마다 도서관에 갔어요. 일종의 현실도피였죠. 그 시간이 너무 좋았어요. 원주 시립도서관에 자주 갔는데, 책을 읽다 보니 내가 살아나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아이가 어린이집에 갈 때쯤엔 책방을 열어보자는 결심까지 하게 됐죠.
자신을 살린 ‘책’으로, 그는 비슷한 고민을 가진 사람들을 연결하려 했다. 책방에서 처음 한 사업은 지역문화진흥원의 ‘동네책방 문화사랑방’이었다. 서울에서 꾸준히 공연 활동도 했던 그에겐 여전히 예술과 창작자에 대한 애정이 있었다. 책방을 거점으로 원주 곳곳에 숨은 창작자들을 찾아내는 일이 재미있었다.
Q. 구체적으로 어떤 활동을 하셨나요.
A. 창작자들이 자기 작업을 이야기할 곳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모두의 마이크’라는 걸 기획했어요. 창작자가 자기 책이나 작품, 작업을 북토크 형식을 빌려 소개하고 공연도 같이 하는 자리였죠. 2년 정도 운영했는데, 창작자들을 많이 만나고 애정도 생겼어요.
아카데미극장 보존 활동이 수면 위로 떠오르자, 그는 ‘창작자들이 생각하는 아카데미극장의 보존 이유’를 묻는 인터뷰집 ‘아카데미극장’을 발간했다. 웹디자인을 줄곧 해온 그에게 ‘물성을 가진 책’을 만드는 일은 새로운 발견이었다. 그렇게 ‘지역 문화 아카이브’를 한 축으로, 출판사를 시작했다.
아카이브 작업은 다양했다. 재개발로 사라져가던 원인동 마을의 향수를 기억하기 위한 마을미술 프로젝트 과정을 기록했고, 흔히 성매매집결지로만 인식되는 학성동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담았다. 문화도시·문화재단 사업에 기획자로 참여해 아카이브 활동을 맡기도 했다. 지역 문화예술 구성원 약 200명을 층위별로 모은 라운드테이블 기획에도 참여했다.
다만, 그 가운데에서 책방은 정리됐다. 책방과 출판을 함께할 사무실을 얻은 시점에 아카데미극장 사안이 터졌고, 출판 일의 대부분이던 지역 문화 아카이브 생태계 자체가 무너지면서 일감도 줄었다. 극장 일이 급박하게 돌아가는 가운데 공간을 줄이며 책방은 자연스레 접었다.
앞선 활동에도, 신동화는 오랫동안 자신을 ‘기획자’라 부르지 못했다. “그냥 ‘책방 합니다’라고만 소개했”다. ‘문화 기획 몇 년 했다’고 자신을 소개하는 이들을 보면 신기하고 조금 열없는 기분이 들었다. 그런 그가 ‘활동가’라는 말과는 다르게 마주쳤다.
Q. ‘활동가’라는 정체성은 언제 받아들이게 되셨나요.
A. 극장 활동을 하면서 외부에서 자꾸 저를 활동가로 명명하더라고요. 아름다운재단 인큐베이팅 사업을 하면서도 그랬고요. 그래서 우리끼리는 ‘벼락 활동가’라고 해요. 벼락처럼 활동가가 돼버린 거죠. 처음엔 아무것도 모르고, 이게 흩어지면 안 되니까 절박한 심정으로 했는데, 반년쯤 활동하니까 저랑 너무 잘 맞는 거예요. 제가 그동안 방황하며 ‘사회를 위해 헌신하고 싶다, 더 올바른 방향으로 가는 데 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했던 바람들이, 이게 잘 풀린 거죠.
활동가로 ‘자각’한 뒤의 변화를 그는 책임감과 부담으로 설명했다. 올바르게 행동해야 한다는 의식이 생겼고, 냉소와 우려가 섞인 시선을 함께 받으며 처신에 대한 부담을 느꼈다. 그러나 그 이전과 이후는 분명히 달랐다.
Q. 자각 이후, 무엇이 달라졌나요.
A. 그전에는 그냥 흘러가는 대로,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었다면, 지금은 ‘소명’ 같은 걸 발견한 게 아닌가 싶어요. 그토록 찾아 헤맸는데 뭔지 몰랐던 것을요. 회사 다니고 공연하며 자아 성취는 일부 했지만, 내가 원하는 활동이 ‘공익적인 것’이라는 걸 잘 몰랐어요. 공익활동가라는 직업이 있는지도 몰랐고요. 활동가가 되며 세상을 보는 눈이 많이 달라졌고, 공부도 진짜 많이 했어요.
그가 말한 공부는 활동가의 일상이기도 했다. 극장 철거를 막기 위해 조례와 행정을 공부했고, 기자회견을 위해 기자들에게 어떤 메일을 어떻게 보내야 기사화되는지 문구 하나하나까지 익혔다. 문화재청을 상대하고 국회 토론회를 열며, 어떤 법률로 문화유산이 지정되는지도 배워야 했다. “활동가는 늘 새롭게 떨어지는 것들을 다 공부해야 한다”는 그는 “그게 재미있어 밤새운 기억이 난다”고 했다.
60년의 기운, 그리고 ‘토포필리아’
극장 보존운동의 출발에는 공간 자체가 준 강렬한 경험이 있었다. 인터뷰집 ‘아카데미극장’을 만들기 위해 극장에 처음 들어선 순간을, 그는 또렷이 기억했다. 문화 행사를 기획하고 지역 예술가들의 안식처를 만들던 그에게, 아카데미극장은 운명처럼 다가왔다.
Q. 2020년 아카데미극장이 재개방되었을 때, 내부에서 느꼈던 감각이 매우 강렬했다고 들었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에 매료되셨나요?
A. 붉은 의자들, 철제로 된 그 의자들, 들어가면 나는 옛날 냄새. 생각보다 너무 컸고 그에 압도됐어요. 지난 60년의 세월동안 이 공간 안에서 사람들이 영화를 보며 웃고 울었을 테고, 임검석(극장 따위에 단속 경찰관, 소방관 등을 위하여 마련한 특별석. 일제강점기 시작돼 1980~90년대까지 잔존.) 도 있다고 하니 독재 시절 치열했던 근대사를 겪은 수많은 사람의 기운이 확 느껴지면서 소름이 돋았어요. 그 시대로, 1960년대로 확 들어간 느낌이었죠.
여기서 그는 ‘토포필리아(topophilia)’라는 개념을 꺼냈다. 장소에 대한 사랑·애착을 뜻하는 말이다. 60년이 넘은 극장, 그 극장과 나이 차가 큰 청년 활동가·기획자들이 왜 그토록 강하게 결합했는가 하는 물음에 대한 그의 답이었다. 그는 이 질문에 “답을 잘해야겠다 싶어 (사전질문지를 받고) 어제 또 공부했다”며 웃었다.
"시민 개개인들이 오래되고 낡은 것들의 가치를 깨닫고 지키려는 감성과 노력이 필요해요. 그것이 공공재이든 사유재이든 말이죠. 오래된 물건은 나름의 시련과 혼을 가지고 있어요. 오래된 것으로부터 시간의 결을 느낄 수 있어야 해요. 역사라는 숫자에 우리는 감동할 수 있어야 하고 그 속에서 펼쳐진 사건과 사물에 감정 이입할 수 있어야 다시는 아카데미와 같은 소중한 것을 잃지 않을 거로 생각해요. 오래되고 낡은 것들의 가치를 알고 감동할 줄 아는 시민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도시는 아름다운 도시가 될 거예요."
신동화가 인터뷰집 ‘아카데미극장’에서 가장 좋아하는 부분. 178쪽에서 발췌.
Q. 청년들과 60년 된 극장 사이의 연결 고리는 무엇이었을까요.
A. 저 스스로를 돌아보면, 저는 1980년대 후반 서울 광진구 자양시장 옆에서 자랐어요. 아버지가 전파사를 하셨고, 지금의 편의점 격인 ‘슈퍼마켙’이 있던 시절 시장 골목을 누비던 세대죠. 아날로그와 디지털 사이, 레트로와 빈티지 감수성을 가진 사람인 거죠. 그래서 극장 공간에 압도되면서도 좋아했던 것 같아요.
그럼 다른 사람들은 왜 그랬을까 생각하다 떠올린 게 토포필리아예요. 예술하는 사람들은 인간의 본질, 인간 원형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하잖아요. 도시에서 지친 사람들이 결국 지역을 찾고 안주할 공간을 찾는 것도, 문화재를 보존하는 것도, 오래된 것의 서사에 감명받는 감수성이 본능적으로 있기 때문이라고 봐요. 단순히 오래된 건물을 지키자는 차원을 넘어, 그 장소가 주는 서사와 역사 속에서 인간성을 회복하고 소통하려는 갈망이 있었던 거죠. 빠르고 새것만 추구하는 세상에서 이 장소가 가진 깊이를 지켜야 한다고 판단한 겁니다. 비록 외지에서 왔거나 그 시절의 극장을 직접 경험하지 못한 청년들일지라도요. 투쟁 과정에서 장소 애착이 더욱 강력하게 형성됐던 것 같기도 해요. 그것이 자신이 믿는 가치관과 강하게 결합했던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는 ‘지역 활동은 곧 고령화’라는 통념에 대한 다른 해석이기도 하다. 흔히 원주는 도시라서 아카데미 극장 투쟁 현장에서도 청년이 많다는 식으로 단순하게 설명되지만, 그는 장소 애착이라는 정서적 고리가 세대를 가로질러 작동했다고 본 셈이다.
철거의 밤, 그리고 타인의 주체성
저항에도 불구하고 극장은 폐쇄·철거됐다. 그 과정을 지나며 겪은 내면의 변화는 컸다.
