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IT의 무한한 가능성을 믿습니다.
- 공동체IT사회적협동조합 인동준 활동가

“허약체질 이라 스무살까지 밖에 못 살것 같다고 수근거렸어요.“
인동준(47)은 키가 크고 머리카락이 길어서 질끈 묶고 다닌다. 누가봐도 건강한 대한민국 청년이다. 비영리 쪽에서는 ‘지각생’으로 통한다. 지각생이라는 별명은 많은 사람에게 필요한 IT 사회운동을 늦게 시작했다고 스스로 지은 별명이다.
인동준에게 아픈 사연이 있었다는 걸 안 지는 얼마되지 않았다. 어느 모임이 끝나고 뒤풀이에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어린 시절 이야기가 나왔다. 그때 인동준이 한 말이다.
”초등학교 때 아버지 사업이 망했어요. 저는 키도 작고, 눈이 나빠서 맨 앞에 앉아서 눈을 찡그리고 수업을 들었어요. 어느 날 우리반이 수학경시대회에서 1등을 해서 상금을 받았어요. 반 친구들과 맛있는 걸 먹고 있는데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상금이 남았어. 남은 돈으로 우리 동준이 안경 맞춰주고 싶은데 너희들 생각은 어때?”라고 물었어요. 아이들이 전부 ”좋아요“라고 했어요. 그때 처음으로 안경을 썼어요.
지금은 키가 크지만(180Cm) 어릴 때는 허약체질 이었어요. 20살 까지 밖에 못 산다는 수근 거림을 듣고 자랐어요. 금방 죽을거니까 돈을 많이 벌어야겠다거나 성공해야겠다하는 꿈을 가지고 살진 않았어요. 현실에 집중하고 지금의 감정에 충실하자는 생각으로 살았어요.”
시간이 많이 흘러서인지 몸과 마음이 아팠던 이야기를 웃으면서 할 수 있게 되었다. 남에게 보여주기 싫은 상처를 꺼내는 게 쉬운일이 아닐텐데 꺼내준 그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디테일한 질문을 해도 된다는 신호로 여기고 다음 질문을 이어갔다.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신문 배달을 했어요. 어느 날 학교 끝나고 집에 오는데 전봇대에 &석간신문 배달할 사람 모집&이라는 전단지를 봤어요. 얼마라도 벌어서 부모님을 도와드리고 싶었어요. 몸이 약해서 신문 배달을 오래 할지 몰랐는데 고등학교, 대학교 때까지 했어요. 신문 배달을 하고부터 몸이 튼튼해지더라고요(웃음).”
인동준은 공부하는 방법이 남달랐다. 남들은 암기 위주로 공부를 하는데 인동준은 문제를 분석하고, 문제를 낸 의도가 무엇일까를 생각하면서 시험문제를 풀었다. 1997년, Y대학교 컴퓨터 공학과에 입학했다. 대학교에 갔더니 내가 공부하고 싶은 주제는 따로 있는데 가르치는 방법이 마음에 안 들었다. 거기다 초등학교 때 망한 아버지의 사업이 회복 될 기미가 보이지 않아 학업에 집중할 형편이 안 되었다. 등록금 낼 돈이 없어서 휴학과 등록을 몇 차례 반복했다. 결국은 자퇴를 했다.
“대학교에 갔더니 선배들은 저를 운동권으로 만들려고 했어요. 철학 교육도 시키고 술도 많이 먹이고 집회도 데리고 나갔어요. 그런데 뭔가 딱딱하고 수직적인 분위기와 가르치려는 느낌이 들었어요. 저하고 맞지 않는 분위기였죠. 곧, 선배들이 저를 찾지 않더라고요. 컴퓨터 공학을 공부하려면 큰 주제를 많이 알아야 했어요. 선배들이 저를 찾지 않자 자유인(?)이 되었어요. 도서관에 파묻혀 보고 싶은 책을 마음껏 봤어요.”

