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획인터뷰 - 활동가, 전환을 말하다]
이제부터 할 일은, 기업의 안전 관리자들을 세상과 연결하는 것
주식회사 픽켐 대표 김신범

노동환경건강연구소의 수석연구원이자, 주식회사 픽켐 대표이사로 새로운 도전을 시작한 김신범 님.
노동환경건강연구소를 만난 행운
Q. 소개를 부탁드려요. 김신범을 한 단어, 한 문장으로 표현한다면?
저는 이렇게 쭉 사는 과정을 돌이켜 보면, 약간 '또라이' 기질은 있지만 겁이 되게 많은 또라이인 것 같아요. 꾸역꾸역 뭔가를 하긴 하는데 되게 무서워하고 조심하면서 하는 그런 편이에요. 근데 또 뭘 하면, 마음을 먹으면 일단은 가요. 되게 겁이 많아서 그런 거를 많이 안 하지만. 약간 그런 스타일이에요. 명함에 쓰여 있는 것들로 소개하자면 픽켐 대표이사이고, 우리 노동환경건강연구소에서는 수석연구원이에요. 제가 그냥 자유연구원으로 해달라고 그랬는데 없어 보인다고, 자기네들한테 그런 게 필요하다고 그래서 수석연구원이 되었어요.
사실은 제가 대학원 가기 전에 부끄러웠던 게, 원래는 현장 들어가려고 인천에서 세미나까지 하는데 그때 선배들이 현장에서 나왔어요. 들어갈 때가 아닌 것 같다고 하면서. 제가 4학년쯤 됐을 때였을 거예요. 선배들이 “야 술이나 한잔 하러 가자” 그러면서 술을 먹는데 “우리도 정리할 거니까 너도 이제 그만 와.” 그러는데 되게 속상해야 되는데 제 속마음이 ‘다행이다.’(웃음) 난 도대체 뭘까… 이렇게 하기 싫으면서 도대체 왜 이렇게 살려고 하는 걸까? 그러니까 저를 혐오하게 됐어요, 그 순간. 근데 용서가 안 되더라고요. 되게 멋있게 저를 포장하고 산 거잖아요.
저는 대학원을 갈 때 그냥 어떤 단체 활동가가 되기 위해서 대학원을 간 거거든요. 제가 조교 생활 할 때는 IMF였고 방송통신대가 동생들 대학 보내기 위해서 대학을 포기한 그런 분들이 오시는 학교니까 되게 뜨거웠어요, 학생들이. 논문을 써야 되는데 “나는 실험을 해보고 싶다. 그러면 공부한 것 같은 느낌이 들 것 같다.”는 거예요. 근데 이건 들어주고 싶은 거예요. 마침 우리 과에 실험실이 있고 제가 관리하기도 했고요. 그래서 실험실 쓰고 싶은 학생들 모집해서 실험을 하는데, 그때 한국노총 연구소가 만들어졌어요. 노동조합의 연구소가 나 같은 놈한테는 더 맞겠다는 생각도 들었고, 노동조합이 연구소 채용이 다시는 없을 기회라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때 고민을 했지만 뭐 어떻게 해요. 눈앞에 있는 사람들을 버리면 안 되니까. 그래서 이분들은 논문 써서 졸업하고, 우리 연구소가 만들어지면서 그냥 자연스럽게 오게 되었죠.
Q. 노동환경건강연구소 창립멤버네요. 연구소 소개도 부탁드릴게요.
연구소는 원진레이온 직업병 때문에 만들어졌어요. 1988년도에 직업병이 알려진 이후 10년간 싸움을 해서 보상을 받고, 최종적으로 정부를 상대로 이 녹색병원을 설립할 수 있는 기금을 보상 받았어요. 개별 보상으로 그친 게 아니라 사회에 자기와 같은 사람들이 생기지 않도록 병원하고 연구소를 만들었던 거죠. 예전에도 자기네 공장에 와서 측정도 하고 조사도 다 했대요. 근데 문제 없다고만 했으니까, 그런 거짓말을 안 하는 연구자들이 필요하다, 그래서 만들어진 연구소입니다. 처음에는 화학물질이나 이런 것들에 관심이 많았지만 근골격계 질환이나 정신 건강, 지금은 농민들, 정규적인 노동을 하지 않는 다양한 노동자들의 문제들을 연구하고 있어요.
사실 저는 화학물질은 할 생각이 없었어요. 왜냐하면 화학물질로 인한 피해는 규명이 돼요. 그리고 조사하면 돼요. 근데 자기 목소리를 내지도 못하는 노동자들이 너무 많이 보이는 거예요. 그런 일을 하고 싶었죠. 그래서 제가 민주노총하고 같이 했던 일이 의자 캠페인, 서서 일하는 노동자들에게 의자를 제공하는 그런 거 기획하고 환경미화원 씻을 수 있는 권리, 그런 일을 더 하고 싶어 해서 먼저 했어요. 왜냐하면 우리 연구소를 당시에 부를 수 있었던 노동조합들은 대기업 노동조합들이거든요. 물론 그들도 환경이 너무 열악한 상황이었던 건 맞지만 그거보다 훨씬 어려운 노동자들이 제 눈엔 보이니까. 노조도 없는 곳들이요. 그래서 연구소 들어와서 서울 일반노조 조합원 생활도 했어요. 더 많이 이해하고 해 보려고.
근데 작업 환경이나 화학물질 쪽을 담당하던 친구가 우리 연구소 실장으로 있었는데 대학 교수로 가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잠시 구원 투수로, 그러면 이거 맡아서 뭐 좀 방향을 좀 잡아주겠다 했는데, 못 빠져나가고 지금까지(웃음) 인생이 이래요.

인터뷰 당일 날, 20년을 활동해온 노동환경건강연구소 입구 앞에서.
20년 동안의 활동, 그리고 전환
Q. 20년이 훌쩍 넘게 연구소에서 활동을 하셨는데 활동해 오면서 기억에 남는 캠페인이 어떤 게 있을까요?
의자 캠페인을 통해서는 제가 배운 게 많아요. 백화점이나 마트에 그 당시에는 진짜 의자가 없었거든요. 이분들이 얼마나 힘든지 아니까. 제가 가서 물어보면 “무슨무슨 법, 이런 게 우리한테 적용되지도 않는데…” 무슨! 적용되는데! 그러니까 자기가 노동자라는 생각이 너무 부족한 상태였던 거예요. 그래서 그런 캠페인을 만들었던 건 ‘우리가 노동자다’, ‘법에 의해서 내가 앉을 권리가 있었던 거구나’ 이 생각을 만들어주기 위해서였거든요. 어린이들 관련된 일들도 했어요. ‘PVC 없는 학교 만들기 캠페인’하다가 유자 학교라고 ‘유해물질로부터 자유로운 학교 만들기’를 했고, 지금은 선생님들이 주도하는 프로그램으로 만들었어요. 출발은 밖에서 시작했지만 학교 안에 주체들이 스스로 하는 운동을 만든 되게 좋은 사례였던 것 같아요.