Q. 철거가 결정되고 진행되는 과정을 보며 어떠셨나요.
A. 당시엔 정말 절박한 심정이었어요. 극장이 지켜지기만 한다면 자존심도 다 내려놓을 수 있다는 심정으로 간절했죠. 가장 기억에 남는 건 공무원들과 대치하던 장면이에요. 제가 책방을 하다 보니 처음에 ‘수호대장’으로 책방 사장님들을 불렀거든요. 네 명 중 셋이 책방 사장, 한 명이 친한 사진작가였는데, 제가 부른 사람들이 압박 속에 숨을 못 쉬던 장면이 기억나요. 뒤에서 유리 깨지는 소리도 나고……. 그게 너무 미안하고 죄책감이 들었어요.
그런데 그 죄책감은 예상치 못한 방향에서 풀렸다. 그날 저녁 촛불 모임에서 사람들은 무엇이 힘들었는지 나누며 함께 울고 울었다. 그렇게 서로를 위로하는 모습을 보며 그는 큰 깨달음과 함께 위안을 얻었다.
A. 제가 불러서 온 사람들이니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는데, 그게 아니더라고요. 이 사람들도 진짜 극장을 지키고 싶어서, 이 가치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선택해서 온 거였구나. 이건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일이구나 하고요.
자신의 주체성뿐 아니라 타인의 주체성을 함께 발견한 순간이었다. 이 경험은 뒤에 그가 말하는 ‘시민의 힘’이라는 인식으로 이어진다.
2022 아카데미 정원 만들기 ⓒ아카데미의친구들
“우리는 모두 이방인입니다”
한 인터뷰에서 그는 “지금은 노마드의 시대이고, 정통성이나 정당성보다 개인의 가치와 선택에 집중하는 세대가 우리”라고 말한 바 있다. 그 문장의 배경에는 당시 겪은 ‘억하심정’이 있었다.
A. 대립하던 분들이 “너희 다 외지인 아니냐, 서울로 돌려보내라”는 식으로 말했어요. 그게 너무 억울했어요. 처음에는 “청년들이 와서 좋다”더니, 정작 갈등이 생기니까 “너네는 토박이도 아닌데 왜 하라는 대로 안 하냐”는 거잖아요. 인구 수는 늘려야 하니 이주 청년은 필요한데, 지역의 의사결정 권한은 단 1도 나눠주기 싫다는 기득권의 속내가 빤히 보였어요.
그렇게 배타적인 태도라면, 지역은 결국 소멸할 수밖에 없어요. 권력은 갖고 싶고 나눠주긴 싫지만 새로운 사람은 왔으면 하는 그 모순이 늘 문제를 만들어요. 저는 다 이방인이라고 생각해요. 이제 자기 고향에서 평생 터 잡고 사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요. 그러니 정통성이나 순혈주의를 따질 게 아니라, 진짜 애착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환대할 준비가 돼야 지역의 지속가능성이 열려요.
이 대목은 앞서 말한 장소 애착과 정확히 맞물린다. 의미 있는 장소에 애착을 가진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가 곧 지역 소멸을 막는 힘이 되고, 애착을 가지면 출생지와 무관하게 그곳은 ‘고향’이 된다. 그는 “이런 이야기를 청년 단위에서 많이 해야 한다”며, 청년이야말로 이주를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세대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 지점에서 인터뷰는 자연스레 지역 기득권의 문제로 이어졌다. ‘토박이냐 아니냐’는 프레임이 결국 기득권을 지키는 도구로 쓰인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지역 청년의 로컬 활동 철학은 상당히 진보적일 수밖에 없다는 해석에, 그는 동의했다.
Q. 그 시대를 직접 겪지 않은 이주 청년에게 ‘지역의 유산’은 어떤 의미인가요.
A. 전쟁과 가난, 독재를 겪은 세대에게 그 극장은 별게 아닐 수 있어요. 당시 극장은 ‘대한늬우스’ 같은 정권의 선전물이 함께 상영되던 공간이기도 했으니까요. 그런데 그걸 겪지 않은 세대가 보는 또 다른 의미가 있거든요. 그 부분을 수용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 잃어버린 게 너무 많아요. 지금까지의 정치 방향은 근대사의 상처나 보기 싫은 것들을 다 없애고 새것으로 갈아치우자는 걸로밖에 안 느껴져요. 단순히 ‘옛날 거 지키자’가 아니라, 인간의 본질과 본성이 무엇인가를 고민하면서 정책을 펴야 하지 않을까요.
좋은 어른들, 그리고 원주라는 토대
지역 내 청년 활동가들이 흔히 겪는 난제 중 하나는 기존 지역사회 원로와의 소통과 결합이다. 아친은 투쟁 과정에서 풍물시장 상인 300명의 서명을 직접 받아내는가 하면, 생협운동이나 무위당 장일순 선생의 맥을 잇는 지역 원로들과 단단한 연대를 맺어 주목받았다. 이 굳건한 세대 연대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Q. 나와 다른 세대, 특히 지역 상인들이나 어르신들과 연대하고 소통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나 원칙이 있었다면 소개해 주십시오.
A.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희 소통 잘 못합니다. 어르신들께 대들기도 많이 대들었어요(웃음). 우리가 소통을 완벽하게 했다기보다, 원주라는 지역에 정말 깨어있고 훌륭한 어른들이 계셨던 덕분이에요. 저희 공동대표를 맡아주셨던 이현주 대표님, 무위당사람들의 성락철 이사장님, 상지대 공제욱 교수님 같은 분들이 대표적입니다. 제 부모님 연배이신데, 사안을 해석하는 시선과 가치관이 저희와 완전히 통했어요. 나이나 경력을 내세워 위계를 잡지 않으시고, 언제나 청년들의 선택을 전적으로 존중하며 든든하게 뒤를 받쳐주셨죠.
그 ‘좋은 어른들’의 뿌리를 따라가며 그는 원주라는 도시의 역사를 새로 알게 됐다고 했다. 원주는 한국 협동조합·생명운동의 거점으로 꼽히는 곳이다. 무위당 장일순과 원동성당 지학순 주교로 상징되는 민주화·생명사상의 흐름이 한살림 등 협동조합 운동으로 이어져 왔다. 그는 이 맥락을 인터뷰에서 직접 짚었다.
Q. 그 어른들의 뿌리를 따라가니 무엇이 보였나요.
A. 그분들은 협동조합과 민주화 운동을 경험한 분들이었어요. 지금 무위당 장일순 선생이 생명사상과 협동조합 운동을 통해 지역공동체의 가치를 일깨웠고, 지학순 주교가 유신독재에 맞서 민주화와 인권을 위해 목소리를 냈던 것처럼 그 시대에 뿌려진 씨앗이 어떻게 흐르고 있는지를 알게 된 거죠. 원주의 협동조합은 결국 생명과 땅의 힘을 믿는 사람들이에요. 쌀 한 알도 소중하고 그 안에 우주가 있다고 믿는 사람들. 그러니 기득권은 우리를 무시하고 밀어버리면 없앨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생명의 힘을 믿는 지역 어른들은 권력 없는 청년들에게도 가능성이 있다고 믿고 지지해 주신 거예요.
이런 토대 위에서, 아친은 외지인 비중이 높은 조직(사무국 3명 중 2명이 외지인, 운영위원도 절반 이상이 외지인)이면서도 원주 시민사회의 역사적 맥락을 잇는 주체로 호명됐다. “지역의 원로들이 세대를 이어 이 활동을 이을 수 있도록 청년들을 호명해 주신 셈”이라고 그는 표현했다.
극장 이후, ‘커먼즈’로
2023년 10월 극장이 철거된 뒤, 아친은 ‘지키던 것이 사라졌으니 해산해야 하는가’라는 질문 앞에 선다.
Q. 극장이 사라진 뒤엔 무엇을 의제로 삼았나요.
A.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너무 많았어요. 아카데미극장의 철거와 함께 문화도시가 해체되며 문화 생태계가 초토화되었고, 또 재판도 진행 중이었죠. 책임져야 할 사람은 벌을 받지 않았고, 전방위적 압박이 이어졌어요. 우리의 다음 싸움은 무엇일지 친구들과 많은 토론과 논의를 거듭했죠. 그러면서 우리가 처음 모인 건 극장 보존을 위해서였지만 결국 지키고 싶은 건 ‘시민의 주권’이라는 걸 깨달았어요. 왜 4년짜리 임기직 시장이 시민 모두의 재산을 독점하고 파괴하는가에 대한 질문이었죠. 이건 폭력이라는 생각에 도달했고, 그러면서 ‘커먼즈(commons, 공유재)’라는 활동 핵심 키워드를 도출할 수 있었어요.
커먼즈는 공동체가 함께 관리하고 누리는 공유 자원·공유 영역을 뜻한다. 극장이라는 물리적 공간에서 ‘시민 모두의 것’이라는 더 넓은 개념으로 운동의 좌표를 옮긴 것이다. 이 전환은 연대의 확장으로 이어졌다. 지역 공유재를 위협하는 ‘치악산 케이블카 사업’이 제기되자, 이를 함께 논의하는 포럼도 열었다. 설악산 케이블카 반대 단위, 전국 케이블카 연대와 만났고, 홍천 양수발전소 건설 반대까지 힘을 보탰다. 극장 보존 투쟁을 통해 인연이 닿았던 동두천 성병관리소 보존 투쟁에도 연대했다.
Q. 다양한 연대를 거치며 무엇을 보셨나요.
A. 밖에서 보면 모두 타고난 투쟁가 같지만, 알고 보면 다 작은 무언가에서 시작해 “내가 겪은 문제가 저 사람 문제와 같네” 하며 연결되더라고요. 한편으론 한국 사회의 문제가 이렇게 뿌리 깊고 다 연결돼 있구나 싶기도 했지만, 또 한편으론 이게 ‘시민의 힘’이구나, 우리가 연결돼 있구나를 발견하게 돼요. 앞서 유리창 너머의 그 장면, 각자가 개인적으로 선택했다는 게 바로 그 지점이에요. 나 혼자 짊어져야 한다는 부담이 있었는데, 다 함께 느끼고 있었던 거죠.
아친 최은지 대표와 함께.