2018년 NPO파트너페어에서 IT노조 홍보중
인동준을 알게 된 건 2002년, 진보넷 블로그를 할 때였다. 그의 블로그에는 항상 IT관련 글이 올라왔다. IT에 문외한인 나는 그가 블로그에 쓰는 단어가 외계어처럼 보였다. 어디어디에서 컴퓨터를 고쳤다, ㅇㅇ를 나눠 주었다, ㅇㅇ로 자전거를 타러 간다, 등의 글이 올라왔다. ‘IT‘와 ‘공동체‘에 관한 일에 대해 쓴 글이 많았다. 호기심이 생겼고, 애독자가 되었다. 돈을 버는 것 같지는 않는데 쫓기는 모습도 아니고, 왠지 여유 있는 모습에 신뢰가 생겼다.

2018년 개발자 폭행 등 갑질 행한 위디스크 양진호 고발 기자회견
인동준은 희망이 보이지 않던 어린시절을 보냈다. 가진 것이 없어도 꿈은 크게 꾸라는 말이 있다. 인동준에게는 허황된 소리였다. 낭만은 있고 대책은 없는 삶이 이어졌다. 2003년 이라크 전쟁이 터졌을 때다. 남아 있던 낭만 마저 박살이 났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하는 걸 보고 더이상 폐인처럼 살아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평화 집회에 참석 했어요. 그런데 집회에 참석하면서 내가 필요한 일을 못 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IT를 공부했지만 졸업을 못해서 내가 배운 기술을 사회에 활용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일단 ‘한국에서 제일 유명한 단체에 들어가서 청소라도 하자’고 마음 먹었어요. 그때 간 곳이 ‘환경운동연합‘이에요. 2003년도 였어요.
그곳에 갔더니 50명 가까운 사람이 한 건물에 있었는데 개발자 한 명이 개발 뿐만 아니라, 컴퓨터 고치는 일까지 하고 있었어요. 거기다 자잘한 상담, 교육 까지 하고있는 거예요. 할 일은 많은데 50명의 사람이 번갈아 가면서 부르니까 자기 일을 못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컴퓨터 고치는 일을 하겠다고 했어요. 환경운동연합이면 큰 단체니까 컴퓨터도 좋은 거 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어요. 컴퓨터 수준이 어느정도 였냐면, 컴퓨터를 켜고 밖에 나가서 바람을 쐬고 와야 겨우 부팅이 됐어요. 이렇게 큰 시민단체의 컴퓨터 사정이 안 좋다는 것에 큰 충격을 받았어요. 곧이어 내가 할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을 알고 바로 뛰어들었어요. 그때부터 다른 단체에도 막 다니기 시작했어요.“

2022년 경남이주여성인권센터 컨설팅하는 중
20년 전에 인동준이 겪은 일이다. 인동준은 곧, 노동운동 하는 단체나 노동조합에 가서 IT로 서포트를 하기 시작한다. 큰 집회가 있으면 인터넷 놓고 인터넷 생중계를 할 수 있도록 도왔다. 용산 참사가 터졌을 때, 제주 강정 마을 해군기지 반대 싸움 할 때도 같은 일을 했다. 그렇게 활동가 커리어를 쌓았다.
하지만 개인들의 네트워크는 한계가 있었다. IT 단체를 따로 만들고 싶었다. 2012년에 비영리IT지원센터를 만들었고, 2016년에는 공동체IT사회적협동조합(이하 IT사협)을 창립했다. IT사협에서 하고 있는 사업중에 여전히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사업은 ‘일하는 노동자를 위한 컴퓨터 교실’이다.