속상한 일도 있었는데, 경주에서 조사할 때였는데 젊은 이주 노동자들이 열악한 공정에 투입되는데 처음에는 제가 몰랐다가 환경호르몬이라는 걸 알게 된 거예요. 이게 불임도 일으키고 생식기 계통의 암도 일으키는데… 자동차에 충격 방지할 때 쓰는 부드러운 실런트(접착부 사이에 연결 용도로 쓰이는 액체 또는 연고성 물체) 같은 것들 막 이렇게 뿌린단 말이에요. 그런 걸 바르고 건조하는 과정에서 환경호르몬이 굉장히 높은 농도로 나오더라고요. 근데 환기 장치도 없고, 보호구도 없이 그냥 고스란히 마시는 거예요. 그래서 가서 “결혼했냐?” “안 했다.” “그럼 너 지금부터 이거 명심해라. 네가 지금 일할 때 이게 나오는데 이거 먹으면 너 애 못 낳게 될 거다. 아이 낳고 싶냐?” “낳고 싶다.” “그러면 안 된다.” 남자건 여자건 만나서… 환경을 개선해 줄 수는 없고 “일단 너부터 알아라.” 그랬던 거죠.
제가 이 일을 하면서 한 번도 법에 의지한 적이 없다는 게 되게 신기한 것 같아요. 고소 고발을 하는 게 아니라 그냥 옆에서 발을 동동동동 구르고 있었던 것 같아요. 당사자의 마음으로 당사자와 함께 고민하고 생각하고 토론하는 게 제 역할이라고 생각을 해요. 다른 사람들은 안 그런 사람들도 있어요. 적극적으로 나서서 문제를 제기하고 해결하고 싸우는 사람들도 있고요, 또 전문가로서 보고서를 써서 주면 된 거지 하는 사람도… 근데 저는 그냥 옆에서 그냥 쭈그려 앉아 있었던 사람인 것 같아요. 왜 내가 밖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계속 당사자의 관점에서 이걸 바라보고 있었는지는 정말 잘 모르겠는데, 그게 제가 문제를 이해하는 방법론이었던 것 같아요.
우리 연구소가 형식이 갖춰져 있는 상태에서 만들어진 게 아니라… 제가 창립 멤버였으니까 가능했던 일 같거든요. 제 방법론을 믿어주었던 거죠. 그래서 그냥 맡겨놓고 내버려뒀거든요. 방치 상태에서 방목형처럼 성장을 했던 거예요. 그래서 10년간은 길을 잃고 헤매기만 했던 것 같고, 그러면서 제 방법론이 만들어진 거였던 것 같아요.
Q. 이제 몇 년 뒤면 연구소 30주년, 얼마 안 남았네요. 한국처럼 굉장히 사회가 빠르게 변하는 곳에서는 어마어마하게 긴 시간일 수 있는데 그 기간 동안에 이런 산업안전 노동안전 분야에서 어떤 변화가 있었나요? 김신범 선생님이나 연구소의 변화도 궁금해요.
제도조차 없었다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겪은 거잖아요. 그런 경험을 했다는 게 너무 대단한 거예요. 출발점을 알잖아요. 뭐가 없었는지, 지금 뭐가 좋아졌는지도 알 수 있는 거죠. 사람들이 “노동권, 건강권 실현되고 있어?” 그러면 그거에 대해서는 답을 못해요. 하지만 “네가 원했던 변화들은 만들었어?”라고 하면 “네.”라고 답을 해요. 그게 제가 제 일을 정리하고 돈을 벌러 간 이유이기도 한 것 같아요.
엄청난 변화가 만들어졌고, 제 노력이나 이런 것들이 기여했다고 생각은 하지만, 그것보다는 참사 때문인 것 같아요. 원진레이온이 거의 천 명에 가까운 노동자들이 직업병 인정을 받았어요. 한 공장에서. 지금 이런 사고가 났다면 참사라고 불렀을 거예요. 근데 ‘원진레이온 사건’이라고 불렀단 말이에요. 사건, 사고란 '나쁜 놈'이 있는 거예요. 나쁜 사업주를 어떻게 처벌하느냐가 관건인 거죠. 근데 참사란 국가, 구조에 대해 묻는 거잖아요. 가습기 살균제와 세월호는 상상도 못 하는 변화들을 만들어냈어요. 사회가 재난이라고 하는 것을 참사로 인식할 수 있는 감수성을 획득했어요. 국가를 존재론적으로 질문할 수 있게 되면서 온 변화는 어마어마해요. 저는 그제야 국가라는 존재를 냉철하게 바라보게 돼요.
나는 원진레이온 같은 피해가 국내에 어떻게 발생할 수 있고 어떤 구조 속에서 발생하는가를 주로 연구를 하고 대응하는 일을 해왔는데, 내가 진짜 던졌어야 했던 질문은 '화학물질로 인해서 인류에게 참사가 발생된 시점은 언제인가', '그 뒤로 우리는 어떤 변화들을 만들어내 왔고 그런 변화의 경로 속에 한국은 어디쯤 있는가'. 좀 더 큰 틀 속에서 나의 문제를 볼 수 있어야 근본적인 문제 해결로 갈 수 있는 힘을 가졌을 텐데, 개별 사건에 대응하는 수준밖에 안 됐던 거예요.
이걸 깨닫고 다시 공부를 해요. 전 세계적으로 화학물질이 대량 생산, 대량 소비된 건 1939년 히틀러가 전쟁을 일으킨 다음이에요.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이 62년도에 나와요. 인류가 화학물질 피해라는 걸 깨달은 게 62년이니까 불과 100년도 안 되는 거예요. 70년대 들어서 미국에서 국가의 화학물질 관리법이 등장하는데 시장에 이미 수만 종의 화학물질이 있는데 이건 포기하고 이제부터 새로 들어오는 것만 독성 파악하자, 그러다가 2000년대 들어서 유럽에서 “이걸 왜 정부가 파악해? 기업이 돈 벌고 있는데, 기업한테 등록하라고 그래야지.” 이러면서 모든 화학물질의 독성이 파악되기 시작하는 거예요. 전 세계 표준 분류 체계? 2000년대 이후에야 등장해요.
이제서야 내가 뭔 짓을 하고 있었는지 이해가 되는 거야. “왜 너네 이것도 못해!”라고 공무원들한테,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존재들에게… 그때부터 저는 관계를 질문하기 시작한 것 같아요. 정체성은 고정된 게 아닌데, 상황 속에서 만들어지는 건데, ‘국가란 원래 이랬어야 돼, 기업이란 원래 이랬어야 돼’가 아니라 ‘저들은 무슨 상황에 있지? 저들은 누구누구와 관계를 맺고 있어서 어느 수준의 생각을 갖고 있지?’를 읽기 시작한 것 같아요. 그게 픽켐을 만든 결정적인 이유겠죠.

