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공익활동가주간]"우리 모두 서로를 비추며 연결되어 있는 구슬이다" - 사회연대쉼터 '인드라망' 중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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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 서로를 비추며 연결되어 있는 구슬이다"
사회연대쉼터 '인드라망' 공동대표 중묵



그런 이들이 언제까지나 걸어갈 수 있을 것만 같은 든든함을 주지 않나. 용기를 가진 사람들. 헛된 희망보다 정직하게 절망하는 사람들. 좋은 것만 보자며 고개 숙이고 눈 돌리기보다 자꾸만 분노하고 슬퍼할 용기를 가진 사람들. 우리가 싸우는 건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이 우리를 바꾸게 하지 않기 위함이기도 하니까. 나는 싸우는 사람들이 사라지지 않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


여기 그런 이들을 위한 공간이 있다. ‘사회연대쉼터 인드라망’이다. 더 나은 사회를 위해 노력하는 활동가들, 각종 사회폭력의 피해자와 그 가족들, 기성의 질서와 관습에 저항해 새로운 꿈을 꾸는 사람들, 그러다가 지친 모든 사람들은 아무런 조건 없이 이곳에서 쉬어갈 수 있다. 밥도 방도 내어준다. 하루든, 일주일이든, 한 달이든, 1년이든.  


6월 11일 오후, 사회연대쉼터의 공동대표이자 쉼터에게 절간의 터를 내어주는 ‘귀정사’의 중묵(법명)을 만나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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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땅만 보던 소년, 세상에 발을 디디다


- 서울에 사셨나요? 고향이.

고향은 서울이 아니고 천안. 고등학교 졸업할 때 까지 천안에 있다가 그 이후로 아버지가 직장 때문에 서울에 올라가면서 따라가게 되었지요. 서울에서 재수학원을 다니며 대학 들어갈 준비를 했지요.


- 왜 재수를 하셨어요?

내가 공부에 재주가 없었거든요.


- 성균관 대학교 가셔놓고..

중학교 때 워낙 공부를 못해서 천안에 있는 인문계 고등학교에는 들어갈 수 있는 데가 없대요. 천안에서 유일하게 갈 수 있는 데가 상업고등학교, 그래서 상고를 갔어요. 대학을 목표로 하는 공부가 아니니까 졸업하고 나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어요. 그래서 대학이나 가야겠다 하면서 공부를 시작했고 그때부터 실질적인 3수를 했지요.


- 그러면 목표로 하신 과가 불교?

원래 동국대학교 불교학과를 목표로 했지요. 그런데 같이 재수학원을 다니던 친구들이 불교를 공부하는 것도 중요한데 불교를 감싸고 있는 다른 사상 즉 인도철학 또는 중국철학 등 동양철학 전반을 함께 공부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때 참 기특한 친구들을 만났던 것이지요. 그래서 동양 철학 전반에 대해서 알 수 있는 데를 가보자 했던 거죠. 당시에 동양철학과가 있는 곳은 성균관대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거기를 들어가게 됐지요.


- 학생 때부터 불교에 관심이 있으셨던 거예요?

그렇지요. 나한테는 할머니가 어머니의 역할을 하셨는데 할머니가 절에 다녀서 아무래도 불교가 익숙했지요. 또 개인적으로 내가 불교를 지향했던 건 불교가 나를 뭔가 위로해 줄 것 같은 느낌을 받았지요. 중고등학교 시절 나는 세상의 모든 관계를 염세적으로 봤고 큰 가치가 없다고도 생각했거든요. 내가 가지고 있는 세상과 사람에 대한 불만족을 불교가 위로해주고 답을 찾아줄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런 생각이 강했지요. 그런데 막상 동양철학과에 들어가 보니까 불교에 대해서 배우는 건 별로 없었어요. 유교 중심이지. 그래서  불교학생회에 들어가서 불교공부를 해야 겠다 싶어 가입을 했는데 들어가 보니 운동 서클이야. 불교 공부는 안하고 사회과학 세미나를 주로 하는 서클이었던 거지요. 그래도 불교학생회에는 불교에 대해서 이해가 깊은 선배들이 있었지요. 그 선배들을 통해서 조금씩 배우긴 했죠. 그리고 서클 생활이 재미가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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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게 재미있으셨어요?

