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공익활동가주간]민주주의와 공동체의 힘을 믿고 지켜온 정보공개센터 김조은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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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와 공동체의 힘을 믿고 지켜온 

정보공개센터 김조은 활동가



조은은 투명사회를 위한 정보공개센터의 활동가다. 조은이 이곳에서 작업한 대표적인 활동을 꼽자면 외환위기 협상자료를 국제기구 IMF에 청구해 <1997 외환위기 아카이브>를 만든 것이라 할 수 있다. 나는 현장에서 몸을 부딪히며 투쟁하는 활동가를 많이 만났고 스스로도 현장에 머물 때가 종종 있으며 몸으로 싸우는 직접행동과 현장 투쟁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생각을 해 왔다. 그런데 조은을 만나면서는, 문제에 더 잘 대응하기 위해서는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정보’와 ‘알 권리’라는 도구와 시스템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생각, 이 또한 현장 투쟁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공동체라는 말에 자주 기대고, 경청을 통한 의사소통에 능하며, 정치적 균형감각이 탁월한 조은 활동가의 활동가로서의 시작은 어디일지, 그 감각은 어떤 경험에서 얻어진 것인지가 궁금했다. 이에 대한 반짝이는 응답의 기록을 주변의 많은 이들과 나누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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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파면촉구시민사회단체결의대회에서 행진 구호를 외치는 중



Q. 정보공개센터에 적을 두고 있는 조은의 경우, 활동가라 불리는 데 어색함이 없을 듯한데요, 그럼에도 ‘활동가’라는 이름을 괄호로 둔다면 그 안을 무엇으로 채울 수 있을지 궁금해요. 정보공개센터의 활동가이기도 하지만, 센터의 활동을 하고 있는 더욱 근본적인 마음은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요. 어떻게 해서 정보공개센터 활동가가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부터 자연스럽게 들을 수 있겠네요.

제가 정보공개센터에서 일하게 된 것, 그리고 활동가가 된 계기나 경위에 대해 말한다면, 역사적인 경험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을 거예요. 우연한 계기로 학습받은 것, 경험한 것들을 토대로, 제가 제일 잘할 수 있는 일, 혹은 그냥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선택해서 오다 보니까 센터도 이제 알게 되고 활동가라는 직업도 갖게 된 것 같거든요.

활동이라는 것 자체를 알게 된 계기는 청소년 인권 활동이었어요. 제가 고등학교 때 되게 공부를 열심히 하고 사교육도 엄청 많는 소위 ‘목동 키즈’였거든요. 고2 때 수시 준비를 하려고 보니까 논술이 중요했던 거예요. 그래서 저희 학교 내에서 하는 영화 논술 프로그램을 들었는데, 그 수업에서 봤던 영화 중에 특이한 영화들이 진짜 많았거든요. <빵과 장미>를 보고 큰 감명을 받았고,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전쟁 영화나 <조제, 호랑이, 물고기> 같은 영화도 거기서 처음 보게 됐죠. 그런 영화들을 보면서 세상을 보는 시각, 감각이 조금 달라진 계기였죠. 그런데 그 이후로도 평범하게 공부하면서 대입 준비하고 이렇게 살았거든요. 

그러다가 고3 때 고액 논술 과외를 하게 됐어요. 영어학원에서 구성을 해준 고액 논술 과외를 하게 됐는데 그때 선생님이 ‘인권교육센터 들’이라는 데서 활동을 하던 활동가였던 거예요. 그 선생님이 제가 관심이 있겠다는 생각을 하셨는지, 청소년 인권 세미나를 하는데 거기 한번 와보지 않겠냐고 권했어요. 그때 제가 많은 것에 열려 있고 에너지도 넘치고 해서 거길 갔죠. 세미나는 민주노총 1층 회의실에서 진행됐어요. 탈학교 운동을 하는 그런 청소년들, 인권활동가들이 많더라고요. 거기서 세미나를 하다 보니까 세상을 보는 눈이 확 달라졌어요. 그래서 그 친구들이랑 술도 마시고 그러면서 같이 놀러 다니기 시작한 거죠.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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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공개센터 회의실에서의 인터뷰 모습