2024년 화학안전정책포럼 종합토론회 모습(본인 제공)
기업들에게 '장사하는' 회사를 만들자
Q. 자연스럽게 픽켐 이야기로 넘어가는 것 같은데, 그런 고민들이 연구소에서 활동해 오던 것과는 다른 방식의 시도들로 연결됐다고 생각해도 될까요?
또 하나의 흐름은, 연구소가 되게 가난해졌어요. 그래서 그냥 돈 벌어야 되겠다는 생각으로 먼저 한 거죠. 연구소를 보니 돈을 벌 줄 아는 사람이 없는 거예요. 이제 나는 돈 버는 역할을 해도 되지 않을까, 그래서 2022년쯤인가 그때 돈을 벌어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연구소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어요. 근데 그때 브라이언임팩트 재단을 만난 거예요. 브라이언임팩트가 뭔지 들어본 적도 없는데 연말에, 새해 전에 지원 신청하는 서류를 쓰라는 거예요. 한 푼이라도 벌 수 있다면 써야지, 이런 마음으로 그냥 썼어요. 근데 30억을 받은 거예요. 그래서 3년이라는 시간을 번 거죠.
30억 중에 한 6~7억을 개발자 3명을 고용하는 데 써서, 연구소에 개발자를 두고 제가 IT를 공부해요. 이것저것 도전을 해요. 왜냐하면 현장에는 도구들이 너무 없어서 IT가 필요한데, 돈을 번다면 이것밖에 없을 것 같다. 게다가 브라이언임팩트에서 돈을 따려면 IT 얘기를 해야 될 것 같아서 "IT 법인을 만들어서 독립시키겠습니다" 하면서 '뻥'을 쳤던 거죠. 근데 뻥을 쳤지만 이제 약속을 지켜야 하잖아요. 그러면서 픽켐이 만들어진 거예요. 솔루션을 만들어서 돈을 버는 회사니까 국가를 상대로도 할 수 있고, 기업을 상대로도 할 수 있잖아요. 또는 시민을 상대로도 할 수 있고.
Q. 픽켐은 정확히 누구에게 무엇을 팔아 돈을 버는 회사인가요? 픽켐을 통해 하려는 일이 무엇인가요?
픽켐에서는 사업장의 화학물질 안전 관리 도구를 개발해요. 그리고 이 도구를 사서 쓰는 회사의 관리자들의 커뮤니티를 만들 거예요. 그리고 그 관리자들이 바깥세상을 경험하게 해 줄 거예요. “지금 법이 왜 바뀌는지 알아요? 위험성 평가에서 노동부가 이번에 작업자 참여를 중시했는데 그 이유가 뭔지 알아요? 왜 우리는 노동자를 존중해야 될까요? 진짜 참여를 한다는 건 뭘까요? 그리고 그런 기록을 잘 만들어서 전산 시스템을 통해서 근로감독관에게 보여줘서 나는 놀지 않았다, 난 진짜로 철학을 가지고 일하는 존재다라는 자긍심을 획득하는 방법은 뭘까요?” 이런 이야기를 나누는 커뮤니티를 만들어 보려고 해요.
그런데 왜 제가 지금 기업을 상대로 돈을 벌려고 하냐 하면, 환경부에서 2020년도에 저를 찾아왔어요. “가습기 살균제 참사 이후에 법을 만들긴 만들었는데, 너무 '세게' 만들어서 기업이 못 따라오고 있습니다. 시민사회에서 좀 함께 해 주시면서… 규제 완화라는 욕도 좀 안 먹게…” 저는 시민사회 재산이라서 밀실에서 야합하면 시민사회에 타격이 온다고 말하면서, 환경부에 공론장에서 논의할 것을 제안했어요. 사실은 그때 제가 바깥 공론장을 만들고 있었거든요. 정부랑 기업을 초대해서 회의를 막 열었단 말이에요. 근데 이게 산업계도 좋았던 거예요. 왜냐하면 산업계도 내부에 어떤 욕구가 있냐 하면, 가습기 살균제 참사 같은 사건들을 겪으면서 규제를 너무 완화시켜도 부메랑이 돌아온다는 깨달음이 생겨났어요. 합리적이고 꾸준하게 가는 규제가 투자를 위해서는 가장 최고라는 깨달음을 갖게 돼요.
토론회에 오는 기업 측 사람들은 저랑 동일한 전공을 공부한 다음에 기업에 간 사람들이에요. 이들에겐 이중의 정체성이 있는 거잖아요. 하나는 기업인이지만 하나는 생명과 환경을 지키는 전문가인 거죠. 근데 전문가로서의 자존감이 없고, 이 정체성이 너무 약한 거예요. 왜? 기업 내의 관계밖에 없으니까. 이제부터 내가 할 일은 기업의 관리자들에게 세상과의 관계를 만들어 주는 거다. 정부와의 관계를 만들고, 시민과의 관계, 주민과의 관계를 만들어서, 주민의 얼굴을 보고 우리 사업장에서 이만큼 배출하는 게 괜찮은지를 말할 수 있는, 자기네들이 정말 노력했다면 노력했다고 설득할 수 있는 그런 관리자들을 만드는 일을 해야 되겠다.
나는 시스템이나 이런 것들은 잘 믿지 않아요. 믿지 않는다기보다 너무 형식적으로 고착돼 있어서. 작년에 제가 라투르라는 철학자를 우연히 알게 돼서 존재들에 대한 고민을 배우게 됐어요. 관계 자체가 중요한 거고, 이 관계가 우연히 만들어졌든 뭐가 됐든 이 관계가 목적하는 바가 있다면 이걸 ‘컬렉티브 집합체’라고 부르더라고요. 나는 내가 만들고 싶은 커뮤니티를 뭐라고 불러야 하는지 몰랐는데, '그래, 이런 집합체지' 했어요. 그러니까 “이 업을 존중해! 사람들의 건강과 생명과 안전을 지키려고 하는 사람들을 비난하지 마! 그리고 이들이 소중한 법을 지키려고 노력했을 때 기업은 이 사람들을 자르지 마! 처벌하지 마!” 이런 목소리를 낼 수 있고, 그리고 이들이 사장에게 법을 해석을 해서 투자하도록 번역하는 사람들이잖아요. 우리 기업은 그래서 '이번에 얼마 더 투자한다', '이쪽으로 환경이 얼마나 좋아졌다' 이런 걸 자랑할 수 있는 사람들을 만들어낼 수 있는, 그런 것에 도전하겠다. 여기까지 왔어요.

2024년 화학안전정책포럼 이해당사자의날에서 2025년 토론 주제에 대해 이해당사자들과 테이블별로 토론하는 모습.
오른쪽 아래쪽이 김신범(본인 제공)
Q. 굉장히 신선하고 새로운 시도 같은데, 한편으로는 쉽지 않은 일 같아요. 걱정되진 않으세요?
‘돈을 어떻게 벌어야 하지?’하는 고민 때문에 잠도 안 오고 그런 건 있어요. 지금도 좋은 일은 한 번도 안 생겼어요. 제가 기업을 시작하겠다고 하고 모든 것에 다 떨어지고 있어요. 신기술 공모전도 해보고, 그다음에 무슨 IT 허브 사무실 빌려주는 데 지원해서 떨어지고. 그래서 지금 마케팅 이런 것들도 되게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게, ‘내가 움직여서 만난 관계가 돈 버는 길이야. 이것밖에 없어.’라고 생각하고 움직이자, 그 생각은 좀 있어요. 망할 수도 있지만 이런 경험이 가져다주는 경험으로 다음 도전을 할 수 있는 힘 정도는 있을 거예요.