지역언론을 향한 질문
전국적인 연대로 강단을 보여주는 아친이지만, 내밀한 지역 권력 지형에서는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을 이어가야 했다. 특히 극장 투쟁에서 마주한 지역 언론의 역할은 엇갈렸다. 그는 원주MBC의 보도를 가장 먼저 꼽았다.
Q. 당시 지역언론의 분위기는 어땠나요.
A. 원주MBC 권기만 기자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저희 활동을 팔로우해 주셨어요. 이 문제를 함께 고민하고 때로는 촌철살인의 조언도 해주셨어요. 나중에 아카데미 극장 투쟁 보도로 기자상도 받으셨을 정도로 최선을 다해 이 사안을 다뤄주셨어요. 저희의 소중한 ‘연대자’라고 생각하는데, 이렇게 표현하면 부담스러우시려나요?
반면 일부 지역 언론에 대해서는 비판이 분명했다. 기계적 중립에 머물거나 검증 없이 철거 찬성 측 입장을 실었던 일부 풀뿌리 지역 언론에 대한 아쉬움은 지금도 여전하다.
Q. 다른 지역언론은 어땠나요.
A. 편하게 말하면 정파적으로 이용하는 느낌이었어요. 아카데미극장 보존 운동이 7년 간 지속되다보니 협력해왔던 지역 언론들도 있었는데, 시장이 바뀌니 달라지더라고요. 지자체 홍보 예산 지원 등 지역 언론이 처한 여러 상황이 있겠지만, 그런 변화가 아쉽게 느껴졌어요. 아친의 무죄 판결 뒤 고발 당사자였던 ‘시장의 처벌불원서 덕분에 무죄가 선고되었다’는 허위 사실이 담긴 기고를, 사실관계 검토 없이 그대로 실어버린 일도 있었어요. 그래서 언론중재위 제소를 고민하기도 했어요.
여기서 그는 ‘공정’의 의미를 되물었다. ‘양쪽 입장을 같은 분량으로 싣는 것이 곧 공정이라는 통념’에 대한 문제 제기다.
Q. 공정이란 무엇이라고 보시나요.
A. 공정하다는 게 그냥 ‘상대 입장 싣고 내 입장 싣고’가 아니잖아요. 그건 기계적 중립이죠. 최근 한 매체에서 무죄 판결 이후의 소회를 기고해 달라고 해서 썼어요. 무죄 판결은 났지만 사회적 갈등이 해결된 건 아니다, 지역에 깊게 남겨진 불신과 갈등을 어떻게 회복해야 할지 고민해야 할 때이며, 이 과정에서 언론의 책임 역시 가볍지 않다고 지적했죠. 상대 입장을 그냥 싣는 게 공정이 아닌데 언론도 이 점을 반성해야 한다고요. (그런 내용이라) 안 실어줄 줄 알았는데 실어주더라고요(웃음). 그런데 깨진 신뢰를 회복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려요. 사회적 비용으로 따지면 어마어마한 거죠.
언론 환경 자체가 기울어져 있다는 인식도 있었다. 그는 전 원주시장이 기자 출신이어서 언론을 잘 다룬다고 봤고, 이른바 ‘관변 언론’이 많아 아친이 성명을 하나 내면 수십 곳이 동시에 반박하는 구도였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렇게 쏟아지는 정보를 시민이 걸러 보긴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지역 언론에 쓴소리를 해주는 독자의 존재가 그래서 더 귀하다. 당장은 듣기 싫을지 몰라도, 결국 지역 언론의 발전은 “너희 이거 잘못했어” 하고 말해주는 독자에게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아카데미상영회 씨네마스코프전 홍보물 ⓒ아카데미의친구들
“나는 당신의 이웃입니다”
거대한 기울기에 맞서, 아친이 택한 방식은 ‘밖으로 나가는 것’이었다.
Q. 행정 권력과 왜곡된 프레임 속에서 일반 시민들에게 아친의 활동이 '데모꾼의 정치 싸움'이 아닌 공동체의 가치를 지키는 일임을 설득하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어떤 방식으로 시민들에게 다가갔나요?
A. 행진하고 공연하고, 노란 텐트 앞에서 문화행사를 했어요. 지역 맘카페에 홍보해 어린이들을 위한 비눗방울 공연도 해주고요. 저는 ‘전복 하는 사람’. ‘데모꾼’이 아니라 “진짜 시민이고, 당신처럼 똑같이 이곳에서 아이를 키우는 이웃입니다”를 보여주려 한 거예요.
2023년 8월 29일의 새벽은, 그래서 더 또렷이 기억한다. 아친 활동을 하며 수없이 많은 권력에 맞섰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가장 무서웠던 날. 철거를 위해 건장한 용역들이 들이닥쳤을 때다. 온몸이 벌벌 떨렸지만, 빗속에서 그는 현장 건너편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A. 비를 맞으며 호소했어요. “우리는 당신들과 다른 사람이 아니라 당신들의 이웃이고 친구인 사람들이다, 제발 다치게 하지 말라”고요. 혹시라도 누가 다칠까봐 무서웠던 기억이 나요. 새벽 4시에 모여 8시 출근 시간까지, 차가 지나갈 때마다 계속 그렇게 외쳤어요.
이 호소는 뜻밖의 우군을 만들었다. 처음엔 시위를 거리껴 하던 맘카페 회원들이 그를 직접 만나며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웃이 이런 마음으로 나섰구나” 하는 서사를 알게 됐고, 이후 행진에 함께 나와 주었다. 적극적인 참여는 못하더라도 지지하고 소문 내주는 이웃들도 여론을 만들었다. 시민운동으로의 전환이 그렇게 일어났다.
버티는 일의 경제학
투쟁 기간 경제활동은 사실상 멈춘다. 활동가의 생계는 늘 위태롭다.
Q. 경제적 생계 유지나 번아웃 문제는 어떻게 감당하셨어요?
A. 정말 돈이 너무 쪼들리고 힘들었어요(웃음). 현재 아친 대표인 최은지 활동가는 당시 미디어 강사 수입을 최소한으로 줄여가며 버텼고, 저 역시 문화기획 프리랜서로 2023년에는 학성동 성매매 집결지 아카이브 사업 등 두세 개 외주를 정신없이 병행하면서 대치 현장으로 뛰어갔죠. “시청에 난리 났다” 하면 달려가고, 다시 와서 작업하고. 아마 친구들 모두 그땐 그렇게 정신없이 살았을 거예요. 그러다 극장이 무너지고 난 후인 2024년엔 공황이 왔어요. 대인기피처럼 몇 달간 사람을 못 만났죠.
이후 아름다운재단의 인큐베이팅 지원 사업에 선정돼 최소한의 활동비를 지원받게 됐지만, 그는 지금도 디자인 외주와 노동인권 강의 등을 병행한다. 활동가의 기여에 대한 지역사회의 후원이나 기본소득 시스템이 절실한 이유다.
Q. 소진과 압박 속에서도 아친이라는 이름으로 깃발을 내리지 않는 근본적인 동력은 결국 어디서 오는 걸까요.
A. 동력이 자꾸 생겨서 문제예요(웃음). 없어야 그만두는데 자꾸 생겨요. 결국 사람에게서 얻는 것 같아요. 무언가 바뀌어가는 걸 볼 때요. 커먼즈를 이야기하다 보니 환경 활동으로도 이어졌고, 무위당숲학교에서 생태 관련 기획에 참여하고 있어요. 단순히 생태계를 관찰하는 게 아니라, 우리 지역에 어떤 생명이 살고 어떤 공동체가 있으며 하나가 사라지면 전체 생태계가 무너진다는 걸 계속 이야기하는 거죠. 그에 사람들이 공감하고, 직접 체험하며 의미를 발견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동력을 얻어요.
신뢰도 쌓였다. 아친이 공공재와 생태계의 연결성을 지속해서 이야기하면서, 지역 문화예술계 관련 비위나 고충 등 개인이 해결하기 어려운 일들에 대한 제보도 들어온다. “버텨줘서 고맙다”는 말들에 벅찬 힘도 얻는다. “어려울 때 지지해 줄 수 있도록 튼튼하게 버텨야겠다, 우리가 막막했을 때 아무도 찾을 수 없었던 그런 상황을 만들지 말아야겠다”는 마음이 곧 동력이다.
그러나 부담도 따른다. 최근 지방선거를 앞두고는 정치인들의 잘못된 발언에 대한 대응으로 바빴는데, 이런 과정 자체가 큰 부담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그는 “걱정이 안 되는 건 아니다. 여러 번 그만두자고 마음먹다가도 결국 다시 하게 된다”며 “막연하지만 시민들을 믿는 마음으로 버티게 된다”고 말했다.
아친은 어느새 원주의 ‘커먼즈’이자 ‘대나무 숲’이 됐다. “힘들면 아친 찾으라”는 말처럼, 작은 일에도 시민들이 찾는다. 물론 “좋은 점도 있지만 힘든 점도 있다”는 그는 소진의 문제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전화위복의 가능성
이 갈등이 “전화위복의 계기가 되어 원주를 기억하는 방식을 바꿀 것”이라는 일각의 평가도 있다. 신동화에게 지난 1년의 사건이 남긴 전환의 가능성을 물었다.
Q. 어떤 가능성을 보시나요.
A. 실제 성과로는 시장의 독단을 견제할 ‘시정 정책 토론 조례’를 바꿨고, 재판 결과 무죄가 선고되면서 저희 활동의 정당성도 인정받았죠. 근현대 문화유산 보존 관련 법률도 개정했어요. 우리 활동이 시스템에 영향을 미칠 수 있구나를 느꼈죠. 이번 지방선거에서 “아카데미 같은 사례를 만들지 않겠다”며 시민 주권을 강조하는 흐름이 생긴 것도 조금은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해요. 앞으로는 정치인들도 정치적 부담이 커져서 시민 의견을 무시한 채 일방적으로 결정하기는 어려울 거예요. 사회적 분위기는 이제 개선해 나가야죠. 그 과정에 우리가 계속 목소리를 내며 있을 거고요.