”2008년에 “움직이는 NGO IT 교육장을 만들려고 합니다. 노트북을 기증해 주세요”라는 글을 글을 SNS에 올렸어요. 노트북이 모이면 제가 고쳐서 갖고 다니면서 이동식 컴퓨터 교육장을 만들겠다고요. 그랬더니 익명의 사람들이 노트북을 주고 갔어요. 그렇게 모은 노트북으로 연세대, 이대, 홍대를 돌아다니면서 교육을 했어요. 교육의 대상은 대학교에서 일하는 미화직이나 경비 노동자 였어요. 이분들이 부당한 노동 처우를 개선하기 위해서 노조를 만들었고 싸움이 승리했어요. 승리하고 나면 역량 강화 교육을 하죠. 그때 한 교육이 컴퓨터 다루는 교육과 한글 교육이었어요. 각 학교의 학생들이 그림자 노동을 하고 있는 분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기꺼이 돕겠다고 나섰어요. 그때, &일하는 노동자들을 위한 컴퓨터 교실&을 만든 거예요. 지금도 은평지역에서 1년에 두 번씩 열고 있어요.”

2024년 전태일재단 활동가들에게 업무 전반에 도움이 되는 유용한 팁과 새로운 기술을 습득하는 노하우에 대해 교육
어떻게든 자신의 IT기술로 다른 사람을 도우려고 한 인동준은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일을 벌였다. 그래서 IT사협을 만들었고, ‘일하는 주민을 위한 컴퓨터 교실’은 지금도 성황리에 운영되고 있다.
”우리가 시도도 하지 못한 일들이 아직 많아요. 그래서 저는 이 일을 계속 할 수 밖에 없어요. IT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더 많은 사회적 약자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것들이 보이기 때문이에요.”
공동체 IT사협을 만들고 9년이 흘렀다. 처음에 가볍게 참여했던 사람들이 점점 재미를 느끼고 역량도 키우고 참여도를 높이는 모습을 볼 때 인동준은 보람을 느낀다. 공동체IT사협을 만든 이유는 공익활동을 하는 비영리단체를 위한 것이었다. 그렇기에 활동가들은 공동체IT사협이 출범도 하기 전부터 관심이 뜨거웠고 기대감이 컸다.
”한국의 시민사회는 여유가 없어요. IT문제 하나 해결하면, ‘해결하니까 좋다, 이제부터는 IT 역량을 강화하자‘ 라고 마음 먹는 게 아니라, 당장의 문제를 해결했으니까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다음에 또 문제가 생기기 전까지는 잊어버리죠(IT 역량강화문제를).
이 문제는 조직에 큰 변화가 있어야만 해결 할 수 있어요. 내·외부의 의지와 지원이 필요한 문제죠. 그런데 대부분의 비영리단체에서 IT는 젊은 사람이 잘 한다고 생각하고 젊은 사람에게 맡겨요. 다 그렇지만 않지만 젊은 사람은 경력이 짧거나 전반적인 경험이 부족해요. 그래서 함부로 다른 활동가들에게 ‘지금 하는 방식을 바꿔야 IT역량을 강화할 수 있어요’라는 말을 못해요. 많은 비영리단체들은 조직 내에서 힘 있는 사람들이 뒷받침하지 않기 때문에 변화가 느린 거예요.”

2016년 공동체IT창립총회시 회의 진행 하는 인동준
완전 공감 가는 얘기다. 비영리조직은 사회 변화를 위한 활동을 고민하고 활동가의 역량을 중요시 하지만 내부의 변화는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는다. 세대교체는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시스템적 사고(드러난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근본적인 문제가 무엇인지 아는 것)를 해야 하는데 당장 눈 앞에 보이는 것을 해결하기에 바쁘다. 지금 즉시 해야 하는 것은 따로 있다고 했다.
”지금까지는 내부적으로 여유가 없어서 소극적으로 움직였어요. 덮어 놓고 조직만 키우면 감당 못한다는 걸 지난 몇 년의 시행착오를 겪고서 알았어요. 내가 성공하고 큰 힘을 가진 후라야만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건 아니예요. 지금 즉시 우리 주변을 돌아보고 마음을 열면 누구나 도움을 줄 수 있어요. 그때 그 사람의 도움이 가장 효과적이고 가시적으로 남아요.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라고 하듯이 나중에 도움을 주는 건 실제로는 도움이 안 될수도 있어요.