그리고 또 다른 두려움이 이 선택에 있어요. '내가 더 나이 든다면 어떤 모습일까'에 대한 두려움이에요. 정치권에서 오라고 하는 유혹도 있고, 정부 안에서도 들어와 달라는 유혹도 있었고, 대차게 거절하면서 잘 살아왔단 말이에요. 근데 내가 내 힘으로 내 두 발로 일어나서 일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남의 힘에 의존하는 방식으로 일을 하다가는 언젠가 “자리 없어요?”라는 말이 내 입에서 나오겠다, 그 공포가 되게 컸어요. 50대 초반까지도 전혀 이런 생각 안 해봤었어요. 근데 몸이 일단 조금씩 조금씩 변화하고, 나이 들어간다는 걸 진짜 느낄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오니까 대찼던 그 용기는 금방 없어져 버리더라고요. ‘연구소에서 이렇게만 살다가 60을 넘어가면 나는 분명히 이런 연구 능력도 떨어질 거고, 뭘 할 수 있는 능력도 떨어지는데. 그때 가면 어디 가서 기웃거릴 거야. 그전에 나를 바꾸지 않으면 안 되겠어.’ 그 공포도, 그 무서움도 되게 큰 이유였던 것 같아요.
Q. 무척 결과가 궁금하네요. 사실 한국 시민사회가 어떤 운동 방식이 하나 성공하면 모두들 똑같은 방식을 따라 하는데, 새롭고 재밌는 ‘또라이’들이 하는 신박한 시도들이 좀 많아져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7월에 개발 완료하고 오픈할 거예요. 다국적 기업들이 관리 수준이 좀 높잖아요. 그런 기업들을 찾아가서 제가 만들고 있는 거 시제품 보여줬더니 다 사겠대요. 다음 주에도 영업 회의 있습니다.
근데 너무 재미있는 게, 우리가 가격을 구독 방식으로 할 거고, 한 달에 10만 원, 연간 100만 원밖에 안 해요. 이것 때문에 욕 많이 먹어요. “야, 이 정도 서비스면 몇 백만 원 이상은 받아야지, 왜 시장을 흐려!” 시장을 진짜 모르는 사람들이에요. 제가 2016년도에 톡스프리라고 하는 무료 서비스를 오픈한 적이 있어요. 현장의 관리자들이 규제 정보도 모르고 화학물질 정보도 모르니까, 그래서 제품만 입력하면 규제 정보, 독성 정보 딱 볼 수 있게. 근데 이걸 2만 명 가까운 사람들이 쓰거든요. (그 사람들에게) 이번에 만든 거 보여주면서 “어떻게 하실래요?”라고 하니까 “3만 원까지는 제가 어떻게 낼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그런데 회사 관리자가 개인 돈으로 이런 걸 구매해서 쓰는 건 끝내야지. 근데 내 생각에, '1년에 100만 원밖에 안 해요'라는 말은 당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100만 원이에요.
현장 관리자들 중에 포럼에 나올 수 있는 관리자들은 그나마 큰 기업 사람들인 거예요. 진짜 제 눈에 밟히는 사람들은 처음 연구소 와서 돌아다니면서 만난 사람들, 그 곁에서 같이 질문하고 있었던 그 방법론이 현재도 이어지고 있다고 저는 생각해요. 그들의 힘으로, 그들이 나의 도구를 회삿돈으로 구매해서 딛고 일어나게 만들고 싶은 거예요. 그런 관계 속에서 우리에게는 미션이 있는 것 같아요. “우리라는 존재들은 소중한 존재들이에요.”라는 말을 거는 게 그래야 가능해지는 거 아닌가, 의자 캠페인으로 서비스 노동자가 노동자라는 걸 인정받은 것처럼, 100만 원으로 회사가 이걸 사줄 때 '내가 관리자구나'라는 그런 희열을 느끼게 되는 거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는 거죠.
일단 올해 목표가 오픈하고 내년 초까지 300개 기업, 300개 유저는 만들어서 유저들의 커뮤니티를 구성하겠다. 그게 제 목표고요. 그러면 3억이잖아요. 1년에 3억 돼야, 일하는 두 분 임금이라도 되고. 그걸 목표로 열심히 마케팅을 할 겁니다.
글 잘 쓰는 사람, 디자인 잘 하는 사람, 캠페인 전략 기획 잘하는 사람, 영어 잘하는 사람, 노래 잘 부르는 사람, 모두와 친해지는 대단한 재주를 가진 사람. 활동가들을 만나보면 별별 재주를 가진 사람들이 참 많은데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재주가 돈 잘 버는 사람이다. 나조차도 글도 잘 쓰고 싶고, 디자인도 잘하고 싶고, 영어도 잘하고 싶지만 돈 버는 일에는 큰 관심이 없으니. 하지만 결국 활동가도, 단체도 먹고 살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다. 누구에게나 꼭 필요하지만 시민사회운동에 가장 없는 것이 바로 돈이기 때문에.
김신범 선생님과 인터뷰 약속을 잡고 인터뷰 질문지를 만들기 위해 자료를 찾아보면서 깜짝 놀랐다. ‘아니 주식회사를 만든다고?’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 절반, 과연 잘 될까 의심 가득한 눈빛 절반. 화학물질과 노동자 건강권 관련 연구와 활동을 평생 해오신 걸로 아는데 대체 돈벌이는 언제 배우셨나 의문과 걱정이 동시에 들었다. 돈 버는 일도 나름의 전문성과 기술과 훈련이 필요하니까. 인터뷰를 하면서 나는 그가 왜 주식회사를 만들게 되었는지, 너무나도 납득이 되어버렸다. 별 수 있나, 이제 성공하고 살아남는 수밖에. 픽켐의 서비스가 '대박'나서 화학물질 걱정 없는 일터가 늘어나기를, 그리고 노동환경건강연구소가 돈 걱정 없이 노동자건강권 관련 연구를 지속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인터뷰어 : 이용석
평화운동단체 전쟁없는세상 활동가. 병역거부자가 되기 위해 평화에 대해 공부하고 고민하다 보니 평화활동가가 되었다. 프로야구 기록지 살피기, 보드게임 하기, 라디오 듣기, 책 읽기를 좋아한다. <평화는 처음이라>, <병역거부의 질문들>, <전쟁 없는 세상을 만들고 싶어>를 썼다.
2026 공익활동가주간의 〈활동가 인터뷰 프로젝트〉는 다양한 지역과 분야에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변화를 위해 노력하는 활동가들의 일과 삶 이야기를 듣고 인터뷰로 기록하는 활동을 지원합니다.