그는 이 문제를 지역 소멸, 나아가 민주주의의 작동 방식과 연결했다. 다수결 원리가 정파적으로 악용되는 현실에서, 더 오래 이 땅에 살아야 하는 청년과 소수자의 목소리가 반영돼야 한다는 것이다.
Q. 아친의 활동을 어떻게 자리매김하시겠어요.
A. 아친 활동이나 주장에 “시민 모두가 공감했다”고 할 순 없어요. 확실히 소수죠. 하지만 그 소수의 목소리가, 우리가 이 지역에서 더 오래 더 잘 살기 위해 고민할 화두를 던진 정도는 되지 않을까요. 기후위기처럼 지속가능성이 위협받는 상황에서는 소수자의 목소리를 반영해야 한다고 봐요. 전화위복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식으로 계속 쌓아가야죠.
아카데미극장 철거, 도시재생 실패에 대해 냉정한 관찰자이기도 했던 그는 ‘원주만의 지역성을 바탕으로 한 브랜딩’이라는 제안을 내놓기도 했다.
Q. 원도심의 미래를 어떻게 그리시나요.
A. 문화재생, 도시재생이 잘 안 되잖아요. 전주 선미촌도 성공 사례였지만 시간이 지나며 공실이 많아졌고, 강릉 명주동도 반짝하다 다시 공실이 생기더라고요. 예산이 투입될 때만 반짝하고 사라지면 끝인 경우가 대부분이에요. 사람들은 자본을 따라가고 ‘힙한 것’을 따라가니까요. 그래서 본질적 가치에 공감하는 사람을 많이 만들어야 하는데, 그건 교육과 구조까지 건드려야 할 문제예요.
그가 제시한 방향은 ‘서사와 공간의 브랜딩’이다. 광주에 민주화기념관이 있듯, 각 도시가 가진 역사와 서사를 활용해야 소멸하지 않는다는 논리다. 그는 아파트뿐인 신도시를 예로 들며 “스토리 없는 도시는 놀러 가고 싶지 않다”고 했다. 원주의 협동조합·저항·생명존중의 역사를 원도심 브랜딩으로 삼자는 제안이다.
그 구체적 비전이 ‘영상문화 거점도시’다.
Q. 어떤 비전인가요.
A. 원주가 영상문화 거점도시가 된다면 어떨까요? 원주는 지역 이야기와 정체성을 담은 영화가 꾸준히 만들어지고 있는 곳이에요. 아카데미극장이 있었고, 그 극장을 사랑한 시민들이 모인 도시이기도 하고요.
아카데미 극장 투쟁의 경우 전국의 영화인들이 연대해 왔어요. 원주에서 영화인들이 투쟁한 서사가 있으니, 이걸 키울 토대가 마련됐다고 생각해요. 극장이 사라진 뒤에도 사람들이 모여 영화를 보고, 이야기를 나누고,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어 갈 공간과 활동을 이어가는 거죠. 강원에 정동진독립영화제, 원주 옥상영화제가 있는데, 이런 게 지역 브랜딩과 맞아요. 전국에 다 똑같은 출렁다리 말고, “원주에 작은 영화제와 영화 거점이 있대, 거기 아카데미극장에서 많은 사람들이 싸워 지켜 만든 거래” 하는 서사요.
극장을 잃은 자리에서 그는 ‘은퇴자 도시, 반도체 도시’ 같은 구호 대신 “원주 사람들이 자부심을 가질 문화”라는 비전을 본다.
동료 활동가들에게
인터뷰 말미, 비슷한 싸움을 하고 있거나 앞두고 있을 동료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을 청했다.
Q. 같은 길 위의 동료들에게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A. 활동가 소진 문제를 이야기하는 자리에서 누군가 “존버가 답이다”라고 했다더라고요. 다들 그래요. 업무가 너무 많고 기본적인 게 보장되지 않으니 소진되죠. 그걸 한 번에 다 해내려 하면 불태워 없어져요. 실제 싸워보니 투쟁은 단판 승부가 아니고 장기전이더라고요. 체력도 중요하고, 무엇보다 내 자신이 제일 중요해요. 세상과 싸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를 파괴하면서까지는 안 하셨으면 좋겠어요. 저도 극장을 지킬 때 너무 간절한 나머지 “무릎이라도 꿇겠다”고 했지만(웃음), 지금 보니 그럴 필요가 없었던 거예요. “돈이 없지, 가오냐 없냐”는 마음으로, 나를 사랑하고 긴 호흡으로 가야 해요.
그는 ‘운동 방식’에 대해서도 덧붙였다. 재판과 물리적 충돌까지 겪다 보면 ‘이런 것만 운동인가’ 싶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Q. 어떤 방식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A. 모든 운동에는 자기와 맞는 방식이 있어요. 호저면에 귀농해 아이를 키우며 자연농으로 농사짓는 분이 있는데, 그게 본인의 운동이라고 하시더라고요. ‘나의 운동’이 따로 있다는 거죠. 그건 살아가면서 깨닫는 거고, 남들과 다른 방식을 택한다고 해서 운동을 포기하거나 실패하는 게 아니라는 걸 기억하면 좋겠어요. 그래야 길게 할 수 있죠. 동료를 믿고, 내가 모든 걸 책임지려 하기보다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하면서요. 나만의 운동을 계속 찾으시길. 투쟁하십시오.
이번 인터뷰 시리즈의 주제는 ‘변화를 만드는 사람들’이다. 10년 전 원주에 온 청년 신동화가 원주를 만나 어떻게 변했고, 원주는 신동화를 통해 어떻게 전환됐는가. 서로 주고받은 ‘전환의 키워드’를 물었다.
Q. 원주와 당신이 주고받은 변화는 무엇일까요.
A. 처음 이곳에 왔던 저는 아무것도 아닌 외지인이었고, 그냥 편하게 살고 싶었던 사람이었어요. 사람들을 만나고 투쟁에 휩쓸리며 지금에 이른 거죠. 우연히 시작된 일이 지역과 사람을 만나면서 삶의 방향이 된 것 같아요. ‘조금 더 사회를 이롭게 하고 싶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면 좋겠다’는 마음은 늘 있었어요. 아이를 낳으면서 그 마음이 더 커졌고, 우리 아이가 원주를 자랑스러운 고향으로 여겼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더 열심히 활동하게 된 것 같아요. 제 개인적 변화는, 원주를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 내가 살아가고 내 아이가 살아갈 곳으로 여기게 된 거예요. 장소에 대한 애착이 강해지고 책임감이 생겼죠. 원주 시민으로 거듭난 것 같아요. 전에는 언제든 떠나도 됐는데, 지금은 떠나면 “너 왜 가” 하며 욕먹을 것 같아요. 이 싸움을 통해 시민으로 인정받은 거죠.
반대로 원주도 조금은 달라졌다고 생각해요. 아카데미극장을 계기로 시민들이 서로 연결되고 목소리를 내면서, 지역의 역사와 공동체를 스스로 지키려는 힘이 조금씩 커졌다고 느껴요.
인터뷰를 진행하며 한 가지를 깨달았다. 원주는 아카데미극장을 포기하는 대신 ‘아친’이라는 시민을 얻었다는 것을 말이다. 신동화는 거기에 한 가지 미래를 더했다. “사라진 것을 똑같이 세우는 걸 넘어서야 한다”고. 보이지 않게 된 과거의 투쟁을 어떻게 지금 존재하게 할 것인가. 그 물음은 여전히 원주의 몫으로 남아 있다.
인터뷰어 : 박누리 ‘왜 모두 지역을 떠날까’라는 질문을 품고 2010년 충북 옥천에 정착했다. 옥천신문 편집부장, 지역잡지 〈월간 옥이네〉 편집장으로 일하며 지역의 이야기를 기록해왔고, 지금은 '농촌기록활동가'로서 이전과 다르게 일하는 실험의 시간을 보내는 중이다. 콘텐츠 스튜디오 누리:사를 통해 지역의 다양한 이야기를 연결하고 전파하는 일을 이어간다.
2026 공익활동가주간의 〈활동가 인터뷰 프로젝트〉는 다양한 지역과 분야에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변화를 위해 노력하는 활동가들의 일과 삶 이야기를 듣고 인터뷰로 기록하는 활동을 지원합니다.
2026년에는 〈활동가, 전환을 말하다〉를 주제로 기획인터뷰를 진행했습니다. 공익활동가가 되는 데 정해진 경로는 없습니다. 교사였던 사람, 광장에서 처음 마이크를 잡았던 사람, 기존 활동의 궤적 위에서 변화를 만드는 방식 자체를 '전환'해 온 사람들도 있습니다. '공익활동'이 더 많은 사람의 선택지가 되길 바라며, 다채로운 전환의 이야기를 기록했습니다.
[기획인터뷰 - 활동가, 전환을 말하다]
무너진 극장 위에서 피어난 시민의 주권
원주 '아카데미의 친구들(아친)' 신동화 사무국장
[편집자주]
60년의 세월 동안 원주의 도심을 지켜온 아카데미 극장은 단순한 건축물을 넘어 지역민들의 희로애락이 스며든 근현대 문화유산이었습니다. 지난 2023년 원주시의 일방적인 결정으로 극장은 끝내 철거되었지만, 그 공간을 지키기 위해 모였던 청년들과 시민들의 저항은 새로운 공동체 운동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공익활동가 주간’을 맞아 원주 '아카데미의 친구들(아친)' 신동화 사무국장을 만나 공간을 잃은 투쟁이 어떻게 시민 주권과 지역 생태계 운동으로 확장되었는지, 그리고 활동가로서 지치지 않고 걷는 법에 대해 이야기 나누었습니다.
서울에서 ‘쉬러’ 원주에 온 한 사람이 책방 주인에서 출판인을 거쳐 ‘활동가’로 호명되기까지의 10년을, 그리고 ‘극장 철거’라는 한 도시의 사건을 기록해봅니다. 인터뷰는 2026년 5월 21일 ‘아카데미의 친구들’ 사무실에서 진행됐습니다.