누군가를 돕는 행위는 내 시간을 쪼개서 하는 거지만 그 시간을 아까워 하지 마세요. 내가 쓴 시간과 에너지는 반드시 나에게 돌아와요. 그 시간은 나를 성장시키는 시간이에요. 주저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여러 시행착오 후에 내린 결론 일 것이다. 어느 누구도 시행착오 없는 인생을 걷는 사람은 없다. 우리 앞에 성큼 다가온 AI도 마찬가지다. 셀 수 없이 반복된 경험을 하고 종류가 다른 인풋을 거쳐 인간을 돕는다. 많은 분야에서 AI가 인간보다 우위를 점하려고 한다. 공동체IT사협은 이에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지를 물었다.
”우리 사회는 기술 발전이 오면 좋은 의도든 나쁜 의도든 무조건 따라가라고 해요. 기술은 생산자만 만드는 게 아니라, 소비자와의 교감과 상호작용을 통해서 만들 때 가장 이로운 기술이 되거든요. 기술 민주화를 추구하는 것이 지향인데 인공지능 개발은 대기업들만 참여 할 수 있는 쪽으로 흘러 가고 있어요. 소규모 그룹이나 비영리쪽에서 인공지능 개발에 참여하기는 어려워요. 기술을 잘 이해하고 따라가되 기술이 만드는 노동문제, 환경문제에도 적극적으로 대응하면서 받아들여야해요. 예를 들면 장애가 있거나 여러가지 어려운 환경에 처한 사람들도 인공지능을 통해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 올 수 있도록 이런 저런 교육도 하고 삶을 이롭게 하는 담론도 만들어야 하고요.”
내년이면 공동체IT사협을 만든 지 10년 째다. 엊그제 창립 총회를 한 것 같은데 벌써 10년이 흘렀다니 믿어지지 않는다. 나는 IT 기술은 잘 모르지만 뭐든 도움을 주고 싶어서 2022년 부터 2024년까지 이사직을 맡기도 했다. 생애 처음으로 조직의 ‘이사‘를 맡으면서 배운 점이 있다. ’임원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는 것. 특히 비영리쪽은 재정문제와 인력 문제가 심각하다. 대한민국에 딱 한 개 밖에 없는 공동체를 위한 IT사회적협동조합의 이사직은 그래서 부담이 컸다. 능력이 안 된다는 한탄을 늘어놓을 때마다 인동준은 말했다.
”내가 큰 힘을 가졌을 때만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건 아니에요. 저는 사람들이 저를 ‘중재자‘로 생각했으면 좋겠어요. 그것도 되게 신념이 있는 중재자요. 저를 잘 이용해서 의제를 만들고 공론화해서 조직을 변화 시켰으면해요. 변화와 혁신을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실행 방안을 제시하면 더 좋구요. 저를 중재자로 이용해서 AI처럼 활용했으면 좋겠어요(웃음).”
인동준은 누가봐도 남을 위해 사는 사람이다. 본인에게 어떤 좋은 일이 생겨도 묻지 않으면 말하지 않는다. 그런데 작년 가을, 좋은 소식을 전했다. 부모님과 함께 17년 동안 살던 반지하 집에서 탈출했다고 한다. 전세도 월세도 아닌 자가로 말이다(물론 엄청난 대출을 받고). 나는 내가 집을 산 것 처럼 기분이 좋았다. 인동준에게 짜장면 값을 안 줄 수 없었다. 봉투를 받은 인동준의 얼굴에는 쑥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인터뷰어 : 문세경
세상에 맞서는 NGO활동가 18명의 진심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사우, 2021)를 썼다. 가난하고 차별받고 소외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쓴다.