Q. 그때가 고3이었는데, 괜찮았어요? 급격한 내적 변화를 겪었으니 불화감도 많이 느꼈을 것 같은데. 적응이 힘들거나 하진 않았는지.

맞아요. 기억나는 사건이 하나 있긴 해요. 교육공동체 ‘나다’라는 곳이 있거든요. 그곳에서 활동하는 친구들이랑 ‘아수나로’ 친구들, 그렇게 청소년 인권운동을 하던 친구들이 대부분이었거든요. 장애인 차별 철폐 운동하시는 분들, 전교조 소속인데 조금 더 인권운동에 맥이 닿아 있는 교사들도 있었고. 일주일에 한 번씩 하는 세미나에 20~30명씩 모여 꽤 오랫동안 했어요. 그때가 사실 곽노현이 학생인권 조례를 처음 도입하던 시기였어요. 학생인권 조례라는 걸 만들기 시작하면서 제가 요청을 받아서 교육청에서 하는 TF 회의도 참석하고 기자회견에도 가고 교복 입고 나가서 퍼포먼스 하고 그랬거든요. 그런데 그걸 학교에서 알게 돼서 난리가 났죠. 선생님이 저를 교탁 앞으로 불러서 “온실 속의 화초 같은 애가 뭘 한다고 그런 데를 가서 그런 걸 하고 있냐” 하는 식으로 망신을 주기도 했죠. 저는 거기서 막 펑펑 울기만 했고요. 지금도 생각하면 너무 분해요. 제가 거기서 제대로 대응을 하지 못했던 게요.


Q.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서 세상 보는 눈이 바뀌고 그 친구들과 열심히 놀러 다녔다고 했는데, 놀러 다녔다는 게 단순히 놀러만 다녔다는 말은 아니죠? (웃음)

그렇죠. 공기라는 친구를 포함해서 여러 멋진 친구들과 홍대 앞도 다니고 했지만 당시에 두리반을 알게 된 게 좋았어요. 두리반이 너무 재밌는 공간이었거든요. 온갖 사람들이 다 있었어요. 진보정당 운동을 하는 사람들부터 예술가들, 그리고 아나키스트까지. 조약골 같은 사람들이 기획을 해서 텃밭도 막 해보고 라디오도 하고 그랬어요.
그곳에서의 정치적 경험이 제 몸에 뿌리내린 가장 확실한 경험이라는 생각을 해요. 거기서 공동체에 대한 의식이 처음 생겼죠. 공동체를 만들고 유지하는 조건이라는 건 이런 것이구나 하는 것. 사무실 사람들이 저를 김공동체라고 놀리는데, 공동체를 향한 마음이 두리반에서 온 것 같아요. 


Q. 조은이 당시 두리반에서 얻었을 놀라움과 재미를 상상하게 돼요. 상상만으로도 덩달아 들뜨는데요, 그뿐만 아니라 그곳에서 읽어낸 정치적 메시지는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도 궁금해요.

두리반이라는 현장 자체가 철거 현장이잖아요. 너무 부당한 현장인 거죠. 그러니까 건설 자본이 세입자들을 내쫓는 현장. 보상도 당연히 제대로 안 해주지만, 보상이 초점은 아니고 이 상황 자체가 너무 부당하다는 감각이 되게 컸죠. 거기서 느꼈던 게, 평등이라는 것이 되게 중요하다는 거였어요. 힘과 권력의 차이가, 어떤 한 사람의 삶을 완전히 몰아낼 수 있게 하는 현장이다 보니 그걸 배울 수밖에 없었어요. 그러면 어떻게 그런 구조에 대항할 수 있을까 했을 때, 공동체라는 기반이 너무 중요해지는 거고요.  

그전에는 세입자나 자본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었거든요. 그와 관련해서 어떤 폭력이 일어나는지도 알지 못했고요. 관심이 없었던 거죠. 두리반에서의 경험을 계기로 난생처음으로 평등이라는 가치에 대해 굉장히 많이 생각을 하게 됐죠. 몸으로 알게 된 거예요.