2026년에는 〈활동가, 전환을 말하다〉를 주제로 기획인터뷰를 진행했습니다. 공익활동가가 되는 데 정해진 경로는 없습니다. 교사였던 사람, 광장에서 처음 마이크를 잡았던 사람, 기존 활동의 궤적 위에서 변화를 만드는 방식 자체를 '전환'해 온 사람들도 있습니다. '공익활동'이 더 많은 사람의 선택지가 되길 바라며, 다채로운 전환의 이야기를 기록했습니다.
활동가 인터뷰 프로젝트는 아름다운재단의 지원으로 지리산이음에서 기획·운영하고 있습니다.
[기획인터뷰 - 활동가, 전환을 말하다]
이제부터 할 일은, 기업의 안전 관리자들을 세상과 연결하는 것
주식회사 픽켐 대표 김신범
노동환경건강연구소의 수석연구원이자, 주식회사 픽켐 대표이사로 새로운 도전을 시작한 김신범 님.
노동환경건강연구소를 만난 행운
Q. 소개를 부탁드려요. 김신범을 한 단어, 한 문장으로 표현한다면?
저는 이렇게 쭉 사는 과정을 돌이켜 보면, 약간 '또라이' 기질은 있지만 겁이 되게 많은 또라이인 것 같아요. 꾸역꾸역 뭔가를 하긴 하는데 되게 무서워하고 조심하면서 하는 그런 편이에요. 근데 또 뭘 하면, 마음을 먹으면 일단은 가요. 되게 겁이 많아서 그런 거를 많이 안 하지만. 약간 그런 스타일이에요. 명함에 쓰여 있는 것들로 소개하자면 픽켐 대표이사이고, 우리 노동환경건강연구소에서는 수석연구원이에요. 제가 그냥 자유연구원으로 해달라고 그랬는데 없어 보인다고, 자기네들한테 그런 게 필요하다고 그래서 수석연구원이 되었어요.
사실은 제가 대학원 가기 전에 부끄러웠던 게, 원래는 현장 들어가려고 인천에서 세미나까지 하는데 그때 선배들이 현장에서 나왔어요. 들어갈 때가 아닌 것 같다고 하면서. 제가 4학년쯤 됐을 때였을 거예요. 선배들이 “야 술이나 한잔 하러 가자” 그러면서 술을 먹는데 “우리도 정리할 거니까 너도 이제 그만 와.” 그러는데 되게 속상해야 되는데 제 속마음이 ‘다행이다.’(웃음) 난 도대체 뭘까… 이렇게 하기 싫으면서 도대체 왜 이렇게 살려고 하는 걸까? 그러니까 저를 혐오하게 됐어요, 그 순간. 근데 용서가 안 되더라고요. 되게 멋있게 저를 포장하고 산 거잖아요.
저는 대학원을 갈 때 그냥 어떤 단체 활동가가 되기 위해서 대학원을 간 거거든요. 제가 조교 생활 할 때는 IMF였고 방송통신대가 동생들 대학 보내기 위해서 대학을 포기한 그런 분들이 오시는 학교니까 되게 뜨거웠어요, 학생들이. 논문을 써야 되는데 “나는 실험을 해보고 싶다. 그러면 공부한 것 같은 느낌이 들 것 같다.”는 거예요. 근데 이건 들어주고 싶은 거예요. 마침 우리 과에 실험실이 있고 제가 관리하기도 했고요. 그래서 실험실 쓰고 싶은 학생들 모집해서 실험을 하는데, 그때 한국노총 연구소가 만들어졌어요. 노동조합의 연구소가 나 같은 놈한테는 더 맞겠다는 생각도 들었고, 노동조합이 연구소 채용이 다시는 없을 기회라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때 고민을 했지만 뭐 어떻게 해요. 눈앞에 있는 사람들을 버리면 안 되니까. 그래서 이분들은 논문 써서 졸업하고, 우리 연구소가 만들어지면서 그냥 자연스럽게 오게 되었죠.
Q. 노동환경건강연구소 창립멤버네요. 연구소 소개도 부탁드릴게요.
연구소는 원진레이온 직업병 때문에 만들어졌어요. 1988년도에 직업병이 알려진 이후 10년간 싸움을 해서 보상을 받고, 최종적으로 정부를 상대로 이 녹색병원을 설립할 수 있는 기금을 보상 받았어요. 개별 보상으로 그친 게 아니라 사회에 자기와 같은 사람들이 생기지 않도록 병원하고 연구소를 만들었던 거죠. 예전에도 자기네 공장에 와서 측정도 하고 조사도 다 했대요. 근데 문제 없다고만 했으니까, 그런 거짓말을 안 하는 연구자들이 필요하다, 그래서 만들어진 연구소입니다. 처음에는 화학물질이나 이런 것들에 관심이 많았지만 근골격계 질환이나 정신 건강, 지금은 농민들, 정규적인 노동을 하지 않는 다양한 노동자들의 문제들을 연구하고 있어요.
사실 저는 화학물질은 할 생각이 없었어요. 왜냐하면 화학물질로 인한 피해는 규명이 돼요. 그리고 조사하면 돼요. 근데 자기 목소리를 내지도 못하는 노동자들이 너무 많이 보이는 거예요. 그런 일을 하고 싶었죠. 그래서 제가 민주노총하고 같이 했던 일이 의자 캠페인, 서서 일하는 노동자들에게 의자를 제공하는 그런 거 기획하고 환경미화원 씻을 수 있는 권리, 그런 일을 더 하고 싶어 해서 먼저 했어요. 왜냐하면 우리 연구소를 당시에 부를 수 있었던 노동조합들은 대기업 노동조합들이거든요. 물론 그들도 환경이 너무 열악한 상황이었던 건 맞지만 그거보다 훨씬 어려운 노동자들이 제 눈엔 보이니까. 노조도 없는 곳들이요. 그래서 연구소 들어와서 서울 일반노조 조합원 생활도 했어요. 더 많이 이해하고 해 보려고.
근데 작업 환경이나 화학물질 쪽을 담당하던 친구가 우리 연구소 실장으로 있었는데 대학 교수로 가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잠시 구원 투수로, 그러면 이거 맡아서 뭐 좀 방향을 좀 잡아주겠다 했는데, 못 빠져나가고 지금까지(웃음) 인생이 이래요.
인터뷰 당일 날, 20년을 활동해온 노동환경건강연구소 입구 앞에서.