나는 걸어 다닐 때나 대화를 나눌 때도 사람과 눈을 마주치지 못했거든요. 항상 땅만 보고 다녔어요.  땅만. 초등학교 때는 학교가 내가 사는 마을 근처에 있고 다 오래전부터 봤던 사람들이니까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별로 이상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중학교는 시내에 있었거든요. 마을에서 한참 떨어진 거지요. 그 시내 사람들이 나를 보는 시선이 다른 거예요. 화상당한 얼굴과 손을 안쓰럽게 보거나 불쌍하다는 듯이 보는 거지요. 그러면서 그때 처음으로 내가 다른 사람들과 많이 다르다는 걸 알게 된 거죠. 그때부터는 이제 사람 눈을 안 마주쳤어요. 그 자체가 부담스럽고 힘드니까. 땅만 보고 다니는 거지요.  자리에 앉아도 사람들의 시선이 안 띄는 구석탱이에 앉고. 거의 재수할 때까지 그랬어요. 그런데 대학교에 들어가니까 그런 부분을 친구들이 부숴주는 거야. 내가 지닌 화상상처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대하고 한번은 내가 라면을 먹다가 남겼어요. 그러자 한 친구가 배고프다며 아무 거리낌 없이 그 라면을 가져다 먹는 거예요. 난 깜짝 놀랐지요. 내가 다른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그 친구들이 깨우쳐 줬지요.  그렇게 내가 가지고 있는 벽들이 깨지면서 많은 부분 편해졌지요.


- 되게 드라마틱하네요. 땅만 쳐다보며 걸었던 시간들 속에서 불교가 나에게 위로를 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그래도 불교라는 종교를 알고 있어도 거기서 말하는 게 무엇인지를 알아야 내가 조금 더 공부하면 위로를 받을 수 있겠다는 생각까지 갈 텐데요.

내가 불교에 가까이 가려고 했던 이유는 스스로 가지고 있는 세상에 대한 만족스럽지 않은 마음. 나는 왜 이럴까. 나는 왜 이런 처지가 됐지. 이런 생각들을 받아줄 수 있는 품이 불교라고 느낀 거지요. 고등학교 시절 쇼펜하우어라든지 철학적으로도 세상을 비관적으로 보는 작가들의 책을 많이 읽었던 것 같아요. 나는 염세주의 철학처럼 불교도 같은 맥락이라고 봤는데 더 깊게 들어가 보니까 불교가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구나 깨닫게 됐죠. 물론 불교 안에 그렇게 해석될 수 있는 부분이 없지는 않지만 불교가 진정으로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지, 무엇을 세상에 전달하고 싶어 하는지를 새롭게 이해를 하면서 세상과 사람 관계를 보는 안목이 조금은 넓어지지 않았나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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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싸우는 마음, 떠나는 마음


- 감옥에 다녀오셨다는 이야기도 들은 것 같은데요.

감옥도 갔었지요.


- 당시의 분위기는 그곳에 갈 수도 있다는 걸 감지하셨을 것 같은데요. 어떤 마음이 그런 희생을 감당하게끔 하셨을까.

대학에서 운동권 활동을 하는데 큰 두려움 없이 할 수 있었던 것은  친구들이나 선배들이 나한테 주는 신뢰. 사람으로서의 정. 이런 것에 나는 더 감동을 한 거지요. 그래서 선배가 데모하자고 하면하고, 어디 점거하자고 하면 하고 그랬지요. 세상이 이렇게 굴러가서는 안되겠다 라는 뜻은 당연히 있었지만 그래도 여러 가지 두려움이 있기 마련이잖아요. 그럼에도 선배들이 내가 생각지 못했던 새로운 인간상들을 보여줬죠. 그렇게 대학교 때는 몇 개월씩 감옥에 갔다 왔고 나중에는 민불련(민중불교운동연합)에서 일하다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잡혀 들어갔지요. 1년 6개월.