** 이 기사는 오마이뉴스에 시민기자 문세경님의 기사로 동시 게재됩니다.

2025공익활동가주간의 <활동가인터뷰 프로젝트>는 다양한 지역과 분야에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변화를 위해 노력하는 활동가들의 일과 삶 이야기를 듣고 인터뷰로 기록하는 활동을 지원합니다. 2025년에는 특별히 <광장을 만드는 활동가>를 기획인터뷰로 진행했으며, 공모를 통한 활동가 인터뷰 프로젝트도 더불어 운영했습니다. 활동가 인터뷰 프로젝트는 <아름다운재단>과 <지리산이음>이 함께 기획/운영하고 있습니다.
IT의 무한한 가능성을 믿습니다.
- 공동체IT사회적협동조합 인동준 활동가
“허약체질 이라 스무살까지 밖에 못 살것 같다고 수근거렸어요.“
인동준(47)은 키가 크고 머리카락이 길어서 질끈 묶고 다닌다. 누가봐도 건강한 대한민국 청년이다. 비영리 쪽에서는 ‘지각생’으로 통한다. 지각생이라는 별명은 많은 사람에게 필요한 IT 사회운동을 늦게 시작했다고 스스로 지은 별명이다.
인동준에게 아픈 사연이 있었다는 걸 안 지는 얼마되지 않았다. 어느 모임이 끝나고 뒤풀이에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어린 시절 이야기가 나왔다. 그때 인동준이 한 말이다.
”초등학교 때 아버지 사업이 망했어요. 저는 키도 작고, 눈이 나빠서 맨 앞에 앉아서 눈을 찡그리고 수업을 들었어요. 어느 날 우리반이 수학경시대회에서 1등을 해서 상금을 받았어요. 반 친구들과 맛있는 걸 먹고 있는데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상금이 남았어. 남은 돈으로 우리 동준이 안경 맞춰주고 싶은데 너희들 생각은 어때?”라고 물었어요. 아이들이 전부 ”좋아요“라고 했어요. 그때 처음으로 안경을 썼어요.
지금은 키가 크지만(180Cm) 어릴 때는 허약체질 이었어요. 20살 까지 밖에 못 산다는 수근 거림을 듣고 자랐어요. 금방 죽을거니까 돈을 많이 벌어야겠다거나 성공해야겠다하는 꿈을 가지고 살진 않았어요. 현실에 집중하고 지금의 감정에 충실하자는 생각으로 살았어요.”
시간이 많이 흘러서인지 몸과 마음이 아팠던 이야기를 웃으면서 할 수 있게 되었다. 남에게 보여주기 싫은 상처를 꺼내는 게 쉬운일이 아닐텐데 꺼내준 그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디테일한 질문을 해도 된다는 신호로 여기고 다음 질문을 이어갔다.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신문 배달을 했어요. 어느 날 학교 끝나고 집에 오는데 전봇대에 &석간신문 배달할 사람 모집&이라는 전단지를 봤어요. 얼마라도 벌어서 부모님을 도와드리고 싶었어요. 몸이 약해서 신문 배달을 오래 할지 몰랐는데 고등학교, 대학교 때까지 했어요. 신문 배달을 하고부터 몸이 튼튼해지더라고요(웃음).”
인동준은 공부하는 방법이 남달랐다. 남들은 암기 위주로 공부를 하는데 인동준은 문제를 분석하고, 문제를 낸 의도가 무엇일까를 생각하면서 시험문제를 풀었다. 1997년, Y대학교 컴퓨터 공학과에 입학했다. 대학교에 갔더니 내가 공부하고 싶은 주제는 따로 있는데 가르치는 방법이 마음에 안 들었다. 거기다 초등학교 때 망한 아버지의 사업이 회복 될 기미가 보이지 않아 학업에 집중할 형편이 안 되었다. 등록금 낼 돈이 없어서 휴학과 등록을 몇 차례 반복했다. 결국은 자퇴를 했다.