20년 동안의 활동, 그리고 전환
Q. 20년이 훌쩍 넘게 연구소에서 활동을 하셨는데 활동해 오면서 기억에 남는 캠페인이 어떤 게 있을까요?
의자 캠페인을 통해서는 제가 배운 게 많아요. 백화점이나 마트에 그 당시에는 진짜 의자가 없었거든요. 이분들이 얼마나 힘든지 아니까. 제가 가서 물어보면 “무슨무슨 법, 이런 게 우리한테 적용되지도 않는데…” 무슨! 적용되는데! 그러니까 자기가 노동자라는 생각이 너무 부족한 상태였던 거예요. 그래서 그런 캠페인을 만들었던 건 ‘우리가 노동자다’, ‘법에 의해서 내가 앉을 권리가 있었던 거구나’ 이 생각을 만들어주기 위해서였거든요. 어린이들 관련된 일들도 했어요. ‘PVC 없는 학교 만들기 캠페인’하다가 유자 학교라고 ‘유해물질로부터 자유로운 학교 만들기’를 했고, 지금은 선생님들이 주도하는 프로그램으로 만들었어요. 출발은 밖에서 시작했지만 학교 안에 주체들이 스스로 하는 운동을 만든 되게 좋은 사례였던 것 같아요.
속상한 일도 있었는데, 경주에서 조사할 때였는데 젊은 이주 노동자들이 열악한 공정에 투입되는데 처음에는 제가 몰랐다가 환경호르몬이라는 걸 알게 된 거예요. 이게 불임도 일으키고 생식기 계통의 암도 일으키는데… 자동차에 충격 방지할 때 쓰는 부드러운 실런트(접착부 사이에 연결 용도로 쓰이는 액체 또는 연고성 물체) 같은 것들 막 이렇게 뿌린단 말이에요. 그런 걸 바르고 건조하는 과정에서 환경호르몬이 굉장히 높은 농도로 나오더라고요. 근데 환기 장치도 없고, 보호구도 없이 그냥 고스란히 마시는 거예요. 그래서 가서 “결혼했냐?” “안 했다.” “그럼 너 지금부터 이거 명심해라. 네가 지금 일할 때 이게 나오는데 이거 먹으면 너 애 못 낳게 될 거다. 아이 낳고 싶냐?” “낳고 싶다.” “그러면 안 된다.” 남자건 여자건 만나서… 환경을 개선해 줄 수는 없고 “일단 너부터 알아라.” 그랬던 거죠.
제가 이 일을 하면서 한 번도 법에 의지한 적이 없다는 게 되게 신기한 것 같아요. 고소 고발을 하는 게 아니라 그냥 옆에서 발을 동동동동 구르고 있었던 것 같아요. 당사자의 마음으로 당사자와 함께 고민하고 생각하고 토론하는 게 제 역할이라고 생각을 해요. 다른 사람들은 안 그런 사람들도 있어요. 적극적으로 나서서 문제를 제기하고 해결하고 싸우는 사람들도 있고요, 또 전문가로서 보고서를 써서 주면 된 거지 하는 사람도… 근데 저는 그냥 옆에서 그냥 쭈그려 앉아 있었던 사람인 것 같아요. 왜 내가 밖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계속 당사자의 관점에서 이걸 바라보고 있었는지는 정말 잘 모르겠는데, 그게 제가 문제를 이해하는 방법론이었던 것 같아요.
우리 연구소가 형식이 갖춰져 있는 상태에서 만들어진 게 아니라… 제가 창립 멤버였으니까 가능했던 일 같거든요. 제 방법론을 믿어주었던 거죠. 그래서 그냥 맡겨놓고 내버려뒀거든요. 방치 상태에서 방목형처럼 성장을 했던 거예요. 그래서 10년간은 길을 잃고 헤매기만 했던 것 같고, 그러면서 제 방법론이 만들어진 거였던 것 같아요.
Q. 이제 몇 년 뒤면 연구소 30주년, 얼마 안 남았네요. 한국처럼 굉장히 사회가 빠르게 변하는 곳에서는 어마어마하게 긴 시간일 수 있는데 그 기간 동안에 이런 산업안전 노동안전 분야에서 어떤 변화가 있었나요? 김신범 선생님이나 연구소의 변화도 궁금해요.
제도조차 없었다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겪은 거잖아요. 그런 경험을 했다는 게 너무 대단한 거예요. 출발점을 알잖아요. 뭐가 없었는지, 지금 뭐가 좋아졌는지도 알 수 있는 거죠. 사람들이 “노동권, 건강권 실현되고 있어?” 그러면 그거에 대해서는 답을 못해요. 하지만 “네가 원했던 변화들은 만들었어?”라고 하면 “네.”라고 답을 해요. 그게 제가 제 일을 정리하고 돈을 벌러 간 이유이기도 한 것 같아요.
엄청난 변화가 만들어졌고, 제 노력이나 이런 것들이 기여했다고 생각은 하지만, 그것보다는 참사 때문인 것 같아요. 원진레이온이 거의 천 명에 가까운 노동자들이 직업병 인정을 받았어요. 한 공장에서. 지금 이런 사고가 났다면 참사라고 불렀을 거예요. 근데 ‘원진레이온 사건’이라고 불렀단 말이에요. 사건, 사고란 '나쁜 놈'이 있는 거예요. 나쁜 사업주를 어떻게 처벌하느냐가 관건인 거죠. 근데 참사란 국가, 구조에 대해 묻는 거잖아요. 가습기 살균제와 세월호는 상상도 못 하는 변화들을 만들어냈어요. 사회가 재난이라고 하는 것을 참사로 인식할 수 있는 감수성을 획득했어요. 국가를 존재론적으로 질문할 수 있게 되면서 온 변화는 어마어마해요. 저는 그제야 국가라는 존재를 냉철하게 바라보게 돼요.
나는 원진레이온 같은 피해가 국내에 어떻게 발생할 수 있고 어떤 구조 속에서 발생하는가를 주로 연구를 하고 대응하는 일을 해왔는데, 내가 진짜 던졌어야 했던 질문은 '화학물질로 인해서 인류에게 참사가 발생된 시점은 언제인가', '그 뒤로 우리는 어떤 변화들을 만들어내 왔고 그런 변화의 경로 속에 한국은 어디쯤 있는가'. 좀 더 큰 틀 속에서 나의 문제를 볼 수 있어야 근본적인 문제 해결로 갈 수 있는 힘을 가졌을 텐데, 개별 사건에 대응하는 수준밖에 안 됐던 거예요.
이걸 깨닫고 다시 공부를 해요. 전 세계적으로 화학물질이 대량 생산, 대량 소비된 건 1939년 히틀러가 전쟁을 일으킨 다음이에요.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이 62년도에 나와요. 인류가 화학물질 피해라는 걸 깨달은 게 62년이니까 불과 100년도 안 되는 거예요. 70년대 들어서 미국에서 국가의 화학물질 관리법이 등장하는데 시장에 이미 수만 종의 화학물질이 있는데 이건 포기하고 이제부터 새로 들어오는 것만 독성 파악하자, 그러다가 2000년대 들어서 유럽에서 “이걸 왜 정부가 파악해? 기업이 돈 벌고 있는데, 기업한테 등록하라고 그래야지.” 이러면서 모든 화학물질의 독성이 파악되기 시작하는 거예요. 전 세계 표준 분류 체계? 2000년대 이후에야 등장해요.