- 대학교를 졸업할 즈음에는 민불련에서 실무를 보는 활동가로써. 민불련은 어떤 내용을 가진 단체였어요?

80년대 만들어진 최초의 불교운동권 단체로서 여러 불교사회단체들을 실질적으로 이끌었던 단체이지요. 특히 기관지나 소식지등의 선전물 제작에 많은 힘을 기우렸지요. 선전물로 최전선에 있는 거지요.  다른 불교 활동가들은 거기서 나온 선전물들의 내용을 활동의 지침으로 삼았지요. 그런데 선전물에 나오는 글들이 반체제적이고 구체적이다 보니 정권의 입장에서는 타깃으로 삼기가 쉬웠던 거지요.


- 타깃으로 삼기가 쉬웠다. 

그렇지요. 그런데 나는 그 시기에 민불련 활동 자체에 여러 가지로 회의감을 느꼈어요. 특히 이런 활동이 내 삶에 어떤 변화를 가져다 줄 수 있는가 의문이 들었던 시기였죠. 그런데 그때  노태우 정권이 유화정책 일환으로 대학제적생들을 다시 학교로 돌아오게 하는 정책이 펼쳤거든요. 그래서 나도 이참에 대학에 돌아가 공부나 더 해야 겠다는 생각으로 복학 준비를 했지요. 그런데 덜컥 감옥에 잡혀간 거죠. 사실 내가 활동에 대한 회의감이 극심할 때는 감옥에나 가야겠다 작정하고 . 시위대 맨 앞에서 여러 번 주도를 했는데 경찰에 잡혀가도 계속 풀려나는 거야. 주동자로 잡혀가도 풀려나고, 풀려나고.


- 공부 좀 해보려니까.

예. 그 일을 통해서 또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인생이 내 뜻대로 되지 않는구나. 세상이 뜻대로 되지 않는구나. 이걸 새삼 절박하게 깨달았지요.


- 활동에 회의감을 느끼는 것도 혼란의 과정이잖아요. 다시 공부해야겠다고 다짐하는 것도 그 와중 일텐데 모든 계획들이 탁 엎어지면서 갇힌 상황.

아침에 사무실 출근하는데 숨어서 기다리던 형사들에게 잡혀갔지요. 옛날의 감옥은 동지들이 많으니까 감옥이라고 생각도 잘 안 들었지요. 사실은 감옥에서 생활한다는 것이 우리들만의 새로운 세계가 형성된 거지요 

우리끼리 의식도 하고. 매일같이 애국가 조회하듯이 투쟁가를 부르면서 하루를 마감하고. 감옥이지만 그렇게 갇혀 있다는 느낌이 잘 안 들죠. 간수들도 정치범들에게는 함부로 하지는 못하니까 독방에 갇혀 있지만 낮에는 방문을 열어놔요 같이 모여서 밥도 먹고, 운동도 하고 큰 틀에서는 갇혀 있지만 그 안에서 왔다 갔다 하면서 소통도 하고.


- 좁은 공간의 자유로움이네. 여기네요. 귀정사.

그렇게 감옥에 1년 6개월이 있다 나와서 출가를 한 게 29살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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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시사IN 이명익



#3) 끝이라 여긴 끝에서


- 출소 후에 긴 시간을 보내지 않고 바로 출가를 하신 건 어떤 결심이 있었어요?

내가 했던 활동들이 나에게는 희망이 별로 안 보였어요. 또 활동을 하면 할수록 나의 성품하고 안 맞는다는 생각이 들어서. 격렬하게 싸우고 대립하고 욕설하고, 그렇게 하는 것이 투사로서의 성품을 갖추는 길이다. 적개심을 길러야 한다. 이런 말들이 잘 다가오질 않았죠. 거기서 오는 힘듦이 항상 잠복해있었기 때문에 감옥 안에서 출가를 생각했던 거죠.


- 그럼 감옥 안에서도 불교 공부를 계속 하셨겠네요.