두리반에서 다큐를 봤던 것도 굉장히 큰 경험이었어요. 근데 그때 김동현 감독이 찍었던 다큐를 몇 번 봤어요. 정말 인상적이었던 건 <송환>이라는 다큐였어요. 쫓겨온 사람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사람들의 슬픔을 진짜 담담하게 몇십 년 동안 담아서 찍은 거였는데, 그게 놀라웠어요. 되게 좀 인상적이었죠. 그때 읽었던 것 중에 또하나의문화에서 나온 김현미 선생님의 <글로벌 시대의 문화번역>이라는 책이 있었는데, 그 책 역시 너무 좋았어서 그 책에서 소개된 문화인류학과에 진학하게 되기도 했죠. 그렇게 간 대학에서 필드웍을 많이 나가면서 활동에 대한 감각을 키운 것도 있어요. 특히 시화호 필드웍을 나가면서요. 그게 거의 모든 과정이 협업으로 이뤄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거든요. 같이 땡볕 내리쬐는 현장에 오가고 같이 인터뷰 하고 녹취 풀고 하면서 훈련이 많이 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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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참사 진상규명을 위한 대통령 기록물 봉인 저지 기자회견에서 피켓을 들고 있는 모습



Q. 그럼 이제 대학 과정 마치고 어떻게 이곳, 정보공개센터에 들어오게 됐는지에 대한 이야기도 들을 수 있겠네요.  

대학 다니면서도 저는 주로 공중캠프라고 하는, 협동조합 식으로 운영되던 문화공간 겸 공동체 커뮤니티였던 곳에서 8년 정도 스탭으로 함께했거든요. 제가 당시 커뮤니티 활동에 방점을 두고 살았던 것 같아요. 졸업이 다가오고 이제 뭘 해야 하나 고민을 하다가 한 1년간은 그냥 놀았어요. 그러다 노동당의 활동가로 일하고 있던 친구 예찬이가 정보공개센터를 이야기하면서 조직문화도 괜찮아 보이고 제가 관심있어 할 만한 활동인 것 같다고 하면서, 거기 사람 뽑는다고 한번 지원해보라고 한 거죠. 그렇게 들어오게 됐어요. 주 4일 근무이고 금요일엔 자율 근무라는 것도 큰 장점이었어요.

별생각 없이 들어왔는데 되게 재미있더라고요. 정보공개센터는 알 권리라고 하는 것, 공공 정보에 대한 접근권이라고 하는 것을 말하는 곳이거든요. 다르게 말하면, 모두가 목소리를 다 가질 수 있어야 한다는 거예요. 목소리를 가지기 위해서는 알아야 하니까. 그러니까 알 권리라는 것은 우산 같은 권리, 권리의 토대가 되는 권리인 거예요.

2016년이네요. 정보공개센터에서 활동을 시작한 게. 이제 10년째예요. 저는 공동체나 조직의 의사결정 과정이 폐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에 대한 문제의식을 많이 느끼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두리반이 좋았던 것도 있어요. 두리반은 반상회라고 하는 걸 열어서 논의하고 결정하는 민주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었거든요. 옛날 철거운동이 갖고 있던 관성과는 다르게 운영이 되는 곳이었어요. 이런 게 공동체 안에서 뿐만이 아니라 국가적인 차원에서도 보장이 되어야만 우리가 더 정확하게 좀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생각, 이 점이 되게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활동을 하면 할수록 아는 게 되게 중요하다고 느끼기도 해요. 문제의 핵심을 정확하게 파악해야 우리가 어디에서 어떻게 개입해야 할지 아니까요. 그러니까 정확한 정보를 아는 게 기반이 되는 거죠.


Q. 정말 공감해요. 모두가 함께, 알아야 하는 정보를 제때 알 수 있고 정확히 알 수 있도록 하는 게 진짜 민주주의인 것 같아요. 관련해서 제가 한국사회에서 문제라고 느끼는 건 정보의 불평등이기도 하거든요. 어떤 언어를 쓰느냐, 그 언어를 얼마만큼 잘 쓸 수 있느냐에 따라서도 불평등이 생기잖아요. 그런데 그게 계급 불평등이 그대로 반영되는 것이라서 더 이 문제가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궁금한데, 이와 관련해서 정보공개센터는 구체적으로 어떤 기반을 만들어 왔는지, 앞으로는 어떤 지향을 가지고 있는지가 궁금해요.