“대학교에 갔더니 선배들은 저를 운동권으로 만들려고 했어요. 철학 교육도 시키고 술도 많이 먹이고 집회도 데리고 나갔어요. 그런데 뭔가 딱딱하고 수직적인 분위기와 가르치려는 느낌이 들었어요. 저하고 맞지 않는 분위기였죠. 곧, 선배들이 저를 찾지 않더라고요. 컴퓨터 공학을 공부하려면 큰 주제를 많이 알아야 했어요. 선배들이 저를 찾지 않자 자유인(?)이 되었어요. 도서관에 파묻혀 보고 싶은 책을 마음껏 봤어요.”
2018년 NPO파트너페어에서 IT노조 홍보중
인동준을 알게 된 건 2002년, 진보넷 블로그를 할 때였다. 그의 블로그에는 항상 IT관련 글이 올라왔다. IT에 문외한인 나는 그가 블로그에 쓰는 단어가 외계어처럼 보였다. 어디어디에서 컴퓨터를 고쳤다, ㅇㅇ를 나눠 주었다, ㅇㅇ로 자전거를 타러 간다, 등의 글이 올라왔다. ‘IT‘와 ‘공동체‘에 관한 일에 대해 쓴 글이 많았다. 호기심이 생겼고, 애독자가 되었다. 돈을 버는 것 같지는 않는데 쫓기는 모습도 아니고, 왠지 여유 있는 모습에 신뢰가 생겼다.
2018년 개발자 폭행 등 갑질 행한 위디스크 양진호 고발 기자회견
인동준은 희망이 보이지 않던 어린시절을 보냈다. 가진 것이 없어도 꿈은 크게 꾸라는 말이 있다. 인동준에게는 허황된 소리였다. 낭만은 있고 대책은 없는 삶이 이어졌다. 2003년 이라크 전쟁이 터졌을 때다. 남아 있던 낭만 마저 박살이 났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하는 걸 보고 더이상 폐인처럼 살아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평화 집회에 참석 했어요. 그런데 집회에 참석하면서 내가 필요한 일을 못 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IT를 공부했지만 졸업을 못해서 내가 배운 기술을 사회에 활용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일단 ‘한국에서 제일 유명한 단체에 들어가서 청소라도 하자’고 마음 먹었어요. 그때 간 곳이 ‘환경운동연합‘이에요. 2003년도 였어요.
그곳에 갔더니 50명 가까운 사람이 한 건물에 있었는데 개발자 한 명이 개발 뿐만 아니라, 컴퓨터 고치는 일까지 하고 있었어요. 거기다 자잘한 상담, 교육 까지 하고있는 거예요. 할 일은 많은데 50명의 사람이 번갈아 가면서 부르니까 자기 일을 못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컴퓨터 고치는 일을 하겠다고 했어요. 환경운동연합이면 큰 단체니까 컴퓨터도 좋은 거 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어요. 컴퓨터 수준이 어느정도 였냐면, 컴퓨터를 켜고 밖에 나가서 바람을 쐬고 와야 겨우 부팅이 됐어요. 이렇게 큰 시민단체의 컴퓨터 사정이 안 좋다는 것에 큰 충격을 받았어요. 곧이어 내가 할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을 알고 바로 뛰어들었어요. 그때부터 다른 단체에도 막 다니기 시작했어요.“
2022년 경남이주여성인권센터 컨설팅하는 중
20년 전에 인동준이 겪은 일이다. 인동준은 곧, 노동운동 하는 단체나 노동조합에 가서 IT로 서포트를 하기 시작한다. 큰 집회가 있으면 인터넷 놓고 인터넷 생중계를 할 수 있도록 도왔다. 용산 참사가 터졌을 때, 제주 강정 마을 해군기지 반대 싸움 할 때도 같은 일을 했다. 그렇게 활동가 커리어를 쌓았다.
하지만 개인들의 네트워크는 한계가 있었다. IT 단체를 따로 만들고 싶었다. 2012년에 비영리IT지원센터를 만들었고, 2016년에는 공동체IT사회적협동조합(이하 IT사협)을 창립했다. IT사협에서 하고 있는 사업중에 여전히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사업은 ‘일하는 노동자를 위한 컴퓨터 교실’이다.