그때는 책을 자유롭게 읽을 수가 있으니까. 감옥에서 나와서 불교단체에서 일하고 있던 학교 선배한테 출가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니까 도법스님을 소개시켜 주었지요. 그때  신문 기사를 통해서만 스님의 활동을 접했을 뿐 스님을 잘 몰랐지요.  충청도에 있는 수덕사, 그 위에 정혜사라는 조그마한 선방에 스님이 계셨거든요. 거기를 찾아뵙고 절 생활을 시작했어요.


- 수덕사 위에 정혜사.

그렇게 정혜사에서 출가를 했는데 문제가 생겼어요. 조계종법이 바뀐 거예요. 출가 수행자는 신체장애가 있으면 안 된다고. 스님도 그걸 모르고 출가가 가능하다고 생각하셨던 거죠. 그래도 스님은 절에서 일하는 사람으로 평생을 같이 지낼 수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나는 그 길이 구체적으로 잘 떠오르지가 않더라고요. 그래서 3개월 정도 있다가 내려왔지요. 다시 불교 단체에서 일하면서 지내고 있는데 스님이 정혜사에서 실상사로 옮겨와서 터를 잡으시면서 연락을 주셨어요. 한번 보자고. 스님께서 실상사에서 일을 같이 했으면 좋겠다고 하셔서 내가 실상사로 왔지요. 그게 92~93년도. 그러면서 그 후 실상사에서 살았던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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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년이 지났네요.

그러다가 95년도에 스스로 삭발을 했는데, 스님이 머리 깎은 김에 실상사 내의 스님들이 증명하는 출가를 해보자. 조계종이 인정하는 출가자는 아니지만 실상사 내에서는 출가자로 인정하는 그런 의식을 한번 해보자고 제안하셨죠. 그렇게 실상사 내에서 승복 받고 본격적인 승려생활을 한 거지. 나한테 특별한 사건이죠. 스님도 고민하면서 여러 가지로 배려를 해주신 거지. 그래서 스님에 대한 고마움은 제 인생에 굽이굽이마다 배어있어요. 내가 지닌 복이지요. 좋은 스승을 만난 것.


- 저에게도 그런 스승이 계시는데.. 복처럼 여긴다는 게 공감돼요.

정혜사에 처음 갔을 때 도법스님 뵈러 왔다고 하니까 지금 울력 시간이라고 어느 방에 가서 기다리고 있으라고 하더라고요. 한참 기다리니까 작업복 차림으로 추레하게 입은 스님이 들어오는 거예요. 나는 도법스님께서 이 스님한테 심부름을 시키셨구나 하고 생각을 했지요. 그런데 그 스님이 나한테 왜 출가를 하는지 이것저것 묻더라고. 그런데 나는 나의 속마음을 도법스님을 뵙고 이야기를 드려야 하니까 그 스님한테는 건성건성 대답했어요. 그때 이미 도법스님은 언론에서도 그렇고 유명했었거든요. 그런데 유명한 인물 치고는 너무 왜소하고 차림새도 그렇고 큰 스님같은 느낌이 하나도 안 드는 거야. 나중에야 그분이 도법스님이라는 걸 알게 됐지요. 하하.


-  나중에 알게 됐을 때도 그 첫인상이 도법스님에 대한 좋은 느낌이었겠네요. 큰 스님을 떠올릴 때 어떤 분위기가 그려지는 반면에. 재밌는 에피소드네요. 그리고는 실상사에 계시다가.

스님이 이제 실상사의 주지를 맡게 돼요. 그러려면 행정을 보는 총무 역할을 할 사람이 필요해서 그 역할을 했지요. 2002년도. 우리나라 2002년 월드컵 열릴 때까지 그 일을 했어요. 그런데 그때 내가 뇌출혈을 겪으면서 모든 일을 놓게 되었지요.


- 처사님이요?