저희가 단계별로 변화를 겪은 것 같아요. 처음 저희가 창립했을 시기에는, 정보 공개 제도라는 것을 활용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잘 알려지지 않았던 시기였거든요. 그래서 저희가 모두가 알아야 하는 정보에 대해 정보 공개 청구를 해서 언론에 제공하고 언론이 그걸 보도해주는 방식을 취했어요. 정보 공개 청구를 어떻게 할 수 있는지 알리는 활동도 많이 했고요. 

이 단계가 어느 정도 지나고 나서는 정보 공개 청구 제도 자체에 대한 문제가 보였어요. 아까 말씀하셨던 것처럼, 사실 행정이 너무 많은 권력을 가지고 있거든요. 근데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에요. 그러니까 관료주의가 있을 수밖에 없는 국가라면 정부부처나 관련 기관들이 권력을 독점을 하고 있는 거죠. 근데 이게 사실은 정보를 독점하는 것이기도 해요. 정보를 독점하니까 밀실에서 결정을 하고 추진을 하는 게 가능해지죠.  

그래서 저희가 계속 이 정보 공개의 접근성, 정보의 평등을 현실 안에서 이루기 위해서 시스템에 변화가 필요하다는 걸 많이 느끼고 그쪽으로 활동을 하게 된 게 한 3~4년 정도 된 것 같아요. 행정 차원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정보를 차단하는 일이 없도록 이 제도를 시민 친화적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내고 있죠. 회의 공개법 등의 법안을 만드는 입법 운동도 시도하고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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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공개센터 회의실에서의 인터뷰 모습



Q. 회의 공개법이요? 다른 많은 입법 운동들도 있을 텐데 회의 공개법에 대한 운동을 먼저 하는 이유가 있을까요? 그게 특히 중요한 이유가 궁금해요.

회의라는 게 중앙 정부 및 지자체에서 운영하는 많은 위원회에서 항시 열리잖아요. 그렇게 위원회에서 결정되는 사안이 굉장히 많고요. 그런데 그런 결정 과정에 대한 알 권리가 진짜 보장이 잘 안 되거든요. 실제로도 현장 활동가들이 그렇게 많이 싸우지만, 다큐 같은 것 보면 회의장에 막 찾아가서 시위도 하고 직접행동도 하고 그러잖아요. 난개발 관련해서도 특히 그런 사례가 많고요. 

그런데 이 회의가 언제 있고, 어디서 모일 거고, 무슨 이야기를 할 것인지도 알아야 하고, 논의가 어디까지 진행되었는지 알아야 대응을 하잖아요. 그런데 현재는 이런 부분들이 너무 폐쇄적으로 되고 있기 때문에 이 정보를 먼저 오픈을 시키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이에요. 그래서 이 회의 공개라고 하는 시스템을 잘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죠. 회의를 실시간으로 공개하고 당연히 방청을 갈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놔야 한다고요. 적절한 때에 정보를 알 수 있어야 시의적절한 개입을 할 수 있으니까요. 늦지 않게 개입을 해서 중단을 시켜야 하는 거잖아요.


Q. 회의 공개가 정말 중요한 것이라는 걸 알게 됐어요. 정보 공개 운동 자체가 얼마나 정치적이고도 동적인 사회운동의 하나인지도요. 그런데 이번에는 정보공개센터가 광장에도 부지런히 뛰쳐나갔잖아요. 계엄과 탄핵 국면에서요. 그 배경에는 어떤 문제의식과 결의가 있었을까요?