쉬러 온 원주에서 ‘벼락 활동가’가 되기까지
신동화가 원주에 처음 닿은 것은 2014년 무렵. 서울 토박이였던 그가 20대 초중반을 거치며 도시 생활에 지쳐 있을 때다. 회사 일에 매여 있었고, 반지하를 전전했고, 서로 스쳐갈 뿐인 도시 안 관계에서 스스로를 ‘이방인’처럼 느끼곤 했다. 경의선 출퇴근길에 녹초가 되곤 했던 그는, 어느날 문득 원주로 향하게 된다. 마침 부모님이 먼저 원주로 이주해 있던 터였다.
Q. 처음 원주에 왔을 때, 이 지역은 어떤 공간이었나요.
A. 일단 산이 있어서 너무 좋았어요. 제가 사는 단구동 쪽에 메타세쿼이아길이 있는데, 그 가로수길에서 보는 치악산 풍경이 아름다워요. 눈 쌓이고 단풍 들면 정말 이국적이에요. 집 앞엔 바로 원주천이 있고요. 그게 좀 ‘고향’ 같은 느낌이었어요. 그때만 해도 원주가 많이 개발되지 않아서 무실동도 크지 않았고, 장터가 있고 새벽시장이 열리고, 아카데미극장도 문화극장도 모두 철거 전이었어요. 그런 옛날 건물이 원도심에 남아 있고, 기찻길도 있던 게 좋았어요.
Q. 이주 초기엔 일자리를 찾는 것도 쉽지 않았을 거 같은데요.
A. 맞아요. 제가 원래 웹디자인 일을 했는데, 일감을 찾기가 쉽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그냥 창업을 했죠. 서울에 있을 때부터 제 브랜드를 하나 만들고 싶었는데 여건이 안 됐거든요. 집 근처에 작은 공간이 있어서 거기서 작업을 시작했어요. 처음엔 반려견 용품 쇼핑몰을 만들어서 수제 목줄 같은 걸 제작·판매하고 백화점에 납품도 했고, 나중엔 캔들·드라이플라워 같은 공방까지 확장했고요.
“처음엔 그냥 쉬러 왔고, 언젠가 다시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야 하지 않을까 했다”던 그이지만, 원주에서의 생활은 예상보다 길어졌다.
어느새 이곳에서 결혼을 하고, 아이가 생기면서 그의 삶도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무엇보다, 원래 하던 일을 계속 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공방 작업과 육아를 병행하기가 어려워졌던 것이다. 2년 가까이 집에서 아이 양육에 전념하던 그는 산후우울증을 심하게 겪게 된다. 그만큼 자아 성취에 대한 갈증이 커지기 시작했다.
Q. 그 시기를 어떻게 지나 오셨나요.
A. 우울증이 올 때마다 도서관에 갔어요. 일종의 현실도피였죠. 그 시간이 너무 좋았어요. 원주 시립도서관에 자주 갔는데, 책을 읽다 보니 내가 살아나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아이가 어린이집에 갈 때쯤엔 책방을 열어보자는 결심까지 하게 됐죠.
자신을 살린 ‘책’으로, 그는 비슷한 고민을 가진 사람들을 연결하려 했다. 책방에서 처음 한 사업은 지역문화진흥원의 ‘동네책방 문화사랑방’이었다. 서울에서 꾸준히 공연 활동도 했던 그에겐 여전히 예술과 창작자에 대한 애정이 있었다. 책방을 거점으로 원주 곳곳에 숨은 창작자들을 찾아내는 일이 재미있었다.
Q. 구체적으로 어떤 활동을 하셨나요.
A. 창작자들이 자기 작업을 이야기할 곳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모두의 마이크’라는 걸 기획했어요. 창작자가 자기 책이나 작품, 작업을 북토크 형식을 빌려 소개하고 공연도 같이 하는 자리였죠. 2년 정도 운영했는데, 창작자들을 많이 만나고 애정도 생겼어요.
아카데미극장 보존 활동이 수면 위로 떠오르자, 그는 ‘창작자들이 생각하는 아카데미극장의 보존 이유’를 묻는 인터뷰집 ‘아카데미극장’을 발간했다. 웹디자인을 줄곧 해온 그에게 ‘물성을 가진 책’을 만드는 일은 새로운 발견이었다. 그렇게 ‘지역 문화 아카이브’를 한 축으로, 출판사를 시작했다.
아카이브 작업은 다양했다. 재개발로 사라져가던 원인동 마을의 향수를 기억하기 위한 마을미술 프로젝트 과정을 기록했고, 흔히 성매매집결지로만 인식되는 학성동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담았다. 문화도시·문화재단 사업에 기획자로 참여해 아카이브 활동을 맡기도 했다. 지역 문화예술 구성원 약 200명을 층위별로 모은 라운드테이블 기획에도 참여했다.
다만, 그 가운데에서 책방은 정리됐다. 책방과 출판을 함께할 사무실을 얻은 시점에 아카데미극장 사안이 터졌고, 출판 일의 대부분이던 지역 문화 아카이브 생태계 자체가 무너지면서 일감도 줄었다. 극장 일이 급박하게 돌아가는 가운데 공간을 줄이며 책방은 자연스레 접었다.
앞선 활동에도, 신동화는 오랫동안 자신을 ‘기획자’라 부르지 못했다. “그냥 ‘책방 합니다’라고만 소개했”다. ‘문화 기획 몇 년 했다’고 자신을 소개하는 이들을 보면 신기하고 조금 열없는 기분이 들었다. 그런 그가 ‘활동가’라는 말과는 다르게 마주쳤다.
Q. ‘활동가’라는 정체성은 언제 받아들이게 되셨나요.
A. 극장 활동을 하면서 외부에서 자꾸 저를 활동가로 명명하더라고요. 아름다운재단 인큐베이팅 사업을 하면서도 그랬고요. 그래서 우리끼리는 ‘벼락 활동가’라고 해요. 벼락처럼 활동가가 돼버린 거죠. 처음엔 아무것도 모르고, 이게 흩어지면 안 되니까 절박한 심정으로 했는데, 반년쯤 활동하니까 저랑 너무 잘 맞는 거예요. 제가 그동안 방황하며 ‘사회를 위해 헌신하고 싶다, 더 올바른 방향으로 가는 데 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했던 바람들이, 이게 잘 풀린 거죠.
활동가로 ‘자각’한 뒤의 변화를 그는 책임감과 부담으로 설명했다. 올바르게 행동해야 한다는 의식이 생겼고, 냉소와 우려가 섞인 시선을 함께 받으며 처신에 대한 부담을 느꼈다. 그러나 그 이전과 이후는 분명히 달랐다.
Q. 자각 이후, 무엇이 달라졌나요.
A. 그전에는 그냥 흘러가는 대로,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었다면, 지금은 ‘소명’ 같은 걸 발견한 게 아닌가 싶어요. 그토록 찾아 헤맸는데 뭔지 몰랐던 것을요. 회사 다니고 공연하며 자아 성취는 일부 했지만, 내가 원하는 활동이 ‘공익적인 것’이라는 걸 잘 몰랐어요. 공익활동가라는 직업이 있는지도 몰랐고요. 활동가가 되며 세상을 보는 눈이 많이 달라졌고, 공부도 진짜 많이 했어요.
그가 말한 공부는 활동가의 일상이기도 했다. 극장 철거를 막기 위해 조례와 행정을 공부했고, 기자회견을 위해 기자들에게 어떤 메일을 어떻게 보내야 기사화되는지 문구 하나하나까지 익혔다. 문화재청을 상대하고 국회 토론회를 열며, 어떤 법률로 문화유산이 지정되는지도 배워야 했다. “활동가는 늘 새롭게 떨어지는 것들을 다 공부해야 한다”는 그는 “그게 재미있어 밤새운 기억이 난다”고 했다.
60년의 기운, 그리고 ‘토포필리아’
극장 보존운동의 출발에는 공간 자체가 준 강렬한 경험이 있었다. 인터뷰집 ‘아카데미극장’을 만들기 위해 극장에 처음 들어선 순간을, 그는 또렷이 기억했다. 문화 행사를 기획하고 지역 예술가들의 안식처를 만들던 그에게, 아카데미극장은 운명처럼 다가왔다.
Q. 2020년 아카데미극장이 재개방되었을 때, 내부에서 느꼈던 감각이 매우 강렬했다고 들었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에 매료되셨나요?
A. 붉은 의자들, 철제로 된 그 의자들, 들어가면 나는 옛날 냄새. 생각보다 너무 컸고 그에 압도됐어요. 지난 60년의 세월동안 이 공간 안에서 사람들이 영화를 보며 웃고 울었을 테고, 임검석(극장 따위에 단속 경찰관, 소방관 등을 위하여 마련한 특별석. 일제강점기 시작돼 1980~90년대까지 잔존.) 도 있다고 하니 독재 시절 치열했던 근대사를 겪은 수많은 사람의 기운이 확 느껴지면서 소름이 돋았어요. 그 시대로, 1960년대로 확 들어간 느낌이었죠.
여기서 그는 ‘토포필리아(topophilia)’라는 개념을 꺼냈다. 장소에 대한 사랑·애착을 뜻하는 말이다. 60년이 넘은 극장, 그 극장과 나이 차가 큰 청년 활동가·기획자들이 왜 그토록 강하게 결합했는가 하는 물음에 대한 그의 답이었다. 그는 이 질문에 “답을 잘해야겠다 싶어 (사전질문지를 받고) 어제 또 공부했다”며 웃었다.
"시민 개개인들이 오래되고 낡은 것들의 가치를 깨닫고 지키려는 감성과 노력이 필요해요. 그것이 공공재이든 사유재이든 말이죠. 오래된 물건은 나름의 시련과 혼을 가지고 있어요. 오래된 것으로부터 시간의 결을 느낄 수 있어야 해요. 역사라는 숫자에 우리는 감동할 수 있어야 하고 그 속에서 펼쳐진 사건과 사물에 감정 이입할 수 있어야 다시는 아카데미와 같은 소중한 것을 잃지 않을 거로 생각해요. 오래되고 낡은 것들의 가치를 알고 감동할 줄 아는 시민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도시는 아름다운 도시가 될 거예요."