머리가 갑자기 아파서 CT를 찍었는데 뇌혈관이 터졌다고 그러더라고요. 뇌출혈은 빨리 수술을 하지 않으면 치료방법이 없대요. 그런데 수술을 하는 방법은 내 마음에 다가오지 않아서 수술을 하지 않고 고칠 방법을 모색했는데 그런 길은 없다 그러더라고요. 뇌 수술을 하면 남은 생을 나사 풀린 사람처럼 맹하게 사는게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있었어요. 그래서 그냥 떠났어요. 병원에서도 수술을 안 하면 3일 안에 죽거나 반신불구가 된다. 그래서 서해안에 있는 섬으로 갔어요. 원래는 아름답다고 알려진 선유도를 가려고 했는데 선유도로 가는 배가 이미 다 끊겨서 개야도라는 조그마한 섬으로 갔어요. 거기서 죽으려고. 3일 안에 죽는다고 하니까.


- 죽을 자리를 찾아서.

서해의 석양을 보면서 서해 바다 속에서 죽을 수도 있겠다 싶었지요. 그래서 민박집을 잡고 지내고 있는데 며칠이 지나도 내 몸의 느낌이 죽을 것 같지가 않은 거예요. 그래서 제주도로 가서 아는 스님 절에 의탁해있으면서 주로 제주도 해안가를 걸으면서 1년을 보냈죠. 뇌출혈이 저절로 없어졌어요. 대학병원에서 3개월에 한번 CT만 찍었는데 의사들도 이런 경우도 있구나 하면서 특이한 현상이라서 자료로써 갖고 싶다고 말했었죠.


- 진짜 거짓말 같아요. 자가회복을 하신 거잖아요. 그렇게 육지로 올라와서 실상사로 다시 돌아가신 거군요.

네. 실상사 근처에 화림원이라는 곳에서 지내다가 산내면 중기마을 위에 귀농학교 책임자로써 역할을 한 거죠. 그때는 인드라망 교육원이라고 불렀죠. 그 교육원 안에서 귀농학교도 운영하고, 대안치료를 가르치는 일도 하고, 음식 강좌도 하는 그런 학교를 운영했었죠. 그러다가 2006년도에 귀정사로 오게 된 거지요.


- 2004년에 교육원에 가셨다가 2006년에 귀정사로. 도법스님이 귀정사는 사부대중이 만들어가는 그런 절로 운영해보라고 하셨던.

당시에 도법스님 상좌(제자)가 한 10명 정도 됐었죠. 그때 상좌스님들이 스님께 마음 편하게 쉴 수 있는 공간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요청했어요. 실상사는 쉬는 공간이라기보다 다양한 활동이 이루어지는 공간이다 보니까 마음 편하게 쉴 수 있는 조그마한 절이 있었으면 좋겠다 해서 스님이 알아봐 주신 거지요. 귀정사는 사람들이 크게 관심 갖지 않는 절이니까 너희들이 한번 운영해보라고 제안을 하신 거죠. 결국 다른 상좌스님들은 왔다 갔다 하고 나는 여기서 상주하면서 귀정사가 다시 시작하게 된 거죠.


- 말하자면 귀정사의 주지로 오신 건가요?

그렇지요. 처음 와서는 3개월 정도 혼자 살았죠.


- 환경이 지금과는 비교가 어려울 것 같은데요.

전체적으로 건물들이 무너지기도 하고 공간 자체가 어수선했죠. 그때까지는 스님 한 분이 살거나 또는 비구니 스님이 가족과 살았던 거죠. 아무래도 여기가 너무 외지니까 신도들이 오기도 그렇고 운영이 어려웠지요. 조용히 은둔하고 싶어서 오는 스님들도 있는데 은둔처로써도 어렵죠. 여기가 본사와 관계를 맺고 있고 본사와 말사에는 회의 체계도 있어요. 회의도 가야 하고 또 귀정사의 역사가 오래됐고 전통이 있기 때문에 초하루 법회나 동지 법회는 신도가 몇 명이 오든지 간에 해야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은둔을 원했던 스님들과도 안 맞는 거지요. 그러니까 오래 머물지 못하시는 거죠. 결국 그렇게 우리들한테 귀정사라는 절이 맡겨진 거죠.