윤석열 정부 들어서고 나서 사실 말도 안 되는 행보를 많이 보였잖아요. 불통 정부였고, 정보 공개에 있어서도 비공개를 남발했죠. 저희는 그 상황을 계속 주시하면서 대응책을 찾고 있었어요. 특히 이태원 참사나 채상병 사건 등 재난의 당사자가 있고 피해자가 있는 사건이 누적이 되니 상황은 더 안 좋았죠. 이 경우, 정보 접근이 진짜 중요하고 그런 게 제대로 안 되면 막 음모론 나오고 난리가 나거든요. 정확한 정보에 대한 접근을 통해서만이 진상규명이 가능한데, 그런 게 계속 막히면서 이에 대응하는 연대 활동에 더 많이 참여를 하게 된 참이었어요. 윤석열 퇴진운동도 중요했는데, 이 운동이 사실 조금은 당파적인 게 있어서 저희가 참여를 안 하고 있었어요.

그러다가 계엄이 터졌죠. 계엄은 완전히 다른 국면인 거잖아요. 정보 접근, 언론의 자유, 표현의 자유를 말하는 게 저희 단체의 주된 메시지이자 밑바탕이고, 사람들이 말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저희 단체의 가장 큰 사명인데, 계엄은 이 모든 걸 통제하고 억압하는 것이니까요. 통제와 입 막음의 끝판왕인 거죠. 이건 말이 안 되죠. 계엄 선포한 날도 그래서 바로 뛰쳐나갔던 것 같아요.

또 하나는, 저희가 함께하는 ‘거부권을 거부한다’라는 시민사회 연대체가 있었고 거기에 저희가 지속적으로 결합을 하고 있었던 이유도 있어요. 함께 대응하던 누적된 사안들이 있었고, 그 와중에 계엄이 터졌으니까 바로 적극적으로 결합을 할 수 있었던 거죠. 이건 박근혜 탄핵 때와는 조금 다른 흐름이었어요. 그때는 민중총궐기라고 하는 플랫폼이 있었어서 민주노총 중심으로 꾸려졌다면 최근의 윤석열 탄핵 운동은 시민사회 단체를 중심으로 꾸려진 셈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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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파면 촉구 결의대회에서 율동중



Q. 많이 힘들었을 것 같아요. 일상생활이 제대로 안 되지 않았어요? 아무리 단체에서 하는 활동이었다고는 해도, 힘 받는 요소가 없지는 않았을 텐데 어떤가요? 또 그렇게 부지런히 광장에 나갔던 게 조은 개인에게는 어떤 의미였을까요?

제 경우, 여러 활동가들을 만난 게 큰 의미였어요. 앞으로도 이렇게까지 많은, 다양한 단체의 활동가들을 만날 일은 앞으로도 없을 것 같아요. 이번 탄핵 운동이 아니었다면 만나지 않을 활동가도 알게 됐고요. 훌륭한 활동가들을 진짜 많이 만났어요. 

사회운동, 혹은 공동체라는 감각을 처음 알게 된 순간인, 두리반에 발을 들였을 때와 비교한다면, 그때는 한 사람의 참여자로서 함께 경험하고 공동체에 속해 있는 느낌이었다면, 이번에는 책임을 가진 한 사람으로서 서 있는 느낌이랄까요. 한 단체의 활동가로서 다른 단체의 활동가와 어떻게 함께 일을 꾸리고 조직해야 하는지를, 어떻게 광장이라고 하는 큰 판을 만드는 것인지를 배우게 된 거예요. 이 경험이 정말 특별했어요.


Q. 두리반 공동체에 있던 15년 전의 조은과 정보공개센터의 활동가로 있는 지금의 조은이 대비되어 보이네요. 조금은 닮아 있으면서도 판이한 형태로 겹쳐진 그 두 개의 장면이 흥미롭게 감각돼요. 그게 조은의 성장을 보여주는 것 같아서요. 그럼 끝으로, 정보공개센터의 활동 중 가장 인상 깊고 의미 있었던 활동은 무엇인지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제가 정말 애정을 많이 가지고 사실 했던 건 <1997 외환위기 아카이브> 작업이었어요. 센터에 들어오기 전부터 관심이 있어서 강연을 찾아서 듣기도 했죠. 이 사회의 불평등이 갈수록 깊어지는 데 대한 문제의식이 있었고, 자본주의가 어떻게 변화를 거듭해 왔는지, 이를테면 수탈의 전략들이 어떻게 변해 왔는지에 대해 관심이 많았어요. 그러다 보니 이 외환위기 아카이브 작업을 하자는 결정이 된 뒤로 제가 바로 그걸 맡아서 기획부터 진행까지 다 하게 된 거죠. 