이제서야 내가 뭔 짓을 하고 있었는지 이해가 되는 거야. “왜 너네 이것도 못해!”라고 공무원들한테,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존재들에게… 그때부터 저는 관계를 질문하기 시작한 것 같아요. 정체성은 고정된 게 아닌데, 상황 속에서 만들어지는 건데, ‘국가란 원래 이랬어야 돼, 기업이란 원래 이랬어야 돼’가 아니라 ‘저들은 무슨 상황에 있지? 저들은 누구누구와 관계를 맺고 있어서 어느 수준의 생각을 갖고 있지?’를 읽기 시작한 것 같아요. 그게 픽켐을 만든 결정적인 이유겠죠.
2024년 화학안전정책포럼 종합토론회 모습(본인 제공)
기업들에게 '장사하는' 회사를 만들자
Q. 자연스럽게 픽켐 이야기로 넘어가는 것 같은데, 그런 고민들이 연구소에서 활동해 오던 것과는 다른 방식의 시도들로 연결됐다고 생각해도 될까요?
또 하나의 흐름은, 연구소가 되게 가난해졌어요. 그래서 그냥 돈 벌어야 되겠다는 생각으로 먼저 한 거죠. 연구소를 보니 돈을 벌 줄 아는 사람이 없는 거예요. 이제 나는 돈 버는 역할을 해도 되지 않을까, 그래서 2022년쯤인가 그때 돈을 벌어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연구소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어요. 근데 그때 브라이언임팩트 재단을 만난 거예요. 브라이언임팩트가 뭔지 들어본 적도 없는데 연말에, 새해 전에 지원 신청하는 서류를 쓰라는 거예요. 한 푼이라도 벌 수 있다면 써야지, 이런 마음으로 그냥 썼어요. 근데 30억을 받은 거예요. 그래서 3년이라는 시간을 번 거죠.
30억 중에 한 6~7억을 개발자 3명을 고용하는 데 써서, 연구소에 개발자를 두고 제가 IT를 공부해요. 이것저것 도전을 해요. 왜냐하면 현장에는 도구들이 너무 없어서 IT가 필요한데, 돈을 번다면 이것밖에 없을 것 같다. 게다가 브라이언임팩트에서 돈을 따려면 IT 얘기를 해야 될 것 같아서 "IT 법인을 만들어서 독립시키겠습니다" 하면서 '뻥'을 쳤던 거죠. 근데 뻥을 쳤지만 이제 약속을 지켜야 하잖아요. 그러면서 픽켐이 만들어진 거예요. 솔루션을 만들어서 돈을 버는 회사니까 국가를 상대로도 할 수 있고, 기업을 상대로도 할 수 있잖아요. 또는 시민을 상대로도 할 수 있고.
Q. 픽켐은 정확히 누구에게 무엇을 팔아 돈을 버는 회사인가요? 픽켐을 통해 하려는 일이 무엇인가요?
픽켐에서는 사업장의 화학물질 안전 관리 도구를 개발해요. 그리고 이 도구를 사서 쓰는 회사의 관리자들의 커뮤니티를 만들 거예요. 그리고 그 관리자들이 바깥세상을 경험하게 해 줄 거예요. “지금 법이 왜 바뀌는지 알아요? 위험성 평가에서 노동부가 이번에 작업자 참여를 중시했는데 그 이유가 뭔지 알아요? 왜 우리는 노동자를 존중해야 될까요? 진짜 참여를 한다는 건 뭘까요? 그리고 그런 기록을 잘 만들어서 전산 시스템을 통해서 근로감독관에게 보여줘서 나는 놀지 않았다, 난 진짜로 철학을 가지고 일하는 존재다라는 자긍심을 획득하는 방법은 뭘까요?” 이런 이야기를 나누는 커뮤니티를 만들어 보려고 해요.
그런데 왜 제가 지금 기업을 상대로 돈을 벌려고 하냐 하면, 환경부에서 2020년도에 저를 찾아왔어요. “가습기 살균제 참사 이후에 법을 만들긴 만들었는데, 너무 '세게' 만들어서 기업이 못 따라오고 있습니다. 시민사회에서 좀 함께 해 주시면서… 규제 완화라는 욕도 좀 안 먹게…” 저는 시민사회 재산이라서 밀실에서 야합하면 시민사회에 타격이 온다고 말하면서, 환경부에 공론장에서 논의할 것을 제안했어요. 사실은 그때 제가 바깥 공론장을 만들고 있었거든요. 정부랑 기업을 초대해서 회의를 막 열었단 말이에요. 근데 이게 산업계도 좋았던 거예요. 왜냐하면 산업계도 내부에 어떤 욕구가 있냐 하면, 가습기 살균제 참사 같은 사건들을 겪으면서 규제를 너무 완화시켜도 부메랑이 돌아온다는 깨달음이 생겨났어요. 합리적이고 꾸준하게 가는 규제가 투자를 위해서는 가장 최고라는 깨달음을 갖게 돼요.
토론회에 오는 기업 측 사람들은 저랑 동일한 전공을 공부한 다음에 기업에 간 사람들이에요. 이들에겐 이중의 정체성이 있는 거잖아요. 하나는 기업인이지만 하나는 생명과 환경을 지키는 전문가인 거죠. 근데 전문가로서의 자존감이 없고, 이 정체성이 너무 약한 거예요. 왜? 기업 내의 관계밖에 없으니까. 이제부터 내가 할 일은 기업의 관리자들에게 세상과의 관계를 만들어 주는 거다. 정부와의 관계를 만들고, 시민과의 관계, 주민과의 관계를 만들어서, 주민의 얼굴을 보고 우리 사업장에서 이만큼 배출하는 게 괜찮은지를 말할 수 있는, 자기네들이 정말 노력했다면 노력했다고 설득할 수 있는 그런 관리자들을 만드는 일을 해야 되겠다.
나는 시스템이나 이런 것들은 잘 믿지 않아요. 믿지 않는다기보다 너무 형식적으로 고착돼 있어서. 작년에 제가 라투르라는 철학자를 우연히 알게 돼서 존재들에 대한 고민을 배우게 됐어요. 관계 자체가 중요한 거고, 이 관계가 우연히 만들어졌든 뭐가 됐든 이 관계가 목적하는 바가 있다면 이걸 ‘컬렉티브 집합체’라고 부르더라고요. 나는 내가 만들고 싶은 커뮤니티를 뭐라고 불러야 하는지 몰랐는데, '그래, 이런 집합체지' 했어요. 그러니까 “이 업을 존중해! 사람들의 건강과 생명과 안전을 지키려고 하는 사람들을 비난하지 마! 그리고 이들이 소중한 법을 지키려고 노력했을 때 기업은 이 사람들을 자르지 마! 처벌하지 마!” 이런 목소리를 낼 수 있고, 그리고 이들이 사장에게 법을 해석을 해서 투자하도록 번역하는 사람들이잖아요. 우리 기업은 그래서 '이번에 얼마 더 투자한다', '이쪽으로 환경이 얼마나 좋아졌다' 이런 걸 자랑할 수 있는 사람들을 만들어낼 수 있는, 그런 것에 도전하겠다. 여기까지 왔어요.