- 그것이 2006년부터의 과정이고요. 쉼터가 만들어진 건 제가 아는 경과가 맞을까요? 송경동 시인이 수지행 선생님한테 쉴 공간을 물었고, 귀정사에 쉼터를 만들자고 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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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집도 절도 아닌 곳


예. 송경동 시인이 도법스님 소개로 2012년 겨울에 귀정사에 와서 4개월을 지냈지요 봄 무렵 올라가려던 시점이죠. 올라가기 전에 제안을 한 거죠. 자신이 누렸던 이 공간에서의 쉼을 누려야 하는 절박한 형편의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런데 그런 공간이 없다. 이런 얘기를 했었죠. 그렇게 송경동 시인, 순천 들풀한의원 윤성현 원장님 등이 모이면서 구체화 됐어요. 사실 처음 귀정사에 와서 귀정사를 어떤 방향성을 가지고 가꿔갈 것인가 여러 고민속에 귀정사의 모토를 ‘뭇 삶의 안식처’라고 표현했었죠. 이 공간 자체가 물리적으로 바깥과는 단절돼있기 때문에 그런 환경이 사람들에게 여유와 편안함을 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귀정사가 의미 있게 쓰일 수 있는 방법은 그런 내용이어야겠다 싶었던 거예요. 그래서 쉼터를 적극적으로 추진했던 거죠.


- 그럼 굉장히 속도감있게 추진된 상황이었네요. 2012년 겨울에 송경동 시인이 오고 2013년에 정식개원을 했으니까요.

그렇죠. 개원식은 2013년 10월달에 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쉼터가 이미 운영되고 있었어요.기존에 있던 요사채 네 곳을 활용해서 쉼이 필요한 분들을 받고 있었죠. 개원 전에 이용객들이 오는 걸 보니까 공간 자체가 비좁았지요. 그래서 숲 속에다가 한 채, 두 채, 집을 지었고 그 공간이 완성되는 날 개원식을 한 거죠.지금 생각해보면 참 신기하지. 어떻게 그렇게 잘 될 수 있었을까. 사실 초창기에 일이 반짝 진행되는 것은 가능하지요. 우리 운동권들도 반짝 추진하는 건 잘하지만 지속성을 가지고 장기적인 호흡력을 가지는 데 있어서는 약한 부분이 있어요. 지치지 않고 쭉 유지해나갈 수 있도록 하는 게 우리한테 가장 관건이었지요.


- 사람이 모인다고 해도 유지를 하는 건 많은 협력들이 있어야 하잖아요. 이 공간을 귀정사가 지켜주고 처사님의 곧음도 있으시고 쉼터 이용객이나 사람간의 문화도 그렇고. 많은 조건이 있을텐데 어떤 동력이 쉼터를 유지시킨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쉼터는 귀정사라는 절, 쉼터 운영진, 쉼터 이용객, 그리고 쉼터 후원자 이렇게 여러 주체가 있잖아요. 이들이 서로 고마워하고 힘을 주는 거죠. 쉬었다 간 사람들이 쉼터에게 고마워하고 소중한 공간으로 여기고 북돋아주니까 운영진들도 힘을 받고요. 물론 절의 입장에서도 걱정스러운 점이 없지는 않았죠. 절 공간이 불교인이 아닌 비불교인들이 중심이 되고, 또 오는 이들이 종교에 대해서 그렇게 호의적이지 않은 운동권이잖아요. 

그러나 귀정사는 보통 절과 다르다. 귀정사가 대한민국의 모든 절과 동일한 색깔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저는 그렇게 생각했어요. 귀정사의 이러한 다양성이 한국 불교를 더욱 강화시켜주는 역할을 할 것이다. 한국 절이니까 이렇게 해야 한다 저렇게 해야 한다는 것 자체가 불교를 약화시키는 길이라고 보았지요. 개인의 안목, 또는 절의 안목이 넓어지는 것은 동일한 생각을 지닌 가진 사람들이나 불교인들을 만나서 높아질 수도 있겠지만 대체로 더 비약적인 상승을 가져오는 것은 전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 전혀 다른 틀에서 살아온 사람들과의 만남 속에서 이루어지지요. 그건 귀정사로서도 복이고 나로서도 복인 거지. 오히려 그런 새로움을 통해서 절이 활력을 가질 수 있으니까요.