강의 들으면서 알게 된 선생님들, 공중캠프에서 알게 된 지인들에게 묻고 도움 청해가면서 작업을 시작했어요. 국제기구 IMF에 정보 공개 청구할 건데 도와달라고도 하고 누구 만나 인터뷰하면 좋을지도 물어보고요. 지주형 선생님의 <신자유주의의 기원과 형성>이라는 책이 큰 지침이 되었죠. 아카이브 구성에도 그 책이 많이 쓰였어요. 관련 강의 들으러 가서 지주형 선생님 연락처 받고 이메일 보내고, 연구 자료 기증도 요청하면서 긴밀하게 소통을 했죠. 그 연구 자료들 쫙 기증받아서 무리 없이 아카이브를 만들게 됐어요. 지주형 선생님은 저희에게 연구 자료 기증하신 걸 계기로 국가기록원에서 표창도 받으셨어요.

IMF에다 정보 공개 청구했던 자료도 청구한 지 2년 만에 온라인으로 다 받아낼 수 있었어요. 국제기구는 정보 공개 규정이 20년 주기거든요. 사건 기준으로 20년 지나면 공개할 수 있는 거예요. 

외환위기의 맥락을 보여주는 원고는 여러 연구자와 활동가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IMF 때 도입됐던 여러 사회 복지 제도, 빈곤 문제는 김윤영 활동가가, 외환위기 당시 재벌개혁의 한계는 김경필 선생님이, 금융화와 부채 전가가 어떤 구조 속에서 어떻게 이뤄졌는지, 그것이 어떤 현상을 낳았는지에 대한 일목요연한 분석은 장진호 선생님이 해주셨어요. 이 밖에도 정말 많은 분들이 중요한 도움을 주셨죠. 외환위기 아카이브는 97imf 쩜 kr 치면 바로 볼 수 있어요. (https://97imf.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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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인대회에서 <1997 외환위기 아카이브> 구축 과정을 발표하는 모습



Q. 외환위기 아카이브 너무 좋네요. 꼭 들어가서 봐야겠어요. 주변에도 좀 많이 알리고요. 그러면 이제 진짜 마지막 질문인데요, 여러 사건과 시절과 프로젝트를 건너 오셨는데, 앞으로는 그러면 어떻게 어디로 또 건너갈 예정인지, 활동이든 삶이든 조은의 앞으로가 궁금해요.

당분간은 계속 정보공개센터에서 활동을 할 것 같아요. 아주 큰 계기가 없다면 앞으로 한 10년 정도는? 또 저희 센터에 새 식구가 들어왔기 때문에 조금은 더 있어야 할 것 같아요. 센터에서 제가 집중해서 하고 싶은 활동은 아까도 말씀드렸듯 회의 공개 제도를 좀 제대로 돌아가게끔 만들어내는 일이에요. 아주 오래전부터 제가 중요하게 생각해 왔던 것, 의사결정 과정에 대한 민주적인 참여와 알 권리가 모두에게 부여되는 사회를 꼭 만들어내고 싶어요. 



인터뷰어 : 희음
시 쓰기와 기록노동을 겸한다. 기후정의운동을 해왔고, 돌봄의 인식론 및 실천을 확장하는 데 관심이 많다. <김용균, 김용균들>, <우리 힘세고 사나운 용기>를 함께 썼고, 시집 <치마들은 마주 본다 들추지 않고>와 그림책 <무르무르의 유령>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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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공익활동가주간의 <활동가인터뷰 프로젝트>는 다양한 지역과 분야에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변화를 위해 노력하는 활동가들의 일과 삶 이야기를 듣고 인터뷰로 기록하는 활동을 지원합니다. 2025년에는 특별히 <광장을 만드는 활동가>를 기획인터뷰로 진행했으며, 공모를 통한 활동가 인터뷰 프로젝트도 더불어 운영했습니다.  활동가 인터뷰 프로젝트는 <아름다운재단>과 <지리산이음>이 함께 기획/운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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