신동화가 인터뷰집 ‘아카데미극장’에서 가장 좋아하는 부분. 178쪽에서 발췌.
Q. 청년들과 60년 된 극장 사이의 연결 고리는 무엇이었을까요.
A. 저 스스로를 돌아보면, 저는 1980년대 후반 서울 광진구 자양시장 옆에서 자랐어요. 아버지가 전파사를 하셨고, 지금의 편의점 격인 ‘슈퍼마켙’이 있던 시절 시장 골목을 누비던 세대죠. 아날로그와 디지털 사이, 레트로와 빈티지 감수성을 가진 사람인 거죠. 그래서 극장 공간에 압도되면서도 좋아했던 것 같아요.
그럼 다른 사람들은 왜 그랬을까 생각하다 떠올린 게 토포필리아예요. 예술하는 사람들은 인간의 본질, 인간 원형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하잖아요. 도시에서 지친 사람들이 결국 지역을 찾고 안주할 공간을 찾는 것도, 문화재를 보존하는 것도, 오래된 것의 서사에 감명받는 감수성이 본능적으로 있기 때문이라고 봐요. 단순히 오래된 건물을 지키자는 차원을 넘어, 그 장소가 주는 서사와 역사 속에서 인간성을 회복하고 소통하려는 갈망이 있었던 거죠. 빠르고 새것만 추구하는 세상에서 이 장소가 가진 깊이를 지켜야 한다고 판단한 겁니다. 비록 외지에서 왔거나 그 시절의 극장을 직접 경험하지 못한 청년들일지라도요. 투쟁 과정에서 장소 애착이 더욱 강력하게 형성됐던 것 같기도 해요. 그것이 자신이 믿는 가치관과 강하게 결합했던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는 ‘지역 활동은 곧 고령화’라는 통념에 대한 다른 해석이기도 하다. 흔히 원주는 도시라서 아카데미 극장 투쟁 현장에서도 청년이 많다는 식으로 단순하게 설명되지만, 그는 장소 애착이라는 정서적 고리가 세대를 가로질러 작동했다고 본 셈이다.
철거의 밤, 그리고 타인의 주체성
저항에도 불구하고 극장은 폐쇄·철거됐다. 그 과정을 지나며 겪은 내면의 변화는 컸다.
Q. 철거가 결정되고 진행되는 과정을 보며 어떠셨나요.
A. 당시엔 정말 절박한 심정이었어요. 극장이 지켜지기만 한다면 자존심도 다 내려놓을 수 있다는 심정으로 간절했죠. 가장 기억에 남는 건 공무원들과 대치하던 장면이에요. 제가 책방을 하다 보니 처음에 ‘수호대장’으로 책방 사장님들을 불렀거든요. 네 명 중 셋이 책방 사장, 한 명이 친한 사진작가였는데, 제가 부른 사람들이 압박 속에 숨을 못 쉬던 장면이 기억나요. 뒤에서 유리 깨지는 소리도 나고……. 그게 너무 미안하고 죄책감이 들었어요.
그런데 그 죄책감은 예상치 못한 방향에서 풀렸다. 그날 저녁 촛불 모임에서 사람들은 무엇이 힘들었는지 나누며 함께 울고 울었다. 그렇게 서로를 위로하는 모습을 보며 그는 큰 깨달음과 함께 위안을 얻었다.
A. 제가 불러서 온 사람들이니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는데, 그게 아니더라고요. 이 사람들도 진짜 극장을 지키고 싶어서, 이 가치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선택해서 온 거였구나. 이건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일이구나 하고요.
자신의 주체성뿐 아니라 타인의 주체성을 함께 발견한 순간이었다. 이 경험은 뒤에 그가 말하는 ‘시민의 힘’이라는 인식으로 이어진다.
2022 아카데미 정원 만들기 ⓒ아카데미의친구들
“우리는 모두 이방인입니다”
한 인터뷰에서 그는 “지금은 노마드의 시대이고, 정통성이나 정당성보다 개인의 가치와 선택에 집중하는 세대가 우리”라고 말한 바 있다. 그 문장의 배경에는 당시 겪은 ‘억하심정’이 있었다.
A. 대립하던 분들이 “너희 다 외지인 아니냐, 서울로 돌려보내라”는 식으로 말했어요. 그게 너무 억울했어요. 처음에는 “청년들이 와서 좋다”더니, 정작 갈등이 생기니까 “너네는 토박이도 아닌데 왜 하라는 대로 안 하냐”는 거잖아요. 인구 수는 늘려야 하니 이주 청년은 필요한데, 지역의 의사결정 권한은 단 1도 나눠주기 싫다는 기득권의 속내가 빤히 보였어요.
그렇게 배타적인 태도라면, 지역은 결국 소멸할 수밖에 없어요. 권력은 갖고 싶고 나눠주긴 싫지만 새로운 사람은 왔으면 하는 그 모순이 늘 문제를 만들어요. 저는 다 이방인이라고 생각해요. 이제 자기 고향에서 평생 터 잡고 사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요. 그러니 정통성이나 순혈주의를 따질 게 아니라, 진짜 애착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환대할 준비가 돼야 지역의 지속가능성이 열려요.
이 대목은 앞서 말한 장소 애착과 정확히 맞물린다. 의미 있는 장소에 애착을 가진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가 곧 지역 소멸을 막는 힘이 되고, 애착을 가지면 출생지와 무관하게 그곳은 ‘고향’이 된다. 그는 “이런 이야기를 청년 단위에서 많이 해야 한다”며, 청년이야말로 이주를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세대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 지점에서 인터뷰는 자연스레 지역 기득권의 문제로 이어졌다. ‘토박이냐 아니냐’는 프레임이 결국 기득권을 지키는 도구로 쓰인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지역 청년의 로컬 활동 철학은 상당히 진보적일 수밖에 없다는 해석에, 그는 동의했다.
Q. 그 시대를 직접 겪지 않은 이주 청년에게 ‘지역의 유산’은 어떤 의미인가요.
A. 전쟁과 가난, 독재를 겪은 세대에게 그 극장은 별게 아닐 수 있어요. 당시 극장은 ‘대한늬우스’ 같은 정권의 선전물이 함께 상영되던 공간이기도 했으니까요. 그런데 그걸 겪지 않은 세대가 보는 또 다른 의미가 있거든요. 그 부분을 수용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 잃어버린 게 너무 많아요. 지금까지의 정치 방향은 근대사의 상처나 보기 싫은 것들을 다 없애고 새것으로 갈아치우자는 걸로밖에 안 느껴져요. 단순히 ‘옛날 거 지키자’가 아니라, 인간의 본질과 본성이 무엇인가를 고민하면서 정책을 펴야 하지 않을까요.
좋은 어른들, 그리고 원주라는 토대
지역 내 청년 활동가들이 흔히 겪는 난제 중 하나는 기존 지역사회 원로와의 소통과 결합이다. 아친은 투쟁 과정에서 풍물시장 상인 300명의 서명을 직접 받아내는가 하면, 생협운동이나 무위당 장일순 선생의 맥을 잇는 지역 원로들과 단단한 연대를 맺어 주목받았다. 이 굳건한 세대 연대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Q. 나와 다른 세대, 특히 지역 상인들이나 어르신들과 연대하고 소통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나 원칙이 있었다면 소개해 주십시오.
A.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희 소통 잘 못합니다. 어르신들께 대들기도 많이 대들었어요(웃음). 우리가 소통을 완벽하게 했다기보다, 원주라는 지역에 정말 깨어있고 훌륭한 어른들이 계셨던 덕분이에요. 저희 공동대표를 맡아주셨던 이현주 대표님, 무위당사람들의 성락철 이사장님, 상지대 공제욱 교수님 같은 분들이 대표적입니다. 제 부모님 연배이신데, 사안을 해석하는 시선과 가치관이 저희와 완전히 통했어요. 나이나 경력을 내세워 위계를 잡지 않으시고, 언제나 청년들의 선택을 전적으로 존중하며 든든하게 뒤를 받쳐주셨죠.
그 ‘좋은 어른들’의 뿌리를 따라가며 그는 원주라는 도시의 역사를 새로 알게 됐다고 했다. 원주는 한국 협동조합·생명운동의 거점으로 꼽히는 곳이다. 무위당 장일순과 원동성당 지학순 주교로 상징되는 민주화·생명사상의 흐름이 한살림 등 협동조합 운동으로 이어져 왔다. 그는 이 맥락을 인터뷰에서 직접 짚었다.
Q. 그 어른들의 뿌리를 따라가니 무엇이 보였나요.
A. 그분들은 협동조합과 민주화 운동을 경험한 분들이었어요. 지금 무위당 장일순 선생이 생명사상과 협동조합 운동을 통해 지역공동체의 가치를 일깨웠고, 지학순 주교가 유신독재에 맞서 민주화와 인권을 위해 목소리를 냈던 것처럼 그 시대에 뿌려진 씨앗이 어떻게 흐르고 있는지를 알게 된 거죠. 원주의 협동조합은 결국 생명과 땅의 힘을 믿는 사람들이에요. 쌀 한 알도 소중하고 그 안에 우주가 있다고 믿는 사람들. 그러니 기득권은 우리를 무시하고 밀어버리면 없앨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생명의 힘을 믿는 지역 어른들은 권력 없는 청년들에게도 가능성이 있다고 믿고 지지해 주신 거예요.
이런 토대 위에서, 아친은 외지인 비중이 높은 조직(사무국 3명 중 2명이 외지인, 운영위원도 절반 이상이 외지인)이면서도 원주 시민사회의 역사적 맥락을 잇는 주체로 호명됐다. “지역의 원로들이 세대를 이어 이 활동을 이을 수 있도록 청년들을 호명해 주신 셈”이라고 그는 표현했다.
극장 이후, ‘커먼즈’로
2023년 10월 극장이 철거된 뒤, 아친은 ‘지키던 것이 사라졌으니 해산해야 하는가’라는 질문 앞에 선다.