”2008년에 “움직이는 NGO IT 교육장을 만들려고 합니다. 노트북을 기증해 주세요”라는 글을 글을 SNS에 올렸어요. 노트북이 모이면 제가 고쳐서 갖고 다니면서 이동식 컴퓨터 교육장을 만들겠다고요. 그랬더니 익명의 사람들이 노트북을 주고 갔어요. 그렇게 모은 노트북으로 연세대, 이대, 홍대를 돌아다니면서 교육을 했어요. 교육의 대상은 대학교에서 일하는 미화직이나 경비 노동자 였어요. 이분들이 부당한 노동 처우를 개선하기 위해서 노조를 만들었고 싸움이 승리했어요. 승리하고 나면 역량 강화 교육을 하죠. 그때 한 교육이 컴퓨터 다루는 교육과 한글 교육이었어요. 각 학교의 학생들이 그림자 노동을 하고 있는 분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기꺼이 돕겠다고 나섰어요. 그때, &일하는 노동자들을 위한 컴퓨터 교실&을 만든 거예요. 지금도 은평지역에서 1년에 두 번씩 열고 있어요.”
2024년 전태일재단 활동가들에게 업무 전반에 도움이 되는 유용한 팁과 새로운 기술을 습득하는 노하우에 대해 교육
어떻게든 자신의 IT기술로 다른 사람을 도우려고 한 인동준은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일을 벌였다. 그래서 IT사협을 만들었고, ‘일하는 주민을 위한 컴퓨터 교실’은 지금도 성황리에 운영되고 있다.
”우리가 시도도 하지 못한 일들이 아직 많아요. 그래서 저는 이 일을 계속 할 수 밖에 없어요. IT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더 많은 사회적 약자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것들이 보이기 때문이에요.”
공동체 IT사협을 만들고 9년이 흘렀다. 처음에 가볍게 참여했던 사람들이 점점 재미를 느끼고 역량도 키우고 참여도를 높이는 모습을 볼 때 인동준은 보람을 느낀다. 공동체IT사협을 만든 이유는 공익활동을 하는 비영리단체를 위한 것이었다. 그렇기에 활동가들은 공동체IT사협이 출범도 하기 전부터 관심이 뜨거웠고 기대감이 컸다.
”한국의 시민사회는 여유가 없어요. IT문제 하나 해결하면, ‘해결하니까 좋다, 이제부터는 IT 역량을 강화하자‘ 라고 마음 먹는 게 아니라, 당장의 문제를 해결했으니까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다음에 또 문제가 생기기 전까지는 잊어버리죠(IT 역량강화문제를).
이 문제는 조직에 큰 변화가 있어야만 해결 할 수 있어요. 내·외부의 의지와 지원이 필요한 문제죠. 그런데 대부분의 비영리단체에서 IT는 젊은 사람이 잘 한다고 생각하고 젊은 사람에게 맡겨요. 다 그렇지만 않지만 젊은 사람은 경력이 짧거나 전반적인 경험이 부족해요. 그래서 함부로 다른 활동가들에게 ‘지금 하는 방식을 바꿔야 IT역량을 강화할 수 있어요’라는 말을 못해요. 많은 비영리단체들은 조직 내에서 힘 있는 사람들이 뒷받침하지 않기 때문에 변화가 느린 거예요.”
2016년 공동체IT창립총회시 회의 진행 하는 인동준
완전 공감 가는 얘기다. 비영리조직은 사회 변화를 위한 활동을 고민하고 활동가의 역량을 중요시 하지만 내부의 변화는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는다. 세대교체는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시스템적 사고(드러난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근본적인 문제가 무엇인지 아는 것)를 해야 하는데 당장 눈 앞에 보이는 것을 해결하기에 바쁘다. 지금 즉시 해야 하는 것은 따로 있다고 했다.