결국 절과 쉼터 운영진, 여기서 쉬었다 가는 사람들, 그리고 후원자들의 마음이 잘 모아졌다고 생각이 들어요. 그게 지속적으로 운영되어올 수 있는 힘이 되지 않았을까요.


- 그렇게 지켜온 쉼터네요. 

쉼터에 대해 평가한 여러 사람의 글 중에 가장 인상 깊은 게 있어요. ‘어딘가 있을 법한 공간, 생각해보면 존재할 수 없는 공간, 그러나 꼭 있어야 하는 공간’ 이렇게 표현을 하셨어요. 상상 속에서나 있을 만한 공간, 그러나 현실에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공간, 그러나 꼭 필요한 공간. 어린이집 선생님이었나, 여기 머물다 가셨던 분이  그런 편지를 보내주셨어요. 오아시스가 실제로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 불확실하듯이 쉼터가 그런 아련한 공간이었다는 거지요. 그게 쉼터에 대한 적절한 표현 같아요.처음에 무료로 쉼터를 운영한다고 했을 때 다들 반신반의 했지요. 실제로 그런 공간이 있을 수 있나? 사기치는 거 아니야?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구현되었고, 점점 우리가 이 공간을 운영해나가는 역량이 확인되면 될수록 탄탄하게 유지해 나갈 수 있는 기반이 되겠죠.


- 저는 귀정사에서 처사님의 역할을 생각하다가 그런 물음표도 생겼어요. 처사님 삶의 중심은 귀정사이고, 여기서 주로 사람들의 고민을 들어주는 위치일 텐데, 그럼 자신의 생각이나 고민을 풀고 해결하는 방식이 평범한 사람들과는 다를 수 있겠다 싶어서요.

저는 순발력이 뛰어나거나 그러지를 못해요. 예를 들어 질문을 하면 그에 적절한 답이 딱 나와야 되는데 그렇게 순발력이 없거든요.


- 괜찮습니다.

저는 약간의 거리감을 두는 거죠. 너무 밀접하면 순발력이 필요하거든. 어떤 일에도 그 즉시에서 터져 나오는 문제를 내가 당장 해결할 수 없으니까 거리를 두고 생각하고 정리하는 스타일인 것 같아요. 마음이야 뭐 다 비슷하지.문제를 만나면 다 요동치고. 그러나 마음의 안정감, 평정심. 이런 걸 놓치지 않으려고 애는 쓰죠.제일 잘 활용하는 방법은 매 순간 내가 지금 하는 일을 알아차리면서 하려고 하는 것이죠. 걷고 있다면 걷는 행위를 주시하고 밥을 먹고 있다면 밥 먹는 행위를 주시하고. 설거지를 하고 있다면 설거지하는 행위를 주시하는 거예요. 되도록이면  지금 하고 있는 일,  주시하려고 노력해요. 불교는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난 삶을 목적으로 해요. 그리고 그것을 이루려면 지혜를 갖춰야 된다고 말해요. 그런데 그 지혜는 균형 잡힌 마음 즉 평정심을 갖췄을 때 나온다. 마음의 균형이 무너진 상태 불균형의 마음 상태 속에서는 어리석은 행위가 나온다고 보거든요. 그래서 평정심을 갖추는 훈련으로써 지금 이 순간 내가 하고 있는 행위를 잘 주시하는 게 일상속에서 애써서 하는 훈련 방법이죠.


- 현재에 집중해라. 그런 거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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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삶의 끝까지 함께, 쉼과 연대의 공동체


- 마지막 질문을 드릴게요. 처사님이 앞으로 귀정사와 사회연대쉼터에서 하고 싶은 일이 있다고 들었는데요. 