Q. 극장이 사라진 뒤엔 무엇을 의제로 삼았나요.
A.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너무 많았어요. 아카데미극장의 철거와 함께 문화도시가 해체되며 문화 생태계가 초토화되었고, 또 재판도 진행 중이었죠. 책임져야 할 사람은 벌을 받지 않았고, 전방위적 압박이 이어졌어요. 우리의 다음 싸움은 무엇일지 친구들과 많은 토론과 논의를 거듭했죠. 그러면서 우리가 처음 모인 건 극장 보존을 위해서였지만 결국 지키고 싶은 건 ‘시민의 주권’이라는 걸 깨달았어요. 왜 4년짜리 임기직 시장이 시민 모두의 재산을 독점하고 파괴하는가에 대한 질문이었죠. 이건 폭력이라는 생각에 도달했고, 그러면서 ‘커먼즈(commons, 공유재)’라는 활동 핵심 키워드를 도출할 수 있었어요.
커먼즈는 공동체가 함께 관리하고 누리는 공유 자원·공유 영역을 뜻한다. 극장이라는 물리적 공간에서 ‘시민 모두의 것’이라는 더 넓은 개념으로 운동의 좌표를 옮긴 것이다. 이 전환은 연대의 확장으로 이어졌다. 지역 공유재를 위협하는 ‘치악산 케이블카 사업’이 제기되자, 이를 함께 논의하는 포럼도 열었다. 설악산 케이블카 반대 단위, 전국 케이블카 연대와 만났고, 홍천 양수발전소 건설 반대까지 힘을 보탰다. 극장 보존 투쟁을 통해 인연이 닿았던 동두천 성병관리소 보존 투쟁에도 연대했다.
Q. 다양한 연대를 거치며 무엇을 보셨나요.
A. 밖에서 보면 모두 타고난 투쟁가 같지만, 알고 보면 다 작은 무언가에서 시작해 “내가 겪은 문제가 저 사람 문제와 같네” 하며 연결되더라고요. 한편으론 한국 사회의 문제가 이렇게 뿌리 깊고 다 연결돼 있구나 싶기도 했지만, 또 한편으론 이게 ‘시민의 힘’이구나, 우리가 연결돼 있구나를 발견하게 돼요. 앞서 유리창 너머의 그 장면, 각자가 개인적으로 선택했다는 게 바로 그 지점이에요. 나 혼자 짊어져야 한다는 부담이 있었는데, 다 함께 느끼고 있었던 거죠.
아친 최은지 대표와 함께.
지역언론을 향한 질문
전국적인 연대로 강단을 보여주는 아친이지만, 내밀한 지역 권력 지형에서는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을 이어가야 했다. 특히 극장 투쟁에서 마주한 지역 언론의 역할은 엇갈렸다. 그는 원주MBC의 보도를 가장 먼저 꼽았다.
Q. 당시 지역언론의 분위기는 어땠나요.
A. 원주MBC 권기만 기자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저희 활동을 팔로우해 주셨어요. 이 문제를 함께 고민하고 때로는 촌철살인의 조언도 해주셨어요. 나중에 아카데미 극장 투쟁 보도로 기자상도 받으셨을 정도로 최선을 다해 이 사안을 다뤄주셨어요. 저희의 소중한 ‘연대자’라고 생각하는데, 이렇게 표현하면 부담스러우시려나요?
반면 일부 지역 언론에 대해서는 비판이 분명했다. 기계적 중립에 머물거나 검증 없이 철거 찬성 측 입장을 실었던 일부 풀뿌리 지역 언론에 대한 아쉬움은 지금도 여전하다.
Q. 다른 지역언론은 어땠나요.
A. 편하게 말하면 정파적으로 이용하는 느낌이었어요. 아카데미극장 보존 운동이 7년 간 지속되다보니 협력해왔던 지역 언론들도 있었는데, 시장이 바뀌니 달라지더라고요. 지자체 홍보 예산 지원 등 지역 언론이 처한 여러 상황이 있겠지만, 그런 변화가 아쉽게 느껴졌어요. 아친의 무죄 판결 뒤 고발 당사자였던 ‘시장의 처벌불원서 덕분에 무죄가 선고되었다’는 허위 사실이 담긴 기고를, 사실관계 검토 없이 그대로 실어버린 일도 있었어요. 그래서 언론중재위 제소를 고민하기도 했어요.
여기서 그는 ‘공정’의 의미를 되물었다. ‘양쪽 입장을 같은 분량으로 싣는 것이 곧 공정이라는 통념’에 대한 문제 제기다.
Q. 공정이란 무엇이라고 보시나요.
A. 공정하다는 게 그냥 ‘상대 입장 싣고 내 입장 싣고’가 아니잖아요. 그건 기계적 중립이죠. 최근 한 매체에서 무죄 판결 이후의 소회를 기고해 달라고 해서 썼어요. 무죄 판결은 났지만 사회적 갈등이 해결된 건 아니다, 지역에 깊게 남겨진 불신과 갈등을 어떻게 회복해야 할지 고민해야 할 때이며, 이 과정에서 언론의 책임 역시 가볍지 않다고 지적했죠. 상대 입장을 그냥 싣는 게 공정이 아닌데 언론도 이 점을 반성해야 한다고요. (그런 내용이라) 안 실어줄 줄 알았는데 실어주더라고요(웃음). 그런데 깨진 신뢰를 회복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려요. 사회적 비용으로 따지면 어마어마한 거죠.
언론 환경 자체가 기울어져 있다는 인식도 있었다. 그는 전 원주시장이 기자 출신이어서 언론을 잘 다룬다고 봤고, 이른바 ‘관변 언론’이 많아 아친이 성명을 하나 내면 수십 곳이 동시에 반박하는 구도였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렇게 쏟아지는 정보를 시민이 걸러 보긴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지역 언론에 쓴소리를 해주는 독자의 존재가 그래서 더 귀하다. 당장은 듣기 싫을지 몰라도, 결국 지역 언론의 발전은 “너희 이거 잘못했어” 하고 말해주는 독자에게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아카데미상영회 씨네마스코프전 홍보물 ⓒ아카데미의친구들
“나는 당신의 이웃입니다”
거대한 기울기에 맞서, 아친이 택한 방식은 ‘밖으로 나가는 것’이었다.
Q. 행정 권력과 왜곡된 프레임 속에서 일반 시민들에게 아친의 활동이 '데모꾼의 정치 싸움'이 아닌 공동체의 가치를 지키는 일임을 설득하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어떤 방식으로 시민들에게 다가갔나요?
A. 행진하고 공연하고, 노란 텐트 앞에서 문화행사를 했어요. 지역 맘카페에 홍보해 어린이들을 위한 비눗방울 공연도 해주고요. 저는 ‘전복 하는 사람’. ‘데모꾼’이 아니라 “진짜 시민이고, 당신처럼 똑같이 이곳에서 아이를 키우는 이웃입니다”를 보여주려 한 거예요.
2023년 8월 29일의 새벽은, 그래서 더 또렷이 기억한다. 아친 활동을 하며 수없이 많은 권력에 맞섰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가장 무서웠던 날. 철거를 위해 건장한 용역들이 들이닥쳤을 때다. 온몸이 벌벌 떨렸지만, 빗속에서 그는 현장 건너편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A. 비를 맞으며 호소했어요. “우리는 당신들과 다른 사람이 아니라 당신들의 이웃이고 친구인 사람들이다, 제발 다치게 하지 말라”고요. 혹시라도 누가 다칠까봐 무서웠던 기억이 나요. 새벽 4시에 모여 8시 출근 시간까지, 차가 지나갈 때마다 계속 그렇게 외쳤어요.
이 호소는 뜻밖의 우군을 만들었다. 처음엔 시위를 거리껴 하던 맘카페 회원들이 그를 직접 만나며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웃이 이런 마음으로 나섰구나” 하는 서사를 알게 됐고, 이후 행진에 함께 나와 주었다. 적극적인 참여는 못하더라도 지지하고 소문 내주는 이웃들도 여론을 만들었다. 시민운동으로의 전환이 그렇게 일어났다.
버티는 일의 경제학
투쟁 기간 경제활동은 사실상 멈춘다. 활동가의 생계는 늘 위태롭다.
Q. 경제적 생계 유지나 번아웃 문제는 어떻게 감당하셨어요?
A. 정말 돈이 너무 쪼들리고 힘들었어요(웃음). 현재 아친 대표인 최은지 활동가는 당시 미디어 강사 수입을 최소한으로 줄여가며 버텼고, 저 역시 문화기획 프리랜서로 2023년에는 학성동 성매매 집결지 아카이브 사업 등 두세 개 외주를 정신없이 병행하면서 대치 현장으로 뛰어갔죠. “시청에 난리 났다” 하면 달려가고, 다시 와서 작업하고. 아마 친구들 모두 그땐 그렇게 정신없이 살았을 거예요. 그러다 극장이 무너지고 난 후인 2024년엔 공황이 왔어요. 대인기피처럼 몇 달간 사람을 못 만났죠.
이후 아름다운재단의 인큐베이팅 지원 사업에 선정돼 최소한의 활동비를 지원받게 됐지만, 그는 지금도 디자인 외주와 노동인권 강의 등을 병행한다. 활동가의 기여에 대한 지역사회의 후원이나 기본소득 시스템이 절실한 이유다.
Q. 소진과 압박 속에서도 아친이라는 이름으로 깃발을 내리지 않는 근본적인 동력은 결국 어디서 오는 걸까요.
A. 동력이 자꾸 생겨서 문제예요(웃음). 없어야 그만두는데 자꾸 생겨요. 결국 사람에게서 얻는 것 같아요. 무언가 바뀌어가는 걸 볼 때요. 커먼즈를 이야기하다 보니 환경 활동으로도 이어졌고, 무위당숲학교에서 생태 관련 기획에 참여하고 있어요. 단순히 생태계를 관찰하는 게 아니라, 우리 지역에 어떤 생명이 살고 어떤 공동체가 있으며 하나가 사라지면 전체 생태계가 무너진다는 걸 계속 이야기하는 거죠. 그에 사람들이 공감하고, 직접 체험하며 의미를 발견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동력을 얻어요.