”지금까지는 내부적으로 여유가 없어서 소극적으로 움직였어요. 덮어 놓고 조직만 키우면 감당 못한다는 걸 지난 몇 년의 시행착오를 겪고서 알았어요. 내가 성공하고 큰 힘을 가진 후라야만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건 아니예요. 지금 즉시 우리 주변을 돌아보고 마음을 열면 누구나 도움을 줄 수 있어요. 그때 그 사람의 도움이 가장 효과적이고 가시적으로 남아요.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라고 하듯이 나중에 도움을 주는 건 실제로는 도움이 안 될수도 있어요.
누군가를 돕는 행위는 내 시간을 쪼개서 하는 거지만 그 시간을 아까워 하지 마세요. 내가 쓴 시간과 에너지는 반드시 나에게 돌아와요. 그 시간은 나를 성장시키는 시간이에요. 주저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여러 시행착오 후에 내린 결론 일 것이다. 어느 누구도 시행착오 없는 인생을 걷는 사람은 없다. 우리 앞에 성큼 다가온 AI도 마찬가지다. 셀 수 없이 반복된 경험을 하고 종류가 다른 인풋을 거쳐 인간을 돕는다. 많은 분야에서 AI가 인간보다 우위를 점하려고 한다. 공동체IT사협은 이에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지를 물었다.
”우리 사회는 기술 발전이 오면 좋은 의도든 나쁜 의도든 무조건 따라가라고 해요. 기술은 생산자만 만드는 게 아니라, 소비자와의 교감과 상호작용을 통해서 만들 때 가장 이로운 기술이 되거든요. 기술 민주화를 추구하는 것이 지향인데 인공지능 개발은 대기업들만 참여 할 수 있는 쪽으로 흘러 가고 있어요. 소규모 그룹이나 비영리쪽에서 인공지능 개발에 참여하기는 어려워요. 기술을 잘 이해하고 따라가되 기술이 만드는 노동문제, 환경문제에도 적극적으로 대응하면서 받아들여야해요. 예를 들면 장애가 있거나 여러가지 어려운 환경에 처한 사람들도 인공지능을 통해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 올 수 있도록 이런 저런 교육도 하고 삶을 이롭게 하는 담론도 만들어야 하고요.”
내년이면 공동체IT사협을 만든 지 10년 째다. 엊그제 창립 총회를 한 것 같은데 벌써 10년이 흘렀다니 믿어지지 않는다. 나는 IT 기술은 잘 모르지만 뭐든 도움을 주고 싶어서 2022년 부터 2024년까지 이사직을 맡기도 했다. 생애 처음으로 조직의 ‘이사‘를 맡으면서 배운 점이 있다. ’임원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는 것. 특히 비영리쪽은 재정문제와 인력 문제가 심각하다. 대한민국에 딱 한 개 밖에 없는 공동체를 위한 IT사회적협동조합의 이사직은 그래서 부담이 컸다. 능력이 안 된다는 한탄을 늘어놓을 때마다 인동준은 말했다.
”내가 큰 힘을 가졌을 때만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건 아니에요. 저는 사람들이 저를 ‘중재자‘로 생각했으면 좋겠어요. 그것도 되게 신념이 있는 중재자요. 저를 잘 이용해서 의제를 만들고 공론화해서 조직을 변화 시켰으면해요. 변화와 혁신을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실행 방안을 제시하면 더 좋구요. 저를 중재자로 이용해서 AI처럼 활용했으면 좋겠어요(웃음).”
인동준은 누가봐도 남을 위해 사는 사람이다. 본인에게 어떤 좋은 일이 생겨도 묻지 않으면 말하지 않는다. 그런데 작년 가을, 좋은 소식을 전했다. 부모님과 함께 17년 동안 살던 반지하 집에서 탈출했다고 한다. 전세도 월세도 아닌 자가로 말이다(물론 엄청난 대출을 받고). 나는 내가 집을 산 것 처럼 기분이 좋았다. 인동준에게 짜장면 값을 안 줄 수 없었다. 봉투를 받은 인동준의 얼굴에는 쑥스러운 미소가 번졌다.