2024년 화학안전정책포럼 이해당사자의날에서 2025년 토론 주제에 대해 이해당사자들과 테이블별로 토론하는 모습.
오른쪽 아래쪽이 김신범(본인 제공)
Q. 굉장히 신선하고 새로운 시도 같은데, 한편으로는 쉽지 않은 일 같아요. 걱정되진 않으세요?
‘돈을 어떻게 벌어야 하지?’하는 고민 때문에 잠도 안 오고 그런 건 있어요. 지금도 좋은 일은 한 번도 안 생겼어요. 제가 기업을 시작하겠다고 하고 모든 것에 다 떨어지고 있어요. 신기술 공모전도 해보고, 그다음에 무슨 IT 허브 사무실 빌려주는 데 지원해서 떨어지고. 그래서 지금 마케팅 이런 것들도 되게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게, ‘내가 움직여서 만난 관계가 돈 버는 길이야. 이것밖에 없어.’라고 생각하고 움직이자, 그 생각은 좀 있어요. 망할 수도 있지만 이런 경험이 가져다주는 경험으로 다음 도전을 할 수 있는 힘 정도는 있을 거예요.
그리고 또 다른 두려움이 이 선택에 있어요. '내가 더 나이 든다면 어떤 모습일까'에 대한 두려움이에요. 정치권에서 오라고 하는 유혹도 있고, 정부 안에서도 들어와 달라는 유혹도 있었고, 대차게 거절하면서 잘 살아왔단 말이에요. 근데 내가 내 힘으로 내 두 발로 일어나서 일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남의 힘에 의존하는 방식으로 일을 하다가는 언젠가 “자리 없어요?”라는 말이 내 입에서 나오겠다, 그 공포가 되게 컸어요. 50대 초반까지도 전혀 이런 생각 안 해봤었어요. 근데 몸이 일단 조금씩 조금씩 변화하고, 나이 들어간다는 걸 진짜 느낄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오니까 대찼던 그 용기는 금방 없어져 버리더라고요. ‘연구소에서 이렇게만 살다가 60을 넘어가면 나는 분명히 이런 연구 능력도 떨어질 거고, 뭘 할 수 있는 능력도 떨어지는데. 그때 가면 어디 가서 기웃거릴 거야. 그전에 나를 바꾸지 않으면 안 되겠어.’ 그 공포도, 그 무서움도 되게 큰 이유였던 것 같아요.
Q. 무척 결과가 궁금하네요. 사실 한국 시민사회가 어떤 운동 방식이 하나 성공하면 모두들 똑같은 방식을 따라 하는데, 새롭고 재밌는 ‘또라이’들이 하는 신박한 시도들이 좀 많아져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7월에 개발 완료하고 오픈할 거예요. 다국적 기업들이 관리 수준이 좀 높잖아요. 그런 기업들을 찾아가서 제가 만들고 있는 거 시제품 보여줬더니 다 사겠대요. 다음 주에도 영업 회의 있습니다.
근데 너무 재미있는 게, 우리가 가격을 구독 방식으로 할 거고, 한 달에 10만 원, 연간 100만 원밖에 안 해요. 이것 때문에 욕 많이 먹어요. “야, 이 정도 서비스면 몇 백만 원 이상은 받아야지, 왜 시장을 흐려!” 시장을 진짜 모르는 사람들이에요. 제가 2016년도에 톡스프리라고 하는 무료 서비스를 오픈한 적이 있어요. 현장의 관리자들이 규제 정보도 모르고 화학물질 정보도 모르니까, 그래서 제품만 입력하면 규제 정보, 독성 정보 딱 볼 수 있게. 근데 이걸 2만 명 가까운 사람들이 쓰거든요. (그 사람들에게) 이번에 만든 거 보여주면서 “어떻게 하실래요?”라고 하니까 “3만 원까지는 제가 어떻게 낼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그런데 회사 관리자가 개인 돈으로 이런 걸 구매해서 쓰는 건 끝내야지. 근데 내 생각에, '1년에 100만 원밖에 안 해요'라는 말은 당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100만 원이에요.
현장 관리자들 중에 포럼에 나올 수 있는 관리자들은 그나마 큰 기업 사람들인 거예요. 진짜 제 눈에 밟히는 사람들은 처음 연구소 와서 돌아다니면서 만난 사람들, 그 곁에서 같이 질문하고 있었던 그 방법론이 현재도 이어지고 있다고 저는 생각해요. 그들의 힘으로, 그들이 나의 도구를 회삿돈으로 구매해서 딛고 일어나게 만들고 싶은 거예요. 그런 관계 속에서 우리에게는 미션이 있는 것 같아요. “우리라는 존재들은 소중한 존재들이에요.”라는 말을 거는 게 그래야 가능해지는 거 아닌가, 의자 캠페인으로 서비스 노동자가 노동자라는 걸 인정받은 것처럼, 100만 원으로 회사가 이걸 사줄 때 '내가 관리자구나'라는 그런 희열을 느끼게 되는 거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는 거죠.
일단 올해 목표가 오픈하고 내년 초까지 300개 기업, 300개 유저는 만들어서 유저들의 커뮤니티를 구성하겠다. 그게 제 목표고요. 그러면 3억이잖아요. 1년에 3억 돼야, 일하는 두 분 임금이라도 되고. 그걸 목표로 열심히 마케팅을 할 겁니다.
글 잘 쓰는 사람, 디자인 잘 하는 사람, 캠페인 전략 기획 잘하는 사람, 영어 잘하는 사람, 노래 잘 부르는 사람, 모두와 친해지는 대단한 재주를 가진 사람. 활동가들을 만나보면 별별 재주를 가진 사람들이 참 많은데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재주가 돈 잘 버는 사람이다. 나조차도 글도 잘 쓰고 싶고, 디자인도 잘하고 싶고, 영어도 잘하고 싶지만 돈 버는 일에는 큰 관심이 없으니. 하지만 결국 활동가도, 단체도 먹고 살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다. 누구에게나 꼭 필요하지만 시민사회운동에 가장 없는 것이 바로 돈이기 때문에.
김신범 선생님과 인터뷰 약속을 잡고 인터뷰 질문지를 만들기 위해 자료를 찾아보면서 깜짝 놀랐다. ‘아니 주식회사를 만든다고?’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 절반, 과연 잘 될까 의심 가득한 눈빛 절반. 화학물질과 노동자 건강권 관련 연구와 활동을 평생 해오신 걸로 아는데 대체 돈벌이는 언제 배우셨나 의문과 걱정이 동시에 들었다. 돈 버는 일도 나름의 전문성과 기술과 훈련이 필요하니까. 인터뷰를 하면서 나는 그가 왜 주식회사를 만들게 되었는지, 너무나도 납득이 되어버렸다. 별 수 있나, 이제 성공하고 살아남는 수밖에. 픽켐의 서비스가 '대박'나서 화학물질 걱정 없는 일터가 늘어나기를, 그리고 노동환경건강연구소가 돈 걱정 없이 노동자건강권 관련 연구를 지속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