신뢰도 쌓였다. 아친이 공공재와 생태계의 연결성을 지속해서 이야기하면서, 지역 문화예술계 관련 비위나 고충 등 개인이 해결하기 어려운 일들에 대한 제보도 들어온다. “버텨줘서 고맙다”는 말들에 벅찬 힘도 얻는다. “어려울 때 지지해 줄 수 있도록 튼튼하게 버텨야겠다, 우리가 막막했을 때 아무도 찾을 수 없었던 그런 상황을 만들지 말아야겠다”는 마음이 곧 동력이다.
그러나 부담도 따른다. 최근 지방선거를 앞두고는 정치인들의 잘못된 발언에 대한 대응으로 바빴는데, 이런 과정 자체가 큰 부담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그는 “걱정이 안 되는 건 아니다. 여러 번 그만두자고 마음먹다가도 결국 다시 하게 된다”며 “막연하지만 시민들을 믿는 마음으로 버티게 된다”고 말했다.
아친은 어느새 원주의 ‘커먼즈’이자 ‘대나무 숲’이 됐다. “힘들면 아친 찾으라”는 말처럼, 작은 일에도 시민들이 찾는다. 물론 “좋은 점도 있지만 힘든 점도 있다”는 그는 소진의 문제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전화위복의 가능성
이 갈등이 “전화위복의 계기가 되어 원주를 기억하는 방식을 바꿀 것”이라는 일각의 평가도 있다. 신동화에게 지난 1년의 사건이 남긴 전환의 가능성을 물었다.
Q. 어떤 가능성을 보시나요.
A. 실제 성과로는 시장의 독단을 견제할 ‘시정 정책 토론 조례’를 바꿨고, 재판 결과 무죄가 선고되면서 저희 활동의 정당성도 인정받았죠. 근현대 문화유산 보존 관련 법률도 개정했어요. 우리 활동이 시스템에 영향을 미칠 수 있구나를 느꼈죠. 이번 지방선거에서 “아카데미 같은 사례를 만들지 않겠다”며 시민 주권을 강조하는 흐름이 생긴 것도 조금은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해요. 앞으로는 정치인들도 정치적 부담이 커져서 시민 의견을 무시한 채 일방적으로 결정하기는 어려울 거예요. 사회적 분위기는 이제 개선해 나가야죠. 그 과정에 우리가 계속 목소리를 내며 있을 거고요.
그는 이 문제를 지역 소멸, 나아가 민주주의의 작동 방식과 연결했다. 다수결 원리가 정파적으로 악용되는 현실에서, 더 오래 이 땅에 살아야 하는 청년과 소수자의 목소리가 반영돼야 한다는 것이다.
Q. 아친의 활동을 어떻게 자리매김하시겠어요.
A. 아친 활동이나 주장에 “시민 모두가 공감했다”고 할 순 없어요. 확실히 소수죠. 하지만 그 소수의 목소리가, 우리가 이 지역에서 더 오래 더 잘 살기 위해 고민할 화두를 던진 정도는 되지 않을까요. 기후위기처럼 지속가능성이 위협받는 상황에서는 소수자의 목소리를 반영해야 한다고 봐요. 전화위복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식으로 계속 쌓아가야죠.
아카데미극장 철거, 도시재생 실패에 대해 냉정한 관찰자이기도 했던 그는 ‘원주만의 지역성을 바탕으로 한 브랜딩’이라는 제안을 내놓기도 했다.
Q. 원도심의 미래를 어떻게 그리시나요.
A. 문화재생, 도시재생이 잘 안 되잖아요. 전주 선미촌도 성공 사례였지만 시간이 지나며 공실이 많아졌고, 강릉 명주동도 반짝하다 다시 공실이 생기더라고요. 예산이 투입될 때만 반짝하고 사라지면 끝인 경우가 대부분이에요. 사람들은 자본을 따라가고 ‘힙한 것’을 따라가니까요. 그래서 본질적 가치에 공감하는 사람을 많이 만들어야 하는데, 그건 교육과 구조까지 건드려야 할 문제예요.
그가 제시한 방향은 ‘서사와 공간의 브랜딩’이다. 광주에 민주화기념관이 있듯, 각 도시가 가진 역사와 서사를 활용해야 소멸하지 않는다는 논리다. 그는 아파트뿐인 신도시를 예로 들며 “스토리 없는 도시는 놀러 가고 싶지 않다”고 했다. 원주의 협동조합·저항·생명존중의 역사를 원도심 브랜딩으로 삼자는 제안이다.
그 구체적 비전이 ‘영상문화 거점도시’다.
Q. 어떤 비전인가요.
A. 원주가 영상문화 거점도시가 된다면 어떨까요? 원주는 지역 이야기와 정체성을 담은 영화가 꾸준히 만들어지고 있는 곳이에요. 아카데미극장이 있었고, 그 극장을 사랑한 시민들이 모인 도시이기도 하고요.
아카데미 극장 투쟁의 경우 전국의 영화인들이 연대해 왔어요. 원주에서 영화인들이 투쟁한 서사가 있으니, 이걸 키울 토대가 마련됐다고 생각해요. 극장이 사라진 뒤에도 사람들이 모여 영화를 보고, 이야기를 나누고,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어 갈 공간과 활동을 이어가는 거죠. 강원에 정동진독립영화제, 원주 옥상영화제가 있는데, 이런 게 지역 브랜딩과 맞아요. 전국에 다 똑같은 출렁다리 말고, “원주에 작은 영화제와 영화 거점이 있대, 거기 아카데미극장에서 많은 사람들이 싸워 지켜 만든 거래” 하는 서사요.
극장을 잃은 자리에서 그는 ‘은퇴자 도시, 반도체 도시’ 같은 구호 대신 “원주 사람들이 자부심을 가질 문화”라는 비전을 본다.
동료 활동가들에게
인터뷰 말미, 비슷한 싸움을 하고 있거나 앞두고 있을 동료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을 청했다.
Q. 같은 길 위의 동료들에게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A. 활동가 소진 문제를 이야기하는 자리에서 누군가 “존버가 답이다”라고 했다더라고요. 다들 그래요. 업무가 너무 많고 기본적인 게 보장되지 않으니 소진되죠. 그걸 한 번에 다 해내려 하면 불태워 없어져요. 실제 싸워보니 투쟁은 단판 승부가 아니고 장기전이더라고요. 체력도 중요하고, 무엇보다 내 자신이 제일 중요해요. 세상과 싸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를 파괴하면서까지는 안 하셨으면 좋겠어요. 저도 극장을 지킬 때 너무 간절한 나머지 “무릎이라도 꿇겠다”고 했지만(웃음), 지금 보니 그럴 필요가 없었던 거예요. “돈이 없지, 가오냐 없냐”는 마음으로, 나를 사랑하고 긴 호흡으로 가야 해요.
그는 ‘운동 방식’에 대해서도 덧붙였다. 재판과 물리적 충돌까지 겪다 보면 ‘이런 것만 운동인가’ 싶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Q. 어떤 방식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A. 모든 운동에는 자기와 맞는 방식이 있어요. 호저면에 귀농해 아이를 키우며 자연농으로 농사짓는 분이 있는데, 그게 본인의 운동이라고 하시더라고요. ‘나의 운동’이 따로 있다는 거죠. 그건 살아가면서 깨닫는 거고, 남들과 다른 방식을 택한다고 해서 운동을 포기하거나 실패하는 게 아니라는 걸 기억하면 좋겠어요. 그래야 길게 할 수 있죠. 동료를 믿고, 내가 모든 걸 책임지려 하기보다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하면서요. 나만의 운동을 계속 찾으시길. 투쟁하십시오.
이번 인터뷰 시리즈의 주제는 ‘변화를 만드는 사람들’이다. 10년 전 원주에 온 청년 신동화가 원주를 만나 어떻게 변했고, 원주는 신동화를 통해 어떻게 전환됐는가. 서로 주고받은 ‘전환의 키워드’를 물었다.
Q. 원주와 당신이 주고받은 변화는 무엇일까요.
A. 처음 이곳에 왔던 저는 아무것도 아닌 외지인이었고, 그냥 편하게 살고 싶었던 사람이었어요. 사람들을 만나고 투쟁에 휩쓸리며 지금에 이른 거죠. 우연히 시작된 일이 지역과 사람을 만나면서 삶의 방향이 된 것 같아요. ‘조금 더 사회를 이롭게 하고 싶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면 좋겠다’는 마음은 늘 있었어요. 아이를 낳으면서 그 마음이 더 커졌고, 우리 아이가 원주를 자랑스러운 고향으로 여겼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더 열심히 활동하게 된 것 같아요. 제 개인적 변화는, 원주를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 내가 살아가고 내 아이가 살아갈 곳으로 여기게 된 거예요. 장소에 대한 애착이 강해지고 책임감이 생겼죠. 원주 시민으로 거듭난 것 같아요. 전에는 언제든 떠나도 됐는데, 지금은 떠나면 “너 왜 가” 하며 욕먹을 것 같아요. 이 싸움을 통해 시민으로 인정받은 거죠.
반대로 원주도 조금은 달라졌다고 생각해요. 아카데미극장을 계기로 시민들이 서로 연결되고 목소리를 내면서, 지역의 역사와 공동체를 스스로 지키려는 힘이 조금씩 커졌다고 느껴요.
인터뷰를 진행하며 한 가지를 깨달았다. 원주는 아카데미극장을 포기하는 대신 ‘아친’이라는 시민을 얻었다는 것을 말이다. 신동화는 거기에 한 가지 미래를 더했다. “사라진 것을 똑같이 세우는 걸 넘어서야 한다”고. 보이지 않게 된 과거의 투쟁을 어떻게 지금 존재하게 할 것인가. 그 물음은 여전히 원주의 몫으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