살아가는 날들을 하루하루 순간순간 더욱 밀도 있게 살 수 있게 하는 일이죠. 그것에 있어 중요한 것이 죽음에 대한 새로운 안목을 갖는 것 이라고 생각해요. 지금의 장례문화는 우리에게 죽음을 통해서 무엇을 배워야 할 지 별로 던져주는 게 없어요. 경황없이 지나가는 통과의례처럼 자리하고 있지요. 우리가 그런 부분에 관심을 가진다면 삶의 지향이 같은 분들에게 귀정사에서 영원한 안식처를 제공하고 그 안식처로 가는 과정에 대한 가르침,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에 대해서 소통하는 그런 문화들이 자리 잡아야 해요. 이럴 때 죽음에 대해서 새로운 안목으로 볼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고 거기에 더해 밀도 높은 하루하루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많은 사람들이 우리는 반드시 죽는다는 사실, 자기 삶이 한계가 있다는 것을 잘 안 받아들이죠. 나 자신에 대한 강한 집착의 일종이죠. 그 집착이 나는 안 죽을 것 같다는 착각을 하게 만드는 거지요. 그 집착을 놓아야 내가 언제든지 죽을 수 있고 내 생명이 한계가 있다는 것에 맞춰서 삶을 계획하는 거지요. 내 삶에 있어 가장 큰 변화가 죽음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면 살아가면서 무거운 짐들을 만들어 놓지 않고  즉각 즉각 풀어가면서 삶을 좀더 가볍고 경쾌하게 꾸려가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러면서 귀정사 숲속에 영원한 안식처로서 수목장을 생각하게 된 것이지요.


- 제가 처음 수목장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제가 이런 질문을 드렸었죠. “여기에 묻히고 싶은 사람들이 많을까요?”. 그때 처사님 대답을 듣고는 100% 이해가 됐었어요.

자신의 동지들이나 정신적인 가치를 공유하는 사람들로부터 보호받는 죽음이라고 한다면 훨씬 더 편안하고 안정될 수 있잖아요. 죽는 사람 입장에서는 숱한 공포와 두려움을 가질텐데 그들이 맞이할 무게를 덜어줄 수 있는 거잖아. 특히 수목장을 생각했던 이유는 “자기가 죽으면 귀정사가 보이는 숲에 묻어달라”고 했던 노동자 윤종광 님. 그분 이야기 들으면서 더 적극적으로 이 문제를 풀어야 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었거든요. 

그분이 30대 초반부터 30년 가까이를 현대자동차 노조 활동을 했는데 하루도 맘 편할 날이 없었대요. 하루도. 그분이 어느 날 긴 단식을 하고 나서 동료 몇 명하고 같이 귀정사 쉼터에서 한 10일을 머물렀지요. 본인은 흰죽을 먹으며 회복식을 하고 다른 사람들은 비빔밥으로 고추장에 비벼 먹고. 숲속을 천천히 산책 하며 지냈는데  그 일상이 별것도 아닌데 그 시간이 너무도 평화로웠고 행복했다는 거예요. 가족과 동료들에게 자주 귀정사에서 보냈던 시간을 얘기 했다고 해요. 윤종광 님의 과정을 거치면서 더 적극적으로 이 문제를 풀 수 있는 길을 모색해야겠다 싶었죠.




인터뷰어 : 이수경
경남에서 청소년인권운동을 했고, 기록작업과 컨텐츠를 수단으로 활동 언저리에 남고 싶어 머리를 굴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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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공익활동가주간의 <활동가인터뷰 프로젝트>는 다양한 지역과 분야에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변화를 위해 노력하는 활동가들의 일과 삶 이야기를 듣고 인터뷰로 기록하는 활동을 지원합니다. 2025년에는 특별히 <광장을 만드는 활동가>를 기획인터뷰로 진행했으며, 공모를 통한 활동가 인터뷰 프로젝트도 더불어 운영했습니다.  활동가 인터뷰 프로젝트는 <아름다운재단>과 <지리산이음>이 함께 기획/운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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